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민족차별의 일상사 - 중등학교 입학부터 취업 이후까지
정연태 지음 / 푸른역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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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본국과 식민지 한국 사이에서는 법적(제도적) 차별이 주목되었다. 그 결과 식민지 한국은 일제 본국의 이법지대 異法地帶로서 법적 차별을 피할 수 없었음이 밝혀졌다. 이에 따르면, 식민지 한국인은 참정권을 인정받지 못했고, 의무교육제의 대상도 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식민지 한국은 공장법/건강보험법/차가법 借家法 등 각종 사회/복지 입법, 소원법/행정재판법 등의 적용 대상 지역이 되지 못하였다. 반면 일제 본국과는 달리 식민지 한국에서는 헌병경찰(경찰)의 즉결 처분권이 폭넓게 인정되었다. _ 정연태, <식민지 민족차별의 일상사> , p19


 일제 하에서 민족차별은 실제하였는가? 정연태 교수의 <식민지 민족차별의 일상사>는 민족차별이 실제로 이루어졌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일본 본국과는 다른 법제도 적용에 따른 법적 차별도 중요하지만, 저자는 법적 차별과 법적 차별이 낳은 1차 결과물인 구조적 차별이 낳은 관행적 차별에 주목한다.


 식민지 민족차별이 전개되는 층위와 양상은 세 가지로 범주화될 수 있다. 법적 민족차별, 구조적 민족차별, 관행적 민족차별이 그것이다. 법적 민족차별은 명시적인 법 규범이나 제도를 통한 차별을 가리킨다. 그리고 구조적 민족차별은 법적 민족차별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명시적인 법 규범이나 제도가 아니라 정치경제적 불평등 구조와 위계관계에 의해 이루어진 결과적/사실적 차별을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관행적 민족차별은 법적 민족차별, 정치경제적 불평등 구조나 위계관계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도 편견이나 혐오에 기초한 의식과 문화에 의해 일상적으로 자행되는 정서적/사회적 차별이라 하겠다. _ 정연태, <식민지 민족차별의 일상사> , p23


 정연태 교수가 분석한 차별의 층위 - 법적, 구조적, 관행적- 는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 1902~1985)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서 주장한 3층 구조 - 물질생활, 시장경제, 자본주의 - 를 연상시킨다. 층위(層位)라는 표현에서처럼 이들의 관계는 구조적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차이가 있다면, 브로델의 분석 대상인 자본주의는 가장 높은 층에 위치한 반면, 정연태 교수의 차별의 층위의 분석 구조는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 관행적 민족차별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보인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말하지 않지만, 차별의 층위는 역(逆)피라미드 형태로 형사화할 수 있을 것이다.


 관행적 민족차별은 식민자의 일상적 언행을 통해 표출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법적 영역에서는 포착할 수 없는 식민지 민족차별의 다채로운 양상과 특성을 드러내준다. 예컨대, 관행적 민족차별은 공적 활동영역에서든 사적 생활영역에서든 지배민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피지배민족에 대하여 일상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경멸하는 시선, 무시하는 태도, 모욕적인 언행, 배제와 차별 대우, 심지어 구타와 폭력 등을 통해 표현되었다. 그렇기에 민족 간 정치경제적 불평등성, 법과 구조의 민족차별성은 물론 식민지 민족차별을 정당화하고 근저에서 지탱해주는 식민자 내면의 의식세계까지 보여준다. _ 정연태, <식민지 민족차별의 일상사> , p25


 저자는 1920년대 충남 강경에 위치한 강상중등학교에 주목한다. 이 시기 학교 입학과 중퇴, 졸업 및 취업 현황 등의 자료를 통해 교육분야에서 일어난 여러 차별의 유형을 분석한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1919년 3.1운동 이후 노골적인 법적 차별의 모습은 점차 사라지는 대신, 국내 정착 일본인과 한국인들의 경제적 불평등에서 오는 구조적 차별의 모습과 관행적 민족차별을 확인할 수 있다.


 강상 당국은 다른 한/일 공학교와 마찬가지로 일본인 지원 규모에 맞추어 민족별 입학정원을 할당해, 신입생 선발과정에서 노골적인 민족차별을 자행하였다. 그리고 민족 간 합격률의 현저한 격차는 경제력 차이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인 것처럼 호도해, 신입생 선발과정상의 민족차별을 은폐, 부정하고자 하였다. 이런 논리로 민족차별성을 부정하는 것은 당시 조선총독부나 다른 한/일 공학 당국에서도 자주 발견되는 양태였다. _ 정연태, <식민지 민족차별의 일상사> , p49


 법적인 차별이 3.1운동과 같은 집단반발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로부터 민족차별의 양상은 보다 은밀하게 행해졌다. 마치 오늘날 미국에서 공공장소에서의 인종차별적 발언이 강한 법적 제재를 받지만, 미국 사회에는 뿌리 깊은 인종 간 반목이 존재하는 것처럼, 아니 그보다는 노골적으로 차별이 이루어졌다.


 경제 사유 중퇴는 한일 학생 모두에서 다수를 차지했지만, 그 비중에서 한국인 학생이 훨씬 높았다. 이는 개인적 차원에서는 보호자인 정正보증인의 직업과 경제력 차이, 구조적 차원에서는 농업 중심의 한국인사회와 상업, 공무자유업 중심의 재한 일본인사회의 정치경제적 격차를 반영한 결과이다. 이런 점에서 경제 사유 중퇴 양상의 민족간 차이는 관행적 민족차별과는 관련성이 별로 없다. 그보다는 한일 민족간 정치경제적 불평등 구조에 의해 초래된 '결과의 차별', 즉 구조적 민족차별의 성격을 지닌다 하겠다. _ 정연태, <식민지 민족차별의 일상사> , p248


