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서는 화가의 붓만 사용하고 철학자 성찰은 거의 하지 않았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풍자를 위주로 했더라면 이 '풍경'이 쉬웠을 테지만, 나는 풍자를 철저하게 삼갔다. 전형화된 풍자는 자극적이고 무감각하게 만들 뿐, 올바른 길로 인도하거나 제대로 바꾸지 못한다는 점에서 잘못된 것이다. 나는 전체적인 그림만을 그렸고, 이것을 넘어서는 일은 공익을 위해서 하지 않았다. 나는 살아 있는 인물들을 보고 이 '풍경'을 그렸다. _ 루이 세바스티앵 메르시에, <파리의 풍경 1>, 머리말 中


 주명철 교수의 <프랑스 혁명사> 10부작도 어느 정도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프랑스 혁명을 이대로 정리하기에는 부족함이 생긴다. 물론, 이 부족함은 저자의 부족함이 아닌 내 자신의 부족함에서 오는 것이리라.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은 프랑스 혁명의 역사를 2016년 촛불항쟁의 경험을 가진 이들에게 혁명의 의미에 대해 잘 전달한다. 프랑스 혁명이 시간적, 공간적으로 우리에게 큰 의미가 없는 사건이 아니라는 점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이 대작(大作)은 분명 큰 의의가 있다. 반면, 프랑스인들은 이 혁명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는 다른 책들이 필요할 듯하다. 




 그런 점에서 루이세바스티앵 메르시에 (Louis-Sebastien Mercier)의 <파리의 풍경 Tableau de Paris>은 당대의 시대상을 앵글에 담아 보여줄 것이며, 그런 사료에 대한 현대 프랑스인들의 인식은 피에르 노라(Pierre Nora)의  <기억의 장소 Les Lieux de Memoire>가 알려줄 것이다. <파리의 풍경>를 둘러싼 프랑스 혁명의 사건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기억의 장소>와 이를 바라보는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을 통해 혁명을 바라보는 인식의 삼각형을 뚜렷하게 그려보기를 바라본다...


 이러한 삼각형의 윤곽을 잡은 후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의 철학으로 안을 색칠하고, 성공한 파리코뮌이었던 프랑스 혁명과 대척점에 있는 프롤레타리아 혁명 파리코뮌을 주제로 한 <프랑스 혁명사 3부작>으로 외접원을 그린다면, 이제 다시 자연스럽게 자본주의로 독서주제를 선회할 수 있지 않을까. 일단 계획은 그렇다... 














 기억으로부터 역사로의 이행은 각 사회집단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역사를 활성화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재규정하는 것을 의무로 삼게 만든다. 기억의 의무는 각자를 자기 자신에 대한 역사가로 만든다. 역사의 절대적 필요성은 이렇게 해서 제한된 전문 역사가 서클의 범위를 크게 넘어선다(p48)... 기억의 역사적 변환(metamorphose)은 개인심리로의 결정적인 전환이라는 대가를 치렀다. 두 현상이 너무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그것들이 발생한 시점이 일치한다는 것조차 지적하기 어려운 그런 현상들이 있다... 기억의 전이(轉移)는 역사적인 것에서 심리학적인 것으로, 사회적인 것에서 개인적인 것으로, 전달가능한 것에서 주관적인 것으로, 되풀이되는 것에서 회상하게 만드는 것으로의 결정적인 이동이다. 기억의 구속이 집요하고 미분화된 방식으로 힘을 가하는 대상은 결국은 개인이고 오직 개인일 뿐이다. _ 피에르 노라, <기억의 장소 1>,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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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2-08-25 12: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꼬리에 꼬리를 잇는 독서법” 넘 좋습니다. ^^

겨울호랑이 2022-08-25 12:32   좋아요 2 | URL
좋게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제 독서법은 ‘그때 그때 기분 내키는 대로 독서법‘에 더 가깝긴 합니다만 ㅋㅋ 북다이제스터님 좋은 오후 되세요! ^^:)

거리의화가 2022-08-25 13: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파리의 풍경>은 시민들이 생각하는 역사를 확인할 수 있겠네요. 관심이 갑니다! 겨울호랑이님 덕분에 프랑스 혁명을 훓고 지나갔다는 생각이 들어요. 주명철 교수의 책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더 좋겠는데 언젠간~!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22-08-25 14:08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제가 <프랑스 혁명사>10부작은 전체 내용 중 극히 일부만을 인용한 것이라 거리의화가님께서 직접 읽으신다면 훨씬 많은 내용을 담으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거리의화가님 좋은 하루 되세요! ^^:)

