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은 어떻게든 사수해야 하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글을 쓰기로 나 자신과 약속한 날, 종일 집에 머물며 아주 천천히 글을 썼다. 평소에는 잘 마시지도 않는 돌체구스토도 한 잔 내려놓고서. 그런 날이면 내 고양이가 낮잠을 자다 말고 그루밍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볕이 가장 좋은 창문 아래 자리를 잡고 앉는다. 시간과 정성을 들여 아주 오랫동안 온몸의 털을 싹싹 핥아 다듬는다. 뒷다리를 하늘 높이 번쩍 치켜들고 그루밍할 때는 마치 요가를 하는 듯 우스꽝스러운 자세가 된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한참 동안 몸을 단장하고 나면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다시 따사로운 햇살 아래서 낮잠을 청하는 것이다. 잘 보일 애인도 없는 녀석이 굳이 시간을 내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털을 가꾼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글을 쓰고 책을 내는 행위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중에 둥실둥실 떠다니는 나만의 생각과 느낌을 정성껏 고른 언어로 만드는 작업. 이것이야말로 나를 정성껏 가꾸고 돌보는 시간,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시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래서 다들 글을 쓰는 걸까? 그렇구나. 자신의 목소리를 몸 밖으로 내보낼 줄 아는 삶이란, 굳이 책을 내지 않는다고 해도 그 자체로 매우 근사하고 쓸모 있는 게 아닐까.


- 김먼지, 책갈피의 기분 p.207~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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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퍼가 그린 그림

사다리꼴 지붕에 사각 벽에 사각 창에 있다

머리카락이 없고 눈이 없고 입이 없다 윤곽선만 남아

창턱에 두 팔을 걸치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일곱 살 그림마다 사다리꼴 지붕 아래 사각 벽에 사각 창을 그려넣곤 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그때부터

세 번 만나고 헤어지자는 말에 스무 살 짝사랑이 말했다

사랑은 제 눈에 들앉은 들보라고

네가 바라봐줘야 너를 들어올릴 수 있다고

결혼식 전날 기혼의 막내 오빠가 말했다

사랑이란 나의 너를 위해 세상에 쌓는 담이라고

허물어지지 않으려면 스스로가 벽이 되어야 한다고

현관의 나 홀로 신은 홀로임을 반성중이다

어제 입술로 오늘 마시는 말술이 마술이다

왼손에 사각턱을 괴고 사각 창에 갇힌 내가 말했다

일흔 살에 잘한 일이 일곱 살 사다리꼴 지붕 아래 반성중인 신을 사들이고 마술을 살아낸 거였으면 좋겠다고

신이 있다면 내가 그린 그림에 있다고

마술이 있다면 그 그림에 찍어놓은 내 입술 자국에 있다고

사랑에 갇힌 호퍼가 말했다 사각의 유리창 안에서

- 정끝별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 <호퍼가 그린 그림>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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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몸무게란 뭘까? 사진이 찍혔을 때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을 정도의 모습이거나 여자 옷 가게에서 '프리 사이즈'를 훌렁훌렁 입을 수 있는 상태의 몸무게일 것이다. 좋아하는 몸무게가 되어 프리 사이즈를 입어도 스스로가 예쁘다고 느끼기엔 한참 모자라지만, 일단 몸이 옷 안에 들어간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다. 옷 가게에 걸린 대부푼의 옷은 프리 사이즈다. 너도 나도 우리도 모두 입으라고 만든 조그마한 프리 사이즈. 운 좋게 프리 사이즈가 아닌 경우, S 사이즈와 M 사이즈의 하의를 선택할 수 있다. 이때, M 사이즈가 맞지 않으면 옷을 살 수 없다. You lose... 쇼핑에 실패했습니다. 길거리의 여자 옷 가게에서 L 사이즈라는 것은 사실상 없다. 나는 S 사이즈가 헐렁했던 적도 M 사이즈가 꼭 꼈던 적도 있다. 실연, 스트레스, 섭식장애, 욕구불만 등 많은 이유로 내 몸은 살이 쪘다 빠졌다를 반복한다.

