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에티카> 입문 컨티뉴엄 리더스 가이드
J. 토마스 쿡 지음, 김익현 옮김 / 서광사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에티카>는 어떤 삶이 인간 존재에게 최선의 삶인가 그리고 어떻게 개인은 그런 삶을 방해하는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가를 설명할 것을 약속하고 있다. _ J. 토마스 쿡, <스피노자의 에티카 입문>, p170 


 J. 토마스 쿡 (J. Thomas Cook)의 <스피노자의 에티카 입문 Spinoza's 'Ethics': A Reader's Guide>은 기하학적 구조로 정리-증명-주석이라는 기하학적 구조로 건축된 스피노자(Benedictus de Spinoza, 1632~1675)의 <에티카 Ethica>를 보다 평면적으로 보여주는 입문서다. 신(神), 정신, 정서, 지성, 이성으로 이어지는 논의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앞서 말한 기하학적인 논증 구조 안에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의 용어를 담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증명을 통해 앞선 정리로부터 끊임없이 확장해 가는 구조는 강력하지만, 간결한 도형 대신 명제로 구성된 <에티카>는 그만큼 독자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도 분명하다. 그런 면에서 <스피노자의 에티카 입문>은 구조에 대한 좋은 도면을 보여주며 독자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책이다. 이번 리뷰에서는 다소 거칠지만 <에티카>의 구조를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려 한다.


 스피노자가 생각하는 세계는 결과가 그것의 원인으로부터 질서 있게 따라 나오는 그리고 결과가 그것의 원인을 이해함으로써만 이해될 수 있는 세계다. 그리고 그 원인 또한 그것의 원인을 이해함으로써 이해될 수 있다. 그렇게 계속된다... 만약 스피노자의 실재에 대한 철학적 설명이 기하학과 같은 전적으로 합리적인 명료성을 가지려 한다면, 체계를 위한 출발점이 있어야 한다. 선행하는 원인 없이 존재할 수 있는 어떤 것. 스피노자가 이러한 출발점을 지시하기 위해 사용하는 낱말이 '실체'(substance)다. _ J. 토마스 쿡, <스피노자의 에티카 입문>, p45


 <에티카>의 제1부에서 다루는 대상은 실체(實體), 신(神)이다. 결과를 가져오는 모든 것의 원인으로 자기 원인(causa sui)을 스피노자는 실체라고 이름짓는다. 세계는 신의 활동 역량에 의해 생겨나며 이를 생산하는 자연(natura naturans)과 생산된 자연(natura naturata) 의 관계로 표현된다.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因果)관계는 신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의 법칙으로, 스피노자는 이러한 자연의 법칙의 구조에 따라 필연의 세계를 보여준다. 


 신의 역량은 구조화된 역량이고, 사물들은 이 구조화된 역량에 의해 생겨나게 되며 이 역량으로부터 질서 있게 따라 나온다. 만약 양태의 계열 전체가 연장 속성 아래에서 그 역량에 의해 생긴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연장된 사물의 무한 계열이 잘 구조화된 방식으로 서로에 의해 생기고 서로 관계 맺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만약 양태의 계열 전체가 사유 속성 아래에서 그 역량에 의해 생긴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관념 혹은 사유의 무한 계열이 잘 구조화된 방식으로 서로에 의해 생기고 서로 관계 맺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바로 이 동일한 구조적 역량이 양태의 두 계열 -연장과 사유 - 모두를 통해 표현되는 것이다. _ J. 토마스 쿡, <스피노자의 에티카 입문>, p88


