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의 완성 - 입헌군주제 혁명을 완수하다 Liberte :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6
주명철 지음 / 여문책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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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의회는 무슨 업적을 남겼는가? 1791년 9월 30일 마지막 회의를 끝마친 시점에서 보면 제헌의회는 전대미문의 업적을 남겼다. 그들은 1789년 5월부터 아무도 예견하지 못한 일을 만들거나 거기에 휩쓸리면서 2년 5개월 동안 헌법을 제정했고, 그 헌법을 기초로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투표로써 입법의원들을 뽑아놓고 물러났던 것이다. 그들이 비록 구체제의 방식으로 뽑혀 전국신분회에 나갔고 개인별 투표를 전제로 모이지는 않았지만 '주권의 혁명'을 성취했다. _ 주명철, <헌법의 완성> , p373/380

주명철 교수의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중 제6권 <헌법의 완성 - 입헌군주제 혁명을 완성하다 Liberte>는 바스티유 사건 이후 2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 Divine Right of Kings)의 절대군주제 대신, 국왕을 '제1 공복'으로 규정한 입헌군주제의 프랑스를 만나게 된다. 그렇지만, 2년 남짓의 짧은 기간 동안 혁명기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결코 작지 않았다.

루이 16세는 왕당파의 지지를 받으면서 버티려고 노력했지만 절대군주로서의 권위를 잃었다. 국회의 권력이 더욱 강해지는 데 비해, 그는 더욱 위축되었다. 그는 점점 자유를 구속받는 현실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어떻게든 혁명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파리에서 도주했다. 그러나 그는 24시간 만에 국경과 가까운 바렌에서 붙잡혔다... 그는 전국신분회가 175년 전처럼 군주를 위해 세금을 걷는 일에 동의해주기 바랐지만, 거기에 모인 제3신분 대표들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사태를 이끌어나갔다.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국민의 진정한 대표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들은 전국신분회의 전통적인 방식인 신분별 회의를 거부하고 세 신분이 한데 모여 의논하자고 주장했다. _ 주명철, <헌법의 완성> , p9/380

미국 독립전쟁 참전 등으로 인한 막대한 재정부담을 덜기 위해 소집한 삼부회(三部會)에서 본래 의도했던 증세(增稅) 대신 특권 폐지와 제3신분에 의해 주도되는 국회에게 입법권을 넘겨주는 과정과 이후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갈등은 혁명 세력과 반혁명 세력 모두에게 깊은 감정의 상처를 남겼다. 혁명 이후 절대군주제의 부활을 노렸던 루이 16세를 중심으로 한 세력과 영국식의 입헌군주제를 원하는 제3신분 사이의 치열한 다툼 끝에 루이 16세가 결국 도주하면서 건널 수 없는 다리를 건넌 듯 했다.

왕이 파리로 돌아간 뒤 여론은 더욱 들끓었다. 6월 말까지 국민에게 왕의 재판을 맡기자, 법원에 왕의 재판을 맡기자, 루이 16세를 폐위하자, 왕의 자격을 정지하고 섭정을 두자, 이렇게 의견이 분분했다. 그런데 팔레 루아얄에서는 몇몇 작가나 협회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제를 수립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에 대해 아직까지 큰 호응이 없었다. 특히 코르들리에 클럽은 공화제를 주장했다. 그들은 자코뱅 클럽에 대표를 보내 협조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의 무시당했고, 심지어 비난을 받기도 했다._ 주명철, <헌법의 완성> , p119/380

그럼에도 이들은 혁명을 인정하고, 왕을 존중하는 '적대적 공생관계'를 이어가며 결국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사실, 국회의원 전원이
루이 16세를 지속적으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제3신분을 중심으로 한 국회에서 설계하는 새로운 질서의 방향은 기본적으로 입헌군주제를 지향하고 있었으나, 루이 16세의 도주 사건 이후 분위기가 바뀌어 공화정을 주장하는 급진세력이 출현학는 계기가 마련되면서 변화가 생겨났다.

국회에서는 왕의 문제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왕의 신성성을 생각하는 방식에 따라 크게 극우파와 우파는 절대군주제를 지지하고, 중도우파와 중도좌파는 입헌군주제를 지지했다. 혁명이 급진화할수록 좌파에서 공화제를 주장하는 극좌파가 나타났다. _ 주명철, <헌법의 완성> , p132/380

사람들은 국회의 합동위원회에 "왕에게 신성성이 있는데 재판을 받아야 하는가?" 라고 물었지만, 르장드르는 그 질문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차라리 이렇게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일 왕에게 신성성이 있다면 국회는 무슨 권리로 왕의 자격을 정지시켰는가? 그것은 국회가 제정한 헌법의 원칙을 벗어난 것이 아닌가?" 르장드르는 국회가 원칙을 벗어난 이상, 왕은 인민의 재판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_ 주명철, <헌법의 완성> , p147/380

루이 16세의 도주사건으로 인해 분위기가 급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제헌의회는 입헌군주제라는 새로운 제도를 빠른 시일 내에 구체화할 필요에 쫓기고 있었다. 이런 다급함을 잘 알고 있던 루이 16세를 비롯한 절대왕정세력은 수세에 몰린 처지에서도 당당하게 제헌의회의 헌법을 제정하는 한 축으로 기능하면서, 국정운영의 파트너로 인정받았음을 우리는 <헌법의 완성>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정치적인 움직임으로 과연 대중들을 속일 수 있었을까?

