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신이 그중 딱 한 감독의 영화 속으로 직접 입장할 기회를 주겠으니 고르라고 한다면 내 선택은 아마 링클레이터일 것이다. 거기 포함되는 순간 내 삶이 더 복되고 나아질 거라는 잇속 궁리 때문이다. <슬래커>(1991)와 <멍하고 혼돈스러운>(1993), '비포' 시리즈와 <보이후드>를 보며 내가 느낀 떨림의 일부는 분명 저 따스하고 현명한 소우주의 일부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링클레이터가 나를 찍어준다면 '삶'이라는 한 음절을 온전히 이루지 못하고 흩어지기만 하는 시간이 총체성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이 어지러운 난반사의 소용돌이가 멈추고 내 인생이 타인의 삶과 어떻게 기대어 힘을 주고받으며 스스로를 조각해가고 있는지 해명되지 않을까? 타르코프스키가 쓴 대로다. 우리가 예술가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삶이 불완전해서다.


­
-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 p.283

 

 


 

 

 

필사로 불태운 금요일 밤. 세번째 다시 써서 완성한 글.

타르코프스키가 쓴 대로 우리가 예술가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삶이 불완전해서고,

나는 이 책을 계속 필요로 할 것 같아서 결국 책을 구매했더랬다. 

 

 

 

요건 포스터 생각나서 함께 찍어본 사진.

피카츄는 필압때문에 노트 모서리가 떠서 누름용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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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장 리스트의 힘 - 100번의 계획보다 강력한
가오위안 지음, 최정숙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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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모든 시작은 리스트였다. 그때그때 손 가는 노트에 썼던 여행 계획, 스터디 플래너에 썼던 공부 계획, 매년 새 다이어리에 제일 먼저 써넣는 일년 계획, 늘 손에 붙어있는 수첩에 쓰는 포스팅 계획 등등. 뭐든 손으로 쓰는 걸 좋아해서 시도 때도 없이 리스트를 썼지만 너무 익숙했던 탓일까, 리스트의 힘에 대해서 자세히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적당히 계획했고, 적당히 실감했던 지난 날 나의 리스트. 비단 지난 날 뿐만 아니라 지금의 리스트를 보완하고 싶다는 생각에, 이 책 하루 한 장 리스트의 힘을 읽었다. 책이 책이니 만큼, 이 책을 읽는 중에 썼던 내 리스트를 예로 들어 먼저 이야기 해본다.

 

 

혹시 당신의 컴퓨터 모니터 가장자리에 메모지가 잔뜩 붙어 있거나 책상 위에 서류가 어지럽게 쌓여 있어서 펜을 찾기가 어려운가? 아니면 책상 아래에 있는 전선과 콘센트 때문에 발을 뻗기가 불편한가? 만일 그렇다면 사장과 동료는 당신을 게으름뱅이에다가 비효율적인 사람으로 판단할 것이다. 나 역시 직원들의 사고 능력과 업무 효율을 판단할 때 가장 먼저 사무 환경을 본다. (p.153)

 

 

이 책을 읽고 제일 먼저 실천으로 옮겼던 건 바로 사무실 정리였다.

이 구절을 읽고 누군가 내 자리를 보고 업무 효율을 판단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했던 것도 있지만,

나를 위한 업무 환경을 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작년에 사무실이 리모델링을 하면서 자리 위치가 바뀌었는데, 그때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가구 배치가

내 자세를 오랜 시간 불편하게 만드는 배치였고 그로 인해 업무 효율을 갉아먹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업무 환경은 잠재의식 속에서 우리의 사고 효율에 영향을 준다. 어수선한 환경은 우리를 피곤하게 하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게 만든다. 반대로 정돈된 환경은 우리가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게 한다. 당신의 사무실이 엉망진창이라면 가장 먼저 할 일은 업무 리스트를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정리 계획을 세워 모든 물건을 제자리에 갖다 놓는 것이다. (p.154)



책상 아래를 정리하고 서랍을 이동하고. 리스트에 기록한 그대로 아직 컴퓨터 선은 정리하지 못했다.

