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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씨의 입문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2년 1월
평점 :
이렇게 사람을 쓸쓸하게 만드는 소설 같은 것은 왜 있는 걸까
그런 감정도 사람이란다.
눈도 안 오는데 왜 백석이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주로 눈이 몰아치는 밤 생각나는 사람인데. 만난 적도 없는데도 말이다.
세상 같은 것은 나 몰라라 하고 싶은 소설 탓인가 보다.
황정은의 소설집 <파씨의 입문>에는 '뼈도둑'이란 단편이 나온다. 두 남자의, 아니 한 남자의 사랑 얘기다. 이미 지나가버린 사랑 속으로, 눈이 푹푹 나리는 날 남자는 나아가며 이야기가 끝난다. 이미 이룰 수도 없는 사랑인데도 불구하고 나아가는 그 남자의 마음이 짠해서, 이렇게 사람을 쓸쓸하게 만드는 소설 같은 것은 왜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드는, 그러다가 그런 감정도 사람이란다, 결론짓게 되는.
예전에도 한 남자의 사랑 얘기에 이렇게 찡한 적이 있다. 왕가위의 <해피투게더>. 나는 이 영화를 고등학생 때 보았다. 그때 영화는 국내 상영 금지 판정을 받았고, 그래서 직할시에(당시에는 아마 직할시였을 것이다) 살던 나는 그 영화를 작은 영화제에서 겨우 봤다. 직할시였으므로, 문화적 혜택은 적었고, 그럼에도 <중경삼림>의 캘리포니아 드리밍이 거리에 떠돌 정도의 문화적 관심은 있는 도시였으므로(당시에는 그랬다. 테이프를 파는 아저씨들이 가장 핫한 음악을 매일 듣게 해주던. 컨스피러시가 유행할 때는 can't take my eyes off you를, 전도연, 한석규 주연의 <접속>이 유행할 때는 'love's concerto'를 너무 많이 들어 뒤는 몰라도 "I love baby 따따다따다다"를 외치게 되고 "how gentle is the rain~"이 무슨 뜻인지 몰라도 너무 많이 들어 따라부를 수 있게 되는... 딱 거기까지지만.) 영화에 관심 많은 친구와 그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갔었다. 유일한 상영이었으므로(아직 불법다운로드 같은 게 세상에 있게 될 줄은 전혀 몰랐던, 비디오 테이프를 빌려보던 시절) 극장에는 사람이 넘쳐나 의자는 고사하고, 서서 영화를 봐야했다. 심지어 서있는 사람도 많아 꼿발을 딛고 영화를 봤다. 다리가 아파 제대로 서면 영화가 잘 보이지 않았으므로, 내용조차 잘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나는 그날밤 그 영화의 장면이 머리속에서 난동쳐 잠을 못잤다. 흑백화면 속 이과수폭포 같은 것들이, 새벽녘 장국영과 이과수 폭포를 찾아가는 양조위의 모습 같은 것들이 뭉쳐져 떠돌았다. 이후 영화의 상영금지조치가 풀리며 영화를 극장에서, 비디오테이프로, 그러다 파일로, 가끔 특별영화전 같은 것을 하면 다시 극장에서, 봤다. 처음의 문화적 충격은 가셨으나, 그래도 지금 생각해도 아름다운 영화다. 장국영과 양조위가 탱고를 추던 부엌 장면, 사랑이란 감정 속에는 때로 어떤 처절함 같은 것마저 묻어날 수 있다는 것을 피아졸라의 음악과 더불어 엄청나게 감각적으로 보여주는.
왕가위는 그 영화를 홍콩의 중국 반환에 대한 함의로 보아도 좋다고 밝혔던 것 같다. 그때는 잘 이해되지 않았으나, 이제는 좀 알 것도 같다. <해피투게더>의 한자제목은 '春光乍洩' 봄볕이 잠깐 엿든다는 뜻이다. '해피투게더'는 한편으로는 새로운 사랑에 대한 기대감 같은 이야기로, 다른 말로 하자면 새로운 시대에 대한 설렘 같은, 물론 그 설렘이 진짜 사랑으로 발전할 수 있을지, 또 한번 마음만 아프게 하는 사랑이 될 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랑을 시작할 때는 설렘이 들 수밖에 없으므로(그래서 연애는 처음 3개월이 가장 행복한 시절이라 하지 않는가, 오래 연애 한 사람들은 이 말을 한다. 그때 인생으로 찾아온 말도 안 되는 설렘을 행복이라 받아들이므로), 그렇게 영화는 끝난다.
다시 백석으로 돌아가자면,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세상 같은 것은 나 몰라라 하며 마가리'로 가자던 백석은 그가 사랑한 자야와는 아니지만, 고등학교 선생이 되어 실제로 학생들과 당나귀를 사러 다녔다 한다. 길상사에 가게 되면 그의 시와 이 일화가 함께 떠오른다. 길상사는 백석의 연인이었던, 그러나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남은 자야가 요정 대원각을 법정스님께 부탁해 절로 시주했다. 부모님의 반대로 이루지 못한 사랑이 두 사람에게는 영원히 각인되었나 보다. 지금 생각해보면 백석이 자야와 '세상 같은 것은 나 몰라'라 하며 마가리로 가고 싶었던 이유는, 그녀가 자신만큼이나 예민한 영혼이기에, 서로를 알아본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러니까, 고등학교 선생이 되어서도 학생들과 당나귀를 사러 다니는, 자신을 이해해줄 여자라는 것을 알아챈 것은 아닐까. 물론 모든 이야기는 후일담이므로, 사실의 연관관계는 있을 망정 감정은 늘 추측으로 남게 한다.
두 예민한 영혼의 도피는 현실에서도 이야기 속에서도 대부분 실패로 끝난다. 인도 소설가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 역시 두 예민한 영혼의 사랑 얘기다. 상황은 백석과 자야와 반대. 계급제도 남아있는 인도에서, 주인 여자와 노예의 사랑이야기라고 아주 간단히 요약할 수 있는, 그러나 실은 절대 이게 끝은 아닌… 사랑+정치+쓸쓸함에도 불구하고, 자그마한, 아직 싹도 안 난 씨앗 같은 희망에 대해 말하는 소설.
황정은의 소설을 읽고 문득 아룬다티 로이가 그리워졌다. 물론 모든 문학이 정치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그게 더 답답하다. 내가 황정은의 소설을 읽은 며칠 전 특히 정치 상황은 암울했고, 그래서 더욱 아룬다티 로이가 그리웠을 것이다.
2015년
1월 15일 목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