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에 따르면 왕랑은 같은 해 11월에 죽었다. 이때는 제갈량의 1차 북벌이 실패로 끝나고 9개월이 지난 후였다. 왕랑이 같은 해 죽었다는 데에 착안해 제갈량의 독설을 듣고 죽은 것으로 바꾼 것이다. 소설 삼국지의 저자는 무슨 억하심정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왕랑을 두 번 죽였다. 소설 삼국지에서 자주 사용하는 수법이다.

공성전에서 성을 포위한 군대가 유리한 점은 식량 공급이다. 최악의 경우 성안의 식량이 바닥날 때까지 기다리면(지구전) 이길 수 있다. 그러나 촉군은 그럴 만한 식량이 없었다. 겨우 20일 만에 식량이 부족해진 것은 촉군의 전쟁 준비가 부족했거나 군량 보급이 여의치 않았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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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지방의 토착 세력이나 마찬가지겠지만 파촉의 토착 세력들도 자신들의 경제력을 축내고 물자를 다른 곳으로 가져가는 ‘강탈’ 행위를 싫어했다. 『화양국지』를 보면 파촉의 토착민들이 유비 사후 정치를 주도한 승상 제갈량과 제갈량의 후계자인 장완, 비위, 강유 가운데 유독 강유를 싫어했던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그보다 유비의 장점은 말수가 적었고, 아랫사람들을 잘 대해주었으며, 얼굴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인간관계에서 성공할 수 있는 장점을 갖춘 셈이다. 『논어 論語』에서는 말을 적게 할 것을 거듭 강조했다. 그래야 실수가 적고, 적을 덜 만들며, 남에게 호감을 준다. 그래서 그럴까? 호협 豪俠
, 지금으로 말하면 깡패 혹은 동네 건달들과도 잘 사귀었고, 건달들이 그에게 몰려들었다

반면 북조 계열인 수나라와 당나라 그리고 오대십국 가운데 북쪽의 정통 왕조인 오대를 계승한 송나라(북송)는 정신적 고향인 중원을 장악했기 때문에 정통성의 기준을 혈통보다 중원의 장악에 두었다.

남송시대에도 속지주의보다 속인주의를 정통성의 기준으로 삼으면서 다시 위나라보다 촉나라를 정통으로 간주하는 분위기가 생겼다. 이러한 시대적 저류는 주자학의 아버지 주희가 쓴 『통감강목 通鑑綱目
』에 반영되었다

위나라가 망하게 된 계기는 조예가 죽기 전에 어린 아들 조방을 보좌할 후견인을 잘못 정한 데 있었다. 조예는 본래 조조의 아들이었던 연왕 燕王 조우 曹宇
와 조휴의 아들 조조 曹肇
, 조진의 아들 조상에게 조방을 보좌하게 하고 사마의를 바깥으로 내보내 관중에 주둔하도록 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병이 들어 정신이 혼미해져 측근인 유방
劉放과 손자 孫資
의 말을 듣고 조우와 조조를 내치고 조상과 사마의에게 공동으로 조방을 돕도록 했다

손권이 말년에 군사적인 측면에서 고생한 것은 그의 무능 때문이라기보다 훌륭한 장군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적벽대전의 영웅 주유(175~210년)는 손권이 29세인 210년 36세에 세상을 떠났다. 삼분지계의 계책을 내놓은 모사이자 장군인 노숙(172~217년)은 손권의 나이 36세인 217년 46세로 타계했다. 형주를 점령한 여몽(178~219년)은 손권의 나이 38세인 219년 42세의 나이로 죽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숙을 명장이라고 평가하지 않지만, 형주의 분할을 두고 관우와 대치한 용기와 관우가 노숙의 군대를 쉽게 이기지 못한 것을 보면 군사적 재능이 있었다. 노숙을 제외한다고 해도 주유와 여몽이 너무 일찍 죽었다. 손권에게는 큰 손실이었다.

손권은 초기에는 정치를 잘했지만 말년으로 갈수록 실수를 거듭했다. 가장 중요한 실수는 태자 손화孫和와 동생 손패孫覇의 후계자 다툼을 수수방관한 것이다. 15-10의 계보에서 볼 수 있듯 본래 태자는 손등孫登이었으나 241년에 병들어 죽고 만다. 그러자 손화가 242년 태자가 되었다. 손화와 손패가 파당을 만들어 정쟁을 벌이자 손권은 손화를 태자의 자리에서 밀어내고 손패에게 자결 명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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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은 유비에게 충성스럽고 믿음직스러운 신하였지만 유비가 싫어하는 직언도 마다 않는 강직한 사람이었다. 황제나 왕, 상관들은 충성스러운 신하나 부하를 원하지만 자기에게 대놓고 간언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조자룡은 바로 그런 사람, 직설적이고 신랄한 직언을 아끼지 않은 충직한 사람이었다.

