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의 『성찰』 입문
리처드 프랭크스 지음, 김성호 옮김 / 서광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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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의 전체 구조는 우리가 세계를 우리의 내부로부터 인식한다는 믿음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코기토를 통해 나는 내가 존재한다는 점을 인식한다는 것에 더해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곧 나는 나의 특수한 특성이나 내력이 아니라 사고하는 존재, 한 개인 그리고 자아임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데카르트는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이런 이해에 기초해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념과 물질적 사물에 대한 관념을 형성할 수 있다고 말한다. _ 리처드 프랭크스, <데카르트의 성찰 입문>, p188

리처드 프랭크스 (Richard Francks)의 <데카르트의 성찰 입문 Descartes’ Meditations>은 6개의 성찰로 이루어진 데카르트( Rene Descartes, 1596~1650)의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에 대한 입문서이며 해설서다. 저자는 이를 통해 데카르트의 주장을 설명하면서 때로는 비판하기도, 때로는 옹호하면서 데카르트 철학의 현대적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독자들은 이를 통해 기계론적 인간관, 이원론, 환원주의 등 현대 과학 사상의 뿌리를 발견하게 된다.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이 올바른 일인 까닭은 단지 우리를 진리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를 통해 동시에 신의 창조를 더욱 잘 인식하게 함으로써 신을 제대로 숭배하게 만들고, 신이 순전히 지적으로 창조한 세계를 나 자신의 소박한 방식으로 이해하도록 인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감각이 일으키는 혼란을 넘어서서 나의 자유의지를 사용함으로써 나의 도덕적 의무를 다한다. _ 리처드 프랭크스, <데카르트의 성찰 입문>, p235

<성찰>에는 유명한 코기토(cogito ero sum) 명제가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지만, 해당 내용은 제2성찰에 포함되며, 데카르트 논의의 확장에 한 축이 되는데, <데카르트의 성찰 입문>가 보여주는 전체 구조 속에서 독자들은 데카르트의 회의주의가 거부할 수 없는 제1명제를 찾기 위해 자신의 내부로 들어가 존재를 확인하고 이로부터 다시 외부로 나가는 흐름을 파악하게 된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하야 할 점은 <성찰>에서의 신(神)의 존재다.

<성찰>은 상당히 이중적인 성격을 지닌 저술이다. 한편으로 모든 것을 회의하는 사고하는 자가 진지하고 개방적인 태도로 탐구를 진행해나가는 방식도 그렇고, 다른 한편으로 더욱 깊은 수준에서 사실은 교회 권위자들이 믿는 바 대부분을 무너뜨리려 하면서도 저술 자체는 그들이 수용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애쓰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에 비추어 보면 <성찰>에서 신이 담당하는 역할 또한 일종의 가장이 아닌가? _ 리처드 프랭크스, <데카르트의 성찰 입문>, p216

데카르트가 의심할 수 없는 자신의 존재로부터 외부로 논의로 확장할 수 있다면 그 근거는 무엇일까? 제1성찰의 가정처럼 데카르트 자신이 꿈 속의 악령의 힘으로부터 벗어났다고 확신할 수 없다면 그의 성찰은 높은 벽에 가로막히게 되는데,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나가도록 이끄는 존재가 바로 우리의 유한성을 깨닫게 해주는 전지전능한 신이다.

이 무한한 실체(신)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이 실체는 일시적 기분이나 선호, 욕구 등을 전혀 지니지 않으며 그저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궁극적으로 설명할 수 있기 위해서 신은 모든 것을 행할 수 있어야 하며, 바로 그런 의미에서 전능하다.... 신이 모든 것의 설명 근거라면, 모든 존재의 근원이라면 신은 어떤 의미에서 궁극적인 진리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을 자신 안에 알려질 수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존재로 생각할 수 있으며, 바로 이런 의미에서 신은 전지하다. _ 리처드 프랭크스, <데카르트의 성찰 입문>, p222

결국, <성찰>에서 데카르트의 성찰은 지성과 의지의 결합을 통해 이루어지는 유한한 인간의 인식이 오류를 범하지 않고 절대진리인 신에게 이르기 위해서는 이성을 사용한 과학적 방법만이 유일한 길임을 6일간의 성찰을 통해 드러낸다.

