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한 장 리스트의 힘 - 100번의 계획보다 강력한
가오위안 지음, 최정숙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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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모든 시작은 리스트였다. 그때그때 손 가는 노트에 썼던 여행 계획, 스터디 플래너에 썼던 공부 계획, 매년 새 다이어리에 제일 먼저 써넣는 일년 계획, 늘 손에 붙어있는 수첩에 쓰는 포스팅 계획 등등. 뭐든 손으로 쓰는 걸 좋아해서 시도 때도 없이 리스트를 썼지만 너무 익숙했던 탓일까, 리스트의 힘에 대해서 자세히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적당히 계획했고, 적당히 실감했던 지난 날 나의 리스트. 비단 지난 날 뿐만 아니라 지금의 리스트를 보완하고 싶다는 생각에, 이 책 하루 한 장 리스트의 힘을 읽었다. 책이 책이니 만큼, 이 책을 읽는 중에 썼던 내 리스트를 예로 들어 먼저 이야기 해본다.

 

 

혹시 당신의 컴퓨터 모니터 가장자리에 메모지가 잔뜩 붙어 있거나 책상 위에 서류가 어지럽게 쌓여 있어서 펜을 찾기가 어려운가? 아니면 책상 아래에 있는 전선과 콘센트 때문에 발을 뻗기가 불편한가? 만일 그렇다면 사장과 동료는 당신을 게으름뱅이에다가 비효율적인 사람으로 판단할 것이다. 나 역시 직원들의 사고 능력과 업무 효율을 판단할 때 가장 먼저 사무 환경을 본다. (p.153)

 

 

이 책을 읽고 제일 먼저 실천으로 옮겼던 건 바로 사무실 정리였다.

이 구절을 읽고 누군가 내 자리를 보고 업무 효율을 판단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했던 것도 있지만,

나를 위한 업무 환경을 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작년에 사무실이 리모델링을 하면서 자리 위치가 바뀌었는데, 그때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가구 배치가

내 자세를 오랜 시간 불편하게 만드는 배치였고 그로 인해 업무 효율을 갉아먹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업무 환경은 잠재의식 속에서 우리의 사고 효율에 영향을 준다. 어수선한 환경은 우리를 피곤하게 하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게 만든다. 반대로 정돈된 환경은 우리가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게 한다. 당신의 사무실이 엉망진창이라면 가장 먼저 할 일은 업무 리스트를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정리 계획을 세워 모든 물건을 제자리에 갖다 놓는 것이다. (p.154)



책상 아래를 정리하고 서랍을 이동하고. 리스트에 기록한 그대로 아직 컴퓨터 선은 정리하지 못했다.

책에서는 모니터에 있는 메모지를 다 떼어 내고 바탕화면에

언제든지 수정할 수 있는 전자 일정 알림을 만들어 사용하라는데,

나는 이 부분에 있어서는 디지털하지 못한지, 여전히 아날로그 방식이 좋다.

메모하는 방식을 수정하고, 지난 메모들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에 함께 리스트에 추가.

연필꽂이는 제일 쉬운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리스트에 오래 머물러 있다.

월요일 아침에 출근하면 연필꽂이부터 정리해야지.

 

 

 

 

누구나 자기 집을 정리해서 말끔한 공간을 만들 수 있다. 나는 학창 시절 정리정돈을 잘 못하는 학생이었다. 기숙사의 내 방 곳곳에는 벗어 놓은 옷과 낡은 잡지, 바람 빠진 농구공과 종이 쓰레기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는 상황이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불필요한 물건이 많았다. 한 선배는 내 방을 보고 이런 말을 했다.

"방을 좀 정리해 봐. 환경이 정돈되면 네 마음도 정돈될 거야."

이는 단순히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의 문제다. 물론 당시에는 그 말의 중요성을 간파하지 못했다. 하지만 대학교 4학년 무렵 취업 준비를 하면서, 생각할 것도 필요한 것도 많아지면서 일상을 '정리'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인생에서 처음으로 불필요한 물건 리스트를 만들었다. (p.301)


이번엔 집 안 정리다. 챕터9 '가정 리스트로 행복을 찾아라'에서

집 안 정리에 관한 이야기의 제목을 리스트에 써 넣었다.