이 빌어먹을 프리 사이즈 월드에 포함된 기분은 정말 역겹고 자랑스럽다. '프리'라고 말하는 이 작은 사이즈에 내 몸도 들어간다고! 나도 누군가에게 욕망받을 수 있는 몸을 가진 사람이 됐다고! 나는 그 썩은 카르텔에 들어가기 위해서 운동을 하고 종일 두부만 먹고 올리브영에서 다이어트 약을 사고, 그러다 욕구불만에 넋이 나가 폭식을 하며 프리 사이즈를 입기 위해 달려간다. 이젠 그걸 그만두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고 싶어.

(p.33-34)

나는 일주일에 거의 5일은 스타벅스에 출근하고 매일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가끔은 소이 라테를 마시니까 일주일에 2~3만원, 크게 잡으면 한 달에 15만 원 정도를 스타벅스에 쓴다(카드 혜택으로 조금 환급도 받는다). 그 금액이면 우리의 아지트(나의 작업실) 에 놓을 이케아 책상 두 개 정도를 겨우 살 수 있을까? 내 집 마련은커녕 전세 자금 대출도 어려워하는 내가 무슨 작업실이야. 게다가 작업실이 생기더라도 나는 스벅에서 커피를 사올 것 같다. 그런 정당한 이유를 대며 오늘도 스벅에 출근한다. 창문가의 바 좌석에 나와 같은 이들이 노트북을 켜놓고 나란히 앉아 있다. 적당하고도 굉장한 스타벅스. 이곳에서 대도시에 사는 이상한 낭만을 느낀다. 아무것도 내 것이 아닌데 내 삶의 질은 포기할 수 없다.

(p.99~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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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 - 유쾌하고 신랄한 여자 장의사의 좋은 죽음 안내서 시체 시리즈
케이틀린 도티 지음, 임희근 옮김 / 반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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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본 영화 중 가장 갑분싸했던 결말은 영화 '미성년'이 아닐까.

이런 말은 백 마디 늘어놔도 모자르니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라고 표현하던 영화 속 남자주인공이 떠올랐다. 같은 뜻이라도 문학적으로 표현하는 것과 그것을 보여주는 것에는 이렇게 큰 차이가 있구나 싶었다. 남들에게 미성년의 결말이 주는 충격이 100이라면 나는 50의 충격을 받았는데, 그건 영화 '행복 목욕탕' 덕분(?)이었다. 아니 뜻은 알겠는데... 꼭 그렇게까지 보여줘야만 속이 후련했냐...! 싶은 심정이었다.

이 두 편의 영화가 내게 충격을 안겨 주었다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 영화도 있다. 인생 영화로 꼽는 '캡틴 판타스틱' 속 장면이 그랬다. 영화에는 한 인물의 죽음이 그려지는데, 고인의 장례 방식을 두고 두 가족이 대립한다. 산 자의 방식대로 장례를 치룰 것이냐, 고인이 생전에 요구했던 방식대로 장례를 치룰 것이냐. 나라면 전자와 후자 중에 어떤 방식을 택했을까. 나는 선뜻 택하지 못하고 그들을 지켜보았다. 저렇게 어린 아이가 죽음 앞에서 겁먹지 않고 행동할 수 있다니. 죽음을 오래 전에 접하고 고민해봤더라면 나 역시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이 책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을 택한 건 위 생각의 연장선이었다. 애정하는 김혼비 작가님의 추천사에 혹한 김에 이번에야말로 죽음에 관한 책을 읽어보겠다고 다짐했다.