 신(자연)의 세계는 이처럼 완전한 세계지만, 인간의 세계는 이와 같지 않다. 인간 또한 실체이고 인간 자체로 완전하지만, 신의 부분인만큼 부분적으로 완전하다. 신의 속성에 대해 부족한 만큼 인간은 무지와 오류를 갖고 있는데, 스피노자는 이를 상상지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스피노자는 신체나 뇌의 변용을 통해 어떤 것의 현존을 지각적으로 기록하는 과정 전체를 '상상지'(imaginatio)라고 부른다... 사물에 대한 우리의 상상적 관념이 우리가 지각하고 있는 물체의 본성 못지않게 적어도 우리 자신의 신체의 본성을 반영한다는 사실은 오류에 대한 스피노자의 설명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p110)... 제2부 정리18에서 약술된 상상지(imainatio)론은 인간 인식에 대한 스피노자의 설명에 있어서 첫 번째 단계일 뿐만 아니라 허위, 인간의 무지와 오류에 대한 설명의 기초이기도 하다. _ J. 토마스 쿡, <스피노자의 에티카 입문>, p115


 인간은 고유의 특성인 상상지를 갖고 있지만, 동시에 자연의 일부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그는 사물들의 보편적 특성인 '코나투스'라는 자기보존 특성도 함께 갖는다. 자기보존을 하려는 '욕망' 그리고 긍정적 정서인 '기쁨'과 부정적 정서인 '슬픔'이라는 세 기본 정서는 다른 관념 및 정서들과 결합하여 수많은 감정을 끊임없이 창출해간다.  


 제3부에서도 중심이 되는 정리는 제3부 정리6으로, 거기서 스피노자는 코나투스(conatus)의 원리를 소개하고 그 원리가 모든 사물들의 보편적 특성이라고 주장한다. 코나투스의 원리는 <에티카>의 나머지 부분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기서 스포노자의 주장은 각각의 것(unaquaeque res)이 자신의 존재 보존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_ J. 토마스 쿡, <스피노자의 에티카 입문>, p153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자기 보존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며, 따라서 인간은 그러한 것들을 하도록 결정된다.' 그 다음 문장에서 알게 되는 것은 우리가 그 욕구를 의식할 때 그것은 욕망이라 불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욕망'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신-물리적 유기체로서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우리의 근본적인 코나투스적 노력의 표현이다. 이러한 본질적 노력이 우리의 모든 욕망과 행동의 뿌리를 이룬다. _ J. 토마스 쿡, <스피노자의 에티카 입문>, p162


  부분적인 실체인 인간이 구조적으로 드러낼 수밖에 없는 '상상지'의 한계 안에서, 자기보존의 욕망을 어떻게 충족시킬 수 있는가. 스피노자는 <에티카>를 통해 더 많은 덕(virtus), 탁월함(arete)을 가지려는 노력을 강조한다. 이러한 노력은 최고선(崔高善)과 신에 대한 인식을 지향하며, 신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지성에 의해 느끼는 정신이, 이성에 의해 자신을 진정으로 인식하면서 최종적으로 영원의 상 아래에서 자신이 신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스피노자의 생각으로는 우리가 능동적인 한 우리는 자유롭지만, 반면에 수동적인 한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예속적 상태에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 이것이 스피노자 논증의 핵심이다.  _ J. 토마스 쿡, <스피노자의 에티카 입문>, p173


  <에티카>는 분명 기하학적인 구조로 구성된 건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건축물이 조금은 위태롭게 보인다면 이는 건축물을 스피노자 시대의 사상적 기반이 아닌 현대의 기반 위에 올려놓고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필연의 법칙이 적용되는 실체의 세계와 우연의 법칙이 적용되는 부분적 실체의 세계를 같은 유클리드 기하학으로 설명하려 했기 때문이 아닐까. 욕망이라는 변수로 인해 생겨나는 곡률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비(非)유클리드 기하학적 구조로 설명했다면, <에티카>가 보다 설명력있는 기하-윤리학책이 되었겠지만, 자기원인의 세계가 아닌 시간의 제약을 받는 인간의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모든 개체는 존재 보존을 위해 노력하며(제3부 정리6) 그렇게 함에 있어서 기쁨을 주는 것을 추구하고 고통을 주는 것을 피하고자 한다(제4부 정리19 증명). 이러한 노력이 바로 개인의 코나투스적 본질 혹은 본성이다. 이러한 노력이 성공적일수록, 그 사람은 더 많은 역량을 표출한다. 스피노자는 개인의 역량을 그의 덕과 동일시하며(제4부 정의8) 개인이 존재 보전 노력에 있어서 더 많은 성공을 거두면 거둘수록, 그는 덕을 더 많이 갖게 된다고(제4부 정리20) 결론내린다. _ J. 토마스 쿡, <스피노자의 에티카 입문>, p184

