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나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 - 마음속에 새기고 싶은 인생의 키워드 20
정여울 지음, 이승원 사진 / arte(아르테)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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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의 지난 에세이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이 가슴속에 품어야 할 청춘의 키워드 20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두 번째 이야기 그때, 나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은 마음속에 새기고 싶은 인생의 키워드 20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서툴러서 상처밖에 줄 수 없었던 나의 20대에 사과하는 시간을 지나, 그래도 눈부신 그대에게 보내는 이야기.

 

PART 1 ,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 걸까 : 나이/ 소개/ 포기/ 선택/ 독립

PART 2 외로움 앞에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 : 관계/ 자존감/ 소외/ 상처/ 걱정

PART 3 일상에 여백이 필요한 순간들 : 습관/ 직업/ 기다림/ 생각/ 우연

PART 4 평생 후회할 일을 저지를 때, 비로소 어른이 된다 : 순간/ 이기심/ 용기/ 후회/ 균형

 

책은 이렇게 네 파트로 나뉜다. 나는 먼저 프롤로그를 읽고, 다시 목차로 돌아가서 가장 마음이 가는 키워드부터 읽어 보기로 했다. 20개 중에 1개를 고르는 일이니, 1개에 내 심경이 반영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목차를 들여다보던 내가 고른 하나의 키워드는 포기였다. 포기를 선택한 것을 처음에는 부정했다. 많고 많은 키워드 중에 포기라니. 호기심에 선택한 것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막상 책을 읽기 시작하니, 지금의 내 심경에 가장 가까운 키워드가 포기였음을 깨달았다.


포기할 수 있는 지혜를 배우고 나니 인생은 더 크고 넓고 다정해졌다. 눈부신 희망보다는 허심탄회한 포기가 차라리 나을 때가 있다. 아주 가끔은 포기가 희망보다 더 아름다울 때도 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철들기 시작한다. 나는 무엇보다도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 남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강박을 버릴 때 진정한 만족감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게 됐다.

물론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들도 있다.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 새로운 모험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 누군가를 간절히 그리워할 수 있는 마음 같은 것들은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당신이 무언가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타인의 시선때문이라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포기하지 못하고 붙들고 있는 그것이 정말로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것인지를.

자유를 위해 포기할 수 있는 것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 그것이 우리의 남은 삶을 결정할 것이다. (p.66)

 

정여울 작가님의 글을 좋아하고 찾아 읽는 이유 중 하나는, 작가님의 생각과 더불어 작가님이 읽은 좋은 책의 구절을 함께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포기꼭지에서도 포기에 관한 책 이야기를 넣으려면 얼마든지 넣을 수 있었겠지만, 오롯이 작가님의 이야기가 담겨서 더 와 닿지 않았나 싶다.

 

포기를 시작으로, 키워드 하나하나를 지금의 내게 대입해서 생각하느라 이 책을 읽는 시간이 제법 걸렸다각각의 단어에 관한 작가님의 깊은 생각과, 생각을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좋은 글과, 책을 읽고 생각하는 중간 중간 쉬어가라고 자리를 내어주는 것 같았던 좋은 사진들.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 건지 매일 고민하고 망설이는 나에게, 이 자리를 빌려 이 말을 해주고 싶다.

외롭고 불안한 이때, 이다지도 든든한 책을 읽어서 다행이다." 라고 말이다.

 

 

 

* 인상 깊었던 구절이 정말 많은데, 하나의 구절만을 덧붙이라면 이 구절을 덧붙이고 싶다.

 

다시 열네 살로 돌아간다면, 열네 살의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해주고 싶나요.” 여성들끼리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미국의 한 토크쇼를 보다가 문득 이 질문이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여성들은 지금은 알지만 그때는 몰랐던 것들’, 그래서 더 가슴 아프고, 그래서 더 짠한 과거의 자신을 향해 따뜻한 위로의 말을 전해주었다.

열네 살의 나에게, ‘넌 분명 잘해낼 거야, 이제 걱정과 두려움일랑 그만 접어둬!’라고 말하는 여성들의 표정 속에는, 겁많던 소녀 시절의 나약함에 대한 후회와 이제는 좀 더 씩씩해진 자신을 향한 자존감이 깊게 배어 있었다. 제인 폰다는 열네 살의 자신을 만날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고 한다.

 

It's good to say 'No'.

‘아니오’라고 말해도 괜찮아.

 

(p.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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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 왔지만
다카기 나오코 지음, 고현진 옮김 / artePOP(아르테팝)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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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살기 시리즈로 입문했던 다카기 나오코의 만화. 한 권 두 권 챙겨 읽다보니 벌써 8권을 읽었다. 그림의 자도 어려워해서 그저 꿈만 꾸고 있는, 일상 만화에 대한 로망을 다카기 나오코의 만화를 보며 채우는 게 아닐까 싶다. 먹방 만화도 있고, 실용 만화(얼렁뚝딱 홈메이드)도 있지만 다카기 나오코 만화의 매력은 역시 일상 만화라고 생각한다.

 

특히 최근에 읽은 2권의 책 우리집 무쿠, 못 보셨어요?효도할 수 있을까?에 혼자살기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서, 다카기 나오코의 자취 이야기를 다시금 궁금해 하던 차에 이 책 도쿄에 왔지만을 접했다. 고향집에서 상경을 결정하고, 준비하고, 올라와서 살림을 꾸리고, 전철을 타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고향에서 올라온 가족을 맞이하는 진짜 상경 이야기다.

 

진짜 상경 이야기에 빠질 수 없는, 깨알 같은 이야기들에 눈이 갔다.