저자는 불필요한 물건 리스트로, 왼쪽에는 품목을 적고 오른쪽에는 상태 및 현황을 적었다.


안 읽는 책 20여권 - 다른 사람에게 주기

소형 녹음기 한 개 - 버튼이 고장 났음


나는 이 방식보다는 불필요한 물건-기승전버리기 리스트로 만들기로 했다.

오래 입지 않은 청바지, 마찬가지로 오래 쓰지 않은 화장품을 제일 먼저 버리기로 했고

계륵 같았던 뽁뽁이도 정량만 남기고 버리기로 마음 먹었다.

내가 써 넣으면서도 버리면 다 버리지 정량만 남기는 건 뭐야 싶었지만,

아래 써넣은 책 정리와 연관이 있어서였다.

박스에 책을 담을 때 완충재 역할을 하기에 뽁뽁이만한 게 없다.

더 이상 읽지 않는 만화책을 판매할 때 뽁뽁이를 쓰면

내 방의 계륵 둘을 한 번에 정리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며칠 전 '책을 판다는 건지 산다는 건지'라는 글을 썼는데,

이번 책 정리는 부디 과거만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생각하는 정리가 되었으면 한다.

 

 

이건 어떤 리스트라고 분류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일상 리스트에 넣기로 했다.

사실 독서 리스트는 다이어리에 따로 쓰는데 그건 1년 단위로 기록하는 리스트라 반납이 언제까지이고,

이 책은 읽고, 이 책은 아직 읽지 못했으며 독서기록일지는 작성했는지에 대한 깨알같은 기록들을 담는 리스트는 아니다.

2-3권이야 얼마든지 다이어리에 작성할 수 있지만 5-10권 단위는 기록하기도 버겁고

심지어 대출-반납일이 제각각이라 종종 이렇게 도서관 책을 정리하곤 한다.


메모는 그때그때 다른데, 읽은 책을 표시할 때도 있고 반납하거나 구매했다고 표시할 때도 있다.

독서기록일지를 작성했는지까지 확인하면 좋겠지만...

제일 큰 목적은 '반납일 잊지 않기'여서 그런지, 반납일을 끝으로 버려진다.

이 책을 읽고나니 단순히 반납일을 잊지 않기 위한 리스트로 그치지 않고,

도서관 책을 좀 더 계획적으로 읽는 리스트로 보완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서관 책 리스트에 시간 기록 리스트를 결합시켜서 A 책을 하루에 몇분 읽었는지 기록하여

A 책을 읽는데 걸리는 속도를 파악해서 완독 계획을 세울 수 있지 않을까.

또, A 책과 연관된 책을 리스트에 메모해두었다가 다음 방문시 B 책을 찾아보거나 대출하는 일로 이어질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영화를 찾아 볼 수도 있고 음악을 찾아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 책 리스트는 좀 더 큰 공간에 기록해서, 확장된 리스트를 써 볼 생각이다.

 

 

위 리스트는 내멋대로 리스트다. 일일 할일이 되는가 하면, 주간 할일이 되기도 한다.

다이어리에 기록하는 것과 겹치는 부분이 많지만, 리스트를 작성하면서 할 일에 대해 다시 한 번 곱씹게 되서 자주 쓴다.

서평 마감일처럼 정말 중요한 일도 있고, 하지 않아도 전혀 무관한 일(좋아하는 일일 때가 많다)도 종종 써넣는다.

중요한 일을 해치우고 좋아하는 일을 해야지! 하고 생각하게 되고

중요한 일-중요한 일이 이어질 때 휴식이 되는 일을 함으로써 기분을 전환하는 효과가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휴대 전화를 만지작거린다든지 TV를 보는 등 무언가 하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잠들기 전 무엇을 하느냐가 다음 날 우리 생활의 질을 결정한다. 편안하게 휴식에 빠져들 수 있는 행위를 해야 잠에 집중할 수 있고, 숙면을 취해야 다음 날을 좋은 컨디션으로 맞이할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리스트에 강제적인 규칙을 마련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이를테면 전날 30분 늦게 잤으면 오늘 밤에는 한 시간 일찍 잠든다는 식으로 말이다. (p.333)



휴식이 되는 일이 아니라, 진짜 휴식을 강제적인 규칙으로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만든 구절이다.

