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속자치통감 006 속자치통감 6
필원 | 권중달 / 도서출판 삼화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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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10월 정해일(13일)에 조서를 내렸다.
"옛날 서한(西漢)시대에는 이민 가운데 경술에 밝은 자를 찾으면서 회계를 하는사람과 더불어 하도록 하였는데, 현(縣)에서는 차례대로 먹을 것을 이어 주었으니, 대개 현명한 사람을 우대하는 도리였다. 국가는 해마다 공부를 열어서 뛰어난 인재를 널리 찾는데 사방에 있는 인사들은 멀다고 이르지 아니할 사람이 없어야하나 오는 도중에 길이 멀어 막히고 노자와 쓸 것이 혹 모자라니 짐은 아주 걱정한다. 지금 서천(西川)·산남(山南)·형호(荊, 호북) 등의 길에 나서는 거인들은 왕래하는 데 증권(證券)을 공급하라."

식정효(植廷曉, ? ~971)가 곽숭악에게 말하였다.
"북쪽의 군대는 자리를 마는 기세를 타고 있는데, 그 칼끝은 감당할 수 없으며, 우리 군사들은비록 많지만 그러나 모두 다치고 난 나머지 사람이어서 지금은 채찍을 몰아 앞으로 나아갈 수없으니 역시 앉아서 그 죽음만을 받아야 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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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듣건대 도곡은 아들을 교훈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도병이 어떻게 합격할 수 있었겠는가?" 급히 중서에 명령을 내려서 복시(覆試)를 치게 하였더니 도병은 다시 합격하였다. 이어서 조서를 내렸다. "조사(造士)의 선발은 사사로운 은혜를 심는 것이 아니니 세록(世祿)을 가진 집안에서는 의당 평소의 업무를 돈독하게 하라. 예컨대 당여(黨與)를 만들어서 자못 용납하고 가만히 입김을 불어 넣는 일이 있다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문형(文衡)이라는 공기(公器)가 어찌 의당 사사롭게 남용되어야 하겠는가? 지금부터 거인(擧人)은 무릇 녹봉을 받아먹는 집안과 관계가 있다면 중서에 위탁하여 복시(覆試)를 치루라."

"길에서는 모두가 말하기를 호부시랑 맹공신(孟拱宸)의 집을 교방사(敎坊使)인 원승진(袁承進)에게 준다고 합니다. 옛날에 고조(高祖)가 무용수인 안질노(安叱奴)에게 벼슬을 주어 산기시랑으로 삼으려 하여 온 조정에서 모두 비웃었습니다. 지금 비록 원승진을 시랑으로 삼지는 않았지만 시랑이 살 집을 하사하시니 일이 역시 비슷합니다." 남당의 주군은 백(帛)을 하사하여 그가 용감하게 말한 것을 나타냈지만 그러나 끝내 고칠 수는 없었다.

소사온은 야율색진(耶律色珍, 斜軫)을 천거하여 나라를 경륜(經綸)할 재주를 가졌다고 하자 요주가 말하였다. "짐은 그를 아는데, 안일하게 호탕하기만 하니 어떻게 얽어 매여 굴복시키겠소!" 소사온이 말하였다.
"밖으로는 안일하고 호탕하지만 중심은 아직 헤아릴 수 없습니다." 마침내 불러서 당시의 정치에 관하여 물었더니 가리키고 진술하는 것이 알맞고 절실하여 요주는 그를 그릇으로 중히 여겼으며, 즉시 절제(節制)서남면제군으로 명령하여 하동(河東)을 돕게 하였다.

국가는 고요한 것을 귀하게 여기는데, 천도(天道)에는 악이 가득 찼고 앞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험한 것을 믿는 나라인데 듣건대 이번 전역(戰役)은 부고에 있는 재물을 고갈시키고 백성들의 힘을 소진하며 충성스런 마음이 용약(踊躍)하여 각기 규유(窺?, 틈을 봐서 행동하다)를 갖고 있습니다. 전하여 지는 말에 ‘이웃 나라가 후해지면 군주는 엷어진다.’고 하였는데, 어찌 난가(?駕, 황제의 수레)를 돌려 도읍지로 돌아가는 것이 상당(上黨)에 군사를 주둔시키는 것과 같겠습니까! 여름에 그 보리를 거두고 가을 그 벼를 거두게 하고 역역(力役)의 징발을 느슨하시는 것이 탕평책입니다.

