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즈키 시게루의 일본 현대사 2 - 중일 전쟁부터 태평양 전쟁 전반까지
미즈키 시게루 지음, 김진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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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참전 상이 군인이기도 한 <전원 옥쇄하라!> 의 작가 미즈키 시게루의 일본현대사. 2권에서는 중일전쟁의 교착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독-일-이 추축국 동맹과 태평양 전쟁의 개전이 그려진다. 진주만 공습 - 일본의 동남아시아 지역으로의 세력 확장 - 미드웨이 해전으로 이어지는 진행은 다른 역사 만화와 큰 차이가 없다. <미즈키 시게루의 일본현대사>가 다른 역사만화와 차이가 있다면 일본의 현대사에 맞물린 개인의 삶이 함께 서술된다는 점이다.

조금은 엉뚱한 학생이었던 시게루가 전황이 어려워 짐에 따라 강제 징집되고 동남아시아 전선으로 끌려가 겪는 고초는 일본 현대사의 불행이자 개인의 불행이라는 점을 독자들은 본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항공모함 4척이 격침되었던 미드웨이 패배가 사기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종전 때까지 일본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보듯 예나 지금이나 일반 대중들은 대의(大義)를 위한 프로파간다로 눈이 가리워져 있는 것은 아닐까. 여기에 더해 개인을 사선(死線)에 올려놓은 전쟁이라는 상황은 모든 사람을 평균화시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눕히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평소라면 다소 엉뚱한 천재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학생이 덜 떨어진 고문관으로만 인식된다면, 이는 전쟁의 또 다른 참혹함일 것이다. <미즈키 시레구의 일본 현대사 2>는 이런 점에서 다른 책들과는 다른 차별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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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의 역사 - 유라시아의 교차로 서울대학교 중앙유라시아연구소 교양 총서 2
제임스 A. 밀워드 지음, 김찬영.이광태 옮김 / 사계절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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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장의 발전을 촉진한 최초의 중앙 지도자는 사실상 장쩌민이나 덩샤오핑, 마오쩌둥도 아닌 건륭제였다. 18세기 중반 그는 황제로서의 권위를 이용하여 서쪽에 있는 '새로운 영토'의 대부분을 토착 지배자들의 자치적인 지배 아래에 있는 완충 지대로 남겨 두기보다는 이 지역을 개발하여 안정시키자고 주장했다.... 이같은 (강희제와 관료들, 지식인 계층간의) 논쟁은 19세기와 20세기에 다양한 형태로 다시 등장했다. 중국 내지에 기반을 둔 정권들은 신장의 불안, 신장의 국경에 대한 외국의 침입, 그리고 이로 인해 생겨난 압박감을 고려해 볼 때 과연 이 지역을 통치해야 하는가에 대한 딜레마를 늘 고민했기 때문이다. _ 제임스 A. 밀워드, <신장의 역사> , p414


 제임스 A. 밀워드 (James A. Millward)의 <신장의 역사 Eurasian Crossroads: A History of Xinjiang>은 고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신장(新疆) 지역사를 다룬 책으로 신장의 현대사에 특히 무게를 두었다. 책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현재 중국의 일부면서 동시에 위구르족에 대한 인권 문제로 국제적인 관심을 받는 신장 지역의 역사에서 오늘의 문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밀워드는 본문에서 오늘날 신장 지역에 대한 중국정부 정책의 기원을 청(淸)으로부터 찾는다.


 청(淸) 강희제(康熙帝, 1654 ~ 1722)는 준가르 복속 이후 이 지역을 결코 방치하지 않았다. 대신, 이 지역에 대한 집중적인 경제적 투자와 유교문화권 편입 노력이 행해지면서 '이슬람 유목 제국'이었던 신장 지역은 제국의 질서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이렇듯 강희제 이후 청조의 노력이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이슬람 문화권에 대한 일정 수준의 자치권을 보장한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 지역이 청 제국 내 편입되면서 눈에 띄게 경제적 발전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장 내 청의 통치 체제는 다양한 행정 체계를 갖추고 현지인에 의존했다는 점에서 영국의 인도 통치 및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통치 체제와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한 가지 눈에 띄는 예외를 제외하면 신장의 군정과 벡 체제 및 다른 행정 체제는 결코 절대적으로 공정하다거나 문명화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경제 발전이 지역의 반란을 억제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효율적인 방식으로 수십 년 동안 작동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이 되면 이 지역은 불붙기 직전의 마른 장작과 같은 위태로운 상태가 된다. _ 제임스 A. 밀워드, <신장의 역사> , p166


