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의 위대한 선물 - 천재과학자의 감동적인 천국 체험기
임마누엘 스베덴보리 지음, 스베덴보리 연구회 엮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스웨덴의 과학자이자 신학자인 스베덴보리 (Swedenborg, 1688 ~1772)의 영적 체험은 칸트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단테처럼 지옥과 천국을 묘사한 그의 글은 기독교 신앙만을 강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신곡」과 다르다. 또한, 우리는 「실천 이성 비판」에서 신의 나라로 우리를 이끄는 이성이 ‘양심‘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서술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천국은 기독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지상에서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온 사람들을 위해서도 하늘은 무관심하지 않다. 세상에는 종교를 갖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인간 각자의 가슴속에 양심을 심어 주었다. 양심은 하나님께서 파송한 ‘하나님의 사자‘이다. 양심은 천국으로 가는 길을 가르치고 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우리에게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이다.(p148)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0-06-06 1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06 2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실천이성비판 - 개정판 대우고전총서 5
임마누엘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 / 아카넷 / 200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A226 V125 최고선을 위해 전제되어야만 하는 것인 한에서, 자연의 최상 원인은 지성과 의지에 의해 자연의 원인(따라서 창시자)인 존재자, 다시 말해 신이다. 따라서 최고의 파생적 선(즉 최선의 세계)의 가능성의 요청은 동시에 최고의 근원적 선의 현실성, 곧 신의 실존의 요청이다. 무릇 최고선을 촉진함은 우리의 의무였다. 그러니까 이 최고선의 가능성을 전제하는 것은 우리의 권한일 뿐만 아니라 요구인 의무와 결합된 필연성이다. 최고선은 오로지 신이 현존한다는 조건 아래서만 생기므로, 그것은 신이 현존한다는 그 전제를 의무와 불가분리적으로 결합한다. 다시 말해 신의 현존을 상정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필연적이다.(p221) <실천 이성 비판> 中 


 <실천 이성 비판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 >에서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는 '인간이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 하는 물음을 던지고, 이에 대해 선(善)을 행하는 것이라고 답한다. 뒤이어, '선을 행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실천해야하는가'라는 다음 질문이 따라나오게 되는데, <실천 이성 비판>은 이 두 번째 질문에 대해 논리적으로 답을 한다. 본문에서 칸트는 덕과 행복이 일치된 최고선이 성취된 곳을 '신의 나라 Reich Gottes'라고 부른다. 신의 나라를 현실에서 이룩하도록 노력하는 것. 이것이 칸트가 생각한 인간의 길이고, 물음에 대한 답이다. 이를 먼저 확인하고 이번 리뷰에서는 실천 원칙으로부터 우리가 행해야할 바를 순차적으로 따라가 보도록 하자.


 A35 V19 실천 원칙들은 의지의 보편적인 규정을 함유하는 명제들로서, 그 아래에 다수의 실천 규칙들을 갖는다. 이 원칙들은, 그 조건이 주관에 의해서 단지 주관이 의지에 대해서만 타당한 것으로 간주될 때는, 주관적이다. 즉 준칙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 조건이 객관적인 것으로, 다시 말해 모든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에 타당한 것으로 인식되면, 객관적이다. 즉 실천 법칙들이다.(p73) <실천 이성 비판> 中


  칸트는 실천 원칙들이 법칙이 되기 위해서는 객관적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객관성을 결여한 실천 원칙들은 준칙에 불과하며, 이것은 도덕의 실천 원칙에서도 마찬가지 때문에, 도덕법칙을 세우기 위해서는 객관성을 충족시키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만 인식할 수 있고, 이는 법칙을 세우는데 장애요소가 된다.


