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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문화사(외)
신채호 지음, 박기봉 옮김 / 비봉출판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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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청의 난(妙淸-亂, 1135년 1월 19일(음력 1월 4일) ~ 1136년)은 고려 인종 때 승려 묘청 등이 금국정벌론과 서경천도론이 개경 귀족들의 방해로 무산되자 서경(西京)[1]에서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 군호(軍號)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하여 대위국(大爲國)을 선언하고 일으킨 반란이다. 대위국이라는 새로운 국가이념 차원의 반란은 김부식이 지휘하는 진압군의 공격을 받고 내부 분열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1년간 치열하게 지속되었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주의 사학의 선구자인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 1880 ~ 1936) 는 묘청의 난을 두고 '조선역사상 1천년래 제1대 사건'이라 했다. 묘청의 난을 가리키는 요즘 이름으로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있다. (출처 : 위키백과)


[사진] 묘청의 난 : 서경(西京)과 개경(開京)의 대립 (출처 : KBS) 


 민족의 성쇠(盛衰)는 항상 그 사상(思想)의 추향(趨向 : 추세)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으며, 사상의 추향이 혹 좌(左) 혹 우(右)로 되는 것은 언제나 어떤(某種) 사건(事件)의 영향을 받는 것이다. 그러면 조선 근세(近世)에 종교나 학술이나 정치나 풍속이 사대주의(事大主義)의 노예가 된 것은 어디에 그 원인이 있는가?(p444)... 나는 한 마디로 대답하기를, 고려 인종(仁宗) 13년 서경(西京) 전쟁, 즉 묘청(妙淸)이 김부식(金富軾)에게 패한 것이 그 원인이라고 한다.(p445)


 <조선사연구초 朝鮮史硏究草>에서 저자 신채호는 조선 역사상 1천년 이래 최대 사건을 묘청의 난으로 규정하고 있다. 저자는 묘청의 난을 화랑파의 사상을 이어받은 불교(佛敎)와 유교(儒敎)의 대립구도로 파악하며, 묘청의 난 이후 유교가 우리 사회의 주류(主流)가 되면서 사대주의의 병폐가 심해졌음을 본문 전반을 통해 주장하고 있다.


 기타 고려조 역대 외교에서 매번 강력하게 자존(自尊)의 의견을 발표한 자들은 거의 화랑파나 혹은 간접으로 화랑파의 사상을 받은 자들이었고, 비사(卑辭)와 후폐(厚弊)의 사대론(事大論)을 고집한 자들은 대개 유교도들이었다. 불교는 그 자체의 성질상 정치문제에 관하여 화랑파와 같이 격렬하게 계통적(系統的)인 주장을 갖지는 않았으나, 대개는 화랑파와 가까웠다.(p452)


 불교는 원래 세상을 벗어난 교(敎)일 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에 수입되더라도 항상 그 나라의 풍속 습관과 잘 타협하고 다른 교(敎)를 심하게 배척하지 않지만, 유교는 그 의관(衣冠), 예악(禮樂), 윤리(倫理), 명분(名分) 등을 그 교(敎)의 중심으로 삼기 때문에 전도(傳道)되는 곳에는 반드시 표면까지의 동화(同化)를 요구하면서 타교(他敎)를 매우 심하게 배척한다. 그 때문에 이때의 유교 장려에 대하여 화랑파와 불교파 사람들이 불평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국 인민들도 그것을 못마땅해 하였다.(p449)


 <조선사연구초>를 통해 저자는 묘청의 난에서 김부식으로 대표되는 유가 사상의 승리로 우리 사회에 사대주의가 팽배해졌음을 통탄하고 있지만, 정작 '조선 역사상 1천년 이래의 최대 사건 묘청의 난'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보다 정확하게는 '묘청'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서술한 바를 간략히 총괄(總括)하여 말하면, 조선의 역사는 원래 화랑파(郎家)의 독립사상(獨立思想)과 유가(儒家)의 사대주의(事大主義)로 나뉘어 왔는데, 갑자기 묘청이 불교도로서 화랑가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하다가 그 거동이 너무나 미치광이처럼 제멋대로여서 결국 패망함으로써 드디어 사대주의파의 천하가 되었다.(p475) 


 묘청의 거동이 미치광이처럼 제멋대로였다는 말의 근거는 무엇일까. 단재의 비판은 당시 묘청을 중심으로 한 화랑파가 주도적인 입장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급하게 서경으로 천도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묘청의 행동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예종본기(睿宗本記) 나 묘청전(妙淸傳)을 보면, 당시 칭제북벌론(稱帝北伐論)으로 기운 자가 거의 전 국민의 반이 넘었으며, 정치세력의 중심인 군주 인종(仁宗)도 십중팔구 묘청을 신임하였다. 비록 김부식, 문공유(文公裕) 등등 몇몇 사람의 반대자가 외적의 형세를 과장하면서 그 전통적 사대주의의 보루를 고수하려고 하였으나, 이를 공격여 깨뜨리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제 이같이 성숙한 시기를 잘 이용하지 못하고, 김부식의 상소문 하나로 인종(仁宗)이 평양천도 계획을 중지한 것에 문득 화를 내고는 서경에서 군사를 일으켜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 : 하늘이 파견한 충의 군대)'라 자칭하고, 국호(國號)를 '대위(大爲)'라 하고 연호(年號)를 '천개(天開)'라 하고, 평양을 상경(上京)으로 정하고는 인종에게 상경의 새 궁궐로 옮겨와서 그 국호, 그 연호를 받기를 요구하니 그 시대의 신하의 예(禮)로 볼 때 그 얼마나 제멋대로 날뛰고 설친 행동이었던가.(p462)


 '묘청의 난' 이후의 상황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내용을 정리하고 있다. 즉, 고려 중엽 이후 유교와 사대주의가 세력을 키우다가, 결국 조선(朝鮮)의 건국을 계기로 사대주의는 우리 사회의 주요 정치사상으로 자리잡게 되면서 우리 민족의 자주성이 말살되었다는 것이다.


 화랑가의 윤언이(尹彦頤) 등은 유가(儒家)의 압박 아래서 겨우 그 잔명(殘命)을 구차하게 보존하게 되고, 그 뒤에 몽고의 난(亂)을 지나면서 더욱 유가의 사대주의가 득세하게 되었다. 이조(李朝)는 창업(創業) 자체가 곧 이 사대주의로 성취되었으므로 화랑파는 완전히 멸망하여 버렸다. 정치가 이렇게 되니 종교나 학술이나 기타 모든 방면에서 사대주의(事大主義)의 노예가 되었다.(p475)


 '묘청의 난'(1135)으로부터 약 900년이 흐른 지금 우리 사회는 많은 변화가 있어왔다. 저자가 사대주의의 온상으로 지적했던 유교는 이제는 불교와 더불어 우리전통사상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되었고, 고려 당시 유교의 위치를 이제는 기독교(基督敎)가 대신하고 있다. 사대(事大)의 대상 역시 중국(宋)에서 미국(America)로 바뀌었으며, 우리나라는 분단(分斷)되었고, 주변의 상황은 고려 당대보다 더 복잡해졌다. 이러한 외부 상황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묘청의 난 당시와 같이 '자주(自主)'와 '사대'간의 내부 대립 문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자주'로 대표되는 화랑파의 세력이 사대로 대표되는 유가파보다 더 힘을 얻었던 상황 역시 현재와 비교하게 된다.


