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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 빈 현대의 고전 5
칼 쇼르스케 지음, 김병화 옮김 / 글항아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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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에서는 대부분의 분야에 자유주의 이후 post-liberal 시대의 특징인 문화의 ‘현대성 modernism‘이 나타난 것이 1890년대인데, 그 후 20년 만에 완전히 성숙한 단계에 이르렀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새로운 고급문화가 마치 온실에서 자라듯 빠른 속도로 자라났으며 그 온실의 열기를 공급하는 것은 정치적 위기였다. - 머리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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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 서설 대우고전총서 32
임마누엘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 / 아카넷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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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이상학은 본래 선험적 종합명제들만을 다루는 것이며, 이러한 명제들만이 형이상학의 목적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형이상학은 물론 그 개념들의 많은 분해들을, 그러니까 분석판단들을 필요로 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수행절차는 사람들이 자기의 개념들을 분해함으로써 한갓 분명하게 하고자 하는, 여느 다른 인식방식에서와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직관과 개념들에 의한 선험적 인식의 산출이, 결국은 또한 선험적 종합명제들의 산출이, 그것도 철학적 인식에서의, 그러한 산출이 형이상학의 본질적 내용을 이룬다.... 우리에게 오직 하나 남은 것은 '대체 형이상학은 가능한가?' 하는 비판적 물음이거니와, 이 물음에 대한 답변 여하에 따라서 우리는 장차 우리의 거동을 정할 수 있을 것이다.(p143) <형이상학 서설> 中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가 <순수이성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ft >의 계획서라 밝힌 <형이상학 서설 Prolegomena>은 '대체 형이상학은 가능한가?'라는 하나의 물음에 대한 칸트의 답이다. 결론부터 보자면, 칸트의 형이상학은 '인식과 그 서술이 지향해야만 하는 완성형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초월적 이념(이성)에 의해 형이상학이 성립됨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이번 리뷰에서는 이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초월적 이념들의 총괄은 자연적인 순수 이성의 본래적 과제가 되는데, 이 과제는 이성으로 하여금 순전한 자연고찰을 떠나 모든 가능한 경험을 넘어가게 하고, 이런 노력 중에서 형이상학이라고 일컫는 것을 성립시키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p307) <형이상학 서설> 中 


 칸트에 의하면 형이상학적 인식들은 경험적이지 않으며, 선험적 판단만을 담고 있어야 하며, 선험적 판단은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으로 구분될 수 있다.


 형이상학적 인식의 원천들에 관해서 말하자면, 그것들이 경험적일 수 없음은 이미 그 인식의 개념 속에 들어 있다... 형이상학적 인식은 선험적 인식, 바꿔 말해 순수 지성과 순수 이성으로부터의 인식이다.(p126)...  형이상학적 인식은 순정하게 선험적 판단들만을 함유해야 한다... 판단들은 내용에 따라 한낱 설명적이어서 인식의 내용에 덧붙이는 바가 아무것도 없거나, 확장적이어서 주어진 인식을 확대하거나 한다. 전자는 분석판단이라고, 후자는 종합판단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p127) <형이상학 서설> 中


 칸트는 이 중에서 분석판단들은 모순율에 의거하기에 선험적 판단들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종합판단들은 후험적인 판단들도 있지만, 모순율 이외의 다른 법칙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분석적 판단과 다르다. 칸트는 형이상학적 판단은 모두 종합적 판단이라 보았기 때문에, 이후 칸트의 관심은 종합판단으로 향한다.


 분석판단들은 술어에서 주어의 개념에, 비록 그다지 명료하지 않고, 명료한 의식으로써 생각되지는 않았을지라도, 이미 실제로 생각된 것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는 바가 없다...모든 분석판단들은 전적으로 모순율에 의거하며, 그 본성상 선험적 인식들이다. 긍정적 분석판단의 술어는 이미 앞서 주어개념 안에서 생각되는 것이므로, 이 술어가 모순 없이는 주어 개념에 대해 부정될 수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분석적 명제들은 선험적 판단들이다.(p129)...  그 근원이 경험적인 후험적 종합판단들이 있다. 그러나 또한 선험적으로 확실하고, 순수 지성과 이성에서 생겨나는 그러한 종합판단들도 있다. 그러나 이 양자는 이것들이 결코 분석의 원칙, 곧 모순율에 따라서만 생겨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p129) <형이상학 서설> 中


 본래적으로 형이상학적인 판단들은 모두가 종합적이다. 사람들은 형이상학에 속하는 판단들과 본래적으로 형이상학적인 판단들을 구분해야 한다. 전자 중에는 그 대다수가 분석적이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단지 이 학문의 목적이 전적으로 지향되어 있으며, 언제나 종합적인, 형이상학적 판단들을 위한 수단을 이룰 뿐이다.(p141) <형이상학 서설> 中


 이후 논의에서 비록 우리가 형이상학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순수 수학과 순수 과학의 존재를 통해 형이상학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우리는 이들은 경험을 통해 인식하지 않기에, 경험이전에 존재하는 '선험적'인 것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들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일까?


