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설들에서 눈에 띈 것은 불확실성에 대한 충만한 감각이었는데, 마오는 "사회주의가 승리할지 자본주의가 승리할지는 아직 진정으로 결정되지 않았다"라는 문제에 대해 경고했다. 그는 계급투쟁이 사회주의하에서도 오랫동안 계속되어야 할 것이고, 혁명이 활성화되고 강화되어야만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집단화에 대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당은 끈질기게 대규모로 군사화된 인민공사와 집단 식당을 밀어붙였는데, 이는 더 생산적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공산주의의 약속을 실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대약진의 즉각적인 결과는 끔찍한 자산의 낭비와 소름 끼치는 생명의 파괴였지만, 매우 중요한 장기적 영향도 남겼다. 기층 수준에서 촌민들이 스스로 기근에서 살아남고 생존을 위해 싸우도록 방치되었다. 공산당은 빈곤을 없애고 굶주림을 막겠다는 사회주의 국가의 약속을 지키는 데 완전히 실패했다.

그 이름과 달리 문화대혁명은 전혀 문화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우귀사신牛鬼蛇神을 쓸어버리고’,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을 끝까지 수행’하는 것을 목표로 한 폭력적이고 혁명적인 대중운동이었다. 문화대혁명의 공인된 목표는 ‘일체를 타도(打倒一切)’하고 ‘전면 내전’全面內戰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마오는 대약진의 비극으로부터 다른 지도자들과 같은 결론을 끌어내지 않았다. 그는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의 근본 원인을 반역자, 사보타주하는 사람, 노동 인민들에 대한 자본주의적 억압의 복귀 등으로 보았고, 적극적이고 폭력적인 혁명으로 회귀할 것을 주장했다. 문화대혁명은 중국 문화를 바꾸는 것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마오가 자신과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것으로 의심한 주요 간부들을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비록 대약진보다는 자산과 인명 피해가 적었지만 문화대혁명은 중국 사회 전체에 아주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단기적으로는 물론 정치적 불안정과 경제 정책에서의 좌충우돌로 경제가 성장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후퇴했고, 상품과 서비스를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정부 기관의 능력을 퇴보시켰다.

중앙집권화된 국가는 배타적인 정치제도인 당-국가에 기초하기도 했다. 당-국가는 통제를 행하고 자원의 추출로부터 혜택을 받도록 공산당의 권력을 보장했다. 일당제하에서 국가의 중앙집권화는 특히 기반시설, 교육, 복지 등 부분적 성취를 가능하게 했지만, 착취적 정치제도하에서 발전은 국가와 국가의 자원 추출을 장악하려는 공산당 내부의 라이벌 분파들의 내분을 부추겼기 때문에 허약하고 불안정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첫 30년 동안 공산당이 무척 새로웠던 엘리트들과 함께 새로운 사회제도를 만들어내고 안정화할 수 없었다는 관찰에서 비롯되었다.
51 그 대신 공산당은 오랫동안 권력과 자원을 두고 경쟁하는 여러 불안정한 연합에 의존해야 했다. 마오주의는 국가와 정치 체계의 혁명을 의도했지만, 실패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토지 개혁은 아마도 공산당의 가장 중요한 사회정치적 목표였을 것이다. 토지의 재분배로 좀 더 평등한 사회가 만들어지고 농촌의 빈곤과 경제적 불평등이 제거될 것이었다. 그러나 공산당은 농촌에 대한 통제를 확립하고 중국의 거대한 농업 생산으로부터 세수를 증대시키는 것과 같은 다른 목표들도 추구했다.

토지 개혁으로 토지가 좀 더 평등하게 분배되었지만, 농업 소득을 더 균등하게 분배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토지 개혁 이후 농촌 인구의 57% 이상을 차지하는 더 가난한 농민들이 중국 토지의 거의 절반을 소유하게 되었지만, 부농의 땅이 평균적으로 빈농 소유 땅의 두 배에 이르는 경우가 많았다.

토지 개혁은 더 공정한 토지 분배를 달성하는 농촌 사회 개혁을 넘어서서 다른 정치적 목표들도 성취했다. 국가와 농촌 사회의 관계 변화가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토지 개혁으로 이전에 징세 담당자에게 보고되지 않았던 토지들이 측정되고 평가되었다.

호구 제도는 정부가 국내 이주를 규제하고 통제하게 했는데, 농촌에서 도시 지역 이주나 소도시에서 대도시 이주를 막았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반대 방향의 이주를 장려하기도 했다. 농촌 주민들이 도시에 들어와서 도시 거주자들을 위해 마련된 보조금으로 혜택을 보는 것을 방지하려면 그들이 도시에 진입할 권리를 제한해야 했다.

종합적으로 보아 호구 제도는 새 정부가 수립한 가장 중심적인 제도의 하나였다. 호구 제도는 인구통계적 개입의 강력한 도구일 뿐 아니라, 부족한 자원과 혜택에 대한 접근을 거주를 기반으로 규제하면서 1950년대에 도시의 구역들을 관리하는 핵심이었다.

