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 - 지질학적 시간의 발견에서 신화와 은유 아카넷 한국연구재단총서 학술명저번역 506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이철우 옮김 / 아카넷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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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화살이라 부르는 시간의 이분법의 한 극단에서 보면 역사는 반드시 반복될 수 없는 사건의 불가역적인 연속이다.(p34)... 시간의 이분법의 또 다른 극단인 시간의 순환에서 보면 사건은 우발적인 역사에 인과적인 영향을 끼치는 주목할 만한 계기라는 의미가 전혀 없다. 시간 속에 내재하는 근본적인 모습은 항상 현재 속에 존재하며 절대 변화하지 않는다. 외면적인 변화는 반복되는 순환의 한 부분이며 과거의 차이들이 바로 미래의 현실이 될 것이다. 이 경우 시간에는 방향성이 없다.(p35)

시간의 화살과 시간의 순환. 년도는 증가하는 방향으로 르겠지만, 매일은 일상의 모습으로 반복됩니다. 이제 2019년을 보내고 몇 시간 뒤 2020년을 맞이합니다. 아마 새해에도 우리 모두는 반복되는 일상을 보낼 것입니다. 변함없이. 그렇지만, 2020년에는 하루하루가 다른 빛깔로 채색하시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2020년 끝자락에서 우리 모두 한층 자란 모습으로 처음을 돌아보기를 바라봅니다. 모두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계통적인 연관이나 시간의 화살에 의한 유사성과 내재적인 동일한 법칙의 개별적인 반영이나 시간의 순환에 의한 유사성이라는 두 종류의 유사성을 함께 고려하면 자연의 복잡성을 해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p280)

시간의 화살 개념으로 설명되는 상동 관계와 시간의 순환 개념으로 설명되는 상사 관계는 한 유기체 내에서 주도권을 다투는 적대적인 개념들이 아니다. 이들은 갈등(긴장) 속에서 상호작용을 통해 각 피조물의 차이점과 유사점을 만들어낸다. 그들은 서로 얽혀 있으면서 서로 의지한다. 이것은 시간의 순환이라는 법칙이 역사라는 실체를 형성하는 것과 같다.(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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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19-12-31 23: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제 한시간 후면 2020년이군요~~
올해 겨울호랑이님의 리뷰 잘 읽었습니다.
리뷰만 읽고 정작 책은 아직^^
언젠가는 읽을 수 있는 경지에 오르겠죠~~ㅎㅎ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항상 건강하십시요^^

겨울호랑이 2019-12-31 23:45   좋아요 2 | URL
페넬로페님 감사합니다. 페넬로페님의 진솔한 이야기와 리뷰에 감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내년에도 잘 부탁 드립니다. 행복한 하루, 한 해 여세요!^^:)

서니데이 2019-12-31 23: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새해인사 드리러 왔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가정에 평안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새해에는 소원하는 것을 이루는 시간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겨울호랑이 2019-12-31 23:46   좋아요 2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께서도 항상 건강하시고 원하시는 바 이루시는 한 해 되세요!^^:)

초딩 2019-12-31 23: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겨울 호랑이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여~~~😍😍😍

겨울호랑이 2019-12-31 23:47   좋아요 2 | URL
초딩님 감사합니다. 초딩님께서도 행복한 2020년 되세요!^^:)

2020-01-02 07: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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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2 0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종교의 본질에 대하여 한길그레이트북스 77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지음, 강대석 옮김 / 한길사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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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과제는 여러분을 신의 친구에서 인간의 친구로, 신앙인에서 사유하는 자로, 기도하는 자에서 노동자로, 내세의 후보자에서 현세의 학생으로, 기독교인 자신의 고백과 자백에 따르면 ‘반은 동물이고 반은 천사인‘ 기독교인에서 인간으로 만들려는 과제이다.(p401)

나는 불멸성에서 비로소 신성의 의미와 목적이 발견되고 달성되며, 신성과 불멸성은 하나이고, 처음에는 독자적인 본질로서 존재하던 신성이 끝에 가서는 불멸성으로서 인간의 특성이 된다는 증명과 함께 내 과제의 목표에 도달했다. 그리고 나는 자연종교의 신이 자연이고 정신종교인 기독교의 신이 정신 또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본질이라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 그것은 물론 인간이 이교도처럼 인간 밖에서가 아니라, 기독교인처럼 인간을 초월해서가 아니라 인간 자체 속에서 행위의 규정근거, 사유의 목적, 해악과 고통의 치료 원천을 찾고 발견해야 한다는 것을 목표로 했다.(p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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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2 12: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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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2 13: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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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의 상실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 지음 / 문예출판사 / 199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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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은 하나의 습득한 인간의 성질로서, 그것의 소유와 실천이 우리로 하여금 어떤 실천에 내재하고 있는 선들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해주며 또 그것의 결여는 결과적으로 그러한 선들의 성취를 방해하는 그러한 성질이다.(p282)