 A38 V21 욕구 능력의 객관(질료)을 의지의 규정 근거로 전제하는 모든 실천 원리들은 모조리 경험적인 것이며, 어떠한 실천 법칙도 제공할 수가 없다.(p76)...  A41 V23 모든 질료적인 실천적 규칙들은 의지의 규정 근거를 하위의 욕구 능력에 둔다. 그리고 의지를 충분하게 규정하는 순전히 형식적인 법칙이 전혀 없다면, 어떠한 상위의 욕구 능력도 인정될 수 없을 것이다.(p78) <실천 이성 비판> 中


 A71 V42 에피쿠로스의 행복설에서 열거된 원리들은 모두 질료적이다. 둘째로, 그것들은 가능한 모든 질료적 원리들을 포괄하고 있다. 이로부터 마지막 결론이 나온다. 질료적 원리들은 최상의 도덕법칙으로는 아주 부적합하기 때문에, 그에 준거해서 우리의 준칙들에 의한 가능한 보편적 법칙 수립의 순전한 형식이 의지의 최상의 직접적인 규정 근거를 이뤄야만 하는 순수 이성의 형식적 실천 원리가 유일하게 가능한 원리이며, 이것은 정언 명령들, 다시 말해 (행위들을 의무로 만드는) 실천 법칙들로 적합하고, 판정할 때나 인간의지를 규정함에 있어서 그에 적용할 때 윤리성의 원리로 적합하다.(p107) <실천 이성 비판> 中


 또한, 우리가 욕구하는 모든 것은 경험적인 것이기에, 우리는 경험으로부터 객관적인 법칙을 가져올 수 없게 된다. 때문에, 칸트는  도덕의 법칙이 '정언 명령'의 형태로 선험적으로 주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라 결론 내린다. 


 A55 V31 순수 실천 이성의 원칙 :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p91)...  A56 순수 이성은 그 자체만으로 실천적이고, 우리가 윤리 법칙이라고 부르는 보편적 법칙을 (인간에게)준다.(p93) <실천 이성 비판> 中


 A52 V29 실천 법칙의 질료, 다시 말해 준칙의 객관은 결단코 경험적으로밖에는 주어질 수 없고, 그러나 자유의지는 경험적인 (다시 말해, 감성 세계에 속하는) 조건들에 대해 독립적으로 규정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므로, 자유의지는 법칙의 질료에 대해 독립적으로, 그러면서도 법칙 안에서 규정 근거를 발견해야만 한다. 그런데 법칙의 질료를 제외하면 법칙 안에는 법칙 수립적 형식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함유되어 있지 않다.(p88)... 자유와 무조건적인 실천 법칙은 상호 의거한다...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의식되는 것은 도덕법칙이다. 도덕 법칙은 우리에게 맨 처음에 주어지는 것이다.(p89) <실천 이성 비판> 中


 '자유'는 이성 체계에 있어 가장 기초가 되는 개념이다. 이에 반해, '자율'은 의무에 대한 유일한 원리다. '신의 나라'에서 이성은 자유에 기초하지만, 시공간의 제약을 안고 경험적으로 물자체를 인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도덕 법칙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때문에, 우리가 알아야 할 개념들은 도덕법칙에 의해 간접적으로 규정되어지기에, 우리가 선(善)을 행하기 위해서는 이에 복종해야 한다.


 A111 V63 선악의 개념은 도덕법칙에 앞서서가 아니라, (얼핏 보면 심지어 이 개념이 도덕법칙의 기초에 놓여야 할 법하지만), 오히려 (여기서 보이는 바대로) 도덕법칙에[의] 따라서[뒤에] 그리고 도덕법칙에 의해서 규정될 수밖에 없다.(p138) <실천 이성 비판> 中


 A5 V4 무릇 자유 개념은, 그것의 실재성이 실천이성의 명증적인 법치에 의해 증명되는 한에 있어서, 순수 이성의, 그러니까 사변 이성까지를 포함한, 체계 전체 건물의 마룻돌[宗石]을 이룬다. 그리고 아무런 받침대도 없이 순전한 이념들로 사변 이성에 남아 있는 (신이니 [영혼의] 불사성이니하는 등의) 여타의 모든 개념들은 이제 이 개념에 연결되어, 이 개념과 함께 그리고 이 개념을 통하여 존립하여 객관적 실재성을 얻는다.(p52) <실천 이성 비판> 中