 비록 우리가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이 실제로 있다는 것을 납득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우리가 어떤 선험적인 순수한 종합적 인식, 곧 순수 수학과 순수 자연과학이 실제로 있고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아주 다행스런 일이다. 왜냐하면 저 두 학문은 한편으로는 순전한 이성에 의해, 또 한편으로는 경험에서 오는 보편적 일치에 의해 명증적으로 확실하되, 그럼에도 경험으로부터 독립적인 것으로 널리 인정되는 명제들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어떻게 선험적 종합 인식이 가능한가만을 물으면 된다.(p145) <형이상학 서설> 中


 칸트 <순수이성비판>에서 시간과 공간 속에서 특정사물을 인식하는 능력을 '감성'이라고 부르고, 감성을 통한 직접적 인식을 '직관'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직관과 실체의 개념이 선험적이라는 사실을 끌어낼 수 있다. 즉, 이들은 경험과 무관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들이다.  


  우리가 선험적으로 사물들을 직관할 수 있는 것은 감성적 직관의 형식을 통해서일 뿐이며, 그러나 그로 인해 우리는 또한 객관들을 그것들 자체인 바대로가 아니라, 우리에게 현상할 수 있는 바대로만 인식할 수 있다... 그런데 공간과 시간은 순수 수학이 그것의 명증적인 동시에 필연적인 것으로 등장하는 모든 인식과 판단들의 기초에 두고 있는 그러한 직관들이다.... 공간과 시간이 선험적 순수 직관들이라는 사실을 통해, 공간과 시간은 모든 경험적 직관, 다시말해 현실적 대상들의 지각에 선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리고 이것들에 맞춰서 대상들이 선험적으로 인식될 수 있지만, 그러나 물론 단지 그것들이 우리에게 현상하는 바대로만 인식될 수 있는, 우리 감성의 순전한 형식들임을 증명한다.(p161) <형이상학 서설> 中


 직관이 곧 영감을 통해 내가 대상들에 의해 촉발되는 모든 현실적인 인상들에 선행하는 나의 주관 안의 감성 형식 외에 다른 어떤 것도 함유하고 있지 않을 때에만, 나의 직관이 대상의 현실성에 선행하여 선험적 인식으로 생기는 일이 오직 유일하게 가능하다.(p159) <형이상학 서설> 中


 공간과 시간은 선험적이며, 우리는 이들 안에 있는 대상들을 감관을 통해 직관하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가 감관을 통해 직관적으로 얻은 지식은 경험적이고 주관적이다. 이러한 지식이 개인의 경험으로 머무르지 않고, 객관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직관이외의 다른 요소인 지성이 필요하다. 세계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직관과 지성이 모두 필요하다. 직관을 통해 들어온 '표상'과 지성을 통한 '판단'이 통일이 되었을 때, 우리는 이들이 주관성과 객관성이 모두 획득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대상으로 주어져야 하는 것은 모두 우리에게 직관에서 주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직관은 오직 감관들을 매개로 해서만 일어난다. 지성은 아무것도 직관하지 않으며, 단지 반성할 뿐이다.(p169) <형이상학 서설> 中


 객관적 타당성을 가지는 한에서 경험적 판단들은 경험판단들이다. 그러나 단지 주관적으로만 타당한 경험적 판단들을 나는 순전한 지각판단들이라고 부른다. 후자는 아무런 순수 지성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고, 단지 사고하는 주관에서 지각들의 논리적 연결만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전자는 항상 감성적 직관의 표상들 위에 지성에서 근원적으로 산출되는 특수한 개념들 또한 필요로 하며, 이 개념들이 바로 경험판단을 객관적으로 타당하게 만드는 것이다.(p189) <형이상학 서설> 中


 감관들의 일은 직관하는 것이고, 지성의 일은 사고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고함은 표상들을 한 의식에서 통일하는 것이다. 이 통일은 한낱 주관과의 관계에서 발생하여 우연적이며 주관적이거나, 절대적으로 생겨나 필연적이거나 객관적이다. 한 의식에서 표상들을 통일함이 판단이다. 그러므로 사고함은 판단함 또는 표상들을 판단들 일반과 관계 맺게 함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판단들은 표상들이 한 주관에서의 의식과만 관계 맺어지고, 그 안에서 통일이 되면 한낱 주관적이고, 혹은 표상들이 의식 일반에서, 다시 말해 거기서 필연적으로 통일이 되면 객관적이다. 모든 판단들의 논리적 계기들은 표상들을 한 의식에서 통일하는 그만큼의 가능한 방식들이다. 이 같은 계기들이 개념들로 쓰인다면, 그것들은 표상들을 한 의식에서 필연적으로 통일하는 개념들이고, 그러니까 객관적으로 타당한 판단들의 원리들이다. 한 의식에서의 이 통일은 분석적이거나 종합적이다.(p201) <형이상학 서설> 中


 위와 같은 과정에서 우리는 감관을 통해 대상을 인식(표상)하고, 지성을 통해 사고함(판단)을 알게 된다. 이러한 표상과 판단을 일치시키는 일련의 작업을 통해 우리가 '자연'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사실은 '자연'이 아니라 '내가 인식하고 사고한 결과물로서의 자연'이라는 사실을 도출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연법칙이라고 부른 것들도 사실은 우리의 법칙을 자연에 적용한 것에 불과할 것이다. 


