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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끓이며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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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와 함께 손꼽는 소설의 첫 문장이다. 소설이 아닌 그저 한 문장으로만 김훈 작가님을 기억하던 나는, 지난해 11월 김연수 작가님의 산문집 소설가의 일출간과 김훈 작가님의 산문집 자전거 여행재출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열린 북콘서트에서 김훈 작가님을 만났다. 질문에 대한 답을 고르는 그 모습과, 답을 할 때의 그 눈빛이 인상 깊었다. 글은 글을 쓰는 그 사람을 닮는다더니, 정말 그랬다. 내가 기억하는 문장이 바로 그 한 문장이었을지라도 말이다. 에세이는 쉽고, 소설은 어렵다고 하셨지만 그의 소설이 조금 어려웠던 나는 일단 에세이부터 읽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났고,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이 책 라면을 끓이며가 내 품에 들어오고서야 나는 작가님의 에세이를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오래전에 절판된 산문집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밥벌이의 지겨움바다의 기별에 실린 글의 일부와 그후에 새로 쓴 글을 합쳐서 엮은 책이라고 하는데, 나는 작가님의 모든 산문집을 읽어본 적이 없으므로, 이 책은 그저 하나의 산문집이었다.

 

우리 남매들이 더 이상 울지 않는 세월에도, 새로 들어온 무덤에서는 사람들이 울었다. 이제는 울지 않는 자들과 새로 울기 시작한 자들 사이에서 봄마다 풀들은 푸르게 빛났다. (p.34)

 

이 산문집의 제목인 라면을 끓이며로 시작한 1부 곳곳에서 김훈 작가님만의 문장을 만나고, 마주하는 2의 시작은 세월호. 201511중앙일보에 실린 글과 같은 해 410일 종합경제지 이투데이에 실린 글을 합쳐서 재구성한 글이라 그런지 제법 길다.

나 역시 세월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지만, 그걸 글로 풀어내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떤 날은 세월호라는 세 글자에 앞에서 나아갈 수 없었고, 또 어떤 날은 뉴스에서 되풀이해 보여주던 침몰하는 세월호의 한 호실에서 구조되는 다른 이들을 바라보는 아이들 생각이 나서 끝내 마무리 짓지 못했다. 그래서 세월호를 이야기한 작가들의 많은 글을 찾아 읽었다.

 

글을 쓰면서 읽은 책을 들이대는 것은 게으르고 졸렬한 수작일 테지만 나는 바다에 빠져 죽을 뻔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별수 없이 책을 들먹인다. (p.156)

 

며 조선 성종 때 관인 최부의 기록과 조선 영조 연간의 제주도 선비 장한철의 기록과 마지막으로 함석헌의 글을 인용하는데, 작가님이 아니면 결코 접하기 어려웠을 기록이다.

 

그리고 다시 4월이 와서, 세월호 침몰은 1주년이 되었다. 꽃보라가 흩날리고 목련이 피어서 등불로 돋아나고, 여자들도 피어서 웃음소리가 공원에 가득하다. 생명의 아름다움은 본래 스스로 그러한 것이어서 사람이 입을 벌려 말할 필요는 없을 터이지만, 지난해 4월 꽃보라 날리고 천지간에 생명의 함성이 퍼질 적에 갑자기 바다에 빠진 큰 배와 거기서 죽은 생명들을 기어코 기억하고 또 말하는 것은 내가 아직도 살아있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겨우 쓴다. (p.170)

 

