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 않다. 바로 시씨(柴氏)가 어린아이로 하여금 천하를 주관하게 하니 많은 사람들이 마음으로 붙지 않은 연고로 말미암은 것이다. 너와 광의는 모두 내가 낳았으니 너의 뒤로는 마땅히 그 동생에게 자리를 전해 주어라. 사해는 아주 넓어서 어른인 군주를 세울 수 있는 것은 사직의 복이다."

조보가 말하였다. "폐하께서 말씀 하시는 것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하늘과 땅과 사람과 신의 복입니다. 이는 다른 연고가 없고, 방진(方鎭)이 지나치게 무거워서 임금은 약하고 신하가 강하기 때문일 뿐입니다. 지금 이를 잘 다스리고자 한다면 오직 조금씩 그들의 권한을 빼앗고 그들이 가진 전량(錢糧)을 제한하며 그들이 가진 정예의 군사를 거둔다면 천하는 스스로 편안해 집니다."

황제가 말하였다."경 같은 사람이야 정말로 그러하겠지만 가령 휘하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부귀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인데, 어느 날 황포(黃袍)를 그대의 몸에 덮어준다면 그대가 비록하지 않으려한다고 하여도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석수신 등이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신 같은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여기까지에 생각이 이르지 못하였으니 오직 폐하께서 애달프고 긍휼히 여기시어 살 수 있는 길을 지시하여 주십시오."

여진국(女眞國)에서 사자를 파견하여 명마를 공헌(貢獻)했다. 여진의 선조는 옛날 숙신(肅愼, 흑룡강, 송화강 일대) 땅에 거주하였는데, 원위(元魏, 북위)시기에 물길(勿吉)이라 불렸고, 수대(隋代)에 이르러 호칭을 고쳐서 말갈(靺鞨)이라고 하였으며, 당(唐) 초기에는 흑수부(黑水部)와 속말부(粟末部) 두 부(部)를 가지고 있었으며, 뒤에 가서 속말부가 대단히 강해져서 발해국(渤海國)으로 호칭하였고 흑수부는 이어서 그들에게 속하여 불리어졌다.

오대 이래로 절도사는 친하게 따르는 사람을 진장(鎭將)으로 보임하여 현령(縣令)과 항례(抗禮)하였지만, 무릇 공사(公事)는 오로지 주(州)에만 보내지니 현의 관리는 직책을 잃었다. 이에 이르러 다시 현으로 통할하니 진장이 주관하는 곳은 향촌(鄕邨)에는 미치지 못하고 다만 곽내(郭內)에서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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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100년 전쟁 - 정착민 식민주의와 저항의 역사, 1917-2017
라시드 할리디 지음, 유강은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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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쟁은 다른 식민주의 군사 행동들과 비슷한 전형적인 특징이 많기는 하지만, 또한 아주 특수한 특징도 있다. 대단히 특별한 식민주의 기획인 시온주의 운동에 의해, 이 운동을 위해 벌어진 전쟁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해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외부 열강의 대대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수행된 이 식민주의 충돌이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두 민족 집단, 두 국민의 민족 대결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특징의 밑바탕에서 그 점을 더욱 증폭시킨 요인은 유대인, 그리고 또한 많은 기독교인에게 역사적인 이스라엘 땅과 성경의 연관성을 불러일으키는 심대한 공명 resonance이다. _ 라시드 할리디,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 p25

라시드 할리디(Rashid Khalidi, 1948 ~ )의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_정착민 식민주의와 저항의 역사, 1917-2017 The Hundred Years' War on Palestine: A History of Settler Colonialism and Resistance, 1917-2017>은 뉴스를 통해 익숙하지만 문제의 전반을 잘 알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관점을 보여준다. 그 새로운 관점은 바로 '팔레스타인의 관점'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두 충돌(1948년 전쟁, 수에즈 전쟁) 모두 거의 오로지 이스라엘군과 이웃 아랍 국가 군대들의 대결이라는 측면에서만 바라본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이 자기 땅을 빼앗긴 것을 묵인하지 않고 저항하자, 자국 문제에 정신이 팔린 채 이스라엘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의지나 각오가 전혀 없었던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과의 대결로 이끌려 들어갔고, 이 대결은 걷잡을 수 없이 고조되었다. _ 라시드 할리디,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 p144

많은 경우 우리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아랍 제국들과 이스라엘의 전쟁', '이슬람과 유대교의 종교 갈등'이라는 관점으로부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회복'이라는 구약의 실현이라는 종교적인 해석에 이르는 인식의 범위를 넘지 않은 수준에서 바라본다. 그렇지만, 정작 그 땅에서 오랜 기간 살아왔고 살았던 이들에 대한 관심은 우리에게 없었다. 유대 전쟁 이후 멸망한 유대왕국과 디아스포라를 형성했던 유대인들의 불행한 처지, 그 속에서도 탈무드와 토라를 통해 신앙과 민족 정체성을 놓지 않고 있었던 이들이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겪으면서 결국 선조 아브라함이 약속받았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하늘의 별들처럼 번성하는 약속의 실현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는 것이 주된 관점이다.