 지성은 자연의 보편적 질서의 근원이다. 지성은 모든 현상들을 자기 자신의 법칙들 안에 파악하고, 그로써 비로소 경험을 선험적으로 성립시키며, 그에 의해 경험을 통해서만 인식되어야 할 모든 것이 지성의 법칙들에 필연적으로 종속된다. 무릇 우리가 다루어야 할 문제는 우리의 감성 및 지성의 조건들에 독립적인 사물들 그 자체의 자연[본성]이 아니라, 가능한 경험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이다.(p233) <형이상학 서설> 中


 '보편적 자연법칙들은 선험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라는 명제는 이미 저절로 다음의 명제, 즉 '자연의 최상의 법칙수립은 우리 자신 안에, 다시 말해 우리 지성 안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명제에, 그리고 '우리는 자연의 보편적 법칙들을 경험에 의거해 자연으로부터 찾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자연을 그 보편적 합법칙성의 면에서 순전히 우리의 감성과 지성 안에 놓여 있는,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명제에 이른다.(p227)... 내가 이와 관련하여 "지성은 그의 (선험적인)법칙들을 자연에서 길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법칙들을 자연에게 지정한다"라고 말하면, 처음에는 기이하게 들릴 것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확실하다.(p229)  <형이상학 서설> 中


 결국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참된 지식인 '앎'에 이를 수 없다. 표상과 판단의 통일이 경험적 판단의 한계일 것이다. 그렇다면, 참된 앎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러한 경험을 넘어선 초월적인 무엇인가(우리의 인식너머에 있기에 규정할 수 없는)가 필요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초월적인 것에 대해 알 수 없지만, 그 단초(端初)를 갖고 있다. 바로 '이성'이다. 


  경험을 통해서는 앎에 이를 수 없다. 이 물음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이성은 결코 스스로 만족하지 못한다. 이성이 순수 지성을 그에 국한시키고 있는 경험적 사용은 이성 자신의 전체 사명을 충족시키지는 않는다. 각각의 개별 경험은 경험 구역의 전체 권역의 단지 한 부분이다. 그러나 모든 가능한 경험의 절대적 전체는 그 자신 경험이 아니되, 그럼에도 그것은 이성에게는 하나의 필연적 과제이다. 이 전체에 대한 순전한 표상을 위해 이성은 그 사용이 단지 내재적인, 다시 말해 주어질 수 있는 한의 경험에만 상관하는 저 순수 지성개념들과는 전혀 다른 개념들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성개념들은 완벽성에, 다시 말해 전체적인 가능한 경험의 집합적 통일에 상관하고, 그럼으로써 모든 주어진 경험을 넘어서고, 초험적이 된다.(p243) <형이상학 서설> 中


 감성세계는 보편적 법칙들에 따라 연결된 현상들의 연쇄에 불과하며, 그러므로 그것은 자립적인 것이 아니고, 본래 사물 그 자체가 아니며, 그러므로 그것은 필연적으로 이 현상들의 근거를 함유하고 있는 것과, 즉 한낱 현상들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사물들 그 자체로서 인식될 수 있는 존재자들과 관계한다. 사물들 그 자체의 인식에서만 이성은 조건 지어진 것으로부터 조건들로의 진행에서 완벽성에 대한 요구가 언젠가는 충족되는 것을 볼 것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p291) <형이상학 서설> 中


 우리는 이것에 대해을 말할 수 없지만, 두 가지는 알고 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이성'을 통해서 초월적인 무엇인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과, 우리는 이성을 통해 완벽한 절대 진리로 이끌림을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인식의 한계로 인해 형이상학적 세계의 최고존재자를 알 수는 없지만, 우리 안의 이성을 통한 이끌림을 통해서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형이상학은 가능하다'는 것이 칸트가 <형이상학 서설>에서 내린 결론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하나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바, 그것은 한낱 우리 행위[활동]들의 자연원인들인 주관적으로 규정하는 근거들과 연결되어 있고, 그런 한에서 그 자신 현상들에 속하는 존재자의 능력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한낱 이념일 따름인 근거들이 이 능력을 규정할 수 있는 한에서, 객관적인 이 근거들과도 관계 맺고 있다. 이 연결은 당위에 의해서 표현된다. 이 능력을 이성이라고 일컫는다.(p274) <형이상학 서설> 中  


 순수 이성은 자기의 이념들 중에 경험의 분야를 넘어가 있는 특수한 대상들을 의도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경험과 연관한 지서사용의 완벽성만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완벽성은 원리들의 완벽성일 뿐, 직관과 대상들의 완벽성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완벽성이 명확하게 표상되게 하기 위하여, 이성은 그 완벽성을 그 인식이 저 [지성의] 규칙들에 관하여 완벽하게 규정된 객관의 인식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 객관은 단지 하나의 이념일 뿐으로, 지성인식을 저 이념이 가리키는 완벽성에 가능한 한 근접시키기 위한 것이다.(p251) <형이상학 서설> 中