 강상 중등학교에서 구조적 민족차별의 결과는 경제 사유 중퇴에서 잘 드러난다. 열악한 처지에서 공부해야 하는 한국학생의 중퇴율이 높다는 단순한 결과는 일본학생이 보다 높은 학구열이 있다는 것으로 왜곡하여 보다 많은 입학정원을 허용하는 법적 차별를 합리화시켰으며, 취업과정에는 관행적 민족차별과 연계되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개인적으로 이를 통해 저자의 다른 저작 <식민권력과 한국농업>을 떠올리게 된다. <식민권력과 한국농업>이 일제 권력, 일제 자본, 지주, 농민들의 역학관계를 분석했다면, <식민지 민족차별의 일상사>는 법적 차별, 구조적 차별, 관행적 차별이 단독으로 또는 복합적으로 만들어낸 결과물을 분석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취업과정에서도 민족차별이 자행되었다. 당시 신입직원 채용의 주요 사정자료는 학교장의 소견표나 추천서였다. 그런데 선발 사정이 이들 소견표나 추천서 작성의 주요 근거자료인 학업(지력)평가와 조행평가의 결과에 따라 공정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일본인 졸업생이 한국인 졸업생과 비교할 때, 학업평가 결과에서는 월등히 더 나빴음에도 두 분야의 취업률에서는 더 좋았다. 조행평가에서도 유사한 경향을 보였다. 이들 평가 이외의 다른 변수를 배제하고는 납득하기 어려운 양상이다. 바로 그 외적인 변수란 다름 아니라 일제권력의 식민지배, 일본자본의 압도적 우세, 일본인 교장/교사의 학생 평가/추천이라는 삼중 三重의 민족적 위계구조가 구축된 식민지 현실과 연관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취업과정의 차별은 관행적 민족차별인 동시에 구조적 민족차별의 성격을 동시에 띤다고 하겠다. _ 정연태, <식민지 민족차별의 일상사> , p250


  그렇다면, 저자는 왜 관행적 차별에 주목한 것일까. 이는 정치적인 법적 차별과 경제적인 구조적 차별에 비해 차별의 의식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의 구조에서 차별이 받아들여진다면, 이는 법적 차별과 구조적 차별을 정당화하게 된다는 점에서 저자는 관행적 차별에 주목한다. 그리고, 관행적 차별이 생산되는 교육기관을 분석대상으로 본문을 통해 자세히 들여다본다.


 알베르 멤미 Alvert Memmi의 차별주의론에 따르면, 식민 지배민족은 자신의 특권과 공격, 그리고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피지배민족과의 차이를 발견하고 강조한다. 만약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차이를 날조하기조차 한다. 이때 강조되고 날조되는 차이의 핵심은 지배민족의 우수성, 긍정성과 대비되는 피지배민족의 열등성, 부정성이다. 민족 위계화가 이뤄지는 것이다. 그리고 지배민족은 이러한 실제 또는 가공 架空의 위계적 차이에 대해 결정적인 가치를 부여한다. 그 과정에서 일부 집단의 차이는 민족 전체의 차이로, 한 시기의 차이는 시대를 초월한 차이로, 국부적 차이는 신체, 심리, 사회, 지리, 문화, 역사 등을 포괄한 일반적 차이로까지 간주된다. 이런 점에서 식민지 민족차별은 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 사이의 기본적 관계를 요약하며 상징하는 것이라 하겠다. _ 정연태, <식민지 민족차별의 일상사> , p22 


 이처럼 정연태 교수의 <식민지 민족차별의 일상사>는 1920년대 한 중등학교의 기록을 바탕으로 민족차별에 대해 분석하기에 언뜻 우리의 삶과 무관해 보인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불평등 문제와 엘리트 세습의 출발이 교육에서 시작된다는 점과 함께 우리 주변의 모든 종류의 차별 문제를 들여다 볼 수 있는 틀 - 차별의 3층 구조 - 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라 여겨진다.


 리뷰를 마치기 전 식민지 근대화론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라 여겨지는 내용을 옮겨본다. 아래 내용은 일제 하 과정에서 한국인들이 무조건 차별받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차별받는 상황에서도 몇몇 소수는 승진하며 보다 높은 지위로 나아간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사례를 바탕으로 차별이 없었다, 일본을 통한 근대화의 혜택은 한국에게 유리하게 적용되었다는 논지는 당연하게도 무리한 해석일 것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점은 취업과정에서 민족차별이 자행되는 가운데서도 일제 말기 강상의 한국인 졸업생 가운데 일부는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한국인 졸업생 중 일부는 일제의 전쟁 총동원정책과 일본자본의 대륙 팽창이란 전시상황을 활용해 성장해나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 졸업생 가운데 직위 승진자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는 점도 간과돼서는 안 된다. 일제 말기 한국인 졸업생의 성장도 그 이전 시기와 비교한 상대적 성장에 불과하였고, 식민지사회 전체를 놓고 보면 미약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한국인 졸업생의 성장이란 것도 '일본인=상급관리자, 한국인=하급 실무자'라는 식민지적 위계구조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_ 정연태, <식민지 민족차별의 일상사>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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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7-31 08: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에서 자신의ㅠ협력자를 찾는건 당연한 일이고 때문에 일부 식민지인들이 출세를 하거나 하는데 이를 근거로 식민지 근대화론 같은 얘기를 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걸까요? 이런 실증적 연구들이 한국사의 내용을 더 풍부하게 해주네요.

겨울호랑이 2022-07-31 08:53   좋아요 2 | URL
바람돌이님 말씀처럼 식민지 근대화론은 적은 사례로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또한, 일제 식민 시기 이전을 안정기, 이후를 급격한 분화기로 구분하고, 산업화=근대화 도식을 적용하는 식민지 근대화 이론은 학술적으로도 폐해가 심하지만, 최근 독일 소녀상 문제에서도 나타나듯 현실에 있어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극우사관이라 생각됩니다... 이영훈으로 대표되는 이들의 출발이 극좌인 점을 생각해보면, 극과 극은 통하는 것 같기도 하네요...
 