저자의 이름은 케이틀린 도티. 로스앤젤레스에서 장의사로 일하고 있다. 어릴 적 쇼핑몰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어린아이의 추락사를 목격했다. 그 아이는 귀퉁이에 부딪혀 넘어지며 10미터 아래로 떨어져, 반질반질한 카운터에 얼굴부터 닿아 소름 끼치는 쿵 소리를 냈다(p.62)고 한다. 저자는 그날 이후로 죽음이라는 주제에 사로잡혔다. 대학에선 중세사를 전공해 죽음을 둘러싼 역사와 문화에 대해 공부했다. 졸업 후 샌프란시스코의 한 화장터 업체에서 하루에 수십 구씩 시체를 태워가며 현대 장례 문화의 최전방에서 일했다.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미국의 획일화된 장례 문화에 문제를 제기하며 새로운 장례 문화를 개척해나가고 있다. 죽음을 부정하는 문화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죽음을 받아들이고 준비할 수 있도록 책을 쓰고 강연을 하는가 하면, 유튜브 채널 '장의사에게 물어보세요'를 통해 죽음에 대한 담론을 친숙하게 풀어놓는다.

나는 그녀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창구 중 책을 통해 만난 것이었다. 시체를 방부처리하는 것도 낯설었지만, 화장 업체의 웹사이트에 들어가서 가족의 시신이 있는 지역을 입력하고, 소정의 서식을 인쇄하고, 거기에 서명하고 팩스로 서류를 보내고, 신용카드 번호를 웹사이트에 입력하면 2주 후 집배원이 등기우편으로 아버지의 유해를 건네주는 서비스를 접할 땐 어안이 벙벙했다. 장의사도, 슬픈 얼굴도 필요 없고, 가족의 시체를 마주할 필요조차도 없다니. 이 모든 것을 피하는 데 저렴하게 단돈 799.99달러면 된단다. 이 부분은 책 뒷부분에 나오는 옮긴이의 말마따나 미국 장의사의 일상이겠거니 감안하고 읽었다.

비단 미국의 장례 문화와만 다르겠는가. 1960년대 이전에 와리족은 장례 과정에 식인 풍습이 존재했다.

또, 티베트 고산 지대에서는 땅에 바위가 너무 많아 매장을 하지 못하는 데다 나무마저 드물어 화장에 필요한 장작을 만들 수 없다. 티베트인들은 망자를 처리하는 색다른 방식을 발달시켰다. 직업적인 로규빠(시신을 부수는 사람)가 시신에서 살을 잘게 자르고, 남은 뼈는 보리 가루와 야크 버터와 함께 빻는다. 시체는 높고 평평한 바위 위에 놓아두어 독수리들이 먹도록 한다. 새들이 날아들어 그 시체를 파먹고 하늘로 날아올라 사방팔방으로 실어 나른다. 이렇게 남은 살을 다른 짐승들이 먹도록 놔두는 것은 시체를 처리하는 너그러운 방식(p.130)이란다.

이전의 나였다면 각국의 장례 문화를 접했을때 그저 낯설었을 테지만, 이 책을 통해 장례 문화에도 귀천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설적인 정신분석가 칼 융은 죽음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이야기를 들어봤자 도움이 안 될 것이다."

원주민 고유의 전통으로, 종교적인 이유로, 마케팅과 소비주의 등등 그 어떤 이유로 시작되고 굳어졌든 간에 인간이 죽음과 맺는 관계는 오직 그 사람만의, 그 나라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어린 시절에 알고 싶었던 버전의 이야기다. 어린 아이를 사랑과 죽음의 실상 앞에 노출시키는 것은 그를 해피 엔딩이라는 거짓말에 노출시키는 것보다는 훨씬 덜 위험하다. 디즈니 공주 시대의 아이들은 동물들이 조연으로 나오고 비현실적 기대로 가득 찬, 눈가림 버전을 보며 자라났다.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은 현명하게도, 해피 엔딩을 경계하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보는 세계는 오직 한 가지 결말만을 낳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했던 모습들이 멸하고 우리 심장이 죽고, 해체되고, 절단되고, 처절한 고통을 겪는다."(p.208)

이 구절을 읽는데 2년 전 인상 깊게 본 애니메이션 '코코'가 떠올랐다. 애니메이션마다 빌런을 통해 '악'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죽음'을 소재로 러닝타임 내내 꽉 채운 작품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죽음을 이야기함으로써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니. 조지프 캠벨의 말마따나 우리가 보는 세계는 오직 한 가지 결말만을 낳지만,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익숙해진 사회라면 다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죽음에 대해 언제든 이야기할 수가 있다면 해피 엔딩을 마냥 경계할 필요가 없다. 해피 엔딩 너머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테니까.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글은 이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글이다. 이 글을 소개하고 싶어서 말이 길었다.

