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인칭 하나만 해도 그래. 영어는 ‘나‘도 ‘저‘도 전부 ‘I‘지. 그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 평소 흔히 하는 말도 편지에서는 왜 좀더 격식을 차릴까? 평소에는 ‘그대‘라고 부른 적도 없고 ‘당신‘이라고 불린 적도 없어. 이모와 이모부 편지를 따라서 시작한 거지만 편지 속에서 ‘당신‘이라고 불리는 게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해.
솔직히 당신이 편지를 써달라고 했을 때는 메일이 어때서 싶었어. 무엇보다 나는 달필이 아니야. 직업상 남들 앞에서 글씨를 쓰기는 하지만 칭찬받은 적이 한 번도 없거든. 기본적으로 메일로 보내고 편지는 반년에 한 번만 보내야지 하는 생각도 했어. 하지만 부임하자마자 정전이야. 당신하고 연락하려면 편지를 쓰는 수 밖에 없어.
그게 지금은 전화선이 복구돼도 메일은 최대한 피하고 당신하고 주고받는 편지를 즐기려 해.
메일로는 ‘당신‘이라고 불러주지 않겠지? 편지이기 때문에 가능한 표현이 있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어.-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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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내리는 자세로
엄청나게 견디고 있다
이번 삶이 날 터뜨리진 않았지만
자꾸 쏘아올릴 것 같아서

- 권민경 시집 《베개는 얼마나 많은 꿈을 견뎌냈나요》,
<몸과 마음의 고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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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왜 사는가에 대한 답을 놓지 않는다면 자신만의 길을 걸을 수 있고 삶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김철종, 《미래를 여는 핵의학과 함께 핵의학 외길 반세기》, 새한사업, 2014, 7쪽)

잠시 책탑을 보며 생각에 빠졌다. 내가 사는 까닭은 뭘까. 그야 자명하다. 내 삶은 실비아 플라스와 마찬가지로 의문형이다.

내가 글을 쓸 수 있을까? 많이 써보면 작품을 쓸 수 있을까? 작품을 잘 쓸 때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을 해야 할까?

(타니아 슐리, <실비아 플라스>, 《글쓰는 여자의 공간》, 이봄, 2016, 118쪽)

나는 이 모든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산다. 아직 답은 찾지 못했다. 그런고로 나는 지금 ‘살아 있다’. 지금 이 순간 또 한 번 작품을 잘 쓰기 위해 책탑을 쌓는다. 누가 뭐라 하든 간에 삶을 걱정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걷기 위하여 아마 나는 계속 덕후의 삶을 살 듯하다.-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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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글이고 인생은 인생이다. 인생을 글로,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는 순간은 인생에서 제일 멀리 떨어져 있을 때다. 지구에서 떠나야 푸른 지구의 둥근 수평선이 보이듯이, 격렬한 인생의 사건들을 떠나야 가닥과 맥락이 보인다. 디테일이 뭉개진 지도가 보인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그때 살고 있는 인생이 있다. 인생에 대한 글은 마치 거울의 저편에 놓여있는 나처럼, 나와 닮았지만 나는 아니다. 인생을 닮았지만 인생은 아니다. 아침저녁으로 거울을 보듯, 우리가 인생 속에서 글 쓸 거리들을 찾아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합당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거울 속에 살지 않듯 글이 우리 인생을 살아주지 않는다. 밥 먹고, 잠자고, 걸어 다니고, 웃는 것처럼, 글 쓰는 것 또한 우리 인생의 작지만 생생한 한 부분을 이룰 뿐이다.- P67

작가의 삶과 작품이 아주 밀접하다는 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끊임없이 그 거짓말이 정말일까? 물어왔을 뿐. 사실, 작가의 삶은 작가의 작품만큼이나 다양하다. 삶을 보며 작품을 가늠할 필요도 없고 작품을 기준으로 삶을 평가할 수도 없다. 작가의 삶은 작품의 땔감도 아니고 작품은 작가의 삶의 액세서리가 아니다. 작가의 삶 또한 하나하나의 작품처럼, 독자에게는 흥미로운 이야기일 뿐이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삶은 더 특별한 이야기겠지만.

오스카 와일드가 자신의 천재성을 삶이 아니라 작품에 쏟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평범한 아저씨로 늙어가고 작품은 대단한 명작 목록에 속속 올랐을까. 그랬다면 그는 만족했을까. 아마도 전혀 만족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욕망은 삶에 있었고, 그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남김없이 불탔다. 그래서 겹겹이 그에게 매혹당한다. 천재의 삶이 아니라 천재적인 삶이라서.-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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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사려 깊고 과묵하지만 일단 입을 열면 그 누구보다 재밌는 친구

창가 책상에 놓인 그것들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문득

‘아, 참 아름답다’ 느낀 적이 있습니다.

가로와 세로의 이상적인 비율.

저 단호한 직각의 고요와 단정함.

사려 깊은 함구와 믿음직스러운 과묵함.

그러나 일단 입만 열면 그 누구보다 재밌는 걸 알고 있죠.

그중 하나를 집어 들어봅니다.

손안에 들어와 맞춤하게 잡히는 느낌이나

솜처럼 가볍지도, 돌처럼 무겁지도 않은 존재감도 적당합니다.

그것을 넘길 때 내 손가락 끝은

얇은 단면을 쓰다듬으며 내려와, 단 한 장을 가려 쥡니다.

배운 적 없는 그 동작을 손은 어떻게 그렇게 잘하는 걸까요.

어느 밤에는

나의 지문과 종이의 살결이 마찰할 때의 그 느낌,

그 소리까지도 좋아집니다.

그런 순간에는 깨닫게 되죠.

아, 내가 정말 사랑하게 됐구나!

글자들은 줄지어 기어가는 개미들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 작고 검은 몸들이 꼬물거리며 나에게 오고 있는 것처럼요.

그러니 좋아하지 않고 배길 수 있나요.

그래서 커트 보니것도 이렇게 썼나봅니다.

“책을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책은 느낌이 아주 좋으니까요.”

- 허은실 『그날 당신이 내게 말을 걸어서』 P.2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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