책에서는 모니터에 있는 메모지를 다 떼어 내고 바탕화면에

언제든지 수정할 수 있는 전자 일정 알림을 만들어 사용하라는데,

나는 이 부분에 있어서는 디지털하지 못한지, 여전히 아날로그 방식이 좋다.

메모하는 방식을 수정하고, 지난 메모들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에 함께 리스트에 추가.

연필꽂이는 제일 쉬운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리스트에 오래 머물러 있다.

월요일 아침에 출근하면 연필꽂이부터 정리해야지.

 

 

 

 

누구나 자기 집을 정리해서 말끔한 공간을 만들 수 있다. 나는 학창 시절 정리정돈을 잘 못하는 학생이었다. 기숙사의 내 방 곳곳에는 벗어 놓은 옷과 낡은 잡지, 바람 빠진 농구공과 종이 쓰레기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는 상황이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불필요한 물건이 많았다. 한 선배는 내 방을 보고 이런 말을 했다.

"방을 좀 정리해 봐. 환경이 정돈되면 네 마음도 정돈될 거야."

이는 단순히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의 문제다. 물론 당시에는 그 말의 중요성을 간파하지 못했다. 하지만 대학교 4학년 무렵 취업 준비를 하면서, 생각할 것도 필요한 것도 많아지면서 일상을 '정리'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인생에서 처음으로 불필요한 물건 리스트를 만들었다. (p.301)


이번엔 집 안 정리다. 챕터9 '가정 리스트로 행복을 찾아라'에서

집 안 정리에 관한 이야기의 제목을 리스트에 써 넣었다.

저자는 불필요한 물건 리스트로, 왼쪽에는 품목을 적고 오른쪽에는 상태 및 현황을 적었다.


안 읽는 책 20여권 - 다른 사람에게 주기

소형 녹음기 한 개 - 버튼이 고장 났음


나는 이 방식보다는 불필요한 물건-기승전버리기 리스트로 만들기로 했다.

오래 입지 않은 청바지, 마찬가지로 오래 쓰지 않은 화장품을 제일 먼저 버리기로 했고

계륵 같았던 뽁뽁이도 정량만 남기고 버리기로 마음 먹었다.

내가 써 넣으면서도 버리면 다 버리지 정량만 남기는 건 뭐야 싶었지만,

아래 써넣은 책 정리와 연관이 있어서였다.

박스에 책을 담을 때 완충재 역할을 하기에 뽁뽁이만한 게 없다.

더 이상 읽지 않는 만화책을 판매할 때 뽁뽁이를 쓰면

내 방의 계륵 둘을 한 번에 정리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며칠 전 '책을 판다는 건지 산다는 건지'라는 글을 썼는데,

이번 책 정리는 부디 과거만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생각하는 정리가 되었으면 한다.

 

 

이건 어떤 리스트라고 분류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일상 리스트에 넣기로 했다.

사실 독서 리스트는 다이어리에 따로 쓰는데 그건 1년 단위로 기록하는 리스트라 반납이 언제까지이고,

이 책은 읽고, 이 책은 아직 읽지 못했으며 독서기록일지는 작성했는지에 대한 깨알같은 기록들을 담는 리스트는 아니다.

2-3권이야 얼마든지 다이어리에 작성할 수 있지만 5-10권 단위는 기록하기도 버겁고

심지어 대출-반납일이 제각각이라 종종 이렇게 도서관 책을 정리하곤 한다.


메모는 그때그때 다른데, 읽은 책을 표시할 때도 있고 반납하거나 구매했다고 표시할 때도 있다.

독서기록일지를 작성했는지까지 확인하면 좋겠지만...

제일 큰 목적은 '반납일 잊지 않기'여서 그런지, 반납일을 끝으로 버려진다.

이 책을 읽고나니 단순히 반납일을 잊지 않기 위한 리스트로 그치지 않고,

도서관 책을 좀 더 계획적으로 읽는 리스트로 보완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서관 책 리스트에 시간 기록 리스트를 결합시켜서 A 책을 하루에 몇분 읽었는지 기록하여

A 책을 읽는데 걸리는 속도를 파악해서 완독 계획을 세울 수 있지 않을까.

