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후회.

전철에서 옆에 탄 남자가 주절주절 끊임없이 통화하는데,

피곤하다고 그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지 못한 거.
그렇게 앉아서 책을 한 장도 읽지 못하고 속으로만 투덜댄 거.

집에 와서 쉬면 되는데, 왜 그 자리를 뜨지 못하고 바보처럼 앉아있었나.
지하철 매너 상실한 그 남자도 문제지만,

결국 나는 몸이 편하자고 책을 읽을 수 있는 그 시간을 바꾼 것이다.

자업자득이면서 이렇게 글로 푸는 건, 일종의 다짐이다.

매너없이 통화하는 그 남자에게 소리를 낮춰 통화해달라 하는 말을 끝내 하지 못할 거라면,

비록 40분을 서서 와야 하더라도 내 소중한 시간을 절대 맞바꾸지 말 것!

그사세 1부 속 준영의 내레이션을 조금 바꾸어 인용해본다.
그리고 한 번쯤은 진지하게 상대가 아닌 자신에게 물어볼 일이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민폐승객이었던 적은 없는지.

원래는 이 글을 올리려고 했다.

 

 

 



사원을 나오자 마데 아저씨가 묻는다. 새 공원에 가겠느냐고. 이름은 새 공원이지만 결국 동물원이라 마찬가지라 나는 들어갈 생각이 없다. 게다가 우붓까지 관광을 하며 가는 여덟 시간짜리 차량 렌트비가 4만 원인데 새공원 입장료는 한 사람에 3만 원. 돈을 새들에게 모이처럼 뿌려줄 수는 없다. 근데 엄마가 뜻밖의 반응을 보인다. "나 새 좋아하는데... 들어가 보고 싶어." 엄마가 새를 좋아하다니 금시초문이다. "엄마 혼자 들어갔다 와요." "혼자서는 안 갈래. 무슨 재미로 혼자가?" 어쩔 수 없이 나도 따라 들어갈 수밖에. 열대의 새들을 모아놓았는데 규모도 작고 새의 종류도 많지 않다. 그래도 엄마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새들을 찾아다닌다. 그런 엄마가 새들보다 더 신기하다. 나는 어째서 엄마가 새를 좋아한다는 것도 몰랐을까.

세상의 모든 딸은 자신을 낳아준 엄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세상의 모든 엄마는 또 자신이 키운 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엄마'라는 이름을 벗어놓은, 욕망을 지닌 한 여성으로서의 엄마를 나는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군가와 함께하는 여행은 익숙했던 상대를 재발견하게 만든다. 내 안에 단단하게 굳어있던 상대에 대한 이미지를 녹여준다. 엄마와 함께 여행을 떠나오다니, 참 잘했다. (p.28)

 

 

 


좋은 글은 그때 그때 남겨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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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옥같은 대사가 가득한 이 대사집에서 내가 가장 마음에 들어한 건,

이 책의 문을 여는 '작가의 말'이었다.


이십 년째 드라마를 썼다. 살면서 어떤 사랑도 이십 년을 지켜본 적 없고, 소중한 관계도 이십 년 꼬박 한마음으로 숭배하기 어려웠는데, 내가 무려 이십 년간이나 즐거이 드라마를 썼단다. 그것도 준비 기간을 치면 한 해도 쉬지 않고. 참 별일이다.

이젠 간혹 내 기억에서조차 지워진 말들을 정리해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조금은 어색하고, 낯설고, 부끄럽다. 내가 한 말들을 내가, 내 삶이 온몸과 마음으로 지켜냈다면 어색할 것도 낯설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겠으나, 말만 해놓고 행동하지 못한 삶이 이러한 민망을 초래하는구나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내놓는 건, 자신에 대한 채찍이다.

나이 오십, 다시 돌아보렴, 노희경, 너를!

웃기는 말이지만, 나는 내가 오십까지 살 줄도 몰랐고, 이십 년 지고지순하게 드라마를 사랑할 줄도 몰랐다. 그저 순간순간 살아지니 살고, 쓰고 싶어 쓰니, 이리 됐다. 이 꼴로 가면 앞날도 훤하다. 지금처럼 멋모르고 살다, 가리라. 어려선 이 나이쯤 되면 뭐든 확연해지고, 내 삶은 내가 쓴 한 줄 대사처럼 꿰뚫어질 줄 알았는데… 기껏 혼란만 인정하는 수준이라니, 사는 게 참 재밌다.