 <신장의 역사>에서 저자는 청 제국의 주요 정책이 오늘날의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책으로 계승되었음을 말한다. 제국주의(Imperialism)의 주변부가 아닌 제국(Empire)의 일부로서 신장을 바라보는 중앙정부에 대한 반감이 고조된다면, 그것은 이들 지역을 제국의 일부로 묶어주었던 사슬이 붕괴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책은 한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건륭제와 그 이후 청 황제들의 정책과 동일하다. 즉, 동부 지방의 인구 압력을 완화하고 변경의 안보를 강화하기 위해 신장에 중국인들을 정착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이 재정착 혹은 식민화 프로그램의 핵심은 중국의 변경 정책에서 오래된 기원을 갖는 군둔(軍屯)이었다. _ 제임스 A. 밀워드, <신장의 역사> , p356


 1990년대 중화인민공화국의 지도자들은 신장의 상황을 다시 평가하고 신장과 중국의 다른 지역 및 세계와의 통합을 재촉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이와 같은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1991년 소련의 해체였는데, 이로 인해 19세기 이래 신장에 대한 중국의 통치를 위협하던 국경 바로 너머에 있는 거대한 경쟁자가 제거되었다. 동시에 계속된 중국과 미국의 긴장은 신장과 중앙아시아의 석유/천연가스 매장지의 전략적 중요성을 높였다. 신흥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등장과 1980년대 이래 시작된 시장 사회주의에 대한 중국의 실험으로 인해 촉발된 폭발적인 경제 성장은 위구르 기업가들에게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주었다. 반면 1980년대 중국 전역에 걸쳐 상대적으로 국가의 통제가 이완되고 민주화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신장에서는 무슬림 민족 집단, 특히 위구르 족이 주도하는 시위와 소요가 늘어나고 심지어 무장 저항도 발생했다. _ 제임스 A. 밀워드, <신장의 역사> , p403


 이러한 판단은 고대 유목제국인 흉노(Huns)와 농경제국인 한(漢)이 서로를 바라보는 관점을 통해 뒷받침 될 수 있다. 유목 세력의 남하가 경제적 요인에 의한 것이었다면, 농경 세력의 북침은 안보 요인때문이었다. 만약, 자연환경이 척박한 신장 지역사람들에게 경제적 이익이 보장될 수 있고, 황하 지역의 한인들의 안전이 확보될 수 있다면 이들은 공생할 수 있었고, 전통적인 조공(朝貢)관계가 성립된 배경이 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한-흉노 투쟁의 기초가 되었던 두 가지 원동력이다. 우선 몽골과 중가리아에 있는 유목 세력은 식량과 세입을 위해 타림 분지와 투루판 분지를 이용했다. 다음으로 중국에 기반을 둔 세력들은 북방 민족과의 전쟁에서 유목 적대 세력의 자원 기반을 손상시켜 북중국을 침략할 역량을 감소시키기 위해 서쪽의 신장으로 군사 원정을 했다. 다시 말해 한의 '서역'으로의 팽창은 흉노와의 오랜 대립에서 기인한 것으로, 무역로나 새로운 영토를 확보하기 위한 열망이 아니라 안보에 대한 우려로부터 유발된 것이다. 이는 다시 확인하게 될 패턴이다. _ 제임스 A. 밀워드, <신장의 역사> , p68


 청나라 말기 이후 국민당 정부를 거쳐 공산당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할 때까지 이 지역에서는 티베트 지역에서와 같이 종교에 기반한 독립운동이나 구 소련지역에서의 독립국가들처럼 민족에 바탕을 둔 독립운동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신장 지역의 중앙정부에 대한 경제적 기대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또한, 이러한 높은 기대가 그들을 제국 내에 머무르게 했다면, 이러한 기대감이 충족되지 못했을 때의 배신감은 그만큼 커지지 않을까.


 20세기 신장에서의 권리 운동 또는 독립 운동은 '이슬람의 성전'이라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개념과 잘 들어맞지 않는다. 실패로 끝난 1933~1934년의 동투르키스탄 공화국 선포는 온건한 이슬람식 그리고 자유 민주주의적 목소리를 냈으나, 1940년대에 투르크족 자치 또는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조직한 주된 세력은 친소적이고 세속적이었다. 1950년대에 신장의 이슬람 기구들은 공개적인 저항을 거의 하지 않은 채 중국 공산당에 의한 재산의 국유화와 감독을 받아들였다. 반지방 민족주의 운동과 문화 대혁명에서 나타난 중국의 수사학으로 판단해 보건대, 신장에서 '단결'을 위협하는 주된 요인으로 인식된 것은 이슬람이 아니라 소련과의 연계였다. _ 제임스 A. 밀워드, <신장의 역사> , p394


