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
사샤 세이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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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샤샤 세이건의 에세이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를 읽었다.

 

 

이 책의 저자 샤샤 세이건은 창백한 푸른 점코스모스를 쓴 천문학자이자 교육자인 칼 세이건과 작가이자 영화 제작자인 앤 드루얀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두 사람의 슬하에서 샤샤는 방대한 우주와 자연현상에는 심오한 아름다움이 숨어있으며, 현상을 비판적으로 보되 삶을 냉소적으로 바라보지 말라고 배웠다. 부모의 삶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인간 존재를 다층적으로 탐색하는 글쓰기를 해왔다는 그녀의 우주를 이 한 권으로 엿 본 느낌이었다.

 

 

2. 16장의 챕터로 구성된 이 책은 태어남과 성장(성년), 명절(독립기념일)과 결혼을 거쳐 가을과 겨울을 지나 죽음에 이른다. 인간의 생애주기에 따른 샤샤 본인의 실화를 소개하며, 그 안에서 펼쳐지는 희로애락을 인문학적 통찰로 담아낸 에세이다.

 

 

나는 이 책의 시작인 들어가는 말부터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앙이 없다고 해서 이 지구상의 삶의 리듬을 따라 살고 싶은 욕망도 없는 것은 아니(p.16)라는 구절 때문이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의 입장에서 쓴 글이지만, 신앙이 있는 사람이 읽기에도 전혀 무리가 없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신앙이 있고 없고의 문제는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니까. 이 부분에 있어 저자의 단호함을 느낄 수 있는 구절이 있어 소개해본다.

 

 

아이가 웃음을 터뜨리고 경이감을 느끼고 지구에서의 삶이 신비롭고도 의미로 가득차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고 싶다. 그렇지만 믿지도 않으면서 시늉만 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사실이라고 믿지 않는 것을 아이에게 말해줄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아이 양쪽 부모 조상들의 관습과 신념 일부를 따르면서도 거기에 구애받지 않고 한 해의 삶을 그려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은 욕구를 강하게 느낀다. 아이가 사람들을 갈라놓는 교리 따위에 얽매이지 않고 이 지구의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게 만들고 싶다. (p.28)

 

 

저자는 종교가 가지는 힘과 자신이 부모님께 배운 과학을 결합하여 자신의 딸과 가족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이 우주에서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신비한 아름다움과 공포를 함께 헤쳐 나가고 기릴 때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고 싶다고 썼는데, 책을 읽는 내내 그 의지가 느껴져서 즐거웠다. 이와 같은 주제로 대화를 하면 이런 느낌일까? 좋은 책을 읽는 것은 좋은 대화를 하는 것임을 다시금 깨달았다.

 

 

3.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4매일의 의식에 나온다.

 

 

결국은 우리의 취약함이 우리가 무언가 더 깊은 것에 다가갈 수 있게 해준다. 사랑도 그렇고. 오류를 기꺼이 인정한다면, 예측이나 선입견을 과감히 놓아버릴 수 있다면, 상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에 다가갈 수 있다.

 

(p109-110)

 

 

요즘 내가 생각하는 삶의 태도와 맞닿아있어 눈에 들었다. 결국은 우리의 취약함이 우리가 무언가 더 깊은 것에 다가갈 수 있게 해준다는 전자도 좋지만 내 마음에 든 건 후자 쪽이었다. 오류를 기꺼이 인정하는 자세, 예측이나 선입견을 과감히 놓아버릴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더 많은 것에 다가갈 수 있다는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오류를 인정하고 선입견을 내려놓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2015년에 개봉한 모 영화의 제목을 비틀어 이야기 하자면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고 이야기 하는 건 정말 어렵다. 그땐 그게 맞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틀리다는 걸 알아차리는 것조차 쉽지 않을 때도 있다. 가깝게는 책부터 멀게는 사람까지 나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취하고 싶은 것만 취하고 싶어지는데, 이 태도를 경계하게끔 만들어주었다.

 

 

4. 나라마다 탄생을 기념하는 방법도 다르고 본인의 죄를 고백하고 속죄하는 방법도 다르지만 별자리를 믿는다는 점이 재밌었다. 이 점에 대해서 저자의 어머니가 한 말이 인상 깊었다.

 

 

편견으로 예단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지. 어떤 사람에 대해 무엇 한 가지를 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안다고 생각하는 거잖아.” 엄마가 말했다. 엄마 말대로 이것도 일종의 고정관념이다.

 

별자리 때문에 피부색, 젠더, 인종, 성정체성, 종교 등에 따라 차별받듯 차별을 받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유사한 면이 있다. “나는 당신에 대해 한 가지를 알므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안다고 말하는 것에서 여러 차별주의에 내재한 게으르고 섣부른 가정을 볼 수 있다.