[그림] 2018년 2월 기준 정당 지지도 (출처 : 오마이뉴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길을 걸어야 할 것인가. 이 질문은 또한 촛불 혁명을 통해 시민의식이 깨어나 전례없이 자주적인 사상이 힘을 얻고 있는 지금 섣부른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치환할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에 대해 역사학자인 단재가 <조선사 연구초 : 조선 역사상 1천년 이래 최대 사건>을 통해 답(答)을 주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리뷰를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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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9 1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29 1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29 14: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29 14: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29 16: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29 16: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8-03-29 14: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천하의 몹쓸 인간인 사대주의자 김부식 일파로
대표되는 기득권층의 공고함에 다시 한 번
전율하게 됩니다.

유교는 원래 민주공화주의와는 공존할 수 없는
그런 이데올로기라는 생각이 드네요.


겨울호랑이 2018-03-29 14:56   좋아요 0 | URL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는 <조선상고사>전반을 통해서 유교의 사대주의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중화사상, 사대주의가 유교의 폐단이라고 해석하신 부분에 대해서 공감을 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 유교의 긍정적인 부분도 무시할 수는 없다는 생각 또한 듭니다. 도올 김용옥 교수같은 분들은 우리 나라에 여러 종교가 공존할 수 있는 기본 전제가 유교 문화권이라는 해석을 하시는 것을 보면, 긍정적인 요소 또한 유교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큰 나라 중심의 사대주의는 경계해야겠지요... 레삭메냐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삼국사기>는 고대사 연구에 가장 중요한 사료임에도 논란이 많은 자료인 듯 합니다. 아무래도 저자의 모화사상이 반영된 저서라 그렇겠지요. 그런 면에서 얼마전 국정교과서 문제를 다시 바라보게 됩니다. 역사를 통해 일종의 패러다임을 만드는 작업을 보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되네요...
 
프레이저 보고서 - 악당들의 시대, 한국현대사와 박정희시대에 대한 가장 완벽한 평가서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국제기구소위원회 지음, 김병년 엮음 / 레드북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우리에게 <프레이저 보고서 Fraser Report>로 알려진 이 보고서는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국제기구소위원회(Subcommittee On International Organizations of the Commitee On International Relations U.S. House Of Representatives)에서 1978년 10월 제출된 <한-미 관계 조사 보고서 Investigation Of Korean-American Relations Report>가 원제다. 원제목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프레이저 보고서>는 당시 한국과 미국과의 관계에 대한 많은 숨겨진 내용이 담겨있다. 그리고, 보고서의 많은 내용이 보고서가 작성된 후 약 40년이 지난 우리의 삶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이번 리뷰에서는 <프레이저 보고서>의 내용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북한에 대한 위협 강조와 현실


 이미 1978년에 한국군의 능력은 북한을 능가한다는 국방부 부차관보의 증언을 보더라도 한국군의 전투력은 결코 북한보다 떨어지는 수준이 아니었다. 또한, 위급한 상황에서도  무기의 해외 수출을 추진하던 당시 상황을 보더라도 북한의 위협은 실질적인 위협이 되지 못함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정부는 왜 1970년대 미군 철수를 그토록 반대했던 것일까? 그것은 미국의 국방예산 지원금과 생필품이 박정희 정권에게 돈벌이의 수단이되었기 때문이었다.


[사진] 태극기 집회(출처 : 뉴스1)


 '한국인들이 북한에 대항해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상황이 되면, 그들은 결정적으로 외국세력에 의지할 필요가 없는 더욱 안정된 억제력을 기본적으로 가지게 됩니다. 그들은 스스로 지상의 역할을 처리할 수 있는 상황에 도달했습니다... 미 국방부 부차관보 아브라모위츠(Morton Abramowitz)는 대한민국은 지금(1978년 현재) 북한과 더욱 대등하게 걷고 있으며, 전쟁 수행을 위해 동맹국의 주둔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고 덧붙였다.'(p124)


 '이곳 사람들은 매우 격양되어 있다. 만일 한국인들이 최근 수년 간 말해왔던 것처럼 북한의 위협이 그렇게 엄청나다면, 그들은 어째서 자신들의 방어에 필요하다고 주장해온 것들을 해외에 팔려고 하는가?'(p144)


 '한국의 국방 능력을 키우려는 미국의 군사정책 역시 경제원조에 영향을 주었다. 미국의 승인 아래 한국정부는 미국이 한국의 국방예산을 지원하기 위해 원조한 생필품들을 국내에서 판매하여 그 수익금들을 사용할 수 있었다.'(p257)


2. 불안한 국내 정치 상황 : 농촌문제와 도시 빈민 문제


  박정희 정권은 불안한 정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정치 자금이 필요했다. 그것은 한국의 경제 성장이 국내 곡물 가격 억제로 인한 인플레이션 요인 통제, 그리고 저임금 노동력을 지속적으로 시장에 공급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한국 경제에 있어 농촌 문제와 도시 빈민 문제는 197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중요한 불안요인이 되었고, 정권의 정당성이 결여된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돈이 필요했다. 


 '1960년대 PL480 프로그램은 식량 요구들을 충족시키고 대규모 방위시설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재원의 일부를 한국정부에 공급함으로써, 한국 경제의 발전에 기여했다. 이 기간 동안 농업분야는 산업분야만큼 급속히 성장하지 못했는데, 한국정부가 농업분야로 재원들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농업분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 1970년대 초까지 PL480은 농업 성장률과 생산성, 그리고 수입을 꽉 억눌렀던 것으로 보인다.'(p339)


 '1960년대 중반 경, AID는 한국정부가 일부 국내 식량 곡물에 대한 가격을 시장가격 이하로만 허락하는 정책 때문에 농촌 소득은 최소한의 증가만 이루어 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정책과 함께 농촌 소득이 낮은 성장을 초래하는 이유는, 한국정부의 인플레이션 억제 노력과 도시 저임금노동자들에게 싼 생필품을 제공할 필요성 때문이었다.(p288)... 1960년대와 마찬가지로 1970년대에도 도시노동자의 소득은 증가했다. 그러나 1975년과 마찬가지로 도시노동자의 월 평균소득은 월 가계지출보다 적었다. 대부분의 경우 한국정부는 값싼 노동력의 공급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조합을 유순하게 했고, 권위주의적 수단에 의지했으며, 고용주의 협력을 얻는 정책을 지속했다.'(p296)


 수출경쟁력 확보를 위한 낮은 임금 강요는 40년 전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최저임금제와 관련된 논란은 한국경제의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제조업 임금은 수출 경쟁력을 얻기 위해 의도적으로 낮게 유지되었고, 조직된 노동자는 극도로 제한을 받았다. 1960년대의 대부분과 1970년대 초반을 통해 농산물 가격 또한 도시의 불만을 원천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낮게 유지되었다. 이것은 농촌과 농업의 발전을 방해했다. 모든 영역에서의 사회복지는 경제 개발의 뒤편으로 밀려났다.'(p328)