 우리는 하나의 비물질적 존재자, 하나의 오성세계, 그리고 모든 존재자 중의 최고존재자를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성은 오직 사물들 그 자체인 이것들에서만 현상들을 그와 동종의 근거들에서 도출함에서는 결코 기대할 수 없는 완성과 충족을 만나기 때문이며, 또한 이 현상들은 항상 어떤 사상(事象) 그 자체를 전제하고,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것을 좀 더 자세히 인식할 수 있든 없든 간에, 그 어떤 사상(事象) 그 자체를 암시하고 있기에, 현상들과는 구별되는 어떤 것과 실제로 관계하고 있기 때문이다.(p292) <형이상학 서설> 中


 이성은 우리에게 어떤 것에 대해 그 자체를 가르쳐주지 않고, 가능한 경험의 분야에서 오직 자기 자신의 완벽한 그리고 최고 목적을 향해 있는 사용과의 관계에서만 가르쳐준다.(p305) <형이상학 서설> 中


 <형이상학 서설>에서 우리는 형이상학이 가능하다는 칸트의 주장과 함께 <순수이성비판>의 전체적인 체계를 살펴볼 수 있다. 다만, 여기에서는 시간, 공간 등 선험적 지식 등을 비롯한 이야기는 빠져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순수이성비판> 리뷰에서 다루도록 하고 일단 미루도록 하자. 다만, 리뷰를 마무리하기 전 괴델(Kurt Godel, 1906 ~ 1978)의 불완전성정리(Godel's incompleteness theorems)에 대해 간단하게 확인해보자.


 수학의 체계가 무모순이라면, 수학의 체계에서는 참이지만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제1불완전성 정리). 나아가 수학의 체계가 무모순이라면, 수학의 체계에서 모순이 도출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체계에서는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제2불완전성 정리)


 위와 같이 요약되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를 통해 <형이상학 서설>을 다시 보자. 제1불완정성 정리에 의하면, 순수 수학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인식 세계 내에서는 참이지만, 증명할 수 없는 초월적 존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형이상학 서설>의 주장과 일치한다. 반면, 제2불완전성 정리에 의하면 우리는 우리의 인식 범위 내에서는 우리의 인식이 올바르다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는 것이 아닐런지. 이처럼, 우리의 인식의 한계를 포함한 모든 것이 부정된다면, 인식 너머의 존재도 부정되는 것은 아닌지. 결국, 제1불완전성 정리와 제2 불완전성 정리를 종합한다면, 형이상학에 대해 알 수 없다는 결론으로 가는 것은 아닌가 여겨진다. 이에 대해서는 일전에 정리한 <신의 존재에 대한 괴델의 수학적 증명>을 다시 읽고 보다 상세히 정리하기로 하고 리뷰를 갈무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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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레고메나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84
임마누엘 칸트 지음, 염승준 옮김 / 책세상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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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할 수 없는 문제'는 칸트가 <순수이성 비판>의 '초월적 변증론'에서 다루고 있는 세계의 시초, 영혼불멸, 신의 존재, 인간의 자유에 대한 문제이며, 이러한 "초월적 변증론"의 주된 내용은, <프롤로고메나>의 셋째 부분, "어떻게 형이상학 일반이 가능한가?"에서 다루고 있는, "인간 영혼의 이념들", "우주론적 이념들", "신학적 이념들"에 상응한다.(p169) <프롤레고메나> - 해제 中 -

칸트는 '대답할 수 없는 문제'가 이성 자신의 실존적 문제가 되지 못하는 것을 '이성의 안락사'로 진단한다. '대답할 수 없는 문제'가 '자연 본성 자체'로부터 부과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의 실존적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내 이성의 자연 본성이 죽은 것 아니겠는가!(p171) <프롤레고메나> - 해제 中 -

칸트는 교조주의적 독단주의와 경험주의, 그리고 회의주의를 거쳐 형이상학적 문제들에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게 된 인간이 '성숙한 판단력'의 도움으로 이성능력 자체를 비판해야 한다는 자각에 이르게 될 것으로 기대했다. 이러한 자각에 이른 이성이 비로소 던질 수 있는 물음이 바로 '형이상학이 도대체 가능한가?'이다.(p173) <프롤레고메나> - 해제 中 -

순수이성 비판이란 책들과 체계에 대한 비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 능력 일반을, 이성이 모든 경험으로부터 독립해서 추구함직한 모든 인식과 관련해서 비판함을 뜻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도대체 형이상학이라는 것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를 결정하고, 형이상학의 원천과 범위 그리고 한계를 규정하되, 그것들을 모두 원리로부터 수행함을 뜻한다.(p175) <프롤레고메나> - 해제 中 -