 A58 V33 의지의 자율은 모든 도덕법칙들과 그에 따르는 의무들의 유일한 원리이다. 이에 반해 의사의 모든 타율은 전혀 책무를 정초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책무 및 의지의 윤리성 원리에 맞서 있다. 즉 법칙의 일체의 질료(곧, 욕구된 객관들)로부터의 독립성과 동시에 준칙이 그에 부합해야 하는 순전히 보편적인 법칙 수립적 형식에 의한 의사의 규정에서 윤리성의 유일한 원리가 성립한다.(p95) <실천 이성 비판> 中


 그렇다면, 도덕법칙의 근거가 무엇이기에 우리는 여기에 복종해야 하는가? 이는 도덕법칙이 '우리 안의 신(Deus in nobis)'에 의한 준엄한 명령이기 때문이다. 도덕법칙에 복종한다는 것은 이성이 인도하는 바에 따라 최고선에 한걸음씩 가까이 간다는 것이기에 우리는 도덕법칙에 복종해야 한다. 이러한 칸트의 주장은 정언명령을 깨달아, 끊임없이 실천해 최고선에 도달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것으로 정리되는데,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서 불교의 돈오점수(頓悟漸修)를 떠올리게 한다.


  A145 V82 도덕법칙은 곧 최고 완전 존재자의 의지에 대해서는 신성성의 법칙이고, 그러나 모든 유한한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에 대해서는 의무의 법칙이자, 도덕적 강요의 법칙이며, 법칙에 대한 존경을 통해 그리고 자기 의무에 대한 외경에 의해 이성적 존재자의 행위들을 규정하는 법칙이다... 우리는 이성의 훈육 아래에 서 있는바, 우리는 우리의 모든 준칙들에서 이 훈육에서 아무것도 덜지 않도록 이에 복종할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p165) <실천 이성 비판> 中 


 A233 V129 도덕법칙은 순수 실천이성의 객관이자 궁극 목적인 최고선의 개념을 통해 종교에, 다시 말해 모든 의무들을 신의 지시명령[계명]들로 인식하는데에 이른다. [도덕법칙은 의무들을 곧] 남의 의지의 제재[制栽], 다시 말해 임의적인, 그 자신 우연적인 지령들로서가 아니라, 각자의 자유로운 의지 자신의 본질적인 법칙들로 인식하는 데에 이른다.(p226) <실천 이성 비판> 中


 <실천 이성 비판>에서는 이와 같이 인간 인식의 한계로 최고선을 알 수는 없지만, 정언명령을 통해 최고선에 이르는 길이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데, 이로부터 예전의 경험을 떠올리게 된다.


 예전 깊은 산중에서 너무도 짙은 어둠 속에 놓여 길을 잃었던 적이 있었다. 계속 같은 자리만 맴도는 듯한 느낌과 나무들에 둘러싸여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을 때, 들려오던 물소리.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기에 물소리를 따라 계곡을 내려가면 산 아래로 내려갈 수 있다는 생각은 지친 나를 일으켜 세웠고, 시간은 걸렸지만, 내려올 수 있었다. 칸트가 보여주려 한 희망이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칸트의 희망이 더 가슴 벅차게 다가오는 것은 희망의 소리가 밖이 아닌 내 안에 있다는 것 때문일 것이다. <실천 이성 비판>을 통해 희망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면서 이번 리뷰를 갈무리한다.


