진정한 혁명의 시작 - 신분제 국가에서 국민국가로 Liberte :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3
주명철 지음 / 여문책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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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혁명이 대중의 힘 또는 폭력과 함께 추진력을 얻는 것이라 할지라도, 늘 새로운 헌정질서를 창조하는 민주적 절차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국회의원들은 날마다 각 분야의 전문위원회들이 연구한 안을 토론하고 심의를 거쳐 헌법으로 확정하면서도, 새로 일어나는 사건에 대응하려고 예정에도 없던 시간을 할애해 토론하고 상대를 설득하면서 합의를 이끌어냈다. 프랑스 혁명의 본질적인 측면이 바로 여기에 있다. _ 주명철, <진정한 혁명의 시작> , p12/364

주명철 교수의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중 제3권 <진정한 혁명의 시작 - 신분제 국가에서 국민국가로 Liberte>에서는 입법기관인 국회에 의해 앙시앵 레짐을 대신한 새로운 법질서의 틀을 보여준다. 기존 삼부회(三部會, Etats generaux)에서 세금을 납부할 의무만 있을 뿐,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던 제3신분이 주도하는 국회는 신분제 질서를 타파하면서도,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맞는 제도를 만들어냈다.

국회의원들이 할 일은 기본적으로 재정문제를 해결하고 헌법을 제정하는 두 가지였다. 헌법을 제정해 새 체제를 만들면 그 법을 시행할 기구도 만들어야 했다. 앞으로 보겠지만 고등법원을 폐지하는 일도 새 체제에 맞는 법질서를 구현하려는 준비작업이었다. _ 주명철, <진정한 혁명의 시작> , p165/364

왕에게 한시적인 거부권을 주면서도 단원제 의회를 만들고, 미숙련 노동자의 평균 임금 3일치를 세금으로 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수동시민으로 규정해 투표권을 제한하는 법을 만들게 되는 사람들이 1789년의 국회에서 가장 발언권이 셌다. 그들은 부르주아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들이었으며 대주교 샹피옹드 시세, 대주교 부아즐랭, 시에예스 신부, 미라보 백작, 타르제, 카뮈, 투레 같은 법률가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새로운 프랑스를 건설하려고 노력했다. _ 주명철, <진정한 혁명의 시작> , p120/364

‘대표 없는 곳에 세금도 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라는 미국독립혁명의 영향을 받아서일까. 투표권을 납세 능력과 연결시켰다는 점에서 국회의 다수 세력인 부르주아 계층의 영향력을 새삼 느끼게 된다. 국회의 절대다수가 부르주아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은 제3신분의 대표성을 약화시킨 반면, 국회 내의 동질성을 강화시켰다는 점에서 양날의 검이 되었다.

모든 회의체는 신분이 아니라 개인으로 구성하도록 했다(10월 26일). 그러나 유권자와 피선거권자를 결정할 때는 납세액을 기준으로 삼았다. 9월 29일부터 10월 29일까지 논의한 결과, 프랑스인으로서 각 선거구에 1년 이상 산 25세 이상의 남성 가운데 3일치 임금을 낼 수 있는 사람에게 투표권을 주었다. _ 주명철, <진정한 혁명의 시작> , p159/364

국회에 다수 가난한 민중들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아 이들의 삶이 혁명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은 부정적인 측면이었지만, 공동의 이해관계를 갖춘 이들은 자신과 동료 의원들의 이익을 위해 신분제 특권을 폐지했고, 중앙집권적 권력 구조를 개편하는 성과를 올렸다는 점은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혁명이 투기업자에게는 기회를 주었지만 대다수 가난한 국민에게는 늘 물가고를 안겨주었기 때문에 국회와 왕, 그리고 종교인이 예전처럼 사회적 불안요소인 극빈자, 특히 떠돌이들을 도와 국가에 이로운 인구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하더라도 항상 힘에 부쳤다. 인구는 많은데 일거리는 언제나 부족하고, 만성적자에 시달리던 재정문제를 하루아침에 고치지 못하는 한, 구빈문제는 혁명도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난제였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은 현실적 불만 때문에 혁명/반혁명의 과정에 쉽게 동원되었다. _ 주명철, <진정한 혁명의 시작> , p147/364