국회에서는 헌법을 마무리하는 단계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7월 14일의 기념식에도 겨우 스물네 명의 대표만 참석시킨 채 현안문제를 다룬다고 바쁜 척했다. 그러나 민중은 그동안 희망을 안고 참았지만 생활이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몹시 분하게 여겼고, 급진적인 신문 발행인은 국회가 일부러 혁명의 다음 단계를 늦추려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_ 주명철, <헌법의 완성> , p111/380

왕과 왕비는 비록 튈르리 궁에 갇혀 있는 형국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숨도 크게 쉬지 않고 납작 엎드려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들 주위에 모이는 사람들은 항상 국내외 반혁명세력과 연계할 궁리를 하면서 상황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끌 수 있는 기회만 엿보았으니, 그들이 자기 패거리들과 함께 있을 때는 유쾌하고 오만한 태도로 궁 밖에 오가는 민중을 '개/돼지' 정도로 깔보고 가엾게 여겼음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들은 새로운 체제도 어차피 질서의 안정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파악했다. _ 주명철, <헌법의 완성> , p116/380

그렇지만, 이들의 이런 정치적인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일반 대중들은 이러한 '좌/우 야합(野合)'의 실체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혁명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인민의 삶과 생각보다 늦어지는 개혁의 움직임 등으로 제3신분 다수의 불만은 점차 커져가고 있음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이후 혁명이 입헌군주제의 수립에서 멈추지 않음을 알려주는 하나의 복선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들의 움직임은 국회를 구성하는 이들에게 주목을 받으면서 1789년의 혁명이 제3신분 중 어느 정도 성공한 부르주아(bourgeois)만의 공화정인가, 아니면 제3신분의 다수를 구성하는 데모스(demos)를 위한 혁명의 성격도 갖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앞으로 지켜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헌법은 제정되었으나, 이를 지켜내기 위한 프랑스의 혁명 전쟁은 다음권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인민은 왕국의 방방곡고에서 대대적으로 봉기해 도시를 둘러친 세관 울타리, 지방을 갈라놓은 그 울타리들을 무너뜨렸다. 소금세, 각종 소비세, 담배세, 입시세를 받던 세리들은 쫓겨났다. 사람들은 창고를 약탈했다. 식료품의 밀수가 도처에 성행했고 이성보다 폭력이 세상을 먼저 지배했다. _ 주명철, <헌법의 완성> , p270/380

1791년 초부터 수많은 단체와 우애관계를 맺은 코르들리에 클럽은 7월 8일의 회의에서 왕의 신성성에 대해 논의했다. 여러 사람이 연단에 올라가 왕의 신성성을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다. 왕도 죄를 지었으니 재판하고 벌을 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들은 왕이 도주하는 순간 신성성을 보장받지 못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의 도주는 자신을 왕으로 인정한 헌법에 공식적으로 반대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국회는 왕에게 신성성을 되찾아주고 그를 왕좌에 굳건히 앉히려고 노력혔다. 그리고 국회는 왕이 납치당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인민이 떠들기 시작하면서 국회의 노력은 실패했다. _ 주명철, <헌법의 완성> , p138/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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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8-22 07: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왕을 죽이는 것은 쉽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왕의 자리를 죽이는 것은 그 체제가 유지되어온 시간만큼 힘든거겠지요. 혁명을 일으키는 것보다 혁명 후 새로운 체제를 만드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만큼요. 이런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되어 왔는데 우리는 아직도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인간들이네요.

