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위에서 언급했고 불트만자신도 인정하는 대로 기적이야기 (요한복음은 제외)에서 그가 말하는 게리그마를 찾아내기란 어렵다. 더욱이 초기의 전승들로 소급할수록 그렇다.
"케리그마가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먼저 있었다. 그러므로 케리그마의 배후를 물어야만 한다."
우리는 기적이야기들을 하느님 나라 운동의 일환으로 보았다." 그것은 바로 민중운동과 직결된다. 기적이야기는 바로 민중운동의 일환이다. 민중은 개인이 아니고 집단이다. 그러므로 그 기적사건이 예수 개인에게서 일어난 것인가 아니면 후기 예수의 민중운동에 의해 추가, 변형 또는 창출되었는가 하는 물음은 별 의미가 없다. 의미가 있다면 민중운동사의 규명을 위해서일 것이다. 예수의 민중운동은 예수에게서시작되어 그의 민중에게 계승되었으며, 그것은 하느님 나라 운동으로이어진다. 그런 시각에서 우리는 기적이야기들을 성격화할 것이다. - P152

사회에서 철저히 소외된 바로 이들을 제가 속했던 데로 복귀시키는것은 그들에게 권리회복이며 해방운동이다. 그러나 민중운동의 차원에서 볼 때 이것은 단순히 옛 상태로 환원하는 사건에 머물 수 없다. 그들은 예수를 통해 해방의 경험을 한 것이다. 옛 모습을 다시 찾는 데 그것이 아니고 새로운 삶을 얻은 것이며, 그 새로운 삶은 민중운동의 일환속에서 얻어진 것이다.  - P162

예수의 율법해석을 확대 실천하면 기존질서는 모두 붕괴된다. 기존질서는 사유화를 인정하고 보호해 주는 것을 중심과제로 하고 있다. 그 사유화의 과정이 어떠했는지 그 결과가 무엇을 초래했는지는 묻지 않고 그것을 보호해 주는 것이 국가권력의 존재이유이다. 국가권력 자체도 사유화에서 독점화를 위한 도구로 이용된다. 사유화를 확대하고 유지하기위해서는 노동력이 필요하다. 그것을 위해 노예가 필요했던 것이다. - P202

끝으로 수난사 구도에 나타난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다. 그것은 수난사 전체가 어떻게 그토록 무신적 분위기로 일관되었나 하는 것이다. 게쎄마니에서 골고타에 이르는 과정에서 어떤 형태로도 신의 개입은 없다.
그는 신없는 현실에서 철저히 패배당하는 약자로서 서술되었을 뿐이다.
유다 민족 일반은 물론이고 그의 소수의 제자들마저 배신하여 내버리고도망하며, 그 중 하나는 예수를 모반한다. 마침내 하느님마저 그를 버린현장이다.  - P264

아니! 예수는 ‘우리‘와 꼭같은 조건 아래에서 수난당했다. 우리가 당하고 있고 당해야 하는 그런 수난을! 이런 인식은 바로 저들로 하여금 그의 수난이 바로 우리의 수난, 그의 죽음이 바로 우리의 죽음이라는 인식에 도달하게 했다. 이것은 "그는 우리를 대신해서 수난당했다"는 인식의 디딤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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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탄생
엔도 슈사쿠 지음, 이평아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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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는 대중의 지상적 메시아로서의 기대를 저버렸기 때문에 그들에게 무력한 존재로 비쳤던 것이다. 제자들조차 대부분 그를 저버린 것(요한 6,66)은 그가 자신들의 기대에 부합하지 못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스승'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서의 중요한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무력했던 예수가 어째서 죽은 후에 하느님의 아들로 간주되었는가? 그가 십자가에 달려 있을 때 저버리고 도망친 제자들이 왜 그 후에 목숨을 걸고 예수의 가르침을 전하려고 했던 것일까? 무력한 예수가 영광의 그리스도로 바뀐 이유는 무엇인가? 겁쟁이였던 제자들이 어떻게 강한 신념과 신앙을 지니게 되었을까? _ 엔도 슈사쿠, <그리스도의 탄생> , p8


 엔도 슈사쿠 (遠藤周作, 1923~1996)의 <그리스도의 탄생>은 전작 <예수의 생애>에 뒤이어 예수의 죽음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형성을 다룬다. 대중의 기대를 저버린 메시아. 엔도 슈사쿠가 바라본 예수의 이미지는 무기력한 한 명의 인간이다. 너무도 무력한 모습을 보였기에 주변으로 배신을 당하고 결국은 죽음을 당한 한 인간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류사의 거대한 종교로 부활한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이를 쫓아가는 작가의 여정이 <그리스도의 탄생>이다.