제1신분인 성직자와 제2신분인 귀족들의 특권의 폐지는 교회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고 귀족의 작위를 공식적으로 없애는 형태로 구현되었다. 제3신분이기는 하지만 일반 대중들과 살롱(salon) 문화를 공유한 자신들을 구분한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일시적‘이고 ‘중앙집권적‘으로 운영되던 과거에서 벗어나 법에 의한 ‘영속‘과 지방분권, 탈신분제의 첫걸음이라는 면에서 혁명의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마침내 7월 12일에는 시민헌법 최종안이 나왔다. 새 체제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교회를 국가 밑에 두어 주교나 대주교의 수를 줄이는 동시에 로마 교황청과 관계를 끊도록 하는 데 있었다. 그리하여 종교인의 사법적/정치적 간섭을 배제하고 오로지 종교적인 일만 하도록 했다(p220)... 계몽주의자 가운데 볼테르의 주장만큼 혁명에 확실하게 반영된 것은 없으리라. 볼테르는 틈만 나면 가톨릭교를 비판하고더 나아가 종교적 자유를 주장했는데 이제 그 길이 확실히 열렸던 것이다. _ 주명철, <진정한 혁명의 시작> , p225/364

시민들이 주역이 되는 연맹제가 공화주의의 분위기를 한껏 드높일 때, 국회는 귀족작위를 폐지하는 문제로 한바탕 토론을 벌였다. 수많은 소책자에서 이미 귀족 작위 폐지문제를 거론했고 국민주권의 시대가 열렸기 때문에 6월 19일에 국회가 실천하려는 일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사실 지난해 8월 4일부터 일주일 동안 귀족 의원들이 특권을 자발적으로 포기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열 달이 지난 시점에 실제로 귀족 작위를 폐지하는 문제가 나오자 저항하는 의원이 많았고, 이튿날인 일요일(20일)에 항의서를 써서 국회에 보낸 사람들도 많았음을 볼 때, 전국연맹제를 앞두고 국회는 또 한 번 높은 산을 넘었다고 말할 수 있다. _ 주명철, <진정한 혁명의 시작> , p293/364

다른 한편으로, 혁명 세력에 의해 강제적으로 교회의 특권 페지, 튈르리 궁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던 루이 16세와 혁명 이후 입헌군주제를 유지하고 실력자로 서려 했던 라파예트 간의 대립이 서서히 격화되고 있었다. 혁명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며 혁명가들에게 실망감을 안겨 준 루이 16세와 이러한 루이 16세를 혁명세력으로부터 보호하려 했지만, 정작 라파예트 자신은 왕에게 라이벌로 인식되는 상황.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중 3권 <진정한 혁명의 시작>은 혁명에 의한 새로운 질서의 수립과 함께 새로운 시대의 갈등을 함께 보여준다. 여기에 더해 해결되지 않은 민중들의 어려움은 혁명을 더욱 격렬하게 몰아갔고, 지도층의 보이지 않는 알력은 여기에 기름을 부으며 전혀 예상치 못한 역사의 흐름으로 이들을 몰아간다...

라파예트는 요크타운이 함락된 뒤 야전사령관이 되어 싸우다가 1785년에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는 이미 ‘두 세계의 영웅‘이 되어 있었다. 라파예트 후작은 새로운 사상에 물들었고 네케르와 친하게 지냈다(p55)... 국민방위군의 목적이 귀족의 음모, 민중의 분노와 조급함에 맞서는 한편, 혁명의 역동성 때문에 생기는 강력한 현상을 제한하는 데 있으며, 모든 시민으로 하여금 무장하게 하는 것 자체가 시민의 세력화를 뜻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들을 지휘하는 라파예트의 의지는 혁명의 과정에 큰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변수였다(p56)... 라파예트는 공화정신에 물든 왕정주의자였다. 한마디로 그는 왕과 혁명가를 화해시키는 역할을 맡고 싶었다. _ 주명철, <진정한 혁명의 시작> , p57/364

왕은 전국연맹제에서 자신이 라파예트보다 우위에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13일에 직접 점검에 나섰던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충성심은 받는 사람의 몫이 아니라 바치는 사람의 몫이다. 왕은 구시대의 상징으로 아슬아슬하게 하루하루를 보냈지만 역사의 주역이 여기저기서 마구 두각을 나타내는 격변기였으니 왕으로서는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으리라. _ 주명철, <진정한 혁명의 시작> , p342/364

이렇게 해서 ‘새로운 시대의 출발‘을 상징하는 7월 14일의 전국연맹제는 무사히 끝났다. 그것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먼저 그것을 진정한 국민의 잔치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대중 또는 다중이 진정한 우애를 느끼고 새로운 관계를 열렬히 환영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행사가 끝난 시점에 냉정한 사람은 과연 그날의 주역이 누구였는지 돌이켜보았다. 행사장에서는 분명히 왕이 정점에 있었다. 그러나 문화적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에 왕보다는 라파예트가 더 돋보였다. _ 주명철, <진정한 혁명의 시작> , p347/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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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 - 평등을 잉태한 자유의 원년 Liberte :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2
주명철 지음 / 여문책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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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사가 조르주 르페르브 Georges Lefebvre는 두려운 심리가 ‘방어의지‘와 ‘처벌의지‘를 불러일으킨다고 보았다. 그래서 혁명기 사람들은 공권력이 저지를 ‘폭력‘에 스스로 방어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무장하게 되었으며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들을 억압하고 ‘폭력‘을 행사했던 사람들을 직접 처벌하고 싶어졌다. 이러한 맥락에서 혁명기 민중의 무장을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무장한 민중 때문에 무질서 상태가 오는 것을 두려워하고 왕이 동원하는 무력에 온전히 대응하려고 민병대를 조직한 부르주아 계층의 대응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_ 주명철, <1789> , p79/300