돌아보니 그저 할 일, 할 일, 할 일만 써 넣었지 한 번도 휴식을 넣어본 적은 없었다.

일을 하면서 휴식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강제적인 규칙을 마련할 정도로 온전한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단순한 하루 단위 할 일 리스트여도, 미루는 법 없이 잘 지키기 위해서는

리스트가 좀 더 구체적일 필요가 있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 깨달았다.

이를테면, 도서관 책을 반납하면서 또 다시 대출해오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극단적으로 도서관 대출증과 스마트폰(모바일 회원증)을 챙겨가지 않는 방법이 있다.

여행 사진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여행 전체 사진>몇일차 사진>특정 관광지 사진으로

사진의 범위를 좁혀서 정리하는 방법이 있다.  

 



이 책에서는 리스트란 무엇이며, 그것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내가 주로 이야기한 생활 리스트 뿐만 아니라

꿈, 업무, 시간, 감정, 관계 등 분야별로 어떻게 적용할지도 설명해주는 책이다.


에필로그 제목은 '리스트 습관이 당신의 10년 후를 바꾼다'고 하는데,

10년 후를 바꾼다는 건 다시 말해 10일 후의 나를 바꾸고, 10개월 후의 나를 바꾼다는 뜻이다.

체감하는 변화가 있는가 하면 체감하지 못하는 변화도 있다.

어떤 변화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쌓여서 어느날 오롯이 힘을 발휘한다.


지금은 이런 저런 사정으로 멈춰있지만 애정을 가지고 포스팅하는 '주간 해밀' 역시 리스트가 시작이었던 걸 생각하면

나는 이 책의 에필로그 마지막 구절이 그저 막연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 '도구'를 제대로 활용한다면 인생의 목표로 품었던 꿈을 이룰 수 있고 당신 삶은 한층 더 나아질 것이다.

(p.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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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옆집에 영국남자가 산다 - 유쾌한 영국인 글쟁이 팀 알퍼 씨의 한국 산책기
팀 알퍼 지음, 이철원 그림, 조은정.정지현 옮김 / 21세기북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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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어떻게 시작할까 고민하다 문득 영국남자를 떠올려 보았다. 수많은 영국남자들이 떠올라서 흐뭇했다. 타임로드를 타고 시간여행을 하는 닥터, 베이커가 221B에 사는 탐정과 그의 동료,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 말하는 수트가 잘 어울리는 남자, 한 명 한 명 봐도 좋은 남자들이 떼로 나와서 안 볼래야 안 볼 수가 없었던 엑스맨 리부트 시리즈 속 배우들 등등 서평이 아니라 영국남자의 매력에 대한 이야기로만 거뜬하게 3장은 채울 수 있을 것만 같다. 이 글에서 소개할 영국남자 역시 스크린과 브라운관과 모니터 너머로 만나는 영국남자 못지않게 매력이 넘친다.

 

2006년 한국을 처음 방문하고 다이내믹한 한국인들과 버라이어티한 한국 음식의 매력에 빠져 2007년부터는 아예 한국에서 살게 된 영국인 칼럼리스트이자 문화통역관 팀 알퍼. 이 책 『우리 옆집에 영국남자가 산다』는 그가 지난 11년간 한국에서 살아오며 느끼고 생각하고 맛보고 사랑하고 슬퍼했던 경험을 담은 한국 문화 산책기다.

 

영국남자가 지난 11년간 한국에서 살며 경험했고, 지켜 봐온 한국 이야기였어도 충분히 재밌었겠지만 이 책에서 내가 꼽는 매력은 따로 있다. 먼저, 그가 자랑하는 유머다.

그의 말에 따르면 영국에 살 때는 외우고 있는 농담이 수백 가지는 되었는데 이제는 거의 농담 깡통이 되어버렸다지만 그의 유머는 내게 정말 잘 맞았다. 이를 테면 이런 구절.

