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정은 한국인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을 실시하게 된다. 일제 말에 쌀을 공출하면서 말 그대로 박박 긁어가지 않았나. 그 때문에 한국인들이 얼마나 심하게 굶주렸나. 그런데 미군정이 이름을 바꿔서 미곡 수집령을 내렸다.

우익이 반탁 투쟁을 했다는 점에서 반탁은 맞다. 그러나 좌익은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지지한 것이지, 신탁 통치 하나를 지지한 것이 아니었다.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임시정부 수립이었다. 좌익은 임시정부 수립을 중심에 놓고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지지한다’, 이렇게 나왔는데 지금까지 우리는 ‘찬탁, 반탁’ 식으로 교육을 받아왔다

더 놀라운 건 12월 27일 자 보도다. 이날 동아일보는 1면 톱기사로 "소련은 신탁 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이라는 제목 아래 ‘소련은 남북 양 지역을 일괄한 일국 신탁 통치를 주장’한다고까지 보도했다.

친일파는 해방 정국에서 두 가지를 통해서 변신이랄까 세탁을 한다. 하나는 반탁 투쟁, 다른 하나는 이승만의 단정(단독 정부 수립)운동이다. 단정 운동에서 친일파가 대단한 힘을 발휘하며 한민당과 함께 중추 역할을 하지 않았나.

김규식 같은 사람은 이렇게 주장한 거다.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지키지 않으면 분단되고 분열을 겪는 건데,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 제1항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 아니냐. 빨리 미소공위에 협력해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그런 다음에 임시정부에서 신탁 통치를 열화와 같이 반대하면 될 것 아닌가. 제3항에 임시정부하고 협의한다고 돼 있는데, 우리가 다 반대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러면 미국, 소련도 어떻게 우리 의견을 무시하겠는가. 우선 임시정부를 세워놓고 보자.’ 그 얼마나 현명하고 정확한 답인가.

미소공위가 성공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극좌와 극우가 미소공위에 과연 현명한 태도를 취한 건가. 통일 정부를 세우기 위해 얼마만큼 노력했단 말인가. 이런 점에선 해도 너무했다. 미소공위가 완전한 성공까진 못 가더라도 적어도 몇 단계는 갔어야 하는 건데, 최소한의 첫 단추도 못 끼운 것 아닌가. 그렇게 된 데에는 극좌와 극우의 탓이 크다고 본다.

우리가 친미·친소 정책을 견지함과 동시에 내부에서 경쟁은 하더라도 좌우 합작을 이뤄내면, 안정과 평화를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두 나라의 경쟁적인 지원도 받을 수 있다. 지정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한반도를 잃지 않으려고 미국과 소련은 경쟁적으로 우리를 지원할 거다. 지정학적 요인을 패배적으로만 생각할 게 아니라 전진적으로, 미래 지향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걸 여운형과 김규식, 특히 여운형이 아주 강조하는 걸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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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역사의 죄인’이 있다. 우리 역사에서 제일 큰 죄인은 누구일까. 우선 친일파, 분단 세력, 독재 협력 세력이 쉽게 떠오를 것이다. 이승만을 존경하는 사람들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친일파, 분단 세력, 독재 협력 세력이 거기 포함된다. 이들은 이승만을 살리고 나아가 그를 ‘건국의 아버지’ ‘국부’로 만들어놓을 수만 있으면 ‘역사의 죄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나아가 이승만이 국부가 되면 권력이나 사회적 지위, 기득권을 계속 움켜쥘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 같다.

진보 세력은 수구 세력이 뉴라이트의 도움을 받아 근현대사 쟁점에 나름대로 논리를 세워놨는데도 더 이상 자신을 채찍질하지 않았다.
1980년대에 그렇게 현대사에 열을 올리던 사람들 가운데 몇이나 해방과 광복, 광복절과 건국절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을까.

해방을 어떻게 맞았는지를 여러 면에서 살펴볼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우리가 해방을 주체적으로 맞았다는 것이다. 해방은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진 게 아니다. 끊임없이 항일 투쟁을 해온 분들이 중심이 되어 주체적으로 맞았다. 이 점이 굉장히 중요하다. 우리처럼 주체적으로 해방을 맞은 나라는 그리 많지 않다. 이 점을 적당히 넘겨서는 안 된다.

정리하면 한국은 해방을 통해 시민 혁명이자 정치적 혁명, 사회적 혁명, 경제적 혁명, 문화적 혁명을 맞았다. 그야말로 유사 이래 이렇게 큰 변화를 순식간에, 한꺼번에 맞이하게 됐다는 것, 이건 정말 대단한 거였다. 젊은 사람들은 ‘공기가 자연스러운 것처럼 해방도 자연스럽게 왔네’, 이렇게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국내외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가면서 싸워 우리가 해방을 맞이하게 됐는가와 연관시켜서 해방의 역사적 의미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와 정치적 자유를 비롯한 기본적 자유는 우리 스스로, 주체적으로 해방을 맞이하면서 획득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해방된 바로 그날부터 그런 자유를 누리지 않았나.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를 인수해 우리 스스로 매일신보를 내고 그랬다. 이게 나중에 서울신문으로 바뀌는 거다. 미국이 우리에게 자유를 준 게 아니다.