바람돌이 2022-08-25 14: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파리의 풍경 관심가는 책이네요. 담아갑니다. 겨울호랑이님 덕분에 프랑스혁명에 대해서 다시 여러가지를 생각해볼 구 있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8-25 14:35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바람돌이님 즐거운 독서 되세요! ^^:)

꼬마요정 2022-08-25 23: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파리의 풍경> 책 표지가 참 이쁘네요. 흑흑 전 이제 <프랑스혁명사> 1권 시작하는데 뭔가 훅 하고 거대한 밀물이 들어오지만 책이 예뻐서 장바구니에 담아봅니다. ㅎㅎㅎ 제정신이 아닌 게 틀림없습니다. 아니면 북플에는 마약 성분이 분비되고 막 그러나요?? 지름신이랑 계약이 되어 있다거나….

겨울호랑이 2022-08-26 00:09   좋아요 1 | URL
^^:) 설마요 . <파리의 풍경>을 지금 읽고 있습니다만 18세기 프랑스를 느낄 수 있는 생동감 넘치는 책이라 여겨집니다. 다만 6권에 달하는 방대함이 부담스러울수도 있을 것같아요. 목차 중 관심내용을 선택하여 우선 읽으시면 지루함을 덜수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꼬마요정님 즐거운 독서 되세요!
 
제2의 혁명 - 입법의회와 왕의 폐위 Liberte :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7
주명철 지음 / 여문책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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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성문헌법을 적용해서 민주적 선거로 뽑은 입법의회는 1791년 10월 1일부터 법을 만들면서 국내외의 온갖 어려움을 겪었다. 종교인들은 헌법에서 공무원의 지위를 얻었으며, 헌법에 충성하겠다고 맹세해야 했지만 거부하거나 맹세를 하고서도 철회하는 경우가 많았다. 귀족주의자들은 단원제 국회를 영국식 양원제로 바꾸자고 주장했다. 종교인과 귀족주의자들은 나라 안팎에서 헌정을 파괴할 목적으로 군대를 모으고 외국의 지원을 받았다. 그들은 내전을 부추기는 동시에 외국으로 망명한 왕족들과 내통하고 외국 군주들의 지원을 얻어 대외전쟁까지 부추겼다. 그렇게 해서 프랑스는 1792년 4월 20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연합군과 전쟁을 시작했다. _ 주명철, <제2의 혁명> , p10/464

주명철 교수의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중 제7권 <제2의 혁명 - 입법의회와 전쟁, 왕의 폐위 Liberte>의 배경인 1791년과 1792년의 2년 시기는 2년 남짓한 시간에 불과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혁명기 프랑스의 어려움의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로 이후 프랑스 혁명의 성격이 이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지는 변곡점이라는 점에서 시대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전제군주정으로부터 입헌군주제로의 혁명을 이루었지만, 입헌군주국 프랑스를 둘러싼 내/외부 환경은 결코 그들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제1공무원으로 국가를 위해 노력해야 할 국왕 루이 16세와 귀족들은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최대한 혁명을 지연시키는 방향으로 행정력을 소모하고 있었고, 이러한 움직임은 그렇지 않아도 국왕의 도주 사건으로 떨어진 그에 대한 인식을 더욱 나쁘게 했다.

능동적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수동적으로라도 따라오는 사람이 있는 한 새로운 체제를 정착시키기 쉽다. 그러나 변화를 바라지 않고, 변화에 능동적으로 반대하고 방해하는 사람들은 만만치 않은 반혁명세력이다. 루이 16세는 변화에 마지못해 따라가면서도 헌법이 준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펵명의 앞길에 장애물을 설치했다. _ 주명철, <제2의 혁명> , p45/464

그렇다면 인민의 대표 일부를 본연의 임무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왕실비다. 행정부는 왕실비를 써서 대신들을 임명한다. 따라서 행정부가 합리적인 봉급을 주고, 또 어떠한 공직도 마음대로 부리지 않는다면 입법부는 본연의 임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입법부가 부패하지 않으면 건전하고 정의로운 법을 제정할 수 있다. 행정부가 이러한 법을 집행하면 정치는 올바르다. 만일 행정부가 법을 올바르게 집행할 의사가 없으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왕의 권리는 신성하기 때문에 아무도 그의 무관심이나 행동을 제약할 수 없다. 따라서 혁명은 무용지물이 된다. _ 주명철, <제2의 혁명> , p206/464