 

(p.195)

 

 

나도 만화 잡지를 달마다 사서 챙겨보던 시절에 비닐 포장을 벗기면 매번 별자리 운세부터 챙겨 읽었고, 혈액형으로 사람을 판단하던 때도 있었다. 요새는 그 자리를 MBTI가 차지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역시도 관심이 있었으나 흥미를 잃었다. 왜냐하면 내가 MBTI를 처음 접했을 때와 시간이 흘러 다시 검사를 해봤을 때 결과가 달랐기 때문이다. 몇 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도 이렇게 다른데 이걸로 사람을 어떻게 판단하지? 싶었다. 물론 기본적인 성향 같은 건 무시할 수 없어서 그런 공통점을 재밌어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MBTI를 비롯하여 어떤 사람에 대해 무엇 한 가지를 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안다고 생각하는 일 역시 앞으로도 경계해야겠다.

 

 

5. 이 책을 읽으면서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을 읽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친절하게도 저자 본인이 그간 읽고 좋아했거나 깨달음을 얻었거나 이 책의 주제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논픽션들을 소개한 장이 있다. 저자에게 한없는 영감의 원천인 아버지 칼 세이건의 책 4권을 포함해 스무 권이 넘는데, 나는 그 중 5권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타네하시 코츠 세상과 나 사이, 오숙은 옮김, 열린책들, 2016

-카렌 암스트롱 축의 시대, 정영목 옮김, 교양인, 2010

-데이비드 우튼 과학이라는 발명, 정태훈 옮김, 김영사, 2020

-그레그 제너 소소한 일상의 대단한 역사, 서정아 옮김, 와이즈베리, 2017

-알랭 드 보통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박중서 옮김, 청미래, 2011

 

 

6. 내가 이 책을 읽고 이야기 한 것은 아주 일부에 불과하다. 종교와 각종 의식 등 전반적인 사례가 외국의 이야기들이긴 하지만 외국은 이렇구나, 외국이라고 다를 것 없구나 하며 읽었고 내가 경험하지 못해서 이해하기 어려웠던 부분들은 작품에서 보았던 장면들을 오버랩하여 읽었다. 이를테면 이 구절이다.

 

 

나는 아버지 묘지 앞 잔디에 앉아서 울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말을 걸었다. 아버지 묘지에 가면 늘 그렇게 한다. 아버지나 근처에 묻힌 조부모님이 내 말을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분들 들으라고 한 말이 아니라 나를 위해 한 말이었다. 그분들은 이제 이곳에 없지만 한때는 있었고, 내가 그분들을 아직 사랑한다는 것을 되새기기 위해서였다.

 

(p.219-220)

 

 

드라마 하백의 신부 2017’에서 주인공 윤소아가 엄마의 묘지 앞에 앉아서 엄마에게 말을 거는 장면을 생각하며 읽는 것이다. 좋아하는 드라마를 떠올리며 읽으니 책이 더욱 친근해졌다. 앞서 소개했던 4장의 구절 중 사랑도 그렇고.’라는 문장 역시 이 드라마의 내레이션을 생각나게 했다. 이 책의 제목과 드라마 속 내레이션을 조합하여 이 글을 마무리한다.

 

 

크나큰 우주 앞에서 우리는 이토록 작은 존재들이지만, 사람들은 어떤 힘으로든 살아요.

 

그게 사람이면, 사랑이면 더 좋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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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샤샤 세이건의 에세이 우리, 이토록 작은 존재들을 위하여를 읽었다.

 

이 책의 저자 샤샤 세이건은 창백한 푸른 점코스모스를 쓴 천문학자이자 교육자인 칼 세이건과 작가이자 영화 제작자인 앤 드루얀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두 사람의 슬하에서 샤샤는 방대한 우주와 자연현상에는 심오한 아름다움이 숨어있으며, 현상을 비판적으로 보되 삶을 냉소적으로 바라보지 말라고 배웠다. 부모의 삶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인간 존재를 다층적으로 탐색하는 글쓰기를 해왔다는 그녀의 우주를 이 한 권으로 엿 본 느낌이었다.

 

2. 16장의 챕터로 구성된 이 책은 태어남과 성장(성년), 명절(독립기념일)과 결혼을 거쳐 가을과 겨울을 지나 죽음에 이른다. 인간의 생애주기에 따른 샤샤 본인의 실화를 소개하며, 그 안에서 펼쳐지는 희로애락을 인문학적 통찰로 담아낸 에세이다.