소설에서는 관우 및 장비의 살해와 관련된 주연, 반장, 마충, 부사인, 미방, 범강, 장달을 모두 죽였다(주연의 죽음은 84회에 나온다). 특히 관우의 아들인 관흥과 장비의 아들인 장포가 배신자인 부사인과 미방, 범강과 장달을 직접 죽여 아버지에게 제사를 지내고 원혼을 달랬다. 그러나 『삼국지』에 따르면 반장은 234년, 주연은 249년에 죽었다. 참고로 이릉 전투는 221년에 있었으니 반장과 주연은 이릉 전투 이후에도 살 만큼 살다 죽었음을 알 수 있다. 마충·부사인·미방·범강·장달이 언제 죽었는지는 기록이 없으나 이릉 전투에서 죽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조비와 제갈량뿐만 아니라 약간의 군사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촉한군의 군사 배치가 잘못되었음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유비의 무식이나 노망 때문이 아니었다. 지형상의 한계 때문이었다.
요약하면 촉한군은 길게 늘어선 군영 때문에 8만 대군의 병력을 집중하여 전투를 벌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게다가 장강 지형도를 보면 그런 군영들이 고립된 지형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군영을 목책으로 만들어 화공에 취약했다.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육손은 당연히 화공법으로 촉한의 군영을 동시에 공격했다.

한 학자는 이릉 전투가 끼친 영향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먼저 개와 고양이처럼 촉나라와 오나라가 싸우고 반목했지만 위나라의 강대함과 대비되는 촉나라의 쇠약, 오나라의 고립 때문에 두 나라는 감정을 버리고 도리어 연합해 위나라에 대항하는 구도가 만들어졌다. 두 번째로 오나라는 형주 방어에 성공하고 오나라와 촉나라의 연합을 통해 촉나라가 형주를 침입할 위험을 제거함으로써 위나라와의 싸움에 전념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오나라와 촉나라의 연합은 위나라와의 세력균형을 이루게 하여 삼국정립의 기틀을 마련했다.

부하를 위해 자기 목숨을 거는 지도자라니. 복수를 ‘사랑’하는 중국인들이 반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다. 이에 착안한 삼국지의 작가들은 상상의 나래를 펴서 유비가 관우와 장비의 복수를 감행했던 이유를 형제애에서 찾았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의형제였기에 피가 섞인 형제와 다름없다고. 게다가 의형제를 당연시하던 사회 분위기와 맞물려 이들의 상상력은 기정사실처럼 굳어졌다. 소설의 작가나 청중 혹은 독자들은 세 사람이 의형제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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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에 장비가 술을 많이 마시고 계략이 부족하다는 서술은 없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장비가 술을 많이 마시고 사고를 치며, 용맹하지만 머리는 부족한 인물로 묘사되었다. 이는 독자들과 청중들을 위해 장비의 이미지를 바꾼 것이다.

『삼국지/촉서』의 기록이 부족하여 통혼 계보만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은 위험하지만, 현재의 자료로는 촉나라 황실이 관우·장비·마초·제갈량의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은 것은 이들 후손들을 조상들처럼 촉나라 황실에 충성을 다하는 친위 세력으로 만들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오늘날 참고할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하지만, 장비의 자손들은 대부분 장비와 달리 무장이 아닌 문신으로 활약했음을 알 수 있다. 장비의 후손들이 문관, 관우·조운의 후손들이 무장으로 활동한 점을 비교하면 장비 역시 교양과 학식을 갖췄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점 때문에 장비의 딸들이 현모양처의 자질을 길러 황후에 임명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기록 이면에 감춰진 장비의 진면목이다.

요컨대 조조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달랐다. 선양이라는 정권 교체 방식이 만연한 시대에 조조는 상대적으로 존중되었지만, 선양과 찬탈이 터부시되던 송나라 이후에는 악인으로 낙인찍혔다.

한편으로 조조는 악인이어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전투에서 초반에는 지는 것처럼 묘사된다. 이때 독자와 청중들은 가슴 졸이며 조조가 지기를 바라지만 거의 대부분 이긴다. 앞에서 통계수치를 내본 것처럼 조조는 대부분의 전투에서 승리했고, 관도 전투처럼 접전을 벌였던 적도 있지만 대부분 손쉽게 일방적으로 이겼다. 그러나 소설 삼국지에서 조조가 처음부터 손쉽게 이겼다고 기록하면 독자와 청중들은 얼마나 허무하고 재미없을 것인가. 독자와 청중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서도 이러한 허구적인 내용을 추가해야 했다. 조조는 소설 삼국지의 흥행을 위해 왜곡되어야 했다.

무엇보다 시대 분위기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의 전근대사를 두 시기로 나누라면 당나라와 그 이전의 시기, 송나라와 그 이후의 시기로 나눈다. 이 두 시기는 확실히 다르다. 대체로 후자의 시기에는 수나라 때 창시된 과거제도가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당나라 시대까지 가문의 힘에 의해 출세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송나라 이후에는 기본적으로 과거에 합격해야 관리가 될 수 있었다. 따라서 서민들이 지배층에 대거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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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가 한중 일대에서 포교한 대상은 가난한 백성들이었지만 위나라에서는 지배층을 상대로 포교하면서 교리와 의식에 변화가 있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장로는 전투에서 패했지만 전쟁에서 이긴 셈이다. 오두미도의 교주였던 그에게는 넓은 땅을 차지하는 것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도교(오두미도)를 전파시키는 것이 중요했을 테니 말이다.