이런 국왕과 왕당파의 노골적인 태업(怠業)행위에 대해 견제해야 할 온건파 혁명세력이 주도하는 국회에 대한 실망감도 적지 않았다. 라파예트로 대표되는 이들 세력의 굼뜬 움직임 역시 혁명에 대한 민중의 실망을 자아내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국회의원들이 모두 실권을 행사하는 것이 처음이라 그들이 겪는 시행착오는 그대로 일반 시민들의 몫이었고, 행정상의 태업과 입법상의 공백 사이에서 민중들의 삶은 매우 불안해져갔다. 이처럼 정치/ 경제적 불안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프랑스는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의 오빠 레오폴트 2세로부터 선전포고라는 선물을 받으며 결정적인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들은 불매운동을 벌여야 설탕 값이 떨어진다는 논리로 투기꾼들을 비난했다. 설탕이 귀해진 이유는 생산지에서 생산량이 줄고 수출관세는 높게 매기는 데서 출발해 프랑스의 투기꾼들이 매점매석하기 때문인데, 서민은 품귀현상의 모든 책임을 투기꾼에게 물었고, 국회에서 이 문제를 빨리 해결해주기 바랐다(p154)... 돈의 가치가 떨어지고 은값이 치솟았다. 2월 초, 은은 53퍼센트나 비싸졌다. _ 주명철, <제2의 혁명> , p156/464

혁명이 시작된 후 프랑스는 국내외의 반혁명세력을 견제해야 했다. 왕의 군대에서 프랑스 수비대는 1789년 6월부터 민간인들과 형제애를 나누면서 상관의 말을 듣지 않았다. 국민방위군을 창설해 도시와 외곽의 질서를 바로잡았지만, 해가 바뀌고 혁명이 더욱 급진화하면서 국민방위군은 귀족이나 민중의 희망을 저버리고, 더욱이 국민방위군 안에서도 틈이 발생했다. 파리 국민방위군 총사령관 라파예트는 초기에 하늘을 찌를 듯한 인기를 누렸으나 점점 정치적 암투에서 인기를 잃었다. 정규군도 혁명의 바람에 휩쓸렸다. _ 주명철, <제2의 혁명> , p71/464

황제 레오폴트 2세는 끊임없이 유럽 열강들을 프랑스와 대립시킬 방법을 찾았다. 그는 오래전부터 러시아와 공모해 폴란드와 터키를 나눠 가질 궁리를 했고, 프랑스와 스웨덴을 이간질했다. 그는 3월 1일에 죽고, 구스타브3세도 3월 29일에 살해당했다. 레오폴트 2세의 뜻을 담아 카우니츠 공이 지난 2월 18일에 보낸 공식 서한은 진정한 뜻의 선전포고였다. _ 주명철, <제2의 혁명> , p264/464

안으로는 반혁명세력, 밖으로는 오스트리아-프로이센과의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국회는 어떠한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기 위해 나서달라는 호소를, 샹퀼로트(Sans-culotte)를 중심으로 한 일단의 세력들은 튈르리 궁으로 쳐들어가면서 루이 16세의 폐위가 결정된다. 이제 프랑스는 혁명전쟁을 입헌군주국이 아닌 공화정으로 치를 것이었다. 그리고, 튈르리 궁을 지키던 스위스 용병대와의 전투를 통해 피맛을 알게 된 상퀼로트들의 등장은 바로 공포정의 서곡이기도 했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고 있음에도, 병력을 증강하자는 법에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루이 16세가 패배하기 바랐던 전쟁을 장기전으로 가져가거나 결국 승리할까봐 두려웠던 것일까? 설마. 그럼에도 우리는 전체의 이익보다 자기네 이익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상식을 깨는 능력이 있음을 깨닫는다. _ 주명철, <제2의 혁명> , p327/464

8월 10일, 왕의 권한을 정지시킨 것은 1791년 헌법을 부정하는 혁명이었다. 그 헌법에는 왕이 입법부를 해산할 수 있으며, 왕은 몇 가지 경우에 '사임 abdication'한다고 정했다. 다시 말해 국회는 왕을 정직 suspension시키거나 폐위 decheance할 권한이 없었다. 그렇다면 누가 먼저 헌법을 부정했던가? 지난 1년 동안 귀족주의자들은 양원제 헌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단원제 헌법을 거부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국민이 왕의 정직과 폐위를 요구했고, 마침내 무장투쟁을 통해 국회를 움직였다. 그래서 1792년 8월 10일은 한 달 뒤에 있을 '공화국 선포'의 첫 단추를 꿰는 날이었다. _ 주명철, <제2의 혁명> , p451/464