 이같은 상황에서 민족주의나 종교에 기반한 중앙정부에 대한 배신감과 반발감이 생긴다면 그 이유는 하나 뿐일 것이다. 한족과 위구르족간의 심해진 소득불균형 문제. 경제적 문제로부터 시작된 중앙정부(공산당)에 대한 불만이 민족적 갈등으로 이어졌고, 때마침 시진핑習近平)의 일대일로(一帶一路)정책의 핵심 관문으로 이 지역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강경하게 진압한 것이 국제 이슈로 대두되면서 오늘날 신장 위구르 지역의 문제가 국제문제로 커지게 되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사실, 신장 지역의 역사를 다룬 좋은 책들은 이전 리뷰, 페이퍼에서 다룬 바 있고 <신장의 역사>가 미처 다루지 못한 상세한 내용이 이들 책에는 담겨있다. 신장 지역의 고대 유목제국의 역사를 보기 위해서는 <돌궐유목제국사>, <위구르 유목제국사 744 ~ 840>를 참조하면 좋을 것이며, 이후 강희제의 준가르 정복사는 <중국의 서진>이 매우 상세하게 설명되지만, 오늘날 신장지역 문제를 이해하기에는 <신장의 역사>가  적합한 책이라 생각된다. 신장의 과거를 통해 현대를 바라보고자 하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홍콩 출신의 한 학자는 신장의 한족-위구르족 관계의 상태를 정량화하려는 시도를 해 왔다. 위구르인 응답자들이 민감한 문제에 대해 솔직하게 대답하는 것을 내켜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2000년 우루무치에서 거의 400명의 한족과 위구르족을 대상으로 한 그의 조사는 두 공동체 사이에 대단히 깊은 골이 있음을 밝혀냈다. 많은 비율의 위구르인 응답자들이 중국 시민이라는 것(88퍼센트)보다는 위구르인이라는 것(91퍼센트)과 신장의 주민이라는 사실(95퍼센트)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대답했으며, 거의 40퍼센트에 달하는 위구르인들이 자신들의 삶의 질은 한족보다 더 느리게 향상되고 있다고 믿었으며, 과반수의 위구르인들은 한족과 위구르족 사이에 심각한 소득 불균형이 있다고 생각했다.  _ 제임스 A. 밀워드, <신장의 역사> , p477

한화(漢化)라는 개념은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것으로 적어도 2가지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첫째로 이 개념은 주변의 민족들과 중국을 정복한 민족 모두 일단 중국의 문화와 조우하게 되면 우월한 중국 문화에 자연스럽게 동화된다고 가정한다. 중국 고전에서 기원한 이 사고방식은 경험적/이론적 기반 모두에서 무시되거나 고도로 제한되었다. ‘한화‘의 두 번째 의미는 비중국적인 문화 요소들을 제거하고 특정 민족이나 지역을 중국적인 방식으로 변환시키려는 국가의 직접적인 노력을 지칭한다... 그러나 사실상 청은 19세기 중반 이전에는 이 지역의 투르크계 무슬림, 몽골족과 한족 주민들에게 서로 다른 행정/법률 체계를 시행했으며, 한족 농부들이 신장의 북부와 동부로 이주하는 것을 제한하며 느슨한 민족 분리 정책을 고수했다. - P172

청 제국의 붕괴로 인해 토착 엘리트들이 신흥 국가, 즉 중화민국으로부터의 민족 독립을 선언한 티베트나 몽골에서와는 달리 신장에는 이러한 선언을 할 만큼 충분히 두드러지는 위치에 있었던 엘리트들이 없었으며 청의 붕괴에 대한 통일된 대응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장의 좀 더 세속적인 투르크계 무슬림들 사이에서는 민족주의적 사고의 동요가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신장 성에 신식 투르크 학교가 설립된 것에 가장 잘 나타나 있었는데, 이는 몇몇 도시에 거주하는 부유하고 자주 여행을 다니는 상인들이 선도한 운동이었다. - P254

개발 프로젝트와 마찬가지로 공식적인 역사 편찬과 교육 개혁의 목적은 신장을 중국의 다른 지역들과 더욱 밀접하게 통합하는 것이었다... 중앙아시아의 공화국들은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탈퇴하도록 이끈 것이 민족주의 그 자체는 아니었지만, 소련은 스탈린이 정의 내린 바로 그 민족 경계를 따라 분열되었다. 중국의 헌법은 소련과 달리 중국의 ‘소수 민족 자치구‘에 분리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여년간 중화인민공화국의 소수 민족 정책은 이어 붙인 중국 민족 구조의 갈라진 틈을 지우기보다는 오히려 부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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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3-05-24 14: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농담이 아니고 잠시 소름이 끼쳤네요! 제가 얼마 전에 이 책을 샀거든요(물론 시작은 못했지만ㅋㅋ) <오리엔탈리즘>에서 참고도서로 이 책이 나오더라구요. 그래서 담아놨다가 중앙유라시아지도 주는 행사도서에 포함되길래 샀답니다. 신장의 역사를 알기가 쉽지 않잖아요. 이런 연구총서는 왠만해서는 중쇄 찍는 경우도 드물고 품절이나 절판되면 다시 나오기도 힘든 경우가 많아서 이럴 때 사야해! 하면서 샀답니다. 겨울호랑이님께서 별점 5점을 주셨다니! 역시 잘 샀다는 생각이 드네요. 나중에 만주족의 역사와도 병행해가면서 읽어야겠습니다. 올려주신 리스트도 도움이 많이 될 것 같구요. 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덧) 그러고보니 돌궐유목제국사부터 읽어야겠네요ㅋㅋ