 

나는 이 책의 시작인 들어가는 말부터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앙이 없다고 해서 이 지구상의 삶의 리듬을 따라 살고 싶은 욕망도 없는 것은 아니(p.16)라는 구절 때문이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의 입장에서 쓴 글이지만, 신앙이 있는 사람이 읽기에도 전혀 무리가 없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신앙이 있고 없고의 문제는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니까. 이 부분에 있어 저자의 단호함을 느낄 수 있는 구절이 있어 소개해본다.

 

아이가 웃음을 터뜨리고 경이감을 느끼고 지구에서의 삶이 신비롭고도 의미로 가득차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고 싶다. 그렇지만 믿지도 않으면서 시늉만 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사실이라고 믿지 않는 것을 아이에게 말해줄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아이 양쪽 부모 조상들의 관습과 신념 일부를 따르면서도 거기에 구애받지 않고 한 해의 삶을 그려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은 욕구를 강하게 느낀다. 아이가 사람들을 갈라놓는 교리 따위에 얽매이지 않고 이 지구의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게 만들고 싶다. (p.28)

 

저자는 종교가 가지는 힘과 자신이 부모님께 배운 과학을 결합하여 자신의 딸과 가족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이 우주에서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신비한 아름다움과 공포를 함께 헤쳐 나가고 기릴 때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고 싶다고 썼는데, 책을 읽는 내내 그 의지가 느껴져서 즐거웠다. 이와 같은 주제로 대화를 하면 이런 느낌일까? 좋은 책을 읽는 것은 좋은 대화를 하는 것임을 다시금 깨달았다.

 

3.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4매일의 의식에 나온다.

 

결국은 우리의 취약함이 우리가 무언가 더 깊은 것에 다가갈 수 있게 해준다. 사랑도 그렇고. 오류를 기꺼이 인정한다면, 예측이나 선입견을 과감히 놓아버릴 수 있다면, 상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에 다가갈 수 있다.

(p109-110)

 

요즘 내가 생각하는 삶의 태도와 맞닿아있어 눈에 들었다. 결국은 우리의 취약함이 우리가 무언가 더 깊은 것에 다가갈 수 있게 해준다는 전자도 좋지만 내 마음에 든 건 후자 쪽이었다. 오류를 기꺼이 인정하는 자세, 예측이나 선입견을 과감히 놓아버릴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더 많은 것에 다가갈 수 있다는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오류를 인정하고 선입견을 내려놓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2015년에 개봉한 모 영화의 제목을 비틀어 이야기 하자면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고 이야기 하는 건 정말 어렵다. 그땐 그게 맞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틀리다는 걸 알아차리는 것조차 쉽지 않을 때도 있다. 가깝게는 책부터 멀게는 사람까지 나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취하고 싶은 것만 취하고 싶어지는데, 이 태도를 경계하게끔 만들어주었다.

 

4. 나라마다 탄생을 기념하는 방법도 다르고 본인의 죄를 고백하고 속죄하는 방법도 다르지만 별자리를 믿는다는 점이 재밌었다. 이 점에 대해서 저자의 어머니가 한 말이 인상 깊었다.

 

편견으로 예단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지. 어떤 사람에 대해 무엇 한 가지를 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안다고 생각하는 거잖아.” 엄마가 말했다. 엄마 말대로 이것도 일종의 고정관념이다.

별자리 때문에 피부색, 젠더, 인종, 성정체성, 종교 등에 따라 차별받듯 차별을 받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유사한 면이 있다. “나는 당신에 대해 한 가지를 알므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안다고 말하는 것에서 여러 차별주의에 내재한 게으르고 섣부른 가정을 볼 수 있다.

(p.195)

 

나도 만화 잡지를 달마다 사서 챙겨보던 시절에 비닐 포장을 벗기면 매번 별자리 운세부터 챙겨 읽었고, 혈액형으로 사람을 판단하던 때도 있었다. 요새는 그 자리를 MBTI가 차지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역시도 관심이 있었으나 흥미를 잃었다. 왜냐하면 내가 MBTI를 처음 접했을 때와 시간이 흘러 다시 검사를 해봤을 때 결과가 달랐기 때문이다. 몇 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도 이렇게 다른데 이걸로 사람을 어떻게 판단하지? 싶었다. 물론 기본적인 성향 같은 건 무시할 수 없어서 그런 공통점을 재밌어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MBTI를 비롯하여 어떤 사람에 대해 무엇 한 가지를 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안다고 생각하는 일 역시 앞으로도 경계해야겠다.