주명철 교수의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중 제2권 <1789-평등을 잉태한 자유의 원년 Liberte>의 주제는 앙시앵레짐(Ancien Regime)의 붕괴(崩壞)다. 우리는 2권을 통해서 ‘문화적 앙시앵레짐‘의 파괴로 혁명의 배경이 만들어졌다면, 1789년에 일어난 2개의 사건 - 바스티유 함락, 인권선언 - 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결과적으로 바스티유 함락은 ‘정치적 앙시앵레짐‘의 끝장을, 인권선언의 승인은 ‘사회적 앙시앵레짐‘의 종언을 알리며 이제 구체제는 부활하기 어려울 정도로 몰락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0월 5일과 6일에 혁명이 다시 한번 폭발했다. 그리고 파리가 100여 년 전에 잃었던 정치의 중심지 역할을 되찾았다. 파리 아낙네들이 베르사유로 행진해 가지 않았다면 왕은 헌법과 인권선언을 승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10월 5일까지 거부권으로 버티던 왕은 마침내 국민의 의지에 굴복하게 되었다. 이로써 왕과 국민 또는 왕과 국회 사이의 무게중심이 국민 편으로 더 많이 이동했다. 국회 안에서도 좌파가 점점 두드러진 세력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양원제 의회, 절대적 거부권을 주장하는 파는 혁명을 세 달 만에 끝내고 싶어했지만 혁명이 다시 한번 폭발해 누구 하나 앞날을 계획대로 만들어가기 어렵게 되었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일이 있다. 앙시앵레짐이 죽어가면서 이제 더는 회생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_ 주명철, <1789> , p289/300

그렇지만, 앙시앵레짐의 붕괴까지 단계는 결코 순탄치 않았다. 누구보다도 반(反)혁명의 선두에 서 있던 것이 루이16세였고, 그를 둘러싸고 특권을 놓치 않으려는 1,2신분의 저항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실제로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제3신분의 요구를 짓밟으려는 반혁명 세력의 시도가 있었기에 이 시점에서 혁명은 분명 위태로워 보였다.

왕은 종교인과 귀족이 제3신분(‘평민‘)에게 휘둘리지 않고 자신에게 충성해준다면 ‘평민‘을 고립시키고 원래 목적대로 전국신분회의 기능을 되살려 체제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고 계산했다. 그리하여 그는 6월 23일에 군대를 집결시켜 힘을 과시하고 회의실에 일반일을 들이지 않은 채, 다시 말해 평민 대표들을 고립시킨 채, 그날을 위해 준비한 각본을 국무대신으로 하여금 대표들에게 읽도록 했다. _ 주명철, <1789> , p51/300

그러한 위기상황에서 결국 절대군주와 특권층의 반격을 좌절시킨 것은 국회로 표현되는 제3신분의 일반의지였다. 절대군주로부터 입법권을 국회로 가져오면서 역사의 흐름은 바뀌기 시작한다. 이전에는 ‘불온한 기운의 반란‘이 ‘새로운 시대의 혁명‘으로 명분을 얻으면서 제3신분의 행동은 정당성을 획득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혁명은 점차 가속화되었다.

루이 16세는 브로이 원수가 지휘하는 병력 2만 명을 베르사유에 집결시켰음에도 그들에게 명령하여 국회를 해산시키지 않았다. 브로이 원수는 기꺼이 무력을 동원할 준비를 갖추고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왜 루이 16세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을까?(p60)... 제3신분이 국회를 선포하고 주도하면서 왕의 의지를 꺾은 것은 큰 의미를 가진다. 더욱이 그들은 ˝루이, 당신만 신성한가? 우리도 신성하다˝라는 듯이 의원의 면책특권을 결의했다. 이로써 국회가 스스로 자신의 지위를 높였고 왕은 즉각 대응을 하지 않았지만, 그때부터 ‘혁명‘은 수많은 사건과 함께 흘러간다. 전국신분회의 제3신분이 국회의 ‘평민‘이 되었고, 왕처럼 ‘신성한 존재‘가 되면서 혁명의 중요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로써 정치적 앙시앵레짐은 6월 23일로 죽었다. _ 주명철, <1789> , p61/300

‘프랑스 혁명=바스티유 함락‘이라는 공식을 떠올릴 정도로 바스티유 함락이 프랑스 혁명에서 갖는 의미는 상징적이다. 그것의 실상이 생각만큼 큰 것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루이14세의 절대정으로의 회귀를 원했던 루이16세에게 입헌군주라는 현실을 알려주었다는 점과 혁명의 소식을 지방으로 널리 전파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대혁명의 과정에서 이는 하나의 분기점이었음이 분명해진다.

