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해 성찰하고 세상을 떠나기에 앞서 주변을 정리하는 데는 여러 가지 길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화장되어 바다에 뿌려지기를 원하고, 어떤 사람은 관 속에 넣어 매장되고 싶어합니다. 이 외에도 자신의 죽음과 장례식에 대해 생각할 거리는 많습니다. 친지들에게 이 어려운 결정들을 떠넘기지 않으려면 아직 힘이 남아 있을 때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가까운 사람에게 본인의 바람을 이야기하거나 서류로 작성해두는 것이지요. 데스클리닝이란 이렇게 그냥 실용적인 행동을 하자는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데스클리닝을 시작하고, 이 행위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벌어줄 시간을 생각하며 기뻐하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데스클리닝을 하면 그들은 원하지 않은 물건을 처리하느라 소중한 시간을 쓰지 않아도 되니까요.
나는 내 데스클리닝을 얼추 마치고 나면 대단히 흡족하고 행복할 것 같습니다. 여력이 된다면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도 좋고, 나 자신에게 꽃다발을 선물하고, 친구들을 몇 명 초대해 근사한 저녁밥을 대접하며 임무 완수를 축하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도 죽지 않는다면 쇼핑을 나갈 생각입니다. 다시 한 번 말이에요!
(p.189-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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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을 하고 살을 뺀다는 것이 외모에 대한 편견에서 도망치는 것인지 편견과 맞서 싸우는 것인지 자주 헷갈린다. 남의 눈에 들려고 하는 건지 나에게 나를 잘 보이기 위한 건지도 잘 모르겠는 때가 많다. 하긴 나에게 잘 보이고 싶은 나도 어차피 타인의 눈을 거치기 마련이다. ‘내 안에 너 있다‘는 대사처럼 타자는 다양한 모습으로 내 안에 존재한다. 나와 타자의 경계는 명확히 그을 수 없다.
지름신 때문에 행거에 걸린 옷이 늘어날 때마다 나는 누구의 어떤 눈으로 나를 보고 있나 생각하게 된다. 아름답다는 말의 어원 중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자기답다‘라고 한다. 지름신에 들려 산 내 옷, 저 옷들은 나다운 것일까? - P26

다시 운동을 시작한 날, 막 입학한 새내기의 설렘으로 체육관에 들어섰다. 높은 사다리 위에 올라 전구를 갈고 있던 나이스가 활짝 웃었다. 다시 만나게 돼 반갑다고 했다. 당분간은 살살 걷기만 하라고도 했다. 나는 트레드밀을 시속 3.5킬로미터로 걷는 달팽이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아무리 느려도 나는 움직이고 있다. 다시 움직인다는 것이 즐겁기만 했다. 분홍 신을 신고 무대에 오른 발레리나처럼, 운동화를 신고 나는 것 같았다. 나는 뭔가를 몸에 새긴 것이다. 몸에 새긴다! 이 말이 참 좋다. - P34

나는 이걸 내 방식으로 이해했다. 글을 쓸 때 ‘은/는, 이/가‘라는 조사 중 어떤 걸 쓰느냐에 따라 문장의 느낌이 미묘하게 달라진다. 조사를 잘못 썼을 때는 내가 전달하려던 것과 전혀 다른 느낌이 전달되곤 한다. 나는 ‘지금 취하려는 자세가 조사 고르기처럼 까다로운 것 같다‘고 했다. 나이스는 맞장구쳤다. "맞아요. 글 쓸 때 조사가 중요한 것처럼 운동할 때도 조사를 중요하게 여기세요." - P51

아틀라스처럼 일로 힘을 쓰는 것만이 아니라, 헤라클레스처럼 쓰는 힘도 필요하다. 일이 아닌 데다 에너지를 들이는 것, 사람들은 그런 것을 가리켜 흔히 사치라 한다. 그러나 어디 삶이 필수품만으로 이루어지는가. 살아가려면 간혹이라도 사치품이 필요하다. 여유와 틈을 ‘사치‘라고 낙인찍은 건 아닐까. 그렇게 사치라는 말은 ‘분수를 지켜라‘ 하는 말로도 바뀌어 우리 삶을 단속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필요해서가 아니라 즐거워서 힘을 쓰는 일이 사치라면, 난 내 힘을 하늘을 들어 올리는 데 쓰는 사치를 마음껏 부릴 것이다. - P60

그런데 그 지루함이 반전이 되기도 한다. 나는 운동신경이 아주 둔한 사람이라 할 줄 아는 운동이라곤 하나도 없다. 미련할 정도로 꾸준히 버티는 건 잘한다. 느리더라도 자기 속도로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묵묵히 갈 수 있다는 데 피트니스의 매력이 있다. "어리석은 자가 그 어리석음을 고집하다 보면 현명해진다"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구처럼 말이다. - P81