겨울호랑이 2022-08-22 08:42   좋아요 2 | URL
바람돌이님 말씀처럼 과거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있었던 많은 일들과 인물들이 기시감이 들 정도로 반복됨을 느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인류가 진보해왔다면, 과거의 성과들이 잊혀지거나 사라지지 않고 축적되어왔기 때문이라 여겨지네요... 인간은 그렇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인류와 문명은 그런 면에서 사회적 진화를 해 온 것은 아니었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바람돌이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1790 - 군대에 부는 혁명의 바람, 낭시 군사반란 Liberte :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4
주명철 지음 / 여문책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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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정치적 조건과 법은 새로운 갈등을 낳았으니, 헌법을 빨리 제정하면 혁명을 끝낼 수 있다고 믿는 사람보다 혁명을 더욱 철저히 해야 이제까지 이룬 성과를 지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더욱 자기 확신에 빠질 수 있었다. 여전히 파리와 지방에서는 민중이 봉기하여 크고 작은 소요사태를 일으켰고, 국경지대에서는 외국 군대가 침략할까봐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더욱이 파브라 후작의 음모에서 보았듯이 왕당파는 국내외에서 계속 일을 꾸며 혁명의 성과를 지우려 하고 있었으니, 1790년을 생각할 때 전국연맹제의 화합보다는 새로운 체제가 탄생하는 가운데 옛날부터 물려받은 재정적자와 새로운 문화조건 때문에 생기는 갈등을 더 강조해야 마땅할 것이다. _ 주명철, <1790> , p10/366

주명철 교수의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중 제4권 <1790 - 군대에 부는 혁명의 바람, 낭시 군사반란 Liberte>에서는 혁명(革命)이라는 급격한 변화가 가져온 혼란의 모습이 낭시 군사 반란을 통해 선명하게 그려진다. 저자는 본문을 통해 의문을 던진다.
'합법적으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 기관'인 군대에서 시민의 가치관은 여전히 유효한가. 왕의 백성으로서 한 명의 군인이었을 때는 제기되지 않았던 물음은 이제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이 구성원이 되면서 문제가 된다. 여기에 혁명을 지지하지만 역량이 부족한 병사들의 다수는 시민인 반면, 역량이 넘치지만 반혁명적인 성향인 장교단 등 지배계층의 이해가 충돌한 결과를 낭시군사반란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유용한 말, "민주 군대는 있어도 군대 안의 민주주의는 없다"라는 말을 1790년 프랑스의 왕의 군대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병사들은 민간인의 정치클럽에 드나들었고, 거기서 배운 정치생활을 병영으로 가지고 들어갔다. 그들은 일종의 의사결정기구인 위원회를 조직해서 자신들과 관련한 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결정한 뒤 장교들에게 그 결정대로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리하여 일사불란한 명령계통을 중시하는 군대의 기강이 무너졌다. _ 주명철, <1790> , p13/366

군인들의 불복종행위는 가장 큰 골칫거리입니다. 그런데 모든 장교직은 귀족과 특권층이 차지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혁명에 충성한다고 생각해야 합니까? 병사들은 어떻습니까? 병사들은 애국자입니다만 식견이 많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장교들은 식견이 많지만 애국자가 아닙니다. 이러니까 불행한 일이 발생합니다. _ 주명철, <1790> , p71/366

이러한 혼란의 배경에는 국회와 국왕을 지지하는 세력 간의 다툼이 자리한다. 루이 16세를 지지하는 우파와 보다 적극적인 공화정을 지지하는 좌파간의 대립은 여론전의 형태로 나타났고, 이러한 혼란 속에서 각자도생(各自圖生)하려는 움직임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자유롭게 의사를 개진하고 이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시민의 권리가, 공동체에서 유일하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무기를 들고 있는 집단인 군인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일까.

1790년에 국회가 모든 정치의 중심 역할을 하면서 의원들이 제정한 헌법, 법률, 명령이나 시행령을 왕에게 승인하고 시행하도록 요구하는 과정에서, 겉으로는 간청하는 형식을 취하지만 실제로는 강요하다시피 의지를 관철시키는 모습을 보면서, 왕당파는 왕의 지위가 낮아지고 점점 권력을 잃어가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왕을 지지하는 세력은 틈만 나면 국회와 그 지지세력에 반대하는 여론을 조성했다. 아직 혁명/반혁명의 구도가 어느 한편의 완전한 승리로 깨지기 전이었기 때문에 애국자 신문 못지않게 왕당파 신문도 반혁명의 분위기를 띄우는 데 한몫했다. _ 주명철, <1790> , p12/366

여론 전쟁이 낭시의 모든 불행의 원인이었다. 대부분의 주민은 현실에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몇몇 저명한 시민은 자신들이 겪을 손실을 전혀 계산하지 않았고 오직 국가의 행복만 생각하면서 국회가 제정한 법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 법은 사실상 오랫동안 억눌렸던 비참한 계급에게 유리했다. 이들은 그 법에 찬동했고, 그 법을 거부하는 사람들과 대립했다. 낭시의 주둔군도 분열과 무관할 수 없었고, 전국을 휩쓸던 혼란의 분위기에 말려들었다. _ 주명철, <1790> , p319/366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중 4번째 <1790>은 혁명의 과정에서 빚어진 혼란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서 질문을 받게 된다. 과연 변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추구해야할 가치가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의 방향성에도 불구하고 상황에 따라 가치의 적용이 제한될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러한 제약이 누군가에게는 부당하게 느껴질 수 있을 때, 우리 모두는 현실적인 한계를 인정할 수 있을까? 아니면, 혁명 자체를 부정하게 되는 것일까. 이러한 혼란상 속에서 서서히 반혁명의 움직임은 내부에서부터 일어나고 있었다...