 A237 V131 우리 인격의 인간성은 우리 자신에게 신성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이것은 이제 당연한 결론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도덕법칙의 주체요, 그러니까 그 자체로 신성한 것의 주체이며, 이 주체를 위하여 그리고 이 주체와 일치해서만 도대체 무엇인가가 신성하다고 말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도덕법칙이 자유의지인 인간 의지의 자율에 기초해 있고, 자유의지는 인간의 보편적 법칙들에 따라 반드시 그가 복종해야만 할 것에 동시에 일치할 수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p229) <실천 이성 비판> 中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0-06-06 1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06 2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실천이성비판 - 개정판 대우고전총서 5
임마누엘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 / 아카넷 / 200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순수 이성 비판‘을 통해서는 형이상학으로서 존재론이 불가능함이 밝혀진 것이라면, ‘실천 이성 비판‘을 통해서는 형이상학으로서 윤리학이 정초된다.(p42)

˝네가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성)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서 대하지 않도록, 그렇게 행위하라.˝(GMS:IV, 429)

칸트는 기독교의 순수 이성(ratio pra)인 ‘신의 이성‘ 을 ‘인간의 선험적인 초월적 의식‘으로 대체한다. 필멸의 인간은 불멸의 신에 미치지 못하기에, 인간의 초월적 의식은 세계를 창조할 수도, 심지어는 완벽하게 인식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칸트는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주어지는 정언명령(定言命令, Categorical Imperative)에 귀기울이고 우공이산(愚公移山)의 마음으로 꾸준히 나아간다면,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희망할 수 있다는 복음(the gospel)을 전해준다.

인간은, 요컨대, 세계 인식에서 존재자의 존재를 규정하는 초월적 주관이자, 행위에서 선의 이념을 현실화해야 하는 도덕적 주체이고, 세계의 전체적인 합리성과 합목적성을 요청하고 희망하고 믿는 반성적 존재자이다. 이로써 칸트의 ‘이성 비판‘은 우리가 과학적 엄밀성을 가지고 발언할 수 있는 것은 인식의 세계, 즉 진리의 세계에 대해서뿐이지만, 그러나 인간에게 ‘가치 있는‘ 일은 논리적 사고 활동뿐만 아니라, 아니 오히려 그보다도 더, 도덕적 완전성, 그리고 인간의 이상이 마침내 실현된다는 희망 내지 확신을 가지고 역행(力行)하는 일임을 일깨워준다.(p331)

이러한 칸트의 철학은 내세(來歲)에 대한 믿음이 없는 이들에게도 우리 안의 도덕법칙이 하늘의 별과 더불어 아름다울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의 묘비명처럼.

그에 대해서 자주 그리고 계속해서 숙고하면 할수록, 점점 더 새롭고 점점 더 큰 경탄과 외경으로 마음을 채우는 두 가지 것이 있다. 그것은 내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법칙이다.(kpV, A288=V161)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0-06-06 1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06 2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윤리형이상학 정초 대우고전총서 16
임마누엘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 / 아카넷 / 2014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B3 선의지는 그것이 생기게 하는 것이나 성취한 것으로 말미암아, 또 어떤 세워진 목적 달성에 쓸모 있음으로 말미암아 선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 의욕함으로 말미암아, 다시 말해 그 자체로 선한 것이다.(p79) <윤리형이상학 정초> 中


  B16 IV401 최고의 무조건적인 선은 오로지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에서만 마주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상되는 결과가 아니라 법칙의 표상이 의지의 동인인 한에서, 두말할 것도 없이 오로지 이성적 존재자에서만 생기는, 이 법칙의 표상 자체만이 우리가 윤리적이라고 부르는 그러한 탁월한 선을 이룰 수 있다. 이 탁월한 선은, 법칙의 표상에 따라 행위하는 인격 자체 안에 이미 현전하는 것으로, 비로소 그 행위결과로부터 기대될 필요가 없다.(p92) <윤리형이상학 정초> 中