대사를 잘 쓰려 애쓰던 서른을 지나고, 말로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고 싶은 사십의 야망을 지나, 이제 오십의 나는 말 없는 드라마를 쓰고 싶다. 배우의 손길이 그저 내 어머니고, 배우의 뒷모습이 그저 내 아버지고, 배우의 거친 반항이 그저 시대의 청춘들의 고단을 인정해주는. 그래서, 결국 내 드라마에 대사가 다 없어진다 해도 후회는 없겠다.

확신컨대 이 책은 마지막 대사집이 될 거다. 그래야, 중견 드라마 작가로서의 내 꿈이 이뤄지는 걸 테니까. 이 다짐 속에서도 혹여 말로 대변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대사를 쓸 땐,
제발, 노희경, 말이 목적이 아니길, 사람이 목적이길.
입을 닫고 온 마음으로.

2015 겨울, 노희경




'어려선 이 나이쯤 되면 뭐든 확연해지고, 

내 삶은 내가 쓴 한 줄 대사처럼 꿰뚫어질 줄 알았는데… 

기껏 혼란만 인정하는 수준이라니, 사는 게 참 재밌다.'

라는 구절이, '그사세' 6부 지오선배의 내레이션을 환기해서 그랬던 걸까.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산다는 건, 늘 뒤통수를 맞는 거라고.
인생이란 놈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어서 절대로 우리가 알게 앞통수를 치는 법은 없다고.
나만이 아니라, 누구나 뒤통수를 맞는 거라고. 그러니 억울해 말라고.
어머니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니 다 별일 아니라고.
하지만, 그건 육십 인생을 산 어머니 말씀이고,
아직 너무도 젊은 우리는 모든 게 다 별일이다, 젠장.
(그사세 6부 '산다는 것' 지오 N)





'제발, 노희경, 말이 목적이 아니길, 사람이 목적이길.'
이 부분도 정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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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6-02-25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희경작가의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거짓말`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작품이예요..
 

 

 

아무 소리도 없이 말도 없이
등뒤로 털썩
밧줄이 날아와 나는
뛰어가 밧줄을 잡아다 배를 맨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배는 멀리서부터 닿는다

사랑은,
호젓한 부둣가에 우연히,
별 그럴 일도 없으면서 넋 놓고 앉았다가
배가 들어와
던져지는 밧줄을 받는 것
그래서 어찌할 수 없이
배를 매게 되는 것

잔잔한 바닷물 위에
구름과 빛과 시간과 함께
떠 있는 배
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을 떠 있다

- 장석남 <배를 매며> 전문.

 

*

 

네이버 메모앱에 저장되어 있었다.
2014년 11월 9일에 기록해둔 메모였고, 그 즈음에 무슨 책을 읽었나 살펴보니 시집이 한 권 있다.
신현림 작가님이 엮으신 '딸아 외로울 때는 시를 읽으렴 ' 2권.
이렇게 남겨뒀다는 건 정말 좋았다는 것일테고,
이렇게 남겨둔 덕분에 시간이 지나도 좋은 시를 다시 읽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손으로 쓴 구절도 좋지만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 떠 있다'도 만만치않게 좋다.
아니 그냥 이 시 자체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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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고대 그리스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에 그들은 비극을 쓰고, 공연하고, 그것에 열광했을까.

왜 그 빛의 한가운데에서 어둠을 상상했던 것일까.
비극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이해되지 않았다. 다만 그들 모두의 태도는 같았다.

결코 운명 앞에서 구차하지 않았다. 낙담하거나 체념하지도 않았다. 끝까지 의연했다.

바뀔 수 있는 것은 어차피 아무것도 없었다. '운명'이라 그러지 않는가.

신들조차 바꿀 수 없는, 합리적으로 이해되지 않지만 나에게 주어진 나의 '운명'.
그들은 비극적인 운명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다만 그 운명 앞에서 얼마나 고귀하게 사는가, 그리고 얼마나 용감하게 죽느냐,

라는 태도를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었다.


- 김민철, 《모든 요일의 기록》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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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희생자의 가족들은 인천에서 배 떠나던 그 시간을

"영원의 시간"에서 지우고 싶어 잠을 자도 잠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몸서리치는 기억을 누가 지울 수 있겠는가.

예술의 희생보다 세상의 희생이 먼저 있다.

예술이 세상을 낯선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갑자기 낯선 것이 되어버린 사람들을 위해 예술이 있다.

예술에 희생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 희생 뒤에 겨우 예술이 있다.

믿음과 사람이 그렇게 어렵고, 믿음과 사랑이 그렇게 절박하다.

 

 

- 황현산, 우물에서 하늘 보기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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