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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혁명 - 입법의회와 왕의 폐위 ㅣ Liberte :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7
주명철 지음 / 여문책 / 2018년 5월
평점 :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성문헌법을 적용해서 민주적 선거로 뽑은 입법의회는 1791년 10월 1일부터 법을 만들면서 국내외의 온갖 어려움을 겪었다. 종교인들은 헌법에서 공무원의 지위를 얻었으며, 헌법에 충성하겠다고 맹세해야 했지만 거부하거나 맹세를 하고서도 철회하는 경우가 많았다. 귀족주의자들은 단원제 국회를 영국식 양원제로 바꾸자고 주장했다. 종교인과 귀족주의자들은 나라 안팎에서 헌정을 파괴할 목적으로 군대를 모으고 외국의 지원을 받았다. 그들은 내전을 부추기는 동시에 외국으로 망명한 왕족들과 내통하고 외국 군주들의 지원을 얻어 대외전쟁까지 부추겼다. 그렇게 해서 프랑스는 1792년 4월 20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연합군과 전쟁을 시작했다. _ 주명철, <제2의 혁명> , p10/464
주명철 교수의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중 제7권 <제2의 혁명 - 입법의회와 전쟁, 왕의 폐위 Liberte>의 배경인 1791년과 1792년의 2년 시기는 2년 남짓한 시간에 불과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혁명기 프랑스의 어려움의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로 이후 프랑스 혁명의 성격이 이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지는 변곡점이라는 점에서 시대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전제군주정으로부터 입헌군주제로의 혁명을 이루었지만, 입헌군주국 프랑스를 둘러싼 내/외부 환경은 결코 그들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제1공무원으로 국가를 위해 노력해야 할 국왕 루이 16세와 귀족들은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최대한 혁명을 지연시키는 방향으로 행정력을 소모하고 있었고, 이러한 움직임은 그렇지 않아도 국왕의 도주 사건으로 떨어진 그에 대한 인식을 더욱 나쁘게 했다.
능동적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수동적으로라도 따라오는 사람이 있는 한 새로운 체제를 정착시키기 쉽다. 그러나 변화를 바라지 않고, 변화에 능동적으로 반대하고 방해하는 사람들은 만만치 않은 반혁명세력이다. 루이 16세는 변화에 마지못해 따라가면서도 헌법이 준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펵명의 앞길에 장애물을 설치했다. _ 주명철, <제2의 혁명> , p45/464
그렇다면 인민의 대표 일부를 본연의 임무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왕실비다. 행정부는 왕실비를 써서 대신들을 임명한다. 따라서 행정부가 합리적인 봉급을 주고, 또 어떠한 공직도 마음대로 부리지 않는다면 입법부는 본연의 임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입법부가 부패하지 않으면 건전하고 정의로운 법을 제정할 수 있다. 행정부가 이러한 법을 집행하면 정치는 올바르다. 만일 행정부가 법을 올바르게 집행할 의사가 없으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왕의 권리는 신성하기 때문에 아무도 그의 무관심이나 행동을 제약할 수 없다. 따라서 혁명은 무용지물이 된다. _ 주명철, <제2의 혁명> , p206/464
이런 국왕과 왕당파의 노골적인 태업(怠業)행위에 대해 견제해야 할 온건파 혁명세력이 주도하는 국회에 대한 실망감도 적지 않았다. 라파예트로 대표되는 이들 세력의 굼뜬 움직임 역시 혁명에 대한 민중의 실망을 자아내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국회의원들이 모두 실권을 행사하는 것이 처음이라 그들이 겪는 시행착오는 그대로 일반 시민들의 몫이었고, 행정상의 태업과 입법상의 공백 사이에서 민중들의 삶은 매우 불안해져갔다. 이처럼 정치/ 경제적 불안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프랑스는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의 오빠 레오폴트 2세로부터 선전포고라는 선물을 받으며 결정적인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들은 불매운동을 벌여야 설탕 값이 떨어진다는 논리로 투기꾼들을 비난했다. 설탕이 귀해진 이유는 생산지에서 생산량이 줄고 수출관세는 높게 매기는 데서 출발해 프랑스의 투기꾼들이 매점매석하기 때문인데, 서민은 품귀현상의 모든 책임을 투기꾼에게 물었고, 국회에서 이 문제를 빨리 해결해주기 바랐다(p154)... 돈의 가치가 떨어지고 은값이 치솟았다. 2월 초, 은은 53퍼센트나 비싸졌다. _ 주명철, <제2의 혁명> , p156/464
혁명이 시작된 후 프랑스는 국내외의 반혁명세력을 견제해야 했다. 왕의 군대에서 프랑스 수비대는 1789년 6월부터 민간인들과 형제애를 나누면서 상관의 말을 듣지 않았다. 국민방위군을 창설해 도시와 외곽의 질서를 바로잡았지만, 해가 바뀌고 혁명이 더욱 급진화하면서 국민방위군은 귀족이나 민중의 희망을 저버리고, 더욱이 국민방위군 안에서도 틈이 발생했다. 파리 국민방위군 총사령관 라파예트는 초기에 하늘을 찌를 듯한 인기를 누렸으나 점점 정치적 암투에서 인기를 잃었다. 정규군도 혁명의 바람에 휩쓸렸다. _ 주명철, <제2의 혁명> , p71/464