나는 한밤중 묘지에 출몰하는 존재를 두려워하라고 문화가 우리에게 가르친 것들을 생각했다. 둥둥 떠다니는 유령이 악마같이 붉은 두 눈에 활활 타오르는 듯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좀비가 그 퉁퉁 붓고 썩어가는 손을 근처의 무덤 밖으로 내민다. 오르간 소리가 점점 커지고, 부엉이들은 부엉부엉 우짖고, 문들은 삐걱댄다. 이것들은 무슨 싸구려 무대장치 같다. 그중 어느 하나만 삐끗해도 죽음의 정적과 완벽함은 무너질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바로 그런 이유로 무대장치를 만들어내는지도 모른다. 정적 자체가 가만히 응시하기 어려운 것이니까.

피가 내 혈관 속을 돌아 그 밑에 깔린 부패한 시체들 위로 흐르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나는 살아 있다, 있을 수도 있는 많은 내일을 품은 채로. 그렇다, 지금 세운 여러 계획들은 내가 죽고 나면 산산조각 나버리거나 미완성으로 남을 수도 있다. 나는 육체적으로 어떻게 죽을지만 선택할 수 있다. 죽음이 28세에 찾아오든 93세에 찾아오든, 나는 만족한 채 무(無)로 돌아가 스르르 미끄러져 죽기로 선택했다. 그래서 내 몸을 이루는 원자가 나무들을 가린, 바로 그 안개가 되도록 말이다. 죽음과 묘지의 정적은 형벌이 아니라 잘 살아낸 삶에 대한 보상인 것이다. (p.336-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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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 - 성매매라는 착취와 폭력에서 살아남은 한 여성의 용감한 기록
봄날 지음 / 반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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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9일자, 그것이 알고 싶다의 클로징 멘트를 기억한다.

세상에 꺾어져도 좋은 꽃은 어디에도 없고, 외면 받아 마땅한 존재 역시 어디에도 없다고 우리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은 앞으로도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 또 편견이 가득한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도 계속해서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며 얼어붙은 도끼를 깨는 느낌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1007회 뉴질랜드에서 온 SOS 쪽지와 1008회 몽키하우스와 비밀의 방을 다룬, '꽃'들에 관한 인권보고서 시리즈였다. 뉴질랜드에서 감금당한 상태로 성매매를 해야했던 여성들, 국내에서 인신매매나 납치를 당한 뒤 성매매를 해야했던 동두천 기지촌의 여성들의 이야기. 클로징 멘트의 서두에서 이 시리즈를 보며 불편함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세상에 억울한 사연들이 얼마나 많은데, 굳이 성매매 여성들의 억울한 얘기까지 들어야 하느냐고.

여러분들은 어떻게 보셨습니까? 라는 멘트를 듣는데, 머리가 멍했고 이어지는 멘트를 놓치고 말았다. 나는 이 시리즈를 어떤 마음으로 챙겨 보았던가.
그리고 2년이 지나 영화 '죽여주는 여자'를 보았다. 2년 전 나를 흔든 멘트는 영화 속 소영의 대사로 돌아왔다. "저 사람도 무슨 사연이 있겠지. 아무도 진짜 속사정은 모르는 거거든." 사연만으로 어떤 이의 일을 합리화할 수는 없지만, 아무도 진짜 속사정은 모르는 거라고 늘 생각해왔다. 이 책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다.