오류는 지성과 의지의 결합에서 생겨난다. 나의 지성은 나에게 관념들을 제공하며, 나의 의지는 그들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결정한다. 따라서 지성은 내가 범하는 오류의 원인이 아니다. 지성은 단지 내가 고려해야 할 관념들을 제공할 뿐이다. 하지만 의지는 이와 정반대이다. 나는 무엇인든 원할 수는 있지만 자유롭기 때문에 잘못 원할 수도 있다. 오류는 내가 오류에 빠지기 쉽지만 제한되지 않는 나의 의지를 사용한다는 사실에서 발생한다. _ 리처드 프랭크스, <데카르트의 성찰 입문>, p232

우리는 <데카르트 성찰 입문>을 통해 데카르트 자신은 <성찰>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E 384~322)의 영향을 받은 스콜라 철학자들을 비판했지만, 정작 그 비판방식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74)의 신앙과 이성의 길을 사용했음을 확인하게 된다. 아직 중세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데카르트 철학의 전체 구조를 담아두고 그의 저작 <성찰>을 상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이 순수한 관찰에서 얻은 지식이 아무리 '정밀하다' 할지라도 이들은 참되고 불변하는 지식에 결코 이를 수 없었다. 이들의 탐구에서 빠진 요소, 곧 과학적 지식의 진정한 기초는 경험에 포함된 것이 아니라 관찰을 과학으로 바꾸는 요소인데 이 요소가 바로 이성이다. _ 리처드 프랭크스, <데카르트의 성찰 입문>,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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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이성비판』 강의 원전디딤돌 2
이수영 지음 / 북튜브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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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실천이성이 우리의 의지를 그 어떤 정념적 대상들과 상관없이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그저 생각할 수만 있었던 저 자유를 객관적 실재로서 파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천이성비판>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유와 윤리의 기초를 확보한다는 것. 이에 따르면 자유는 사변적으로 파악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실천적인 차원에서만, 다시 말해 윤리적 차원에서만 제대로 파악될 수 있는 것입니다. _ 이수영, <실천이성비판 강의>, p23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실천이성비판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을 풀이한 이수영의 <실천이성비판 강의>. 앞선 <순수이성비판 강의>를 통해 시공간을 통해 지각하는 대상에 입법하는 지성의 역할과 이에 대해 순수이성에 의한 월권이 상세하게 설명되었다면, 이제는 감각의 대상이 아닌 것에 대한 논의와 해설이 <실천이성비판 강의>에서 이루어진다.

자유의 범주들은 저 자연의 범주들에 비해 명백한 특징을 갖습니다. 자연의 범주들(지성의 범주들)은 무규정적인 객관들을 보편적인 개념들을 통해 인식하는 사고형식이었지만, 자유의 범주들은 자유로운 의사의 규정에 관계하므로 실천적 요소 개념들로서 직관의 형식(시공간) 대신 이성 중에 있는 순수의지의 형식을 주어진 것으로 그 기초에 두고 있습니다. _ 이수영, <실천이성비판 강의>, p123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서 널리 알려진 개념은 아무래도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A54)"는 정언명령(定言命令, Kategorischer Imperativ)과 자유(自由)라 생각된다. 얼핏 '~을 해야한다'는 명령과 자유의 개념은 상충되는 것으로 보이기에, 이들이 하나로 묶이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실천이성비판 강의>는 끊어진 듯 보이는 이 간격을 쉬운 해설을 통해 부드럽게 이어준다.

<실천이성비판>에서 자유는 정언명령이라는 도덕법칙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정념적인 조건들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상황, 감정 등과 같은 여러 조건들이 관여하는 순간 도덕법칙은 시공간의 현상으로서 규칙으로 전락할 것이기에, 도덕법칙이 형이상학적인 항상성을 갖기 위해서는 '정념'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이 이루어져야 한다.

실천 규칙이 하나의 실천 '법칙'이 되기 위해서는, 욕망하는 결과를 위해 우리가 필요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그런 결과를 낳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지 묻기 전에 의지 자체를 충분히 규정해야 합니다. 즉 가언적이지 않고 정언적이어야 합니다. 법칙이란 필연적인 것입니다. 이 필연성을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의지에 우연히 부착해 있는 정념적인 조건들로부터의 해방입니다. _ 이수영, <실천이성비판 강의>, p33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도덕법칙은 별이 빛나는 하늘에서부터 정언명령이라는 형식으로 우리 자신에게 주어지는데, 우리는 이러한 형식에 대해 '자유'의지를 통해 내용을 실천적으로 채워갈 것을 요구받음을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에 관계하는 것은 오로지 실천이성이라는 것을 <실천이성비판 강의>를 통해 이해하고, 이 개념들을 바탕으로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으로 들어간다면 좋을 듯하다. 너무 많은 설명을 해설서를 통해 다 이해하기 보다 큰 틀을 세워두고 상세한 내용을 채워간다면 한결 발걸음이 가벼우리라 생각한다. 이와 함께 독자들은 책을 읽으면서 일어나는 수많은 정념들로부터 얻어지는 부분적인 자유가 무엇인지 실감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PS.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칸트는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 타당할 수 있도록 하라는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쓴 책이 독자들에게 폭넓게 이해될 수 있도록 배려하지는 못했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된다...