 제자들은 굴욕적인 타협으로 목숨을 부지하였다. 그 후에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평생 스승이 자신들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죽었다는 부끄러움과 회한이 남았던 것이고, 그것이 십자가에 대한 이미지의 원형이 되었던 것이다(p16)... 베드로가 의회와 그러한 타협을 한 이튿날, 예수는 군중의 욕설과 멸시를 받으며 좁고 무더운 예루살렘의 길을 걸어 처형한 골고타로 향했다. 그동안 그들은 형언할 수 없는 수치심을 느끼며 자신들의 배신을 되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예수가 죽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감정은 그들에게 관념이 아니라 사실이었던 것이다. _ 엔도 슈사쿠, <그리스도의 탄생> , p17


 슈사쿠는 스승의 마지막 순간에 도망친 제자들의 회개(Metanoia)에 주목한다. 자신들의 배신에 대해 원망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마지막 순간까지 평소 자신이 강조한 '사랑'에 충실한 스승의 모습. 이러한 예수의 죽음은 생전이 아닌 사후에 온전하게 제자들의 마음에 뿌리내리게 되고, 비로소 믿음이 결실이 되어, 겨자씨가 자라 나무가 되듯 내적 부활(復活)로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변모(metamorphosis)에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형성 동기를 설명한다.


 제자들은 예수가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 이들, 자신을 저버린 제자들에 대해 원망과 증오의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자신들을 징벌하도록 하느님께 청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 말들을 전해들은 제자들을 충격을 받았다(p20)... 그들은 그때 비로소 자신들이 예수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제자들은 비로소 무언가를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생전에 예수가 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수수께끼 같은 말들을 통해서 예수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었는지 조금씩 알 듯했다(p21)... 예수는 죽었지만 새로운 모습으로 그들 앞에 나타나 그들 가운데 생존하기 시작한 것이다. 바꿔 말하면, 예수는 다름아닌 그들의 마음속에 부활한 것이다. 부활의 본질적인 의미 중 하나는 제자들이 예수를 재발견했다는 점이다. _ 엔도 슈사쿠, <그리스도의 탄생> , p22


 원시 그리스도교는 예수를 저버리고 배신한 비애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은 배신한 제자들을 미워하기는커녕 끝까지 사랑하려고 했던, 어머니와 같은 예수의 이미지에서 생겨난 것이다. 배신한 자식과 사랑을 베푼 어머니와의 관계, 거기에서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는 예수의 이미지가 생겨났으며 인간의 그러한 나약함, 가련함을 이해해주는 동반자 예수의 이미지가 생겨났고, 그 동반자 예수가 다시 자신들 옆에 와줄 것이라는 신념이 생겨났다. 그리스도가 되기 전까지 예수가 지닌 이미지는 모두 생생한 제자들의 고백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_ 엔도 슈사쿠, <그리스도의 탄생> , p63


 그렇지만, 스승의 위대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이 제자들을 완전하게 변화시킬 수 없었다. 슈사쿠는 제자(사도)들이 예수의 죽음 후 골방에 숨어 두려움에 떨던 그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바라본다. <사도행전>의 기록과는 달리 그들은 세상끝까지 복음(Gaspel)을 전파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스승을 죽게 만든 이들과의 공존을 선택했다. 성전의 중요성과 관련해서는 사두가이들과, 율법의 중요성과 관련해서는 바리사이들과 부딪히지 않고 유대인들 사이에 조용하게 스스의 가르침을 되새기던 이들. 이것이 슈사쿠가 바라본 소수의 유대교 분파에 지나지 않던 것이 초대 그리스도교의 모습이었다.


 이러한 평온한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불을 던진 사건이 바로 스테파노의 순교와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의 등장이다. 성전이 아닌 사랑의 중요성을 외치면서 스테파노는 사두가이파의 교리와 대립하고, 율법 대신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바오로는 바리사이와 대립하며 비로소 유대교의 분파가 아닌 세계 종교로서 변화되었다.