 

5. 이 책을 읽으면서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을 읽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친절하게도 저자 본인이 그간 읽고 좋아했거나 깨달음을 얻었거나 이 책의 주제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논픽션들을 소개한 장이 있다. 저자에게 한없는 영감의 원천인 아버지 칼 세이건의 책 4권을 포함해 스무 권이 넘는데, 나는 그 중 5권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타네하시 코츠 세상과 나 사이, 오숙은 옮김, 열린책들, 2016

-카렌 암스트롱 축의 시대, 정영목 옮김, 교양인, 2010

-데이비드 우튼 과학이라는 발명, 정태훈 옮김, 김영사, 2020

-그레그 제너 소소한 일상의 대단한 역사, 서정아 옮김, 와이즈베리, 2017

-알랭 드 보통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박중서 옮김, 청미래, 2011

 

6. 내가 이 책을 읽고 이야기 한 것은 아주 일부에 불과하다. 종교와 각종 의식 등 전반적인 사례가 외국의 이야기들이긴 하지만 외국은 이렇구나, 외국이라고 다를 것 없구나 하며 읽었고 내가 경험하지 못해서 이해하기 어려웠던 부분들은 작품에서 보았던 장면들을 오버랩하여 읽었다. 이를테면 이 구절이다.

 

나는 아버지 묘지 앞 잔디에 앉아서 울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말을 걸었다. 아버지 묘지에 가면 늘 그렇게 한다. 아버지나 근처에 묻힌 조부모님이 내 말을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분들 들으라고 한 말이 아니라 나를 위해 한 말이었다. 그분들은 이제 이곳에 없지만 한때는 있었고, 내가 그분들을 아직 사랑한다는 것을 되새기기 위해서였다.

(p.219-220)

 

드라마 하백의 신부 2017’에서 주인공 윤소아가 엄마의 묘지 앞에 앉아서 엄마에게 말을 거는 장면을 생각하며 읽는 것이다. 좋아하는 드라마를 떠올리며 읽으니 책이 더욱 친근해졌다. 앞서 소개했던 4장의 구절 중 사랑도 그렇고.’라는 문장 역시 이 드라마의 내레이션을 생각나게 했다. 이 책의 제목과 드라마 속 내레이션을 조합하여 이 글을 마무리한다.

 

크나큰 우주 앞에서 우리는 이토록 작은 존재들이지만, 사람들은 어떤 힘으로든 살아요.

그게 사람이면, 사랑이면 더 좋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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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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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해의 마지막을 완독했다.

1.

2021년 김연수 다시 읽기의 첫 책으로 일곱 해의 마지막을 읽었다. 지난 여름 내게 왔으나 뜻하지 않은 일로 읽기를 미룬 책이었다. '다시' 읽기 위해서는 마지막에 가진 책부터 읽는 것이 어떨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었는데, 완독한 지금에야 그 생각이 옳은 생각이었음을 알았다.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토록 강요받던 찬양시를 마침내 쓰는 마음과, 그뒤 삼십여 년에 걸친 기나긴 침묵을 이해하기 위해 지난 몇 년 동안 옛말과 흑백사진과 이적표현의 미로를 헤매고 다닌 작가의 선물과 같은 이야기. 자신의 인생이 완전히 실패한 것이며 자신의 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을 시인과, 그가 살아보지 못한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죽는 순간까지도 그가 마음속에서 놓지 않았던 소망을 그려낸 작가. 반 년이나 늦어졌지만 끝까지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2.

소설의 시/공간적 배경과 그 안에서 쓰이는 말이 어려울 때면 나는 내가 챙겨 보았던 뮤지컬 작품들을 생각했다.

사람들로 북적대는 혜산역 대합실 한켠에서, 어떤 두려움이나 부끄러움도 없는 선한 표정으로 그녀는,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라며 시를 낭송하기 시작했다. 그런 곳에서, 오랜전에 잊어버렸던 시를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듣게 되니 그의 목구멍으로 뜨거운 것이 치밀어올랐다. 여학생 시절, 국어 선생을 따라 외웠다는 그 시의 한 음절 한 음절은 쇠도끼 날처럼 그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p.196)

젊은 소설가가 이십 년 전의 일을 끄집어내니 자연스레 기행도 그때 자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떠올리게 됐다. 그즈음 그는 도쿄의 기치조지에서 살면서 아오야마학원 영문학과에 다니고 있었다. 그 이듬해 졸업을 앞두고 멀리 눈 쌓인 후지산이 보이는 이즈반도를 한 바퀴 여행하고 서울에 돌아와보니 구인회라는 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 구인회의 멤버 중에서 이상과 유정은 젊어서 죽고, 기림과 지용은 전쟁 뒤에 생사를 알 수 없게 됐으며, 상허와 구보는 북으로 와 이십 년 전의 일을 추궁받고 있었다.