이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고 나서도 나는 단지, 겨우 쓴다.’는 문장이 내 안에 오래 남았다. 밥과 돈과 몸과 길과 글 사이에서 그는 여전히 라면을 끓이며, 살아 있는 육체성의 느낌을 전해주는 연필로 글을 쓰며 단지, 겨우 쓸 것이다. 그렇게 쓰인 그의 산문을 뒤로하고 나는 아직 읽지 못한, 그의 많은 글들을 읽으려 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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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 - 알타이 걸어본다 6
배수아 지음 / 난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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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여행은 한 자락으로 기억될 때가 있다. 친구와의 남원 여행이 그랬다. 남들처럼 코스를 밟아 여행했던 전주를 뒤로하고, 남원으로 넘어온 우리는 남원에서의 하루를 종일 자전거를 타며 보냈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빌린 자전거를 끌고, 오르막길을 한참 오른 끝에 방문했던 남원랜드. 영업시간은 지나 있었고, 아쉬운 마음에 남원랜드와 서로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우리는 10분 넘게 올라간 그 길을 1분 만에 내려왔다. 여행의 한 자락은 그 1분 사이에 찾아왔다. 넓게 펼쳐진 남원의 풍경 위로 저물어가는 노을이 내 눈에 가득 들어차는데, 우리는 이 노을을 보려고 여길 이렇게 올라왔나보다 했다. 그 풍경은 그렇게 지난 여행의 전부가 되었다.

 

이렇듯 한 자락은 어떤 풍경이 되는가 하면, 한 사람의 모습이 되기도 한다. 알타이를 여행한 배수아에게는 한스가 있었다.

 

나는 한스가 그렇게 걸어 식탁에 와서 앉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아침마다 반드시 홍차를 마셨으나 그날은 식탁 어디에도 홍차 봉지가 없었다. "한스, 이제는 차가 하나도 없어" 하고 누군가가 말해주자 한스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에서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평원으로 걸어가서 허리를 굽히고는 그가 조각을 위해서 돌을 고를 때와 마찬가지로 아주 신중한 태도로 몇 송이의 노란 들꽃을 꺾었다. 그리고 그 꽃송이를 식탁으로 가져와 뜨거운 물이 담긴 그릇에 띄우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의 차였다.

세상과 반쯤 격리된 듯한 한스의 몸짓과 태도에는 내 마음을 건드리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시처럼 느껴졌다. 나는 아직도 그날 아침 그의 말없는, 변함없이 주변과 무관하던 표정과 몸짓을 잊을 수가 없다. (p.186)

 

이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그녀가 도저히 저항하지 못할 운명의 힘에 이끌려 몽골로 떠나 약 한 달 간 머물렀다는 서북부 국경 지대인 알타이를 떠올렸다. 사진으로 접한 알타이의 풍경보다, 뜨거운 물이 담긴 그릇에 노란 들꽃을 띄워 그의 차를 마시는 한스가 눈에 선했다. 내가 그곳 알타이에 있었고, 그날 차를 마시는 한스를 보았어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었을까 싶었다.

 

유르테에 불을 피울 야크똥을 모으고, 3주 내내 양고기를 주식으로 먹고 소화불량에 시달리고, 많은 경우 자신의 감정과 언어 안에서 오직 혼자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플 때조차도 가장 많은 미소를 지으면서 유목민으로 거듭난 그녀. 책의 시작부터 그녀의 책이었으나, 저 구절을 읽으면서 이 책은 온전한 그녀의 책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여기서는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늘이 도대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 알 도리가 없었고, 사실상 알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또다른 사실도 깨달았다. 이곳에서 나는 내가 누구인지조차 거의 절반쯤은 정말로 잊어버리고 있었음을, 그건 예상치 못하게 아주 행복한 기분이었다. (p.138)

 