겨울호랑이 2023-05-24 15:07   좋아요 1 | URL
아, 그러셨군요. 거리의화가님처럼 저도 정말 보고싶은 연구총서는 제법 있지만, 언제 절판, 품절될 지 모르는 시한부 삶이라 항상 조마조마합니다. 덕분에 밀린 재고량도 꽤 되고 참 부작용이 크네요 ㅋ 그래도, <신장의 역사> <중국의 서진>과 같은 책들을 보면 든든한 현인을 모신 듯한 느낌이 들어 조금은 위안이 됩니다. 거리의화가님께서는 워낙 책을 다양하게 읽으시니 저보다 낫겠습니다만. 지도를 보면서 지정학적으로 보는 역사도 즐거울 것 같아요. 거리의화가님, 화창한 날 즐거운 독서 시간 가지세요! ^^:)

거리의화가 2023-05-24 15:11   좋아요 1 | URL
<중국의 서진>은 그래도 지역 도서관에서 빌려볼 수 있을 듯한데 <위구르 유목제국사>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신청해서나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재고로 쌓이는 병폐는 있지만 나중을 위해서라도 이런 책들은 결국 사두어야 좋은 듯합니다.

겨울호랑이 2023-05-24 15:30   좋아요 1 | URL
^^:) 재고 처리를위해서도 정말 부지런히 읽어야할 것 같아요. 시간을 짧은데 읽어야 할 책은 참 많고, 좋은 책은 계속 나오는 것을 보면 빠른 런닝 머신 위를 걷고 있는 느낌을 받게 되네요.
 
역사 삼국지 - 군웅할거에서 통일전쟁까지 184~280
최진열 지음 / 미지북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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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역사학자의 눈으로 보면, <삼국지>는 잘 쓴 책이라는 서진시대의 평가와 달리 엉성하고 빈 부분이 많다. 본기와 열전에 정반대의 사실이 서술되어 있는가 하면위나라를 다룬 기록과 촉나라를 다룬 기록이 서로 모순되기도 한다. 게다가 사건의 줄거리가 엉성하다. 예컨대 소설 삼국지에서 비중있게 다루는 적벽대전이 <삼국지>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역사서로서 <삼국지>는 사실을 잘 기록한 책이라기보다는 당시 정치적으로 민감했던 문제를 잘 해결한 책이었다. _ 최진열, <역사 삼국지>, p8/431

현대의 소설 삼국지는 삼국시대 이야기를 명청시대 사람들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각색한 작품이다. 삼국지의 시대적 배경인 후한 말과 위진시대는 신분(계급)이 점차 엄격해지던 시기였다. 이를 세습계급이 없던 명청시대 분위기에 맞게 바꿔서 마치 능력만 있으면 출세할 수 있는 시대처럼 묘사했다. 관직과 지명도 명청시대 중국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명청시대의 것을 섞어 썼다. _ 최진열, <역사 삼국지>, p11/431

최진열의 <역사 삼국지 - 군웅할거에서 통일전쟁까지 184~280>는 우리에게 익숙한 소설 <삼국지>와 진수(陳壽, 233~297)의 <삼국지 三國志>의 한계를 함께 보여준다. 저자는 본문을 통해 민중들을 대상으로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되, 흥미를 위해 사실 왜곡에 주저함이 없었던 소설 <삼국지>는 물론, 우리가 정사(正史)로 알고 있는 <삼국지> 역시 조조(曹操, 155~220)와 위(魏)나라를 천하의 중심에 놓고 당시를 바라본다는 점에서 당대의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다. 소설이 허구라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역사 <삼국지>에 대한 비판은 상대적으로 적기에, 이러한 저자의 지적은 신선하게 느껴진다. 본문에 소개된 대표적인 역사서 <삼국지>의 왜곡 사례는 형주의 유표(劉表, 142~208)에서 찾을 수 있다.