일제와 중등학교 당국과 일본인 교사들은 학생 선발과정부터 시작해학생 지도과정, 학생 평가과정, 퇴학 처분과정, 그리고 학생의 취업과정에 이르기까지 민족을 차별하였다. 이 점을 충남 강경 소재 중등 실업학교인 강경상업학교(이하 강상으로 줄임)의 사례에 대한 미시적 분석을 통해 밝혔다. - P246

이런 점에서 경제 사유 중퇴 양상의 민족 간차이는 관행적 민족차별과 관련성이 별로 없다. 그보다는 한·일 민족 간 정치경제적 불평등 구조에 의해 초래된 결과의 차별, 즉 구조적민족차별의 성격을 지닌다 하겠다.
민족차별은 학생 선발·지도·평가·퇴학 처분 과정에서만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강상 학생들이 졸업과 동시에 진로를 모색하고 취업하는과정에서도 민족차별이 있었다. - P249

여기서 짚고 넘어갈 점은 취업과정에서 민족차별이 자행되는 가운데서도 일제 말기 강상의 한국인 졸업생 가운데 일부는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한국인 졸업생 중 일부는 일제의 전쟁 총동원정책과 일본자본의 대륙 팽창이란 전시상황을 활용해 성장해나간 것이다. 선호도 높은 분야에 취업하는 한국인  졸업생이 증가하고, 그 취업처도 다변화하고, 하급  실무자에서  중간 관리자로 승진하는 한국인 졸업생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그 단적인 예이다.
그러나 한국인 졸업생 가운데 직위 승진자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였다는 점도 간과돼서는 안 된다.  - P250

교사 배척 맹휴에서 드러난 관행적 민족차별의 방식은 대체로 세 가지였다. 한국 민족과 한국인을 일방적으로 모욕하는 방식, 한국과 일본의 비교를 통해 한국 민족과 한국인을 비하하는 방식,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을 차별 대우하는 방식이 그것이었다. 여기서 유의할 점이 있다. 관행적 민족차별에는 교사의 전제와 독선과 억압과 폭력이 수반되는 경향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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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소위는 <1976년 한국중앙정보부 활동>에 대해 조사하던 중 문선명과 그와 관련한 조직에 관한 수많은 혐의를 입수했다. 그때까지 문선명과 통일교(Unification Church-UC)는 미국 곳곳에서 다양한 사안에 걸쳐 논란을 일으켜왔다. 많은 미국인들은 통일교의 신도 모집 기술에 고통을 당했다. 다른 이들은 통일교가 세웠고, 묶여있다고 공개적으로 진술한 수많은 그룹들에게 통일교의 실패를 질문했다.면세 지위의 남용, 남한에 있는 군수공장 소유와 가동의 적절성, 남한정부와의 연계가능성, 그리고 닉슨 대통령과 워터게이트사건에 관련하여 1973년 말부터 1974년까지 문선명의 진술 등이었다. _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국제기구소위원회, < 프레이저 보고서>, p483


 아베 신조(安倍 晋三, 1954~2022) 피살사건으로 통일교가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아베 총격 용의자의 어머니가 전 통일교 신자였으며, 이로 인해 총격을 계획했다는 그의 증언은 합동결혼식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종교에 대한 관심을 가져왔다. 아베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1896~1987)와 통일교의 유착관계는 널리 알려진 것이지만, 정치/외교적인 통일교의 영향력을 구체적으로 다룬 책을 찾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런 면에서 '코리아 게이트 Korea Gate'이후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산하 국제기구소위원회에서 한미관계를 분석한 프레이저 보고서(Fraser Report)는 1970년대 당시 통일교의 국내외적 영향력을 살필 수 있는 자료다. 특별 쟁점으로 '문선명 조직'으로 통일교에 대해 별도의 장(章)을 할당한 보고서의 내용을 간단하게나마 정리해보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프레이저 보고서>는 통일교 및 관련 조직들이 반공(反共)을 이념으로 교회와 국가의 분리가 폐지된 범세계적인 단일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비영리재단인 한국문화자유재단을 통해 방위사업을 영위했고, 이를 통해 한국과 미국 등의 정치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보여준다. 보고서는 앤드루 파인스타인의 <어둠의 세계 The Shadow World>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어둠의 다른 측면을 보다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리뷰에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그러므로 본 소위는 권고한다 :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하원 군수위원회, 그리고 상원의 관련 위원회는 공동 생산 협정을 포함하여, 미국의 원조프로그램을 통해 대한민국 정부에 공급한 무기들의 생산 혹은 판매에 문선명 조직이 개입되어 운용되고 있는 사업이 있는지 여부를 알아낸다. 적절한 미국 국방 및 정보기관들로부터 추진되었던 한국 국방생산에서 문선명 조직 산업들에 의해 수행된 역할에 관한 정보. _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국제기구소위원회, < 프레이저 보고서>, p598


 세계기독교 통일신령협회(Holy Spirit Association for the Unification of World Christianity)는 문선명이 1954년 한국 서울에서 창시한 신흥 그리스도교다. 문선명은 통일교를 성경과 그의 저서 <원리강론 Divine Principle>에 근거한 기독교의 한 교파로 여겼지만, 인류의 타락과 원죄 이야기를 기독교와 전혀 다르게 해석한다. 문선명은 이브가 사탄과 정신적인 관계를 맺은 후에 아담과 성적인 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이브의 모든 자손은 선천적으로 죄와 결함을 갖고 태어나고, 결정적으로 예수가 이를 바로잡기 위해 강림했으나 결혼할 기회를 얻기 전에 십자가에서 처형당함으로써 부분적인 속죄밖에 하지 못했다고 믿었다. _ 슬라이트 암발루, <종교의 책>, p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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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지기 2022-07-14 22: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즘 (흔히 사이비라 불리는) 마이너한 종교들에 관심이 생겨서 책 찾아읽고 있었는데 덕분에 좋은 책 하나 더 알아갑니다.^^ 다음 리뷰도 기대돼요

겨울호랑이 2022-07-14 23:03   좋아요 2 | URL
코로나19로 신천지 문제가 공론화되면서부터 최근의 통일교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신흥종교의 문제가 사회문제로 떠오르는 듯 합니다. 라퓨타(‘천공‘의 성) 문제도 여기에 한 몫하는 듯하구요....종교의 문제가 단순히 영성의 문제가 아닌 세속의 문제와도 어떻게 연계되는지를 <프레이저 보고서>가 잘 보여주는 듯합니다. 등대지기님 감사합니다. 잘 정리해 보겠습니다 ^^:)