검은 머리를 길게 기르고 치렁치렁한 양털 스커트를 입고, 손에는 양치기 막대를 들고 걸어다녔을 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 그녀가 아니었으면, 알타이와 울란바토르 그 어디쯤의 풍경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노란 들꽃을 뜨거운 물에 띄워 마시던 한스가 하나의 시였다면, 유목민으로 산 한 달간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거의 절반쯤은 정말로 잊어버리고 있었으나 예상치 못하게 아주 행복한 기분이었다 말하는 그녀의 이야기는 내게 하나의 소설이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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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 '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야구의 디테일
배우근 지음 / 넥서스BOOKS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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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회말 2아웃 만루상황. 원정팀이 1점 앞선 가운데, 홈팀의 다음 타자가 타석에 들어선다. 타석에 들어선 그는 우선 장갑을 단단하게 조이고 헬멧을 이마의 끝선에 맞춰 고쳐 쓴다. 그리고 스파이크에 흙이 엉겨 붙어 있으면 두세 번 점프해서 털어낸다. 이어 방망이를 연필 삼아 홈 플레이트에 쭉 선을 그린다. 이게 끝이 아니다. 왼손으로 허벅지를 한 번 툭 쳐야 타격 준비가 끝난다. 그 중에서도 헬멧 속 냄새를 맡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여유가 있는 상황, 모두가 숨죽이는 긴장감 넘치는 상황을 가리지 않고 매 타석 자신만의 독특한 준비동작을 하는 선수들이 있다. 이때, 이 준비동작을 루틴혹은 쿠세라고 부른다. 자신이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하는 이 루틴은 선수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집중력을 높이는 수단이다. (p.239)

 

 

앞서 소개한 루틴의 주인공은, ‘꾸준함의 대명사로 불리는 삼성라이온즈 우익수 박한이다. 다른 선수에 비해 유난히 준비 동작이 많고 길어 버퍼링 박’, ‘킁킁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올해로 8년차 삼성팬인 나뿐만 아니라 타 구단 팬들 역시 박한이 선수의 루틴을 따라 해낼 정도로 루틴은 그에게 트레이드마크다. 나 역시 종종 따라 해보곤 하는데, 성실하고 꾸준한 그의 기록 속에 한 경기, 한 타석, 한 구 한 구 차곡차곡 쌓였을 루틴을 생각하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듯 사소해 보이지만, 루틴이 없는 선수가 없을 정도로 야구에서 루틴은 중요하다. 아니, 야구에서 중요한 게 어디 루틴뿐이랴. 투수는 왜 선글라스를 쓰지 않는지, 홈런을 칠 때 손맛을 느끼는 게 정말인지, 포수는 왜 매니큐어를 바르는지, 야구는 왜 9회까지 하는지 등등 꼭 알 필요는 없지만, 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야구의 디테일이 담긴 책이 있다. 이름하야 야구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 바로 그 책이다.

 

야구를 챙겨보기 시작하던 8년 전, 주위에 야구팬이 없었던지라 이 용어, 저 용어를 찾아가며 경기를 챙겨봤던 기억이 난다. 보크와 낫아웃에 대해서는 조금 낯설었던 그때. 그래도 야구가 꿀잼이라는 건 제대로 알았고, 그렇게 매년 챙겨보다 보니 어느새 8년이 흘렀다. 이쯤 되면 야구에 대해 모르는 게 없을 줄 알았던 내 생각은 이 책을 만나면서 우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8년이나 봤는데도 모르는 게 많았다. 그 중 하나를 꼽자면, ‘삼진 후 내야 라운딩 세리머니.

 

투수가 타자를 삼진 잡으면 포수는 미트에 있던(타자가 삼진을 당한) 공을 꺼내 1루나 3루수에게 던진다. 그렇게 내야를 한 바퀴 돌고 나서야 그 공이 투수에게 향한다. (p.271)

 

경기를 8년이나 봤으면서도 그게 세리머니인 줄 몰랐던 것이다. 이럴 수가. 허탈한 마음에 허허허 하고 웃으면서 계속 읽어 내려가는데, 이 세리머니에 대한 감독들의 답변이 재미있다. 유격수 출신 류중일 감독은 어릴 때부터 그랬는데, 삼진 잡고 나서 포수가 투수에게 바로 던지면 서먹하지 않을까. 바로 던지는 경우를 거의 못 봤다. 어릴 때부터 하다 보니 습관이 배어 있는 것 같다라고 했다고 답한다. 다음으로 투수 출신 감독인 양상문 감독의 답변이 이어진다. “의식하지 못했다. 진짜 그러느냐?”라며 눈을 크게 떴다는 그의 답변을 읽는데 안심했다. , 나만 모르는 건 아니었구나 하고.