<삼국지>와 <후한서>의 유표 관련 기록을 비교하면, 전자는 유표를 평범하면서도 관도 전투 때 원소와 조조 사이에서 간을 본 기회주의자이자 황제 놀이를 했던 역적으로 묘사한 반면, 후자는 유표가 형주에서 선정을 베풀고 헌제를 돕고 조세를 낙양 조정에 보낸 충신으로 기록했다. <삼국지>는 유표가 먼저 헌제를 도왔다는 기록을 누락함으로써 조조만이 헌제를 도운 유일한 군벌이라고 부각시킬 수 있었다. 불쌍한 헌제를 도운 조조는 당연히 정통성을 지녔고, 이 공 때문에 조조와 조비 부자는 찬탈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_ 최진열, <역사 삼국지>, p216/431

역사 <삼국지>에서는 정통(正統性)의 관점에서 조조와 위진(魏晉), 지역적으로는 화북(華北)지방을 강조한다면, 소설 <삼국지>에서는 후대에 신으로 추대된 관우(關羽, ? ~ 219) 그리고 그가 속한 유비(劉備, 161~223)과 촉한(蜀漢)이 중심이다. 때문에, 실제로 동탁의 부하 화웅을 벤 손견(孫堅, 156 ?~192 ?)의 공도, 문추를 벤 이름 모를 무장의 공도 관우에게 돌리고, 관우의 무용을 과시하기 위해 오관참육(五關斬六)이라는 허구를 만들어 낸다는 점이 한계로 지적된다.

중국에서는 자기 지역의 유명한 인물을 신처럼 떠받들고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산시성 사람들은 산시성 출신 가운데 가장 유명한 관우를 제사 지냈다. 산서상인들이 부를 축적하자 다른 지역 사람들은 산서상인들이 돈을 잘 버는 이유가 관우에게 제사를 지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너도나도 앞다투어 관우의 사당인 관제묘에서 제사 지내며 돈을 잘 벌게 해달라고 빌게 되었다. 이 덕에 관우는 산시성의 토착신에서 전국적인 재물신(財神)이 되었다. _ 최진열, <역사 삼국지>, p272/431

저자는 소설과 역사서 <삼국지>에서 각각 조조와 관우를 강조하는 한계 점을 가지며 이로 으로 인해 독자들이 역사적 실체에 접근하기 어렵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래서, <후한서 後漢書> <자치통감 資治通鑑>등 다른 문헌 등과 비교 고증을 바탕으로 과학적 분석을 통해 새롭게 시대를 바라본다. <삼국지연의>라는 소설이 워낙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저자의 주장이 상당히 낯설게 느껴지고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역사서와 소설이 보여주지 않는 진실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책을 읽는다면 우리에게 친숙하지만 몰랐던 많은 사실을 깨달을 수 있고, 이 점이 책이 갖는 장점이라 생각한다.

<역사 삼국지>는 소설 뿐아니라 역사책 또한 저자의 '독사(doxa)'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알려준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삼국지연의>에서 <정사 삼국지>로 넘어가기 전 읽으면 도움이 될 듯하다. 저자가 삼국의 지형, 정세 등에 대한 상세한 정보와 문헌 연구를 바탕으로 판단의 근거를 제시하는 <역사 삼국지>는 시대를 바라보는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그리고, 독자들은 이를 통해 도탄에 빠진 백성과 황실을 구하는 정치적 명분 대신 폭도로 규정된 태평도와 오두미교에 쏠린 민심과 후대 화북을 능가하는 경제적 중심지로 부상하게 될 강남(江南) 개발의 중요성 등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바로 이 지점이 소설에서 역사로 넘어가는 지점이 되지 않을까...

손권의 큰 업적 가운데 하나가 강남 개발이다. 당시에는 황무지를 농토로 개간하는 것을 뜻했는데, 조조가 둔전제를 실시한 것처럼 손권도 둔전을 실시했다. 손권이 언제 둔전을 실시했는지는 기록이 없지만 어떤 학자는 203년 혹은 204년에 시작되었다고 추정한다. 조조의 둔전이 민둔의 비중이 큰 반면 오나라의 둔전은 군둔이 많았다(p202)... 전한과 후한 시대에는 관리들에게 돈이나 곡식을 봉록으로 주는 제도가 이미 존재했다. 따라서 손권 통치 시기 봉읍제가 실시되었다는 것은 강남 지역이 수취 체계가 잘 작동하지 않은 낙후된 지역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다. 한 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국가의 행정 시스템이 보다 공고해지는 손권 통치 푸기에는 봉읍이 없어지고 지방관과 무장을 열후로 봉하고 식읍을 주는 제도로 바뀐다. _ 최진열, <역사 삼국지>, p204/431

백성들이 태평도로 몰려든 까닭은 태평도가 그들에게 정신적, 물질적 안식처를 어느 정도 제공했기 때문이다. 관리들이 백성들을 보호해주기는 커녕 무소불위로 괴롭히는 데 반해 태평도는 그들을 받아들이고 피난처를 제공햇다. 가렴주구와 무거운 세금을 견디다 못해 떠돌전 유민과 빈민들에게 장각과 태평도는 실로 '구세주'였다. _ 최진열, <역사 삼국지>, p31/431