 <윤리형이상학 정초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에서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는 인식의 한계가 있는 인간이 과연 도덕적 법칙에 맞는 존재자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이에 대해 칸트는 자신의 답을 '아무런 제한 없이 선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선의지'로부터 시작한다. 선의지는 순수한 이성적 존재자의 실천을 지향하는 이성으로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칸트는 선의지는 필연적인 실천 명령으로 주어지며, 의무로부터 주어지는 행동만이 도덕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B7 우리에게는 이성이 실천능력으로서, 다시 말해 의지에게 영향을 미쳐야 할 그런 것으로 품수되어 있으므로, 이성의 참다운 사명은, 가령 다른 의도에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선한 의지를 낳는 것이어야만 한다. 이를 위해 단적으로 이성이 필요했던 것이다.(p83)... B8 선의지라는 개념을, 즉 우리의 행위들의 전체적 가치를 평가하는 데 언제나 상위에 놓여 있어 여타 모든 가치의 조건을 이루는 이 개념을 발전시키기 위해, 우리는 의무 개념을 취해 보기로 한다.(p84) <윤리형이상학 정초> 中


  B13 IV399 다른 모든 경우에서와 같이 하나의 법칙이 남는바, 그것은 곧 경향성에서가 아니라 의무에서 그의 행복을 촉진한다는 것이다. 이때 비로소 그의 태도는 본래적인 도덕적 가치를 갖는다... 실천적 사랑은 의지 안에 들어 있지, 감각의 성벽(性癖)에 있지 않으며, 행위의 원칙들에 있지 애잔한 동정에 있지 않은바, 이런 실천적 사랑만이 지시명령될 수 있으니 말이다.(p89) <윤리형이상학 정초> 中


 그렇다면, 의무로 행해진다는 것만이 도덕적 가치를 가질 수 있는가? 칸트는 이러한 물음에 대해 '의지'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자연의 다른 사물은 자연 법칙에 따라 움직이지만, 이성적 존재자인 인간은 '의지'를 가지고 선한 것을 선별할 수 있다. 이성적 존재자들은 이러한 '의지'를 가지지만, 동시에 윤리법칙에 종속되어 있기도 하다. 칸트는 <윤리형이상학 정초>에서 이러한 윤리 법칙이 '명령'으로 주어진다고 보았다.


  B36 IV412  자연의 사물은 모두 법칙들에 따라 작용한다. 오로지 이성적 존재자만이 법칙의 표상에 따라, 다시 말해 원리들에 따라 행위하는 능력, 내지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법칙들로부터 행위하는 능력, 내지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법칙들로부터 행위들을 이끌어내는 데는 이성이 요구되므로, 의지는 실천 이성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B37 의지란 이성이 경향성에 독립해서 실천적으로 필연적인 것이라고, 다시 말해 선하다고 인식하는 것만을 선택하는 능력이다.(p115) <윤리형이상학 정초> 中


  B38 IV413 객관적인 원리의 표상은, 그것이 의지에 대해 강요적인 한에서, (이성의) 지시명령이라 일컬으며, 이 지시명령의 정식을 일컬어 명령이라 한다. 모든 명령은 당위('해야 한다')로 표현되며, 그게 의해 이성의 객관적 법칙과, 주관적 성질상 그에 의해 필연적으로 결정되지는 않는 의지에 대한 관계(즉, 강요)를 고지한다(p116) <윤리형이상학 정초> 中


 칸트는 <윤리형이상학 정초> 에서 명령을 정언적 명령과 가언적 명령으로 나눈다. 정언적 명령이 목적이라면, 가언적 명령은 수단이 된다. 칸트는 정언적 명령만이 윤리법칙, 실천 법칙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실천 법칙이 되기 위해서는 보편성과 필연성(타당성)이 필요한데, 우리는 명령의 타당성을 즉각적으로 깨달을 수 있다. 또한, 명령이 주관성을 배제하고 객관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자기 자신과 다른 모든 이들을 목적으로 대할 수 있어야 한다. 