 루가는 명백히 스테파노의 죽음을 예수의 죽음에 근거해서 묘사하고 있다. 예수가 재판을 받고 예루살렘 성 밖의 골고타에서 처형되었듯이 스테파노 또한 부당한 재판을 받고 예루살렘 성 밖으로 끌려가 처형된다. 이 점은 저자 루가의 배후에 있었던 후대 원시 그리스도교 안에 스테파노의 죽음을 예수의 죽음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다는 점을 가리키고 있다(p93)... 성전보다도 사랑을 위대하게 여긴 예수를 본받아 스테파노는 성전 절대주의를 통렬히 비판했던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베드로나 사도들보다 스테파노가 예수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_ 엔도 슈사쿠, <그리스도의 탄생> , p95


 바오로는 우리 인간이 고통스러운 존재라는 것과 인간 행위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는 듯하다. 인간은 누군가를 위해서 선한 일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선하다고 생각한 것이 실은 자신의 독선이며, 그것이 상대를 상처 입힌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p152)... 바오로의 그리스도론論이 전개된다. 율법은 인간을 막다른 곳으로 몰아넣는다. 죄로부터 벗어나고자 계율과 율법을 지키지만, 돌을 던진 수면에 물결이 일듯이 계속해서 새로운 죄에 휘말린다. 바로 여기에 인간의 행위의 비애, 그리고 원죄의 고통이 있다.. 그런 인간을 원죄에서 해방시키는 존재, 그가 바로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다. 하느님은 자신과 인간의 화해를 위해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고 십자가에서 죽게 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속죄물인 것이다. _ 엔도 슈사쿠, <그리스도의 탄생> , p153


  엔도 슈사쿠의  <그리스도의 탄생>은 무기력한 한 사내의 죽음이 그리스도의 부활과 세계 종교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것을 그려낸다. 십자가에서의 슬픈 절규가 후대에 그레고리안 성가(Gregorian chant))의 합창이 되는 원동력을 독자들은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는 기적이 증표로 관여되지 않으며, 영원한 생명도 언급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신의 침묵에 대한 인간들의 끊임없는 질문이 신앙(信仰)을 고양시켰음을 <그리스도의 탄생>을 보여준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를 들 수 있다. 이 말은 시편 22편의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는 비애에 찬 하소연이지만, 시편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이 비애의 하소연이 이윽고 "당신의 이름을 겨레에게 알리고 예배 모임 한가운데서 당신을 찬양하리니"라는 찬가讚歌로 바뀐다는 점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말은 결코 절망의 표현이 아니라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의 첫 부분인 것이다. _ 엔도 슈사쿠, <그리스도의 탄생> , p18


  흔히 독수리로 표현되는 <요한복음>에는 대표적인 7가지 기적이 직접적으로 언급된다. 이 복음서에서 카나의 혼인 잔치, 죽어가는 고관의 아들, 중풍 환자, 빵과 물고기를 가진 소년, 물 위를 걸음, 태생 소경, 라자로의 부활 등이 서로 연관맺으며 점층적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간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명이다. 그렇지만, 이와는 조금은 다른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더 인상깊었던 설명이 있어 옮겨본다.


 그것은 7가지 기적 중 마지막이 라자로의 부활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생명마저 다른 이들을 위해 기꺼이 내줄 수 있는 사랑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실천이며, 기적이라는. 이는 예전 광야에서 40일간 단식 후 나타났던 악마가 결코 할 수 없는 경지이며 비로소 7에서 완성되는 설명으로 기억된다. 10년도 더 전에 들었던 강의라 자세히는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그 느낌은 강렬했었다. 그리고, 아마도 엔도 슈사쿠의 예수도 같은 지평 위에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으로 리뷰를 마무리한다.


  <그리스도의 탄생>에서는 이외에도 베스파시아누스에 의해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절망에 빠진 유대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Quo Vadis, Domine(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를 외쳤을 그들의 모습에서 <침묵>의 로드리고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도, <예수의 생애>에서 <사해 부근에서> 던져진 질문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음 페이퍼에서는 이들을 연관시켜 보려한다. 어쩌다 보니 리뷰의 마무리가 페이퍼의 인트로가 된 것은, 예수의 죽음이 그리스도의 탄생과 연결되는 구도와 비슷해졌다...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소중한 곳이 불타 버리고, 그 지성소도 잿더미가 되었다 그런데도 하느님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침묵을 지켰으며, 그리스도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원시 그리스도교에 가장 큰 시련이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지옥과 같은 비참한 상황 속에서 절망하지 않고 신앙을 유지하는 것은 너무도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에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다. 즉, 하느님의 침묵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리스도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고 공동체에서 이탈하거나, 아니면 그 침묵의 이유를 되물음으로써 신앙을 더욱더 굳게 간직하는 것이다. _ 엔도 슈사쿠, <그리스도의 탄생> , p231