한마디로 낭시에서는 반혁명이 시작되고 있었다. _ 주명철, <1790> , p318/366

새로운 헌법을 받아들인 낭시 시민들은 병사들이야말로 자신들이 공격당할 때 기꺼이 지켜줄 친구로 생각했다. 병사들은 지금 체제에서 자신을 시민과 같은 존재로 보기 시작하면서 이제 자유의 열매들을 따먹으려고 노력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규율을 어기는 잘못을 저지르면서 아주 분명한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고 아직 그 벌을 받지 않았다. 애국심에 불타는 병사들이 그 애국심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고통스럽지만 인정해야 한다. _ 주명철, <1790> , p321/366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반혁명은 혁명보다 더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기존질서 속에서 특권을 누리던 사람들은 조그만 변화에도 반발하며 더욱이 혁명이 시작되기 전부터 반혁명세력,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수구세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태초에 반혁명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뜻밖의 사건이 일어나고, 사람들은 그것을 혁명이라 했다. 그때부터 혁명이 아닌 것, 혁명에 저항하는 기존의 것을 반혁명이라 불렀다. 마치 새 체제가 생기면서 이미 존재하던 체제를 구체제라 부르듯이." _ 주명철, <1790> , p36/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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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2-08-18 2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이제 1권 들쳐볼까 하는데 정말 머나먼 길인 것 같습니다. 겨울호랑이님 리뷰 보니 책 말고 10권 다 리뷰 기다릴까봐요 ㅎㅎ 너무 재밌는데요 ㅎㅎ 이거 읽기 전에 <짧게 쓴 프랑스 혁명사> 가와노 겐지 지음 이 책을 먼저 읽는데 영 재미가 없어요ㅠㅠ

겨울호랑이 2022-08-18 22:00   좋아요 1 | URL
저자가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을 쓰던 시기가 마침 촛불혁명이 일어나던 시기이기도 하여 서문과 여러 곳에서 저자의 역사관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독자들에게 생생한 혁명의 모습을 전달하고자 하는 노력이 더해져서 우리에게 더욱 와닿는 작품이 되었다 여겨집니다. 저도 매우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만, 꼬마요정님께서 원하시는 시간 내에 리뷰를 다 쓰지 못할지도 모르겠네요...ㅜㅜ 이번에는 딴길로 새지 않도록 한 눈 안팔겠습니다... 꼬마요정님 감사합니다! 하루 마무리 잘 지으세요 ^^:)
 

이렇게 탄생한 국민제헌의회(Assemblee nationale constituante)가 행한 첫 번째 일은 국민 합의에 의한 세금 납부 원칙 공표였다. 프랑스는 세금으로 건설된 나라이며 납세를 할 때 그 사람은 비로소 프랑스의 국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조세 원칙은 실로 중대한 결정이었다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함락에 가담했던 시위대의 2/3가 생 앙투안 주민이었다. 그들의 싸움은 특권층에 대항해 수백 년간 이어온 민중 투쟁의 연장선 상에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의 도시 봉기와는 달리 이번에는 더 이상 절망 가득한 투쟁이 아닌 민중해방운동이었다. 특정 지배계급의 주도에 의해 휩쓸리는 그런 종류의 분노가 아니었다. 반란이라는 기본 형식에 민주주의가 마련한 새로운 방식의 평화적 사회 투쟁을 유기적으로 연계하여 민중의 열기는 전혀 새로운 모험을 향해 나아갔다.

앞에서 본 것처럼 궁중에서 시작되어 살롱으로 확대된 문화(혹은 문명)라는 개념은 문자를 매개로 공공의 장에 편입된 사람들 사이에서 공유되는 문화를 지칭하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다른 대륙의 ‘미개인’과 다를 바 없던 일반 대중은 문화인일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같은 정치적 사고 방식의 밑바탕에는 보편적인 교육 이상주의가 깔려 있었다. 엘리트들은 언젠가는 모든 미천한 군중이 완전한 시민권을 행사할 능력을 갖춘 사람으로 거듭나도록 학교 교육, 언론, 연극을 통해 가르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국가의 토대를 세우는 막중한 시기에 새로운 논쟁이 벌어졌다. 국가 지방 행정의 가장 기본 단위인 4만여 코뮌에 자율성을 얼마나 인정해 줄 것이냐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시에예스는 코뮌의 자율적 권한에 부정적 입장이었다. 자치권을 확보한 코뮌은 공화국 형태의 무수한 소국(小國)으로 변모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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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혁명의 시작 - 신분제 국가에서 국민국가로 Liberte :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3
주명철 지음 / 여문책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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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혁명이 대중의 힘 또는 폭력과 함께 추진력을 얻는 것이라 할지라도, 늘 새로운 헌정질서를 창조하는 민주적 절차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국회의원들은 날마다 각 분야의 전문위원회들이 연구한 안을 토론하고 심의를 거쳐 헌법으로 확정하면서도, 새로 일어나는 사건에 대응하려고 예정에도 없던 시간을 할애해 토론하고 상대를 설득하면서 합의를 이끌어냈다. 프랑스 혁명의 본질적인 측면이 바로 여기에 있다. _ 주명철, <진정한 혁명의 시작> , p12/364