3. 무능한 한국 정부


 이러한 불안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박정희 정부는 정치 권력을 유지시키기 위한 정치적 압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민심을 달래기 위해 박정희 정권은  끊임없는 재정 확대책을 펼칠 수 밖에 없고, 항상 재정 위험에 노출될 수 밖에 없었다. 정권 유지를 위한 끊임없는 재정지출 속에서 박정희 정권은 한국경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당시 박정희 정부는 한국 경제를 낙관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의 원조만을 기대하고 있었음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지난 6개월 동안 한국의 경제정책은 단지 무책임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낮은 외환보유고와 함께 국제수지 적자가 증가하고 단기 신용 역시 이미 한계에 달했는데도 긴축보다 팽창을 선택했다는 것은 극히 위험한 운용이다. 재계 지도자들은 그 위험을 명확히 알고 우려하지만, 이미 어려워진 정치상황을 악화시키지 않기 위해 성장과 고용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러한 엄청난 정치적 압력에 의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 - 1975년 5월 美 재무부 보고서 - '(p315)


  '한국의 입장에서는, 미국 원조 없는 한국 경제의 미래에 대한 자신감이 결핍되어 있었다. 따라서 심리적, 경제적 의존 양상이 뿌리 깊었다. 더 나아가 한국의 정책입안자들은, 국민소득이 약간이라도 증대되면 그에 상응해서 미국이 원조를 감소시킬 것이라고 우려했다. 미국의 경제 원조로 한국군을 유지했기 때문에 그들의 염려는 특히 컸다.'(p267)


 오히려, 한국경제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은 <프레이저 보고서>에서 보이고 있다. <프레이저 보고서>에 적시된 한국의 미개발 자원이 '인적 자원(人的 資原)'이라는 사실을 박정희 정권은 알고 있었을까. 결국, 한국경제 성장의 실질적인 주역은 박정희 정권이 아니라 주권자인 국민(國民)이었음을 우리는 다른 나라의 보고서를 통해 확인하게 된다. 우리의 장점을 우리가 모르고 외국에서 인정받는 것은 슬픈 일이다.


 '몇몇 거대한 정부소유 기업들은 부실한 관리와 비경제적 요금 구조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 해외 부문에 있어서 엄청난 지불 격차의 균형은 오로지 미국원조에 의해서만 지탱되었다.... 1950년대의 토지개혁은 비록 가난했지만, 농촌 부문을 정치적으로 안정시켰다. 비록 비효율적인 수입대체전략으로 방향을 잡았지만 1950년대 동안 산업 능력은 꾸준히 발전되었고, 보다 효율적인 용도로 전환될 수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한국인들 스스로가 근면하고 교육받고 훈련된, 엄청나다고 표현될 만한 미개발 자원이었다.'(p260) 


4. 정치 기부금 : 베트남 전쟁과 기업 뇌물


 박정희 정부는 통치 자금 마련을 위해 공적개발원조(ODA: 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만 손을 댄 것이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베트남 전쟁 참전을 들 수 있다. 당시 미국 정부는 베트남 파병으로 인해 약 10억 달러에 해당하는 액수를 한국 정부에 지불했으며, 그 금액은 당시 한국의 외화 수령액을 고려한다면 매우 큰 금액이었다. 또한, 당시 유력한 한국의 기업들의 명단을 작성하고 이들로부터 뇌물을 받았고, 이는 선거 때마다 정치자금으로 활용되었다. 최근 K-재단과 미르 재단 문제의 뿌리는 이미 반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할 것 같다.

 


 [사진] K-재단, 미르재단(출처 : SBS뉴스)


 '미국정부는 최근에 합의된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과 연계하여, 양국 대통령 간에 합의된 1억 5천만 달러의, 또는 그 이상의 개발차관을 우호적으로 검토하고 있음을 반복해서 확인했다. 이에 따라 미국정부는 다음 5년에 걸쳐 한국에 상당한 액수의 재원을 차관으로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p272)... 미국정부는 특히 통화 정책의 개혁을 원했다. 선거 시기에 자금 공급을 확대시키려는 한국정부의 경향은, 만성적 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하고 개인 저축을 장려하기 위해서는 중단되어야만 했다.'(p274)


 '1973년에 회계감사원이 지적했듯이, 미국이 한국군의 베트남 모험의 결과에 지불한 금액을 산정하는 것은 자료 부족으로 어렵다. 1970년에 국방부는 미국의 해외 안보협정과 공약에 관한 소위원회의 사이밍턴(Symington) 상원위원에게 추정을 제출했는데, 다음과 같이 복사되어 있었다. 9억 2,700만 달러였다.(p281)... 미 회계국은 1966년부터 1970년 사이에 베트남전과 관련된 소득이 연간 2억 달러라고 추산했다. 대충 잡더라도 그 금액은 1966년에는 한국의 외화 수령액의 40%를 차지했으나 1970년도에는 15%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한국의 만성적인 외화부족을 고려한다면, 15%조차도 중요했다.'(p282)


 '1971년에 대통령선거가 다가오자, 정치자금의 필요는 더욱 심화되었다. 전해진 바에 의하면, 박대통령은 1970년 6월에 민주공화당에 십만 달러씩을 기부할 수 있는 한국 기업들의 명단을 작성하도록 직접 김성곤에게 지시했다고 한다. 그 명단에는 한국의 거대한 재벌들, 럭키 그룹, 현대 건설, 삼성 그룹, 김성곤이 경영하는 쌍용 그룹 등이 포함되었다.'(p370)


5. 정치 자금의 활용


 박정희 정부는 이렇게 모은 정치 자금을 이용하여 미 상하원 의원들을 설득하였으며, 친(親) 정부 활동 자금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일부는 자신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선거구에 회사 본부가 소재해 있는 하원의원들을 설득하기 위해, 이미 한국에 투자해 온 거대기업들(Gulf, Caltex, American Airlines, Fairchild)을 지속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한국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한 프로그램들과 활동들은 외부의 출처들과 다양한 수단들을 이용해서 자금을 공급받았다... 예를 들어 쌀 수수료는 박동선의 조지타운클럽과 다른 프로젝트들의 재정을 도왔다. 한국문화자유재단과 그 계획인 자유아시아방송을 통해 한국정부는 미국 내 출처로부터 전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자금을 지원받으면서 친정부 활동들을 지도, 통제할 수 있었다.'(p170)


6. 개인적 뇌물 수수 


 정부 정치자금 중 일부는 개인 재산으로 축적되었고, 이중 일부는 박정희에게도 전달되었다. 박정희에게 전달된 자금은 청와대 금고와 스위스 계좌에 예치되는 형태로 보관, 유지되었다. 이러한 정치자금과 관련한 중심에는 한국중앙정보부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이들은 1965년 일본과 국교정상화 이후 일본으로부터 많은 원조를 받아왔다.



