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천득 선생은 춘원 이광수의 제자였다.
선생이 돌아가시기 얼마전 생전의 당신에 대한 다큐멘터리에서 나는 피천득 선생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춘원 선생은 그때 감옥에서 죽었어야 했다'는 이야기였다. 아마도 그 말은 춘원이 감옥에서 나온 직후 친일파로 변절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었으리라.
김지하가 <조선일보>에 정운찬 총리 후보(이제는 '총리'다)가 인사청문회 자리에서 천만 원 받은 사실에 대해 지적하자 간단하게 "예"라고 대답하는 것을 보고 "나는 정운찬 씨를 좋아한다"며 육두문자(X)를 섞어 야당 의원들을 질타하는 글 "천만 원짜리 개망신"이란 글을 기고했다.
누군가에게 그 사람은 그 때 죽었어야 했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 매우 잔인한 말이다. 그러나 피천득 선생이 자신의 스승인 춘원에 대해 '그때 감옥에서 죽었어야 했다'고 말하는 진심은 애틋한 것이라 느꼈다. 호랑이는 가죽 때문에 죽고, 사람은 이름 때문에 죽는다고 하는데, 춘원이 한 개인으로서의 생명은 살렸으나 역사적 인물로서의 춘원이 죽게 되었기에 그 점을 제자로서 안타까이 여긴 것이리라.
김지하가 그 때 죽었더라면... 나는 그의 제자도 아니기에 감히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수는 없으나 그의 시를 사랑하는 독자 중 한 사람으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불쌍한 사람! 그는 문명의 대전환이니, 르네상스니, 생명이니 뭐니 하여 큰 말들을 가져다 붙이길 좋아한다.
사실, 그 순간에 이미 그는 작가로서, 시인으로서의 생명이 끝난 것이나 진배 없다. 작가가 쓰는 글이 수백년에 걸쳐 '대설(大說)'이 아니라 '소설(小說)'인 까닭, 시인이 쓰는 시(詩)가 작고 비루하며 약한 것들에 대한 연민에서 비롯되는 까닭을 잊은 탓이다.
나는 80년대 권력에 저항했던 실천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니나 70년대 권력에 저항한 것보다는 덜 외로운 일이었으리라 여기는 편이다. 진창에서 연못이 피어난다는 것은 자연을 관찰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지만 쓰레기통에서 민주주의라는 장미가 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그 시절에 알 수 있었던 사람이, 그 시절 과연 얼마나 되었겠으며,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비밀스러운 죽음이 드러날 수 있었던 시절에 비해 그 시절의 죽음은 얼마나 고요하고 비밀스럽게 진행되었던가를 아는 사람이라면 김지하의 저항이 지닌 무게를 과소평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가 그때 죽었더라면 ... 하는 잔인하고 몹쓸 상상을 하게 된다. 하긴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까닭은 사실 김지하가 불쌍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아직 맑은 사람이던 시절, 토해냈던 시를 읽고 있는 이들이 불쌍하다, 나도 그 중 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