또, A 책과 연관된 책을 리스트에 메모해두었다가 다음 방문시 B 책을 찾아보거나 대출하는 일로 이어질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영화를 찾아 볼 수도 있고 음악을 찾아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 책 리스트는 좀 더 큰 공간에 기록해서, 확장된 리스트를 써 볼 생각이다.

 

 

위 리스트는 내멋대로 리스트다. 일일 할일이 되는가 하면, 주간 할일이 되기도 한다.

다이어리에 기록하는 것과 겹치는 부분이 많지만, 리스트를 작성하면서 할 일에 대해 다시 한 번 곱씹게 되서 자주 쓴다.

서평 마감일처럼 정말 중요한 일도 있고, 하지 않아도 전혀 무관한 일(좋아하는 일일 때가 많다)도 종종 써넣는다.

중요한 일을 해치우고 좋아하는 일을 해야지! 하고 생각하게 되고

중요한 일-중요한 일이 이어질 때 휴식이 되는 일을 함으로써 기분을 전환하는 효과가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휴대 전화를 만지작거린다든지 TV를 보는 등 무언가 하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잠들기 전 무엇을 하느냐가 다음 날 우리 생활의 질을 결정한다. 편안하게 휴식에 빠져들 수 있는 행위를 해야 잠에 집중할 수 있고, 숙면을 취해야 다음 날을 좋은 컨디션으로 맞이할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리스트에 강제적인 규칙을 마련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이를테면 전날 30분 늦게 잤으면 오늘 밤에는 한 시간 일찍 잠든다는 식으로 말이다. (p.333)



휴식이 되는 일이 아니라, 진짜 휴식을 강제적인 규칙으로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만든 구절이다.

돌아보니 그저 할 일, 할 일, 할 일만 써 넣었지 한 번도 휴식을 넣어본 적은 없었다.

일을 하면서 휴식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강제적인 규칙을 마련할 정도로 온전한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단순한 하루 단위 할 일 리스트여도, 미루는 법 없이 잘 지키기 위해서는

리스트가 좀 더 구체적일 필요가 있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 깨달았다.

이를테면, 도서관 책을 반납하면서 또 다시 대출해오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극단적으로 도서관 대출증과 스마트폰(모바일 회원증)을 챙겨가지 않는 방법이 있다.

여행 사진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여행 전체 사진>몇일차 사진>특정 관광지 사진으로

사진의 범위를 좁혀서 정리하는 방법이 있다.  

 



이 책에서는 리스트란 무엇이며, 그것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내가 주로 이야기한 생활 리스트 뿐만 아니라

꿈, 업무, 시간, 감정, 관계 등 분야별로 어떻게 적용할지도 설명해주는 책이다.


에필로그 제목은 '리스트 습관이 당신의 10년 후를 바꾼다'고 하는데,

10년 후를 바꾼다는 건 다시 말해 10일 후의 나를 바꾸고, 10개월 후의 나를 바꾼다는 뜻이다.

체감하는 변화가 있는가 하면 체감하지 못하는 변화도 있다.

어떤 변화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쌓여서 어느날 오롯이 힘을 발휘한다.


지금은 이런 저런 사정으로 멈춰있지만 애정을 가지고 포스팅하는 '주간 해밀' 역시 리스트가 시작이었던 걸 생각하면

나는 이 책의 에필로그 마지막 구절이 그저 막연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 '도구'를 제대로 활용한다면 인생의 목표로 품었던 꿈을 이룰 수 있고 당신 삶은 한층 더 나아질 것이다.