당시 제자들은 이사야서에서 가혹한 운명을 겪고 있는 이스라엘의 부흥이 아니라 예수 자신의 부활을 감지했을 것이다. 그가 다시 온다! 자신들에게 돌아온다! 이러한 기대가 이때부터 제자들의 마음속에 생겨났다. 그들은 스승의 죽음에 대한 하느님의 침묵의 의미를 부활이란 말에서 찾으려 했다(p38)... 부활이나 재림은 당시 유다인에게 일반적인 관념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그러한 관념이 없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마음속에는 죽음과 재생이라는 관념이 깊이 잠재되어 있었던 듯이 보인다. 왜냐하면 죽음과 재생이라는 관념이 유다교 주변의 여러 동방 종교 가운데서 엿보이기 때문이다. - P39

동방 종교와 신약성서와의 관계를 분석한 학자들의 책을 대할 때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동방 종교가 지니고 있는 죽음과 재생의 감각과 유다교에 있는 죽음과 부활에 대한 기대가 제자들과 그 배후에 있는 갈릴래아 집단의 의식 속에 뒤섞여 하나를 이루고 있었고, 그것이 비로소 처참한 예수의 죽음에 의해 촉발되어 무언가를 만들어 내려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유다교의 예언서 속에서 부활의 근거를 발견하려는 가운데, 갈릴래아의 서민들은 그들의 무의식 속에 잠재하는 죽음과 재생이라는 감각에 의거하여 예수가 다시 살아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는 결국 철저한 일신교 一神敎인 유다교적인 요소에 범신론적이고 비유다교적인 요소가 섞였음을 의미한다. - P41

예루살렘이라는 작은 세계에서 이루어졌던 공동체의 활동은 스테파노 사건으로 뜻하지 않게 이 지방까지 퍼져가게 되었다. 그것은 사도들의 선교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발적인 상황 전개에 의해 일어난 것으로, 결과적으로 좁은 예루살렘에 한정되었던 예수의 복음은 바깥 세계를 향해 퍼져 나가게 되었다. 민족과 국경을 초월하여 전개될 그리스도교 선교의 최초의 씨앗이 스테파노 사건에 의해서 뿌려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 P100

사도행전과 갈라디아서의 두 가지 내용에서 떠올릴 수 있는 내용 중에 어느 것이 옳은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두 가지 내용에서 떠올릴 수 있는 당시 상황은 이방인 문제를 둘러싸고 바오로와 보수파 제자들과의 사이에 상당한 논쟁이 있었고, 그로 인한 분쟁을 피하기 위하여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 타협안을 제시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 타협안이란 안티오키아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에 계속해서 의연금 혹은 헌금을 보내는 것으로 이 안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안티오키아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에 종속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안티오키아의 선교는 용인되었지만, 구체적으로 볼 때 가장 중요한 이방인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애매모호한 상태로 남게 되었다. - P144

종교가 조직화, 체계화되고 신학神學이라는 이론으로 신神에 대한 수수께끼를 해명하고자 하여 결국 외형적으로도 내면적으로도 인생과 세계에 대한 의문과 수수께끼가 모두 풀린 순간 쇠약해지고 부패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중세中世라는 시대가 그리스도교 신학의 확립기이자 쇠퇴기이기도 했다는 점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원시 그리스도교는 이 인생과 세계에 대한 의문과 수수께끼를 풀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신앙은 쇠퇴하지 않고 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하느님은 왜 침묵을 지키고 있는가?‘, ‘그리스도는 왜 재림하지 않는가?‘, 이 두 가지 과제를 풀 수 없었기 때문에 신자들은 고뇌하며 발버둥치고 괴로워했으며, 이 고통들이 신앙의 에너지가 되었던 것이다 - P232

예루살렘의 제자들이 처음부터 예수를 신격화하지는 않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 과정을 요약해 본다면, 그들은 처음에 자신들에게 제기된 ‘하느님의 침묵‘이라는 수수께끼와 마주하는 가운데 영광스러운 예수의 재림이라는 해답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 영광스러운 예수를 구름을 타고 나타날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로 불렀는데, 그 칭호가 서서히 메시아로 바뀌고,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에서 나온다‘라는 유다교 전승에 의해 예수를 다윗의 후손으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리라. 결국 예수는 최초에는 하느님에게 선택된 뛰어난 예언자이자 랍비였지만, 평생에 걸친 노력과 수난, 참혹한 죽음의 대가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자격을 받았다는 것이 초기 제자들의 생각이었다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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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2022-05-21 01: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궁금했던 책인데, 먼저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겨울호랑이 2022-05-21 04:46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라파엘님 좋은 주말 되세요 ! ^^:)