그리고 양감독은 앞에 있던 포수 최경철을 불러 세워 삼진을 잡으면 정말 내야에서 수비수끼리 공 돌리기를 하는지, 1루나 3루에 던지는지 물었고 최경철 포수는 그렇게 하라고 지시 받은 건 아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해왔다. 프로에 와서도 경기 진행을 빨리 해야 할 때 말고는 1루나 3루수에게 던졌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렇게, 삼진 후 내야 라운딩 세레머니는 여기서 끝인 줄 알았는데, 얼마 후에 다시 만난 류감독이 삼진 후 내야 라운딩에 대해 자기 나름의 해답을 내놓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야통은 늘 명쾌한 답을 내놓기도 한다라는 괄호 속 문장과 함께.

해답은 둘째치고, 질문을 듣고 저자를 다시 만나기까지 이 문제(?)에 대해 계속 생각했을 감독님의 모습이 눈에 선해서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정답은 없지만, 정답에 가까운 해답은 이 책의 274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의 매력은, 그라운드 위 혹은 덕아웃 한 구석에서 이야기를 듣는듯한 현장감 있는 인터뷰와 그 선수의 준비동작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은 묘사에 있다. (특히 류감독님의 인터뷰를 읽을 때마다 류감독님의 음성이 지원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기에, 정감 가는 일러스트와 적재적소에 배치된 사진들이 이 책에 매력을 더한다.

 

야구의 꽃 홈런과 짜릿한 끝내기 안타에 가려 빛을 바랬을지라도 발로 뛰어 만드는 호수비와 도루가 쌓이고 쌓여 결국 승리로 이끌 듯이, 깨알 같을지라도 이런 디테일들이 큼직한 볼거리 사이에서 재미를 선사한다. 그래서 이 책은 오랜 야구팬에게도, 이제 막 야구를 보기 시작한 팬에게도 좋은 책이다. 야구가 진정 좋아서 쓴, 야구만큼 재미있는 진짜 야구 이야기가 담긴 책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에필로그 속 구절처럼, 이 책은 힘껏 방망이를 휘두른 상태다. 타구의 방향은 미정이었으나, 내 품안에 날아든 이 한 권의 책만큼은 스위트스폿을 정확하게 맞았다.





* 인상 깊었던 구절들


오죽하면 아이슈타인이 "내게 야구를 가르쳐주면 당신에게 상대성이론을 가르쳐주겠소. 아니 그러지 맙시다. 당신이 상대성 이론을 깨우치는 게 내가 야구를 깨우치는 것보다 빠를 겁니다"라고 말하며 불확실하고도 오묘한 야구의 세계를 거론했다고 하지 않은가. (p.5)

 

사실 최고 수준에 다다른 타자는 이미 투수를 이기고 들어간다. 타고난 기량에 경험과 수 싸움이 더해지며 마운드 위의 투수를 압도한다. 여기에 이승엽처럼 안주하지 않는 자세까지 더해지면 최고 타자로 롱런할 수 있다. 그런데 이승엽을 비롯해 정상에 오른 선수들이 전하는 마부작침(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의 성공 방정식은 어찌 보면 식상하고 지루한 스트레오타입이다. 이를 예상한 듯 이승엽은 "진정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그리고 평범한 노력은 노력이 아니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p.27)

 

슬럼프는 인생의 동반자인 외로움처럼 늘 함께한다. 중요한 건 슬럼프에 안 빠지는 게 아니라 수시로 찾아오는 반갑지 않은 손님인 그 슬럼프에서 가능한 한 빨리 탈출하는 것이다. (p.46)

 

야구는 집(홈 베이스)으로 돌아오는 여정이다. 그리고 그 여정은 쉽지 않다. 홈런을 쳐서 한걸음에 돌아오는 방법이 있지만, 대부분 많은 난관을 통과해야만 마지막 홈 베이스를 밟을 수 있다. 그래서 처음 출발한 그곳으로 돌아오기 위해 오늘도 많은 선수가 베이스 앞에서 몸이 부서져라 스스로를 던지고 있다. (p.130)