(p.98-99)

전자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이고 후자는 '팬레터'. 뮤지컬 덕후이기에 가능한 독서였지 싶다. 하나 더 추가하자면,

"거기에 뭐가 적혀 있는 줄 알고 그걸 가져와? 북조선이라고 엔카베데(NKVD)기 없겠어? 남의 일에 끼어들어 좋을 게 하나도 없다구."

(p.37)

는 미드나잇 시리즈를 떠올리게 했고, 소수민족들의 언어와 민요 등을 채집할 테이프 레코더를 이야기하는 부분에선 영화 '콜드 워'가 떠오르기도 했다.

3.

다시 시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사랑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불행해지는 것쯤이야 두렵지 않아서.

(p.32)

소설 전체를 통틀어 나는 이 구절에 가장 마음이 쓰였는데, 이어지는 준의 말 때문이었다. "이제는 자네가 자네의 시보다 더 불행해지지 않았으면 해." 전선을 따라 끌려다니며 기행이 맡긴 시에 많이 의탁했던 준이 조곤조곤 낮은 목소리로 다그쳤고, 기행은 대답 대신 어느 틈엔가 손바닥만한 마당을 희뿜하게 비추고 있는 달빛을 바라봤다.

'희붐하다'는 표현을 찾아 보았는데, '날이 새려고 빛이 희미하게 돌아 약간 밝은 듯하다'라는 뜻이었다. 순하고 여린 것들로 북적대던 아름다운 시절이 끝나고 찾아온 적막에, 사랑을 증명할 수 있다면 불행해지는 것쯤이야 두렵지 않은 그가 다시 시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모습을 표현한 우리말인 것만 같았다.

4.

작가님이 이 소설을 쓸 때 자주 들었다는 음악 3곡을 이 글에 기록해둔다.

김계옥, <눈이 내린다> (옥류금 연주)

아와야 노리코 <남의 마음도 몰라주고>

바흐의 칸타타 <예수, 인간 소망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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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일이 귀찮아서 미니멀리스트가 되기로 했다 - 할 일은 끝이 없고, 삶은 복잡할 때
에린남 지음 / 상상출판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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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기, 미니멀리스트와 맥시멀리스트가 서 있다. 자신은 어디에 가까운지 파악하고 그 뒤에 가서 서보라고 한다면 나는 여지없이 맥시멀리스트 뒤로 갈 것이다. 장서가로 사는 한 짐이 많은 삶을 피할 길이 없다. 책만큼은 평생 덕질하겠지 싶어서.

책은 내가 덕질해 온 분야 중 가장 물성이 높은 분야다. 전자책도 많이 읽지만 종이책에 비할 수 없다. 그렇다면 가장 물성이 낮았던 분야는 무엇일까. 뜻밖에도 야구였다. 8년 간 삼성라이온즈 팬으로 살면서 내게 남은 건 마킹 된 유니폼 한 벌, 싸인볼, 팬북, 마스코트 피규어, 직관 티켓이 전부다. 1년이 갓 넘은 공연 덕질에 비하면 햇수 대비 소량이다. 공연 덕질로 말할 것 같으면 굿즈, 없어서 못 산다. 내줘요 동그란 거(OST 혹은 DVD앨범)...

신발, 옷, 악세사리, 화장품은 욕심이 없어서 물건이 없는 편이라 이쪽으론 이야기 거리가 없다. 대신 문구류를 좋아해서 연필과 만년필과 노트를 조금씩 갖고 있다.




2. 어느 날 1200자 책장을 두 개나 들인게 무색하게, 책을 바닥에 쌓기 시작하면서 물건 정리에 심각성을 느꼈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사 모은 거지? 그때부터 비우기에 관심이 생겼다. 하루아침에 미니멀한 삶을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루라도 덜 맥시멈할 삶을 살기 위해서였다.

이전에 구매해둔 태미 스트로벨의 『행복의 가격』을 다시 읽었고, 유튜버 Erin Nam의 영상을 챙겨보았다. 후자는 책의 출간으로 이어졌는데, 활자를 읽으며 비우기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보고 싶어서 책을 구매하게 되었다.

『집안일이 귀찮아서 미니멀리스트가 되기로 했다』라는 제목 앞에서 깨달았다. 비우기는 이렇게 직관적인 이유에서 시작하는 거구나. 내 상황을 대입해 이야기하면 '1200자 책장이 두 개나 있는데 바닥에 책이 쌓이기 시작해서 비우기를 시작했다'가 될 것이다. 그저 정리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왜 정리를 시작하게 되었고, 정리하는 일이 물건을 구매하는 것에 어떤 영향을 주었으며 결국에는 어떤 생각을 하게 만드는지에 대한 이야기. 이런 이야기였기 때문에 채널을 구독했고, 그간 업로드 된 영상을 꾸준히 챙겨봤으며, 이야기를 한데 모은 이 책을 찾게 된 것이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은 이 부분이다.