(p.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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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옆집에 영국남자가 산다 - 유쾌한 영국인 글쟁이 팀 알퍼 씨의 한국 산책기
팀 알퍼 지음, 이철원 그림, 조은정.정지현 옮김 / 21세기북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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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어떻게 시작할까 고민하다 문득 영국남자를 떠올려 보았다. 수많은 영국남자들이 떠올라서 흐뭇했다. 타임로드를 타고 시간여행을 하는 닥터, 베이커가 221B에 사는 탐정과 그의 동료,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 말하는 수트가 잘 어울리는 남자, 한 명 한 명 봐도 좋은 남자들이 떼로 나와서 안 볼래야 안 볼 수가 없었던 엑스맨 리부트 시리즈 속 배우들 등등 서평이 아니라 영국남자의 매력에 대한 이야기로만 거뜬하게 3장은 채울 수 있을 것만 같다. 이 글에서 소개할 영국남자 역시 스크린과 브라운관과 모니터 너머로 만나는 영국남자 못지않게 매력이 넘친다.

 

2006년 한국을 처음 방문하고 다이내믹한 한국인들과 버라이어티한 한국 음식의 매력에 빠져 2007년부터는 아예 한국에서 살게 된 영국인 칼럼리스트이자 문화통역관 팀 알퍼. 이 책 『우리 옆집에 영국남자가 산다』는 그가 지난 11년간 한국에서 살아오며 느끼고 생각하고 맛보고 사랑하고 슬퍼했던 경험을 담은 한국 문화 산책기다.

 

영국남자가 지난 11년간 한국에서 살며 경험했고, 지켜 봐온 한국 이야기였어도 충분히 재밌었겠지만 이 책에서 내가 꼽는 매력은 따로 있다. 먼저, 그가 자랑하는 유머다.

그의 말에 따르면 영국에 살 때는 외우고 있는 농담이 수백 가지는 되었는데 이제는 거의 농담 깡통이 되어버렸다지만 그의 유머는 내게 정말 잘 맞았다. 이를 테면 이런 구절.

 

아재들의 정통 밤 문화를 제대로 원한다면 참치집-호프집-노래방-해장국집코스를 따르면 된다. 아직 자신이 젊고 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태리 식당-지나치게 비싼 술집-역시 지나치게 비싼 클럽-편의점 라면코스를 즐긴다. (p.30)

 

한국의 밤 문화, 특히 아재들의 정통 밤 문화를 설명하는 이 구절이 너무도 웃겼다. 1차 참치집부터 4차 해장국집까지, 어쩜 이리도 디테일한지. 그의 유머를 느끼기에는 한 구절로 부족하니, 한 구절을 더 보태자면 이 구절이 좋겠다.

 

때로 서울 지하철은 달리기 시합이 벌어진 운동장이나 헬스장을 연상시킨다. 목표물을 향해 뜀박질하는 승객들 때문이다. 집이 북한산 근처라 주말이면 지하철에서 숱한 등산객을 만난다. 그들은 해발고도 837미터인 북한산 백운대는 거침없이 오르면서 지하철 계단은 걸어 올라가기 싫어한다. 꼭 노약자용 승강기를 타려고 든다.

지난주에는 노약자용 승강기를 향해 뛰어가는 등산객들에게 휩쓸렸다. 승강기 문이 열리자마자 그들은 승강기를 향해 폭주 기관차처럼 달렸다. 승강기 앞에서 걷고 있던 나는 어깨를 치고 지나가는 그들에게 밀려 넘어질 뻔했다. 세렝게티 초원의 배곯은 사자에게 쫓기는 한 무리 양 떼도 그렇게 뛰진 않을 것 같다. (p.43)

 

수업 시간엔 틈틈이 수면을 보충하고, 점심시간이면 쏜살같이 식당으로 달려가고, 쉬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뛰어 내려가 배드민턴을 치던 고등학교의 풍경을 그에게 보여주면 이와 같은 문장이 나오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하며 재밌게 읽었던 구절이다.

 

두 구절만 소개했지만, 글이 전반적으로 유머가 배어있어서 읽는 내내 유쾌했다. 이쯤에서 이 책의 두 번째 매력을 소개해야겠다. Part 2 한국인만 모르는 버라이어티 코리아에서 유교에 대한 그의 글이 인상 깊었다. 세월호에 대한 아버지의 생각, 한국 여성이 성형수술을 많이 받는 이유와 땅콩 회항 사건에 대한 서양 매체의 시선, 최순실 게이트와 한국 걸그룹이 롤리타콘셉트로 인기를 끄는 이유 모두 유교 사상과 관련되었다는 이야기에 그는 무엇이 유교 사상 덕분이란 말인가하며, 위에 언급된 일들은 모두 인간의 탐욕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말한다. 서양 글쟁이들 다수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 무척 놀랍다고 덧붙이며 말이다.