 

빠름과 느림은 동전의 양면처럼 균형을 이뤄야 한다. 속구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려면 느린 커브와 함께 던져야 한다. 세상은 여전히 빨리 돌아가고 있지만, 장대한 우주의 역사 속에서는 찰나에 불과하다. 시간이 상대적이라면 느리게 살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인생이든 야구든 '빨리빨리''천천히'가 균형을 맞춰야 한다.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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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코로스, 어머니 만나러 갑니다 페코로스 시리즈 1
오카노 유이치 지음, 양윤옥 옮김 / 라이팅하우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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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페코로스 씨에게서 만화의 재미뿐만이 아니라 부모님의 치매를 뒷바라지하는 힘겨운 터널을 뚫고 온 자로서 동지와도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인간에게는 인간만의 늙어가는 방식이 있구나, 살아가는 방식이 있구나, 죽어가는 방식이 있구나, 라고요. 그리고 인간에게는 인간만의 뒷바라지 방식이 있구나, 라고요.
(p.198 이토 히로미의 추천사 중에서) 

-(마주보고 앉아있는 엄니와 유이치)
-엄니, 내가 누군지 알겠어?
-기요노리(엄니의 남동생).
-아니야!
-그럼 히데요시(엄니의 아버지).
-아니야! '그럼'은 또 뭐냐고요. 자아, 누구?
-(zZ)
-잠들었네!
-(어느틈에...)
-(zZ)
-(zZ)
-(흠칫)눈부셔... (아들의 대머리에 반사된 빛을 보고는)
-(zZ)
-유이치, 언제 왔다냐? 머리는 싹 벗어져서는. 네가 와줘서 참말로 좋다야.
(쓰담쓰담) 


라는 내용이 담긴, 이어지는 4컷만화로 시작하는 이 책은 낙향한 무명 만화가 오카노 유이치가 쓰고 그린 책 <페코로스, 어머니 만나러 갑니다>다.

페코로스는 탁구공만 한 크기의 작은 양파 품종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 책의 저자 오카노 유이치 씨의 필명이자 별명이란다. 그런 페코로스가 어머니 만나러 가는 이야기.
아버지의 유족연금을 바탕으로 어머니를 양호시설에 맡겨둔 자신의 처지에 부모를 돌본다는 말은 너무도 염치없는 소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송구스러운 마음을 담아 '어머니 만나러 갑니다'라는 제목을 정했다고 한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의 만화를 보고 글을 읽고 있으면, 이토 히로미의 추천사에 공감하게 된다.

이건 엄니를 뒷바라지 하는 페코로스, 오카노 유이치만의 방식이라는 것을.

그리하여 엄니는 페코로스의 4컷만화 속에는 살아 숨쉰다. 아들의 대머리를 보고서야 유이치 하고 부르는 엄니. 보이지 않는 실과 바늘로 꼼지락 꼼지락 아들의 나들이옷을 기워주는 엄니. "내가 치매에 걸려서 네 아버지가 나타난 거라면 치매도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하고 말하는 엄니. 간호사의 예쁜 장난으로 난생 처음 매니큐어를 바른 짤막한 손을 수줍게, 자랑스럽게 아버지(엄니 안에서 살아계시는 아부지)에게 내보이는 엄니.