몇 달 동안 쉼 없이 물건들을 비우면서, 오랫동안 쓸모없는 물건을 ‘굳이’ 짊어지고 지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깊은 서랍장 안쪽에 있던 선글라스와 손목시계가 그랬고, 이사 온 뒤로 한 번도 꺼내본 적 없는 옷이 그랬고, 먼지만 소복이 쌓여 있는 전자제품 상자가 그랬다. 자연스럽게 짐이 된 그 물건들은 알게 모르게 내 삶과 생활을 무겁고,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할 일은 끝이 없고, 삶은 고단하게 느껴졌다. 내 공간에 어지럽게 늘어져 있는 물건들은 문득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들리지 않는 잔소리를 해댔다. “나 빨리 치워야 할 걸? 너 지금 쉴 때가 아니야. 얼른 청소하고 설거지해!”

필요 없던 물건들이 천천히 사라지자 생각 이상으로 삶이 쾌적해졌다. 우선 집안일의 압박감이 줄었다. 또 쌓여 있던 물건처럼 묵은 감정 역시 사라졌다. 짐이었던 물건을 비운 것뿐인데 이유 없이 복잡하던 마음까지 해결된 것이다. (p.139)



정리를 시작하며 깨달았다. 물건을 정리한다는 건 비단 물질적인 일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이 물건에는 지난 시절의 추억이, 저 물건에는 끝까지 쓰고 버리겠다는 고집이, 그 물건에는 충동구매로 얼룩진 후회가 깃들어 있었고 물건과 함께 그 마음들을 비우는 것이 '정리'의 완성이었다. 고로 나는 방에 물건을 쌓아두는 동시에 내 마음의 짐을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었던 것이다.

또 인상 깊었던 건 이 구절.


물건은 물건일 뿐


물건은 나에게 편리함을 주고, 삶의 질을 높여주기도 한다. 일의 능률을 높여주거나 쾌적한 생활을 도와준다. 하루에도 수십 번 물건들에 의지하고 도움받으며 살아간다. 물건 없는 생활을 꿈꾸지만, 사실 물건 없이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전보다 반 이상은 줄어든 물건으로 그 전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내가 참 대견하다. 


같은 미니멀 라이프라도 사람마다 각자 더 중요시하는 부분이 있는데, 나는 유난히 물건 비우기에 집착했다. 무엇보다 ‘돈의 힘’을 알아버린 어린 시절부터 생긴 물욕이 천천히 사라지고 있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비우는 기쁨을 알고, 비워진 공간에 물건이 아닌 것을 채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대신 그 자리에는 내 생활을 천천히 돌아보려는 진중한 마음가짐 같은 것들이 채워졌다. 쉽게 물건을 사던 습관도 자연스럽게 고쳐졌다. 사실 나에게는 그게 가장 필요했다. 나는 오랫동안 물건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는 조바심을 버리고, 가진 물건으로 나를 평가하는 세상의 시선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다. 그리고 지금, 어느 정도 극복했다고 말할 수 있게 됐다.


이제서야 물건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확실해졌다. 가지고 있는 물건이 절대 나를 대변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물건이 아닌 나 자신을 스스로 기억하고, 추억해야 한다. 그러니까 물건에 너무 많은 감정과 에너지를 내어주지 않아도 괜찮다.







편안하고 안정된 생활을 위해, 일의 능률을 위해, 즐거운 시간을 위해 필요하면 갖는다. 열심히 사용한다. 충분히 썼다면 비운다. 물건의 용도는 그뿐이다.

(p.205)


이에 대한 내 생각은 반반이다. 물건은 나를 대변해주기도 하지만 대변해주지 않는다. 물건은 내 취향을 반영하기 때문에 내가 어떤 취향의 소유자인지 말해주는 점에서 일부는 대변할지 모르지만, 물건이 곧 그 사람은 아니기에 대변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기분이 우울할 날엔 물건을 사며 기분을 풀던 때도 있었는데, 정리를 시작한 뒤로는 기분이 좋지 않을 땐 오히려 물건을 사지않게 되었다. 물건 때문인지 소비를 했기 때문인지 기분이 일시적으로 달라지긴 하지만, 그렇게 사들인 물건으로 다시 기분이 울적해졌기 때문이다. 위 구절의 제목을 곱씹어본다. 물건을 물건일 뿐이다.