 

한국에 무슨 일만 있으면 유교 사상을 끌어들여 탓하는 서양인들의 생각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가며 그는, 태어나서 줄곧 한국에 살아온 내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국 문화의 가장 훌륭한 특징 가운데 일부는 유교 사회였던 조선 시대의 산물이다. 격몽요결에서 배움과 자기수양이 좋은 행정의 토대라고 한 이이(李珥)의 사상은 오늘날까지도 존경할 만하다. 도널드 트럼프나 테리사 메이 같은 서양의 지도자들도 조금이나마 배움과 자기수양을 실천해 자기 안의 무지를 몰아내려고 애쓰면 좋겠다. 기존의 문화적 가치를 이용해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정약용의 사상 또한 매우 훌륭하고 실용적이다. 신윤복처럼 혁명적인 예술로 유교적 가치에 대항한 사람들마저도 유교 사회의 산물이다. (p.120)

 

특히 마지막 줄. 나는 이 부분에서 무릎을 탁 쳤다. 신윤복이 유교적 가치에 대항한 사람인 건 알았어도, 유교 사회의 산물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너무나 당연해서 산물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일까. 단순히 외국인이어서가 아니라, 한국에 대한 저자만의 균형있는 시선이 오롯이 느껴져서 좋았다. 파트 제목 그대로, 한국인이 모르는 한국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글까지 담겨 있다니. 물론 매력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진지하지만 유쾌함을 잃지 않았던 파트 2를 지나면, 푸드칼럼리스트인 그의 장기가 펼쳐진다. 평소 찜질방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가 찜질방의 음식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어쩐지 식혜와 미역국과 맥반석 달걀은 찜질방이 아니고서는 생각할 수 없다. 쌀로 할 수 있는 것이란 고작 솥에다 넣고 물을 부어 끓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우리 서양 사람에게는, 그 모든 떡의 이름을 외우려면 최소한 몇 년은 할애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지만 그가 떡 이야기를 하면 좋아하지 않는 콩떡도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런 힘은 스크린, 브라운관, 모니터로 만나는 그 어떤 영국남자가 해낼 수 없는 힘이지 않을까 싶다. 내가 태어나서 줄곧 살아왔던 이 나라 한국을 다시 돌아보게 하고, 애정을 갖게 만드는 글을 써내는 남자. 그렇게, 내 영국남자 리스트에 조용히 걸어 들어온 유쾌한 글쟁이, 팀 알퍼 씨. 그의 한국 산책기는, 이 책을 읽은 내게 즐거운 산책기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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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모메 식당 :
“세상 어디에 있어도 슬픈 사람은 슬프고 외로운 사람은 외로워요.”
그러니 우리, 밥만큼은 따뜻하게, 천천히 먹어요.

아주 긴 변명 :
나를 소중히 아껴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 그것이 행복임을 알려주고
‘인생은 타인이다’라는 숙제를 안겨주고 떠난, 아주 긴 여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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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모메 식당'과 '아주 긴 변명' 2줄 리뷰와
임경선 작가님 특강 듣고 돌아와서 해두었던 필사를 함께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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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몰입하는 기분은 내가 생생히 살아서 숨 쉬고 있다는 실감을 안겨준다. 그렇게 조금씩 걸어나가는 일, 건전한 야심을 잃지 않는 일은 무척 중요하다. 결국 열심히 한 것들만이 끝까지 남는다.


­
-임경선, 태도에 관하여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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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 - 마음속에 새기고 싶은 인생의 키워드 20
정여울 지음, 이승원 사진 / arte(아르테)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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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의 지난 에세이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이 가슴속에 품어야 할 청춘의 키워드 20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두 번째 이야기 그때, 나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은 마음속에 새기고 싶은 인생의 키워드 20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서툴러서 상처밖에 줄 수 없었던 나의 20대에 사과하는 시간을 지나, 그래도 눈부신 그대에게 보내는 이야기.