황제 레오폴트 2세는 끊임없이 유럽 열강들을 프랑스와 대립시킬 방법을 찾았다. 그는 오래전부터 러시아와 공모해 폴란드와 터키를 나눠 가질 궁리를 했고, 프랑스와 스웨덴을 이간질했다. 그는 3월 1일에 죽고, 구스타브3세도 3월 29일에 살해당했다. 레오폴트 2세의 뜻을 담아 카우니츠 공이 지난 2월 18일에 보낸 공식 서한은 진정한 뜻의 선전포고였다. _ 주명철, <제2의 혁명> , p264/464
안으로는 반혁명세력, 밖으로는 오스트리아-프로이센과의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국회는 어떠한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기 위해 나서달라는 호소를, 샹퀼로트(Sans-culotte)를 중심으로 한 일단의 세력들은 튈르리 궁으로 쳐들어가면서 루이 16세의 폐위가 결정된다. 이제 프랑스는 혁명전쟁을 입헌군주국이 아닌 공화정으로 치를 것이었다. 그리고, 튈르리 궁을 지키던 스위스 용병대와의 전투를 통해 피맛을 알게 된 상퀼로트들의 등장은 바로 공포정의 서곡이기도 했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고 있음에도, 병력을 증강하자는 법에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루이 16세가 패배하기 바랐던 전쟁을 장기전으로 가져가거나 결국 승리할까봐 두려웠던 것일까? 설마. 그럼에도 우리는 전체의 이익보다 자기네 이익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상식을 깨는 능력이 있음을 깨닫는다. _ 주명철, <제2의 혁명> , p327/464
8월 10일, 왕의 권한을 정지시킨 것은 1791년 헌법을 부정하는 혁명이었다. 그 헌법에는 왕이 입법부를 해산할 수 있으며, 왕은 몇 가지 경우에 '사임 abdication'한다고 정했다. 다시 말해 국회는 왕을 정직 suspension시키거나 폐위 decheance할 권한이 없었다. 그렇다면 누가 먼저 헌법을 부정했던가? 지난 1년 동안 귀족주의자들은 양원제 헌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단원제 헌법을 거부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국민이 왕의 정직과 폐위를 요구했고, 마침내 무장투쟁을 통해 국회를 움직였다. 그래서 1792년 8월 10일은 한 달 뒤에 있을 '공화국 선포'의 첫 단추를 꿰는 날이었다. _ 주명철, <제2의 혁명> , p451/464
<제2의 혁명>을 통해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전제군주의 구심점이었던 루이16세는 입헌군주제의 중심이 될 수 있었는가. 앞에서는 입헌군주로의 개헌을 승인하고, 뒤에서는 끊임없이 반혁명 세력의 준동을 지원한 루이 16세의 모습에서 일본 '천황제'를 생각하게 된다. 과거 군국주의의 상징을 폐지하지 않고 상징적인 존재로나마 남아있는 현실에서 끊임없이 과거로 회귀하려는 일본 극우의 움직임이 사라지지 않을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또한, 이러한 움직임을 인정하고 점진적인 개혁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 우리는 라파예트 장군의 정치행적을 통해 답을 얻을 수 있을 듯하다.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을 잘 조절하여 중도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는 미국독립전쟁 영웅 라파예트의 몰락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시사점이 크다 여겨진다. 그리고, 중도적 개혁이 실패했을 때 상퀼로트로 대표되는 극좌세력이 대두 또한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었을까. 이제 프랑스 혁명은 '기요틴'과 함께 공포정으로 향해 나아갈 것이며, '우애'를 상징하는 빨강색은 이제부터 기요틴의 피로써 '우애 없음'을 보여주면서 프랑스를 물들이게 될 것이다...
1792년 6월 20일, 상퀼로트는 왕궁에 들어가 왕을 만나 붉은 프리기아 모자를 씌우고 자신들이 마시던 포도주를 나눠주면서 왕과 형제애를 나눴지만 기대했던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그들이 무기를 들고 궁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은 굉장히 큰 의미를 가진다. 평소 경멸하고 욕하던 권력자를 막상 마주하게 될 때, 연습했던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은 보통사람의 속성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자주 마주치게 되면 점점 거친 말까지 내뱉게 된다. 결과적으로 6월 20일은 앞으로 한 달 반쯤 뒤에 헌정을 중단시킬 사건을 향한 서막이었다. _ 주명철, <제2의 혁명> , p360/464
'기요틴'은 산업혁명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기계였다. 오늘날까지도 손재주 havilete는 사람마다 다른 결과를 낳지만, 산업화 이후의 과학기술 technologie은 규격화한 결과를 낳는다. 특별한 기술이 없는 사람이라도 조작하는 방법만 제대로 따르면 똑같은 결과를 얻는다. 한마디로 '기요틴'은 사형의 대량화요, 기계화다. _ 주명철, <제2의 혁명> , p188/4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