왕은 충성스러운 의원들을 보면서 ˝국회는 왕의 의도와 바름을 충분히 알았을 테니 언제라도 왕에게 원하는 것이 있으면 얘기하라˝고 확인해주었다. 이 말을 들은 의장은 ˝국회는 오래전부터 국왕과 국민의 대표 사이에 아무런 중개자가 끼어들지 않고 직접 소통하기 바랐다˝고 강조했다. 왕이 베르사유 궁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여 기뻐했다. 왕이 제대로 걸음을 옮기지 못할 정도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어떤 여인은 무릎을 꿇고 왕의 발을 껴안으려 했다. 사방에서 ˝왕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베르사유 궁의 마당으로 들어설 때까지 사람들이 더 많이 몰려들었다(p131)... 바스티유가 정복된 결과 왕이 의도했던 일은 물거품이 되었다._ 주명철, <1789> , p132/300

대공포의 물결이 프랑스를 휩쓸고 지나가는 기간을 7월 20일부터 8월 6일로 인식한다고 해서 그 기간의 앞뒤로 도시나 농민이 조용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대공포의 원인이 모든 곳에서 한결같았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세 가지 원인 가운데 하나 이상이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영주권에 대한 농민의 반발, 도적떼에 대한 두려움, 귀족과 그 하수인들에 대한 두려움이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농민은 소문을 듣고 약탈자들이 오기만을 기다리기보다는 스스로 무장하고 자신들을 괴롭히던 사람들을 직접 처벌하려고 찾아다녔다. _ 주명철, <1789> , p168/300

본문에서는 바스티유 함락과 함께 인권선언의 승인에 적지 않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여러 의원들의 치열한 논쟁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처럼 그려지지만, 이를 감상하는 것은 독자들의 몫으로 돌리도록 하자. 다만, 여기서는 인권선언에 영향을 준 계몽사상과 관련하여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리뷰 URL을 표시하는 것으로 넘기도록 하자.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리뷰 : https://blog.aladin.co.kr/winter_tiger/13794501

먼저 정치적인 앙시앵레짐을 무너뜨리고 나서 사회적 앙시앵레짐을 무너뜨린 지 보름 뒤에 나온 인권 선언은 계몽사상을 반영했다. 그러나 계몽사상을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계몽사상가들이 똑같은 관념을 똑같이 주장하지도 않았으며 평생 서로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각각 다른 시기에 주장한 내용까지 18세기에 나온 것이라고 해서 계몽사상으로 지징하는 것은 분명 무리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계몽주의자들이 앙시앵레짐의 시대의 자유(일종의 특권)와 다른 종류의 자유(모든 구성원의 자유)를 주장하고, 게다가 앙시앵레짐 시대의 신분사회에서 부정하는 사회적 평등을 주장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_ 주명철, <1789> , p203/300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중 2권 <1789-평등을 잉태한 자유의 원년>은 이처럼 앙시앵레짐의 붕괴를 다룬다. 정치적 앙시앵레짐의 붕괴로 국회의 권위를 높이고, 이어서 사회적 앙시앵레짐의 붕괴를 통해 특권을 소멸하여 인권선언을 채택하는 일련의 과정안에서 우리는 프랑스 대혁명의 큰 흐름과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아직 혁명이 채 끝난 것은 아니다. 이것은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중 8권이 남아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반혁명 세력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아직 절대왕권의 꿈을 못버린 루이16세와 특권층의 불만이 아직 채 사라지지 않았던 시기, 같은 시점 국회는 이미 이런 절대정과 ‘헤어질 결심‘을 굳힌 상태에서 이들의 불안한 동거는 어디까지 계속될 것인가. 인권선언에서 기요틴(guillotine)으로 가는 제2의, 제3의 혁명은 어쩌면 이때부터 예정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모호한 상황을 피하고 시간을 지체시키지 않기 위해서 나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만일 당신이 우리를 여기서 내보낼 임무를 띠고 왔다면, 당신은 무력을 동원할 수 있는 명령을 내려달라고 요청해야 합니다. 왜나하면 오직 총칼의 힘을 빌려야만 우리를 이 자리에서 몰아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모든 의원이 미라보의 말을 따라 외쳤다. ˝이것이 국회의 결심이다.˝ _ 주명철, <1789> , p57/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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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사의 서막 - 혁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Liberte :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1
주명철 지음 / 여문책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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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전후관계를 새로 인식한 현대 역사가들은 문제를 다시 검토했다. 혁명가들이 앙시앵레짐이라고 부른 것은 무기력하고 타성에 젖었기 때문에 마땅히 사라져야 할 것인었던가? 그들은 이렇게 묻고 문제를 근본부터 다시 검토하면서 구체제, 앙시앵레짐이 역설적으로 죽어가면서 태어났음을 깨달았다. 따라서 현대 역사가들은 혁명이 발명한 앙시앵레짐이 아니라 혁명을 낳은 앙시앵레짐, 혁명으로 연결되는 앙시앵레짐의 참모습을 파악하려고 노력하였다. _ 주명철, <대서사의 서막> , p32/380