3. 오늘은 외출하는 김에 중고매장에 책을 판매하기 위해 두 권을 챙겨나갔다. 두 권뿐이라 택배로 보내기엔 아까워서 선뜻 판매하지 못했던 책들이다.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비우기 위해서 두 권을 들고 나오다니. 친구가 그런 나를 보고 정말 변한 것 같다고 했다. 타이밍을 놓쳐버려서 내내 들고다니다 집에 오는 길에야 비울 수 있었지만 마음은 홀가분했다. 이 책들을 찾는 사람이 많을 때 비울 것. 이것도 정리를 시작하고 배운 것 중 하나다. 최근에는 tvN의 프로그램 '신박한 정리'를 통해 많이 배우고 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비우면 공간을 재배치 할 수 있고, 재배치 하고나면 원했던 것이 보인다. 누군가에게는 새로이 탈바꿈한 공간이고, 미안함을 덜어낼 수 있게 해준 시간이고, 사랑을 챙기느라 좁아진 꿈에 대한 위로가 그것이다. 내가 시작한 정리는 드라마 같은 변화를 맞이할 수는 없겠지만, 계속해서 정리 일기를 쓰고 불필요한 물건을 늘리지 않으며 나눌 수 있을 때 나누는 일상을 계속할 것이다. 나의 정리 일상이 누군가에게 "야, 너도 정리할 수 있어."하는 목소리가 될 수 있다연 더할 나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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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하고 있잖아 오늘의 젊은 작가 28
정용준 지음 / 민음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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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년은 말을 더듬는다. 엄마는 그런 아들을 걱정해 언어 교정원에 보냈다. 2년 전에 간 언어 치료소와는 달랐다. 그때 담당 선생은 정말로 소년을 치료하려 들었다. 그런데 이곳의 원장은 이렇게 말한다.

웅변 학원과는 다르단다. 말을 잘하게 해 주는 곳이 아니야. 말을 하게 해 주는 곳이지. 용기가 없는 사람에게 용기를 내라고 할 순 없는 법이거든. 용기가 부족한 사람에게는 용기를 내라고 할 수 있지만 용기란 게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에겐 그렇게 말해선 안 돼. 당연하지. 용기가 없으니까. 힘없는 사람에게 힘내라는 말도 이상해. 힘이 있었으면 힘을 냈겠지. 안 그래?

(p.10-11)

스프링 언어 교정원의 치료 과목은 이렇다. 말더듬증 치료. 자신감 향상. 스피치. 성격 개조. 인생 연구. 대화의 기술. 청소년 상담. 소년은 언어 교정원에 대해 '어느 것 하나 잘하지 못해 아무거나 다 하는 능력 없는 사기꾼'이라고 생각했다. 원장은 생각에 빠진 소년을 '강의실 A'로 데려갔다. 정상적인 느낌을 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 같은 곳에서, 원장은 네임 펜으로 이름표에 뭔가를 쓴 뒤 소년의 목에 걸었다.

"무연입니다."

"반갑습니다. 무연."

소년의 이름표에는 '무연'이라 적혀있었다. 둘러보니 사람들이 모두 이름표를 달고 있었는데, 이름이 죄다 이상했다. '루트', '마야코프스키', '핑퐁', '모티프', '처방전', '곰곰이'. 알고보니 최근 가장 말하기 어려운 단어로 이름을 짓고 한 달간 그 이름으로 사는 거였다. 말을 안 하거나 노트를 쓰지 않는 사람은 원장이 직접 별명을 지어 준다. 자기소개를 해보라는 원장의 말에 당연하게도 소년은 거의 소개를 하지 못했다. 무연중을 다닙니다, 라고 말하려 했지만 무연이라는 단어부터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소년의 이름은 그렇게 '무연'이 되었다. 발음도 제대로 못 하는 단어로 이름을 지어 주는 걸 보니 원장이란 자도 정상은 아닌 것 같다고 소년은 생각했다.

이 책 『내가 말하고 있잖아』는 '열네 살 소년이 언어 교정원에 다니며 언어적, 심리적 장애를 극복해 가는 과정을 담은 소설'인데, 이 책의 분위기를 소개하기 위해 도입부의글을 조금 풀어보았다.

2. 올해 초반에 내게 난청과 이명(耳鳴)이 찾아왔고, 이명과 상반기를 함께 보내는 동안 말수가 크게 줄었다. 업무에 관한 대화를 할 땐 문제가 없었지만, 모처럼 지인을 만나는 자리에서는 종종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대화에 어려움이 있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말이 길어질 때, 단어를 더듬는 불특정한 상황이 오면 매번 당황했다. 말을 좀 더듬으면 어때, 라고 생각했으면 괜찮았을까. 말을 더듬는 일은 말을 더듬으면 안 된다는 강박으로 이어져서 스스로를 깨나 괴롭혔다.