Kletos 2022-07-14 22: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흥미롭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7-14 23:04   좋아요 1 | URL
Kletos님 감사합니다. 다만, 단순한 음모론이나 미스터리 오컬트 수준으로 바라볼 수 없다는 현실이 다소 씁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식민권력과 한국 농업 - 일제 식민농정의 동역학
정연태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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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식민농정이 기획, 시행, 수정되는 과정, 즉 식민농정의 동역학 動力學을 주체적, 중층적, 장기사적 시각에서 밝히고자 한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한국 농업의 역사적 환경과 조건 속에서 일제 권력, 일제 자본, 지주, 농민 등 사자 四者의 의도와 지향이 서로 연계, 충돌하고 절충되는 가운데 식민농정의 방향과 기조가 결정되는 동역학을 구명하는 것이다(p8).... 식민농정은 일제 권력의 의도뿐 아니라 일제 자본의 요구, 지주와 농민의 대응에 의해 구성된 사중주 四重奏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사중주는 힘과 처지와 의도가 다른 네 주체 간 갈등의 산물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 사중주는 불협화음과 파열음의 연속이었다. _ 정연태, <식민권력과 한국 농업>, p9

정연태 교수의 <식민권력과 한국농업>은 러일전쟁 직후부터 일제 패망시기까지 한국눙업사를 분석한 책으로, 이 시기 식민농정을 일제권력의 의도, 일제 자본의 요구, 지주의 대응, 농민의 대응의 역학관계로 파악한 책이다. 이 시기를 단순히 민족간 대립, 계급간 대립이 아닌 보다 세분화된 변수로 파악하는 구조 속에서 이분법(二分法)구도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측면들이 드러나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부동산 증명제도안을 둘러싼 관점의 차이다. 증명제도안 도입에 대해 찬성입장을 보인 통감부, 대한자강회, 대한제국 정부는 자신들의 입장에서 최적안을 통과시키고자 노력했다. 식민이주를 목적으로 한 통감부는 '임의주의'를, 외국인 토지 소유 제한을 목적으로 한 대한자강회와 대한제국은 '강제주의'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제도의 도입을 일제의 토지침탈인 '토지조사사업'에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근대적 제도의 도입으로 침탈을 막고자 한 저항을 읽을 수 있다.

일제 통감부, 대한자강화, 대한제국 관료들은 모두 문권위조의 폐단을 개선하기 위해 부동산증명법 제정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했다. 그러나 증명법의 제정 의도나 대강 大綱을 둘러싸고 삼자는 갈등했다(p134)... 자강회안과 법부안이 증명 강제주의 원칙을 취한 반면, 우메수정안과 법률6호는 증명 임의주의를 취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여리서 주목할 점은 증명 강제주의 원칙을 취하면,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국가가 사실상 확인, 관리, 통제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점이다. 대한자강회와 대한제국 관료들도 바로 이런 효과를 기대해 증명 강제주의 원칙을 취했던 것이다. 바로 이 점이야말로 자주적 증명제도안과 식민지적 증명제도안의 분기점이라 하겠다. _ 정연태, <식민권력과 한국 농업>, p134

이와 함께,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한 식민지적 토지정책은 식민지주제의 강화로 생계를 위협받은 소작농민의 저항으로 인해 의도했던 바를 충족시킬 수 없었고, 사회안정화를 위한 조치를 강구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일제 하 식민농정에서 주체적인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게 한다.

경술국치 무렵에 일본인 지주는 개별 지주로서가 아니라 한국사회에서 하나의 집단적 존재가 됐다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일본인 지주들이 하나의 계층적 범주를 구성해 식민지주제란 경제제도가 이식, 착근되기에 이르렀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시기 농업식민화 정책의 양대 축 가운데 하나로 전개됐던 이주식민 장려정책의 실적은 극히 부진했다. _ 정연태, <식민권력과 한국 농업>, p137

지주경영이 강화되고 식민지주제가 발전함에 따라 소작농민은 생계의 안전성과 안전성을 위협받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소작농민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가自家노동을 최대한 연소하거나 소비와 지출을 최소화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도 살아가기 여의치 않을 경우 지주의 부당한 수탈에 대항하는 길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소작농민이 농민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것은 3.1운동이후부터였다. 3.1운동을 계기로 농민들은 계급적/민족적으로 각성하고, 그 이후 확산된 '사회개조', '자유/평등 사상의 자극'에 의해 더욱 자각하게 됐기 때문이다. 여기에다가 3.1운동을 통해 획득한 자유 공간이 농민운동 발전을 가능케 했다(p260)... 소작쟁의의 일상화, 조직화, 대규모화는 일제로 하여금 소작문제를 새롭게 인식케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러나 관헌의 무력적 개입에 의한 소작쟁의 해결은 지주와 소작농민의 사적私的 계급적 갈등을 식민권력과 한국 농민 사이의 공적/민족적 대립으로 전화시킬 수 있었다. _ 정연태, <식민권력과 한국 농업>, p263

1930년대 세계적인 대공황의 여파로 지주경영은 한층 수탈을 강화하고자 했지만, 이전 1920년대부터 일어난 소작쟁의 등의 저항은, 제도적으로 이러한 수탈을 막도록 강제했고, 지주들의 자리를 일제자본이 대신했다는 것 또한 식민농정이 일제 권력이라는 정치권력이나, 지주라는 경제권력의 일방적인 강제에 의해 일어난 사안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세계대공황과 농업공황의 여파로 지주들은 손실을 메꾸기 위해 지주경영을 강화했다. 농사 과정에 대한 개입을 강화하고, 소작료를 인상했으며, 조세공과를 소작농민에게 전가했다. 심지어 농민을 사실상 농업노동자처럼 부리는 위탁경작제를 도입했다. 이와 같은 지주경영은 농촌사회의 관계망과는 동떨어진 일본인 식민 대지주들에게 두드려졌다. 그 결과 식민 대지주는 증가했고, 이들의 토지 소유도 늘어났다. 반면 농가 대부분은 빚더미의 구렁텅이로 더 깊이 빠져들었다. 농가는 파멸적인 위기를 맞이했다. _ 정연태, <식민권력과 한국 농업>, p405

대공황기 소작입법과 자작농지 설정사업과 같은 사회개량적 식민농정의 시행으로 지주경영이 확대될 여지는 현저하게 줄었으나, 농업생산성의 발전을 통해 지속 발전할 가능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고 하겠다. 그 결과 1930년대에 지주제는 종전처럼 성장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약화되지도 않았다(p412)... 지주의 영향력이 이전보다 약화되고 지주제가 둔화된 틈을 차지한 것은 금융자본이었다. 금융자본은 부동산 담보 대부를 통해 농촌과 농업 지배력을 확대됐다. 그 결과 지주와 농민의 금융자본 의존도는 높아졌다. _ 정연태, <식민권력과 한국 농업>, p413

이와 같은 일제 권력, 일제 자본, 지주, 농민의 서로 다른 불협화음은 1940년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파국으로 마무리된다. 전시총동원령이라는 급박한 전시 경제 체제 아래에서 서로 다른 규모의 힘들이 맞춘 균형점은 파괴되었으며, 이러한 결과가 말해주는 것은 결국 일제 식민통치의 수많은 명분에도 불구하고 그 지향점은 결국 제국의 중심부를 위한 주변부의 수탈을 위한 것이었음이 드러나게 된다.

