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석

 

"너의 풍경 속에 언제나 내가 있기를"

저는 이수를 위해 홀로 체코로 떠나고, 낯선 타국에서 새로운 일상에 적응하고 있던 우진을 맡았어요.

그때 우진에게 사랑이란, '기억'이라고 생각해요.

우진에게는 상대의 기억에서 잊힌다는 것이 너무도 무섭고 가슴 아픈 일이었죠.

스스로 떠나왔지만 아마 진심은 그녀가 언제까지나 자신을 기억해주길 원했을 거예요.

누구나 남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약점 같은 것이 있기 마련이죠.

잘 나지 못한 외모일 수도 있고, 화려하지 않은 배경일 수도 있고,

뛰어나지 않은 학벌일 수도 있고, 넘치게 뾰족한 성격일 수도 있고.

이런 약점은 보통 타인에게 들키고 싶진 않지만, 특별한 누군가에게는

솔직히 터놓고 싶어지고 이해받고 싶어져요.

이런 나라도 괜찮은지 확인하고 싶어지고, 이런 나지만

널 향한 마음만큼은 진짜라는 것을 전달하고 싶어지고,

이 마음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라고 약속하고 싶어지고,

오늘보다 더 나은 내가 돼서 그 사람 곁에 내내 머물고 싶어지고...

이것이 다 사랑이죠.

우진 역시 그랬어요.

이수의 기억에서 그저 스치고 사라지는 것이 싫어서 자신의 약점을 스스로 들키는 모험을 감행했죠.

그리고 잠시 떠나기는 했지만, 결국은 언제까지나 함께하는 미래를 선택하죠.
앞으로 좋을 때도 있고 아플 때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의 모든 기억은 그녀와 함께할 거예요.

그녀의 기억 속에도 언제나 그가 있을 거고요. 그는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도 그를 사랑하니까요.

 

 

- 영화 <뷰티 인사이드>에서 각기 다른 '우진'을 연기했던 배우들 중 유연석의 이야기 전문.

 


 

 


외국에서 외국인이면 덜 외로울 줄 알았던 우진.

근데 모습이 바뀐다고 내가 내가 아닌 게 아니잖아, 하고 지독한 현실을 깨닫게 된 우진.

이수와 사랑했던 기억을 가슴에 묻어두고 홀로 체코로 떠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수가 자신을 기억해주길 원하는 남자.

 

영화 속 마지막 우진의 사랑이란 '기억'이었다는 유연석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다시 생각한다.

그래서, 유연석이 연기하는 우진의 뒷모습이 그렇게 먹먹했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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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온 존재가 완전히 비워지면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사랑은 '나'를 무한히 확장시킨다. 사랑에 빠졌을 때, '나'는 질투로 몸이 달아 자살을 떠올리는 심약한 청년이 되기도 하고 어떤 투정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너그러운 성자가 되기도 하고 청소차가 지나가는 새벽 거리를 비스듬히 누워서 바라보는 폐인이 되기도 한다. '나'는 레너드 코헨의 노래처럼 권투 선수와 의사와 운전수가 될 수도 있고 안치환의 노래처럼 그대 뺨에 물들고 싶은 저녁노을이나 그대 위해 내리는 더운 여름날의 소나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랑이 끝나면 이 모든 가능성이 사라진다. 사랑의 종말이 죽음으로 비유되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사랑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가는데, 그러면서 무한히 확장됐던 '나'는 죽어버린다. 진우의 말처럼 한번 끝이 난 사랑을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죽음은 비가역적인 과정이다. 사랑의 종말도 그와 마찬가지다. 확장이 끝난 뒤에는 수축이 이어지게 된다. 사랑이 끝나게 되면 우주 전체를 품을 수 있을 만큼 확장됐던 '나'는 원래의 협소한 '나'로 수축된다. 실연이란 그 크나큰 '나'를 잃어버린 상실감이기도 하다.

다락 같던 '나'에게서 벗어나 엉거주춤 관계 속에 집어넣었던 온갖 잡동사니들을 챙겨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일은 우연히 발견한 초등학교 시절의 일기장을 펼쳐보는 일과 비슷하다. 내가 그렇게 농담을 잘하는 사람이었구나, 슬픔이란 유행가 가사에나 나오는 얘기인 것처럼 늘 맑게 웃었구나, 참 떼도 많이 쓰고 참을성도 없었구나 등등의 회한이 들면서 그런 자신을 아련하게 그리워하게 된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함께 빠져들었지만, 모든 게 끝나고 나면 각자 혼자 힘으로 빠져나와야 하는 것. 그 구지레한 과정을 통해 자신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뼛속 깊이 알게 되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다.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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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화 '별은 어째서 떨어지지 않는 걸까?'에서 엄마 테라다와 아들 나오의 대화.