게다가 나이스에게는 열정이 넘친다. 나이스는 이 운동과 이 일이 너무나 좋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하던 사람이다. 열정을 연기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표정, 말투였다. 나에게도 그렇게 느껴졌다. 그런데 ‘열정노동‘이라는 말이 괜히 생겼겠는가. 이 세상은 자기 일을 아끼고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로 돌아가야 건강하다. 열정에 화답하는 건 응원이어야 한다. 그러나 열정에 초를 뿌리기 일쑤다. ‘네가 좋아서 하는 거잖아.‘ ‘네가 원하는 일 하는데 이 정도도 못 버텨?‘ 이런 말들로 악조건을 정당화한다. 이 조건을 달게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버티지 못하면 내 열정이 부족한 탓으로 돌리도록, 자기를 학대하도록 내몰기도 한다. 그게 열정노동이다. 버티다보면 괜찮아질까? 감정노동과 열정노동이 과연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근육을 만들어주는 것일까? - P90

피곤에도 맥락이 있다. 내 몸에 안개처럼 뿌연 거미줄이 둘러쳐져 있고, 거기 붙잡혀서 헤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릴수록 더 묶이는 것 같은 기분이 있다. 땅 밑에서 무서운 손이 끌어당기는 기분 같기도 하다. 사우나에서 땀을 빼거나 아무리 오래 깊이 잠을 자도 이런 피곤함에서 헤어날 수가 없다. 이런 피로가 아니라 노곤하게 노을처럼 스미는 피곤도 있다. 이런 기분을 느끼게 되는 건 참 좋은 일이다. 피곤의 맥락이 달라지니 감정 조절이 쉬워졌다. 내가 뾰족하지 않고 너그러워지면 주변 사람들도 악마에서 요정으로 변신한다. 그리고 악마를 만난다면, 튕기고 반박할 기운이 생긴다.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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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수는 사람과 거리를 두는 것처럼 보였지만 적극적으로 물어보면 의외로 선선히 대답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나는 은수가 연신내에 산다는 것, 연신내의 그 집은 겨울이면 비탈길이 꽝꽝 얼어서 차는 물론이고 사람도 올라가기 힘든 곳에 있는데 해마다 누군가가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 밧줄을 백 미터도 넘게 묶어놓아서 그것을 잡고 사람들이 오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은수는 그 광경이 좋아서 어쩐지 겨울을 기다리게 되지만 아직 눈이 내리지 않았으므로 지금은 매어놓지 않았다는 것도. 그런 게 왜 좋아, 그게 왜, 하고 물으니까 은수는 재밌잖아요, 했다. 붙들 것이 있다는 게 누나는 재미있지 않아요? - P48

내가 그동안 누렸던 것들이 아쉬워서는 절대 아니었다. 다만 우리가 로커룸에서 머리를 맞대고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다시 거기에서 나와 모두 잠든 사이 택시를 잡아타고 서울을 누볐던 그 시간들이 뭔가 특별하고 소중한 것이 아닐까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가 특별해질 수 있었다면 그것이 멈춰져야 하는 데도 일종의 합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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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칭 하나만 해도 그래. 영어는 ‘나‘도 ‘저‘도 전부 ‘I‘지. 그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 평소 흔히 하는 말도 편지에서는 왜 좀더 격식을 차릴까? 평소에는 ‘그대‘라고 부른 적도 없고 ‘당신‘이라고 불린 적도 없어. 이모와 이모부 편지를 따라서 시작한 거지만 편지 속에서 ‘당신‘이라고 불리는 게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해.
솔직히 당신이 편지를 써달라고 했을 때는 메일이 어때서 싶었어. 무엇보다 나는 달필이 아니야. 직업상 남들 앞에서 글씨를 쓰기는 하지만 칭찬받은 적이 한 번도 없거든. 기본적으로 메일로 보내고 편지는 반년에 한 번만 보내야지 하는 생각도 했어. 하지만 부임하자마자 정전이야. 당신하고 연락하려면 편지를 쓰는 수 밖에 없어.
그게 지금은 전화선이 복구돼도 메일은 최대한 피하고 당신하고 주고받는 편지를 즐기려 해.
메일로는 ‘당신‘이라고 불러주지 않겠지? 편지이기 때문에 가능한 표현이 있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어.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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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내리는 자세로
엄청나게 견디고 있다
이번 삶이 날 터뜨리진 않았지만
자꾸 쏘아올릴 것 같아서

- 권민경 시집 《베개는 얼마나 많은 꿈을 견뎌냈나요》,
<몸과 마음의 고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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