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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마음 - 정채봉 산문집
정채봉 지음 / 샘터사 / 2020년 12월
평점 :

'정채봉'은 듣기만 해도 애잔한 이름이에요.
저는 책을 읽고도 책의 내용이나 구절을 오래 기억하지는 못하는 편인데,
정채봉 작가님 <오세암>은 아직도 기억이 나요.
길손이가 눈이 먼 누나에게 스님의 옷 색깔을 '맛 없는 국 색깔'이라고 한 표현이나
마지막에 길손이의 장례식 날 감이가 '저 연기 좀 붙들어 줘요.'라고 울면서 중얼거리는 장면 등이요.
동화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너무 화가 날 정도로 슬프고 아름다워서 잊을 수가 없고요.
또 대학교 들어가기 이전에 산 책은 대부분 버렸지만 정채봉 작가님 책은 안 버리고 가지고 있었는데
이사하면서 정채봉 작가님의 '생각하는 동화' 시리즈가 없어져 버려서...
아예 싹 다 없어졌으면 기억을 못 하거나 내가 처분했나보다 할 텐데,
시리즈 중 1권만 남아 있어서 아직도 볼 때마다 아까워서 잊을 수가 없어요.
투병하시다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뜨셨다는 점도 너무 안타깝죠.
한동안 멀어졌던 이름이었는데, 오랜만에 다시 만났어요.
정채봉 20주기 기념 산문집이 나왔네요.
#정채봉 #에세이 < #첫마음 >이에요.

세상에 없는 이의 흔적을 다시 접하는 건 역시나 슬픈 일이에요.
정채봉 작가님의 글이 아름다워서 더더욱이요.
이렇게 맑고 깨끗한 글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자꾸 상기하게 되어서요.
삶에 의지를 보이시는 투병 생활 중의 글도 안타깝고..ㅠㅜ
글이 모두 너무 따뜻해서,
이런 심성을 가진 사람이라서 이런 글을 쓸 수 있나보다 했어요.
자연을 바라보며 사람살이에 대해 사람이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깊은 관심과 통찰력이 있기 때문이겠죠.

책에 필사 노트가 함께 와서 반가웠어요.
얼마전부터 제가 좋은 글 필사를 시작했거든요.
정채봉 작가님의 예쁜 글 필사하면서 천천히 곱씹으며 다시 읽어야겠어요.
55쪽 수도자들에게 늘 강조되는 것이 '첫 마음'이라고 나는 들었습니다. 수도에 막 입문하던 날의 그 열렬한 마음이 지속되지 않고서는 험난한 세파에 쉬 휩쓸리게 되듯 첫 마음의 온전함이 아닌 한순간의 방심한 헛눈팖으로 우리의 생이 금방 끝나게 될지도 모를 일 아닙니까.
155쪽 사람이 각기 품성대로 자기 능력을 피우며 사는 것, 이것도 한 송이의 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기다운 꽃을 지닐 때 비로소 그 향기가, 그 열매가 남을 것이 아닌가.
160~161쪽 자신의 한때를 뒤돌아보며 안타까워 하는 사람은 저 나뭇잎을 보십시오. 저들에게도 꽃보다도 찬란하다고 칭송받던 시절이 있었으나 지금은 저렇듯 무료합니다. 자신이 희생되었다고 원통해하는 사람은 저 나뭇잎을 보십시오. 나무를 위하여 한시도 쉬지 않았던 저들은 '베풂' 자체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상대를 향해 매운 얼굴을 보이는 사람은 저 나뭇잎을 보십시오. 떠나면서 오히려 단풍으로 치장을 하는 저들이 아닙니까. 이제 저들이 집니다. 그러나 저들은 지는 것으로 생을 마무리하지 않습니다. 마른 몸이나마 흙으로 묻혀 들어 한 줌 거름으로 나무 밑에 마저 가길 원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나뭇잎보다도 몇백 배, 몇천 배 무겁고도 큰 존재가 아닙니까. 부끄러워할 줄도 알아야겠습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