인간 이성이 회의주의와 독단주의가 되어 잘 성장할 수 있도록 스스로에게 물과 영양을 주는 것은, 잘못된 이성의 자기이해를 완전히 근절시키기 위해서다... 순수이성 비판의 궁극적 목적은 전쟁 상태에 놓인 이성의 '영원한 평화'이며, 그 목적에 이르는 필연적 과정이 인간 이성의 계몽이자 도야가 된다... 칸트는 <프롤레고메나>에서 형이상학을 통해 인간 이성을 도야할 수 있으며, 도야된 인간 이성은 인류 공동체에 유해한 유물론, 숙명론, 무신론, 자유사상적 무신앙, 광신 및 미신으로부터 인류를 보호해 줄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p179) <프롤레고메나> - 해제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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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 하버마스 : 광기의 시대, 소통의 이성 지식인마을 32
하상복 지음 / 김영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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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리성과 일관성을 통해 사물의 내적 원리를 인식하는 능력인 이성(理性, logos)는 본래 개인의 정신적 자질이었다. 하지만 이성이 특정 역사적 시기에 지배적 정신의 위치에 오르면서 그것은 개인이 아닌 집단적 차원에서 작동하기 시작했다. 바로 서구의 근대라는 역사적 시간 속에서 이성은 지배적 집단 정신이 되어 정치/사회적으로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p29)... 계몽의 힘, 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성의 힘은 단순히 자연과 사회에 대한 관조가 아니라 기존 질서에 대한 비판을 통해 새로운 질서의 형성을 이끈 실천력으로 이해해야 한다.(p76)


 <푸코 & 하버마스 : 광기의 시대, 소통의 이성>의 주제는 이성(理性)이다. 그리고, 책에서는 이성의 역할을 둘러싼 푸코(Paul-Michel Foucault, 1926 ~ 1984)와 하버마스(Jurgen Habermas, 1929 ~ )의 차이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근대 이성의 어두운 측면을 바라본 푸코와 근대 이성의 밝은 면을 바라본 하버마스. 푸코가 중세의 신을 부정한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 ~ 1900)의 뒤를 이어 근대의 이성을 부정했다면, 하버마스는 공론장에서 이성을 통한 문제해결 능력을 강조한다. 


 푸코에게 서구의 근대 이성은 과학적 진리의 이름으로 비이성적인 것들을 배제하고 타자화하는 폭력이었다. 그 폭력은 물리력이 아니라 지식을 매개로 매우 정교하게 이루어졌다. 푸코는 서구 근대 사회가 정신병과 미친 사람을 다루는 방식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파헤쳤다. 지식의 정치적 힘은 '지식=진리'라는 등식에 기초한다. 푸코는 고고학적 방법을 통해 서구 근대의 지식이 진리와 얼머나 거리가 먼가를, 그리고 계보학적 방법을 통해 그 지식이 비이성적인 사람들을 얼마나 정교하게 통제하는가를 제시해주었다.(p208)


 하버마스는 서구 근대 이성이 본래 해방적 힘을 발휘해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18세기 서유럽 부르주아 공론장을 그에 대한 적절한 역사적 사례로 본다. 문제는 그 해방적 힘이 특정한 역사적 국면 속에서 가라앉아 있다는데 있다. 따라서 해방적 힘이 간직되어 있는 영역 속에서 이성의 잠재력을 현실화해야 한다.(p209)

 

  그렇다면, 이들의 다른 상황인식은 어디에서 출발하는 것일까? <푸코 & 하버마스>안 에서 우리는 언어에 대한 이들의 서로 다른 관점을 확인하게 된다. 통제 규칙의 전달자로서의 언어와 커뮤니케이션 도구로서의 언어. 언어에 대한 이들의 입장차이는 이성에 대한 이들의 차이로까지 이어진다.


 <담론의 질서>에서 인간의 언어 행위는 인간 외부에 존재하는 통제 규칙에 종속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지식의 고고학>에서 지식은 역사적 연속성 위에서가 아니라 역사적 단절과 불연속 위에서 성립한다고 강조했다. 한마디로 그는 인간의 주체성 subjectivity을 부정하는 구조주의적 사유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푸코는 이러한 시각을 '고고학'으로 명명했다.(p98)


 하버마스에게 언어는 사물을 표상하는 도구가 아니라 열린 공간에서 타인과 관계 맺기 위한 커뮤니케이션의 매개물이었다.(p153)... 하버마스는 서구 근대 사회를 이끈 이성이 과연 부정적인 모습만을 지니고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 사회를 관통하는 원리로서 이성의 폭력적, 지배적 속성을 폭로하는 반근대주의, 반이성주의 사상가들에 맞서 하버마스는 서구의 근대가 간직하고 있는 만주주의적 잠재력을 보여주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p165)


 사실, 푸코와 하버마스 모두 일가를 이룬 철학자이기에 그 방대한 사상을 요약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이번 리뷰에서는 <푸코 & 하버마스>가 입문서라는 점을 감안하고, 또 이들 사상가의 차이에 한정해서 살펴보자. 푸코는 담론과 언표라는 두 개념을 언어 영역에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며 사회적 공간에 위치시킨다. 푸코에게 문제는 이러한 언어가 자리한 공간이 우리에게 통제와 감시를 하는 판옵티콘(Panopticon)이라는 것에 있으며, 푸코에게 판옵티콘은 바로 이성으로 대표되는 근대라 할 수 있다. 