주명철 교수는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중 제1권 <대서사의 서막-혁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Liberte> 앙시앵레짐(Ancien Regime)과 혁명(Revolution)의 관계에 대해 묻는다. 앙시앵레짐이라는 구체제는 과연 혁명으로 사라져야할 적폐(積弊)인가, 아니면 혁명(革命)의 부모인가?

프랑스 혁명은 무엇보다도 경제문제 때문에 일어났다. 왕정이 빚을 많이 지고 더는 돈을 끌어올 곳을 찾지 못한 채 세제개혁을 하려 했지만 특권층의 반발로 실패하면서 혁명이 일어났던 것이다. 한편 그 사실 못지않게 왕정은 그 나름대로 국가를 '근대화'하려고 노력했음도 부인하기 어렵다. _ 주명철, <대서사의 서막> , p42/380

이 이야기는 가난(미제르)이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끝나는지 보여준다. '미제르'의 유일한 재산은 자연이 주는 선물인데 아무나 훔쳐가기 때문에 가난하며, '죽음'도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미제르, 즉 가난을 데려가지 못한다... 민중은 남에게 자기 물건을 도둑맞기 때문에 가난하지만 어려운 사람에게 잠자리를 제공할 정도로 선량하다. 그러므로 민중은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영원히 가난하게 살지 모른다. 이 이야기에서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민중을 보호해줄 공권력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직 가난이라는 주인공이 스스로를 지켜야 할 뿐이다. _ 주명철, <대서사의 서막> , p276/380

저자는 혁명의 근원을 경제적 원인으로부터 찾는다. 이와 함께 본문에 소개된 프랑스 혁명 직전시기 널리 유행한 민담(民譚)은 당시 민중의 어려운 처지를 하나의 예시로 보여주지만, 사실 이것만으로 혁명으로의 흐름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역사상 수많은 '민란(民亂)'이라 불리우는 사건의 가장 큰 이유가 어려운 경제여건이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추가적인 설명이 요구된다. 이전 시기와는 다른 18세기 말 프랑스가 처한 다른 시대 상황은 어떤 것이 있을까.

루이 16세는 계몽사상가 튀르고를 중용했지만 치세 초부터 곡물 값을 안정시키지 못해 '밀가루 전쟁'을 맞아야 했고, 튀르고의 정책에 반대한 네케르를 중용했지만 이 사람이 추진하는 '영국식 군주정(입헌군주정)'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더욱이 궁정에서 그의 동생 프로방스 백작의 질투와 음모, 그의 사촌 오를레앙 가문의 야망, 왕비의 측근들을 경계하면서 다른 뾰족한 수를 찾아내지 못하고 그저 전통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하려고 노력했다. 루이 16세는 처음에는 내키지 않았지만 결국 아메리카 독립전쟁에 참여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것이 절대주의 체졔를 더욱 거세게 뒤흔드는 위기의 시작이었다. _ 주명철, <대서사의 서막> , p197/380

저자는 루이 14세기 절대왕정 시대와는 다른 시대 상황을 '앙시앵레짐의 변화'로 설명한다. 바로크(Baroque)의 장중함에서 로코코(Rococo)의 경박한 화려함으로 넘어가는 시대를 대중들은 정확하게 보고 있었다. 자신들의 어려운 처지에 대해 절망하면서도 이러한 문제를 체제의 문제로 인지하지 못하던 이들은 이제 구조적 문제에 눈을 뜨면서 이전과는 다른 대처를 하게 되었다.