선의를 갖고 있는 남자와 여자들이 로마 제국을 지지하는 과제로부터 등을 돌리고 또 문명과 도덕적 공동체의 지속을 이 제국의 유지와 동일시하는 것을 중단했을 때, 그것은 고대 역사에 있어서 결정적 전환점을 이루었다... 만약 현대의 도덕적 상황에 관한 나의 설명이 옳다면, 우리 역시 얼마전부터 이 전환점에 도달하였다는 결론을 내려야만 한다. 이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 우리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새로운 암흑시대를 거쳐 문명과 지성적, 도덕적 삶이 보존될 수 있는 공동체의 지역적 형식들을 건립하는 것이다.(p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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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6 0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26 08: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화국의 위기 - 정치에서의 거짓말.시민불복종.폭력론 한길그레이트북스 117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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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정치에서 거짓말이 여론을 호도하기 위해 사용되었음을 지적하는 한나 아렌트의 「정치에서의 거짓말」은 어두운 현실을 알려주는 한편, 진리의 부정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거짓말의 한계 또한 보여준다. 그리고 독자들은 ‘정치철학이 주는 위안‘을 따스하게 건네받는다...

착각이나 오류, 계산착오 등과 같은 것이 아니라 은폐와 거짓, 그리고 교묘한 거짓말의 역할이 「펜타곤 문서」의 주요 주제가 되었던 것의 핵심은 거짓말 정책이 적을 향한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주로 미국 국내용으로 특히 의회를 기만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적은 모든 사실을 알지만 상원 국제협력위원회는 전혀 알지 못한 통킹만 사건이 바로 이 예에 해당한다.(p46)

사실들, 어떤 결정이 마침내 이루어질 때 의존하게 되는 전제, 이론, 가설들은 서로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적인 차이를 확실히 염두에 둘 때에만 우리의 실패와 재앙이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할 수 있다.(p58)

속임수가 아무리 정교하다 하더라도 기만의 온전한 작동은 결국 좌초하거나 역효과를 낳을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지 못한 채 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 것이다. 왜냐하면 거짓과 기만의 난점은 그 효과가 거짓말쟁이와 기만자가 숨기고자 하는 명백한 진리 관념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사실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진리는 비록 공적으로 명백히 드러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모든 거짓에 대해 확고한 우선성을 갖고 있다.(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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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9-09-10 0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제, 이론, 가설이 전적으로 서로 다른 말이라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앞뒤 문장 읽어봐야 하겠지만, 세 가지 모두 그냥 믿음일 뿐이라고 생각됩니다. ^^

겨울호랑이 2019-09-10 06:17   좋아요 1 | URL
제가 부분인용한 것이 오해를 드린 듯 합니다.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처럼 이들 모두 진리가 아닌 ‘증명‘이라는 과정과 관련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만, 가설의 증명과정에서 이들이 하는 역할은 각기 다르기에,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도 미세하게나마 차이가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확실성에 관하여 비트겐슈타인 선집 6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지음, 이영철 옮김 / 책세상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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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9. 여기서 "나는 안다"는 하나의 논리적 통찰이다. 다만, 실재주의가 그것에 의해서 증명될 수는 없다... 60. 이것이 한 조각의 종이라는 '가설'이 나중에 경험을 통해 확증되거나 반증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 그리고 "나는 그것이 한 조각의 종이임을 안다"에서 "나는 안다"가 그러한 가설에, 또는 논리적 규정에 관계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낱말이 우리의 언어에 최초로 통합될 때 우리가 배워 익히는 것이기 때문이다.(p31) <확실성에 관하여> 中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 ~ 1951)의 <확실성에 관하여 On Certainty>를 통해 우리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이라는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 ~ 1650)의 유명한 명제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더이상 회의(懷疑)할 수 없는 1명제인 '자신이 생각한다'는 사실로부터 자신의 실재를 주장한 데카르트. 그런 데카르트의 명제와 논리를 비트겐슈타인은 동의하지 않는다.