정언명령은 선험적인 명제입니다. 경험을 통해 구성되는 것도 아니고 논리적 추론에 의해 도출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경험 이전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절대적인 명령입니다. 여기서 순수이성은 자신이 근원적으로 법칙 수립적임을 고지합니다. 감성도 지성도 아닌 이성 자신이 의지에게 명령하는 것이 바로 정언명령입니다. _ 이수영, <실천이성비판 강의>,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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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이성비판』 강의 원전디딤돌 1
이수영 지음 / 북튜브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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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가 하고자 하는 바는, ˝선험적 종합 판단의 가능성의 근거를 밝혀내˝고, ˝이런 판단의 모든 종류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A10)을 충분하게 규정하는 일입니다. 이는 ˝형이상학의 성패˝가 달린 중대한 일입니다... ˝선험적 종합판단은 어떻게 가능한가?˝ 라는 물음이야말로 ˝순수이성의 본래적 과제˝(B19)이고, 형이상학의 기반을 확보하는 일이 됩니다. _ 이수영, <순수이성비판 강의>, p63

이수영의 <순수이성비판 강의>는 제목 그대로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순수이성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ft>을 풀이한 해설서다. 혼자 읽기에 결코 만만하지 않은 <순수이성비판>은 상세한 해설과 강의없이는 책의 초반인 초월적 감성론의 시간과 공간으로의 진입마저도 쉽지 않게 한다. 큰 마음먹고 길 없는 곳을 수풀을 헤치고 가는 심정으로 읽다보면 끊임없이 제기되는 오류와 부정 속에서 자신이 어디에 와있는가 헤매기 십상이다. 그런 면에서 <순수이성비판 강의>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오르기 전 지도로 전체 산의 구조를 잘 보여주는 조감도, 지도로 여겨진다.

이성의 본성으로 인해 경험의 한계를 넘어 실증할 수 없는 영역에서 자신의 진리를 주장하는 논란이 한없이 벌어지는데, 이곳이 형이상학이라는 공간입니다. 답은 없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질문하는 공간이 형이상학이라는 거죠. 따라서 필요한 일은 ‘비판‘인데, 이는 지금까지 형이상학이 걸어왔던 그 길, 즉 경험을 초월한 이성의 사용을 인해서 초래된 혼란을 제거하기 위해 필요한 일입니다. 칸트는 이를 ˝이성의 능력 일반˝에 대한 비판이라고 하는데, 바로 여기에 핵심이 있습니다. _ 이수영, <순수이성비판 강의>, p25

시공간이라는 감성의 형식과 범주라는 지성의 형식을 통해 사람의 인식이 형성되지만, 사람의 경험을 넘어선 곳까지 지성을 사용하려는 순수이성의 월권에 대한 비판이 <순수이성비판>의 거친 요약이라면, 이러한 틀 안에서 감성과 지성, 순수이성의 관계와 한계에 대해서 개략적인 개념을 형성할 수 있다면 <순수이성비판 강의>는 충분히 목적을 달성한 것이라 여겨진다. 이보다 깊은 논의는 <순수이성비판 강의>의 한계를 넘어선 것으로 이는 원전에 대한 입문해설서의 월권이 되지 않을까를 생각하며 글을 갈무리한다...

PS. 오해가 있을까 싶어 붙이는 글. 입문 해설서로서 <순수이성비판 강의>의 내용이 부족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독자들 입장에서 해설서만으로 내용을 이해할 수는 없기에 담을 수 없는 부분을 무리하게 이해하려 하기보다 차라리 원전을 직접 경험하는 편이 더 좋을 듯 싶다...

칸트가 보기에 지금까지 형이상학의 문제는 이처럼 순수지성 개념이 경험적 한계를 넘어(초험적으로) 이성의 요구에 따라 무제한적으로 사용되는 데서 발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칸트는 이렇게 ˝지성과 이성이 초자연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초월적 변증학이라는 이름으로 비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초월적 논리학은 경험적 대상에 적용될 수 있는 지성의 사고 규칙을 다루는 초월적 분석학과 그 경험의 한계를 넘는 지성과 이성에 대한 비판에 집중하는 초월적 변증학으로 구성됩니다. _ 이수영, <순수이성비판 강의>, p111

초월적 연역 부분은 <순수이성비판>의 심장부라고 평가됩니다. 초월적 연역의 핵심은 인식 주관(성)이 모든 대상(경험)의 객관성을 정초한다는 주장입니다. 객관성이라고 하면 우리 바깥의 저 객관(대상이 갖고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여기서는 우리 주관이 경험의 객관성을 정초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대상을 인식하고 경험할 수 있는 객관적 근거가 우리 인식 주관에 있다는 것입니다. _ 이수영, <순수이성비판 강의>, p168

사실 순수이성은 자기 자신만을 다룹니다. 순수이성에게는 대상들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성 인식들이 주어지기 때문에 오로지 자신의 체계적 통일만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이런 이성의 용도는 지성 사용을 촉진하고 지성 사용의 올바름을 보증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지성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길을 개방함으로써 이성의 경험적 사용을 무한하게 촉진하고 확립합니다. _ 이수영, <순수이성비판 강의>, p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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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10-03 14: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이클 샌델의 책에서 칸트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을 읽고 어려워했던 기억이 나네요.