 

아재들의 정통 밤 문화를 제대로 원한다면 참치집-호프집-노래방-해장국집코스를 따르면 된다. 아직 자신이 젊고 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태리 식당-지나치게 비싼 술집-역시 지나치게 비싼 클럽-편의점 라면코스를 즐긴다. (p.30)

 

한국의 밤 문화, 특히 아재들의 정통 밤 문화를 설명하는 이 구절이 너무도 웃겼다. 1차 참치집부터 4차 해장국집까지, 어쩜 이리도 디테일한지. 그의 유머를 느끼기에는 한 구절로 부족하니, 한 구절을 더 보태자면 이 구절이 좋겠다.

 

때로 서울 지하철은 달리기 시합이 벌어진 운동장이나 헬스장을 연상시킨다. 목표물을 향해 뜀박질하는 승객들 때문이다. 집이 북한산 근처라 주말이면 지하철에서 숱한 등산객을 만난다. 그들은 해발고도 837미터인 북한산 백운대는 거침없이 오르면서 지하철 계단은 걸어 올라가기 싫어한다. 꼭 노약자용 승강기를 타려고 든다.

지난주에는 노약자용 승강기를 향해 뛰어가는 등산객들에게 휩쓸렸다. 승강기 문이 열리자마자 그들은 승강기를 향해 폭주 기관차처럼 달렸다. 승강기 앞에서 걷고 있던 나는 어깨를 치고 지나가는 그들에게 밀려 넘어질 뻔했다. 세렝게티 초원의 배곯은 사자에게 쫓기는 한 무리 양 떼도 그렇게 뛰진 않을 것 같다. (p.43)

 

수업 시간엔 틈틈이 수면을 보충하고, 점심시간이면 쏜살같이 식당으로 달려가고, 쉬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뛰어 내려가 배드민턴을 치던 고등학교의 풍경을 그에게 보여주면 이와 같은 문장이 나오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하며 재밌게 읽었던 구절이다.

 

두 구절만 소개했지만, 글이 전반적으로 유머가 배어있어서 읽는 내내 유쾌했다. 이쯤에서 이 책의 두 번째 매력을 소개해야겠다. Part 2 한국인만 모르는 버라이어티 코리아에서 유교에 대한 그의 글이 인상 깊었다. 세월호에 대한 아버지의 생각, 한국 여성이 성형수술을 많이 받는 이유와 땅콩 회항 사건에 대한 서양 매체의 시선, 최순실 게이트와 한국 걸그룹이 롤리타콘셉트로 인기를 끄는 이유 모두 유교 사상과 관련되었다는 이야기에 그는 무엇이 유교 사상 덕분이란 말인가하며, 위에 언급된 일들은 모두 인간의 탐욕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말한다. 서양 글쟁이들 다수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 무척 놀랍다고 덧붙이며 말이다.

 

한국에 무슨 일만 있으면 유교 사상을 끌어들여 탓하는 서양인들의 생각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가며 그는, 태어나서 줄곧 한국에 살아온 내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국 문화의 가장 훌륭한 특징 가운데 일부는 유교 사회였던 조선 시대의 산물이다. 격몽요결에서 배움과 자기수양이 좋은 행정의 토대라고 한 이이(李珥)의 사상은 오늘날까지도 존경할 만하다. 도널드 트럼프나 테리사 메이 같은 서양의 지도자들도 조금이나마 배움과 자기수양을 실천해 자기 안의 무지를 몰아내려고 애쓰면 좋겠다. 기존의 문화적 가치를 이용해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정약용의 사상 또한 매우 훌륭하고 실용적이다. 신윤복처럼 혁명적인 예술로 유교적 가치에 대항한 사람들마저도 유교 사회의 산물이다. (p.120)

 