일제가 전시 식량증산을 위해 주력했던 통제 위주 식민농정도 파탄을 맞게 됐다. 이는 일제 본국 요구의 수행과 식민지배의 안정화라는 두 가지 임무를 동시에 책임졌던 일제 식민권력이 후자는 무시하고 오로지 전자만을 향해 치달은 결과였다. 달리 말하면, 일제가 식민지 한국의 농촌, 농업, 농민 사회의 실상과 대응을 무시, 억압하고 오로지 제국주의 본국의 요구와 필요에 따라 식민농정을 일방적으로 추진하게 되면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역사적 산물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_ 정연태, <식민권력과 한국 농업>, p497

<식민권력과 한국농업>은 일제 시대 한국 농업의 주체를 보다 세분화하고 분석한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가혹한 조선총독부 시절 통치시기에도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주장을 관철하려는 주체를 발견하게 된다. 만주와 해외에서 보다 적극적인 저항으로 독립의지를 밝히려는 투쟁이 있었다면, 식민농정에서는 자기 것을 무기력하게 빼앗기지 않고 지키려는 보다 작은 규모에서의 저항을 발견하게 된다.

저자는 이러한 역동성을 통해 기존의 역사관 - 식민지 수탈론, 식민지 근대화론, 탈근대 인식론 - 을 비판한다. 모두까기보다는 이들의 관점을 모두 수용해서 보다 종합적으로 역사를 바라보자는 저자의 결론을 통해 암울했던 시기를 보다 넓은 시야에서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다. 이러한 시대배경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토지>, <아리랑>을 다시 읽어본다면, 작품 속 인물들의 말과 행동을 더 잘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식민농정의 동역학 動力學을 밝히려는 이 책의 문제의식에 비춰 볼 때, 세 가지 근대역사관에는 각각 합리적 문제제기가 있었다. 식민지 수탈론은 민족간 대립/갈등에 시선을 집중한 나머지 식민지 한국사회에서 중층적으로 작동하는 다양한 이해관계, 수탈과 저항 사이뿐 아니라 성장과 몰락, 저항과 협력, 적응과 반발 사이를 유동하는 대중의 다양한 실체를 간과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p501)... 식민지 근대화론이 범한 결정적 한계는 두 가지다. 일제의 식민성을 드러내는 핵심 지표인 민족 억압, 수탈, 차별, 말살의 구조와 특성은 거의 무시한 채 일제를 한국 농업, 농촌을 발전시킨 식민지 개발자로만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식민지 근대화론은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을 핵심 논리로 하는 신판 식민사관이란 비판을 면할 수 없게 됐다(p502)... 탈근대 인식틀에 따르면, 식민성을 근대성에 매몰시켜 버리고 민족해방운동 주체를 개별적이고 분산적이 하위주체로밖에 포착하지 못할 수 있다. 따라서 식민농정을 둘러싼 일제와 한국 사회/농민의 갈등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게 된다. 요컨대, 탈근대 인식틀로는 하위 주체인 농민의 자율성이 민족/사회 운동의 지원 내지 협력을 받거나 이들 운동 역량과 결합했을 때 비로소 식민농정상 자신들에게 유리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간파할 수 없다. _ 정연태, <식민권력과 한국 농업>, p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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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07-14 14: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이 책 지금 읽고 있는 토지를 읽을 때 참고하면 좋겠네요. 수탈론, 근대화론을 넘어선 관점도 관심이 가구요.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22-07-14 16:06   좋아요 1 | URL
사실 저도 최근 <토지>를 읽은 후에 알게 된 책인데, 읽기 전에 알았다면 최참판댁과 평사리 사람들의 처지가 같은 듯 달랐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더 잘 실감했을 것 같아요. 또, 서희와 봉순(기화)와 길상의 처지를 , <아리랑>에서는 해외로 흩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상황을 이 책을 읽으며 다시 떠올렸습니다. 거리의화가님 감사합니다. ^^:)
 


 지난 50년간 지속된 한국의 분단은 세계냉전의 한국적 변용이었다. 따라서 한국전쟁의 시작논쟁은 냉전을 해석하는 문제로 상승하지 않을 수 없었고 서구의 학자들에게서 종종 볼 수 있듯이, 한국전쟁의 시작과 세계냉전을 해석하는 관점은 일치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큰 아이러니이다. 이 전쟁의 시작 주체를 북한으로 규정하는 시각은 냉전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전통주의적 입장에 섰고, 반대의 경우는 수정주의적 시각에서 냉전을 접근하였다. 그러나 냉전과 전쟁의 시작에 대한 해석은 분리불가능한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사실을 말하자면 전쟁은 북한이 먼저 시작하였다. 이제 이 가공되지 않은 사실에 대한 진실은 다툴 수 없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 p328


 박명림(朴明林, 1963 ~ ) 교수는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에서 한국전쟁의 개시는 북에 의한 남침임을 분명하게 표현한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전쟁은 1949년 김일성의 신년사에 등장한 '국토완정론'의 물리적인 실현이었고, 국토완정론은 김일성(金日成, 1912~1994)과 박헌영(朴憲永, 1900~1955)이 가지고 있는 남측에 대한 우위를 담은 언어였다.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은 한국전쟁 개전 직전 표현된 북측의 자신감에 대한 근거와 함께 한국전쟁의 의의를 다각적으로 분석한다.