 

PART 1 ,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 걸까 : 나이/ 소개/ 포기/ 선택/ 독립

PART 2 외로움 앞에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 : 관계/ 자존감/ 소외/ 상처/ 걱정

PART 3 일상에 여백이 필요한 순간들 : 습관/ 직업/ 기다림/ 생각/ 우연

PART 4 평생 후회할 일을 저지를 때, 비로소 어른이 된다 : 순간/ 이기심/ 용기/ 후회/ 균형

 

책은 이렇게 네 파트로 나뉜다. 나는 먼저 프롤로그를 읽고, 다시 목차로 돌아가서 가장 마음이 가는 키워드부터 읽어 보기로 했다. 20개 중에 1개를 고르는 일이니, 1개에 내 심경이 반영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목차를 들여다보던 내가 고른 하나의 키워드는 포기였다. 포기를 선택한 것을 처음에는 부정했다. 많고 많은 키워드 중에 포기라니. 호기심에 선택한 것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막상 책을 읽기 시작하니, 지금의 내 심경에 가장 가까운 키워드가 포기였음을 깨달았다.


포기할 수 있는 지혜를 배우고 나니 인생은 더 크고 넓고 다정해졌다. 눈부신 희망보다는 허심탄회한 포기가 차라리 나을 때가 있다. 아주 가끔은 포기가 희망보다 더 아름다울 때도 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철들기 시작한다. 나는 무엇보다도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 남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강박을 버릴 때 진정한 만족감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게 됐다.

물론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들도 있다.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 새로운 모험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 누군가를 간절히 그리워할 수 있는 마음 같은 것들은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당신이 무언가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타인의 시선때문이라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포기하지 못하고 붙들고 있는 그것이 정말로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것인지를.

자유를 위해 포기할 수 있는 것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 그것이 우리의 남은 삶을 결정할 것이다. (p.66)

 

정여울 작가님의 글을 좋아하고 찾아 읽는 이유 중 하나는, 작가님의 생각과 더불어 작가님이 읽은 좋은 책의 구절을 함께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포기꼭지에서도 포기에 관한 책 이야기를 넣으려면 얼마든지 넣을 수 있었겠지만, 오롯이 작가님의 이야기가 담겨서 더 와 닿지 않았나 싶다.

 

포기를 시작으로, 키워드 하나하나를 지금의 내게 대입해서 생각하느라 이 책을 읽는 시간이 제법 걸렸다각각의 단어에 관한 작가님의 깊은 생각과, 생각을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좋은 글과, 책을 읽고 생각하는 중간 중간 쉬어가라고 자리를 내어주는 것 같았던 좋은 사진들.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 건지 매일 고민하고 망설이는 나에게, 이 자리를 빌려 이 말을 해주고 싶다.

외롭고 불안한 이때, 이다지도 든든한 책을 읽어서 다행이다." 라고 말이다.

 

 

 

* 인상 깊었던 구절이 정말 많은데, 하나의 구절만을 덧붙이라면 이 구절을 덧붙이고 싶다.

 

다시 열네 살로 돌아간다면, 열네 살의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해주고 싶나요.” 여성들끼리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미국의 한 토크쇼를 보다가 문득 이 질문이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여성들은 지금은 알지만 그때는 몰랐던 것들’, 그래서 더 가슴 아프고, 그래서 더 짠한 과거의 자신을 향해 따뜻한 위로의 말을 전해주었다.

열네 살의 나에게, ‘넌 분명 잘해낼 거야, 이제 걱정과 두려움일랑 그만 접어둬!’라고 말하는 여성들의 표정 속에는, 겁많던 소녀 시절의 나약함에 대한 후회와 이제는 좀 더 씩씩해진 자신을 향한 자존감이 깊게 배어 있었다. 제인 폰다는 열네 살의 자신을 만날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고 한다.

 

It's good to say 'No'.

‘아니오’라고 말해도 괜찮아.

 

(p.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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