"벌목을 하는 데는 먼저 가지와 잎을 없애고 그 후에 뿌리를 빼앗는 것입니다. 지금 하동(河東)은 밖으로 거란의 도움을 받고 있으며 안으로는 사람과 호구가 부세를 내니 가만히 생각하건대 한 해가 지나고 몇 달이 지나도 떨어뜨릴 수 없을까 걱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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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은 불편부당에 이르는 것입니다. 인은 시은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은 약속을 지키며 언행이 일치하는 것을 말합니다. 의는 정무를 처리하면서 절제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불편부당하면 고르게 나눌 수 있고, 인자하면 보상을 받을 수 있고, 약속을 준수하면 신념을 굳게 할 수 있고, 의를 지키면 적정한 절제를 행할 수 있습니다. - P70

5미는 사람의 혈기를 충실케 하고, 색은 때로 경계하고 두렵게 하며, 5성은 정치의 잘잘못을 밝히고, 5의는 상하 · 존비 · 장유를 기록하는 것이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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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에 경사에 큰 눈이 내려서 황제는 강무전(講武殿)에 전장(?帳)을 설치하고 자초구(紫貂?)와 모자를 쓰고 일을 보았다. 홀연히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옷을 입은 것이 이와 같은데 몸으로는 오히려 한기를 느끼니 서쪽으로 정벌하는 장수들이 서리와 싸라기눈을 무릅쓰는 것을 생각하니 어떻게 이를 견디겠는가?" 바로 초구·모자를 벗어서 중서황문을 파견하여 이것을 싸가지고 역으로 달려가서 왕전빈에게 하사하게 하고 또 제장들에게 뜻이 두루 미칠 수 없는 것을 유시하였다.

황제는 몸소 검약함을 실천하여 항상 세탁한 옷을 입었고, 승여(乘輿)와 복장과 쓰는 것은 모두 질박하고 검소한 것을 숭상하였으며 침전에는 푸른 포(布)에 위렴(葦簾, 갈대로 된 발)을 둘렀으며, 궁위(宮?, 궁궐의 쪽문)에 있는 장막에는 무늬가 있는 장식을 없앴다.

"경은 재상인데 어찌하여 스스로 고생하는 것이 이와 같소?" 범질이 대답하였다. "신이 예전에 중서(中書)에 있었는데 문에는 사사롭게 아뢰는 일이 없었고, 더불어 술을 마시는 사람은 모두 가난하고 천했을 때의 친척이었으니 어찌 기명을 쓰겠습니까? 이에 따라서 마련해 두지 않았으며 힘이 미치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을해일(3일)에 왕전빈 등이 출발인사를 하자 숭덕전에서 연회를 베풀었으며, 황제가 그린 그림을 꺼내어 왕전빈 등에게 주고 이어서 말하였다 "무릇 성채(城寨)에서 이기고 나면 다만 그 기갑(器甲)·추량(芻糧)만을 적어놓고 돈과 비단은 남김없이 나누어 전사(戰士)들에게 주는데, 내가 얻고자 하는 바는 그 토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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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축일(14일)에 철기도장(鐵騎都將) 이회의(李懷義)·내반도지(內班都知) 조인수(趙仁璲)에게 명령하여 궁궐을 증수하게 하였는데, 이미 완성하고 나니 황제는 침전에 앉아서 여러 문을 활짝 열도록 명령하여 모두 단정하게 관통하며 넓게 하고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나의 마음과 같으니 조금이라도 삐뚤어지고 굽은 것이 있다면 사람들이 모두 이를 볼 것이다."

을미일(15일)에 비서랑(秘書郞)·직사관(直史館)인 관성(管城, 河南省 鄭州市) 사람 주한(周翰)이 말씀을 올렸다. "무릇 명장은 모두 사람 가운데 영웅인데 만약에 흠집을 지적하려고 한다면 누가 누(累)가 없겠습니까? 어느 날 신위(神位)를 제거하고 터럭을 불듯 다른 시대의 잘못을 찾아내서 옛 사람들의 악함을 소매를 떨치며 분노한 다는 것은 온당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신은 마음으로 의혹합니다." 회보하지 않았다.

고려국왕(高麗國王) 왕소(王昭, 925~975)가 사자 시찬(時贊) 등 파견하여 들어와서 공물을 바치는데, 바다를 건너면서 큰 바람을 만나서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90여 명이었으며 시찬은 겨우 죽음을 면하니, 조서를 내려서 그들을 위로하고 가엽게 여겼다.

황제는 일찍이 두의를 불러서 제서(制書)에 초를 잡게 하여, 원문(苑門)에 도착하였는데 두의는 황제가 안책(岸?)하고 발을 벗고 맨발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물러서서 나아가지 않으니 황제가 이 때문에 관대(冠帶)를 갖춘 다음에 불러 들어오게 하였다. 두의가 말하였다. "폐하께서 창업하시어 전통을 내려 주시는데 의당 예로써 천하를 다스려야 합니다." 황제가 얼굴을 고치고 그에게 사죄하였다. 이로부터 가까이 있는 신하를 대하면서 일찍이 관대를 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이달에 비로소 철전을 사용하고 한희재를 발탁하여 병부상서·근정전(勤政殿)학사로 하였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대부분 옛날 돈을 감추어 숨겨놓으니 옛날 돈은 더욱 적어지자 상고(商賈)들은 경계 밖으로 나가면서 번번이 철전 10개를 가지고 동전 하나로 바꾸었지만 관부에서는 금지 시킬 수가 없었으니 이로 인하여 그 편리함을 좇았다. 관리들은 녹봉을 늘렸으나 철전으로 이를 겸하게 하니 이로부터 물가가 더욱 비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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