  B39 IV414 모든 명령은 가언적으로거나 정언적으로 지시명령한다. 전자는 가능한 행위의 실천적 필연성을 사람들이 의욕하는 (또는 의욕하는 것이 가능한) 어떤 다른 것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표상하는 것이다. 정언적 명령은 한 행위를 그 자체로서, 어떤 다른 목적과 관계없이, 객관적으로 - 필연적인 것으로 표상하는 그런 명령이겠다.(p118)... 행위가 한낱 무언가 다른 것을 위해, 즉 수단으로서 선하다면, 그 명령은 가언적인 것이다. (반면에) 행위가 자체로서 선한 것으로 표상되면, 그러니까 자체로서 이성에 알맞은 의지에서 필연적인 것으로, 즉 의지의 원리로 표상되면, 그 명령은 정언적인 것이다.(p119) <윤리형이상학 정초> 中


  B51 IV421 내가 가언 명령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는, 나에게 조건이 주어질 때까지 나는 그 명령이 무엇을 함유할 것인가를 미리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정언 명령을 생각할 때, 나는 그것이 무엇을 함유하는가를 즉각 안다. 무릇, 명령은 법칙 외에 오로지, 이 법칙에 적합해야 한다는 준칙의 필연성만을 함유하지만, 법칙은 그것이 제한받았던 아무런 조건도 함유하고 있지 않으므로, 남는 것은 오로지, 행위의 준칙이 그에 적합해야 할, 이 법칙 일반의 보편성뿐이며, 이 적합성만이 명령을 본래 필연적인 것으로 표상한다. B52 그러므로 정언 명령은 오로지 유일한 즉, 그것은 '그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것을, 그 준칙을 통해 네가 동시에 의욕할 수 있는, 오직 그런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는 것이다... 의무의 보편적 명령도, '마치 너의 행위의 준칙이 너의 의지에 의해 보편적 자연법칙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위하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p132) <윤리형이상학 정초> 中


 칸트는 이로부터 '네가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성)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 대하지 않도록, 그렇게 행위하라.'는 필연성과 보편성을 모두 갖춘 정언명령을 도출해낸다.


 B66 IV429 무릇 최상의 실천 원리가 있어야 하고, 그리고 인간의 의지에 관련한 정언 명령이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목적 그 자체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누구에게나 목적인 것의 표상으로부터 의지의 객관적 원리를 형성하고, 그러니까 보편적 실천법칙으로 쓰일 수 있는 그러한 것이어야만 한다. 이 원리의 근거인즉, 이성적 자연본성은 목적 그 자체로 실존한다는 것이다.(p147)...  B67 IV429 실천 명령은 다음과 같은 것일 것이다 - 네가 너 자신의 인격에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서 인간(성)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 대하지 않도록, 그렇게 행위하라.(p148) <윤리형이상학 정초> 中


 그렇다면, 도덕법칙이 정언명령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만약 인간이 신적인 존재라면, '의지의 자유'가 언제나 '의지의 자율성'과 일치할 수 있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B87 IV440 의지의 자율이란 의지가 그 자신에게 (의욕의 대상들의 모든 성질로부터 독립적으로) 법칙인 그런 의지의 성질이다. 그러므로 자율의 원리는 선택의 준칙들이 동일한 의욕에서 동시에 보편적인 법칙으로서 함께 포섭되는 그러한 방식 외에는 아무런 것도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p169) <윤리형이상학 정초> 中  


  B97 IV446 의지는 생물이 이성적인 한에서 갖는 일종의 원인성이다. 자유는 이런 원인성의 특성일 것인바, 자유는 그것을 규정하는 외래의 원인들에 독립해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자연필연성은, 외래 원인들의 영향에 의해 활동하게끔 규정받는, 모든 이성 없는 존재자들이 원인성의 특성이다.(p179) <윤리형이상학 정초> 中  


 그렇지만, 인간은 지성과 함께 감성을 가지고 시공간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의지의 자유'와 '의지의 자율'이 항상 일치할 수 없다. 때문에, 인간에게는 도덕법칙이 필요하며, 이는 당위(當爲), 정언적 명령으로 주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성적 존재자인 인간은 자신을 그 아래 세우면서 인격적 존재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칸트의 논지다. 