[사진]김-오히라 메모(출처 : http://blog.naver.com/PostView.nhn?logId=minlovemuch&blogNo=100093008276)


 '1969년 이후 모든 형태의 대출 유용성이 감소되었다. 그것은 정부 정치자금의 기본적 원천들 중 하나의 감소를 재촉했다. 세금 체계를 통해 자금을 증가시킴으로서 문제를 해결하하려는 노력이 명백히 착수되었지만 -그것은 제도의 붕괴를 의미했다- 그러한  노력들은 부패의 일반적 수준이 반영된 한국정부 관리들의 입장에서는 개인적 뇌물 수수의 범위가 방해받는 것이었다. 1970년 경에는 이후락, 김성곤, 김혁욱이 각각 축적한 개인 재산이 1억 달러에 달한다고 한 청와대 고위급 관리가 주장했다.'(p369) 


 '이후락에 의해 수집된 자금들이 스위스 은행계좌에 예치되었고, 원칙적으로 대통령에 의한 용도였다고 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이후락과 다른 사람들도 대통령에게 자금을 제공했다. 그 돈들은 청와대에 있는 대통령 탁자 뒤에 있는 금고 안에 보관되었다고 한다. 스위스 계좌의 존재는 은행 기록들로 구체화되었고, 이동훈(이후락의 아들들 중 한 명)에 의해, 그리고 대통령을 포함한 다수의 청와대 고위관리들 중 최측근에 의해 확인되었다. 이동훈은 본 소위에서, 스위스의 그 돈들은 대통령이 사용하기 위한 "정부자금"이었다고 진술했다.'(p370)


 '워커힐 리조트 건설과 일본에서 자동차 수입과 같은 상업적 거래들에 한국중앙정보부가 깊이 빠져들었다는 믿을만한 표시들이 있었다. 그 후 한국중앙정보부가 워커힐 프로젝트에서 수백만 달러의 순이익을 올렸다고 추정되었다. 1963년 봄 기간 동안 한국중앙정보부는 주식시장의 은밀한 조작에 휩쓸려 들어갔고, 이 공작으로 거의 4천만 달러를 챙겼다고 추정되었다... 김-오히라 메모의 공개는,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재정으로 사용될 선금조로 1억3천만 달러, 그리고 다가오는 선거를 위한 민주공화당 자금으로 2천만 달러를 김종필이 일본에서 받았다는 혐의들의 가죽 끈을 풀어버렸다.'(p361)


7. 한국중앙정보부(KCIA)와 감찰


 한국중앙정보부의 권한은 막대한 것이었으며, 한국 내 국민 뿐 아니라 해외 동포들을 감시하는등 민간인 사찰을 통해 언론 통제 등에 나섰으며, 이를 통해 반(反)정부 활동을 억압했음을 우리는 보고서를 통해 확인하게 된다.


[사진] 군 기무사 민간인 사찰(출처 : 통일뉴스)


 '전 한국중앙정보부(KCIA) 부장이었던 김형욱은 그것이 미국의 CIA와 FBI의 기능을 합친 것이라고 말했다. 전 한국외교관 이재현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실제로 한국중정은 한국인들 삶의 모든 부분에 관여한다."'(p147)


 '한국교민 담당관으로서 김상근의 다른 책무들 중 하나는, 유신헌법에 대한 선전 자료를 배포하고 반정부 활동들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시위에 관한 정보를 수집할 때 그는 영사관 관리들과 협력했고 한인교포들을 이용했다. 또한 그는 그러한 정보를 위해 지역 한국 언론의 기사들을 읽었다.'(p152)


 '한국 법에 의하면, 비록 미국에서 발행되었다고 할지라도 서울사무소가 미주 동아의 내용에 책임이 있다고 여겨졌다. 1976년 1월 13일자 편지에서 김남은, 만약 정부의 비상계엄령을 위반한 기사가 앞으로 발행된다면 소환하겠다는 협박을 받았다. 한국중앙정보부는 한국정부에 비판적인 편집 정책을 가진 미국 내 다른 한국어 신문의 발행자들을 괴롭히고 협박하려고 했다.(p468)... 때때로 한국중앙정보부는 한국정부와 정책을 유리한 관점에서 제시하는 출판 및 방송매체를 공개적으로 설립하거나 혹은 자금 지원하려고 시도했다.'(p469)


 이외에도 프레이저 보고서의 주요한 내용으로는 통일교와 한국정부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다. 교주 문선명이 이끄는 통일교 조직이 교회와 국가의 분리가 폐지된 범세계적 단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어떠한 활동을 했으며, 이러한 활동이 한국 정부와 어떤 영향이 있는가에 대한 내용이 보고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이처럼 <프레이저 보고서>는 1970년대 한국의 고속성장이 농촌과 도시 빈민의 수탈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이러한 사회적 불만을 누르기 위해 박정희 정권이 어떠한 방식으로 정치자금을 마련했는지 그리고 개인자산을 만들었는지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정권 유지를 위한 한국중앙정보부의 중심적 역할에 대해서도 상세히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한국 현대 정치사의 깊은 부분을 들여다 볼 수 있다. <프레이저 보고서>의 중심이 '한-미 관계'에 있기 때문에 일정 부문 한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권이후의 극우 정권이 '왜 미국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가'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 보고서라는 한계로 읽기에 다소 지루함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를 통해 지난 '이명박- 박근혜 정부' 기간의 납득하지 못할 정부의 행태를 잘 설명해 준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에 관심있는 이들에게 일독(一讀)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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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09-02 14: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씨......
얼추 알고 있었지만 자세히 알게 되니 더 열받네요.

겨울호랑이 2017-09-02 14:38   좋아요 1 | URL
네...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들이 하는 모습은 큰 차이가 없는 것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시대를 거슬러 살고있는가를 실감하게 되네요...

AgalmA 2017-09-02 16: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금 꼼수 부리려고 통괄로 걷을 수 있는 부가가치세를 지금처럼 마련한 게 박정희로 알고 있습니다. 종교계 세금 걷는 거 가지고도 여당인 민주당 의원이 나서서 만류하는 모양새 하며... 세금 조정만 잘 해도 문재인 정부가 국회에 예산 굽신 안해도 될 텐데 세금 조정할라치면 국회며 야당이 포퓰리즘이다 어쩐다 또 얼마나 발목 잡을지ㅎ;;

겨울호랑이 2017-09-02 16:19   좋아요 1 | URL
내년 지방 단체장 선거에서 민심의 흐름을 제대로 보여줘야할 것 같아요...한동안 구체제와의 갈등은 피할 수 없는 것 같네요...

나와같다면 2017-09-02 2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한의 군사력은 북한에 비해 열세인가 우위인가?

리영희 선생님은 1980년대 남북한 군사력을 비교해 이미 남한이 북한에 비해 월등히 우월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음을 입증하셨죠..

겨울호랑이 2017-09-02 21:51   좋아요 1 | URL
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풀려진 공포와 이를 이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기득권을 보면 그들의 저의에 대해 의심할 수 밖에 없네요..

2017-09-03 1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9-03 1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1950년 7월 25일 - 29일 충북 영동 인근노근리 마을로 가는 쌍굴다리에서 미군 제7기갑여단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 발생한다. 사망자는 약 400여명. 인근 마을 주민이 500-600명 중 일부만 살아남은 그 날의 기록이다.

