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이 될지 모르겠는데, 큼지막한 빵 한 덩어리처럼 보였던 세상이 점점 얇은 겹이 겹겹이 포개진 페이스트리로 바뀌어 보이기 시작했다. 맞아 그래, 이러려고 열심히 소설책에 코를 박는 거였다. 단순해 보이는 세상을 복잡하게 바라보기 위해서. 나의 무심하고 굼뜬 시선으로는 포착해내기 어려운 다양한 인생의 결을 내 안에 겹겹이 쌓아올리기 위해서.

-구달·이지수, 읽는 사이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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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냐 : 바냐 아저씨, 우린 살아야 해요. 길고도 긴 낮과 밤들을 끝까지 살아 가요. 운명이 우리에게 보내 주는 시련을 꾹 참아 나가는 거예요. 우리, 남들을 위해 쉬지 않고 일하기로 해요. 앞으로도, 늙어서도. 그러다가 우리의 마지막 순간이 오면 우리의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여요. 그리고 무덤 너머 저 세상으로 가서 말하기로 해요. 우리의 삶이 얼마나 괴로웠는지, 우리가 얼마나 울었고 슬퍼했는지 말이에요. 그러면 하느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실 테죠. 아, 그날이 오면, 사랑하는 아저씨, 우리는 밝고 아름다운 세상을 보게 될 거예요. 기쁜 마음으로, 이 세상에서 겪었던 우리의 슬픔을 돌아보며 따스한 미소를 짓게 될 거예요. 그리고 마침내 우린 쉴 수 있을 거예요. 나는 믿어요, 간절하게 정말 간절하게.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그의 두 손에 얹고는 지친 목소리로) 그곳에서 우린 쉴 수 있어요.

텔레긴이 나직하게 기타를 연주한다.

소냐 : 평화롭게 쉴 수 있을 거예요. 천사들의 날갯짓 소리를 들으며, 보석처럼 반짝이는 천상의 세계를 바라보면서요. 모든 악과 고통은 온 세상을 감싸는 위대한 자비의 빛 속으로 가라앉게 될 거예요. 그날은 평화롭고 순수하고 따스할 거예요. 난 믿어요. 굳게 믿어요. (눈물을 닦는다) 불쌍한 바냐 아저씨, 울고 계시군요. (흐느낀다) 아저씨는 평생 행복이 뭔지 모르고 살아오셨죠. 하지만 기다려요, 바냐 아저씨, 기다려야 해요. 우리는 쉴 수 있을 거예요. (그를 껴안는다) 쉴 수 있어요.

야경꾼의 딱따기 소리가 들린다.

텔레긴이 나직하게 기타를 연주한다. 마리야는 소책자 여백에 무언가를 적고 있다. 마리나는 양말을 뜨고 있다.

소냐 : 쉴 수 있어요.

ㅡ막ㅡ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바냐 아저씨 4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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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런데 왜 더 자주 만나지 않고 일주일에 한 번만 보느냐고 누군가는 물을지도 모르겠다. 왜 세상의 더 많은 부분을 함께 받아들이고 매일 서로 시시콜콜 잡담하며 안락함을 찾지 않느냐고 말이다. 문제는 우리 둘 다 부정적인 쪽으로 기울어 있는 사람들이라는 데 있다. 어떤 상황에서든 우린 영원히 컵에 물이 반밖에 없다고 느끼는 인간들인 것이다. 상실, 실패, 패배를 그가 드러내든 내가 드러내든 꼭 한 명은 그러고 있다. 어쩔 수가 없다. 우리도 좀 달라지고 싶지만 어찌됐건 우리가 느끼는 삶이라는 게 그러니까. 그리고 삶을 느끼는 방식은 결국 삶을 살아낸 방식일 수밖에 없다.


-비비언 고닉, 짝 없는 여자와 도시 p.8


엄마는 아빠와 결혼했을 때 영혼에서 모호함이라는 먹구름이 걷혔다고 했다. 엄마는 그렇게 표현했다. 모호함이라는 먹구름. 너희 아버진 마술 같은 사람이었지. 눈길, 손길, 그리고 날 이해해주는 게 그랬어. 엄마는 이 문장을 끝맺을 때쯤 몸을 앞으로 숙였다. 이해는 부적 같은 단어였다. 엄마 말로는, 이해를 받지 못하면 당신이 살아 있는 건지 알 길이 없었고 이해를 받으면 마음이 정돈되며 세상에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비비언 고닉, 짝 없는 여자와 도시 p.63



에마와의 우정에 금이 가기 시작하자 영원한 친구 따윈 없으며 오직 영원한 이익만이 있을 뿐이라던 윈스턴 처칠의 말이 떠올랐다. 물론 처칠은 세계를 향한 야심이 개인 간의 충실한 마음을 짓밟는다는 뜻으로 한 말이란 걸 알지만, 그래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처칠은 틀렸고, 영원한 이익 같은 것도 없다고. 나와 에마의 관계를 무너뜨린 건 수시로 모습을 바꾸는 우리 자신의 ‘이익’에 대한 배반이었다.