겨울호랑이 2023-10-03 16:27   좋아요 1 | URL
칸트 철학은 서양 철학의 기본이면서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그 어려움을 느끼는 거리만큼 철학이 일반인들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북다이제스터 2023-10-03 17: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비판하기 위해선
그의 책을 열심히 많이 잘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ㅎㅎ

겨울호랑이 2023-10-03 20:02   좋아요 1 | URL
데이비드 흄을 좋아하시는 북다이제스터님께 칸트의 비판 3부작은 일종의 ‘적전술‘과 같은 의미로 다가올 듯 합니다 ㅋ
 

한비자는 군주와 신하의 기본적인 관계를 동상이몽의 관계, 즉 본능적으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한다는 관점에서 보았다.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본 전통적인 유가의 관점은 그에게 고려의 대상도 되지 않았다. 그는 법法ㆍ술術ㆍ세勢라는 세 테두리 안에서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데 강한 자신감과 신념을 가지고 단호한 어조로 견해를 피력하였다.

한비자는 법가를 대표하는 인물이지만, 그가 나오기 전에 이미 세 갈래의 큰 학파가 있었다. 첫째는 법을 강조한 상앙, 둘째는 술을 강조한 신불해申不害, 셋째는 세를 강조한 신도愼到였다. 상앙이 주장한 ‘법’은 백성들의 사익 추구를 막고 나라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원칙을 의미한다. 신불해의 ‘술’은 신하들이 내세우는 이론과 비판을 그들의 행동과 일치시키는 기술로서, 신하들을 잘 조종해 군주의 자리를 더욱 굳게 다지는 인사정책을 말한다. 신도의 ‘세’는 군주만이 가지는 배타적이고 유일한 권세를 말한다. 한비자는 이 세 학파의 주장을 두루 수용해 발전시켰다.

한비자는 유가나 묵가의 사상을 반대한 것과는 달리 도가사상에 대해서는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도가는 인간의 본성이 순박하다고 보고 절대적인 자유를 옹호한 반면, 한비자는 인간을 악하다고 보고 사회적인 통제를 주장했다. 그렇지만 도가와 한비자는 ‘무위(無爲)’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다.

"어지러운 나라로써 잘 다스려지는 나라를 공격하는 자는 망하고, 사악한 도道로써 바른 도를 치는 자는 망하며, [천리를] 거스르는 도리로써 천리를 따르는 자를 치는 자는 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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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09-27 11: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맹렬히 가열차게 읽으시는 호랑이님^^

겨울호랑이 2023-09-27 13:0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yamoo님께서도 풍성한 한가위 연휴 보내시고, 그림과 함께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달리 에픽테토스는 오로지 ‘선택’과 ‘선택에 따른 행동’만이 우리에게 좌우되며 나머지(신체나 사물)는 별개의 것으로 남는다고 주장했다. 우리에게 좌우되는 것은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선택 자체라고 본 것이다.

명상록』을 쓰면서 아우렐리우스는 이 두 가지 요소를 융합시키면서 내용의 차원에서는 그가 배운 이론들을 활용하고 방법의 차원에서는 대화와 변증법적인 양식을 활용하는 작업에 몰두한다. 단지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일반적인 대화록의 두 대화자로 동일한 인물, 즉 자기 자신을 등장시킬 뿐이다.

세네카는 자신의 이론에 대한 근거를 자연세계에서 발견했다. 벌들을 관찰하면서 그는 왕벌이 다른 벌들에 비해 탁월한 것은 단순히 몸집이 크기 때문이아니라 공격용 무기(침)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이러한 자연의 법칙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군주가 백성들 앞에서 이와 동일한 비폭력적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 세네카의 생각이었다(『자비에 관하여』, I 19, 3).

어떤 경우에든 세네카는 한 개인의 기본적인 성격에 대한 정확한 검증을 통해서가 아니라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즉 국가의 부패를 이유로 정치 참여의 거부를 합리화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고 보았다. 세네카의 이러한 입장에서 그가 제시하는 철학적 근거 뒤에 어떤 식으로든 네로를 모략하는 인물로 몰리고 싶어하지 않는 정치적인 신중함이 숨어 있음을 보게 된다.

스토아 철학자에게 건강이나 재산 혹은 여행의 편리함 같은 것들은 오로지 병과 가난과 불편함에 비해 ‘선호할’ 만하고 ‘가치’가 있을 뿐이다. 반면에 행복을 결정하는 것은 덕목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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