장로가 순순히 조조에게 항복한 것은 나름대로 정치적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조조에게 항복한 후 장로는 조조와 부하들에게 오두미교를 포교했다고 한다. 훗날 조조의 아들이 세운 위魏나라와 사마의의 손자가 세운 진晉나라 지배층 가운데 도교를 믿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장로가 한중 일대에서 포교한 대상은 가난한 백성들이었지만 위나라에서는 지배층을 상대로 포교하면서 교리와 의식에 변화가 있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장로는 전투에서 패했지만 전쟁에서 이긴 셈이다. _ 최진열, <역사 삼국지>, p255/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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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01-25 17: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공도가 손견의 수하 장수인데 화웅을 베었다고요? 와.... 더운 술이 식기 전에 얼른 나가 관우가 목을 쳐버린 장수 아닙니까? ㅎㅎㅎㅎ 게다가 공도는 황건적 잔당인데 정규군 최고 장수 화웅을 베었다니 정말 놀랐습니다.
문추도요? ㅋㅋㅋㅋ 할 말이 없군요.

겨울호랑이 2023-01-25 20:39   좋아요 2 | URL
에고, 골드문트님 글을 읽고 제 글을 다시 보니 충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네요... 죄송합니다. 저는 공훈(功勳)을 관우에게 몰아주었다는 의미로 적은 글이었는데, 미처 황건적 출신 공도(龔都)를 고려하지 않아 그를 명장으로 만들어 버렸네요...ㅜㅜ <역사 삼국지>에서 해당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관우가 반동탁연합군에 종군하는 동안 더운 술이 식기 전에 동탁의 부하 화웅의 목을 베었다는 이야기는 소설 초반부터 관우의 압도적인 용맹함을 보여주며 독자를 사로잡는데, 정작<삼국지>에 따르면 화웅을 죽인 사람은 관우가 아니라 손견이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데워먹는 술, 즉 증류주도 없었다. 증류주는 몽골이 중국을 지배하던 원나라 시대 아랍에서 중국으로 전파되었다... <삼국지/관우전>에서는 관우가 안량을 참했다고 기록했지만 문추를 죽인 주체는 기록하지 않았다. 또 그렇게 조조의 휘하에서 공을 세우다가 유비가 원소 진영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으러 떠나는 도중에 5개의 관(五關)에서 자신을 막아서는 여섯 장수를 죽였다는 이야기도 사실이 아니다. _ 최진열, <역사 삼국지>, p459/723

관우는 안량만 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랑하는 후세의 이야기꾼 덕분에 화웅과 문추를 죽인 무공도 증류수와 함께 얻은 것을 보면서 관우에 대한 대중의 사랑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이와 함께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삼국지연의>에서 비중도 낮은 인물인 공도를 짧은 순간 떠올리시는 골드문트님 내공에 깊이 감탄하게 됩니다...

레삭매냐 2023-01-25 19: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중산정왕 후예 타령을 하는
유비야말로 시대정신에 어긋
나는 캐릭이 아니었나 싶습
니다.

연의에서는 불세출의 영웅으
로 그려지지만, 결국 꼴랑 서
천과 한중에 할거한 군벌정권
이 실제가 아니었을까요.

오월의 손씨 정권이 강남개발
의 선구자였다는 분석도 흥미
롭네요.

겨울호랑이 2023-01-25 20:45   좋아요 2 | URL
그렇습니다. 소설 속에서는 유비가 백성들의 사랑을 받은 것으로 표현되지만 그의 세력이 익주와 형주 일부에 그쳤던 것을 보면 당대 백성들 역시 그에게서 시대정신을 찾지 못한 것이 아니었나를 생각하게 됩니다. 정사 <삼국지>를 쓴 진수가 사천성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위나라를 정통으로 해석한 것도 이러한 생각의 반증이 아닐까도 생각해 봅니다. 또는 <삼국지연의>의 주인공인 관우와 같은 편이어서 좋게 본 측면도 있을 것 같습니다...

관우에 대한 존경은 소설 삼국지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소설 삼국지를 읽은 독자들은 대충 느꼈겠지만, 소설 삼국지 전반부의 주인공은 유비, 조조, 손권이 아니라 관우였다. _ 최진열, <역사 삼국지>, p458/723

바람돌이 2023-01-25 2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삼국지에 나오는 그 많은 인물들 중에서 관우가 유난히 신으로 추앙받고 사당이 많은 이유가 늘 궁금했는데 오늘 그 이유를 알았네요. 역시 후손이 돈을 잘 벌어야 해요. ㅎㅎ

겨울호랑이 2023-01-26 07:51   좋아요 1 | URL
바람돌이 님 말씀을 들으니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상을 가도, 정승이 죽으면 문상을 가지 않는다‘ 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정확하게 들어맞지는 않겠지만, 후대의 신앙 덕분에 살아서 ‘한수정후(侯)‘에 머물렀던 관우가, 죽어서는 ‘관제(帝)‘가 된 것을 보면서 생각나게 되네요. 다만, 아쉽게도 관우의 후손들은 촉나라 멸망 후에 방덕의 후손들에게 멸문당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관우도 제삿상을 보며 조금은 씁쓸해하지 않을까 추측해 봅니다...
 