<제2의 혁명>을 통해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전제군주의 구심점이었던 루이16세는 입헌군주제의 중심이 될 수 있었는가. 앞에서는 입헌군주로의 개헌을 승인하고, 뒤에서는 끊임없이 반혁명 세력의 준동을 지원한 루이 16세의 모습에서 일본 '천황제'를 생각하게 된다. 과거 군국주의의 상징을 폐지하지 않고 상징적인 존재로나마 남아있는 현실에서 끊임없이 과거로 회귀하려는 일본 극우의 움직임이 사라지지 않을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또한, 이러한 움직임을 인정하고 점진적인 개혁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 우리는 라파예트 장군의 정치행적을 통해 답을 얻을 수 있을 듯하다.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을 잘 조절하여 중도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는 미국독립전쟁 영웅 라파예트의 몰락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시사점이 크다 여겨진다. 그리고, 중도적 개혁이 실패했을 때 상퀼로트로 대표되는 극좌세력이 대두 또한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었을까. 이제 프랑스 혁명은 '기요틴'과 함께 공포정으로 향해 나아갈 것이며, '우애'를 상징하는 빨강색은 이제부터 기요틴의 피로써 '우애 없음'을 보여주면서 프랑스를 물들이게 될 것이다...

1792년 6월 20일, 상퀼로트는 왕궁에 들어가 왕을 만나 붉은 프리기아 모자를 씌우고 자신들이 마시던 포도주를 나눠주면서 왕과 형제애를 나눴지만 기대했던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그들이 무기를 들고 궁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은 굉장히 큰 의미를 가진다. 평소 경멸하고 욕하던 권력자를 막상 마주하게 될 때, 연습했던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은 보통사람의 속성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자주 마주치게 되면 점점 거친 말까지 내뱉게 된다. 결과적으로 6월 20일은 앞으로 한 달 반쯤 뒤에 헌정을 중단시킬 사건을 향한 서막이었다. _ 주명철, <제2의 혁명> , p360/464

'기요틴'은 산업혁명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기계였다. 오늘날까지도 손재주 havilete는 사람마다 다른 결과를 낳지만, 산업화 이후의 과학기술 technologie은 규격화한 결과를 낳는다. 특별한 기술이 없는 사람이라도 조작하는 방법만 제대로 따르면 똑같은 결과를 얻는다. 한마디로 '기요틴'은 사형의 대량화요, 기계화다. _ 주명철, <제2의 혁명> , p188/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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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의 완성 - 입헌군주제 혁명을 완수하다 Liberte :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6
주명철 지음 / 여문책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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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의회는 무슨 업적을 남겼는가? 1791년 9월 30일 마지막 회의를 끝마친 시점에서 보면 제헌의회는 전대미문의 업적을 남겼다. 그들은 1789년 5월부터 아무도 예견하지 못한 일을 만들거나 거기에 휩쓸리면서 2년 5개월 동안 헌법을 제정했고, 그 헌법을 기초로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투표로써 입법의원들을 뽑아놓고 물러났던 것이다. 그들이 비록 구체제의 방식으로 뽑혀 전국신분회에 나갔고 개인별 투표를 전제로 모이지는 않았지만 '주권의 혁명'을 성취했다. _ 주명철, <헌법의 완성> , p373/380

주명철 교수의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중 제6권 <헌법의 완성 - 입헌군주제 혁명을 완성하다 Liberte>는 바스티유 사건 이후 2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 Divine Right of Kings)의 절대군주제 대신, 국왕을 '제1 공복'으로 규정한 입헌군주제의 프랑스를 만나게 된다. 그렇지만, 2년 남짓의 짧은 기간 동안 혁명기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결코 작지 않았다.

