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는 조직 안에서 개인의 행위에 영향을 미치고 조정하는 기초적이고 보이지 않는 인프라를 구축한다. 제도는 과거로부터 계속 세대를 넘어 전달되면서 뒤이은 제도에 영향을 준다. 제도적 요소들은 사회적 기억과 인식 패턴에 연결되어 있다. 제도는 선호와 선택을 형성한다. 한 사회가 새로운 상황이나 도전에 직면했을 때, 기존의 제도적 요소는 가능한 반응의 범위를 좌우한다. 과거에서 전해져 온 제도는 새로운 상황에서 행위의 고정된 틀을 제공한다.

주요한 목표는 상향 유동성이 아니라 신사층, 군인, 상인 등의 출신 배경을 가진 엘리트들이 정부 내에서 제한적으로 순환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수험생 규모가 커지자 자격이 충분하고 잘 교육된 사회적 계급이 창출되어 소설 작가, 극작가, 의례 전문가, 족보학자, 의사, 법률 고문, 교사 등 다른 직업에서 일하게 되었다. 교육받은 지방 엘리트의 창출, 이들과 정부 인원의 사회적 순환은 후기 제국 사회의 사회적·경제적 발전의 열쇠가 되었다.

전반적으로 유교적인 통치 체계가 잘 작동했다는 사실은 중국 제도의 탁월한 생명력을 설명해 준다. 대체로 후기 제국 시기는 놀라운 공공복지, 안보, 안정을 보여주며, 특히 귀족들과 종교 세력이 수많은 전쟁을 벌였던 ‘암흑’의 중세나 초기 근대의 유럽과 비교할 때 그러했다. 그러나 후기 제국 통치자들의 자료와 자기 기술은 더 복잡한 현실을 다 반영하지 못하는 조화, 평화, 품위로 편향되었음을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의례와 자비를 강조했는데도 폭력은 제국 통치의 관행에서 항상적 요인이었다. 폭력은 국가의 행정기구에서뿐만 아니라 지방의 사회와 경제에도 여러 측면에서 체계적으로 내재되어 있었다.

청조의 핵심에는 경제를 활성화하고, 국경을 넘는 상호작용에 참여하고, 지방 통치를 위한 공간을 남기고, 사회에 가볍게 침투하는 제국 관료제를 유지하게 하는 일련의 효율적 제도가 있었다. 과거제는 상속받은 권리보다 성취한 자격을 바탕으로 엘리트들이 통치에 폭넓게 참여할 수 있게 했다.

청의 전성기는 평화와 사회적 질서, 물질적 화려함, 문화적 세련됨, 기술적 진보는 물론 영토 확장이 지속되던 시기였다. 청 제국은 만주, 몽골, 중국령 투르키스탄, 티베트, 중국 그리고 (뒤에 논의할) 조공 체제로 알려진 조정 방문 시스템 속에서 청의 우위를 승인하는 국가들에 대한 정치적 통제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청은 동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에서 군사작전을 계속해 영토 확장을 활발하게 추진했다. 18세기 중반까지 청은 러시아 제국과 잠재적으로는 대영 제국까지 포함하여 확장하는 유라시아 제국들에 견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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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경>과 청동기 명문의 마지막 부분은 살아 있는 자의 기원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언어적인 유사성이 발생한다. 우리가 살펴본 이런 취지의 글은 혼령들이 후손에게 전하는 말을 그대로 되풀이한 것이다. 이 주목할 만한 언어상의 일치에서 우리는 청동기의 명문과 <시경>의 초기 시가에서 의례적인 언어가 포함되어 있고, 일상생활에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대화는 거의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 P72

관중, 손자, 공자, 묵자, 장자, 맹자, 숫자 등의 사상가들은 그 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한다. 후대의 어떤 사상도 이들처럼 심오한 사상을 지닌 다양한 경향을 낳지 못하였다. 거의 모든 그럴듯한 주장들은 옹호자를 찾아냈으며, 그들은 모두 논리정연하였다. 묵자가 논리를 활용한 반면, <도덕경>의 다수 저자들의 목소리는 신비로운 시로읊어졌다. 이들 사상가들의 주장은 국가에 대한 봉사, 인간의 본성, 혼령의 존재, 음악의 장점 등의 측면에서 차이가 있었지만, 한 가지 점에서는 일치하였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다시 돌아가기를 바라던 이상적인 성왕(聖王)의 시대와는 전혀 다른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시대에 살았다는 것이다.  - P122