캐모마일 2022-05-22 2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고 예수의 생애를 샀습니다. 살까말까 망설이다 호랑이님께서 쓰신 그리스도의 탄생 서평을 읽고 결심했네요. 아마 다음 달 초쯤이면 시리즈를 다 읽지 않을까 싶네요 리뷰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중에 우리나라도 일본처럼 예수 그리스도 번역 합본이 나오길
,기대해 봅니다

겨울호랑이 2022-05-22 22:33   좋아요 1 | URL
제 부족한 글이 캐모마일님께 작은 도움이 되어 기분이 좋네요, 감사합니다. <예수의 생애>에서는 ‘신성(神性)‘이 거의 보이지 않는 인간 예수의 모습이 생소하게 다가왔습니다만, 슈사쿠의 작품 세계 전반을 읽다 보니 역사적 지평 위의 한 인간이 더 감동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저 역시 <예수의 생애>가 매우 좋은 작품이라 생각하고, 캐모마일님께서도 의미있는 독서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캐모마일님, 즐거운 독서 되세요! ^^:)
 

예수는 당시의 모든 사람들의 오해에 둘러싸여 살아야 했다. 짧은 생애 동안 민중도, 적대자도, 그리고 제자들 마저도 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꿈과 희망을  예수에게 걸려고 했다.  예수는 자신의 의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대중의 기대 속에서 고독했다. 서민들은 그에게서 사랑보다는 현실적인 효과를 추구했고, 대중은 로마에게 유린당하고 있는 유다를 ‘하느님 나라‘로 회복시킬 지상적인 메시아로 그를 내세우려 했다. 이러한 기대와 흥분은 한때 갈릴래아의봄이라는 열광적인 인기를 불러일으켰지만, 예수에게 지상적인 메시아의 의지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들은 예수로부터 떠나갔다. 예수의 비극적인 십자가상의 죽음은 이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상이 내가 쓴 『예수의 생애』의 줄거리이다.  - P7

인간이 만일 현대인처럼 고독을 장난스럽게 여기지 않고 진지한 자세로 임한다면, 그래서 자신의 내면과 마주한다면 그의 영혼은 반드시 어떤 존재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랑에 실망한 사람은 사랑을  배신하지 않을 존재를 찾을 것이고, 자신의 슬픔을 이해해줄 이가 없어 절망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을 이해해줄 그 누군가를 찾을 것이다. 그것은 감상도 어리광도 아니며, 다른 사람에 대한 인간의 조건인 것이다.
때문에 인간이 존재하는 한 인간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인간은 반드시 그러한 존재를 영원한 동반자를 계속 찾을 것이다. 예수는 이러한 인간의 간절한 기대에 그 자신의 생전에도 사후에도 답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자가 역사 속에서 많은 죄를 범했고 그리스도교 역시 때로는 과오를 범했지만, 인간이 계속해서 예수를 찾는 것은 그때문이다.
- P250

사울이 볼 때, 신자들은 예수라고 불리는 하찮은 남자를 주님으로 섬기며 그의 재림을 믿는 것이다. 더욱이 예수라고 불리는 남자는 십자가형을 당한 자로, 사울이 알고있는 율법에 의하면 십자가에 달린 자는 모두 하느님에게 저주받은 자이다. 하느님에게 저주받은 그를 주님으로 섬기는 것은 율법을 부정하는 것이다. 율법을 부정한 이들이 이렇듯 생생한 구원의 희망을 지닐 수 있는가? 이러한 의문에 휩싸인 사울은 ‘율법인가, 예수인가‘라는 질문을 피할 수 없었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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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해 부근에서 다시 읽고 싶은 명작 6
엔도 슈사쿠 지음, 이석봉 옮김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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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적을 일으키지 못한 예수는 초가을에 갈릴래아 호숫가 마을에서 쫓겨났다. 차가운 안개비가 내리는 날, 예수와 제자들은 5개월 전 그토록 환영했던 자들이 욕설과 돌팔매질을 해대는 수모를 받으며 그곳을 떠났다(p56)... 이듬해 5월, 안드레아는 아무 쓸모 없던 그 사나이가 제자들한테서도 버림을 받아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_ 엔도 슈사쿠, <사해 부근에서>, p57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1923~1996)의 <사해 부근에서>안의 예수는 무능력하다. 기적을 행하지 못하는 예수. 예언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했지만, 고향 뿐 아니라 자신이 가는 곳마다 쫓겨나는 인간 예수의 모습은 우리에게 낯설기만 하다. 슈사쿠의 예수는 기적을 행하며 그들을 비참한 현실에서 한 번에 끌어올려지 않는다. 대신, 자신이 직접 비참한 현실로 내려가 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는 존재다.