「그 여름날의 기억」은 한국 전쟁 이후 신속하게 도망간 이승만 정부의 모습과 보도연맹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무기력한 정부와 극심한 혼란 속에서 7월 23일 미군이 임계리로 들어온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 국민들한테 서울을 사수하자고 그처럼 떠들던 정부가, 국민들 몰래 서울을 버리고 도망쳐 왔단 말인가. 겨우 사흘밖에 버티지 못하고 서울을 적 앞에다 내던진 무책임한 정부. 겨우 그런 정부에게 속고 버림받은 불쌍한 국민들...‘(p55)

주민들은 정부에 대한 배신감을 느꼈지만, 마을로 들어온 미군들에의해 주민들은 강제로 피난하게 된다. 공산주의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주민들과는 달리 미 제1기갑사단과 제25보병사단은 피난민 속에 적이 있을지 모르니, 모든 피난민을 적으로 간주해 ‘총격‘을 가하라는 명령을 이미 받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 가운데 누구도 공산주의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없이 고루 나눠 갖고, 고루 잘 살게 해 주는 나라를 만드는 게 공산주의라는 것이 그이들이 아는 전부였다.‘(p91)

사흘 동안 계속된 총격, 폭격과 기총소사 후 미군은 살아남은 일부 생존자를 치료해 주지만, 노근리 굴다리에서의 학살은 계속 되었다. 정작 굴다리에서 생존자들을 구출해 준 것은 그들이 그토록 피해가고자 했던 ‘인민군‘이었다.

‘군의관들은 창자가 들여다보일만큼 살점이 뭉텅 떨어져 나간 아내의 오른쪽 옆구리를 꿰매고 수액을 꽂아 주었다... 한 쪽에서는 죽이고, 다른 한 쪽에서는 치료해주는 이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자들인가? 두 얼굴을 한 이방인들.‘(p514)

「그 여름날의 기억」은 3일 동안 일어난 한국전쟁의 모습을 그리고 있지만, 그 안에는 한국현대사가 담겨 있다. 노근리 사건속에 그려진 무책임한 정부, 미군문제, 민간인 학살과 피해 등의 문제는 지금도 우리와 연관된 문제다. 위안부 문제, 제주 4.3 사건, 보도연맹사건, 베트남 파병, 5.18민주화 운동, 6.10 민주화 항쟁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흐름. 그 일련의 흐름속에서 우리는 때로는 가해자로, 때로는 피해자로 살아왔다.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과제는 이런 역사 문제에 대한 해결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현대사의 문제 해결은 이에 대한 ‘응시‘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너무 가슴아프지만, 상처를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과거의 상처를 치유할 수 없으리라.

2017년 5월 18일.
「5.18 기념식」에서의 대통령 연설을 통해 해결되지 않은 현대사의 상처 치유에 대한 희망을 품어본다. 마지막으로 노근리에서 숨져간 모든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편안한 안식을 기원하며, 이번 리뷰를 마친다.

ps. 「그 여름날의 기억」은 흑백채색의 만화책이라 가독성이 좋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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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7-05-20 15: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영화<작은연못>도 수작이었어요
이 책도 읽어보고 싶네요^^



겨울호랑이 2017-05-20 15:16   좋아요 3 | URL
저는 아직 영화를 못봐서.. 저는 「작은 연못」을 봐야겠군요. 북프리쿠키님 좋은 영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커피소년 2017-05-26 23:37   좋아요 1 | URL
저도 글을 읽고 영화 작은 연못이 생각나더군요..^^

시이소오 2017-05-20 15: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만화책이 있었군요. 좋네요.
이번 정부는 국가가 자행한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조사와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사려깊은 보상이 이루어지면 좋겠어요. 좋은 책 소개해주셔 감사합니다 ^^

겨울호랑이 2017-05-20 15:47   좋아요 2 | URL
전체 페이지가 620페이지라 조금 두툼하지만 부담스럽지 않게 읽을수 있습니다. 시이소오님 즐거운 토요일 오후 되세요^^:

커피소년 2017-05-26 23:39   좋아요 1 | URL
앞으로도 읽기 쉬운 역사 책이 많이 만들어졌으면 합니다. 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만화 역사책은 많지 않은 것 같더군요..

2017-05-20 2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20 2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와같다면 2017-05-20 20: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네바 협정
민간 주민 및 민간 개인은 군사 작전으로부터 발생하는 위험에서 보호되어야 하며 적대 행위에 직접 가담하지 않는 한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공격은 금지된다

기억은 저절로 갖는 것이 아니예요
망각에 힘을 다해 저항할 때 비로서 갖게 되는 결실이죠

그래서 우리는 기억해야 해요..

겨울호랑이 2017-05-26 23:39   좋아요 2 | URL
나와같다면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무기력에 빠진 이들이 폭력을 가졌을 때의 그 잔인함. 그리고 그에 대한 기억은 또다른 불행을 막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revoman 2017-05-22 06: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첫문장 비군 → 미군 맞나요? ^^

겨울호랑이 2017-05-22 06:41   좋아요 0 | URL
^^: 감사합니다, revoman님 덕분에 오타 수정했습니다^^:.
 
대한민국사 2 - 아리랑 김산에서 월남 김상사까지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2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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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史 02>는 2003년 한겨레 신문에 '한홍구의 역사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연재된 기사를 편집한 책으로 1권에 이어 한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짚어내고 있다. 2권에서는 외국인 차별과 베트남 파병 문제, 독재정권과 비전향 장기수 문제, 독립 투사와 김일 성 문제, 군대와 병역 기피 역사, 학원 문제 등을 다루고 있다. 그 중에서도 베트남 파병, 군 비리, 사학 문제 등을 이번 리뷰에서 살펴보자.


1. 반(反) 중국인 폭동과 베트남 파병


 우리는 과거 1923년 발생한 간토대지진(關東大地震) 당시 일본인에 의해 약 6,000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했음을 '관동대학살'의 이름으로 배웠다. 그렇지만, 우리 역사책은 우리가 저지른  1931년 7월 발생한 만보산(萬寶山) 사건과 이로 인해 발생한 반(反)중국인 폭동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


 '왜 전국적으로 발생한 반(反)중국인 폭동이 유독 평양에서만 집중적인 살상극으로 발전했을까? 전국에서 희생자가 고루 발생하였다면 모르지만, 평양에서만 집중적으로 사망자가 발생하였다는 사실은 평양의 폭동에 "검은 손"이 작용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컸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즉 일본, 특히 만주의 관동군과 연결된 조선 주둔 일본군이 만주침략을 앞두고 조선인과 중국인을 이간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다.'(p23)


  이 폭동의 결과 국제 연맹에 제출된 보고서에 의하면 사망 127명, 부상 393명, 재산피해 250만원이었고, 1930년 말 6만 9천명의 화교인구는 1933년말 3만 7천명으로 급감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우리나라에 화상(華商)의 영향력은 극히 미미하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국세의 90%와 국민소득(NI)의 60%를 화교사업가가 장악하고 있는 말레이시아(출처 : KOTRA)처럼 국가 경제가 화교 손에 넘어가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여겨야할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공정한 시장 경쟁이 아닌 잘못된 민족주의의 결과로 '화교의 이탈'이 발생했다면, 그리고 그 결과 화교의 세력이 약해졌다면 우리는 이에 대해 반성(反省)해야 한다.