연장된 개별 사물이 연장(extension)이라는 속성 ‘안에‘ 있으며 그것을 ‘통해 파악되는‘ 것처럼, 개별 관념과 정신 상태도 사유(thought)라는 일반적 범주 ‘안에‘ 있으며 그것을 ‘통해 파악될‘ 수밖에 없다고 스피노자는 주장한다(p52)... 무한하고 실존하는 하나의 실체가 있다는 것 그리고 실체가 단 하나의 속성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증하고 나서, 무한한 실체는 무한히 많은 수의 속성(attribute)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각 속성 자체가 무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스피노자는 추론한다. 정리 11에서 그는 이 모든 주장을 함께 제시하면서 처음으로 ‘신‘이라는 낱말을 끌어 들인다. - P53

속성의 절대적 본성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따라 나오는 무한하고 영원한 양태를 이해하고자 할 경우, 양태가 신/실체의 역량이 활동으로서 표현되는 방법 내지 방식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경우 연장의 무한하고 영원한 양태는 신의 역량이 무한히 연장된 영역 전반에 걸쳐 표현된 무시간적 방식이다. - P68

능동적인 것을 수동적인 것으로부터 구분하거나 생산된 것으로부터 생산하는 것을 구분한 후에 스피노자는 정리31에서, 특정한 사유와 의지는 사유라는 속성의 양태들이며 사물의 ‘생산된 측면‘ - 생산된 자연 natura naturanta -에 속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러한 사유와 의지는 그것들을 생산한 활동적 역량에 의해 지금 상태로 존재하도록 결정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 P75

스피노자는 제3부 정리9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노력이 정신에만 관계될 때, 그것은 의지라 불리지만, 정신과 신체 모두에 관계될 때, 그것은 욕구라 불린다. 그러므로 욕구는 바로 인간의 본질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자기 보존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며, 따라서 인간은 그러한 것들을 하도록 결정된다.‘ 그 다음 문장에서 알게 되는 것은 우리가 그 욕구를 의식할 때 그것은 욕망이라 불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욕망‘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신-물리적 유기체로서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우리의 근본적인 코나투스적 노력의 표현이다. 이러한 본질적 노력이 우리의 모든 욕망과 행동의 뿌리를 이룬다. - P162

만약 우리가 역량 내에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충분히 마음에 새겨 두고 있다면, 우리는 기대가 충족되지 않은 데서 오는 좌절의 고통을 겪지 않는 방식으로, 충분한 노력을 통해, 욕구와 욕망을 제한할 수 있다... 스피노자의 견해로는 우리 역량 내에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적합한 관념은 그 자체가 우리 역량을 넘어서는 것을 우리가 소유하고 완성시킨다는 생각에 대한 부정을 포함하며, 따라서 후자를 마음속에 떠오르는 상으로서 그리고 욕망의 상상적 대상으로서 약화시킬 것이다. 이해하는 한에 있어서, 우리는 필연적인 것만을 욕망할 수 있다. - P21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위 디오니시우스 사상의 혁신적인 면은 첫 번째 가정과 두 번째 가정을 하나의 동일한 주체, 즉 신에 적용하면서 ‘보류’ 단계와 ‘발전’ 단계를 유일신의 두 측면으로 고려했다는 데 있다. 반대로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은 이 ‘보류’와 ‘발전’의 단계를 서로 구별된 근원실체, 다시 말해 존재를 초월하는 하나와 진정한 의미에서의 존재에 부여했다.