민음북클럽 '밑줄긋고 생각잇기' 9회 – 주변부의 삶, 그리고 인간 존엄성으로 선택하게 된 이 책은 받아든 순간부터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밖에선 법 없이도 산다는 아버지는 집에서는 절대 권력의 폭군이었고, 동네 삼촌은 그림책을 읽고 있던 저자를 강간하고 100원짜리 동전 두개를 손에 쥐어주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다. 아버지가 관할 경찰서를 잘못 찾아가는 바람에 그놈은 뺨을 몇 대 맞고 아버지와 헤어졌다는 해프닝으로 끝난 열여섯 살에 겪은 강간 사건. 임신한 저자를 버리고 떠난 군인 남자친구. 공장에서 친하게 지내던 친구를 따라 시작한 가라오케 아르바이트. 열여덟 살에 유입된 업소, 바다 건너 낯선 섬 제주의 업소들, 낯선 도시에서 저자를 기다리던 유리방, 보도방과 시골의 티켓다방까지 20여 년 동안 저자가 지나온 시간의 기록들.

몇 번이고 다른 책을 고를걸 후회했지만 끝까지 읽어낼 수 있었던 건 2부 '나를 다시 찾아가는 시간'이 뒤에서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인권지원센터의 도움을 받아 각종 법률 지원과 심리상담은 저자의 탈성매매에 큰 힘이 되었다. 도움을 받은 것으로 끝내지 않고, 성매매 경험 당사자로서 상담원과 내담자가 되어 언니(여성인권지원센터에서 내담자를 부르는 호칭이다. 업소에서 쓰는 '언니'라는 호칭이 아니라, 여성으로서 함께 연대한다는 의미를 가진다.)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고. 쉽지 않은 일이었을텐데 용기를 낸 저자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돈이 있다고, 권력이 있다고 남의 성을 사는 행위를 쉬쉬하고 덮어주는 것, 더 어린 여자의 성을 구매하기 위해 어플을 만들고, 성행위 영상을 불법으로 촬영해서 돌려보며 웃는 구매자들을 심판하지 않는 행위에 대해서는 이 사회 모두가 방관자다. 성매매의 경험을 성찰하는 것은 경험 당사자만의 몫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성을 구매하는 행위에 대해 '필요악'이라는 궤변으로 포장하는 문화가 사라지기를 바란다. 뿌리 깊은 성매매에 대한 깊은 성찰과 반성이 있어야 이 사회가 비로소 안전해지지 않을까?
성매매 경험을 했던 20여 년의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아무리 성찰한다고 해도 나에게 휘둘러진 폭력의 잔상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나는 내가, 내 친구가, 내 가족이 안전한 세상을 원한다. 그러기 위해 계속해서 '나답게' 목소리를 내고 행동할 것이다. 앞으로 펼쳐질 내 인생이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흘러갈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상상하고 꿈꾸면서 살아갈 것이다.
(p.425)

언제나 상상하고 꿈꾸며 살아갈 '봄날'님께 며칠전 읽은 구절 하나를 소개하고 싶다. "한 여성이 자기 자신을 옹호할 때, 그는 사실 자신도 모르게, 어떤 주장도 펼치지 않으면서 모든 여성을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
-《여자다운 게 어딨어》 (에머 오튜 지음, 박다솔 옮김, 창비, 2016)에서 재인용.

2000년, 2002년 군산 화재사건으로 별이 된 언니들을 추모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용기내어 글을 쓰고 책을 내주신 봄날님과 반비에 심심(甚深)한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이 책과 함께한 지난 4주간의 조각들


밑줄긋고 생각잇기 9회 – 주변부의 삶, 그리고 인간 존엄성
내가 선택한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도착.
책 소개
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문제인지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이 책은 20여 년간 성매매를 경험한 여성이 써내려간 삶의 기록이다. 저자 봄날은 열여덟 살에 성매매 업소에 유입되기까지, 그리고 그 후 업소에서 빠져나오기까지의 기나긴 여정을 증언한다.