자연스럽게 약속된 땅에 살고 있었던 이들은 악(惡)으로 낙인찍혔고, 수많은 블레셋인들이 삼손의 나귀턱뼈로 죽임을 당해도, 무너진 건물로 수십 명이 함께 죽어도 되는 사람들처럼 생각되었다. 그런 우리들이 팔레스타인인들은 골리앗이며, 작고 약한 다윗, 이스라엘인들을 괴롭히는 사악한 존재라는 관점에서 사태를 보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구도일 것이다. 그렇지만,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은 우리에게 뒤바뀐 골리앗과 다윗의 존재를 알려준다.

1차 인피타다가 시작된 순간부터 1996년 말까지 이스라엘 군대와 무장 정착민들이 팔레스타인인 1,422명을 죽였다. 거의 이틀에 한 명 꼴로 죽인 셈이다. 그 중에 20퍼센트 이상인 294명이 16세 이하의 미성년자였다. 같은 기간에 이스라엘인 175명이 팔레스타인인들 손에 죽었는데, 그중 86명이 군인이나 경찰이었다. 8 대 1 이라는 사망자 비율은 상징적인데, 미국의 언론 보도를 아무리 열심히 보아도 좀처럼 알기 어려운 수치다. _ 라시드 할리디,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 p250

하마스와 이슬람지하드의 로켓들은 2014년 이스라엘이 발사한 4만 9,000발 이상의 전차포와 대포처럼 크고 치명적인 탄두가 없었다. 하마스나 그 동맹 세력은 보통 소련이 설계한 122밀리미터 그래드 Grad나 카추샤 Katyusha 로켓을 발사했는데, 약 20킬로그램이나 약 30킬로그램 탄두를 사용했다... 하마스와 동맹 세력이 발사한 미사일이 빗줄기처럼 쏟아진 것은 분명 사거리 안에 있는 민간인들에게 유력한 심리적 효력을 발휘했겠지만, 이 무기들은 위력이 크지 않았다. _ 라시드 할리디,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 p325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은 팔레스타인 문제의 본질이 식민주의 기획인 시온주의에 있음을 말한다. 시온주의의 해악은 여러 민족들의 공존의 땅이었던 팔레스타인에서 배타적 민족주의를 힘으로 관철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구조를 확대재생산시켜왔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빚어진 대량학살의 피해자들이라는 엄청난 비극에 대한 세계인들의 미안함과 공감이 배경으로 자리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팔레스타인 문제에 관해서는 더는 피해자일 수 없는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에 의해 지금도 지워지고 있는 팔레스타인과 이에 저항하는 이들이 겪는 비극 속에서 적어도 인간사에서는 영원한 선(善)도, 영원한 악(惡)도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와 함께, 과연 우리 또한 뒤바뀐 골리앗과 다윗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운가하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일제 치하에서 남한대토벌작전, 경신대참변 등을 겪으며 민간인 학살의 참상을 비난하지만, 그 후 베트남 전쟁에서 가해자로서 우리가 저질렀던 민간인 학살의 만행은 팔레스타인 문제와 여기에 담긴 의미가 결코 먼 땅에서 벌어지는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1차)인티파다는 시위와 나란히 파업, 불매 운동, 세금 납부 거부에서부터 다른 창의적인 형태의 시민 불복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전술을 활용했다. 항의는 때로 폭력 사태로 바뀌었는데, 대개 비무장 시위대나 돌멩이를 던지는 젊은이들에게 군인들이 실탄과 고무총탄을 발사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불이 붙었다. 하지만 봉기는 비무장, 비폭력적인 방식이 압도했다. 그 덕분에 거리에서 항의하는 젊은이들 외에도 사회의 여러 부문을 결집시키는 한편 점령당한 팔레스타인 사회 전체가 현재 상태에 반대하고 인티파다를 지지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_ 라시드 할리디,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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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3-11-14 1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과거 성경의 다윗이 그랬듯 지금의 다윗이 지혜롭게 방법을 찾을 수 있길 희망합니다. ^^

