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책을 읽는 일은 도가 아니다. 이번 책에 실린 많은 독후감이 그렇듯이 독서를 파고들면 들수록 도통하는 게 아니라, 현실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다. 흔히 책 속에 길이 있다고들 하지만, 그 길은 책 속으로 난 길이 아니라, 책의 가장자리와 현실의 가장자리로 난 길이다.

 

 

 

 

 

 - 장정일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1> 서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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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배는 오랜만에 만난 나에게 대뜸 이런 말을 했다. 나를 향한 말이 아니라 인생을 향한 항변 같았다.
   "인생은 항상 ㄷ자로 뚫려 있어. 자꾸 억지로 ㅁ자로 메우려 하면 꼭 에러가 나."
  디귿과 미음이라니. 얼마나 간단명료하고 매혹적인가. 선배의 속 깊은 은유와 상징을 이해하지 못한 나는 궁금증을 못 이기고 선배를 다그쳤다. "좀 더 쉽게 설명해주시면 안 되겠어요?" 선배는 눈치 없는 나를 위해 쉽게 풀어 설명을 해주었다. "예를 들면, 아이가 있는 사람은 아이가 없는 사람의 자유를 부러워하고, 아이가 없는 사람은 아이가 있는 사람의 충만함을 부러워하잖아. 모든 걸 완전한 ㅁ자로 채우려 하면, 삶이 너무 피곤해지거든. 뭔가 살짝 모자란 ㄷ자가 좋은 거야. ㅁ자는 이루지 못할 이상이지." 욕심 많은 나는 갑자기 내 인생이 부끄러워졌다. 언제나 ㅁ자로 꽉 채우려 하다가 ㄷ은커녕 ㄱ도 제대로 만들지 못한 내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 정여울, 나만 알고 싶은 유럽 TOP 10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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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시장

 

박형준

 

텅 빈 시장을 밝히는 불빛들 속에서

한 여자가 물건을 사들고 집으로 간다.

집에 불빛이 켜 있지 않다면

삶은 얼마나 쓸쓸할 것인가.

밤 시장,

얼마나 뜨거운 단어인가!

 

빈 의자들은 불빛을 받으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밤은 깊어가는데 아무도 오지 않고

빈 의자들은 깜빡거리며 꿈을 꾼다.

밤 시장을 걷다보면

집에서 누군가 기다리고 있다는

가장 쓸쓸한, 뜨거운 빈 의자들과 만난다.

 

텅 빈 상점 안을 혼자 밝히고 있는

백열전구 속 필라멘트처럼

집을 향해 오는 이를 위해

불꽃이고 싶다.

 

삭힐 수만 있다면 인생의 식탁을

풀처럼 연한

그런 불꽃으로 차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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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의 은유

 

 

너는 다행히 우산을 잘 받쳐 드는군

샘이 잘 받쳐 드는 숫물과도 같이

산이 잘 받쳐 드는 산 그림자와도 같이

모래 해변이 잘 받쳐 드는 바다의 푸른 노래와도 같이

너의 얼굴이 잘 받쳐 드는 눈웃음과도 같이

서릿기러기가 잘 받쳐 드는 북쪽과도 같이

 

우산은 그리하여 딱히 물건 아니라

펼쳐 짐작되는 것

 

모질게 헤어져 돌아왔을 때에는

우산이라도 거기

두어 밤 받쳐 두고 올 것을

*

계속해서 시집을 읽는다. 좋아라하는 문태준 시인의 시집.

요즘 우산 쓸 일이 잦아서 그런진 몰라도, 시집 《그늘의 발달》읽는데

<우산의 은유>라는 시가 제일 먼저 눈에 들었다.

우산은 그리하여 딱히 물건 아니라

펼쳐 짐작되는 것

이라는 구절이 가장 마음에 들었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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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 들어야 들리는 것.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남의 말을 잘라먹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비좁아도 남의 말 중간에 끼어드는 건 불편합니다.
다 듣고 나서 말해도 그리 급할 것 없는 인생.
길게 말하지 않아도 우리에겐 긴 인생이 남아 있습니다.
진중하게 들어주고
진심으로 이해하고
그러고서 말을 해도 괜찮을 삶.
듣고 나면 분명히 들리는 것이 있습니다.

- 변종모, 나는 걸었고 세상은 말했다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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