저자가 기록한 삶의 경험은 많은 한국 여성들이 보편적으로 처하게 되는 상황과 다르지 않다. 가난한 집의 장녀로서 어린 나이에 학업을 중단하고 가계를 짊어져야 했던 상황, 가족 내 성차별과 아버지의 가정폭력, 청소년 여성 노동자로서 겪은 부당한 노동착취, 저개발된 지방 도시, 직장 내 성폭력과 잘못된 사건 처리, 자원이 없는 젊은 여성이 당하게 되는 성 착취. 하나하나 떼어놓고 보면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거의 모든 여성들이 생애단계마다 겪게 되는 전형적인 피해의 경험들이다. 저자는 이런 경험들이 한 여성의 삶에서 어떻게 서로 얽히고 교차하면서 성매매에 유입되고 또 빠져나오기 힘들어지는지, 그 과정을 고통스러울 만큼 생생하고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이 책은 개인의 생애사를 통해서 성매매가 결코 특수하고 개별적인 문제가 아니며, 한국 사회의 수많은 젠더 이슈들이 첨예하게 만나는 지대임을 보여준다. 저자가 세밀하게 기록한 삶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빈곤, 성차별, 노동 문제, 지역 간 격차, 남성들의 성폭력적 놀이문화 등이 성매매와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책 소개 출처 : 예스24

쉽지 않은 책이지만 끝까지 읽어보겠다. 




입술이 예쁜 마담은 나더러 어디서 일했냐고 물어보았다. 다 말할 필요는 없어서 충청남도 D시에서 일했다고 했다. 사우나에서 나눈 이야기는 간단했다. 이 목욕탕은 여러 업소 아가씨들이 이용한다고 하면서 다른 업소 마담이나 아가씨들이 보는데 혼자 때를 미는 천박한 짓은 하지 말라고 했다. 목욕탕 이모에게 세신을 받으며 몸매 관리를 하라고 했다. 이 마담도 보통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나중에 마담은 겉옷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자는 속옷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속옷은 꼭 세트로 입으라고 했다. 속옷을 세트로 입지 않은 아가씨들에게는 "네가 때밀이 이모냐?"라면서 면박을 주었다. 속옷조차도 업주나 마담이 간섭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나의 존재는 뼛속까지 성매매 여성임을 알려주었다.
- 봄날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 p.70-71
저자를 때린 아버지와 어린 저자를 성추행했던 삼촌과 저자를 강간하며 웃던 그놈, 임신한 저자를 버리고 간 군인에 대해 쓴 1장 "어떻게 성매매를 하게 되었나요?"를 지나면, 2장 열여덟 살에 유입된 업소 이야기가 그려진다. 1장을 읽으며 몇번이고 이게 경험담이 아니었으면 했다. 2장도 쉽지 않은데, 겨우 1부―긴 터널의 2장을 읽고 있으며 4장이 남았고, 2부는 시작도 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에필로그의 제목처럼 이 책을 덮기 전까지 나는 계속해서 이 책 위에 서 있을 것이다.


그 남자를 잊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다. 잊으려 하면 할수록 더 그리웠다. 거리의 모든 남자가 그 남자로 보였고 같이 보낸 시간들이 어제 일처럼 또렷이 기억이 나 나를 괴롭혔다.
나는 다시 업소로 돌아왔다. 마음을 다잡지 못하는 시간들은 술로 달랬고 하루하루를 견뎌내기 위해 더 모질게 스스로를 학대했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내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남자를 영원히 내 가슴에서 떠나보내기 위해 나는 많은 것을 포기했고 많은 것을 버렸다.
그 남자와의 기억을 지울 수 없었던 이유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배우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나를 이용하고 돈벌이 수단으로만 여기던 주변 사람들에게서는 절망과 좌절을 배웠다. 그러나 상대를 존중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바라보는 사랑을 그 남자로 인해 알게 되었다. 이제는 다른 사람을 만나더라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다.
(p.124)
화가 나고, 숨이 턱 막히고, 읽는 것에 속도가 나지 않을 즈음에 이 이야기의 차례가 왔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똑같은 나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저자 봄날에게 찾아온 그 남자.