루이 16세는 왕당파의 지지를 받으면서 버티려고 노력했지만 절대군주로서의 권위를 잃었다. 국회의 권력이 더욱 강해지는 데 비해, 그는 더욱 위축되었다. 그는 점점 자유를 구속받는 현실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어떻게든 혁명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파리에서 도주했다. 그러나 그는 24시간 만에 국경과 가까운 바렌에서 붙잡혔다... 그는 전국신분회가 175년 전처럼 군주를 위해 세금을 걷는 일에 동의해주기 바랐지만, 거기에 모인 제3신분 대표들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사태를 이끌어나갔다.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국민의 진정한 대표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들은 전국신분회의 전통적인 방식인 신분별 회의를 거부하고 세 신분이 한데 모여 의논하자고 주장했다. _ 주명철, <헌법의 완성> , p9/380

미국 독립전쟁 참전 등으로 인한 막대한 재정부담을 덜기 위해 소집한 삼부회(三部會)에서 본래 의도했던 증세(增稅) 대신 특권 폐지와 제3신분에 의해 주도되는 국회에게 입법권을 넘겨주는 과정과 이후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갈등은 혁명 세력과 반혁명 세력 모두에게 깊은 감정의 상처를 남겼다. 혁명 이후 절대군주제의 부활을 노렸던 루이 16세를 중심으로 한 세력과 영국식의 입헌군주제를 원하는 제3신분 사이의 치열한 다툼 끝에 루이 16세가 결국 도주하면서 건널 수 없는 다리를 건넌 듯 했다.

왕이 파리로 돌아간 뒤 여론은 더욱 들끓었다. 6월 말까지 국민에게 왕의 재판을 맡기자, 법원에 왕의 재판을 맡기자, 루이 16세를 폐위하자, 왕의 자격을 정지하고 섭정을 두자, 이렇게 의견이 분분했다. 그런데 팔레 루아얄에서는 몇몇 작가나 협회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제를 수립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에 대해 아직까지 큰 호응이 없었다. 특히 코르들리에 클럽은 공화제를 주장했다. 그들은 자코뱅 클럽에 대표를 보내 협조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의 무시당했고, 심지어 비난을 받기도 했다._ 주명철, <헌법의 완성> , p119/380

그럼에도 이들은 혁명을 인정하고, 왕을 존중하는 '적대적 공생관계'를 이어가며 결국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사실, 국회의원 전원이
루이 16세를 지속적으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제3신분을 중심으로 한 국회에서 설계하는 새로운 질서의 방향은 기본적으로 입헌군주제를 지향하고 있었으나, 루이 16세의 도주 사건 이후 분위기가 바뀌어 공화정을 주장하는 급진세력이 출현학는 계기가 마련되면서 변화가 생겨났다.

국회에서는 왕의 문제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왕의 신성성을 생각하는 방식에 따라 크게 극우파와 우파는 절대군주제를 지지하고, 중도우파와 중도좌파는 입헌군주제를 지지했다. 혁명이 급진화할수록 좌파에서 공화제를 주장하는 극좌파가 나타났다. _ 주명철, <헌법의 완성> , p132/380

사람들은 국회의 합동위원회에 "왕에게 신성성이 있는데 재판을 받아야 하는가?" 라고 물었지만, 르장드르는 그 질문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차라리 이렇게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일 왕에게 신성성이 있다면 국회는 무슨 권리로 왕의 자격을 정지시켰는가? 그것은 국회가 제정한 헌법의 원칙을 벗어난 것이 아닌가?" 르장드르는 국회가 원칙을 벗어난 이상, 왕은 인민의 재판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_ 주명철, <헌법의 완성> , p147/380

루이 16세의 도주사건으로 인해 분위기가 급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제헌의회는 입헌군주제라는 새로운 제도를 빠른 시일 내에 구체화할 필요에 쫓기고 있었다. 이런 다급함을 잘 알고 있던 루이 16세를 비롯한 절대왕정세력은 수세에 몰린 처지에서도 당당하게 제헌의회의 헌법을 제정하는 한 축으로 기능하면서, 국정운영의 파트너로 인정받았음을 우리는 <헌법의 완성>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정치적인 움직임으로 과연 대중들을 속일 수 있었을까?