중국 사회의 개조에서 또 하나의 핵심적 순간은 소수민족 주민들을 분류하는 체계가 채택되고 실행되었을 때였다. 사회 개조와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을 위해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통일된 다민족 국가로 구축하는 것은 중요한 기획이었다.

농촌의 배급은 일반적으로 도시 지역보다 훨씬 적었다. 도시 지역은 국가로부터 보조를 받았지만, 농촌 사회는 스스로 자원과 노동에 의지해야만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30년 후 마오가 죽을 때까지 재생의 희망은 철저하게 망가졌다. 문화혁명은 새로운 중국을 만들려는 노력이 혼란, 내부 투쟁, 당혹감, 고립 그리고 파괴 속에서 극적으로 끝나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첫 30년의 역사는 열망과 배신, 새로운 시작과 경착륙, 실험과 실패의 역사다.

공산주의는 역사 발전의 법칙을 통해 나타날 이성적인 체제였다. 사회주의는 그러한 유토피아로 가는 길에 있는 이행적 단계였다. 이 단계에서 공산당은 전위로서 사회에 대한 권력을 독점하고, 민주집중제로 불리는 새로운 제도적 질서로 통치했다.

특정 집단들로부터는 지지를 얻었을지 몰라도 혁명 직전까지도 공산당은 폭넓은 지지와 수용을 얻지 못했다.
근본적인 정당성의 부재는 처음부터 공산당 통치의 특징이었다.

당 기구는 새로운 국가의 핵심에 있었다. 당이 혁명 기간에 군대를 통제했던 것처럼, 새로운 민간 행정 기구를 만들고 통제했던 것은 당이었다. 정부의 모든 층위에서 의사결정의 권력은 공산당 손에 있었다.

정부와 당은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구별된 채로 남아 있었다. 당은 지방 사회에 스스로를 주입하고 지방 사회와 깊은 상호작용을 했다. 당은 또한 마오주의적인 정치적 전망과 손상된 국가를 위한 회복의 기획을 제시함으로써 성공적으로 국민 대부분의 추종을 확보했다.

한반도에서 미 제국주의와 싸운다는 결정과 내부 계급투쟁 선언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었다. 전쟁은 토지 개혁을 가속화하고 농촌 경제에서 더 많은 자원을 추출해야 한다는 훨씬 더 큰 압력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러므로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은 경제 정책의 변경을 이끌었다.

공산당에 정치 학습, 고백, 비판을 통한 지식인의 재교육이 사상 개조의 유일한 목표가 아니었다. 당은 개인의 배경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저장함으로써 문화 영역에 통제력을 확보하는 데에도 관심이 많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국주의의 외부적 압력 외에 군벌의 내부 위기가 중국의 미래를 빼앗고 있었다. 군벌은 중앙 국가로부터 성이나 지방의 지도자들에게 군사 지휘권이 이양됨으로써 권력을 획득한 자율적 군사 지도자들이었다. 청 말부터 점진적으로 시작된 중앙 권력의 분산은 민간 질서의 동요와 지방 사회의 군사화를 가져왔다. 이것은 민국 시대에 중요한 사회적 결과를 가져와서 폭넓은 군사와 폭력의 문화가 자리 잡아 사회를 형성하고 나라를 뒤흔들었다.

1911년 이후 처음으로 중국은 다시 단일한 중심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것은 ‘대원수’大元帥 장제스의 일인 통치하에 있는 일당 정부였다. 이러한 성취가 널리 존경받고 소중하게 여겨졌지만, 많은 경우 견고한 지역과 성의 권력은 표면상으로만 참여했을 뿐 제거되지 않았다. 중앙정부에 대한 세금 지불을 거부하는 성들이 있었다. 국가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는 여전히 제한적이었고 정부는 나라의 많은 부분에 대해 불확실한 장악력만 가지고 있었다. 장제스의 지도력 역시 확고한 것과 거리가 멀었고 계속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 그를 반대하는 주요한 원인은 개인적 권력 증대에 대한 경계심과 난징의 중앙집권화 요구에 대한 공포였다.

두 가지 서로 다르면서 경쟁하는 구상이 작용했다. 첫째는 국가의 통제와 민간 부문에 대한 지원을 결합한 민족 경제의 발전을 지향하는 왕징웨이와 쑹즈원의 경제 정책이었다. 이 계획은 농촌 부문의 소득을 증대함으로써 공업 상품에 대한 국내 시장을 발전시키려는 것이었다. 이는 국가의 통제와 계획을 수반했지만 민간 기업에 성장할 공간을 주는 경제발전 전망에 기초했다.

1930년대 후반 일본의 진출에 점점 더 위협을 느끼면서 중국의 국가는 경제에서 더 큰 역할을 맡고 좀 더 직접적이고 개입주의적인 간섭을 하려고 계획했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마오 시대 중국의 특징이 될 계획경제’의 시작을 포착할 수 있다.46 이러한 국면에서 자본가들은 사회나 정부에서 어떤 역할도 부여받지 못했고, 장제스 치하의 당은 반자본주의적인 상태로 남아 있었다. 장제스는 그의 경력 전체에서 중국 도시 지역의 은행가와 상인들의 다양한 조직을 엄격하게 통제했다

1928년의 중국 재통일은 현실보다는 희망이었다. 많은 지역이 (변경지역의 군벌이 통제하는 곳들과 같이) 느슨하게 통합되어 있거나 (조약항이나 공산당이 도망가서 중앙정부에 대한 저항의 은닉처를 만든 반란 지역과 같이) 국민당이 직접 통제하지 못했다. 중요하지만 서로 다른 발전이 조약항과 공산당 지역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외국인들이 관리하던 조약항에서는 도시적이고 코즈모폴리턴적인 문화와 현대적 공업이 역동적으로 계속 확장되었다.