우리가 자주 찾던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한 잔 입에 털어 넣었을 때 그 남자는 나를 바라보며 "어떻게 하면 업소에서 일을 그만둘 수 있어?"라고 물었다. 그 말에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차라리 빚을 갚아달라고 할까? 그러면 여기서 나갈 수 있다고 할까? 그런데 나는 왜 망설이고 말을 못 하지? 답답하고 갑갑했다. 내가 어떤 요구를 하더라도 이 남자는 들어줄 능력이 된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하지만 이 남자 앞에서는 사람과 사람으로 대등한 관계가 되길 바랐다.
(p.117)

읽는 나도 무너져 내렸는데 저자는 이 시간을 어떻게 건넜고, 글로 써내려갔을까. '그러나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다'는 구절에 마음이 쓰여 눈을 떼지 못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르고 그때의 기억은 그 시간에만 못박아두는 것만 같아서.



업소 생활을 하면서 화재 사고를 목격한 적이 없는 나는 도대체 몇 명의 아가씨가 죽었기에 여기까지 이 난리가 나는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훗날 청소 이모가 말하던 그 화재 사건이 군산 대명동 화재 사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2년 뒤 현재 시행되고있는 성매매방지법의 촉매제 역할을 했던 군산 개복동 화재 참사가 일어났다. 업소 창문의 창살을 없애면 성매매 여성들은 안전해질까? 소화기만 설치하면 끝일까? 여성들이 겪는 착취는 문제가 아닌 것일까? 하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화재 사건보다 잠이 더 중요햏고, 오늘은 매상을 얼마나 올릴 수 있는지, 진상을 만나지는 않을지가 유일한 관심사였다. (p.211)
어제 업로드하지 못하고 잠들었다. 이 구절에 담긴 '군산 대명동 화재 사건'과 '군산 개복동 화재 참사'를 찾아보고 글을 쓰려는데 손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2000년 9월 19일, 군산시 대명동의 속칭 '쉬파리골목'의 유흥업소에서 불이 나 성매매 여성 5명이 사망하고 1명이 구출되었다. 피해자들은 모두 20대 여성으로, 10대에 가출하였다가 포주에게 붙잡혀 인신매매되어 감금된 채 성매매를 강요당하고 있었다. 화재시 탈출하지 못한 이유가 성매매여성들의 탈출을 방지하기 위하여 창문엔 쇠창살을 달아놓았었고, 출입구는 두꺼운 철제문으로 잠궈놓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여성들은 그 안에서 나가지 못하고 모두 질식해서 사망하였다.

더욱 충격적인 일은 고작 100m 거리에 파출소가 있었으나 경찰들이 포주들에게 뇌물을 받고 이를 눈 감아주고 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사건 이후에도 포주들에게 뇌물을 받고 수사정보를 유출한 경찰들이 적발되어 구속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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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월 19일, 앞서 화재가 있었던 '쉬파리골목'과 인접한 개복동 유흥주점 '대가'에서 다시 화재가 발생하여 14명의 성매매 여성과 남자업주 1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의 피해자들 역시 인신매매로 팔려와 감금당한 채 성매매를 강요당하고 있었다.
이 사건에서도 업소 30m 거리에 파출소가 있었으나 경찰들은 뇌물을 받고 이를 눈감아주었고, 소방공무원들도 제대로 안전 점검을 하지 않았다. 대명동 화재 참사 이후 1년 반도 지나지 않아 비슷한 곳에서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 충격은 컸다.

내가 이 책을 선택하게 된 이유가 맞닿아있는 사건을 접하니 머리가 멍해졌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 또 편견이 가득한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던 그해의 군산. 명복을 비는데 때란 없다고 생각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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