겨울호랑이 2023-11-14 20:56   좋아요 1 | URL
약자에 대한 무도한 공격과 탄압은 역풍이 되어 결국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이스라엘 자신이 역사로부터 가장 많이 실감할텐데 자신들만은 예외라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이 지금처럼 이어진다고 하더라도 결국 수렁에 빠지는 것은 이스라엘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NamGiKim 2023-11-14 19: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집속탄 및 백린탄으로 팔레스타인을 폭격하는 것을 보며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전 하워드 진이나 에드워드 사이드처럼 행동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팔레스타인 연대 집회에 참여했는데, 어린 아이들까지 집회에 나와 팔레스타인 깃발을 흔드는 모습에 울컥했죠. 누가봐도 이스라엘의 폭력은 75년간 지속된 즉, 아메리카 백인 이주민들이 원주민들에게 보인 폭력과 같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오랜만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23-11-14 21:00   좋아요 1 | URL
팔레스타인 연대 집회에 참석하셨군요. 학업을 하는 중에도 현실에서 눈돌리지 않고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참 멋있어 보입니다. 예전에는 무능하고 게으른 아랍국가들과 현명한 유대민족의 구도 속에서 문제를 바라보던 우리의 인식이 바뀌어가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점차 나은 미래가 만들어지리라 생각합니다. NamGiKim님 감사합니다. ^^:)

레삭매냐 2023-11-14 19: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느 기사에서 보니 네 차례에 걸친 중동전쟁
을 통해 영국과 소련이 제국 해체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분석을 다루었더군요.

그리고 지금 일방적으로 이스라엘 편만 드는
어느 제국의 몰락을 예견하기도 했구요.

북한과 더불어 유엔 결의를 가장 무시하고
아랑곳하지 않는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인데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아무런 제재도 취하지
않네요.

우크라이나 전쟁도 어떻게 하지 못하면서
가자 전쟁까지 휘말려 들게 된다면 정말 답
이 없다는 이야기도요.
처음부터 이란을 배제한 채, 현상유지를 위
한 줄타기가 결국 오늘의 사태를 불러 왔다
는 이야기도 설득력 있게 다가왔습니다.

우크라이나와는 전혀 다른 이중 잣대를 제
시하는 미국의 모습에서 제국의 몰락이 보
이는 것 같습니다.

겨울호랑이 2023-11-14 21:07   좋아요 1 | URL
자국의 이익을 위해 가장 먼저 시오니즘과 손을 잡은 국가가 영국이라고 하더군요. 그런 영국도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여겨져 이스라엘로부터 팽당하고, 뒤이어 미국과 소련이 영국의 자리를 대신했다는 이야기가 본문에서 다뤄집니다. 그런 면에서 미국 또한 이스라엘의 쓸모가 될 수 없다면, 영국과 소련의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겠지요. 동시에 일어나는 두 개의 전쟁에 대처하지 못하는 미국 앞에 우크라이나 전쟁과 팔레스타인 분쟁이 터진 상황에서 대만과 한반도의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은 레산매냐님께서 말씀하신 제국의 한계를 보여주는 단면이라 여겨집니다...
 

"내가 듣건대 임금 노릇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천자는 몸을 억조의 많은 사람 위에 두고서 만약에 잘 다스려서 그 도를 얻는다면 이 지위는 진실로 높겠지만, 진실로 혹 어거(馭車)하지 못하면 필부(匹夫)가 되기를 구하여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내가 근심하는 것이다."

"왕을 일으키고 성(姓)을 바꾸는 것은 비록 천명(天命)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사람의 마음에 연계한 것이다. 너희들이 각기 군사를 엄하게 경계할 수 있고, 표략(剽掠)하지 않아서 도성(都城)의 인심이 편안하게 된다면 사방에서도 자연스레 안정될 것이고, 너희들도 역시 함께 부귀함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당(唐) 이래로 번진(藩鎭)의 폐단을 거울삼아서 경수법(更戍法)을 세우고 금려(禁旅, 금군)를 나누어 파견하여 변성(邊城)을 지키게 하고 길을 왕래하며 부지런하고 고생스러운 것을 익히게 하며 수고로움과 고단함을 고르게 하였다.?