디오니시우스의 신은 사실상 보편적이고 유일무이한 원인인 동시에 이에 상응하는 모든 결과를 단순하고 불분명한 형태로나마 이미 품고 있는 신이다.

보에티우스(Anicius Manlius Severinus Boethius, 480년경~525년)는 로마의 뛰어난 정치인이자 정신적인 측면에서 후세대 철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뛰어난 지성인이었다. 역사는 전기를 통해 그를 야만인들에게 박해당한 로마인으로 기억하지만 철학사적인 관점에서 보에티우스는 틀림없이 중세 사상에 기초를 마련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들 중에 한 명이었다.

보에티우스의 가장 널리 알려진 저서 『철학의 위안』 에서 표명된 몇몇 입장을 고려했을 때 보편적인 개념은 현실을 설명하는 데 감각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일종의 사상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이에 비하면 감각의 인식 영역은 훨씬 더 협소한 것으로 드러난다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나게 될 일들을 예견한다는 차원에서 섭리가 영원하고 시간을 초월하며 모든 것을 파악하는 신의 관점과 일치한다면, 운명은 피조물에게만 적용되기 때문에 시간에 종속된다는 한계를 가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현대철학 케니의 서양철학사 4
앤서니 케니 지음, 이재훈 옮김 / 서광사 / 201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철학의 역사를 통하여 용어 표현을 달리하면서 두고두고 되풀이해서 제기된 하나의 형이상학적인 문제가 있다. 이것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이해하려면 일상생활에서 쏜살같이 스치듯 마주치는 개별적인 것들과 완전히 다른 종류의 대상들(entities)이 정신의 외부 세계에 실존해야만 하는지를 묻는 물음이다. 고대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나 형상이 물질이나 물체와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실존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논했다. 중세에는 줄곧 보편자가 실재하는 것인지 기호에 불과한 것인지를 두고 실재론자와 유명론자 사이에 논쟁이 이어졌다. 현대의 수학철학자들은 수를 숫자와 동일시하는 형식주의자, 그리고 수가 정신 세계나 물질 세계가 아닌 제3세계를 구성하는 독립적 실재성을 갖는다고 주장하는 실재론자와 수학적 대상의 본성에 관해 팽행한 논쟁을 벌였다. _ 앤서니 케니, <현대철학>, p254


 앤서니 케니(Anthony Kenny, 1931 ~ )의 <현대철학 A  New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volume 4 : Philosophy In The Modern World>은 시리즈의 마지막이자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부터 1970년대까지 철학을 다룬다. 철학사의 전체적인 흐름을 앞 장에서 정리하고, 뒷부분에서 세부적으로 내용을 정리하는 케니의 서양철학사의 서술은 흔들림없이 시리즈의 마지막까지 이어진다. 현대 철학의 이 이전 시기의 철학과 가장 크게 구분되는 점은 무엇일까. 중세의 유명론(nominalism)과 실재론(realism) 논쟁과 같은 시대에 따라 다른 양상으로 반복되는 주제가 현대 철학에서도 다뤄지기도 하지만, 가장 특징적인 부분은 자연과학의 독립과 수학의 도입이라 생각된다. 


 지칭 대상의 불투명 문제는 이 모든 양상 문맥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난다. 그 문제는 두 종류의 다른 지칭 대상을 구별함으로써 처리될 수 있다. 어떤 용어가 진정한 이름이 되기 위해서는 크립키의 전문 용어로 고정 지시어(rigid designator)라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그 용어는 모든 가능 세계에서 지칭 대상이 동일해야만 한다. 그와 달리 뜻에 의해 지칭 대상이 정해지기 때문에 가능 세계에 따라 지칭 대상이 달라지는 표현들도 있다. '9=행성들의 수'에서 '9'는 사실상 어느 가능 세계에서나 계속 그 지칭 대상을 유지하는 고정 지시어이다. 그러나 '행성들의 수'는 다른 세계에서 다른 수를 지칭할 수도 있는 일종의 기술(description)이다. _ 앤서니 케니, <현대철학>, p174


