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잃어버린 슬픔은 저 자신조차 몸이 떨릴 정도로 이상한 것으로, 그것은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습니다. 타인의 억측이 미치지 못하는, 아무런 이유도 발견되지 않는 자살이라는 형태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발을 동동 구를 만한 분함과 슬픔이 가슴속에 서리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분함과 슬픔 덕분에 오늘까지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p.80 환상의 빛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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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모토 테루와는 잘 맞지 않았다.
불호평을 길게 썼다가 다 지우고 이 한 줄만을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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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책들, 책들... 내 집을 내 집이게 하는 책들이 활활 타는 것은 상상만으로 괴로웠다. 접고 표시하고 밑줄 치고 메모해둔 수백 개의 흔적은 다시 같은 책을 산대도 되돌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모든 건 몸뚱이 없이는 아무 소용없기 때문에 우리는 부리나케 집을 떠났다.

(p.51)


"유의미한 일들은 대체로 번거롭지. 그 게임엔 '용기'라는 개념도 있어. 어떤 순간에 깃발을 꽂으면 용기를 발휘할 수 있게 되거든. 이때 인간은 주변 존재들에게 용기를 마구 뿜어서 영향을 미쳐. 신체 능력은 엘프나 드워프보다 딸리지만, 희망이랑 용기가 가득 찼을 때에는 막강해지는 거야."

(p.62)


곽 선생님이 낮은 목소리로 읽어준 임의 글은 문장도 단어도 엉망진창으로 틀린 글이었는데 너무 외로운 이야기여서 나는 난데없이 터지려는 눈물을 참느라 혼났다. 불쌍하다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었다. 그 애의 슬픔이 뿜어내는 광채에 놀란 것이었다. 혹시 글쓰기의 세계에서는 가진 것보다 잃은 것이 더 중요한가. 어른이 되어 읽은 신형철 평론가의 문장처럼 "나의 없음을 당신에게 주는" 것이 글쓰기일지도 몰랐다.

(p.135)


인간은 불행의 디테일을 설명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정확히 불행해지는 존재 같았다.

(p.151)


사실 꽤 많은 편견이 우리를 돕는다. 판단의 시간을 단축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일들은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판단을 좀 미루고 볼 필요가 있다. 세상이 간단하지 않으므로 편견도 뭉툭해서는 안 된다. 차라리 이제 막 태어난 사람처럼 무구하게 세계를 감각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함께 본 영화에서는 이런 내레이션이 흘러나왔다.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깜깜한 영화관에 나란히 앉아 그 말을 들었다. 하마도 울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랑을 하는 동안에는 나쁜 일이 자신을 온통 뒤덮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나쁜 일이 나쁜 일로 끝나지 않도록 애썼다. 우리가 모든 것으로부터 배우고 어떤 일에서든 고마운 점을 찾아내는 이들임을 기억했다. 사랑은 불행을 막지 못하지만 회복의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사랑은 마음에 탄력을 준다. 심신을 고무줄처럼 늘어나게도 하고 돌아오게도 한다.

(p.308-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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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이 될지 모르겠는데, 큼지막한 빵 한 덩어리처럼 보였던 세상이 점점 얇은 겹이 겹겹이 포개진 페이스트리로 바뀌어 보이기 시작했다. 맞아 그래, 이러려고 열심히 소설책에 코를 박는 거였다. 단순해 보이는 세상을 복잡하게 바라보기 위해서. 나의 무심하고 굼뜬 시선으로는 포착해내기 어려운 다양한 인생의 결을 내 안에 겹겹이 쌓아올리기 위해서.

-구달·이지수, 읽는 사이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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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냐 : 바냐 아저씨, 우린 살아야 해요. 길고도 긴 낮과 밤들을 끝까지 살아 가요. 운명이 우리에게 보내 주는 시련을 꾹 참아 나가는 거예요. 우리, 남들을 위해 쉬지 않고 일하기로 해요. 앞으로도, 늙어서도. 그러다가 우리의 마지막 순간이 오면 우리의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여요. 그리고 무덤 너머 저 세상으로 가서 말하기로 해요. 우리의 삶이 얼마나 괴로웠는지, 우리가 얼마나 울었고 슬퍼했는지 말이에요. 그러면 하느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실 테죠. 아, 그날이 오면, 사랑하는 아저씨, 우리는 밝고 아름다운 세상을 보게 될 거예요. 기쁜 마음으로, 이 세상에서 겪었던 우리의 슬픔을 돌아보며 따스한 미소를 짓게 될 거예요. 그리고 마침내 우린 쉴 수 있을 거예요. 나는 믿어요, 간절하게 정말 간절하게.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그의 두 손에 얹고는 지친 목소리로) 그곳에서 우린 쉴 수 있어요.