가족의 시간 속에 살아 있다는 말이 참 따뜻했던 책. 엄니의 말을 빌려 마지막 문장을 쓴다. 이 책을 읽게 되어서 참말로 좋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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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들어도 좋은 말 - 이석원 이야기 산문집
이석원 지음 / 그책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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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친구에게 빌려준 책 중에 나는 정말 좋게 읽어서, 내 인생의 에세이 중 한 권이어서 선뜻 빌려줬었는데 공감하지 못했다, 는 말과 함께 돌아온 책이 있다. 바로, 산문집 보통의 존재. 나는 너무 잘 읽었어서 간과하고 있었던 거다. 비단 책의 문제만은 아니지만, 내가 공감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공감하지 않을 수 있고 다른 사람이 공감했다고 해서 내가 공감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그 중요한 사실을. 여하튼, 그렇게 책을 돌려받고 그런가?’하고 다시 읽었다. 내 책으로 소장하고 나서 여섯 번째 다시 읽는 것이었는데 나는 여전히 좋았다. 한 번 잘 읽었다고, 여러 번 좋기는 어려운데 여섯 번째 읽어도 좋다니. 이럴 수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번 산문집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을 접하기 전에, 작가님의 장편소설 실내 인간도 사서 읽었지만 분야가 소설이어서 그랬는지, 보통의 존재가 너무 좋았던 탓인지 감흥이 조금은 덜했던 것 같다. (물론 읽고 나서 지인들에게 많이 추천했을 정도로 좋게 읽었지만) 그런 작가님의 두 번째 산문집이니, 두말할 것 있나. 읽어야지. 보통의 존재만큼은 아니지만 이번 책의 제목도, 표지도 여전히 내 취향을 저격했다.

 

변함없이, 당황스러울 정도의 솔직함. 나는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솔직하지 못한데, 변함없이 솔직한 글이 부러웠다. 어떤 삶이든, 그런 삶을 내 보일 수 있다는 것이.

 

2009년에 첫 책을 내고, 나는 내가 사십년 만에 처음으로 내 일을 찾은 줄 알았다. 하고 싶은 일, 해야 될 일, 잘할 수 있는 일. 그런데 아니었다. 두 번째 책인 소설을 쓰는 동안 나는 행복하지 않았고 나라는 사람은 원래 일에서 재미나 행복, 성취감 같은 것을 찾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걸 원하고 있는 내가 스스로 당황스러웠다. 지금껏, 거의 평생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건 소수의 혜택 받은 사람들에게나 주어지는 행운 같은 것이라 생각했기에, 어떤 일이건 밥벌이나 기타 등등 필요에 의해서 하는 경우가 많았고, 따라서 거기에 대해 특별히 결핍을 느끼지도 않았다. 어떻든 잘해내기만 하면 그뿐이었으니까. 그랬던 내가, 이제 더는 일이 즐겁지 않다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되었을 때, 나를 지탱하던 많은 것들이 헝클어지고 말았으니. (p.191)

 

이 책을 한 줄로 표현하자면 여전히 솔직한 보통의 존재, 이석원과 철수와 산나와 김정희가 나오는 산문집이다.

 

지독히 불행했던 남자 철수. 그런 그가 불운 올림픽에 출전하게 되고, 기적적으로 우승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그는 태어나서 가장 운이 좋았던 기억으로 이렇게 쓴다. 불운 올림픽에 와서 구남이란 사람을 만난 것이 내 평생의 행운입니다, 라고.

 

산나는 이석원에게, 사람이 사람을 그런 이유로 좋아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려준 사람이었다. 왜 나 같은 걸 니가 좋아해? 싶었던 질문에 대한 답은 그 애의 세 살 난 아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들을 수 있었다. 단지 자신의 옆에 앉았다는 이유만으로. 정말이지, 누군가는 누군가를 그렇게 좋아할 수 있다.

 

그리고 포르쉐를 몰던 여의사 김정희. 그녀와의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나는 그녀를 만나면서 그가 했던 고민이 인상 깊었다.

 

내 고민의 포인트는 그녀를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멀쩡한 사람이 왜 사람을 이런 식으 로 만날까. 나는 또 왜 병신처럼 그걸 받아주고 있을까. 분명 뭔가 사연이 있을 것만 같은데 그 이유라도 알면 좀 나을 것 같은데, 그런데도 난 솔직히 털어놓고 대화를 청할 용기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애초 그 사람이 원천 봉쇄를 해둔 탓이긴 하지만 사실 이게 과연 이해의 문제인지 그게 해결되고 나면 정말 내 마음이 괜찮아질지조차 알 수 없었다. (p.219)

 

그 즈음 그는 우연히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말년을 그린 영화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을 보았고, 톨스토이와 그의 아내 소피아를 보며 그는 이렇게 썼다.