책이란 게,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읽는 것 같아도 인연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책을 만난 것도 그랬다. 민음북클럽에서 진행된 '손끝으로 문장읽기' 의 이번 주제가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였고, 누군가의 피드에서 이 책을 추천받은 것이 기억나 골랐던 것인데 타이밍이 잘 맞았다. 이 책의 주인공만큼은 아니지만 말하는 것에 대해 크고 작은 고민을 하고보니 주인공에게 좀 더 몰입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보자. 언어 교정 시간 중 '자기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는데, '나'는 우주에서 가장 싫은 국어(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나의 말더듬증을 고쳐 주는 것을 국어를 가르치는 자로서의 최대 목표로 삼은 듯 집요하고 끈질긴 사람. 교정원에서 친구가 된 루트와 곰곰이는 그런 국어에게 복수하자는 말을 꺼낸다. 나는 궁금했다. 어떻게 복수한다는 걸까? 복수하는 걸 도와준다고? 무슨 수로? 나는 결국 국어에게 한 번 더 괴롭힘을 당하고 나서야 복수 해달라고 부탁한다. 학교에 국어가 있다면 집에는 엄마가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애인이 소년을 괴롭힌다.

집과 학교, 안팎으로 어려운 나날을 보내는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해 읽다보니 금세 완독할 수 있었다. 주인공이 마침내 맞이하는 결말 앞에서 기뻐했고, 스프링 언어 교정원에 다니는 식구들 한 명 한 명에 정이 들어버린 나머지 헤어짐이 아쉬웠다.159쪽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소설이지만 작품이 주는 따뜻함은 결코 분량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소설이었다.

가장 애착이 가는 구절을 덧붙이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이이이모, 이모는 왜 살아요?

이모는 웃었다. 그리고 나를 껴안아 줬다. 왜 사냐니. 무슨 질문이 그래, 아들. 알려 줄 테니까 잘 기억해. 왜 사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그냥. 그냥 살아.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 그래. 그냥 사는 게 사는 데 있어 가장 큰 이유야. 다른 이유는 없어. 돌멩이가 왜 딱딱한지 아니? 왜 나무는 말을 못 하게? 몰라. 나무도 돌도 몰라. 사람도 그래. 사는 데 이유는 없어. 이유를 찾기 시작하면 사는 건 피곤해지고 슬퍼진단다.

(p.102)




이모는 두 종류의 라켓을 보여 줬고 둘 중 하나를 골라 보라고 했다. 하나는 공격에 유리하고 주걱처럼 둥글고 평평한 라켓은 방어에 능하다고 했다. 나는 주걱을 골랐다.

음, 이건 셰이크핸드야. 초보자들이 잡기 가장 좋은 라켓이면서 동시에 세계적인 선수들도 선호하는 라켓이야. 이상하게도 탁구는 공격적으로 달려드는 선수보다 셰이크핸드를 쥐고 방어하면서 경기하는 선수들이 더 많이 승리해. 세계적인 선수들도 대부분 셰이크핸드고. 어, 잘 새겨들어. 잘 방어하는 것, 공격하지 않더라도 일단 부드럽게 넘기는 것, 그게 중요한 거야. 계속 잘 방어하는 건 공격보다 훨씬 강한 공격이거든.

(p.79-80)






이이이모, 이모는 왜 살아요?

이모는 웃었다. 그리고 나를 껴안아 줬다.

왜 사냐니. 무슨 질문이 그래, 아들. 알려 줄 테니까 잘 기억해. 왜 사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그냥. 그냥 살아.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 그래. 그냥 사는 게 사는 데 있어 가장 큰 이유야. 다른 이유는 없어. 돌멩이가 왜 딱딱한지 아니? 왜 나무는 말을 못 하게? 몰라. 나무도 돌도 몰라. 사람도 그래. 사는 데 이유는 없어. 이유를 찾기 시작하면 사는 건 피곤해지고 슬퍼진단다.

(p.102)



여기 나오는 아들이 엄마에게 복수하려고 평생 칼을 갈고 또 갈았는데 이렇게 마지막에 용서하기로 했다는 게 흐름상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고.

왜 마마말이 안 돼요?

넌 그게 돼?

…….

너도 안 되면서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은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미워하면서 동시에 사랑할 수 있고 싫지만 좋을 수 있으니까. 복수하고 싶으면서 용서하고 싶은 것도 가능하지.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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