-(어린이집 앞)
-테라다인데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엄마!
-맨날 늦게 데리러 와서 죄송해요.
자, 집에 가자. 선생님께 인사해야지.
-안녕히 계세요.
-(밤하늘)
-나오, 저기 좀 봐. 별님이 참 예쁘네.
-엄마. 별님은 왜 하늘에서 안 떨어져?
-음... 글쎄, 왜 그럴까? 알았다!
떨어지면 사람들이 깜짝 놀랄까봐 그런 거 아닐까?
-그렇구나~ 근데 만약에 떨어지면 어떻게 해?
-뛰어서 도망쳐야지~
-소중한 거 들고?
-그렇지~
-그럼 난 장난감 많이 들고 갈래.
과자도 이~따만큼 들고 갈 거야. 엄마는?
-엄마한테는 나오가 제일 소중하니까 나오를 데려갈거야. 그러니까 나오 짐이 많으면 엄마가 힘들어.
-그럼 내가 조금만 들고 갈게.
-그래, 착하구나.
-나오야, 이거 중요한 얘기니까 꼭 기억해야 돼. 언제든 달아날 때는 뒤돌아보지 않아도 돼.

살아 있는 게 중요하니까. 별이 떨어져도 무조건 뛰어야 돼!
-알았어~~~
-자 얼른 집에 가자. 오늘 저녁밥은 햄버그스테이크야.

 

 


그리고 다음 화에서, 사표는 어떻게 쓰는 거지? 하고 고민하는 직장인이 나온다.

마음 같아선 쌓이고 쌓인 온갖 분한 일들을 다 써서 "더러워서 못해 먹겠네!!" 라고 한소리 내뱉은 다음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그보다 회사를 그만둬도 되는지가 문제라며 고민한다.

안 그래도 최소한의 인원으로 간신히 돌아가고 있는 직장. 자신마저 그만두면 다른 누군가에게 불똥이 튈 테고,

무책임한 놈이라고 생각할 것만 같다. 약삭빠르게 옮길 곳까지 정해뒀다고 하면 더더욱...
이런 생각 끝에 그는 그냥 꾹 참고 더 다닐까? 한다.

계속 잠을 깊이 못 자거나 식욕이 없다거나 그 정도의 스트레스는 회사원이라면 누구한테나 있는 걸지도 모르니까.

남은 동료들을 생각해서라도, 자신도 조금 더 힘을 내고 힘을 내서... 하는데 어느 날 밤의 하늘이 떠오른다.

 

"나오야, 이거 중요한 얘기니까 꼭 기억해야 돼. 언제든 달아날 때는 뒤돌아보지 않아도 돼."

 

하던 엄마의 말씀이 떠오르는 남자. 그는 시간이 흘러 직장인이 된 나오였다.

어릴 땐 그 얘기가 별이 떨어지면 도망치라는 얘긴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니었다.

달아날 땐 뒤돌아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날밤, 신문에 실린 작은 기사가 우연히 나오의 눈에 띄었다.

우주를 떠도는 떠돌이 행성이 발견되었다는 내용.

원래는 지구처럼 붙박이별 주위를 공전하는 별이었는데 다른 행성 중력으로 인해,

궤도에서 튕겨져나가버렸다는 떠돌이 행성. 둥

 

실둥실 자유롭게 떠도는 행성이 이 밤하늘 어딘가를 날고 있을 거라고 나오는 상상한다.

그리고 다시금 떠오르는 엄마의 말.

 

"살아 있는 게 중요하니까."

 

가끔은 엄마한테 얼굴 보여 드리러 집에 가야겠다고 혼잣말하고는, 나오는 사직서를 마저 쓴다.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한 나오를 데려갈 거라는 엄마와, 그런 엄마를 생각해 조금만 들고 간다는 나오.

지혜롭게 교육하고, 그 교육을 잊지않고 기억하는 모자지간. <밤하늘 아래>에서 내가 제일 손에 꼽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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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라는 시에서, 가장 마지막 구절을 남겨두고 싶다.

전문을 남기려다, 마지막 구절만 맴돌기에 괜찮을 것 같다 싶어서.

얘야, 네가 다 자라면 나는 네 곁에서 길을 잃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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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할 차례라고 하던데, 맞아?

시는, 내가 살아있음을 알려주려고 있는 거야.

살면서 외롭거나 힘들거나 혹은 내가 하찮다고 느껴지거나 할 때,

아무 시집이나 한 번 읽어봐.

그럼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거야.

누가 본문 좀 읽어볼까?”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기를 꽂고 산들 무얼하나

꽃이 내가 아니듯

내가 꽃이 될 수 없는 지금

물빛 몸매를 감은

한 마리 외로운 학으로 산들 무얼하나

 

사랑하기 이전부터

기다림을 배워버린 습성으로 인해

온 밤내 비가 내리고

이젠 내 얼굴에도

강물이 흐른다

 

가슴에 돌단을 쌓고

손 흔들던 기억보다는

간절한 것은

보고 싶다는 단 한 마디

 

먼지 나는 골목을 돌아서다가

언뜻 만나서 스쳐간 바람처럼

쉽게 헤어져버린 얼굴이

아닌 다음에야

 

신기루의 이야기도 아니고

하늘을 돌아 떨어진

별의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 박인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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