특히 마지막 줄. 나는 이 부분에서 무릎을 탁 쳤다. 신윤복이 유교적 가치에 대항한 사람인 건 알았어도, 유교 사회의 산물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너무나 당연해서 산물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일까. 단순히 외국인이어서가 아니라, 한국에 대한 저자만의 균형있는 시선이 오롯이 느껴져서 좋았다. 파트 제목 그대로, 한국인이 모르는 한국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글까지 담겨 있다니. 물론 매력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진지하지만 유쾌함을 잃지 않았던 파트 2를 지나면, 푸드칼럼리스트인 그의 장기가 펼쳐진다. 평소 찜질방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가 찜질방의 음식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어쩐지 식혜와 미역국과 맥반석 달걀은 찜질방이 아니고서는 생각할 수 없다. 쌀로 할 수 있는 것이란 고작 솥에다 넣고 물을 부어 끓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우리 서양 사람에게는, 그 모든 떡의 이름을 외우려면 최소한 몇 년은 할애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지만 그가 떡 이야기를 하면 좋아하지 않는 콩떡도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런 힘은 스크린, 브라운관, 모니터로 만나는 그 어떤 영국남자가 해낼 수 없는 힘이지 않을까 싶다. 내가 태어나서 줄곧 살아왔던 이 나라 한국을 다시 돌아보게 하고, 애정을 갖게 만드는 글을 써내는 남자. 그렇게, 내 영국남자 리스트에 조용히 걸어 들어온 유쾌한 글쟁이, 팀 알퍼 씨. 그의 한국 산책기는, 이 책을 읽은 내게 즐거운 산책기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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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 - 마음속에 새기고 싶은 인생의 키워드 20
정여울 지음, 이승원 사진 / arte(아르테)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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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의 지난 에세이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이 가슴속에 품어야 할 청춘의 키워드 20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두 번째 이야기 그때, 나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은 마음속에 새기고 싶은 인생의 키워드 20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서툴러서 상처밖에 줄 수 없었던 나의 20대에 사과하는 시간을 지나, 그래도 눈부신 그대에게 보내는 이야기.

 

PART 1 ,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 걸까 : 나이/ 소개/ 포기/ 선택/ 독립

PART 2 외로움 앞에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 : 관계/ 자존감/ 소외/ 상처/ 걱정

PART 3 일상에 여백이 필요한 순간들 : 습관/ 직업/ 기다림/ 생각/ 우연

PART 4 평생 후회할 일을 저지를 때, 비로소 어른이 된다 : 순간/ 이기심/ 용기/ 후회/ 균형

 

책은 이렇게 네 파트로 나뉜다. 나는 먼저 프롤로그를 읽고, 다시 목차로 돌아가서 가장 마음이 가는 키워드부터 읽어 보기로 했다. 20개 중에 1개를 고르는 일이니, 1개에 내 심경이 반영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목차를 들여다보던 내가 고른 하나의 키워드는 포기였다. 포기를 선택한 것을 처음에는 부정했다. 많고 많은 키워드 중에 포기라니. 호기심에 선택한 것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막상 책을 읽기 시작하니, 지금의 내 심경에 가장 가까운 키워드가 포기였음을 깨달았다.


포기할 수 있는 지혜를 배우고 나니 인생은 더 크고 넓고 다정해졌다. 눈부신 희망보다는 허심탄회한 포기가 차라리 나을 때가 있다. 아주 가끔은 포기가 희망보다 더 아름다울 때도 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철들기 시작한다. 나는 무엇보다도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 남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강박을 버릴 때 진정한 만족감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게 됐다.

물론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들도 있다.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 새로운 모험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 누군가를 간절히 그리워할 수 있는 마음 같은 것들은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당신이 무언가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타인의 시선때문이라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포기하지 못하고 붙들고 있는 그것이 정말로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것인지를.

자유를 위해 포기할 수 있는 것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 그것이 우리의 남은 삶을 결정할 것이다. (p.66)

 

정여울 작가님의 글을 좋아하고 찾아 읽는 이유 중 하나는, 작가님의 생각과 더불어 작가님이 읽은 좋은 책의 구절을 함께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포기꼭지에서도 포기에 관한 책 이야기를 넣으려면 얼마든지 넣을 수 있었겠지만, 오롯이 작가님의 이야기가 담겨서 더 와 닿지 않았나 싶다.

 

포기를 시작으로, 키워드 하나하나를 지금의 내게 대입해서 생각하느라 이 책을 읽는 시간이 제법 걸렸다각각의 단어에 관한 작가님의 깊은 생각과, 생각을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좋은 글과, 책을 읽고 생각하는 중간 중간 쉬어가라고 자리를 내어주는 것 같았던 좋은 사진들.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 건지 매일 고민하고 망설이는 나에게, 이 자리를 빌려 이 말을 해주고 싶다.