장안에 거주하건 투루판에 거주하건 제국의 주민들은 외구그이 영향에 대단히 개방적이던 중국적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 그들은 인도에서 수입된 종교를 진지하고 열렬히 신봉하였다. 수와 당의 황제들은 불교를 후원하였고, 측천무후처럼 불교를 이용하여 통치를 정당화하였다... 당제국의 시민들은 외국인과 교역하였으며, 또한 외국인과결혼하고 그들의 관습을 받아들였다. 당대 사람들은 외국의 예술, 음악, 유행으로 가득 찬 문화적 융합의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율령에 의해서 지배되는 세계에서 살았다.  - P265

왕조의 수명은 짧았지만, 여진은 중국사에 중대한 돌파구를 제공하였다. 여진의 통치하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은 중국인 학자들은 비한족 통치자에게서 관직을 받았으며, 자신들이 중국 문화의 대의(大義)를 발전시켰다고 생각하였다. 한족 군사의 숫자가 금나라 군대에서 여진족을 능가하였고, 남송의 장군은 1206년 화북의 한족들이금나라에 대해 봉기하지 않았을 때 몹시 실망하였다. 한족 출신의 문신관료들은 여진에게 중국식 통치방식과 중국을 모델로 한 관료제의 구상을 도와줌으로써 협력하였다.  - P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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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30 18: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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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30 19: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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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제국 : 중국 - 고대―1600
발레리 한센 지음, 신성곤 옮김 / 까치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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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극적인 성장 기간들 동안 중국은 통일되지 않은 상태였다. 변혁의 시대를 살았던 관찰자들은 모두 제국이 통합되지 않았던 것을 한탄하였다. 그리고 제국을 통일하기에 충분히 강력한 군주의 출현을 바랐다. 그들은 분열과 전쟁, 잇따른 혼란에서 얼마나 많은 활력(活力)이 비롯되었는지를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_ 발레리 한센, <열린 제국 : 중국 고대 - 1600>, p487

발레리 한센 (Valerie Hansen, 1958 ~ )은 <열린 제국 : 중국 고대 - 1600 The Open Empire : A History of China to 1600> 을 통해 한(漢)족이 수립한 제국(帝國)이 천명(天命)에 의한 정통성있는 국가인 반면, 주변 이민족에 의해 수립한 이른바 유목제국들은 혼란과 파괴만을 주었을 뿐이라는 한족 중심의 사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과연 중원을 지배한 유목제국들은 천명에 어긋나는 오랑캐에 불과했을까.

천명사상은 주나라의 상나라 정복 때에 등장하였지만, 후대 왕조교체의 틀 속에 교묘하게 편입되어 기원전 1세기에 사마천이 <사기>에서 이를 기록할 정도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천명은 신의 의지가 사건이 벌어진 이후에만 확인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사건을 신의 의지의 결과로 여기도록 만들어 주었다. _ 발레리 한센, <열린 제국 : 중국 고대 - 1600>, p59

저자는 <열린 제국>에서 시선을 아래로 돌린다. 왕조 중심의 중국사가 아닌 당대의 시대상에 초점을 맞춘 저자의 분석은 단편적으로만 접하던 생활상에 활력을 부여한다. 문학작품에 남겨진 언어와 유물에 대한 고고학적 분석을 통해 저자는 작품의 행간속에 담겨진 감정을 헤아리고, 생활상을 통해 문자로 표현되지 않은 분위기를 보다 생동감있게 전달한다. 이러한 저자의 노력으로 독자들은 단편적인 지식의 파편이 아닌 열리고 닫히는 시대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중국 전역의 집안에서 일어났음직한 이 대화는 가문에 대한 개인적인 의무 및 구원과 불교의 요구 사이의 갈등이라는 주요 주제를 보여준다. 안령수는 자신의 부모를 포함하여 모든 존재들을 구원받게 해주고 싶다고 주장함으로써 일체의 이기적인 동기를 부인한다. 공덕(功德)을 베푼다는 불교의 교리, 즉 누구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쌓은 공덕을 나누어줄 수 있다는 교리가 안령수가 펼친 주장의 근거였다. 비구든 비구니든 승려가 됨으로써 자신들이 쌓은 공덕을 자신들의 가족에게 베풀어줄 수 있고, 대신 가족들은 승려를 지원함으로써 공덕을 쌓을 수 있었다. _ 발레리 한센, <열린 제국 : 중국 고대 - 1600>, p198