루이 15세 치세말의 이야기, 이를 테면 비천한 창녀 출신 뒤바리 백작부인이 루이 15세의 공식 애첩이 되고 이 여인을 중심으로 파벌이 생겨 국고를 탕진하고 음모를 꾸민 이야기와 함께, 루이 16세의 성적 무능 그리고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낭비와 자유로운 생활을 헐뜯는 중상비방문이 마구 쏟아져 나와 선왕시대부터 누적된 적자와 더불어 루이 16세 치세의 앞날은 그리 밝지 않았다.(p126)... 이것은 문화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지표라 할 수 있다. 대중은 절대왕정의 이상과 이념을 구현하는 왕의 몸이 신성하기는커녕 창녀에게 오염되었다고 생각했으며, 그러한 믿음은 앙시앵레짐 문화의 밑바탕이라 할 수 있는 절대주의의 절정기가 끝나고 그 표상마저 바뀌었음을 반영한다. _ 주명철, <대서사의 서막> , p130/380

루이 16세 치하에서 14년 동안 모든 상황이 변했고 평생 정치와 직접 관련 없이 살아가야 했던 사람들이 정치화하면서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앙시앵레짐의 문화가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다. _ 주명철, <대서사의 서막> , p214/380

민중들에게 주어진 가난과 고통이 민중들과 크게 다를 것 없는 특권층의 결정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그들은 결코 자신들의 결정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했을 때, 그들은 더이상 자신들의 상황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과거에는 큰 문제없이 사회를 작동시키던 구조가 민중들의 깨달음을 통해 문제점으로 인식되는 순간 '레짐'은 '앙시앵레짐'으로, 그리고 혁명의 대상으로 변화되었음을 본문에서 확인하게 된다. 이렇게 민중들은 아폴론의 손이 닿기전 월계수가 된 다프네처럼 정치적 인간으로 갑작스럽게 변화했다. 이제 대혁명은 예정된 사건이었고, 10부작의 서막은 이렇게 시작된다...

제3신분은 강건한 인간이지만 한 팔이 아직 사슬에 묶여 있는 사람이다. 만일 특권층을 제거한다면 국민은 전보다 못한 존재이기는커녕 더 나은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전부다. 그러나 구속받고 압제에 시달리는 전부다. 만일 특권층이 없다면 그는 무엇이 될 것인가? 전부가 된다. 자유롭고 번성하는 전부가. 제3신분이 없이는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다른 존재들(제1신분, 제2신분, 특권층)이 없어도 무한히 발전할 것이다. _ 주명철, <대서사의 서막> , p282/380

앙시앵레짐과 혁명을 분리하는 문턱을 정확히 어느 시점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는 전국 신분회 대표를 뽑는 유세 기간에 프랑스인들이 갑자기 정치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왕국의 모든 곳에서 오랫동안 의식의 밑바닥에 가라앉았던, 때로는 거의 무의식에 가까울 만큼 잊고 지냈던 불만을 구체적인 언어로 되살려내면서 프랑스인은 자유와 평등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으리라고 희망했다. _ 주명철, <대서사의 서막> , p299/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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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8-07 18: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호흡이 긴 프랑스사네요
10부작!

겨울호랑이 2022-08-07 20:17   좋아요 2 | URL
아마 프랑스 혁명을 소재로 한 책들 중에서는 가장 장편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마치 중계방송을 하는 듯한 저자의 친절함으로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라 여겨집니다.^^:)

바람돌이 2022-08-07 20: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또 이렇게 10권의 장대한 여정을 시작하셨군요. 저는 읽지는 못하고 겨울호랑이님 글을 보면서 아 그렇구나 하며 맛만 보는..... ^^;;

겨울호랑이 2022-08-07 21:35   좋아요 1 | URL
에고 아닙니다. 프랑스 혁명에 관한 10권의 책이긴 합니다만, 대중 교양서로 쉽게 읽히는 책이라 마치 트래킹 코스와도 같은 느낌을 주는 시리즈입니다. 저도 말씀은 이렇게 드립니다만, 읽다가 중도에 딴 길로 새는 경우가 많아서 언제 끝낼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ㅜㅜ 이번에는 좀 집중해서 읽어야겠지요... 바람돌이님 하루 마무리 잘 지으세요!.^^:)

초란공 2022-08-07 23: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리 사회와 다르면서도 비슷한 점을 많이 찾을 수 있지 않을까합니다. 공권력을 가진 권력이 소수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고, 일반 국민은 가난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하는 상황을 예로 들면요. 저자의 엄청난 공부와 고민 속에서 탄생한 작품 같아요.

겨울호랑이 2022-08-08 04:51   좋아요 2 | URL
초란공님 말씀처럼 생생하게 당대의 모습을 재현하면서 독자들이 역사의 교훈을 스스로 발견하도록 배려한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인물 한 명 한 명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깊은 내공없이는 불가능함을 느끼게 됩니다. 초란공님 감사합니다 ^^:)

기억의집 2022-08-08 11: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이퍼 읽고 작가분에게 호기심이 생겨 찾아보니 책도 많이 내셨네요. 혁명에 대한 작가의 해석이 많은 자료를 바탕으로한 깊은 사고에서 내려진 것 같아 멋진 분이시네요.