외롭고 불안한 이때, 이다지도 든든한 책을 읽어서 다행이다." 라고 말이다.

 

 

 

* 인상 깊었던 구절이 정말 많은데, 하나의 구절만을 덧붙이라면 이 구절을 덧붙이고 싶다.

 

다시 열네 살로 돌아간다면, 열네 살의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해주고 싶나요.” 여성들끼리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미국의 한 토크쇼를 보다가 문득 이 질문이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여성들은 지금은 알지만 그때는 몰랐던 것들’, 그래서 더 가슴 아프고, 그래서 더 짠한 과거의 자신을 향해 따뜻한 위로의 말을 전해주었다.

열네 살의 나에게, ‘넌 분명 잘해낼 거야, 이제 걱정과 두려움일랑 그만 접어둬!’라고 말하는 여성들의 표정 속에는, 겁많던 소녀 시절의 나약함에 대한 후회와 이제는 좀 더 씩씩해진 자신을 향한 자존감이 깊게 배어 있었다. 제인 폰다는 열네 살의 자신을 만날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고 한다.

 

It's good to say 'No'.

‘아니오’라고 말해도 괜찮아.

 

(p.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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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 왔지만
다카기 나오코 지음, 고현진 옮김 / artePOP(아르테팝)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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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살기 시리즈로 입문했던 다카기 나오코의 만화. 한 권 두 권 챙겨 읽다보니 벌써 8권을 읽었다. 그림의 자도 어려워해서 그저 꿈만 꾸고 있는, 일상 만화에 대한 로망을 다카기 나오코의 만화를 보며 채우는 게 아닐까 싶다. 먹방 만화도 있고, 실용 만화(얼렁뚝딱 홈메이드)도 있지만 다카기 나오코 만화의 매력은 역시 일상 만화라고 생각한다.

 

특히 최근에 읽은 2권의 책 우리집 무쿠, 못 보셨어요?효도할 수 있을까?에 혼자살기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서, 다카기 나오코의 자취 이야기를 다시금 궁금해 하던 차에 이 책 도쿄에 왔지만을 접했다. 고향집에서 상경을 결정하고, 준비하고, 올라와서 살림을 꾸리고, 전철을 타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고향에서 올라온 가족을 맞이하는 진짜 상경 이야기다.

 

진짜 상경 이야기에 빠질 수 없는, 깨알 같은 이야기들에 눈이 갔다.

도쿄로 갈 용기는 없었고, 시간만 허비하고 있던 때에 집 근처에 있는 이삿짐센터에서 하게 된 알바. 다른 이들의 새로운 출발을 보고 있으니, 자신도 무언가를 새로 시작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상경을 결심한 이야기.

휴가를 맞아 딸의 도쿄 집을 방문한 아빠. 그런 아빠가 작고 썰렁한 방을 보면 깜짝 놀랄까, 급하게 방석도 사고 제대로 된 컵도 사고 장식용으로 화분도 마련해두는 딸. 아빠의 눈에는, 안테나 연결이 안 되어서 화면이 이상한 TV와 햇빛이 많이 드는 창이 눈에 든다. 그 자리에서 TV를 손 보고, 대나무발을 사와 창에 달아주고, 무거운 10kg짜리 쌀도 사다 두고, 돌아가는 길에 용돈을 쥐어주는 아빠.

 

어른이 되고 나서 부모님께 받는 용돈은, 고맙기도 하고 죄송하기도 한 복잡한 기분이 들게 했어요. 아빠가 떠나고 또 다시 혼자만의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잠깐이지만 내가 도쿄의 작은 집에서 자취를 하는 딸이 된 것만 같았다. 먹먹했던 아빠의 상경도 잠시, 아빠가 떠나고 또 다시 혼자만의 생활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도 현실감이 느껴져서 좋았다.