우리 내면세계는 유동적이고 불안정하며 변덕스럽고 언제나 전환 중인 상태라고, 윌리엄 제임스가 말했다. 그는 그런 전환들 자체가 바로 실제라고 생각했으며 경험이란 “그 수많은 전환 속에서 사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납득은 고사하고 이해하기도 쉽지 않은 깨달음이지만 분명 설득력이 있다. 정서적 공감에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런 변화가 일어나 평범한 날 아무 때고 결혼이나 우정, 혹은 업무 관계가 ‘돌연’ 정말로 끝장나버리는 일을 어떻게 달리 설명할 수 있을까?

-비비언 고닉, 짝 없는 여자와 도시 p.85-86



작년에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책을 읽었다면, 올해는 비비언 고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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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대가들과 조금 깊이 이야기를 나눠본 경험이 있는데, 대가인데 이런 것도 모르나 싶을 만큼 그분들에게도 구멍이 있어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의 양이 있다고 봅니다. 대가는 능력이 출중해서 하나씩 모두 쌓아가며 지금의 자리로 올라갔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분들도 꼭 완벽하지는 않다는 제 나름의 확신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공부의 구성 요소를 이렇게 생각합니다. ‘젊은 친구들, 너무 두려워하지 말자. 어차피 조금은 엉성한 구조로 가는 게 낫다. 이런 것에 덤벼들고 저런 것에 덤벼들면, 이쪽은 엉성해도 저쪽에서 깊게 공부하다 보면, 나중에는 이쪽과 저쪽이 얼추 만나더라.’ 깊숙이 파고든 저쪽이 버팀목이 되어 제법 힘이 생깁니다.

(p.83)

깨어 있는 동안 쓸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해 애써 잠을 청하거나, 게임이나 스포츠는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것이며 멍 때리고 있는 시간은 낭비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너무 열심히 살고 있다. 행복하기 위해 게으름을 피워야 하는 게 아니라 게으름을 피우기 위해 행복해야 한다.

(p.96.5)

책 읽기에 대해 강연할 때 저는 코끼리가 똥 누는 사진을 화면에 띄웁니다. 코끼리 똥 실제로 보신 적 있으세요? 어마어마합니다. 들어간 게 있어야 나오지 않겠습니까? 어떤 분은 독서를 안 하는데도 글을 제법 쓴다고 말해요. 저는 그 말을 믿지 않습니다. 많이 읽은 사람들이 글을 잘 써요. 읽은 내용을 기억해서 베끼는 게 아니라, 읽으면서 생각하는 과정에서 자기만의 문장이 탄생합니다. 글을 읽지 않은 사람이 글을 잘 쓰는 사례를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p.134)

사두고 이걸 언제 읽나 싶었는데 목표로 삼고 밑져야 본전이라고 펼쳤다.

너무 재밌어서 3일만에 호로록 읽었다 :)

최재천의 아마존을 즐겨보는 재미로서 최재천 교수님 부분은 음성지원 되는 느낌이 들어

읽는 내내 잘 읽혔다꒰◍ˊ◡ˋ꒱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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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힘들 때는 가만히 누워서 눈을 감고 본인에게 물어보세요. “그래서 뭘 하고 싶니? 난 뭘 원하지?” 하고요. 피하지 말고요.

어떻게 됐으면 좋겠는지, 그것을 정확히 인지해야(인정해야)

그 다음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사람들이 왜 슬픈지, 왜 아픈지 대체로 알고 있다고 믿는 편이에요.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는 데 용기가 필요하니까. 자기의 나쁜 상황을 인정해야 하니까.

“모르겠어”라고 말하며 회피하는 거지요. 회피하는 게 우선 편하니까요.

그런데 채빈 씨, 버지니아 울프는 이렇게 말했어요.

“무엇이든 말로 바꾸어놓았을 때 그것은 온전한 것이 되었다. 여기서 온전함이란 그것이 나를 다치게 할 힘을 잃었음을 의미한다. 갈라진 조각을 하나로 묶어내는 일이 커다란 즐거움을 주는 이유는, 아마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고통에서 벗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박연준 『밤은 길고, 괴롭습니다』 p.75-76





박연준 작가님 이번 산문도 좋았다 :) 다음엔 모월모일 읽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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