주명철 교수의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중 제3권 <진정한 혁명의 시작 - 신분제 국가에서 국민국가로 Liberte>에서는 입법기관인 국회에 의해 앙시앵 레짐을 대신한 새로운 법질서의 틀을 보여준다. 기존 삼부회(三部會, Etats generaux)에서 세금을 납부할 의무만 있을 뿐,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던 제3신분이 주도하는 국회는 신분제 질서를 타파하면서도,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맞는 제도를 만들어냈다.

국회의원들이 할 일은 기본적으로 재정문제를 해결하고 헌법을 제정하는 두 가지였다. 헌법을 제정해 새 체제를 만들면 그 법을 시행할 기구도 만들어야 했다. 앞으로 보겠지만 고등법원을 폐지하는 일도 새 체제에 맞는 법질서를 구현하려는 준비작업이었다. _ 주명철, <진정한 혁명의 시작> , p165/364

왕에게 한시적인 거부권을 주면서도 단원제 의회를 만들고, 미숙련 노동자의 평균 임금 3일치를 세금으로 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수동시민으로 규정해 투표권을 제한하는 법을 만들게 되는 사람들이 1789년의 국회에서 가장 발언권이 셌다. 그들은 부르주아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들이었으며 대주교 샹피옹드 시세, 대주교 부아즐랭, 시에예스 신부, 미라보 백작, 타르제, 카뮈, 투레 같은 법률가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새로운 프랑스를 건설하려고 노력했다. _ 주명철, <진정한 혁명의 시작> , p120/364

‘대표 없는 곳에 세금도 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라는 미국독립혁명의 영향을 받아서일까. 투표권을 납세 능력과 연결시켰다는 점에서 국회의 다수 세력인 부르주아 계층의 영향력을 새삼 느끼게 된다. 국회의 절대다수가 부르주아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은 제3신분의 대표성을 약화시킨 반면, 국회 내의 동질성을 강화시켰다는 점에서 양날의 검이 되었다.

모든 회의체는 신분이 아니라 개인으로 구성하도록 했다(10월 26일). 그러나 유권자와 피선거권자를 결정할 때는 납세액을 기준으로 삼았다. 9월 29일부터 10월 29일까지 논의한 결과, 프랑스인으로서 각 선거구에 1년 이상 산 25세 이상의 남성 가운데 3일치 임금을 낼 수 있는 사람에게 투표권을 주었다. _ 주명철, <진정한 혁명의 시작> , p159/364

국회에 다수 가난한 민중들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아 이들의 삶이 혁명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은 부정적인 측면이었지만, 공동의 이해관계를 갖춘 이들은 자신과 동료 의원들의 이익을 위해 신분제 특권을 폐지했고, 중앙집권적 권력 구조를 개편하는 성과를 올렸다는 점은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혁명이 투기업자에게는 기회를 주었지만 대다수 가난한 국민에게는 늘 물가고를 안겨주었기 때문에 국회와 왕, 그리고 종교인이 예전처럼 사회적 불안요소인 극빈자, 특히 떠돌이들을 도와 국가에 이로운 인구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하더라도 항상 힘에 부쳤다. 인구는 많은데 일거리는 언제나 부족하고, 만성적자에 시달리던 재정문제를 하루아침에 고치지 못하는 한, 구빈문제는 혁명도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난제였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은 현실적 불만 때문에 혁명/반혁명의 과정에 쉽게 동원되었다. _ 주명철, <진정한 혁명의 시작> , p147/364