국회에서는 헌법을 마무리하는 단계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7월 14일의 기념식에도 겨우 스물네 명의 대표만 참석시킨 채 현안문제를 다룬다고 바쁜 척했다. 그러나 민중은 그동안 희망을 안고 참았지만 생활이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몹시 분하게 여겼고, 급진적인 신문 발행인은 국회가 일부러 혁명의 다음 단계를 늦추려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_ 주명철, <헌법의 완성> , p111/380

왕과 왕비는 비록 튈르리 궁에 갇혀 있는 형국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숨도 크게 쉬지 않고 납작 엎드려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들 주위에 모이는 사람들은 항상 국내외 반혁명세력과 연계할 궁리를 하면서 상황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끌 수 있는 기회만 엿보았으니, 그들이 자기 패거리들과 함께 있을 때는 유쾌하고 오만한 태도로 궁 밖에 오가는 민중을 '개/돼지' 정도로 깔보고 가엾게 여겼음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들은 새로운 체제도 어차피 질서의 안정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파악했다. _ 주명철, <헌법의 완성> , p116/380

그렇지만, 이들의 이런 정치적인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일반 대중들은 이러한 '좌/우 야합(野合)'의 실체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혁명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인민의 삶과 생각보다 늦어지는 개혁의 움직임 등으로 제3신분 다수의 불만은 점차 커져가고 있음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이후 혁명이 입헌군주제의 수립에서 멈추지 않음을 알려주는 하나의 복선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들의 움직임은 국회를 구성하는 이들에게 주목을 받으면서 1789년의 혁명이 제3신분 중 어느 정도 성공한 부르주아(bourgeois)만의 공화정인가, 아니면 제3신분의 다수를 구성하는 데모스(demos)를 위한 혁명의 성격도 갖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앞으로 지켜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헌법은 제정되었으나, 이를 지켜내기 위한 프랑스의 혁명 전쟁은 다음권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인민은 왕국의 방방곡고에서 대대적으로 봉기해 도시를 둘러친 세관 울타리, 지방을 갈라놓은 그 울타리들을 무너뜨렸다. 소금세, 각종 소비세, 담배세, 입시세를 받던 세리들은 쫓겨났다. 사람들은 창고를 약탈했다. 식료품의 밀수가 도처에 성행했고 이성보다 폭력이 세상을 먼저 지배했다. _ 주명철, <헌법의 완성> , p270/380

1791년 초부터 수많은 단체와 우애관계를 맺은 코르들리에 클럽은 7월 8일의 회의에서 왕의 신성성에 대해 논의했다. 여러 사람이 연단에 올라가 왕의 신성성을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다. 왕도 죄를 지었으니 재판하고 벌을 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들은 왕이 도주하는 순간 신성성을 보장받지 못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의 도주는 자신을 왕으로 인정한 헌법에 공식적으로 반대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국회는 왕에게 신성성을 되찾아주고 그를 왕좌에 굳건히 앉히려고 노력혔다. 그리고 국회는 왕이 납치당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인민이 떠들기 시작하면서 국회의 노력은 실패했다. _ 주명철, <헌법의 완성> , p138/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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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8-22 07: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왕을 죽이는 것은 쉽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왕의 자리를 죽이는 것은 그 체제가 유지되어온 시간만큼 힘든거겠지요. 혁명을 일으키는 것보다 혁명 후 새로운 체제를 만드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만큼요. 이런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되어 왔는데 우리는 아직도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인간들이네요.

겨울호랑이 2022-08-22 08:42   좋아요 2 | URL
바람돌이님 말씀처럼 과거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있었던 많은 일들과 인물들이 기시감이 들 정도로 반복됨을 느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인류가 진보해왔다면, 과거의 성과들이 잊혀지거나 사라지지 않고 축적되어왔기 때문이라 여겨지네요... 인간은 그렇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인류와 문명은 그런 면에서 사회적 진화를 해 온 것은 아니었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바람돌이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1790 - 군대에 부는 혁명의 바람, 낭시 군사반란 Liberte :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4
주명철 지음 / 여문책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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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정치적 조건과 법은 새로운 갈등을 낳았으니, 헌법을 빨리 제정하면 혁명을 끝낼 수 있다고 믿는 사람보다 혁명을 더욱 철저히 해야 이제까지 이룬 성과를 지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더욱 자기 확신에 빠질 수 있었다. 여전히 파리와 지방에서는 민중이 봉기하여 크고 작은 소요사태를 일으켰고, 국경지대에서는 외국 군대가 침략할까봐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더욱이 파브라 후작의 음모에서 보았듯이 왕당파는 국내외에서 계속 일을 꾸며 혁명의 성과를 지우려 하고 있었으니, 1790년을 생각할 때 전국연맹제의 화합보다는 새로운 체제가 탄생하는 가운데 옛날부터 물려받은 재정적자와 새로운 문화조건 때문에 생기는 갈등을 더 강조해야 마땅할 것이다. _ 주명철, <1790> , p10/366