 

챕터마다 끝에 행복 in 도쿄라고 해서, 도쿄에서의 자취 생활 속 행복을 한 컷으로 담아내는데 이걸 챙겨 읽는 재미도 쏠쏠했다. 고향에 비해 미혼 비율이 높다거나, 시설이 다양하고 풍부해서 어딜 가야 할지 고민된다거나, 텔레비전이나 잡지에 소개되는 가게가 직접 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깝다는 이야기의 만화를 보고 있으면 잘 모르는 도쿄가 어쩐지 가까운 기분이 들었다.

 

도쿄에 왔지만 일러스트 일은 쉽지 않고, 전철 노선은 너무 복잡해 미로 같고, 알바비는 집세, 식비, 연료비 같은 생활비로 순식간에 사라져서 화려한 도시의 불빛을 즐기기에는 돈이 턱없이 모자른 나날. 제대로 되는 일은 없고,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가 후회한 적도 있었던 도쿄에서의 생활. 전시회를 보기 위해 나란히 도쿄를 찾은 가족들. 그런 가족들을 보며 작가님은 이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제가 도쿄에 온 것으로 제 인생도, 저와 인연을 맺은 사람의 인생도, 이렇게 조금씩 함게 변해가는 거겠죠...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조금 더 이 도시에서 열심히 살아 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도쿄에 온 의미가 조금은 선명해진 순간. ‘도쿄에 왔지만은 그렇게 도쿄에 와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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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재 지음 / CABINET(캐비넷)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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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에 한 실종 사건이 보도된다. 실종 사건의 중심에는, 지명도로 치면 대통령과 유재석 다음으로 유명하다는 KBS 9시 뉴스 여자 앵커 최선우가 있다.

 

그런 최선우가 교외 외딴 집에서 알몸의 변사체로 발견된다.

 

확인하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최선우 맞습니다.”

 

이 형사의 보고에 수화기 너머에서 서장은 숨을 몰아쉬었다.

수도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력 범죄 발생율이 낮은 지방 소도시의 경찰서장. 기껏해야 조폭들의 난투극이나 서울에서 도망친 강력범들을 추적하는 광수대의 수발을 드는 게 전부였는데, 전 국민이 가장 집중하고 있는 사건 피해자의 시체가 관할 구역에서 나온 것이다. 아나운서 최선우의 시체라니...! (p.25)

 

당대 최고 아나운서가 강간 살해된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은 발칵 뒤집히고, 강력부의 유능한 검사 강주희가 사건의 수사를 담당하게 된다.

 

용의자로 검거된 이는 최선우가 변사체로 발견된 집의 주인인 미술교사 서인하. 검찰청에서 주희를 대면하게 된 서인하의 첫 마디는 증거대로, 사실만 갖고 나 기소할 수 있을까요?”였고, 이어지는 두 마디는 강렬했다. 나는 최선우 섹스 파트너였어! SM! 사도마조히즘 커플이었다고, 우리가!”

 

최선우가 세상에 알려진 고상한 이미지와 달리 SM 취향의 섹스를 즐기는 변태적 성향의 여자였다고 주장한 것이다.

 

매일 저녁 같은 시간 대한민국 인구 가운데 1500만 명 정도 되는 사람들에게 자기 얼굴을 보여 주는 여자가, 그 긴 시간 동안 카메라 앞에서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진 적 없는 여자가, 수천 개의 단어로 구성된 문장을 읽는 동안 발음 한 번 꼬였던 적이 없는 여자가, 자기 등 한복판에 속눈썹이 붙었대도 다른 사람보다 자기가 먼저 알아차리고 자기 손으로 뗀다고 말해도 믿어질 것 같은 여자가, 머리채를 휘어잡혀 바닥에 패대기쳐지고 남자에게 섹스를 해달라고 구걸하다가 개 같은 년이라는 욕을 먹으며 그것을 즐겼다는, 그 여자가 그것을 위해 자신의 발아래 무릎 꿇고 구걸했다는 말을 믿으라는 것인가. (p.75)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이야기였으나 타살이라는 명백한 증거는 없는 상황 속에서, 서인하의 일관된 진술과 이를 입증하는 증거들은 수사를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그러던 중, 우연히 발견된 하나의 증거는 사건을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시키는데...