제1신분인 성직자와 제2신분인 귀족들의 특권의 폐지는 교회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고 귀족의 작위를 공식적으로 없애는 형태로 구현되었다. 제3신분이기는 하지만 일반 대중들과 살롱(salon) 문화를 공유한 자신들을 구분한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일시적‘이고 ‘중앙집권적‘으로 운영되던 과거에서 벗어나 법에 의한 ‘영속‘과 지방분권, 탈신분제의 첫걸음이라는 면에서 혁명의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마침내 7월 12일에는 시민헌법 최종안이 나왔다. 새 체제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교회를 국가 밑에 두어 주교나 대주교의 수를 줄이는 동시에 로마 교황청과 관계를 끊도록 하는 데 있었다. 그리하여 종교인의 사법적/정치적 간섭을 배제하고 오로지 종교적인 일만 하도록 했다(p220)... 계몽주의자 가운데 볼테르의 주장만큼 혁명에 확실하게 반영된 것은 없으리라. 볼테르는 틈만 나면 가톨릭교를 비판하고더 나아가 종교적 자유를 주장했는데 이제 그 길이 확실히 열렸던 것이다. _ 주명철, <진정한 혁명의 시작> , p225/364

시민들이 주역이 되는 연맹제가 공화주의의 분위기를 한껏 드높일 때, 국회는 귀족작위를 폐지하는 문제로 한바탕 토론을 벌였다. 수많은 소책자에서 이미 귀족 작위 폐지문제를 거론했고 국민주권의 시대가 열렸기 때문에 6월 19일에 국회가 실천하려는 일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사실 지난해 8월 4일부터 일주일 동안 귀족 의원들이 특권을 자발적으로 포기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열 달이 지난 시점에 실제로 귀족 작위를 폐지하는 문제가 나오자 저항하는 의원이 많았고, 이튿날인 일요일(20일)에 항의서를 써서 국회에 보낸 사람들도 많았음을 볼 때, 전국연맹제를 앞두고 국회는 또 한 번 높은 산을 넘었다고 말할 수 있다. _ 주명철, <진정한 혁명의 시작> , p293/364

다른 한편으로, 혁명 세력에 의해 강제적으로 교회의 특권 페지, 튈르리 궁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던 루이 16세와 혁명 이후 입헌군주제를 유지하고 실력자로 서려 했던 라파예트 간의 대립이 서서히 격화되고 있었다. 혁명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며 혁명가들에게 실망감을 안겨 준 루이 16세와 이러한 루이 16세를 혁명세력으로부터 보호하려 했지만, 정작 라파예트 자신은 왕에게 라이벌로 인식되는 상황.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중 3권 <진정한 혁명의 시작>은 혁명에 의한 새로운 질서의 수립과 함께 새로운 시대의 갈등을 함께 보여준다. 여기에 더해 해결되지 않은 민중들의 어려움은 혁명을 더욱 격렬하게 몰아갔고, 지도층의 보이지 않는 알력은 여기에 기름을 부으며 전혀 예상치 못한 역사의 흐름으로 이들을 몰아간다...

라파예트는 요크타운이 함락된 뒤 야전사령관이 되어 싸우다가 1785년에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는 이미 ‘두 세계의 영웅‘이 되어 있었다. 라파예트 후작은 새로운 사상에 물들었고 네케르와 친하게 지냈다(p55)... 국민방위군의 목적이 귀족의 음모, 민중의 분노와 조급함에 맞서는 한편, 혁명의 역동성 때문에 생기는 강력한 현상을 제한하는 데 있으며, 모든 시민으로 하여금 무장하게 하는 것 자체가 시민의 세력화를 뜻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들을 지휘하는 라파예트의 의지는 혁명의 과정에 큰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변수였다(p56)... 라파예트는 공화정신에 물든 왕정주의자였다. 한마디로 그는 왕과 혁명가를 화해시키는 역할을 맡고 싶었다. _ 주명철, <진정한 혁명의 시작> , p57/364

왕은 전국연맹제에서 자신이 라파예트보다 우위에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13일에 직접 점검에 나섰던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충성심은 받는 사람의 몫이 아니라 바치는 사람의 몫이다. 왕은 구시대의 상징으로 아슬아슬하게 하루하루를 보냈지만 역사의 주역이 여기저기서 마구 두각을 나타내는 격변기였으니 왕으로서는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으리라. _ 주명철, <진정한 혁명의 시작> , p342/364

이렇게 해서 ‘새로운 시대의 출발‘을 상징하는 7월 14일의 전국연맹제는 무사히 끝났다. 그것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먼저 그것을 진정한 국민의 잔치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대중 또는 다중이 진정한 우애를 느끼고 새로운 관계를 열렬히 환영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행사가 끝난 시점에 냉정한 사람은 과연 그날의 주역이 누구였는지 돌이켜보았다. 행사장에서는 분명히 왕이 정점에 있었다. 그러나 문화적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에 왕보다는 라파예트가 더 돋보였다. _ 주명철, <진정한 혁명의 시작> , p347/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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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 - 평등을 잉태한 자유의 원년 Liberte :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2
주명철 지음 / 여문책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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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사가 조르주 르페르브 Georges Lefebvre는 두려운 심리가 ‘방어의지‘와 ‘처벌의지‘를 불러일으킨다고 보았다. 그래서 혁명기 사람들은 공권력이 저지를 ‘폭력‘에 스스로 방어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무장하게 되었으며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들을 억압하고 ‘폭력‘을 행사했던 사람들을 직접 처벌하고 싶어졌다. 이러한 맥락에서 혁명기 민중의 무장을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무장한 민중 때문에 무질서 상태가 오는 것을 두려워하고 왕이 동원하는 무력에 온전히 대응하려고 민병대를 조직한 부르주아 계층의 대응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_ 주명철, <1789> , p79/300