건준은 초기에 좌우 연합적인 성격이 대단히 강했다. 해방 이틀 후인?1945년?8월?17일 간부를 발표하는데, 그때?7명의 간부 명단을 보면 안재홍 부위원장 등?4명이 우파거나 중도 우파다. 좌파나 중도 좌파는?3명뿐이다. 여운형은 중도 좌파다. 그만큼 배려를 많이 하면서 일했다.

토지를 무상 몰수, 무상 분배해야 한다고도 이야기한다. 아, 한민당 중진이 이렇게까지 발언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만큼 식민지 지주제 폐해가 컸다. 거기에 한국인의 정의감까지 가세해서 ‘토지 개혁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라고 많은 사람이 생각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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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연구들은 김일성의 중국공산당 경력을 들어 그의 투쟁이 조국독립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비난하거나,
그의 소련군 경력을 들어 그의 불변의 소련괴뢰성을 강조하려 한다. 반대로 어떤 연구들은 남한지도자들의 경력을 들어 그들이 이미 식민시대부터 미군의 비밀정보조직과 연계되어 있었던 자들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사후의 이념적 지평에서 식민시기의 독립운동을 보는 것은 잘못된것이다. 그것은 분단시대의 자신의 입점으로 식민시대의 행동들을 평가하려는 전도된 방법인 것이다. 역사와 인간행동을 바로 이해하는 첫출발은 시대와 상황에 대한 이해와 그 속에서의 선택에 대한 균형의식이 아닐 수 없다. - P226

 "누가 맑스-레닌을 옳게 해석했는가"가  탈식민 국가에서는 "누가 해방을 가져왔는가"로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홉스봄이 말하는 ‘전통의 창조‘(invention of tradition)였다. 창조된 전통에는 실제적으로 창조되고 구축되는 전통뿐만 아니라 공식적으로 제도화되는 전통도 포함된다. 창조된 전통은 또한 매우 빠르게 구축되며, 학습에 의해행동의 가치와 규범을 반복 주입하고, 따라서 자동적으로 과거와의 연속을 기도한다.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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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끝으로 전쟁의 성격에 대해 말해야 할 때이다. 현실적으로 이 전쟁은 합의된 경계선을 넘었다는 점에서  명백히 침략전쟁이었다. 그러나 학문적 수준에서 이 전쟁의 개념은 단순한 침략전쟁과는 다르다.  이 문제는  매우 복잡하며 앞으로 많은 토론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교전국 일방이 당사자간의, 또는 국제법과 협약에 의해 용인된 경계선을 넘는 군사행동과 국경을 넘는다는 의미에서의 침략전쟁이자, 다른 한편 분열된  민족을 합치려고 시도하였던 많은 국가들의 사례와 일치하는 민족내부의 단일민족국가의 형성 노력의 하나였다. - P894

이 전쟁은 두 분단국가간의 민족의 통일을 위한 전쟁이었다. 그 점에서는 민족 내부의 전쟁으로 출발한 것이었다. 그러나 분단의 등장원인, 38선의 복합적 성격과  전쟁의  결정 및 발발에 깊숙이 개입된 소련과 중국의  존재로 인하여 애초부터 이 전쟁은 결코 순수한 내전이 아니었다.
게다가 미국 유엔마저 개입함으로써 이 전쟁은 국제전으로 상승하여 버렸다. 미국과 중국의 참전 이후 이  전쟁은 전혀 이승만과 김일성의 전쟁이 아니었다.  이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가장 중요한 결정은 워싱턴과 동경, 모스크바와 북경에서 이루어졌다. - P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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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6-21 15: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번 째 문단이 눈길을 잡아 끄네요.

결국 우리 민족의 운명에 대한 결정
이 외세에 의해 내려졌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6-21 15:47   좋아요 1 | URL
네, 책의 본문에서도 해방이 미/소 양국에 의해 ‘도둑처럼 닥쳐왔다‘고 표현되었고, 분단 또한 도둑처럼 주어졌다고 하는데, 정확한 표현이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남한의 토지개혁 및 한국전쟁중의 북한의 토지개혁과 비교하여 미리 한 가지 지적하고 넘어가자면 방법의 차이를 제외하면 농민에게 돌아간 토지의 실제 양은 큰 차이가 없었다. 사회경제적 변혁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면서 전쟁까지 시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혁명적 방법을 택한 북한체제가 농민에게 준 시혜나 개혁적 방법을 택한 남한체제가 농민에게 준 시혜 사이에는 거의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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