 김일성은 1949년 신년사에서 '국토의 완정'이라는 익숙지 않은 용어를 13번이나 사용하였다. 이는 곧 국토완정론(國土完整論)의 전면적인 등장이었다. 1949년 초의 이 신년사는 북한 통일정책의 한 분명한 전환점이었다. 이 연설은 1945년에서 1950년 사이의 연설 중 몇몇 핵심연설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후로 김일성의 연설에서는 국토완정과 완전 자주독립이 항상 붙어다녔다. 이는, 남한과 북한으로 분단되어 있는 것은 아직 완전한 자주독립이 아니며, 북한에 의해 국토완정을 이루었을 때만 자주독립이라고 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 p87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에서 농민의 측면은 토지개혁 중심으로, 민주주의 측면은 정치 부문에서, 민족주의 문제는 민족주의자의 체제 내 포용 여부 관점에서 분석된다. 결과적으로 한국전쟁 직전 체제의 우위는 북측 일방 우위라 볼 수 없었다. 일부에서 남측의 체제는 우위를 보이고 있었으며, 북측에 다소 뒤처진 측면도 있었지만,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수준은 결코 아니었다. 이러한 부분은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1943 ~ )의 관점과 다소 다른 부분이다.


 이 연구가 설정한 세 가지의 준거, 즉 농민, 민주주의, 민족주의의 측면에서 남북한을 분석할 때 위로부터의 혁명과 밑으로부터의 혁명이 결합된 북한의 방식이 반드시 남한의 위로부터의 개혁보다 더 나은 것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변혁방법과 과정, 농민에게 돌아간 혜택의 측면에서 더 나은 점을 별로 갖고 있지 못했다. 특히 48년질서하에서 북한의 농민은 남한의 농민보다 결코 더 평안하거나 해방되었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민주주의 문제의 경우, 그것을 비록 정치적 민주주의로 한정하다고 하더라도 이 문제에서 우월한 쪽은 북한이 아니라 남한이었다(p873)... 민족주의문제의 경우 남북한은 상호 길항적이었다. 친일-항일의 대립구도에서는 명백히 북한이 앞서 있었다. 그러나 체제를 창출한 미소중심부로부터는 남한이 북한보다 더 자율적이었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 p874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이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과 가장 크게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토지개혁과 관련된 부분일 것이다. 토지개혁의 완성에 따라 국가 성격을 규정하고 한국전쟁을 항일세력와 친일세력의 전쟁으로 정의 내린 커밍스의 관점과는 달리, 박명림은 토지개혁은 남측에서도 1950년 상반기에 마무리되었음을 밝히며 반론을 펼친다. 실질 내용면에서 남측의 토지개혁은 북측과 큰 차이가 없었기에 이를 바탕으로 한국전쟁의 성격을 규명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주장이다.


 그 동안 토지문제야말로 남한과 북한 두 사회의 상이성의 표상이었다는 주장이 강력히 제기되어 왔다. 즉, 북한은 토지개혁이 되었고 남한은 토지개혁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자는 높은 탈식민성과 민중성을 갖고 있었고, 후자는 토지개혁이 되지 않아 높은 식민성과 반민중성을 갖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간단하게 말해 남한은 친일파와 한민당, 지주의 국가라는 것이다. 커밍스는 "남한은 경찰국가였고 그것은 지주라는 작은 계급의 대리기구(an agent of a small class of landlords)였다." 고 진술한다. 반면에 북한은 항일독인운동 세력과 농민의 국가라는 것이다. 이것은 북한의 주장이기도 하지만 한국전쟁에 대한 유력한 연구경향의 중심테제이기도 하다. 이 차이가 전쟁의 한 기원이고, 이 차이야말로 한국전쟁의 내전적, 계급투쟁적 성격을 함축하는 핵심문제라는 주장이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 p475


 그리고, 이러한 분석의 중심에 '대쌍관계동학'(對雙關係動學, interface dynamics)이 자리한다. 무상몰수와 무상분배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북측의 토지개혁은 매우 열렬한 지지를 받았기에, 남측의 토지개혁은 좋든 싫든 내용적으로 이에 근접하는 수준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면에서 해방 이후 두 체제의 움직임은 정통성 확보를 위해 매우 비슷한 길로 가게되었다는 것도 본문을 통해 함께 보여준다.


 국가의 무상몰수와 국가에 의한 무상분배는 전형적인 볼셰비키 방식이었다. 무상몰수 무상분배라는 점 외에 북한의 토지개혁에서 특징적인 두 가지 점은 강조되어야 한다. 하나는 해방후의 '우파-반동들'도 민족반역자로 규정되어 토지를 몰수당하였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지주와 민족반역자의 것은 토지 이외에 모든 것을 박탈했다는 점이었다. 특히 후자는 북한의 토지개혁을 특징지은 중요한 요소였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 p200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주장은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없었지만 상호 대비되는 두 가지 점에서 주목할 만하였다. 하나는 그러한 급진적 주장이 반동적 주장과 맞붙어 상호 상쇄효과를 결과함으로써 중도의 개혁적 입장을 강화하는 효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즉, 수구보수주의, 중도개혁주의, 급진민중주의의 3자 정립(鼎立)관계에서 앞 뒤의 둘은 서로 길항관계를 형성하며 상대를 공격하며 대립, 개혁주의를 강화하였던 것이다.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 p498


 남한의 정세는 북한에 비해 구조적 변환도 저항도 늦게 시작되었고 늦게 폭발하였다. 친일파의 배제와 토지개혁 등 식민지 민중의 열망을 소련군정과 북한리더십은 발 빠르게 처리해 나갔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시차는 억압성과 민주성의 차이이기도 하였다. 남한은, 비록 어떤 주어진 틀 안에라 하더라도, 약간의 자유경쟁적 갈등이 허용되었고 존재하였다면 북한은 허락되지 않았다. 남한은 좀더 민중적일 필요가 있었고 북한은 좀더 민주적일 필요가 있었으나 둘 다 자기 길만을 가려 하였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 p264


 우리는 1946년 북한에서 진행된 정치적, 사회경제적 변화를 북한혁명이라고 규정하였는 바 이 혁명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비유혈적이고 철저했다는 세 가지 점에서 특징적이었다. 기본적으로 북한혁명은 위로부터의 혁명과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결합된 혁명이었다. 필자는 그것을 도이처의 용어를 빌어 반정복과 반혁명의 결합인 혼합혁명이라고 불렀다. 이 혁명은 그 급진성에 비례하는 부(負)의 영향을 남겼는데 체제의 비민주성과 민족주의 세력의 남하의 초래가 그것이었다. 급진주의적 시원을 안고 출발한 체제였기 때문에 남한과의 격렬한 대결을 수반한 48년질서에서는 더욱 급진적인 모습을 띠어갔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 p875


  체제간의 경쟁에서 분명히 북측이 앞서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진행된 사회주의 혁명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이러한 사회주의 혁명의 속도전을 위해 '38선'의 존재는 필수적이었다. 처음에는 분할점령표시에 불과한 38선은 정치적, 사회적 경계의 의미도 포괄하게 되는데, 사회주의 혁명에 있어서 38선은 일종의 '배출구'로 작동했다. 이른바 반동분자(反動分子)들을 모두 숙청하는 대신 남측으로 가는 것을 방관하면서, 북측은 구성원들의 순수성을 확보하고 동시에 남측을 혁명의 대상으로 타자화(他者化)할 수 있었다. 