주명철 교수의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중 제2권 <1789-평등을 잉태한 자유의 원년 Liberte>의 주제는 앙시앵레짐(Ancien Regime)의 붕괴(崩壞)다. 우리는 2권을 통해서 ‘문화적 앙시앵레짐‘의 파괴로 혁명의 배경이 만들어졌다면, 1789년에 일어난 2개의 사건 - 바스티유 함락, 인권선언 - 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결과적으로 바스티유 함락은 ‘정치적 앙시앵레짐‘의 끝장을, 인권선언의 승인은 ‘사회적 앙시앵레짐‘의 종언을 알리며 이제 구체제는 부활하기 어려울 정도로 몰락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0월 5일과 6일에 혁명이 다시 한번 폭발했다. 그리고 파리가 100여 년 전에 잃었던 정치의 중심지 역할을 되찾았다. 파리 아낙네들이 베르사유로 행진해 가지 않았다면 왕은 헌법과 인권선언을 승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10월 5일까지 거부권으로 버티던 왕은 마침내 국민의 의지에 굴복하게 되었다. 이로써 왕과 국민 또는 왕과 국회 사이의 무게중심이 국민 편으로 더 많이 이동했다. 국회 안에서도 좌파가 점점 두드러진 세력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양원제 의회, 절대적 거부권을 주장하는 파는 혁명을 세 달 만에 끝내고 싶어했지만 혁명이 다시 한번 폭발해 누구 하나 앞날을 계획대로 만들어가기 어렵게 되었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일이 있다. 앙시앵레짐이 죽어가면서 이제 더는 회생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_ 주명철, <1789> , p289/300

그렇지만, 앙시앵레짐의 붕괴까지 단계는 결코 순탄치 않았다. 누구보다도 반(反)혁명의 선두에 서 있던 것이 루이16세였고, 그를 둘러싸고 특권을 놓치 않으려는 1,2신분의 저항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실제로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제3신분의 요구를 짓밟으려는 반혁명 세력의 시도가 있었기에 이 시점에서 혁명은 분명 위태로워 보였다.

왕은 종교인과 귀족이 제3신분(‘평민‘)에게 휘둘리지 않고 자신에게 충성해준다면 ‘평민‘을 고립시키고 원래 목적대로 전국신분회의 기능을 되살려 체제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고 계산했다. 그리하여 그는 6월 23일에 군대를 집결시켜 힘을 과시하고 회의실에 일반일을 들이지 않은 채, 다시 말해 평민 대표들을 고립시킨 채, 그날을 위해 준비한 각본을 국무대신으로 하여금 대표들에게 읽도록 했다. _ 주명철, <1789> , p51/300

그러한 위기상황에서 결국 절대군주와 특권층의 반격을 좌절시킨 것은 국회로 표현되는 제3신분의 일반의지였다. 절대군주로부터 입법권을 국회로 가져오면서 역사의 흐름은 바뀌기 시작한다. 이전에는 ‘불온한 기운의 반란‘이 ‘새로운 시대의 혁명‘으로 명분을 얻으면서 제3신분의 행동은 정당성을 획득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혁명은 점차 가속화되었다.

루이 16세는 브로이 원수가 지휘하는 병력 2만 명을 베르사유에 집결시켰음에도 그들에게 명령하여 국회를 해산시키지 않았다. 브로이 원수는 기꺼이 무력을 동원할 준비를 갖추고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왜 루이 16세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을까?(p60)... 제3신분이 국회를 선포하고 주도하면서 왕의 의지를 꺾은 것은 큰 의미를 가진다. 더욱이 그들은 ˝루이, 당신만 신성한가? 우리도 신성하다˝라는 듯이 의원의 면책특권을 결의했다. 이로써 국회가 스스로 자신의 지위를 높였고 왕은 즉각 대응을 하지 않았지만, 그때부터 ‘혁명‘은 수많은 사건과 함께 흘러간다. 전국신분회의 제3신분이 국회의 ‘평민‘이 되었고, 왕처럼 ‘신성한 존재‘가 되면서 혁명의 중요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이로써 정치적 앙시앵레짐은 6월 23일로 죽었다. _ 주명철, <1789> , p61/300

‘프랑스 혁명=바스티유 함락‘이라는 공식을 떠올릴 정도로 바스티유 함락이 프랑스 혁명에서 갖는 의미는 상징적이다. 그것의 실상이 생각만큼 큰 것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루이14세의 절대정으로의 회귀를 원했던 루이16세에게 입헌군주라는 현실을 알려주었다는 점과 혁명의 소식을 지방으로 널리 전파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대혁명의 과정에서 이는 하나의 분기점이었음이 분명해진다.