주명철 교수의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중 제4권 <1790 - 군대에 부는 혁명의 바람, 낭시 군사반란 Liberte>에서는 혁명(革命)이라는 급격한 변화가 가져온 혼란의 모습이 낭시 군사 반란을 통해 선명하게 그려진다. 저자는 본문을 통해 의문을 던진다.
'합법적으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 기관'인 군대에서 시민의 가치관은 여전히 유효한가. 왕의 백성으로서 한 명의 군인이었을 때는 제기되지 않았던 물음은 이제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이 구성원이 되면서 문제가 된다. 여기에 혁명을 지지하지만 역량이 부족한 병사들의 다수는 시민인 반면, 역량이 넘치지만 반혁명적인 성향인 장교단 등 지배계층의 이해가 충돌한 결과를 낭시군사반란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유용한 말, "민주 군대는 있어도 군대 안의 민주주의는 없다"라는 말을 1790년 프랑스의 왕의 군대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병사들은 민간인의 정치클럽에 드나들었고, 거기서 배운 정치생활을 병영으로 가지고 들어갔다. 그들은 일종의 의사결정기구인 위원회를 조직해서 자신들과 관련한 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결정한 뒤 장교들에게 그 결정대로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리하여 일사불란한 명령계통을 중시하는 군대의 기강이 무너졌다. _ 주명철, <1790> , p13/366

군인들의 불복종행위는 가장 큰 골칫거리입니다. 그런데 모든 장교직은 귀족과 특권층이 차지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혁명에 충성한다고 생각해야 합니까? 병사들은 어떻습니까? 병사들은 애국자입니다만 식견이 많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장교들은 식견이 많지만 애국자가 아닙니다. 이러니까 불행한 일이 발생합니다. _ 주명철, <1790> , p71/366

이러한 혼란의 배경에는 국회와 국왕을 지지하는 세력 간의 다툼이 자리한다. 루이 16세를 지지하는 우파와 보다 적극적인 공화정을 지지하는 좌파간의 대립은 여론전의 형태로 나타났고, 이러한 혼란 속에서 각자도생(各自圖生)하려는 움직임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자유롭게 의사를 개진하고 이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시민의 권리가, 공동체에서 유일하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무기를 들고 있는 집단인 군인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일까.

1790년에 국회가 모든 정치의 중심 역할을 하면서 의원들이 제정한 헌법, 법률, 명령이나 시행령을 왕에게 승인하고 시행하도록 요구하는 과정에서, 겉으로는 간청하는 형식을 취하지만 실제로는 강요하다시피 의지를 관철시키는 모습을 보면서, 왕당파는 왕의 지위가 낮아지고 점점 권력을 잃어가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왕을 지지하는 세력은 틈만 나면 국회와 그 지지세력에 반대하는 여론을 조성했다. 아직 혁명/반혁명의 구도가 어느 한편의 완전한 승리로 깨지기 전이었기 때문에 애국자 신문 못지않게 왕당파 신문도 반혁명의 분위기를 띄우는 데 한몫했다. _ 주명철, <1790> , p12/366

여론 전쟁이 낭시의 모든 불행의 원인이었다. 대부분의 주민은 현실에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몇몇 저명한 시민은 자신들이 겪을 손실을 전혀 계산하지 않았고 오직 국가의 행복만 생각하면서 국회가 제정한 법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 법은 사실상 오랫동안 억눌렸던 비참한 계급에게 유리했다. 이들은 그 법에 찬동했고, 그 법을 거부하는 사람들과 대립했다. 낭시의 주둔군도 분열과 무관할 수 없었고, 전국을 휩쓸던 혼란의 분위기에 말려들었다. _ 주명철, <1790> , p319/366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중 4번째 <1790>은 혁명의 과정에서 빚어진 혼란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서 질문을 받게 된다. 과연 변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추구해야할 가치가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의 방향성에도 불구하고 상황에 따라 가치의 적용이 제한될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러한 제약이 누군가에게는 부당하게 느껴질 수 있을 때, 우리 모두는 현실적인 한계를 인정할 수 있을까? 아니면, 혁명 자체를 부정하게 되는 것일까. 이러한 혼란상 속에서 서서히 반혁명의 움직임은 내부에서부터 일어나고 있었다...