유행에 민간함 여성들은 중앙 아시아풍의 착 달라붙는 옷을 입고 어깨까지 덮는 최신 유행의 숄을 착용하였다. 이러한 외출의 자유는 후세 상류층 여인의 규방 속 생활풍속과는 전혀 달랐다. 후세의 여인들은 걷기 어려울 정도로 발을 졸라매는 전족(纏足)을 해야 했고, 감히 집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당대의 그림을 보면 북방의 여인들이 누렸던, 상대적으로 강한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말을 탄 여인들은 매우 편안해보이고, 한 어머니는 딸에게 말의 고삐를 잡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_ 발레리 한센, <열린 제국 : 중국 고대 - 1600>, p251

이러한 이해의 기반 위에 독자들은 고대 상(商)으로부터 근대의 명(明)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팽창과 축소라는 호흡을 느낄 수 있다. 선진(先秦)시대의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사상은 크게 진나라의 법가(法家)에 의한 규율과 유가(儒家)에 의한 예(禮)로 정리되면서 국가 단위에서 법과 도덕의 틀을 형성한다.

진한 제국의 통치 400년 동안 중국 사회는 이후의 제국에서 나타날 윤곽이 대부분을 드러냈다. 제국시대는 다양한 계층 사회 사이의 이동 없이 교육받은 가문이 강력한 지주계층으로서 최정상을 점하였다. 한대의 시장경제와 이를 규제하는 정부의 역할 또한 유지되었다. 중대한 변화가 올 수 있는 하나의 영역은 바로 정신적인 측면이었고, 이 변화는 왕조의 붕괴 직후에 바로 찾아왔다. 유교와 도교를 양 축으로 하던 한대의 신앙세계는 새로운 외래 종교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_ 발레리 한센, <열린 제국 : 중국 고대 - 1600>, p184

이에 반해 개인적인 측면에서는 도가(道家) 사상이 중심이 되었다. 이후 서방으로부터 전파된 불교와 그리스도교 모두 도가의 용어 위에서 이해되면서, 본래의 종교와는 다르게 융합된 종교적 색채를 보여준다. 외래로부터 전래된 사상을 중국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은 '열린 제국'으로서의 면모를 가장 잘 드러내는 부분이다.

예수회는 가톨릭의 주요 개념과 교리를 번역하기 시작하면서 곧 문제에 부닥쳤다. 그들은 비기독교적인 함의를 내포하는 기존의 중국어 단어를 활용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사용할 것인지의 선택에 직면하게 되었다. 초기의 불교 신도들은 자신들의 종교사상을 표현하기 위해서 도교의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이 곤란에 대처하였다... 엄격한 일신교인 가톨릭은 중국에 존재하던 모든 종교적인 전통과 상충되었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가톨릭 교리를 자기들 멋대로 해석하였다. _ 발레리 한센, <열린 제국 : 중국 고대 - 1600>, p466

그렇지만, <연린 제국>에서 다루는 기간 내내 중국이 열려 있었던 것은 아니다. 크게는 유목민족에 의한 지배 시기, 한족이 지배하는 왕조에서도 중상(重商)주의를 주장하는 세력이 정권을 잡은 경우 외부와의 교역이 활성화되고 비단길이 열리는 등 열린 제국으로 기능했지만, 반대로 중농(重農)주의자들이 집권한 경우 제국은 장성과 강을 경계로 문을 닫아버리는 닫힌 제국이 되었음을 저자는 지적한다.