요컨대 유선이 친정을 했던 20여 년 동안은, 비록 위나라의 공격으로 나라가 망했지만, 비교적 평화로웠다. 이는 유선의 정치력과 행정 능력이 뛰어났음을 보여준다. 다만 황호뿐 아니라 강유를 지나치게 신임한 점은 큰 잘못이다. 『삼국지/강유전』에서는 비위가 자기 능력을 과신하는 강유의 북벌을 견제했고, 따라서 강유는 비위가 죽은 253년부터 병권을 장악해 북벌을 시도했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유선은 그 이전부터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강유의 북벌은 곧 강유뿐만 아니라 유선의 뜻이었을 것이다.

예로부터 파촉은 야심이 없고 험한 교통로를 지켜 지방 정권의 지배자로 만족하는 사람들에게는 낙원이었다. 그러나 천하통일을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땅이 아니었다. 유비가 파촉을 정복한 후 다시 형주로 돌아와 허창을 공격하고 관우와 장비에게 관중 공격을 맡겼으면 어땠을까 하는 부질없는 가정을 해본다.

『삼국지/등애전』의 배송지주에는 등애에 대한 기록이 별로 없다. 이는 등애가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어서가 아니라 지배층이 등애에 대해 별로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은 달랐다. 등애를 제사 지내는 사당이 강회(장강과 회수 사이 지역)와 관중, 연주, 파촉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이들 지역은 등애가 지방관 혹은 군사령관으로 주둔한 곳들이다. 등애를 경험한 백성들은 그를 동정했고 그의 억울한 영혼을 달래어주었으며 심지어 신으로 숭상했다. 비록 지배층에게는 외면받았지만 백성들에게는 어느 정도 사랑을 받은 인물이 등애였다.

오나라의 실패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위나라가 촉나라보다 오나라 공격에 관심을 가진 것이 컸다. 촉나라를 멸망시킨 것까지 포함해 위나라가 촉나라를 공격한 것은 세 차례에 불과했지만 오나라는 여덟 차례 공격했다. 게다가 전쟁 중이 아닌 때에도 위나라는 대규모 군대를 회남의 합비와 인근에 주둔시키고 회남과 회수에 둔전을 경작하여 식량까지 자급자족하니, 오나라로서는 병력이나 군량 면에서 모두 불리했다. 여기에 또 다른 전쟁터인 양양 일대는 낙양으로 통하는 관문이었기 때문에 위나라가 대군을 주둔시켜 방어한 탓에 오나라 군사들이 쉽게 점령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권력자 사마소와 그를 따라 종군했던 문무 관리들에게 유리한 그림이 그려졌다. 총사령관 종회와 촉 정복의 일등공신 등애가 제거된 덕에 그 공을 나머지 사람들이 나눠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264년 정월 모든 반란이 끝나고 촉나라 정벌에 공을 세운 등애와 종회가 제거되자 사마소는 2월 낙양으로 돌아갔다.
위나라는 촉나라 부흥운동을 겪은 다음 그것의 재발을 막기 위한 조치를 강구했다. 결론은 지배층과 백성 일부를 강제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요컨대 교통로로 많이 이용했던 진창도(고도)와 진령 서쪽의 상대적으로 평탄한 곳으로 우회하는 길이 관중에서 파촉으로 남진하는 주요 교통로였고 성공 확률도 높았다. 오히려 사곡과 낙곡, 자오곡을 통해 한중군을 점령했던 종회의 경우가 예외적인 성공 사례였다. 즉 포사도, 당락도, 자오도를 이용한 진격로는 험한 진령 때문에 성공할 확률도 낮았고 실제로도 덜 이용되었다. 그래서 촉나라가 더 허를 찔렸는지도 모르겠다.

중국 역사에서 오늘날 난징(남경) 혹은 임안에 수도를 정한 남방 세력(오, 동진·남조의 여러 나라, 남송, 남명)과 북방 세력의 각축은 대개 북방 세력의 승리로 끝났다(위진남북조시대라는 장기 분열의 시기에는 동진과 십육국, 남조와 북조 등 남방 세력과 북방 세력이 남북에서 대결했다). 중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진인각陳寅恪은 그 이유를 ①남쪽의 경제력이 북쪽보다 부족했고, ②남쪽의 군사력이 북쪽보다 약했으며, ③군량과 군수품의 수송이 곤란했고, ④강남 사람들의 북벌 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에 북벌에 실패했다고 보았다.