겨울호랑이 2022-08-08 11:16   좋아요 1 | URL
주명철 교수의 사촌이 <바다 인류>,<물질문명과 자본주의>의 저자 주경철 교수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서양사학자 두 분이 가까운 관계이기에, 인간적으로 더 깊게 교류하면서 더 큰 성과를 낼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기억의집 2022-08-08 11:18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이름이 비슷하긴 해도 사촌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 했어요.

겨울호랑이 2022-08-08 12:56   좋아요 0 | URL
기억의집님 건강한 오후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루소는 『사회계약론Le Contrat social』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공적인 신체personne publique를 옛날에는 도시국가cité라 불렀으며, 이제는 공화국république또는 정치체corps politique(국가)라 부른다. 그리고 그 구성원들은 국가를 세 가지로 구별해서 부른다.
수동적인 경우état, 능동적인 경우souverain(주권자), 그리고 다른 나라와 비교할 경우puissance를 구별하는 것이다. 게다가 국가와 결합한 사람associés을 집단적으로 인민peuple이라 부르며, 주권을 행사하는 경우 시민citoyens, 국가의 법률에 복종하는 경우 신민sujets(국민)이라 부른다."
이것이 프랑스 혁명을 왕이 만든 법률에 수동적으로 복종하던 ‘신민‘이 국회를 만들어 정치적 권리를 행사하는 ‘시민‘으로 탄생하는 과정이었다고 이해하는 근거다.

헌법문제, 재정문제, 농업·상업·상업재판소 문제, 종교·성직자·교육·병원·풍속 문제, 입법문제,
그리고 파리에 한정된 문제를 6개 부문으로 나누어 차례로 다루었다.
"프랑스 군주정에서 입법권은 국민에게 속하며 왕과 함께 나눈다. 왕만이 법을 집행할 수 있다. 국민만이 세금을 신설할 수 있고 전국신분회는 3년마다 열리며 해산하기 전에 반드시 다음에 모일 날짜와 장소를정한다. 신분회 대표를 선출하는 기초의회도 자동적으로 모인다. 군주는 신성하고 침해할 수 없는 존재다. 왕위는 왕실의 장자상속법을 지켜 세습한다."

왕은 왕국의 조화와 행복을 언급하고 번영을 얘기했지만 이미 왕과 제3신분 대표 사이의 거리만큼 귀족이나 성직자의 특권층과 평민 사이의 거리도 좁힐 수 없는 것임을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의 예복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2,000명 정도의 참관인은 중앙홀에서 일어나는 연극 같은 장면이 앙시앵레짐의 모습을그대로 담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 모습 속에서 이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참관인은 연극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는 정치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처럼 앙시앙레짐 시대에는 전혀 불가능했던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날 이후 프랑스의 정치는 대중에게 공개될 것이다.

시에예스 신부는 계속해서 말했다.
"비록 가끔 먹구름이 낀다 해도 우리는 언제나 우리를 이끌어줄 빛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권한을 행사하고 무슨 임무를 수행하려고 프랑스 방방곡곡에서 여기 모였는지 스스로 물어봅시다. 우리는 단지 명령을 받은 사람입니까, 왕의 관리란 말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복종하고 물러나야겠지요. 그러나우리는 인민이 보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기를 내서 자유롭게 우리의 임무를 수행합시다. (.....)우리는 맹세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맹세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프랑스 인민의 권리를 되찾아주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인민은 우리에게 헌법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없으면 누가 헌법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아니면 누가 헌법을 만들겠습니까? 여러분의 선거인들을 대표할 권리를 그 어떤 힘으로 빼앗을 수 있단 말입니까?"
시에예스 신부의 말이 끝나자 우레 같은 박수가 터졌고 국회는 이미 결의한 내용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수구세력은 어떠한 개혁도 싫어한다. 이 같은 사람은 기득권을 잃어가는 과정에서 개혁세력을 증오하게된다. 개혁도 바라지 않는데 하물며 혁명까지야. 그런 사람은 진정한 반혁명anti-révolution의 성향을 보여준다.  1789년 프랑스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자신에게 불리하기 때문에 도저히 참고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7월부터 보따리를 싸들고 외국으로 나갔다. 왕의 작은 동생 아르투아 백작이 대표적인 사례다. 엄밀히 말해 이러한 수구세력은 혁명을 증오한다.
그러나 혁명세력이 ‘애국자‘라는 이름을 얻고 반대세력을 억압하는 상태에서 외국으로 가지 못하는 사람은 혁명의 흐름에 억지로 끌려간다.