 근대 철학에서 인식과 관련하여 감성(感性), 지성(知性), 이성(理性) 등 인간의 사고 능력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졌고,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희망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답을 찾는다면, 현대 철학에서는 "내가 하는 '무엇'은 무엇인가?"라는 한 단계 더 들어간 질문과 답이 논의된다. '무엇'이라고 지칭되는 대상의 기호와 의미와의 관계 속에서 전에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언어(言語)의 문제가 현대철학에서는 본격적으로 다뤄진다. 언어와 대상 사이의 관계, 지각(知覺) 이전의 관계가 새롭게 주목되고, 사회와 언어의 상호작용으로부터 오염을 최소화하기 위한 간결한 수학적 표현 양식의 등장 등이 현대철학과 이전 철학의 큰 차이점으로 생각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 게임에 정통하는 것이 의심의 전제 조건이라고 주장한다. p라는 것에 대해 의심을 보이기 위해서는, 누구든 p라는 말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해야만 한다. 데카르트의 극단적인 의심은 그 의심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 낱말들의 의미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기 떼문에 자멸하게 된다. (OC 369, 456) _ 앤서니 케니, <현대철학>, p237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철학은 이전 시대의 다른 어떤 철학보다 불명확하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는 이전 시기의 철학들이 권위를 통해 극단적인 경우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여진 데 반해, 반증가능성이라는 과학의 특성과 다원화된 민주주의 체제가 보편화된 현대철학에서는 보다 세분화된 영역에서 간결한 방식으로 다양한 양태로 수많은 사상이 공존하는 것이 아닐까.


 다윈주의는 많은 것이 설명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개체종이 이전의 종으로부터 기원하는 것이 진화론적 압박과 선택의 메커니즘에 의해 설명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메커니즘은 그와 같은 종의 기원을 설명하는 데 사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자연선택에 의한 설명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가 전형적인 번식 집단, 즉 종이 존재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_ 앤서니 케니, <현대철학>, p419


 제임스는 결론에서 우주의 최상의 실재(supreme reality)를 흔쾌히 '신'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신에 대한 그의 적극적인 설명은 지극히 불투명하다. 그것은 매슈 아놀드(Matthew Arnold)가 신을 '모든 사물이 그들 존재의 법칙을 실현하려는 경향성의 흐름' 또는 '의로움을 향한 우리 자신이 아닌 영원한 힘'이라고 정의한 것과 비슷하다. 그렇지만 제임스는 종교를 본질적으로 감정의 문제로 간주했고, 감정을 본질적으로 분명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그의 불분명한 표현은 이미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_ 앤서니 케니, <현대철학>, p435


 근대 이후 과학을 새롭게 떠나보내고, 미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현대철학. 지금도 계속 새로운 이론과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현대철학을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하거나 이해하는 것은 분명 불가능한 일이다. 불가능에 대한 미련은 버리고, 큰 흐름을 잡는다는 생각으로 정리를 한다면 케니의 <현대철학>은 좋은 개론서가 되리라 생각하며 리뷰를 갈무리한다...


 크로체의 경우, 예술은 역사와 과학 사이에 위치한다. 역사와 마찬가지로 예술은 일반 법칙이라기보다는 특수 사례를 다루기는 하지만, 예술의 특수 사례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된 것이며, 과학처럼 보편적 진리를 예시한다... 크로체에게 예술의 핵심은 직관(intuition)이다. 직관은 실증주의자들이 뭐라고 말하든 느낌(feeling)과 동일하지 않다. 느낌은 표현을 필요로 하는데, 표현은 인지적 문제이지 감정상의 문제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_ 앤서니 케니, <현대철학>, p37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지주의의 전제는 다신주의 종교(예를 들어 헤르메스주의 문학이나 『칼데아의 신탁』에서 나타나는 종교들)와 철학(특히 플라톤주의)의 공통된 과제들, 즉 절대적으로 초월적인 신의 존재를 보장하고 이어서 신과 세상과의 관계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는 과제였다.