전매정책에 대한 논쟁에는 두 집단이 참여하였다. 한쪽은 대부(大夫)라고 불리는 새로운 전매정책의 입안자들이었고, 다른 쪽은 검소한 생활풍속과 자급자족적 경제체제가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비판적 지식인에 속하는 문학(文學) 집단이었다. 문학 집단은 독점의 폐해뿐만 아니라 중국 외의 국가들과 교역을 장려하는 정부의 정책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그는 정부관리가 교역을 금지시키고 전매정책을 폐지하여, 모든 사람들이 자급자족하는 보다 단순한 경제체제로 복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대부(大夫)는 정부의 교역정책을 열렬히 옹호하였다. _ 발레리 한센, <열린 제국 : 중국 고대 - 1600>, p163

왕안석의 신법(新法) 중 대부분은 화폐와 관련되어 있었다. 그는 정부의 모든 관리, 심지어 하급 관리가 이전에 받던 모든 종류의 급량(給糧)을 현금 봉록으로 대체하려고 하였다. 왕안석은 중국의 차와 티베트의 말을 교역하는 다마(茶馬) 무역을 관장하는 시역무(市易務)라는 새로운 관료기구를 창설하였다. 상인들이 대거 이 관서에 관리로 충원되었으며, 관리들은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는가를 기준으로 승진하였다. _ 발레리 한센, <열린 제국 : 중국 고대 - 1600>, p325

이런 관점에서 저자는 중국인들이 말하는 이른바 이민족에 의한 굴욕의 시기가 오히려 중국문명에 있어서는 하나의 혁신이며 도약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분열과 대립의 시기 동안 세계의 선진국이었던 중국이 안정의 시기를 거치며 오히려 서서히 침몰해가는 것은 이러한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이같이 <열린 제국 : 중국 고대 - 1600>는 중국인이 아닌 외부의 시선에서 바라본 객관적인 중국사라 생각된다.

전통시대 중국에서 흔히 보이는 현상이지만, 분열은 사람들에게 혁신을 강요한다. 이 시기 동안 도교의 연금술사들은 새로운 처방전과 약초를 실험하였다. 또한 대담한 불교 구법승들과 상인들은 비단길과 바닷길을 개척하여, 이를 가로질러 빈번히 중앙 아시아, 인도, 동남 아시아로 여행하였다. _ 발레리 한센, <열린 제국 : 중국 고대 -1600>, p230

중국은 명대를 통해서 번영과 성장을 누렸다. 이전 시기와 비교해보면 제국의 경제적 팽창은 전례 없던 것이었다. 그러나 1600년에 중국은 더이상 세계의 선진국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중국의 그늘에 가려졌던 유럽이 중국을 앞지르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_ 발레리 한센, <열린 제국 : 중국 고대 - 1600>, p480

글의 마지막은 이 책을 읽으며 알게 된 한 작품을 소개하는 것으로 갈무리한다. 중국에 가서 거래하는 조선상인의 모습이 담긴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조선시대의 또다른 면을 엿볼 수 있다...

<노걸대(老乞大)>는 말을 팔러 베이징에 갔던 한 무리의 한국인들의 여행을 자세히 묘사한 회화책이다. 비중국인을 위한 언어교재로 1400년 이후에 쓰인 이 책은 한글-중국어 두 언어가 병기된 판본으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p470)... <노걸대>를 보면 지폐가 없어도 화폐경제가 순조롭게 기능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한국인들은 모든 거래에서 은을 사용함으로써 현금판매를 하였다. 그들이 상품을 가져왔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다른 상품과 바꾼다는 것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다. _ 발레리 한센, <열린 제국 : 중국 고대 - 1600>, p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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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3-06-30 1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의의 뒷모습이네요. 연의의 여름이 건강하고 즐겁기를 바라요!

겨울호랑이 2023-06-30 11:0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자목련님께서도 건강한 여름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

거리의화가 2023-06-30 14: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덕분에 이 책 도서관에서 상호대차로 빌렸어요. 요즘은 내부자가 아닌 외부자의 입장에서 본 역사를 여러 모로 주목하게 되는 듯 합니다. 안 그래도 중국사 읽기를 진행하고 있는 관계로 도움이 될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23-06-30 15:3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저는 왕조 중심의 역사에서 벗어나 중국인과 중국 문화에 초점을 맞춘 다른 매력있는 중국사로 읽었습니다. 거리의화가님께서도 좋은 독서 시간 되세요! ^^:)

그레이스 2023-06-30 18:22   좋아요 1 | URL
우리 동네 도서관에도 있는지 찾아봐야겠어요^^
그런데 까치거면 집에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드네요 ㅋ
 