 "왜 대답을 못하나? 성전과 야훼께 바치는 희생제사보다 더 중요한 게 무엇인가?" "슬퍼하고 고통받는 이를 위해 울어주는 것, 죽어가는 사람의 손을 잡아주고 위로하는 것, 자신의 비참함을 받아들이는 것, 그런 것들이 다윗 성전이나 과월절의 제사보다 더 소중하오. 성전에서 제사를 바치는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소." 예수는 피로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들었소? 이자는 성전과 제사를 모욕했소. 의회도 그것을 알게 될 것이오." _ 엔도 슈사쿠, <사해 부근에서>, p99


 "하느님에게 성전이 무엇이란 말인가? 당신들이 경멸하는 창녀들이 하룻밤 자신의 비참함을 울며 지새웠다면 하느님은 이 성전보다 그 한 방울의 눈물을 택하실 것이다. 하느님은 성전을 바라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인간을 바라신다." _ 엔도 슈사쿠, <사해 부근에서>, p109


 빛나는 승리나 예언의 성취가 아닌 사랑과 인간을 말하는 순진한 목수 예수. 그가 행한 기적이라 기록된 것들은 성경학자들에 의해 많은 부분이 각색된 신화(神話)였음이 작품 속 학자 도다(戶田)에 의해 말하여지고, 이러한 사실은 열심한 신자 도다를 신앙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이곳에 성경학을 공부하러 온 한 사나이가 있었네. 그는 예수의 생애도 모습도 성경에 쓰인 그대로라고 믿고 있었지, 그런데 공부가 깊어짐에 따라 성경에 묘사된 예수의 생애도 말씀도 사실이기보다 원시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신격화하여 지어낸 사실이란 걸 알게 되었다네. 그는 후세의 신앙이 만들어 낸 성경의 예수상像을 정중하게 옆으로 밀어놓았네"(p71)...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우리는 인생의 마무리를 서서히 시작할 나이에 이르렀지만 도다도 나도 손에 거머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_ 엔도 슈사쿠, <사해 부근에서>, p73


 현재의 도다뿐 아니라 역사 속의 유대 민중과 혁명당 그리고 사두가이, 바리사이 등 정치 세력 모두에게 예수는 메시아가 아닌 무기력한 희생양뿐이었다. 우리에게 알려진 예수의 모습은 마치 우리 나라 민화  '아기장수' 처럼 후대의 창작에 불과하다는 <사해 부근에서>. 작품에서는 예수의 모습이 제자 알패오, 대사제 안나스, 총독 빌라도, 쑥 파는 사나이, 백인대장의 시선에서 저마다의 시선으로 비춰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곳에서도 우리가 아는 '그리스도 왕'의 모습은 없다. 다만, <성경> 속의 말씀이 슈사쿠의 예수를 뒷받침할 뿐이다.


 불행은 해마다, 때로는 계절마다 형태를 바꾸어 찾아왔다. 그들은 이렇게 찾아오는 불행에 항거하기보다 지나가 버릴 때까지 수굿이 기다리는 것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호수에서 잡히는 물고기와 양 몇 마리밖에는 생활 방도가 없는 그들은 비참과 가난이 없는 인생이란 생각할 수도 없었다. _ 엔도 슈사쿠, <사해 부근에서>, p38


 갈릴래아의 무지한 민중 사이에는 그가 메시아라는 소문이 꼬리를 물고 퍼져 나갔다. 그러나 이 소문의 근원지는 혁명당이었다. 늘 기회를 노리던 그들은 그 소문의 목수를 앞잡이로 내세워 또 한 차례 반란을 일으키려는 속셈이었다. 무지한 이들은 그가 나병을 고쳐주고, 죽은 이를 살리는 기적을 행했다는 이야기로 사람들의 귀를 솔깃하게 만들었지만 알고 보면 목수는 기적을 행한 적이 없었다(p161)... 순박한 민중이 이런 희생자에게 얼마나 잔인해지는가를 나는 오랫동안 보아왔다. 카야파는 오직 민중의 잔인한 마음을 부추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들은 바라빠는 깨끗이 잊고 그들에게 맡겨진 새 장난감에 열중하게 될 것이다. _ 엔도 슈사쿠, <사해 부근에서>, p162


 <사해 부근에서> 화자인 '나'는 과거와 현재의 교차 속에서 예수의 의미를 찾는다. 마치 <오즈의 마법사 he Wonderful Wizard of Oz >에서 도로시가 찾던 대마법사 오즈의 실체가 실은 평범한 인간이었던 것처럼, 역사 속에 남겨진 예수의 족적은 너무도 희미하기만 하다. 그리고, 그마저도 서로 다른 전승에 의해 찾아보기 힘들게 된 상황에서 화자는 예수의 실체를 찾아 힘든 걸음을 내딛는다.