  조금 더 나아 38선 이남으로 체제불응자를 쫓아내서, 구성원들의 순수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북측에 비해, 갑자기 많은 수의 월남자로 인한 사회혼란을 겪어야 했던 남측에서 한국전쟁 기간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던 것도 이와 연관시켜 볼 수 있지 않을까를 개인적으로 생각해 본다. 물론, 이러한 이유를 찾는다고 해도 민간인에 대한 만행의 죄가 감해질 수는 없을 것이겠지만.


 최초에 38선은 영토분계선, 즉 전후처리를 위한 강대국의 합의선이었으나 점차 한국 내 좌우 두 정치세력의 계급적 이념적 분할선으로 구조화되어 갔으며 나중에는 남북한이라는 두개의 분단국가의 분할선으로 고착되었다. 중국혁명을 계기로 그것은 결국 다음의 세 수준이 복합적으로 분할된 선으로 상승하였다. 그 세 수준은 남북한 대결, 중국-북한의 동아시아 사회주의연대와 일본-남한-대만으로 이어지는 동아시아 자본주의연대간의 동아시아 소국제체제의 대결,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간의 세계적 수준의 대결이 그것이었다. 즉, 이 선은 세계냉전의 동아시아적 초점이었던 것이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 p878


 (대규모)남하를 미군은 오히려 막으려 했고 소련군은 오히려 방임하였다는 점이다. 즉 월남자에 대해 소련군과 북한리더십이 초기에 취한 정책은 일반적인 이해와는 완전히 달랐다. 이들은 월남을 막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권장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월남자의 대규모 유입에 따른 사회경제적 문제를 우려한 미군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남하 물결은 계속되었다(p361)... 대규모의 월남은 북한사회의 변화와 함께 남한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는 북한사회에 압력의 완화를 가져왔고 남한에는 서로 다른 두 영향을 가져왔다... 하나는 토지개혁과 친일세력 배제에 의한 남한민중의 개혁에의 기대였고, 후자는 이로 인한 구체제 지배새력의 월남 및 남한 국가기구에로의 결집, 그리고 이들이 퍼뜨리는 공산주의에 대한 나쁜 소문에 의한 남한민중들의 반공의식의 확산이었다. 김일성은 전자만을 보았고 더 큰 것을 강조하였다. 여기에 문제가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부(負)의 영향이 더 크 심대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 p363


 토지개혁을 비롯한 대규모 사회혁명과 함께 이미 1940년대부터 북측에 조성된 중공업시설이라는 인프라 위에  사회주의 계획개발경제 정책이 맞물리면서 북측은 남측에 비해 경제적 우위를 점하게 된다. 그리고, 경제적 우위에서 비롯된 자신감은 사회를 동원체제로 바꾸면서 북측은 전시사회로 진입하게 된다. 이에 반해, 남측은 1948년 여순사건(麗順事件)을 기점으로 빨치산 세력을 꺾는데 성공하면서 북진통일을 주장할만큼 체제가 공고해지기에 이르렀다. 


 대중의 동원체제로의 견인과 급진군사주의의 확산을 가능케 한 북한리더십의 자신감은 경제적 발전과 연결되어 있었다. 즉, 정치적 이념적 군사적 준비와 동원 및 공세는 경제적 강점(强點)의 기반 위에 밀어붙였던 것이다. 북한리더십에게 경제적 하부구조의 조기 구축은 정치와 사회, 군사와 이념 부분에서의 자신감과 이의 실현의지를  결정적으로 높여주었다. 현재전쟁에서의 경제적 요인의 역할을 소개하는, 소련문건의 번역으로 보이는 인민군 학습요강의 핵심내용은 전쟁의 승패는 생산력의 발달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으로 일관되어 있었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 p763


 48년질서에서 북한이 전쟁을 위한 경제적 강점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세 가지였다. 식민시기의 산업화와 경제적 하부구조의 구축, 초기계획경제의 장점, 소련의 장비와 기술원조가 그것이었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 p768


 보도연맹의 설립과 자수의 권장, 그것은 시민사회에 대한 물샐틈없는 옥죔의 시도였다. 과거에 좌파활동을 한 자들은 자수하여 국가에 대한 과거의 불충(不忠)을 사죄할 것이며 이를 통해 국가가 베푸는 은전을 받으라는 종용을 받았다. 위로부터의 뿌리뽑기와 밑으로부터의 충성의 동원의 병행이었다. 일반민중들은 한 번의 혹독한 패배를 경험한 뒤 국가강권력의 강대함과 공포스러움을 절감하여 알아서 기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스멀거리며 사회의 심저에 존재하는 한국 반공주의와 보수주의의 기원이 형성된 것이었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 p642


 이러한 분위기에서 1949년 중국혁명은 결정적이었다. 1949년 이후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 2개 사단의 귀대와 소련의 군사지원과 북측의 자신감은 군사동맹으로 이어진 반면, 장제스(蔣介石, 1887~1975)의 국민당 정부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미국의 소극적 움직임은 그들에게 기회를 제공했고, 그 결과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모든 여건이 갖추어진 이후 최종적인 결정은 정치적 리더십의 몫이었다.  