장 조레스의 말대로 파리 시민이 바스티유 요새와 감옥을 정복했다면 농민은 그 나름의 ‘봉건적 바스티유‘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케케묵은 문서를 뒤져가면서 세금을 걷어가는 영주들의 저택이었다. 모든 농촌 지역이 들고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많은 지역이 무질서를 경험했다. 노르망디의관목숲 지역(캉과 알랑송의 초원지대 서쪽)과 에노, 오트 알자스에서 농민은 성관(군주나 귀족의 별장)과 수도원으로 쳐들어가  문서를 불태우고 영주권을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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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전후관계를 새로 인식한 현대 역사가들은 문제를 다시 검토했다. 혁명가들이 앙시앵레짐이라고부른 것은 무기력하고 타성에 젖었기 때문에 마땅히 사라져야 할 것이었던가? 그들은 이렇게 묻고 문제를 근본부터 다시 검토하면서 구체제, 앙시앵레짐이 역설적으로 죽어가면서 태어났음을 깨달았다. 따라서 현대 역사가들은 혁명이 발명한 앙시앵레짐이 아니라 혁명을 낳은 앙시앵레짐, 혁명으로 연결되는 앙시앵레짐의 참모습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프랑스 혁명은 무엇보다도 경제문제 때문에 일어났다. 왕정이 빚을 많이 지고 더는 돈을 끌어올 곳을 찾지 못한 채 세제개혁을 하려 했지만 특권층의 반발로 실패하면서 혁명이 일어났던 것이다. 한편 그 사실못지않게 왕정은 그 나름대로 국가를 ‘근대화‘하려고 노력했음도 부인하기 어렵다.

이것은 문화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지표라 할 수 있다. 대중은 절대왕정의 이상과 이념을 구현하는 왕의몸이 신성하기는커녕 창녀에게 오염되었다고 생각했으며, 그러한 믿음은 앙시앵레짐 문화의 밑바탕이라할 수 있는 절대주의의 절정기가 끝나고 그 표상마저 바뀌었음을 반영한다. 우리는 절대왕정의 중요한요소인 신권le droit divin을 가진 왕이 신성성을 잃어가는 과정을 이처럼 루이 15세에게서 찾을 수 있다.

외교문제는 강력한 육군과 해군의 힘에 좌우되었고 군대의 힘은 결국 재정문제에 의지했다. 절대왕정이존재하는 근본적인 조건 가운데 하나인 상비군을 유지하는 방법은 효율적인 징세제도에서 찾아야 했지만 면세특권과 불평등이 존재했기 때문에 재정적자를 벗어날 길을 찾기란 어려웠다.

네케르는 1788년 11월에 제2차 명사회를 소집했다. 명사들은 전국신분회 소집방식과 절차를 다루면서제3신분의 요구를 거절했다. 제3신분은 제1신분과 제2신분의 대표수를 합친 수만큼이라도 대표수를 늘려달라고 요구했고, 게다가 대표자수가 늘어도 신분별 투표를 개인별 투표로 바꾸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에 개인별 투표방식을 도입하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인구의 98퍼센트인 제3신분은 인구에비례해 대표를 뽑자는 것이 아니라 단지 3신분제의 한도 안에서 제3신분이 차지하는 몫을 늘려달라고 요구했을 뿐이지만, 14세기 초부터 1614년 마지막으로 열린 전국신분회의 틀에서 볼 때 그들의 요구는 혁명적이었다.

이 이야기는 가난(미제르)이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끝나는지 보여준다. ‘미제르‘의 유일한 재산은 자연이주는 선물인데 아무나 훔쳐가기 때문에 가난하며, ‘죽음‘도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미제르, 즉 가난을 데려가지 못한다. 이 이야기가 정확히 언제부터 생겼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작품은 18세기에만 여남은 개도시에서 14개 판본에 수백만 권이 발간되었을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이야기를 읽는 민중은 무슨생각을 했을까? 민중은 남에게 자기 물건을 도둑맞기 때문에 가난하지만 어려운 사람에게 잠자리를 제공할 정도로 선량하다. 그러므로 민중은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영원히 가난하게 살지 모른다. 이 이야기에서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민중을 보호해줄 공권력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직 가난이라는 주인공이 스스로를 지켜야 할 뿐이다.

"제3신분은 강건한 인간(남자)이지만 한 팔이 아직 사슬에 묶여 있는 사람이다. 만일 특권층을 제거한다면 국민은 전보다 못한 존재이기는커녕 더 나은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전부다. 그러나 구속받고 압제에 시달리는 전부다. 만일 특권층이 없다면 그는 무엇이 될 것인가? 전부가 된다. 자유롭고 번성하는 전부가 제3신분이 없이는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다른 존재들(제1신분, 제2신분, 특권층)이  없어도 무한히 발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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