 '우리는 일본에 대해 많은 것을 기억하고, 또 자주 분노한다. 일본의 교과서 왜곡에 분노하고, "일본군 성노예(정신대)"만행에 분노하고, 또 재일동포들에 대개 가해지는 차별에 분노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가해자가 되었던 사건들은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p27)


 지금도 우리는 일제(日帝) 하 위안부 문제와  졸속으로 합의된 2015년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로 반성없는 일본을 비난하고 있지만, 정작 우리의 과거 잘못에 대해서는 관대(寬大)한 것은 아닌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저자는 우리의 잘못을 '베트남 파병'과 당시 한국군에 의해 일어났던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를 통해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저자는 베트남 학살 문제에 대해 개인문제가 아닌 사회문제로 인식하고 있으며, 이에 대해 구조적인 접근과 사회적인 반성을 요구하고 있다.


 '당시에 벌어진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의 원인을 병사들의 심리상태 등에서만 찾으려 한다면 이는 구조적인 문제를 등한시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한국군의 작전은 1930년대 만주에서 일본군이 조선과 중국의 항일유격대를 대상으로 엄청난 폭력을 수반한 채 진행한 집단부락 건설 중심의 비민(匪民) 분리 전략을 그대로 빼어 닮았다. 한국군의 수뇌부는 일본군, 만주군 출신으로 구성되었으며, 특히 조선인으로 구성된 일제의 유격대 토벌부대인 간도특설대 출신들은 한국군의 수뇌부에 대거 포진했으며, 한국 전쟁 중의 "공비토벌 작전"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다.'(p31)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가 제기된지 20여년이 지났지만 문제에 대한 인식은 매우 낮은 것이 사실이다. 비록 아픈 역사지만,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냉철한 반성이 필요하다. 반성없는 우리를 세계는 어떻게 바라볼까를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우리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세계는 우리를 이스라엘과 같은 시선으로 바라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스라엘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Holocaust)을 비난하지만, 정작 이스라엘 내의 팔레스타인 人에게 이루어진 무자비한 탄압은 유대인들의 아픈 역사에 대해 공감하기 어렵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아픈 역사의 청산을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반성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된다.


[사진] 팔레스타인 분쟁(출처 : http://www.eatoncatholic.org/CatholicNews/view.asp?b_id=3599&offset=0)


2. 국민방위군과 통영함 


  1950년 12월 15일 '국민방위군 설치 법안'에 따라 약 50만명의 장정이 소집되지만, 이들은 군번도 무기도 군복도 지급받지 못한채 100여일 사이에 5만명이 죽고, 수십만명이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되었다. 


 '각 교육대 간부들은 국민방위군을 며칠씩 수용한 것으로 서류를 꾸며 예산과 식량을 빼돌렸다. 이런식으로 빼돌린 예산이 수사당국의 발표로는 24억원, 국회조사단의 주장으로는 50억원 내지 60억원에 달했다... 부사령관 윤익헌이 100여일 동안에 기밀비 명목으로 쓴 돈이 3억원. 국가기관인 감찰위원회(지금의 감사원)의 1년 예산이 3천만 원가량할 때였다.... <중앙일보> 간행의 "민족의 증언"에는 50만명의 대원 중 2할 가량이 병사나 아사했다고 되어 있고, <부산일보> 간행의 "임시수도 천일"에는 사망자가 5만명으로 되어 있다.'(p180) 


  '국민방위군 사건'은 당시 만연한 군(軍)비리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60년 전에 일어난 사건을 우리는 과연 과거의 일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 발생한 해군 구조함인 통영함의 어군탐지기 문제는 지금도 군 비리 문제로부터 우리가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일깨워 준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국가권력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또 다른 학살이었다. 이 사건은 다른 학살 사건처럼 방위군 병사들을 총을 들고 죽인 것은 아니지만, 그들에게 보급품과 식량을 지급하지 않고 횡령해 수만 명을 굶어죽고, 얼어죽고, 영양실조로 병들어 죽게 한 사실상의 학살 사건이다... 자신들의 동원할 수 있는 인적 자원에 대한 태도가 이런 지경이었으니 잠재적인 적이나 통비분자(通匪分者)들로 분류될 수 있는 민간인 집단에 대해 적극적인 학살이 일어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p185)


[사진] 통영함과 어군탐지기(출처 : http://m.blog.naver.com/thaitour/220185952493) 


3. 사학 재단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는 1911년 이상룡을 주축으로 윤기섭, 이시영, 이회영 형제와 김형선, 이장녕, 이장직, 이동녕 등 군인 출신이 중심이 되어 서간도(길림성 류하현)에서 개교한 독립군 양성 기관으로 현 경희대학교(慶熙大學校)의 전신이다. 신흥무관학교의 졸업생들은 서로군정서 의용대, 조선혁명군, 대한독립군,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등에 참여해 무장 독립운동의 한 축을 차지하며 민족 해방에 크게 기여했다.' (출처 : 위키피디아)


[사진] 신흥무관학교(출처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ohyh45&logNo=20123575985&parentCategoryNo=23&categoryNo=&viewDate=&isShowPopularPosts=false&from=postView)


  우리나라에서 근대 사립학교는 국권 수호와 민중 계몽교육 노력의 일환으로 시작되었지만, 현재 많은 사학들이 기득권들의 부(富) 세습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 이러한 사학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2005년 사립학교법을 통과시켰으나, 당시 한나라당의 반대로 재개정된다. 


  '2005년 사학재단 운영의 투명성을 높이도록 한 사립학교 법이 통과되었다.  학교법인 이사 중 3분의 1과 감사 2인 중 1인을 교수회, 교사회, 학부모회, 학생회 등이 참여하는 사학구성원 단체가 추천하여 선임하는 개방형 이사제 및 공익 감사제, 학교 법인 이사 정부를 7인 이상에서 9인 이상으로 확대, 학교법인 임원간 친인척 비율을 3분의 1에서 4분의 1로 대폭 축소하는 법안을 골자로 한 사립학교법은 2007년 재개정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출처 : 위키피디아) 


[사진] 한나라당의 사학법 반대(출처 : http://www.poweroftruth.net/news/mainView.php?uid=2892&table=byple_news)


 저자는 한국 사회에서 사학재단의 문제는 타인이 설립한 학교를 불법으로 갈취하고 이를 불법승계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다는 면에서 심각성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사학 비리의 모습을 전 대통령 박근혜의 정수장학회(正修?學會)에서 발견하게 된다. 


 '현재(2003년) 사립학교의 학교 운영비를 보면 중/고등학교의 경우 재단 부담금이 2%에 불과하고, 사립대학은 6%에 머물고 있다. 사립학교의 운영비가 실질적으로 등록금이나 시민들의 혈세에 의해 조달되고 있다는 사실은 사립학교들이 개인의 소유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 교육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최근의 사립학교법 개정을 둘러싼 논쟁에서 잘 드러나듯이 사학재단 관계자들과 수구세력은 언필칭 시장경제의 원리에 따른 소유권의 절대성을 들먹인다. 그들은 사립학교법 개정안이 사학재단의 경영권을 빼앗는 전체주의적 발상으로 "홍위병에 의한 문화혁명" 또는 "인민 위원회의 사학 접수"라는 터무니없는 언사를 써가며 반발하고 있다.'(p224)


 '설립자가 학교를 세우는 순간 학교는 설립자의 재산이라기보다 공익적인 학교법인의 재산이 된다. 민법 규정에 따르더라도 사학 이사진은 사학의 소유자가 아니라 관리자일 뿐이다. 백 보를 양보해서 사학재단을 사유재산으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특히 분규가 발생한 사학의 경우 현재 소유권을 주장하거나 설립자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거액의 사유재산을 출연하여 학교를 설립한 사람들인가 하는 점이다.'(p224)

 

<대한민국 史 02>는 2003년에 씌여진 교양역사서임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지적한 문제들이 약 15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문제로 계속되고 있다. 과연 우리의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가?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었던 문제에 대한 질문을 다시 던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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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7 1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17 1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17 1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17 1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5-17 14:4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뉴라이트의 실체를 알아보려고 《대한민국사》를 참고한 적이 있어요. 어두운 실체가 치밀하게 활동하고 있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9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을 거예요.