 '그들은 징조와 기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다.' 우울한 취기를 느끼면서 확실하지 않은 기억으로 예수의 말을 떠올렸다. 지금 나한테는 징조와 기적을 보지 않고 믿는 마음은 사라진지 오래다. 나는 징조와 기적이 필요한 속물이며 나약한 인간이다.... "나는 기적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갈릴래아 사람들이 예수에게 기대했던 것이 기적뿐이었음을 다시 생각하곤 한다네. 갈릴래아 사람들은 예수한테서 사랑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보다 현실적인 기적을 더 바라고 있었던 거지. 절름발이를 고쳐 달라, 열병에 걸린 아이를 살려 달라, 눈먼 사람을 보게 해 달라.... 그 밖의 것은 예수에게 요구하지 않았다는 말이네." _ 엔도 슈사쿠, <사해 부근에서>, p246


 기적을 요구하는 세대에게 보여줄 기적은 없다며 침묵하는 예수. <사해 부근에서>는 <마태오 복음><마르코 복음>과 <루카 복음>에서의 마지막 순간을 미묘하게 대조시킨다. 그리고, 발견하는 부활의 의미. 엔도 슈사쿠가 찾아낸 예수의 의미, 사랑의 의미를 우리는 <사해 부근에서>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로부터 그의 다른 작품 <침묵>을 다시 들여다 본다면 로드리고 신부의 물음에 대한 침묵의 의미를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지않을까. 이에 대해서는 <침묵> <사해 부근에서>의 페이퍼로 넘기자...


 그는 계속 침묵하고 있었다. 완강한 그 침묵은 나(대사제 안나스)에게 분노를 일으켰다. 그 침묵은 처음부터 나의 호기심과 수다스러운 말을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p174)...  "그대는... 마지막에 저 비탄의 시편 구절을 외치게 될 거네. '주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말이네." "아닙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하느님, 모든 것을 당신께 맡겨드립니다.' 라고. 이 모든 걸 곧 알게 될 것입니다." _ 엔도 슈사쿠, <사해 부근에서>, p175


 '당신은 무력했고 그 무력함 때문에 나자렛에서 쫓겨났으며, 갈릴래아 여러 마을에서도 박대를 받으셨습니다. 당신은 무력했기에 예루살렘 사람들한테서 매도당하고 잡히셨으며, 무력한 당신 몸에서 짜낸 고통의 기쁨으로 많은 사람의 슬픔을 씻으려 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음 직전에 오른쪽 죄수에게 언제나 그대 옆에 있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내가 당신 부활의 의미를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표시일지도 모릅니다.' _ 엔도 슈사쿠, <사해 부근에서>, p384

그는 갈릴래아를 찾아온 예언자들처럼 큰 소리로 외치거나 요란한 행동을 하지 않았따. 그는 아네모네로 뒤덮인 호숫가나 양이 풀을 뜯는 구릉의 흰 바위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했는데, 아이들이 뒤에서 매달려도 꾸짖는 일이 없었다... 예수는 하느님도 쓸쓸하시다고 했다. 하느님은 여자가 남자의 사랑을 구하듯 인간의 사랑을 바라신다고 했다. 하느님은 예언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험준한 산속이나 황야에 숨어 계신 것이 아니라 불행한 자가 흘리는 눈물과 버림받은 여인의 고통 중에 함께 계시다고 했다. - P45

몸이 회복되자 그는 그분을 따르는 남녀 무리에 끼어들었다. 그러나 알패오도 시몬처럼 그분의 슬픈 눈빛을 알게 되었다. 그분이 아무리 노력해도 모든 병자가 알패오처럼 치유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잃은 아이와, 남편과 사별한 부인이 왜 고쳐주지 못하느냐고 불평을 쏟자 그분의 눈에 괴로운 빛이 어렸다. 그날 밤 제자들이 깊이 잠들었을 때 예수는 구릉에서 돌아왔다. - P95