 

 

스포일러가 있다는 말은 그 자체로 스포일러지만, 난 저 문장 때문에 이 책이 궁금했다. 강렬한 사건 속에서,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시키는 하나의 증거라. 어떤 증거일지, 그리고 그 끝에는 어떤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했다.

 

 

앞으로 하는 이야기는 스포일러를 거르지 않은 이야기라, 스포일러를 피할 분들은 여기까지만 읽어주시면 좋겠다.

 

   

 

이 소설에 대해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이 소설의 제목인 소실점에 관한 이야기다.

 

소실점, 을 아세요?”

 

2차원의 평면에 원근법과 입체감이 살아 있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기준이 되는 선을 연결하는 방법. 그 정도의 상식을 가진 주희에게 서인하는 조용히 그림을 그리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소실점을 하나로도 할 수 있고, 둘로도 할 수 있고, 셋으로도 할 수 있습니다. 소실점 하나로는 소실점 셋을 써야만 그릴 수 있는 높은 빌딩 같은 것을 그릴 수 없죠. 어렸을 때, 처음으로 이 개념을 알고 난 후 너무 신기해서, 보이는 모든 걸 소실점 찍고 그려보고 혼자 감탄하고 그랬습니다.” (p.276)

 

사건을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시킨 하나의 증거는 서인하가 비단 최선우 사건의 범인이 아닌, 연쇄 방화 살인범이라는 증거였다. 그리하여 그는 최선우를 살해, 시신을 방치한 상태에서 다음 살인 계획을 실천하고 있었던 범죄자가 되었다.

 

서인하는 묵비권으로 일관했고, 판사는 검사의 구형을 그대로 언도했다. 사형.’

 

사건이 종결되고 새롭게 맡은 사건에 매달리면서 주희는 이제 정말 온전하게 그녀를 보내고 서인하를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인하가 수감 중인 청송교도소에서 연락이 왔다. 5892번, 서인하가 강주희 검사를 뵙고 싶어한다는 연락이었다.

 

서인하를 만나기 위해 찾은 청송교도소에서 주희는 사건의 진실을 듣게 된다.

 

저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서인하를 연쇄 방화 살인범으로 몰았던 그 증거는 사실 조작에 관한 증거였다. 서인하 자신이 연쇄살인범이 될 수 있도록 만든 증거.

사고였는지, 정말 죽기로 작정하고 손을 놓은 건지는 여전히 자신도 모르고, 자신이 최선우와 연인이었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다만 자신이 최선우를 사랑한 것은 분명하다고 서인하는 말했다.

 

남들에게 보여지는 자신의 완벽한 모습과, 자신의 본질에 대해 오래 고민하고 괴로워했던 최선우. 그녀의 선택 끝에서 서인하는 준비해왔던 소실점을 찍는다. 증거를 조작하고, 용의자로 지목되고, 묵비권을 일관하여 끔찍한 사건의 범인이 되기로 자처하는 소실점을 말이다.

 

저는 최선우를 똑바로 보기 위해 매 순간 새로운 소실점을 찍고, 제 위치를 바꿔가며 그녀를 보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있는 자리에서 결코 움직이지 않고, 자신이 한 번 찍은 소실점에 변동 없이, 그 구도 안에 선우를 밀어 넣은 사람들은 보지 못했던 모습을, 저는 그래서 볼 수 있었고, 저는 그래서” (p.277)

 

유일하게 최선우의 본질을 알아봤던 남자, 서인하. 숨을 쉬고 싶어서 그를 찾았던 여자, 최선우.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온전하게 해주지 않은 여자를 위해 자기 인생에 허락받은 모든 것을 걸어버린 남자. 그가 뒤늦게 밝힌 진실이라는 소실점 앞에서, 그 사랑의 깊이에 대해 생각하고 있으면 그는 주희에게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 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제가, 사랑한 거니까요.”

 

 

최선우를 몰아넣었던 편견이라는 소실점, 그리하여 최선우가 괴로워했던 가면이라는 소실점, 그런 그녀를 위해 범죄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남자의 치밀했던 조작이라는 소실점. 이 모든 소실점의 끝에는 사랑이 걸려있었고, 나는 그 소실점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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