  푸코에게 근대는 진보의 증거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근대 서구인들이 얼마나 간교하고 모순적인 정치적 욕망의 덩어리인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징표였다. 근대는 정신병을 제조해내고, 사체를 난도질하고, 성적 욕망의 도덕적 표준을 정립하고, 육체의 감시 장치를 발명해냈다. 모든 사람들이 그토록 찬미해 마지않던 근대는 통제와 억압과 폭력 위에 설립된 건축물이라는 것이 푸코의 생각이었다.(p90)


 <지식의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개념은 지식을 구체적인 계기들인 담론 談論 dscours과 언표 言表 enonce다. 언어학적 차원에서 언표는 말이나 글로 표현된 진술을 의미하고, 담론은 그러한 언표들의 집합이다. 그러나 푸코는 담론과 언표를 언어학적 영역 바깥으로 끌어내서 사회적 공간 속에 위치시키고자 한다.(p134)


 여기에 덧붙이자면, 언표가 언어 바깥에서 이해할 때만 제대로 규명될 수 있다는 푸코의 말은 괴델(Kurt Godel, 1906 ~ 1978)의 불완전성 정리로 뒷받침될 수 있을 것다. 근대를 부정하는 푸코의 이론을 근대의 산물인 수학이 뒷받침하는 것이 다소 아이러니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괴델의 두 번째 불완전성 정리는 "이론은 자신의 무모순성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모순인 공리계 T가 존재한다고 하자. 이것이 무모순임을 증명할 수 있을까? 괴델은 T가 무모순이면, "T가 무모순이다"라는 문장은 (수론의 문장으로 부호화했을 때) T로부터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을 보였다. 따라서 "T가 무모순이다"라는 문장은 참이면서도 증명불가능한 문장이다.(p259) <Mathematics 2> 中


 반면,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로서 언어의 기능을 한정시켜 놓는다면, 언어는 사회구조의 강압수단이 아닌 수평 관계를 다지는 역할을 수행한다. 하버마스는 근대 부르주아(bourgeois) 계급 형성과정에서 일어난 정치혁명의 과정에서 일어난 한 단면에 주목한다. 개인들의 친목모임에서 공론의 장으로, 예술에서 정치의 장으로 확장되는 역사 속의 공론장 모습을 통해 다른 의미의 미메시스가 발견된다.


 하버마스는 아도르노가 제시한 '미메시스 mimesis'라는 개념에 주목한다. 아도르노의 미메시스는 개념적 사유에 대비되는 일종의 충동적 체험을 뜻하는데 그것은 자신을 주변 세계 속으로 몰입시켜 자신과 주변의 경계와 구분이 해체되는 상태, 즉 물아일체 物我一體를 만들어내는 힘이다. 아도르노는 미메시스적 행위들을 통해 서구 근대 사회에서 초래된 주체와 객체 사이에 가로놓인 거대한 갈등적 심연을 해소하기를 소망했다. 하버마스는 주체/객체 관계를 '주체/주체' 관계로 전환시키기보다는 그 둘의 관계를 원초적으로 해체하는 힘이기 때문에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위한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p182) 


 부르주아 공론장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국가적 사안들을 논의하는 부르주아 사회의 토론 공간을 뜻한다. 애초에 문학과 예술을 논하는 공간으로 시작된 부르주아 공론장은 점차 국가적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여론이 조성되는 정치적 공간으로 진화해나갔다.(p186)... 부르주아 공론장은 공권력 영역이 아니라 사적 영역에 속한다. 그것은 곧 부르주아 공론장이 사적인 삶이라는 이해관계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 공론장은 사적 영역 내의 경계가 보여주고 있듯이 단순히 가족적 삶과 경제적 삶으로 매몰되지 않는다. 부르주아 사회의 사적 개인들은 공론장을 통해 공권력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여론을 주조해내는 '공중'으로 전환된다. 이렇게 부르주아는 사적 개인임과 동시에 공중으로 등장한다. 이렇듯 매우 독특한 정치적 위상을 지닌 부르주아 공론장에는 사실상 근대 민주주의의 원리가 내재되어 있다.(p196)


 영화 <스타워즈 Starwars>에서 포스의 어두운 면(Darkside of the Force)과 밝은 면(Lightside of the Force)이 나온다. 다스 베이더(Darth Vader)와 아나킨 스카이워커(Anakin Skywalker)로 표현되는 포스의 양면에서 우리는 어느 쪽을 진정한 포스의 본질(本質)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이러한 문제와 마찬가지로 이성의 어두운 면을 바라본 푸코와 밝은 면을 바라본 하버마스 중 누구의 시각이 옳은 것일까. 