허리에 가죽띠를 졸라매고 메뚜기와 들꿀만을 먹었다는 예언자들, 나는 이 황야에서 사람을 불러 모으고, 큰 소리로 외치는 그들 모습을 다시 떠올렸다. 그리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라고 성경에 쓰인 대로 그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세상의 종말을 믿기 위해 이 황량한 풍경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신의 분노를 느끼기 위해서는 하늘을 쳐다보고 하얗게 부서지는 태양을 보는 것으로 족했을 테니까(p141)... "신의 분노와 경외심만으로 살았던 무리 가운데 예수는 무엇을 희구했을까?" 무심코 중얼거리자 도다는 다시 야유하는 것처럼 대답했다. "자네가 방금 말한 대로 인간에 대한 정다움이겠지. 그는 황야에서 자라난 신앙과 율법이 만들어 낸 신의 이미지를 견딜 수 없었던 것일세. 그는 신이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이곳에 왔지만 분노하고 벌하는 신밖에는 알 수 없었지." "그가 요한의 무리를 떠난 것도 그 때문인가?" - P142

완전히 납빛으로 변한 황야를 바라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성경에서 본 예수와 악마의 대화는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이야기 속에서 악마는 예수에게 힘을 드러내 보이라고 몰아세웠다. 돌을 빵으로 바꾸는 힘을 보여라, 높은 성전에서 뛰어내리는 힘을 보여라 하고. 예수는 완강하게 고개를 내저였을 뿐인다. 그 이야기는 도다의 말마따라 황야의 무리가 예수를 무능력자로 낙인찍은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 P144

백인대장이 지금까지 보아온 병사들의 죽음은 훨씬 빠른 속도로 난폭한 모양을 하고 닥쳐왔다. 형장에 끌려온 죄수들도 십자가 위에서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몸을 뒤틀고 비명과 저주의 말을 외쳐대면서 죽어갔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죽음의 얼굴은 아니었다. 공포에 질린 인간이 그것을 속이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것을 백인대장은 알지 못했다. 진정한 죽음은 지금 이 사나이가 받아들이는 것처럼 완만하게, 길고 고통스럽게 오는 것이었다. ‘이런 죽음은 싫다.‘ 이미 여러 번 전쟁터에 나갔던 그였지만 그때 경험한 죽음의 공포보다 훨씬 다른 두려움과 불안이 그를 엄습해 왔다. - P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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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성경학을 공부하러 온 한 사나이가 있었네. 그는 예수의 생애도 모습도 성경에 쓰인 그대로라고 믿고 있었지, 그런데 공부가 깊어짐에 따라 성경에 모시된 때수의 생애도 말씀도 사실이기보다 원시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신격화하여 지어낸 사실이란 걸 알게 되었다네 그는 후세의 신앙이 만들어 낸 성경의 예수상을 정중하게 옆으로 밀어놓았네"(p71)..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려졌다. 우리는 인생의 마무리를 서서히 시작할 나이에 이르렀지만 도다도 나도 손에 거머쥔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 P73

‘그들은 징조와 기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다. 무물한 취기를 느끼면서 확실하지않은 기억으로 예수의 말을 떠올렸다. 지금 나한테는 징조와 기적을 보지 않고 믿는마음은 사라진지 오래다. 나는 징조와 기적이 필요한 속물이며 나약한 인간이다.
"나는 기적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갈릴래아 사람들이 예수에게 기대했던 것이 기적뿐이었음을 다시 생각하곤 한다네. 갈릴래아 사람들은 예수한테서 사랑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보다 현실적인 기적을 더 바라고  있었던 거지 절름발이를 고쳐 달라. 열병에 걸린 아이를  살려 달라, 눈먼 사람을 보게 해 달라.... 그 밖의 것은 예수에게 요구하지 않았다는 말이네."  - P246

사나이의 얼굴에서 땀이 들렀다. 땀방울은 바라빠가 흘린 핏자국 위로 떨어졌다. 가늘게 떨리는 어깨는 곧 찾아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나타냈다. 이 사나이는 바라빠치럼 죽음을 피해 살 힘도 없이 도살되는 어린양처럼 따가몬 죽음에 겁먹고 떠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가장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하게 해주시도록 그의 신에게 바짝 마른 입술로 탄원하고 있었다.  젊은이의 핏자국 위에 떨어지는 방울과 그 일술에서 새어 나오는 기도소리를 백인대장은 어떻게 연결시켜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P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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