왕은 충성스러운 의원들을 보면서 ˝국회는 왕의 의도와 바름을 충분히 알았을 테니 언제라도 왕에게 원하는 것이 있으면 얘기하라˝고 확인해주었다. 이 말을 들은 의장은 ˝국회는 오래전부터 국왕과 국민의 대표 사이에 아무런 중개자가 끼어들지 않고 직접 소통하기 바랐다˝고 강조했다. 왕이 베르사유 궁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여 기뻐했다. 왕이 제대로 걸음을 옮기지 못할 정도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어떤 여인은 무릎을 꿇고 왕의 발을 껴안으려 했다. 사방에서 ˝왕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베르사유 궁의 마당으로 들어설 때까지 사람들이 더 많이 몰려들었다(p131)... 바스티유가 정복된 결과 왕이 의도했던 일은 물거품이 되었다._ 주명철, <1789> , p132/300

대공포의 물결이 프랑스를 휩쓸고 지나가는 기간을 7월 20일부터 8월 6일로 인식한다고 해서 그 기간의 앞뒤로 도시나 농민이 조용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대공포의 원인이 모든 곳에서 한결같았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세 가지 원인 가운데 하나 이상이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영주권에 대한 농민의 반발, 도적떼에 대한 두려움, 귀족과 그 하수인들에 대한 두려움이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농민은 소문을 듣고 약탈자들이 오기만을 기다리기보다는 스스로 무장하고 자신들을 괴롭히던 사람들을 직접 처벌하려고 찾아다녔다. _ 주명철, <1789> , p168/300

본문에서는 바스티유 함락과 함께 인권선언의 승인에 적지 않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여러 의원들의 치열한 논쟁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처럼 그려지지만, 이를 감상하는 것은 독자들의 몫으로 돌리도록 하자. 다만, 여기서는 인권선언에 영향을 준 계몽사상과 관련하여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리뷰 URL을 표시하는 것으로 넘기도록 하자.
<프랑스 대혁명의 철학> 리뷰 : https://blog.aladin.co.kr/winter_tiger/13794501

먼저 정치적인 앙시앵레짐을 무너뜨리고 나서 사회적 앙시앵레짐을 무너뜨린 지 보름 뒤에 나온 인권 선언은 계몽사상을 반영했다. 그러나 계몽사상을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계몽사상가들이 똑같은 관념을 똑같이 주장하지도 않았으며 평생 서로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각각 다른 시기에 주장한 내용까지 18세기에 나온 것이라고 해서 계몽사상으로 지징하는 것은 분명 무리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계몽주의자들이 앙시앵레짐의 시대의 자유(일종의 특권)와 다른 종류의 자유(모든 구성원의 자유)를 주장하고, 게다가 앙시앵레짐 시대의 신분사회에서 부정하는 사회적 평등을 주장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_ 주명철, <1789> , p203/300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중 2권 <1789-평등을 잉태한 자유의 원년>은 이처럼 앙시앵레짐의 붕괴를 다룬다. 정치적 앙시앵레짐의 붕괴로 국회의 권위를 높이고, 이어서 사회적 앙시앵레짐의 붕괴를 통해 특권을 소멸하여 인권선언을 채택하는 일련의 과정안에서 우리는 프랑스 대혁명의 큰 흐름과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아직 혁명이 채 끝난 것은 아니다. 이것은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중 8권이 남아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반혁명 세력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아직 절대왕권의 꿈을 못버린 루이16세와 특권층의 불만이 아직 채 사라지지 않았던 시기, 같은 시점 국회는 이미 이런 절대정과 ‘헤어질 결심‘을 굳힌 상태에서 이들의 불안한 동거는 어디까지 계속될 것인가. 인권선언에서 기요틴(guillotine)으로 가는 제2의, 제3의 혁명은 어쩌면 이때부터 예정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모호한 상황을 피하고 시간을 지체시키지 않기 위해서 나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만일 당신이 우리를 여기서 내보낼 임무를 띠고 왔다면, 당신은 무력을 동원할 수 있는 명령을 내려달라고 요청해야 합니다. 왜나하면 오직 총칼의 힘을 빌려야만 우리를 이 자리에서 몰아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모든 의원이 미라보의 말을 따라 외쳤다. ˝이것이 국회의 결심이다.˝ _ 주명철, <1789> , p57/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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