[그림] Darth Vader/Anakin Skywalker(출처 : https://www.planetminecraft.com/skin/darth-vader-anakin-skywalker-4358471/)


 섣부르게 답을 하기전, 우리가 근대와 이성을 바로 보는 것은 이들 양면을 종합해서 이해했을 때 가능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종합해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다 깊이 있는 공부가 필요할 것이다. 다음을 위해 이정도로 틀만 잡아놓고 입문서는 이만 덮도록 하자...


PS.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의 다른 예. 오늘 아침 주차장에 있는 자동차 시동을 걸고 나서 실을 짐이 있어 차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오른쪽 라이트가 꺼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 자동차 안 운전석에 있을 때는 자동차에 있는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자동차 밖에 있어서는 문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론(자동차)은 자신의 무모순성(라이트가 꺼졌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다". 불완전성 정리를 대강 이렇게 받아들이면 무리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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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 & 니체 : 철학자가 눈물을 흘릴 때 지식인마을 37
김선희 지음 / 김영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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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펜하우어를 괴롭혔던 중심 물음은 삶의 고통, 즉 '삶은 왜 이다지도 고통스러운가?'였다. 그리고 이 물음에 천착한 끝에 그가 발견한 고통의 근원은 의지로 대변되는 의욕과 성욕이었다. 반면에 니체를 괴롭혔던 물음은 '우리 삶의 데카당스 decadence나 허무주의는 어디서 왔는가?'로 대변될 수 있는데, 이는 우리 존재와 고통의 발생에 대한 물음과 더불어 인류가 이것으로부터 자유로워졌던 순간에 사용한 다양한 삶의 기예에 대한 물음이었다.(p17)


 <쇼펜하우어 & 니체 : 철학자가 눈물을 흘릴 때>는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 ~ 1860)와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 ~ 1900) 입문서로서 '존재'와 '고통'에 초점을 맞추어 이들 사상의 차이점을 살펴본다. 


 쇼펜하우어에 있어서 직관적 표상은 세계의 근거나 고통의 근거에 대한 물음의 답을 표상에서 의지로 이행시키는 열쇠 개념이다. 쇼펜하우어가 표상의 근거를 직관에서 빼앗고 직관의 근거를 육체 Leibd에서 찾고, 육체를 의지와 불가분의 것으로 보는 까닭에 고통의 해석학의 중심축을 표상론에서 의지론으로 이행한다... 모든 표상은 의지의 객관화에 불과하기에 이 세상의 모든 현상들, 즉 표상들의 배후에는 바로 의지가 존재한다. 세계의 궁극적인 원인에 대한 충족 이유율의 탐구는 바로 의지에 대한 탐구로 집중된다.(p63)... 삶에 대한 의지의 긍정은 바로 성욕을 충족시키는 생식에 의하여 가장 잘 강화된다.(p68)


 쇼펜하우어에게 현상계와 본체계는 다른 세계가 아닌 다르게 경혐되는 같은 세계이며, '의지'와 '표상'이라는 두 측면을 갖춘 하나의 세계다. 표상은 외부에서 관찰되고, 의지는 내부에서 경험된다. 때문에 고통의 원인 역시 외부에서 내부로 이행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의지는 기본적인 욕구(성욕) 뒤에 숨어 있다.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욕구를 해소하려 하지만 탄타로스(Tantalos)의 형벌처럼 기아와 갈증을 해소할 수는 없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예술과 이념에 대한 인식이다.


[그림] 탄타로스의 형벌(출처 : https://www.pinterest.co.kr/pin/426434658452495973/)


 동물 세계의 의지는 인식적이다. 그러나 이때 인식은 의지에 의해서 지배되는 의지의 노예인 인식과 의지로부터 자유로운 인식으로 구분된다. 후자는 인간이 의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때, 즉 인과율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가능하다. 이를 위한 수단을 쇼펜하우어는 바로 예술 Kunst과 이념 idee에 대한 인식에서 찾는다.(p65)... 의지가 강할수록 노/병/사와 같은 실존의 결여적 속성은 더 강한 고통을 야기한다.(p83)... 예술과 이념에 대한 인식을 통한 치료적 해석에서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가 부각된다. 이 지점이 바로 표상과 의지의 노예인 인간이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는 곳이다.(p89) 


 의지와 인식의 접목 지점은 의지의 사실적 긍정에서 의지의 당위적 부정으로 이행하는 지점이다. 의지의 노예에 불과했던 오성이 인식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오성을 넘어서는 예술과 정관에 의한 이념의 인식이라는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이 차원에서 표상과 의지에 의한 염세주의적 해석이 예술과 이념에 대한 인식을 통한 낙관주의적 해석으로 바뀌는 것이다.(p79)