 중국혁명이 이 전쟁의 도래에 끼친 영향을 세 가지로 요약한 바 있었다. 하나는 북한리더십으로 하여금 전쟁에의 기회의식과 자신감, 즉 이제는 우리 차례라는 의식을 가질 수 있게 만든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전쟁을 치를 병력의 북한으로의 대규모 이월이며, 세번째는 결국은 전쟁을 가능케 한 소련-중국-북한 간의 동아시아 공산주의 삼각동맹의 형성이었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 p877


 한국전쟁의 시작결정은 소수지도자들의 합의로 가능하였다. 내부적으로는 김일성과 박헌영의 합의가 결정적이었고, 외부적으로는 스탈린과 모택동, 특히 스탈린의 동의가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 즉 소련, 중국, 북한의 한국전쟁 시작에 대한 설명은 모두가 각자의 입장에서 책임을 면하여 다른 쪽에게 전가하려는 데에만 초점이 놓여 있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 p177


 한국전쟁은 북한의 김일성과 박헌영이 군사적 수단에 의해 남한과 북한을 통일하려는 의지에서 구상하게 되었으며, 이를 스탈린에게 제의하여 동의를 얻고 이어서 중국의 모택동의 동의에 의해 최종적인 합의에 도달하였다. 이것이 한국전쟁의 결정에 대한 우리의 연구의 결론이다. 이 과정에서 김일성과 박헌영은 지나치게 급진주의적이었고 현실을 낙관하고 있었다. 그들은 넘치는 의욕으로 인해 자신들의 선택이 가져올 파멸적 결과를 고려하는 정치적 사려가 부족하였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 p866


 기원의 문제와 관련하여 미국의 적극적인 유도는 없었으나 자료가 말하는 바를 따를 때 미국은 전쟁의 발발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미국이 사전에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적절히 대응하였느냐는 문제는 또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유도가 있었다 하더라도 한국전쟁은 주체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선택이 없었으면 발발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 연구의 결론이다. 또한 남한정부와 군대의 일부는 좌파 내지 오열로서, 전쟁 직전 남한을 위한 유도가 아니라 북한을 위한 개문 호응을 하였음을 규명하였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 p877


 미국과 남한의 차이는 애치슨과 이승만의 차이였다. 애치슨식 생존방식과 이승만식 생존방식의 차이가 갈등의 폭이었다. 북진통일론이야말로 그 두 방식을 가르는 기준이었다(p535)... 그러나 미국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남한이 전쟁을 일으킬까 우려하여 무기원조를 제한한 것만은 아니었다. 미군은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그 무기가 공산군에 넘어가서 미군이 통제할 수 없게 되고, 결국에는 미국을 향한 공격무기가 되는 것에 대해서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었다. 미국은 남한과 이승만에 대해 또 하나의 중국이자 장개석이라는 의심을 떨쳐버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 p536


 박명림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은 이처럼 해방 전후 수립된 두 체제가 38선을 경계로 서로 경쟁하면서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고, 경쟁에서 앞서나가던 북측의 자신감과 주변 정세가 맞아떨어지면서 전쟁이 일어났음을 보인다. 물리적으로는 남북간의 내전으로, 정치적으로는 소련-중공-북한과 미국-대만-일본-남한 간의 동아시아 대결로, 사상적으로는 사회주의(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대결이 된 한국전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박명림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은 커밍스의 <한국전재의 기원>보다 동적(動的)으로 사태를 바라본다. 커밍스의 분석 틀이 각 체제 내에서 폐쇄적이라면, 박명림의 분석 틀은 역동적으로 체제 내외에서 변수로서 영향을 미친다. 다른 한편으로, 커밍스는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Korea's Place in the Sun: A Modern History>에서 보여주었던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보다 넓은 시야로 사건을 바라본다. 때문에 커밍스의 한국전쟁은 거대한 역사의 흐름이 만들어낸 물줄기와 같은 느낌을 주는 반면, 박명림은 정치적 리더십에 의한 결정적 순간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면에서 '우연과 필연'이 이들의 차이를 설명하는 다른 용어가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러한 차이는 역사학자와 정치학자가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함께 해본다.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일을 맞아 한국전쟁을 분석한 또 다른 대작(大作)을 읽으며 한국전쟁에 대해 더 생각할 좋은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정리한 페이퍼는 이것으로 갈무리하지만, 해방 전후사와 관련해서는 조만간 다시 정리해보려한다.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미뤄두었던 책들을 꺼낼 때가 된 듯하다...  


 남한과 북한의 사회와 경제도 대부분 파괴되었다. 남북한 모두 개인과 집단을 막론하고 생존을 위한 강인한 정신만이 남았고 이것이 곧 체제유지와 재건의 제일 요소였다. 상대에 대한 적대의식과 자기체제의 우월의식이 결합하여 형성되고 증폭되는 단결과 생존에의 의지는 남한과 북한의 각각을 강하게 묶는 단단한 끈이었다(p885)... 사회의 모든 성원은 비로소 국가의 평등한 구성원, 즉 국민이 되었다. 이 전쟁은 근대적 요소를 사회의 많은 부분에 침투시켰던 것이다. 신분과 함께 이념이, 수직적 위계와 함께 수평적 분업에 대한 구조와 의식이 확산되었다. 분단과 전쟁, 단기간의 산업화야말로 현대한국의 독특성을 낳은 두 요소였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 p886


 분단의 역설 중 가장 크고 비밀스런 역설은 그것이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였다는 역설일 것이다. 전쟁 자체는 혹심하게 파괴적이었지만 그 전쟁이 남긴 질서는 경쟁적, 다른 말로 하여 건설적이었다는 배반성을 던져주었다. 중요한 것은 남북한간의 불꽃튀는 경쟁과 냉전의 한반도에의 자력적(磁力的) 집중은 두 국가와 분단질서를 안정시키는 기능을 수행하였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두 한국 모두 정권수준에서는 불안과 격동이 있었으나 국가는 매우 안정적이었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 p889


 현실적으로 한국전쟁은 합의된 경계선을 넘었다는 점에서 명백히 침략전쟁이었다. 그러나 학문적 수준에서 이 전쟁의 개념은 단순한 침략전쟁과는 다르다. 그것은 교전국 일방이 당사자간의, 또는 국제법과 협약에 의해 용인된 경계선을 넘는 군사행동과 국경을 넘는다는 의미에서의 침략전쟁이자, 다른 한편 분열된 민족을 합치려고 시도하였던 많은 국가들의 사례와 일치하는 민족내부의 단일민족국가의 형성 노력의 하나였다. _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2> , p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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