  칸트는 <순수 이성 비판>에서 시공간의 제약으로 인한 인식의 한계를 보여주었다면, <윤리형이상학 정초>에서도 이러한 제약으로 인해 우리가 선(善)을 직관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인식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지성과 감성의 결합을 통해 꾸준히 노력함으로써 세계를 알아갈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언명령을 통해 도적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칸트는 <윤리형이상학 정초> 에서 말한다. 이런 전체적인 틀을 가지고 <실천 이성 비판>으로 나가보자...


  B111 IV454 오성세계의 순전한 성원으로서 나의 모든 행위들은 순수 의지의 자율의 원리에 완전히 적합할 것이다. 그러나 한낱 감성세계의 일부로서 나의 행위들은 전적으로 욕구들과 경향성들의 자연법칙에, 그러니까 자연이 타율에 알맞게 취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p194)... 자유의 이념이 나를 예지 세계의 성원으로 만듦으로써 정언 명령들은 가능하다. 이 정언적 당위는 선험적 종합 명제를 표상하는 것인바, 왜 그런가 하면, 감성적 욕구들에 의해 촉발되는 나의 의지 위에 동일하지만, 오성세계에 속하는, 순수한, 그것 자체로 실천적인 의지의 이념이 덧붙여지고, 이 의지는 저 의지가 이성에 따르는 최상의 조건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p195) <윤리형이상학 정초> 中   


 B110 IV453 우리는, 우리가 자유롭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를 오성세계의 성원으로 놓고, 의지의 자율을, 그 자율의 결과인 도덕성과 함께 인식하되, 그러나 우리가 의무지워져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를 감성세계에 속하면서 또한 동시에 오성세계에도 속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p193) <윤리형이상학 정초> 中 


  B128 IV463 우리는 비록 도덕적 명령이 실천적 무조건적 필연성을 개념적으로 파악하지는 못하나, 그럼에도 우리는 이것을 개념화 못함을 개념적으로 파악하는바, 이것이 인간 이성의 한계에까지 원리적으로 나아가려 하는 철학에 대하여 당연히 요구될 수 있는 것의 전부이다.(p212) <윤리형이상학 정초> 中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0-06-06 1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06 2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윤리형이상학 정초 대우고전총서 16
임마누엘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 / 아카넷 / 2014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선의지는 오직 이성적 존재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것으로서 다름아닌 순수한 이성적 존재자의 실천을 지향하는 이성, 곧 '순수 실천 이성'이다.(p50)...  선의지만이 그 자체로 선한 것이라 함은, 결국 "의무로부터"의, 오로지 의무에서 말미암은 행위만이 "본래적인 도덕적 가치"를 가지며, 의무로부터의 행위란 도덕적 실천 법칙을 그 행위의 표준으로, "의욕의 원리"로, 곧 준칙(Maxime)으로 삼는 행위를 말한다.(p51) <윤리형이상학 정초> 中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는 <윤리형이상학 정초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에서 이성적 존재자만이 선의지를 가질 수 있고, 선의지만이  선(善)한 것으로 해석한다. 신(神)과 같은 이성적 존재자는 선의지의 자율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인간은 절대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시공간에서 감성적 욕구를 느끼는 존재에 불과하기에, 인간이 인격적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정언적 명령(定言命令, Categorical Imperative)이 요구된다.


 칸트는 인간은 이성적 존재자로서 윤리법칙에 종속해 있음을 밝혀낸다.(p52)... "객관적인 원리의 표상은, 그것이 의지에 대해 강요적인 한에서, (이성의)지시명령(Gebot)이라 일컬으며, 이 지시명령의 정식[定式)을 일컬어 명령(Imperativ)이라 한다. 어떤 명령이 실천 법칙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보편성과 필연성을 가져야만 한다.(p53) <윤리형이상학 정초> 中 