 115. 모든 것을 의심하려는 사람은 의심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의심하는 놀이 자체는 이미 확실성을 전제한다.(p42) <확실성에 관하여> 中


 130. 그러나 그렇게 판단하도록, 즉 그렇게 판단하는 것이 옳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경험이 아닌가?... 우리는 그것을 경험에서 끄집어내라고 우리에게 충고하지 않는다. 경험이 우리에게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라면, 우리는 이것을 근거라고 간주할 근거를 또다시 갖고 있지 않다.(p45) <확실성에 관하여> 中


 174. 나는 충분한 확실성을 가지고 행위한다. 그러나 이 확실성은 나 자신의 것이다... 177. 내가 아는 것을, 나는 믿는다.(p55) <확실성에 관하여> 中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의심하는 것 자체가 이미 확실성(certainty)를 전제로 한다. 그렇지만,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경험에 의해 지지되고, 주관적이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는 ''[나는 생각한다]라고 알고 있다(확신한다).'로 바꿀 수 있다. 이것은 내가 확신한다는 것을 보여줄 수는 있으나, 그것이 생각한다는 것을 보장할 수는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자신의 확신은 사실을 보증하지 못하고, 실재 또한 마찬가지다.


 90. "나는 안다"는 "나는 본다"와 비슷하고 근친적인 원초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나는 안다"는, 나와 어떤 한 명제의 뜻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어떤 한 사실 사이의 관계를 표현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 사실이 나의 의식 속에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그 경우 앎의 이미지는 외적 과정을 있는 그대로 눈과 의식에 투영하는 시선을 통해 지각한다는 것일 것이다.(p36) <확실성에 관하여> 中


 284. 사람들은 항상 경험에서 배워 왔다. 그리고 그들의 행위에서 우리들은 그들이 어떤 것을 확고하게 믿는다는 것을 - 그들이 이 믿음을 언표하든 언표하지 않든 - 알아챌 수 있다. 이로써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물론, 인간이 그렇게 행위해야 마땅하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은 그렇게 행위한다는 것이다.(p75) <확실성에 관하여> 中


 65. 언어놀이들이 변하면 개념들이 변화하며, 또 개념들과 더불어 낱말들의 의미들도 변화한다.(p31) <확실성에 관하여> 中


  '자신이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논증하는 축(軸) 명제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경험적으로 뒷받침된 삶의 형태로 존재한다. 이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동되는 것이며, 언어의 기초가 되기는 하지만, 의심할 수 없는 불변의 제1명제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 비트켄슈타인의 주장이다. 이에 비해 수리적 명제들은 선험적(a priori)으로 주어진 명제들이다. 


  651. 12*12=144라는 것에 관해서 내가 오류를 범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제 우리들은 수학적 확실함을 경험 명제들의 상대적 불확실함과 대비시킬 수는 없다. 왜냐하면 수학적 명제는 그 밖의 삶의 행위들과 어떤 방식으로도 구별되지 않는, 그리고 망각과 간과와 미혹에 같은 정도로 내맡겨져 있는 일련의 행위들을 획득되었기 때문이다.(p155) <확실성에 관하여> 中


 45. 계산한다는 것의 본질을 우리는 계산하는 법을 배울 적에 알게 되었다.(p27)... 46. 그러나 우리는 계산의 신뢰성을 어떻게 확인하는지는 결국 기술될 수 있지 않은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거기서 규칙이 등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p27) <확실성에 관하여> 中


 결국, <확실성에 관하여>에서 비트겐슈타인의 논리는 선험적 수학 세계에서의 확실함과 경험적 언어 세계에서의 확실함이 같지 않음을 지적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그 차이를 거의 인지하지 못하는데, 이것이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447. 나는 이렇게 말하고자 한다 : 물리적 놀이는 산수 놀이와 마찬가지로 확실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될 수 있다. 내 소견은 논리적인 것이지, 심리적인 것이 아니다.(p110)... 455. 모든 언어놀이는 낱말들과 대상들이 재인식된다는 점에 의거하고 있다.우리는 이것이 의자라는 것을 2*2=4라는 것과 동일한 엄격성을 가지고 배운다.(p111) <확실성에 관하여> 中


 410. 우리의 앎은 하나의 커다란 체계를 형성한다. 그리고 오직 이 체계 내에서만, 개별적인 것은 우리가 그것에 부여하는 가치를 지닌다.(p100) <확실성에 관하여> 中


 무한(無限)에 매우 가깝지만, 엄밀하게는 유한(有限). 이것이 축의 명제가 가진 한계이자, 인간 언어 활동이 가진 한계가 아닐까. <확실성에 관하여>를 통해 미제스가 <경제과학의 궁극적 기초>를 통해 표현한 선험적인 '인간행동학'과 경험적인 '역사학'를 떠올리며 리뷰를 마무리한다...


PS. 수리논리학에서 자연수 체계를 설명하는 페아노 공리계(Peano's axioms)에서 1은 근본원리(Primitive notion)에 속한다. 별다른 정의없이 사용되는 1의 존재를 통해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라는 신학(神學)요소를 확인함과 함께 선험적이라는 수리세계의 실체( substance) 역시 경험의 연장(extension)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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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5 09: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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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5 11: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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