겨울호랑이 2017-05-17 14:53   좋아요 3 | URL
<대한민국사>를 뒤늦게 읽고 있는데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던 내용에 대한 정리가 쉽게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cyrus님 말씀처럼 우리가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혼란스럽기만 했던 어두운 실체들의 정체를 미리 알았더라면, 잃어버린 9년의 시기를 줄이거나 없앨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드네요.

닷슈 2017-05-17 14:5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출간즘에 한권한권 기다리며 보던기억이 나네요 바뀐게없고 악화될거라곤 당시엔상상도못했죠

겨울호랑이 2017-05-17 15:03   좋아요 4 | URL
네 불과 일주일전까지 더 나빠질까 걱정했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네요. 다행히 일단 더 뒤로 가는 것은 멈췄지만, 갈 길이 아직도 멉니다..

닷슈 2017-05-17 15:04   좋아요 3 | URL
맞습니다

시이소오 2017-05-17 20: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제가 정말 쓰고싶었던 독후감 인데 겨울호랑이님이 먼저 쓰셨네요.
왠지 감사합니다 ^^

겨울호랑이 2017-05-17 20:57   좋아요 1 | URL
휴, 먼저 쓰길 잘 했습니다. 시이소오님께서 지난 여름 작성하신 <한국현대사산책>처럼 리뷰를 작성하셨다면, 저는 리뷰 대신 아마 100자평으로 정리해야 했을 것 같아요. 시이소오님께서 후에 여유있으실 때 <한현산> 후반부 리뷰를 작성해 주시길 고대하는 1인입니다. 감사합니다.^^:

커피소년 2017-05-26 23:46   좋아요 1 | URL
추억의 리뷰네요..ㅎㅎ 시이소오님의 한현산 리뷰..ㅎㅎ 재미있게 읽었었죠..ㅎㅎ 겨울호랑이님의 조선왕조실록에 대한 리뷰도 재미있었습니다..ㅎㅎ 그러고보니 요새 역사 책 리뷰 쓰시는 분이 없더라는..ㅎㅎ

커피소년 2017-05-26 23: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사 책 중에서 가장 쉽게 쓰여진 책이더군요. 너무 글이 잘 읽혀서 한 번에 다 읽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 책을 읽고 한홍구 선생님의 필력(강의)에 감탄했습니다
. 강의내용을 옮겨 적은 책도 있는데 그 책도 좋더군요.

겨울호랑이 2017-05-26 23:46   좋아요 1 | URL
^^: 네 김영성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핵심적인 내용을 체계적으로 무엇보다도 쉽게 정리한 책이라 생각됩니다. 벌써 10년도 전에 쓰여진 책인데 지금도 같은 과제를 안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커피소년 2017-05-26 23: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게말입니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현재진행형이죠.. 방산비리 및 군대 고위 간부들의 비리로 말이죠.. 과거에 국민방위군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책에서 접하고 분노했던 기억이 납니다..ㅎㅎ 아마 군대에서 느꼈던 그런 불편함이 역사 속에서도 존재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더군요..ㄷㄷ
 
대한민국사 - 단군에서 김두한까지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1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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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史 01>는 한홍구 교수가 2003년에 쓴 한국현대사(韓國現代史) 관련한 역사교양서다. 대부분 현대사를 다룬 책들이 해방 이후의 시기를 시간적으로 기술하는 '편년체(編年體)'로 작성되었다면, <대한민국史>는 주제별로 서술된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 형식으로 작성된 차이가 있다. 시간적으로 서술된 역사책의 경우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건의 중요도 등을 독자(讀者)가 판단하기 어려운 반면, 사건 위주로 서술된 <대한민국史>는 현재 우리 삶과 밀접한 주제의 근원을 파들어가고 있어 보다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1권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민주혁명, 친일파문제, 수구와 보수의 차이, 주한 미군 문제, 징병제 등이다. 책이 쓰여진 2003년으로부터 14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부분이 해결되지 않은 현실 속에서 특히 다음의 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1. 승리의 짜릿한 감격은 없었다 : 민주혁명과 주권(主權)문제


 책이 쓰여진 2003년 이전에 우리나라에는 완성(完成)된 혁명(革命)은 존재하지 않았다. 엄밀하게 본다면, 2017년 3월 박근혜 탄핵과 5월 조기 대선을 가져온 '촛불 혁명'도 현재 진행중이기 때문에 지금도 우리는 제대로 시민혁명의 결실을 가져본 적이 없다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라 생각된다.


'시민혁명을 거치지 못하고 제국주의적 근대에 편입되었다는 것은 전근대의 부정적 요소들이 고스란히 다음 시대에 살아남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근대의 부정적 요소를 척결하는 시민혁명을 거치지 못한 현실에서 근대/전근대의 이분법적 도식은 우리 사회를 설명하는데 별로 도움이 안 된다.'(p19)


 그런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일반적으로 전근대(前近代)로 규정하는 조선시대보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낫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 저자 한홍구 교수는 그렇지 않다고 해석한다.  '전시작전통제권(戰時作戰統制權)' 문제를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적어도 임시정부의 광복군은 대한민국의 국군보다 주체(主體)의식이 있음을 알게 된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일까? 임시정부를 계승하였다고 자임하는 대한민국 역시 국군에 대한 작전지훠권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똑같이 작전지휘권이 없다 해도 상황은 너무도 달랐다. 1950년 7월 이승만은 작전지휘권을 미국에 이양하면서 맥아더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국 국민과 정부는 "귀하의 전체적 지휘를 받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남의 나라에서 군대를 조직해야 했기에 수치를 느끼며 작전지휘권을 넘긴 임시정부와 달리, 이승만 정권의 작전지휘권의 이양은 영광스러운 일이었다.'(p45) 


 '전시작전권 환수 문제(이하 전작권)'는 진보와 보수 진영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민감한사안이다. 전시작전권을 '한미연합사'에서 가지고 있어야 보다 효율적으로 작전을 수립할 수 있다는 것이 이른바 보수진영의 가장 큰 주장이다. 그렇지만, 전시작전권 환수는 진보주의자들이 아닌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시대의 전통을 가지기 위해 힘을 가져야한다는 논리가 오히려 '보수주의'에 맞는 것 같다. 최근 미국 국무장관 틸러슨의 발언처럼 "일본은 동맹, 한국은 파트너"인 상황에서, 우리는 북한이라는 적(適)만을 쳐다보고, 파트너인 미국에게 등을 내주고 있다는 생각을 버리기 힘들다. 이런 한국군의 상황을 보고 있노라면, 고대 그리스 보병 전술인 '팔랑크스(Phalanx)'가 연상된다.