 주관적 욕구를 배제한 채, 객관적 법칙이 될 수 있는 행위의 준칙을 스스로 세우고, 그것을 보편적 자연법칙처럼 준수하려는 인간 의지는 그 자체로 거룩하고 '신성하다'(p54)... 그 자체로 존엄한 인간은, 그리고 이성적 존재자는 '목적 그 자체'이다.(p55)... 그렇다면, 무엇이 윤리적으로 선한 마음씨 또는 덕으로 하여금 그토톡 높게 존엄성을 요구할 권리를 주는가? 그것은 자율성이다.(p56) <윤리형이상학 정초> 中 


 이성적 존재자의 선의지는 '자유'를 매개로 도덕 법칙과 결합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성적 존재자의 자유 의지란 바로 도덕 법칙 아래에 있는 의지를 말한다.(p57)... 인간은 감성적 욕구를 동시에 가지고 살아가는 시공상의 존재자이기 때문에, 바로 그 때문에 그에게는 당위가, 자신이 스스로에게 강제적으로라도 부과하는 정언 명령이, 도덕 법칙이 있는 것이다..(p60) <윤리형이상학 정초> 中 


  우리는 <순수 이성 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ft >에서 인간의 인식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 조건의 제한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윤리형이상학 정초>에서 인격적 존재자로서 인간의 행동은 시공간의 제한으로 인해 의지의 자율과 도덕 법칙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역자의 해제로 위와 같이 큰 줄기를 파악하고, 상세 내용은 추가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댓글(8)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다이제스터 2020-05-25 2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칸트의 선의지에 이성이라는 전제 자체가 의문 시 됩니다. 칸트와 같은 천재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인간의 한계 아닌가 생각됩니다.

겨울호랑이 2020-05-25 22:03   좋아요 1 | URL
칸트 철학에서 최고의 통일 능력을 의미하는 ‘이성(Vemunft)‘은 마치 중세의 신(神)의 다른 모습처럼 비춰지기도 합니다.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처럼 칸트 철학에서도 중세철학의 여운이 남아 있음을 저 역시 느끼게 됩니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신의 존재 증명에 대한 우주론적, 존재론적 증명 등은 그 일례라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와 근대 사이, 아직 기독교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던 시기에, 신만의 속성을 인간에게도 가져왔다는 점에서 저는 칸트 철학이 마치 신의 불을 인간에게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 의 불‘과 같은 혁명이라고 느껴집니다. 칸트 자신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이야기 했습니다만...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처럼 사람이 자신주변의 영향으로부터 크게 벗어나는 일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북다이제스터 2020-05-25 22:14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 님 통찰에 공감합니다. 더욱이 우리도 그 오랜 옛날 중세 이념에 자유로운지도 새삼 궁금할 때가 많습니다.

겨울호랑이 2020-05-25 22:28   좋아요 1 | URL
제 개인 생각입니다만, 우리 뇌 구조가 북다이제스터님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생명체가 진화하면서 간뇌에서 대뇌가 발달하는 구조가 되었던 것처럼, 과거의 사상이 영향력을 잃어버리긴 했지만 함께 공존하지 않나 싶습니다. ‘간뇌‘를 양서류나 파충류의 뇌라고 놀리듯이 말하지만, 간뇌의 기능을 대신하는 대뇌의 부분이 없는 것처럼, 문명의 결과는 우리가 의식하지 모르는 사이에 이미 우리 자신이 되지 않았을까 짚어 봅니다..^^:) 북다이제스터님께서 내주신 문제 덕분에 여러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북다이제스터 2020-05-25 22:36   좋아요 1 | URL
이름이 ‘서연’이었던가요? 죄송합니다. 자주 불러보지 않으니 기억이 가물가물... 죄송합니다. 아무튼 자전거 타는 사진 뒷태만 봐도 이젠 어여튼 숙녀네요. ^^

겨울호랑이 2020-05-25 22:39   좋아요 1 | URL
^^:) 연의입니다. 아닙니다, 흔한 이름이 아니라서 친척들도 어려워합니다. 연의가 크는 것에 비례해서 저는 늙어감을 느낍니다 ㅋ 북다이제스터님 감사합니다!

2020-06-06 12: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6-06 20:2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