 

사랑은 이처럼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끊임없이 확인하게 되는 것. 나를 사랑하냐고 묻는 것이 또한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될 수 있는 이유이다.

(중략)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런 소피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랑이란 그럴 수 있는 거니까. 온 세상 사람들이 나를 알아준다 한들 당신이 몰라주면 소용없는 거니까. 그건 온 세상이 몰라주는 것과 다름 없으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이해해줄 때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가. 그러나 그건 어렵고도 힘든 일.

(중략)

사랑이란 결국 상대와는 상관없는 나 자신의 문제이기에, 이렇게 엇갈릴 수밖에 없으며 사랑의 그런 영원히 완결될 수 없는 불완전성이야마로 사랑을 영원하게 해주는 요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p.221)

 

위 구절이 담긴 사랑과 이해라는 글에서, 그는 영화 렛미인에 대한 생각도 덧붙인다.

 

가끔은 사랑보다 이해가 더 중요하단 생각이 든다.

가끔이 아니라 자주. (p.225)

 

그리고 이야기의 중심은 계속해서 김정희다. 김정희를 만나고, 기다리고, 생각하다 크리스마스가 온다. 두 사람의 관계에 변화가 있기 무섭게, 두 사람은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을 마주하고 만다. 그 순간 남자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면, 여자가 좀 더 남자를 포용할 수 있을 때 만났으면 두 사람은 헤어지지 않았을까?

 

원래 여자친구의 휴대폰을 절대로 보지 않던 남자는, 이번만큼은 보게 되는데 그녀의 휴대폰에서 자신은 몰랐던 그녀를 발견한다. 동료 의사에게 보낸 그녀의 문자들. 일기 같기도 하고 혼잣말 같기도 한 그것들은 실은 모두 그에게 보내는 말들이었다. 그 말들을 보면서 그는 자책감이 든 동시에 그녀가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자신이 스스로 정리해 자신의 입으로 뱉어낸 그 말 그대로 종료가 되어 어떤 것으로도 되돌릴 수 없지만, 사람 마음이 어디 드라마 끝나듯 그럴 수 있나. 그녀에게 너무나 연락하고 싶지만, 그는 나리의 조언대로 연락하지 않기로 한다.

 

석원아. 너 그거 알지. 병법에 생즉사, 사즉생이라고 있는 거. 죽으려면 살고 살려면 죽는다. 연애도 전쟁이야. 작전도 있어야 하구 타이밍은 또 얼마나 중요하니? 넌 지금 무조건 그 여자를 잊고 지내야 해. 그래야 단 일 프로라도 남아 있는 가능성을 잡을 수 있어. 만약 니가 지금 한 발짝이라도 다가가면 그 여자는 우주 밖으로 달아나. 명심해. 널 안 좋아해서가 아냐. 사람 마음이 그래.” (p.304)

  

이 책의 제목, ‘언제 들어도 좋은 말은 그녀 김정희에게서 오던 문자 중 하나였다.

 

뭐해요?

 

꽃피는 5월의 계동.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고, 그는 늘 그렇듯 오후의 홍차로 향하던 어느 날이었다. 오후의 홍차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려던 그 순간,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갑작스런 벨소리에 놀라 들어가려다 말고 도로 가게 밖으로 나와서는 휴대폰 화면을 확인하는데, 세상에...... ‘전화를 걸어온 사람이 여자고 직업은 의사이며 성이 김씨였다면 믿겠는가?’ 하며 그는 두 번째 산문집을 갈무리한다. 그의 변함없이, 당황스러울 정도의 솔직함이 전작 보통의 존재에서는 그를 이해하고 공감하게 만들었다면 이번 산문집 언제 들어도 좋은 말에서는 그의 이야기에 쉽게 빠져들게 만들어서, 쉽사리 빠져나올 수 없게 만들었다. 내 연애처럼 고민하고, 공감하며 읽게 만들다니. , 이러니 내가 그의 산문집을 사랑해 마지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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