텔레긴이 나직하게 기타를 연주한다.

소냐 : 평화롭게 쉴 수 있을 거예요. 천사들의 날갯짓 소리를 들으며, 보석처럼 반짝이는 천상의 세계를 바라보면서요. 모든 악과 고통은 온 세상을 감싸는 위대한 자비의 빛 속으로 가라앉게 될 거예요. 그날은 평화롭고 순수하고 따스할 거예요. 난 믿어요. 굳게 믿어요. (눈물을 닦는다) 불쌍한 바냐 아저씨, 울고 계시군요. (흐느낀다) 아저씨는 평생 행복이 뭔지 모르고 살아오셨죠. 하지만 기다려요, 바냐 아저씨, 기다려야 해요. 우리는 쉴 수 있을 거예요. (그를 껴안는다) 쉴 수 있어요.

야경꾼의 딱따기 소리가 들린다.

텔레긴이 나직하게 기타를 연주한다. 마리야는 소책자 여백에 무언가를 적고 있다. 마리나는 양말을 뜨고 있다.

소냐 : 쉴 수 있어요.

ㅡ막ㅡ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바냐 아저씨 4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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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런데 왜 더 자주 만나지 않고 일주일에 한 번만 보느냐고 누군가는 물을지도 모르겠다. 왜 세상의 더 많은 부분을 함께 받아들이고 매일 서로 시시콜콜 잡담하며 안락함을 찾지 않느냐고 말이다. 문제는 우리 둘 다 부정적인 쪽으로 기울어 있는 사람들이라는 데 있다. 어떤 상황에서든 우린 영원히 컵에 물이 반밖에 없다고 느끼는 인간들인 것이다. 상실, 실패, 패배를 그가 드러내든 내가 드러내든 꼭 한 명은 그러고 있다. 어쩔 수가 없다. 우리도 좀 달라지고 싶지만 어찌됐건 우리가 느끼는 삶이라는 게 그러니까. 그리고 삶을 느끼는 방식은 결국 삶을 살아낸 방식일 수밖에 없다.


-비비언 고닉, 짝 없는 여자와 도시 p.8


엄마는 아빠와 결혼했을 때 영혼에서 모호함이라는 먹구름이 걷혔다고 했다. 엄마는 그렇게 표현했다. 모호함이라는 먹구름. 너희 아버진 마술 같은 사람이었지. 눈길, 손길, 그리고 날 이해해주는 게 그랬어. 엄마는 이 문장을 끝맺을 때쯤 몸을 앞으로 숙였다. 이해는 부적 같은 단어였다. 엄마 말로는, 이해를 받지 못하면 당신이 살아 있는 건지 알 길이 없었고 이해를 받으면 마음이 정돈되며 세상에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비비언 고닉, 짝 없는 여자와 도시 p.63



에마와의 우정에 금이 가기 시작하자 영원한 친구 따윈 없으며 오직 영원한 이익만이 있을 뿐이라던 윈스턴 처칠의 말이 떠올랐다. 물론 처칠은 세계를 향한 야심이 개인 간의 충실한 마음을 짓밟는다는 뜻으로 한 말이란 걸 알지만, 그래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처칠은 틀렸고, 영원한 이익 같은 것도 없다고. 나와 에마의 관계를 무너뜨린 건 수시로 모습을 바꾸는 우리 자신의 ‘이익’에 대한 배반이었다.

우리 내면세계는 유동적이고 불안정하며 변덕스럽고 언제나 전환 중인 상태라고, 윌리엄 제임스가 말했다. 그는 그런 전환들 자체가 바로 실제라고 생각했으며 경험이란 “그 수많은 전환 속에서 사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납득은 고사하고 이해하기도 쉽지 않은 깨달음이지만 분명 설득력이 있다. 정서적 공감에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런 변화가 일어나 평범한 날 아무 때고 결혼이나 우정, 혹은 업무 관계가 ‘돌연’ 정말로 끝장나버리는 일을 어떻게 달리 설명할 수 있을까?

-비비언 고닉, 짝 없는 여자와 도시 p.85-86



작년에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책을 읽었다면, 올해는 비비언 고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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