이 세계에는 신성한 영적 실재의 파편들, 즉 지혜가 스스로의 열정으로 인해 신성한 세계에서 잠시 벗어났을 때 ‘밖으로 흘러나온’ 파편들이 감금 상태로 남아 있다. 이러한 파편들은 이어서 하류의 신과 그의 시종들이 창조한 인간의 일부 안에 침적된다. 이들이 바로 영지주의자들이다. 구원 과정은 이들이 자신 안에 내재하는 신성함에 대한 앎을 깨어나게 하고 이를 통해 신의 지체로 복원되는 과정과 일치한다.

이레네오에게 물질세계란 신이 원했고 그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힘으로 함께 실현하게 될 선한 창조의 일부를 의미했다. 그런 식으로 이레네오는 구약을 통한 계시와 예수를 통한 계시를 유기적으로 조합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정체를 구약을 통해 예수로 이어지는 역동적인 역사 및 인류와 모든 피조물에게 부여된 운명의 영광스러운 완성과 일치시켰다.

그리스도교의 공인과 급격한 성장은 사실상 세속 문화와 철학의 주요 기관들에 대한 탄압 정치의 시작을 의미했다.

그리스 전통 철학에서 그노시스는, 단순한 지각aisthesis이나 견해doxa와는 다르다는 차원에서, ‘존재에 대한 진정한 앎’을 의미했다. 하지만 2세기에 들어와서 그노시스는 점차적으로 인간의 정상적이고 평범한 인지능력으로는 취득하기 힘든 초월적인 차원의 지식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아울러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영지주의 문헌들은 철학적이거나 신학적인 성격이 아닌 신화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바로 이러한 특징이 이들의 이론에서 하나의 체계적인 신학을 발견하기 힘들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영지주의는 본질적으로 이원론적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우주를 선과 악이라는 자율적이고 강렬하며 서로 상반되는 원리들이 전투를 벌이는 일종의 무대로 간주한다

신플라톤주의에 따르면 악과 어두움은 신성한 힘이 발산되는 곳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불과했고 신성한 힘의 기원은 하나, 즉 그 자체로 충만한 빛이자 선이었다. 세상이 악한 것은 오로지 신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지주의자에게 근원악은 사고에 의해 발생한 것도, 신의 적도 아니었다. 악은 오히려 신의 또 다른 일면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데카르트에 따르면 밀랍이 자신이 모든 속성을 갖게 되는 까닭은 그것이 밀랍이라는 본질을 지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현미경 또는 초현미경 수준에서 물체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어떤 방식으로 배열되어 다른 방식이 아닌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작용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데카르트는 이런 과정이 기본적으로 기계론적이라고 생각한다. - P108

데카르트는 세계의 모든 자연 현상은 바로 현상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들은 모두 실재하는 사물이며 사건이지만 이들이 세계의 기본 실재는 아니며오직 기본 실재들이 자신을 드러내는 다양한 방식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을만들어내는, 배후에 놓인 기본 실재는 무엇인가? 그 대답은 오직 물체의 연속이라는것이다.  - P115

도덕과 종교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는 듯하며,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현대의 우리는 완벽하게 선한 사람이 무신론자인 경우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반면 데카르트에게 이런 구별은 모두 인위적인 것이며 따라서 부적절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게 과학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인식하는 것은 신의 계속되는 창조 활동을 인식하는 것과 완전히 동일한 일이다.  - P222

데카르트가 행하려던 바, 곧 인간의 사고가 객관적 진리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려는 어떤 시도도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이런 작업을 위해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도구는 오직 인간의 사고 자체뿐이기 때문이다(p244)... 그리고 바로 이것이 데카르트가 회의주의를 반박하면서 신에게 호소한 이유이기도 하다. - P26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