이로부터 장수는 그 군사를 오로지할 수 없었고 사졸들은 교만하고 게으름에 이르지 아니하였으니, 모두 조보의 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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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열차분야지도>는 하늘 지도이고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땅 지도입니다. 두 지도는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습니다. 제작 시기가 <천상열차분야지도>는 1395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1402년입니다. 1392년에 조선이 건국되었으니 나라를 세우자마자 하늘 지도와 세계지도를 만든 셈이죠. 이 세계지도도 새 왕조 건국과 관련되어 있겠죠? 그래서 이름도 거창하고 심오하게 지었나 봅니다.

이처럼 <대동여지도>는 중국이나 일본의 옛 지도에 없는 부호를 사용해 중요한 시설을 표시했습니다. 세계가 <대동여지도>를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부호를 사용한 것은 현대 지도의 개념과 같거든요.

이렇듯 <대동여지도>는 전국적으로 진보나 봉수와 같은 군사 시설, 관아나 읍 같은 행정 관청뿐만 아니라 창고, 역참, 목장 등 경제 시설까지 지도 하나에 모두 담았습니다. 부호를 사용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죠.

김정호 이전에 이미 조선에는 정교한 지도를 만들어온 전통이 있었습니다. 최한기, 최성환, 신헌 같은 실력자들은 김정호의 지도 제작을 적극 후원했습니다. 김정호의 업적은 이런 토대 위에서 찬란히 빛난 겁니다. 마치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탄 난쟁이처럼 말입니다.

위도와 경도를 쓰면서 전국 모든 지역을 같은 척도로 한데 합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김정호가 <대동여지도>에서 한 일이 바로 이겁니다. 큰 지도, 작은 지도를 ‘똑같은 척도’로 그리는 거죠. 거기에다가 지도를 합칠 때 서양 기하학의 비례 방법을 썼습니다. 그래서 모든 읍과 도시 지도들이 더욱 정확하게 배치되었죠. 김정호는 <대동여지도>에서 정상기의 백리척을 적용하고, 신경준의 방안 도법을 정리한 데 이어서 서양 기하학 방법을 세련되게 응용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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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은 중국에 심오한 변화를 가져왔다. 모든 범위에 걸친 새로운 제도가 수립되어 성장과 번영의 기초를 놓았다. 인상적으로 높은 GDP 성장률과 함께 성공적인 시장 이행이 이루어졌다. 평균 소득이 극적으로 증가하면서 수억의 중국인이 빈곤에서 벗어났다. 이 과정은 현대 중국의 장기적 전개에서 완전히 새로운 국면이었다.

중국은 분명히 마오 시대의 중국을 닮지 않게 되었고, 전통적인 소련 스타일의 공산주의 국가와는 더욱 멀어졌다. 그러나 완전한 자유 시장 경제를 가진 자유민주주의적 체제와 가까워지지도 않았다. 이것이 ‘중국 수수께끼’라고 불리는 것이다. 경제는 재산권의 분명한 보호 없이 호황을 이루었고, 국유기업은 계속 국가 경제의 핵심 영역을 지배했다. 일부 분야에서 점점 증가하는 자유와 국가 통제 이완이 공산당이 국가와 사회를 확고하게 통제한다는 사실과 충돌했다.

1980년대 말 무렵이 되자 흔히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라고 불렸던 시장 자유화와 국가의 계획을 결합한 모델의 한계가 분명해졌다. 경제는 과열되었고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이션은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났다. 사회적 긴장이 정치적 저항을 자극했다.

중심점은 경제성장이었고 두 개의 기본점은 ‘개혁개방’과 덩샤오핑이 1978년에 내세웠던 ‘4가지 기본 원칙’,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 공산당의 지도,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이었다. 이 기본 원칙들은 ‘개혁’과 ‘개방’이라는 기치 아래에서 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규정하는 것이었다.

1989년의 베이징 학생운동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래 정치적 변화와 민주주의를 위한 가장 큰 규모의 자발적 저항운동이었다. 학생들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요구했지만, 그들의 저항은 높은 인플레이션과 만연한 관료 부패 그리고 학문 분야의 경제적 전망 악화 등과 같이 새로 생겨난 사회 문제에 대한 직접적 반응이기도 했다.

1989년 학생운동 진압의 이와 같은 결과들은 ‘두 전선에서의 강함’(兩手硬)이라는 구호에 요약되어 있는 1989년 이후 핵심적 정치 전략의 두 가지 일반적 성격과 연관되어 있다. 두 전선은 경제 개혁과 정치적 안정을 의미하고, 해결책은 두 가지 모두에 대해 견고하게 유지하는 것이었다. 톈안먼과 1989년은 개혁의 후퇴를 상징하게 되지 않았고, 영구적으로 중국 개혁의 궤적을 변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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