 쇼펜하우어의 예술과 이념에 대한 인식이 낙관적인 해석으로 이어진다는 그 지점에서 니체의 사상은 출발한다. <비극의 탄생 Die Geburt der Tragodie>에서 말한 디오니소스과 아폴론의 대립은 감성(感性)과 이성(理性)의 대립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아폴론적인 요소의 승리가 그리스 문화의 몰락을 가져왔다는 것을 초기 니체는 주장한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광기가 그리스 땅에 가져다준 풍요로움의 산물로 본다. 반면에 우리가 찬양해 마지않는 그리스의 심미적 명랑함이나 학문적 낙천주의를 그리스의 해체와 약화의 시기에 등장한 병적인 증후라고 여긴다.(p139)...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예술의 발전을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적인 결합 속에서 찾는다.(p140)... 예술의 세계와 가상의 세계를 지배하던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의 대립 대신에 디오니소스와 소크라테스의 대립이 새로이 등장하고 마침내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에 이르러서 소크라테스의 유령이 승리함으로써 그리스 비극의 디오니소스적 요소는 소멸된다. 이와 같은 역전은 바로 그리스인들의 삶의 몰락을 의미한다.(p152)


 이러한 문화 예술적인 측면에 니체는 '계보학 系譜學'의 측면이 더해지면서, 문화/예술의 가치전환을 확장시켜 나간다. <도덕의 계보학 Zur Genealogie der Moral: Eine Streitschrift>으로 대표되는 니체 사상은 이제 플라톤/소크라테스 비판에서 기독교 비판으로 방향을 전환된다. 


 니체는 학문 그리고 예술과 관련하여 그것이 예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을 중심으로 하는 윤리적 문제 설정임을 명시한다... 따라서 비판의 대상도 더 이상 소크라테스적 주지주의의 인식론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기독교의 도덕으로 이행한다.(p178)...  니체의 가치 전환은 계보학적 수단을 통하여 순간적인 가능성에 한정되어 있는 음악이나 직관과 같은 비역사적인 수단을 통한 가치 전환에 비하여, 지속적인 가치 전환의 길을 제시한다. 즉 계보학적 성찰은 시간적/공간적으로 각인된 물질화된 과거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p181)

 그리고, 니체는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유령과 기독교의 도덕을 넘어선 초인(超人)을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에서 말한다. 강인한 낙타에서 자유로운 사자로, 다시 창의적인 어린이가 되면서 제약을 넘어선 인간은 호모 루덴스(Homo Ludens)의 모습을 가진다. 


 디오니소스적 예술가라는 개념은 니체의 예술론의 새로운 면모를 드러내는 중요한 개념이다. 이 개념을 통하여 니체는 더 이상 망각을 재촉하는 도취나 꿈 그리고 기존의 도덕에 반기만을 드는 파괴적인 사자를 내세우는 대신에 새로운 삶의 형식을 창조하려는 자가 지녀야 할 기본적인 기예를 제시한다.(p160)... 정신은 사자의 단계에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사자는 단지 자유를 쟁취하는 자이다. 자유는 단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다. 이 준비 작업이 끝날 때 정신은 사자에서 어린아이로 변화한다.(p235)

 요약하면,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자신의 시야를 한계로 세계를 인식하며, 표상과 의지를 통해 이를 경험한다. 또한 인간의 의지는 본성 뒤에 숨어 있으나, 이를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기에 의지를 벗어날 필요가 있고, 예술과 이념에 대한 인식이 고통을 벗어나는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반면, 니체는 인간은 디오니소스적 요소의 상실을 통해 고대에는 소크라테스 유령이, 중세에는 기독교의 도덕으로 대표되는 이성이 승리해왔으나, 인간이 이러한 제약으로부터 극복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위해 감성과 현재의 회복일 강조했다는 것으로 거칠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보다 깊이 있는 정리가 필요한 것은 물론이겠지만, 입문서로서는 이정도로 일단 넘기자. 


 <쇼펜하우어 & 니체 : 철학자가 눈물을 흘릴 때>는 입문서적인 지식인 마을 시리즈  중에서도 꽤 읽기 어려운 책이다. 이는 쇼펜하우어와 니체외에도 하버마스(Jurgen Habermas, 1929 ~ )와 푸코(Paul-Michel Foucault, 1926 ~ 1984), 빅터 프랭클(Viktor Emil Frankl, 1905 ~ 1997)의 사상까지 다루기 때문이다. 하나라도 알려주고 싶은 저자의 배려 깊음은 입문자들에게는 못내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과감하게 하버마스와 푸코의 이야기는 같은 지식인 마을의 <푸코 & 하버마스 : 광기의 시대, 소통의 이성> 쪽으로 돌리도록 하자. 엄밀하게 말해서, 두 책의 주제는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짐은 되도록 가볍게 갈 필요가 있다 생각된다. 큰 사상가의 사상을 대강 정리한 이번 리뷰를 서둘러 마무리 하자...


PS. 그래도, 하버마스와 푸코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린 이들은 <쇼펜하우어 & 니체>에서 언급한 하버마스의 비판은 '신은 죽었다'를 통해 기존 질서를 부정하지만, 이에 대해 윤리적 대안을 니체가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이에 대한 푸코의 반박은 '파르헤지아' 문제 설정에서 발생하는 변형이 상이한 진리 놀이의 형태를 가져온다는 정도로 대강 정리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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