당시의 자료만 보면 나보니두스는 바빌론 신전의 조직과 경제적 구조를 개혁하고, 이라크 남부에서 지중해로 이어지는 중요한 사막 무역로를 확보한 성공적인 통치자로 평가할 수 있다. 한편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이 바빌론을 정복한 뒤,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기 위해 편향적으로 작성된 기록에는 매우 다른 평가가 실려 있다. 그에 따르면 나보니두스는 무례하고 건방진 자로서 마르두크와 바빌론 주민들을 크게 모욕했기 때문에 고결한 키루스가 이 사악한 자를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크세르크세스가 오래전부터 지속되어 온 에산길라 신전의 사회적·경제적 조직을 와해하고, 신을 섬기는 자들의 권리를 보호하지 않고, 신전공동체의 큰 매력인 오랜 특권을 박탈함으로써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무너뜨린 것은 분명하다. 아시리아 왕들을 좌절시켰던 바빌론의 도시 엘리트들이 장악한 종교적·정치적 권력은 종언을 고했다.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귀족 세력이 와해되면서 페르시아 통치에 대한 바빌론의 오랜 저항은 완전히 무너졌다.

만약 바빌론을 외형적으로는 보수적이며 전통적 특권을 사수하려는 엘리트들이 지배하는 사회로 규정한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바빌로니아의 문화적·인종적 용광로는 시골 지역이었다. 아히캄, 아히카르와 같은 포로 출신들은 사업 기록에 점토판을 활용하거나 아람어 문자를 수용하는 등 새로운 고향 및 이웃의 문화를 받아들이려 했다.

쐐기문자 문화는 에산길라 및 바빌로니아의 다른 신전들에서 살아남았지만, 점차 의례·주술·의식 및 천문학의 용도로만 쓰이게 되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알려진 쐐기문자 텍스트는 천체의 움직임에 대한 관찰 보고서인데, 이는 미래에 대한 신의 설계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했다. 바빌론에서 알려진 가장 마지막 텍스트는 서기 74년에 쓰인 것이고, 우루크의 경우는 몇 년 후인 서기 79년이다.

《바빌론 탈무드》는 서기 3~5세기 사이 이라크 남부와 사산제국 지역에서 유대교 학자들에 의해 편집되었는데, 바빌론이라는 이름은 바빌론 도시뿐 아니라 바빌로니아 전역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 지역은 ‘순수한 혈통’으로 여겨졌으며, 이곳의 유대인은 별다른 확인 없이 통혼이 가능하다고 인정되었다. 만다교 서책과 마찬가지로 《바빌론 탈무드》는 고대 바빌론의 징조와 의학 및 주술 지식을 보존하고 있다. 이것들은 모두 지식 전수의 통로가 되었다. 한때 철저하게 통제되던 바빌론의 관측천문학과 수리천문학은 이제 고대 세계 전역으로 전파되어 각광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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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
김호동 지음 / 사계절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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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의 봉기는 19세기 중반 청제국이 처했던 상황, 또 그러한 상황을 가져온 세계사적인 변화와 연관시킬 때 비로소 왜 그러한 일이 일어났으며 또 어떠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봉기의 가장 결정적인 기폭제는 결국 1862년 섬감 陝甘 지역에서 일어난 회민 봉기의 성공과 그로 인한 청조의 권위붕괴가 가져다 준 충격이었다(p134)... 1864년 신강 무슬림 봉기는 태평천국운동, 섬감의 회민 봉기 등이 표상하는 청조체제의 근본적인 동요 속에서 일어난 현상으로서, 이러한 변화들은 결국 동아시아가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던 변화들이다. _ 김호동,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 p135

김호동 (金浩東, 1954 ~ )교수의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 Revolution and its failure in modern Central Asia>는 19세기 중반 오늘날 신장 지역에서 약 10년 간 독립국가를 만들었던 신강 무슬림 봉기와 야쿱 벡(Jacob Beg, 1820 ~ 1877)의 카쉬가리아 왕국의 성립과 멸망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분석한 책이다. 약 10여 년에 불과한 이 짧은 시기가 갖는 역사적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다시 청 제국의 일부가 된 신강을 내지와 마찬가지로 '성 省'으로 편입되고 중국의 '불가분할적' 영토의 일부로 바뀌는 조치들이 취해지기 시작했다. 과거와 같이 일리 장군을 필두로 각급 대신 大臣들이 관할하는 군사적 지배, 하킴을 비롯한 현지의 벡 관리들을 활용하는 간접적 지배는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곧이어 청조 말기 내지에서 일어난 혼란으로 말미암아 많은 수의 한인 漢人들이 신강으로 이주하기 시작해, 이를 통해 점진적이지만 확고한 '중국화'가 진행되어갔다. _ 김호동,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 p343