서진과 후한을 비교하면 지배 면적이 비슷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진시대에 행정구역의 수는 늘었고, 호수와 인구는 줄어들었다. 이러한 현상의 배후에는 지배계급의 이해관계가 개입되어 있었을 것이다. 주와 군의 수가 늘어나면 장관과 차관을 비롯한 관리들의 수가 대폭 늘어난다. 이는 벼슬을 원하는 지배계급의 이해와 맞아떨어진다. 또한 삼국시대 세 나라의 공통된 특징이기도 한, 즉 대토지와 노비, 소작인 등을 소유한 지배계급의 이해를 반영하여 국가가 호구 파악을 철저히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지배계급에게 세금 면제, 탈세의 기회를 제공했다.

팔왕의 난은 서진의 붕괴에 크게 기여했다. 19-6의 계보에서 볼드체로 굵게 표시된 것이 8명의 종실 제왕이다. 팔왕의 난에 대해 일일이 서술하려면 많은 지면이 필요하므로 생략하겠다. 간략하게 요약하면 권력투쟁에 참여한 가황후 일파와 7명의 왕이 차례로 제거되고, 최후에 승리한 동해왕 사마월이 권력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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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차례나 제갈량에게 패한 사마의는 궁지에 몰렸다. 그런 사마의를 구해준 것은 아군이 아닌 적군이었다. 바로 촉나라의 이엄이었다. 당시 한중군에 머물며 촉군에 군량과 무기를 공급하던 이엄은 군량 보급이 여의치 않아 책임을 추궁당할 궁지에 몰렸다. 이엄은 잔머리를 굴려 급한 일이 생겼으니 제갈량에게 회군할 것을 청했다. 그러고는 후주 유선에게도 거짓 보고를 했다.
결국 제갈량은 231년 6월 식량이 다하자 회군했다.

사마의는 수비전에 치중했다. 이미 위나라는 제갈량의 침입에 대비하여 관중 지역의 농토를 대규모로 개발해 식량을 비축했을 뿐만 아니라, 황하 중하류 지역으로부터 군량과 무기를 운반해 저장해뒀다. 지구전을 펼치면 무조건 이기는 상황이었다.

한마디로 진수는 명재상 관중과 소하는 스스로 재상의 자질이지만 장수의 자질이 없음을 알고 장수를 천거해 제나라 환공과 한고조 유방의 성공을 도운 데 반해 제갈량은 장수의 자질이 부족함에도 명장을 발굴해내지 못했다고 지적한 것이다.

『삼국지/제갈량전』에는 제갈량의 북벌 기사가 승패 정도만 간략하게 기록되었다. 이 기사만 보면, 제갈량이 유능하지 않다는 느낌마저 준다. 배송지주에 인용된 『원자』나 『묵기』에서도 제갈량이 명장의 자질은 없었다고 기록했지만, 구체적인 전투 장면을 보면 제갈량이 무능했다고 볼 수도 없다. 오히려 『묵기』에서 주장한 것처럼 1/9의 영토와 5만도 안 되는 군사가 실제 촉의 국력이었다면 위나라 군사들을 격파한 점은 제갈량의 유능함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제갈량의 실패는 융중대에서 밝힌 전략의 전제인 형주를 잃어버림으로써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형주와 익주에서 각각 낙양과 장안으로 진격하는 전략 자체가 불가능했다. 물론 한고조 유방처럼 익주에서 관중으로 진격하는 방법도 있었다.

강유는 제갈량의 후계자인 장완과 비위처럼 수비에 치우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위나라를 공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11회의 북벌에서 25%의 승률을 기록하고, 7차 북벌 때 잠깐 정복한 3현도 그나마 빼앗겼기 때문에, 잦은 북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강유가 북벌에 실패한 이유는 곽회와 진태, 등애 등 위나라의 장군들을 이길 수 있는 실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제갈량이 북벌에 실패했던 가장 큰 원인인 군량 수송에 신경 쓰지 않고 위나라 땅에서 식량을 조달하려고 했던 무모함도 한몫했다.

나아가 강유는 결과적으로 촉나라가 위나라에 망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259년 이후 강유는 유비가 위연을 시켜 만들어놓은 요새(원문에서는 ‘위
圍’라고 쓰여 있다)의 주둔 병사들을 한성과 악성으로 후퇴시켰다. 적군이 침입하지도 않는데 요새에 병사를 두는 것은 병력과 군량의 낭비라는 게 그 이유였다.

이때는 강유의 대안이 당시 상황에 부합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263년 위나라의 종회鍾會
가 한중군을 점령하는 과정을 보면 결과적으로 잘못된 선택이었다. 강유가 요새의 병력을 철수시키지 않았다면 촉나라는 위나라에게 한중군을 빼앗기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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