관동군은 만주국을 개발하고 통치하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모범 사회’를 건설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관동군의 지도에 따라 새로운 제도들이 만들어졌다. ‘군사 파시즘’적 요소와 위계, 복종, 존중과 같은 유교적 규범의 조합이라고 하는 것이 이러한 제도들에 대한 가장 적절한 묘사일 것이다. 이를 주도한 것이 국가가 후원하는 대중 조직인 협화회協和會였다. 중앙과 지방 사회의 중재자로서 협화회는 관료, 교사, 그리고 사회의 중요한 구성원들을 모두 각각의 기관에서 새로운 국가의 시책을 실행하는 데 참여시켰다. 만주국 국가는 각각의 집단이 국가 안에서 정해진 장소와 명확하게 규정된 기능을 가지는 조합주의적 체계를 만들고자 했다. 동시에 개인의 권리는 무시되었고, 저항은 독재적이고 종종 잔혹하기까지 한 조치로 진압되었다.

이 점에서는 민국 시대에 뚜렷한 변화가 나타났다. 더 분명한 국민 정체성의 감각이 생겨났다. 국민은 국방과 국가 건설의 맥락에서 형성되었다. 또한 외국의 침략에 대항해 국가를 동원하려는 계속된 노력으로 구체화되었다. 국가 건설에 내재된 이러한 재현의 과정 혹은 국민을 규정하는 과정은 ‘중국’을 의미 있고, 실체적이며, 개인적인 개념으로 만들었다.

혁명 만들기, 전쟁, 민족주의 등으로 형성된 이러한 혼란스러운 환경에서 중국 정부 제도의 목표와 구조는 모든 지역과 질서를 특징짓는 중요하고도 보편적인 변화를 겪었다. 이 시기에 국가의 강화를 향한 상당히 뚜렷한 발전이 있었다. 군벌로 시작해서 국민당으로 끝난 서로 다른 행정부에 사회와 경제에 대한 통제의 강화는 독립을 유지하고 경제발전을 추구하는 전제 조건이 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전쟁보다 훨씬 전에 시작되었지만, 일본에 저항하는 동안 중요한 동력을 얻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국주의의 외부적 압력 외에 군벌의 내부 위기가 중국의 미래를 빼앗고 있었다. 군벌은 중앙 국가로부터 성이나 지방의 지도자들에게 군사 지휘권이 이양됨으로써 권력을 획득한 자율적 군사 지도자들이었다. 청 말부터 점진적으로 시작된 중앙 권력의 분산은 민간 질서의 동요와 지방 사회의 군사화를 가져왔다. 이것은 민국 시대에 중요한 사회적 결과를 가져와서 폭넓은 군사와 폭력의 문화가 자리 잡아 사회를 형성하고 나라를 뒤흔들었다.

중국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영감을 준 것은 마르크스주의라기보다는 레닌주의였다.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이 초기 공산주의자 대부분이 원래 민족주의자였다는 점이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의 국제주의적 신조와 그것을 이은 레닌주의적 변형의 관점에서 보면 역설적으로 보이지만, 중국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무엇보다도 구국에 관심이 있었다. 이 점을 인식하는 것은 뒤이은 전개와 중국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의 최종적 형태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되고, 특히 왜 마르크스의 독창적인 철학적 사상보다 소련 혁명의 실용적 원칙과 조직이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관심을 끌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1930년대 후반 일본의 진출에 점점 더 위협을 느끼면서 중국의 국가는 경제에서 더 큰 역할을 맡고 좀 더 직접적이고 개입주의적인 간섭을 하려고 계획했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마오 시대 중국의 특징이 될 계획경제’의 시작을 포착할 수 있다. 이러한 국면에서 자본가들은 사회나 정부에서 어떤 역할도 부여받지 못했고, 장제스 치하의 당은 반자본주의적인 상태로 남아 있었다. 장제스는 그의 경력 전체에서 중국 도시 지역의 은행가와 상인들의 다양한 조직을 엄격하게 통제했다.

1928년의 중국 재통일은 현실보다는 희망이었다. 많은 지역이 (변경지역의 군벌이 통제하는 곳들과 같이) 느슨하게 통합되어 있거나 (조약항이나 공산당이 도망가서 중앙정부에 대한 저항의 은닉처를 만든 반란 지역과 같이) 국민당이 직접 통제하지 못했다. 중요하지만 서로 다른 발전이 조약항과 공산당 지역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외국인들이 관리하던 조약항에서는 도시적이고 코즈모폴리턴적인 문화와 현대적 공업이 역동적으로 계속 확장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