저자는 본문에서 무슬림 봉기와 야쿱 벡과의 전쟁 전후 청나라의 대(對)신장 지역에 대한 정책이 전면적으로 달라졌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전까지 청나라는 지방 귀족의 자치권을 인정해주고 느슨한 형태의 지배를 실시해왔다. 이러한 형태의 간접 지배 결과 중앙정부는 끝없이 많은 돈을 제국의 안정을 위해 쏟아부어야 했으며, 적지 않은 군대의 주둔도 불가피했다. 그렇지만, 민중의 입장에서 이러한 형태의 구조는 수탈자의 증가에 불과했기에 이에 대한 반발이 1864년 무슬림들의 무장봉기로 이어지게 되었다. 또한, 간접 지배층 역시 상황에 따라 언제든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 수 있었기에 1864~77년의 혼란이 마무리 된 후 지배형태는 직접 지배 형태로 변화될 수밖에 없었다.

1864년 무슬림 봉기가 있기 전 신강에 있는 청조 관리들이 봉착해 있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경비부족이었다. 매년 150만량 이상을 내지 각성 各省으로부터 보조받지 않으면 안 되는 실정이었으나 1840년대 이후 청조를 위기에 몰아넣은 크고 작은 사건들은 보조금의 지급을 어렵게 만들었다. _ 김호동,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 p71

무함마드 카쉬미리의 <승전서 勝戰書>에 의하면 혁명이 일어나기 전 무슬림 농민들에게 부과된 과도한 세금, 특히 청조 관리 -> 통사 通事 -> 무슬림 벡 -> 농민들에게로 내려가면서 그 액수가 점점 더 불어났던 폐습 弊習을 지적하고 이로 인해 가족들이 이산하고 '고향'(vatan)을 버리고 타지로 도주할 수밖에 없었던 비참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_ 김호동,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 p96

19세기 후반의 신장 지역의 한(漢)화가 이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해당 지역의 무슬림 세력과 종교적인 권위는 쇠퇴하고 근대적인 민족(民族)문제가 본격적으로 제시되었다는 점에서 저자는 이 시기를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시기로 판단한다. 오늘날 우리가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신장-위구르' 지역명 역시 이러한 민족국가 개념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리라.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을 통해 독자들은 신장 지역의 근현대사 단면을 볼 수 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신장 위구르 지역 주민에 대한 각종 탄압과 대규모 한족 이주 문제의 기원이 이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과 함께 과거 이 전쟁이 영국-러시아 간의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의 지역전 성격을 띄고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당시 야쿱 벡 정권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던 영국과는 대조적으로 그 정권이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이해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여 그 세력 확장에 대해 일리점령으로 대응했던 러시아 정부로서는 청군에 대한 식량판매를 통해 경제적/정치적 이익을 노리려 했던 것은 아마 당연한 결정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_ 김호동,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 p309

글의 마지막은 야쿱 벡의 카쉬가리아 왕국의 마지막을 소개하는 것으로 갈무리하려고 한다. 한 지도자의 외교적 판단이 어떻게 국가의 명운을 좌우하는지 동투르키스탄의 아픈 역사가 잘 보여준다...

조직적인 훈련과 신식장비로 무장한 3만 명 이상의 야쿱 벡 군대가 그렇게 쉽게 궤산된 직접적인 원인에는 야쿱 벡 자신의 결정적인 실책이 있었다. 그는 무슬림 국가의 존립을 위한 최상의 방책이 청과의 군사적 대결이 아니라 외교적 협상에 있다고 보았고 이를 위해 자신의 특사를 런던으로 파견했다. 그는 무슬림 국가의 존속을 희망했던 영국측의 중재노력에 기대를 걸었고 청의 종주권을 인정할 용의도 있음을 밝혔다. 따라서 그 같은 협상을 원만히 타결시키기 위해 가능하면 전선에서 청군과 충돌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함으로써 휘하 군대에 대해 청군에게 발포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좌종당의 군대는 투르판으로 밀려내려왔고, 야쿱 벡의 발포금지 명령으로 아무런 대응책도 취할 수 없었던 무슬림 군대의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어버렸다. _ 김호동,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 p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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