장비 등의 촉군이 무도군을 점령하면 그와 합류한 뒤 위수 상류로 진격하여 관중으로 쳐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장비 등의 군대가 무도군을 점령하지 못하고 후퇴하면서 북벌 시도는 막혔다. 유비는 한중군을 점령하고 조조가 직접 이끄는 군대를 처음으로 격파해 생애 최고의 승리를 맛보았으나, 절반의 승리였다. 장안과 관중을 점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한중군을 점령한 후 유비가 성도로 돌아온 것이 전략상 착오였다. 형주에서 북진하여 번성을 포위하고 있던 관우는 유비처럼 철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관우의 고립. 그 결과는 관우의 죽음이었다.

회남에 주둔하여 손권의 군대를 막고 있던 장요까지 불러들인 것을 보면 당시 관우의 위세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조조가 직접 관우와 싸우려고 했다. 조조의 맹장 5명 가운데 장합을 제외한 4명이 관우를 막기 위해 투입된 것이다. 조조가 관우의 북벌을 막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던 사실에서 관우의 번성·양양 공격은 단순한 영토 확장이 아니라 유비가 제갈량의 융중대 계획대로 추진한 북벌의 한 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익주와 형주에서 동시에 출정하는 전략 말이다.

손권은 조조와 유비 모두에게 결정적인 순간에 일격을 가했다. 그는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군대를 물리쳐 조조의 천하통일 야망을 무산시켰다. 또한 유비로부터 형주를 빼앗고 2인자인 관우를 죽임으로써 유비의 북벌 계획에 큰 타격을 주었다. 두 사람이 천하를 차지할 수 있는 기회를 손권이 날려버린 것이다. 손권은 두 사람(조조와 유비)의 천하통일 시도를 막는 동시에 자신의 지지기반을 공고히 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으로 형주를 점령함으로써 조조의 공격을 막아내기 좋은 자연의 방어벽인 장강도 확보했다.

『삼국지』에서 관우의 기사는 965자에 불과하다. 이렇듯 짧은 기록으로 관우를 제대로 평가하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현존 자료에 의지하여 관우를 평가하면, 그는 시기심이 강하고 남을 깔보는 성격이어서 적을 많이 만드는 스타일이었던 것 같다. 관우가 학문에 조예가 깊다는 학자 이미지는 말 그대로 이미지일 뿐이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도 있지만, 관우가 사후에 이렇게 추앙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전근대 중국 정부는 백성들이 믿는 종교를 국가권력 안으로 포섭하려고 했다. 조정은 불교의 승려나 도교의 도사들에게 관직을 주어 황제의 신하로 격하하는 작업을 꾸준히 벌였다. 관우는 점점 일반 백성들의 신앙 대상이 되어갔고, 국가 차원에서 그에게 보인 예우는 한편으로 ‘관우 신앙’을 통제하려는 시도였을지도 모른다.

산서상인들이 부를 축적하자 다른 지역 사람들은 산서상인들이 돈을 잘 버는 이유가 관우에게 제사를 지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너도나도 앞다투어 관우의 사당인 관제묘에서 제사 지내며 돈을 잘 벌게 해달라고 빌게 되었다. 이 덕에 관우는 산시성의 토착신에서 전국적인 재물의 신(財神)이 되었다.

관우가 반동탁연합군에 종군하는 동안 더운 술이 식기 전에 동탁의 부하 화웅의 목을 베었다는 이야기(5회)는 소설 초반부터 관우의 압도적인 용맹함을 보여주며 독자를 사로잡는데, 정작 『삼국지』에 따르면 화웅을 죽인 사람은 관우가 아니라 손견이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데워먹는 술, 즉 증류주(배갈, 소주)도 없었다. 증류주는 몽골이 중국을 지배하던 원나라 시대 아랍에서 중국으로 전파되었다.

『삼국지/관우전』에서는 관우가 안량을 참했다고 기록했지만 문추를 죽인 주체는 기록하지 않았다. 또 그렇게 조조의 휘하에서 공을 세우다가 유비가 원소 진영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으러 떠나는 도중에 5개의 관(五關)에서 자신을 막아서는 여섯 장수를 죽였다는 이야기(24~28회)도 사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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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01-14 1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삼국지를 정비석 작가의 6권 세트로 읽었어요. 열 권짜리가 길어서 나 나름대로 머리를 쓴 거죠. 히힛^^
좋은 독서 시간을 가지시길 응원합니다.

겨울호랑이 2023-01-14 14:17   좋아요 1 | URL
저도 소설 <삼국지>를 재밌게 읽었는데, 이번에 역사 <삼국지>와 소설 <삼국지>의 차이를 알게 되니, 소설 못지 않게 흥미롭게 읽히네요. 비가 제법 많이 오는 주말입니다. 페크님께서도 여유로운 주말 되세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