한마디로 낭시에서는 반혁명이 시작되고 있었다. _ 주명철, <1790> , p318/366

새로운 헌법을 받아들인 낭시 시민들은 병사들이야말로 자신들이 공격당할 때 기꺼이 지켜줄 친구로 생각했다. 병사들은 지금 체제에서 자신을 시민과 같은 존재로 보기 시작하면서 이제 자유의 열매들을 따먹으려고 노력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규율을 어기는 잘못을 저지르면서 아주 분명한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고 아직 그 벌을 받지 않았다. 애국심에 불타는 병사들이 그 애국심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고통스럽지만 인정해야 한다. _ 주명철, <1790> , p321/366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반혁명은 혁명보다 더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기존질서 속에서 특권을 누리던 사람들은 조그만 변화에도 반발하며 더욱이 혁명이 시작되기 전부터 반혁명세력,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수구세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태초에 반혁명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뜻밖의 사건이 일어나고, 사람들은 그것을 혁명이라 했다. 그때부터 혁명이 아닌 것, 혁명에 저항하는 기존의 것을 반혁명이라 불렀다. 마치 새 체제가 생기면서 이미 존재하던 체제를 구체제라 부르듯이." _ 주명철, <1790> , p36/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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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2-08-18 2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이제 1권 들쳐볼까 하는데 정말 머나먼 길인 것 같습니다. 겨울호랑이님 리뷰 보니 책 말고 10권 다 리뷰 기다릴까봐요 ㅎㅎ 너무 재밌는데요 ㅎㅎ 이거 읽기 전에 <짧게 쓴 프랑스 혁명사> 가와노 겐지 지음 이 책을 먼저 읽는데 영 재미가 없어요ㅠㅠ

겨울호랑이 2022-08-18 22:00   좋아요 1 | URL
저자가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을 쓰던 시기가 마침 촛불혁명이 일어나던 시기이기도 하여 서문과 여러 곳에서 저자의 역사관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독자들에게 생생한 혁명의 모습을 전달하고자 하는 노력이 더해져서 우리에게 더욱 와닿는 작품이 되었다 여겨집니다. 저도 매우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만, 꼬마요정님께서 원하시는 시간 내에 리뷰를 다 쓰지 못할지도 모르겠네요...ㅜㅜ 이번에는 딴길로 새지 않도록 한 눈 안팔겠습니다... 꼬마요정님 감사합니다! 하루 마무리 잘 지으세요 ^^:)
 

이렇게 탄생한 국민제헌의회(Assemblee nationale constituante)가 행한 첫 번째 일은 국민 합의에 의한 세금 납부 원칙 공표였다. 프랑스는 세금으로 건설된 나라이며 납세를 할 때 그 사람은 비로소 프랑스의 국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조세 원칙은 실로 중대한 결정이었다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함락에 가담했던 시위대의 2/3가 생 앙투안 주민이었다. 그들의 싸움은 특권층에 대항해 수백 년간 이어온 민중 투쟁의 연장선 상에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의 도시 봉기와는 달리 이번에는 더 이상 절망 가득한 투쟁이 아닌 민중해방운동이었다. 특정 지배계급의 주도에 의해 휩쓸리는 그런 종류의 분노가 아니었다. 반란이라는 기본 형식에 민주주의가 마련한 새로운 방식의 평화적 사회 투쟁을 유기적으로 연계하여 민중의 열기는 전혀 새로운 모험을 향해 나아갔다.

앞에서 본 것처럼 궁중에서 시작되어 살롱으로 확대된 문화(혹은 문명)라는 개념은 문자를 매개로 공공의 장에 편입된 사람들 사이에서 공유되는 문화를 지칭하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다른 대륙의 ‘미개인’과 다를 바 없던 일반 대중은 문화인일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같은 정치적 사고 방식의 밑바탕에는 보편적인 교육 이상주의가 깔려 있었다. 엘리트들은 언젠가는 모든 미천한 군중이 완전한 시민권을 행사할 능력을 갖춘 사람으로 거듭나도록 학교 교육, 언론, 연극을 통해 가르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국가의 토대를 세우는 막중한 시기에 새로운 논쟁이 벌어졌다. 국가 지방 행정의 가장 기본 단위인 4만여 코뮌에 자율성을 얼마나 인정해 줄 것이냐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시에예스는 코뮌의 자율적 권한에 부정적 입장이었다. 자치권을 확보한 코뮌은 공화국 형태의 무수한 소국(小國)으로 변모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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