[그림] 팔랑크스(출처 : http://rnsauswp.tistory.com/50) 


'팔랑크스'는 밀집된 대형으로 긴 창과 큰 방패로 구성원 서로를 보호하는 구조로 구성되기에 전방의 적에게는 강한 반면, 측방과 후방의 적으로부터는 매우 취약한 한계를 가진 전술이다. 주적(主適)(?)인 북한군외에는 매우 취약한 대응을 할 수 밖에 없는 한국군의 모습을 고대 그리스 전술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자신의 등뒤를 우방이라고 믿고 싶은 '미국'에게 맡기자는 보수주의자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2. 또 다른 생존 방식, '편가르기' : 진정한 보수의 과제


'보수주의자들은 전통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지켜야 할 전통의 내용이 과연 어떤 것일까? 보수주의자들은 "뿌리 없는 것"에 대한 깊은 혐오를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정작 한국에서 보수파를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이 바로 뿌리 없음이며, 전통적 보수주의와의 단절이다. 게나 고둥이나 다 보수주의자라고 목청을 돋우는 이 부박한 시대에 우리는 전통적 보수주의자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장엄하게 사라져갔는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p145)


 저자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보수주의자들이 지키고자 하는 전통은 아쉽게도 그 뿌리를 찾을 수 없다. 진정한 보수주의자들은 일제 식민지 상황과 한국전쟁을 통해 사라졌다고 보는 것이 저자의 시각이다. 저자가 생각하는 진정한 보수의 모습은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한 구한말(舊韓末) 독립운동가들의 모습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건창(李建昌). 그는 동학교도들이 난을 일으키자 짐승을 사냥하듯 이들을 소탕해야 한다고 강경하게 주장한 보수주의자였다... 이건창은 도지사인 관찰사를 두 명이나 파직시킨 장골이었다... 동학농민군을 비난하면서도 그들의 어려운 처지에 공감하고, 그들을 난에 이르게까지 한 학정을 더 매섭게 비난한 사람이 이건창이다.'(p146)


'당대 명문의 후예인 보수주의자들이 신학문을 배우는 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자금을 댔다. 그러고 나니 정작 자신들의 몸을 거둘 널빤지 관 하나 살 돈도 없어 가난한 동포들이 한푼두분 모아 마련해준 관에 몸을 누이고 고국으로 돌아와야했다.'(p150)


 역설적으로, 극우주의자들로부터 '빨갱이'로 낙인찍힌 이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이들이 태생적으로 '보수파'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념의 문제라고만 하기에는 한국의 이른바 진보파는 그 뿌리부터 너무 보수적이다. 장준하는 극우민족단체 민족청년단 간부, 함석헌은 신의주반공의거의 배후이자 공산주의가 싫어 월남한 사상가, 문익환은 미군 통역장교, 계훈제는 우익반탁진영의 행동대장, 김수영은 의용군에 나갔다가 탈출하여 거제도에 수용된 뒤 남쪽을 택한 반공포로, 리영희는 국군 장교 등이었다.'(p151)


저자에 따르면 우리 사회의 '보수주의자'들은 오로지 자신의 '기득권(旣得權)'을 지키고 싶은 무리일 뿐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신과 타인을 공간으로 분리시키고, '빨갱이'로 매도하는 모습을 우리는 '보수정당'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온건하고 합리적인 보수주의자들이 설 땅이 일제 말기의 친일 행위로 인해 사라졌다면, 진보적 지식인들은 한국전쟁과 민간인 학살 와중에 철저히 이 땅에서 사라졌다... 그들은 진정한 보수주의자들의 덕목인 도덕성, 일관성, 책임감, 지혜 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가당치 않은" 족속들이다. 그들은 한번도 정녕 지켜야 할 것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기득권을 버린 적도 없고, 희생한 적도 없다.'(p152)


 그렇다면, 우리가 보수주의자라면 진정으로 지켜야 할 전통(傳統)은 무엇일까. 고등학교 때 교과서에 수록되었던 글을 통해 잠시 전통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요컨대, 우리 민족 문화의 전통은 부단한 창조활동 속에서 이어 온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계승해야 할 민족 문화의 전통은 형상화된 물건에서 받는 것도 있지만, 한편 창조적 정신 그 자체에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민족 문화의 전통을 무시한다는 것은 지나친 자기 학대(自己虐待)에서 나오는 편견(偏見)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 - 이기백, <민족 문화의 전통과 계승> 中 -


그렇게 본다면, 개인적으로 우리가 지켜야할 가치 중 하나는 지금 진행되고 있는 '촛불혁명'이라고 생각한다. 아직은 전통이라고 하기에는 최근의 사건이지만, 민주화에 대한 뜻을 19세기말 동학혁명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면, 그 정신은 앞으로의 우리 노력에 따라 전통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진1] 눈 내리는 겨울 운동장



[사진2] 초봄의 운동장


[사진3] 꽃핀 봄날의 운동장


우리는 이미 겨울을 지내왔고[사진1] , 아름다운 민주주의의 꽃이 만개[사진3]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초봄에 와있다.[사진2]  그런 과정을 지나고 있는 현 시점에서 <대한민국史> 01은 우리 사회의 문제와 더불어 진정한 보수의 가치에 대한 물음을 제시한 좋은 교양서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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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7-04-28 13: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치는 잘 모르지만, 정당정치의 계보를 보면 민주당이 보수 정당이고 새누리당은 수구 정당이 맞는데
보수 진보 개념 자체가 잘못 쓰이고 있는듯 싶어요.

프레임정치는 그만들하고
보수진보 제대로된
정체성정치를 바래봅니다.





겨울호랑이 2017-04-28 14:16   좋아요 0 | URL
^^: 네 아무개님 의견에 동감합니다. 좀 더 세부적이고 실천적인 공약으로 평가할 수 있도록 정책을 제시해야 함에도 아직 우리 정치 현실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은 변화의 가능성을 이번 대선에서 볼 수 있지 않나 생각되네요.

2017-04-28 1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4-28 14: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립간 2017-04-28 14: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백범 김구 선생님을 우익, 단재 신채호 선생님을 좌익, 우남 이승만을 수구로 분류한 적이 있는데,

현실을 무시한 판단이라는 비판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http://blog.aladin.co.kr/maripkahn/7367147

겨울호랑이 2017-04-28 15:36   좋아요 1 | URL
^^: 마립간님의 분류가 한홍구 교수의 관점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으로 단재 신채호 선생님은 민족주의성향이 강한 분인데, 좌익으로 볼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드네요.. 물론 당대 사회주의/공산주의 계열이 민족주의 성격이 강하긴 합니다만, <조선 상고사>에 나타난 모습은 우익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게 됩니다. 약산 김원봉 선생님은 확실하게 좌익쪽일 것 같아요..

마립간 2017-04-28 14:45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 님의 지적에 동의합니다.

위의 판단은 대학 입학 직후에 했던 것인데, 당시에 ‘약산 김원봉‘을 포함해 북한 관련 인물 (그리고 죽산 조봉암 등)에 대해 무지했었습니다.

2017-04-28 19: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4-28 1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01 08: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5-01 08: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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