도쿄로 갈 용기는 없었고, 시간만 허비하고 있던 때에 집 근처에 있는 이삿짐센터에서 하게 된 알바. 다른 이들의 새로운 출발을 보고 있으니, 자신도 무언가를 새로 시작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상경을 결심한 이야기.

휴가를 맞아 딸의 도쿄 집을 방문한 아빠. 그런 아빠가 작고 썰렁한 방을 보면 깜짝 놀랄까, 급하게 방석도 사고 제대로 된 컵도 사고 장식용으로 화분도 마련해두는 딸. 아빠의 눈에는, 안테나 연결이 안 되어서 화면이 이상한 TV와 햇빛이 많이 드는 창이 눈에 든다. 그 자리에서 TV를 손 보고, 대나무발을 사와 창에 달아주고, 무거운 10kg짜리 쌀도 사다 두고, 돌아가는 길에 용돈을 쥐어주는 아빠.

 

어른이 되고 나서 부모님께 받는 용돈은, 고맙기도 하고 죄송하기도 한 복잡한 기분이 들게 했어요. 아빠가 떠나고 또 다시 혼자만의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잠깐이지만 내가 도쿄의 작은 집에서 자취를 하는 딸이 된 것만 같았다. 먹먹했던 아빠의 상경도 잠시, 아빠가 떠나고 또 다시 혼자만의 생활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도 현실감이 느껴져서 좋았다.

 

챕터마다 끝에 행복 in 도쿄라고 해서, 도쿄에서의 자취 생활 속 행복을 한 컷으로 담아내는데 이걸 챙겨 읽는 재미도 쏠쏠했다. 고향에 비해 미혼 비율이 높다거나, 시설이 다양하고 풍부해서 어딜 가야 할지 고민된다거나, 텔레비전이나 잡지에 소개되는 가게가 직접 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깝다는 이야기의 만화를 보고 있으면 잘 모르는 도쿄가 어쩐지 가까운 기분이 들었다.

 

도쿄에 왔지만 일러스트 일은 쉽지 않고, 전철 노선은 너무 복잡해 미로 같고, 알바비는 집세, 식비, 연료비 같은 생활비로 순식간에 사라져서 화려한 도시의 불빛을 즐기기에는 돈이 턱없이 모자른 나날. 제대로 되는 일은 없고,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가 후회한 적도 있었던 도쿄에서의 생활. 전시회를 보기 위해 나란히 도쿄를 찾은 가족들. 그런 가족들을 보며 작가님은 이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제가 도쿄에 온 것으로 제 인생도, 저와 인연을 맺은 사람의 인생도, 이렇게 조금씩 함게 변해가는 거겠죠...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조금 더 이 도시에서 열심히 살아 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도쿄에 온 의미가 조금은 선명해진 순간. ‘도쿄에 왔지만은 그렇게 도쿄에 와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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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실점
김희재 지음 / CABINET(캐비넷)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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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에 한 실종 사건이 보도된다. 실종 사건의 중심에는, 지명도로 치면 대통령과 유재석 다음으로 유명하다는 KBS 9시 뉴스 여자 앵커 최선우가 있다.

 

그런 최선우가 교외 외딴 집에서 알몸의 변사체로 발견된다.

 

확인하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최선우 맞습니다.”

 

이 형사의 보고에 수화기 너머에서 서장은 숨을 몰아쉬었다.

수도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력 범죄 발생율이 낮은 지방 소도시의 경찰서장. 기껏해야 조폭들의 난투극이나 서울에서 도망친 강력범들을 추적하는 광수대의 수발을 드는 게 전부였는데, 전 국민이 가장 집중하고 있는 사건 피해자의 시체가 관할 구역에서 나온 것이다. 아나운서 최선우의 시체라니...! (p.25)

 

당대 최고 아나운서가 강간 살해된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은 발칵 뒤집히고, 강력부의 유능한 검사 강주희가 사건의 수사를 담당하게 된다.

 

용의자로 검거된 이는 최선우가 변사체로 발견된 집의 주인인 미술교사 서인하. 검찰청에서 주희를 대면하게 된 서인하의 첫 마디는 증거대로, 사실만 갖고 나 기소할 수 있을까요?”였고, 이어지는 두 마디는 강렬했다. 나는 최선우 섹스 파트너였어! SM! 사도마조히즘 커플이었다고, 우리가!”

 

최선우가 세상에 알려진 고상한 이미지와 달리 SM 취향의 섹스를 즐기는 변태적 성향의 여자였다고 주장한 것이다.

 

매일 저녁 같은 시간 대한민국 인구 가운데 1500만 명 정도 되는 사람들에게 자기 얼굴을 보여 주는 여자가, 그 긴 시간 동안 카메라 앞에서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진 적 없는 여자가, 수천 개의 단어로 구성된 문장을 읽는 동안 발음 한 번 꼬였던 적이 없는 여자가, 자기 등 한복판에 속눈썹이 붙었대도 다른 사람보다 자기가 먼저 알아차리고 자기 손으로 뗀다고 말해도 믿어질 것 같은 여자가, 머리채를 휘어잡혀 바닥에 패대기쳐지고 남자에게 섹스를 해달라고 구걸하다가 개 같은 년이라는 욕을 먹으며 그것을 즐겼다는, 그 여자가 그것을 위해 자신의 발아래 무릎 꿇고 구걸했다는 말을 믿으라는 것인가. (p.75)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이야기였으나 타살이라는 명백한 증거는 없는 상황 속에서, 서인하의 일관된 진술과 이를 입증하는 증거들은 수사를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그러던 중, 우연히 발견된 하나의 증거는 사건을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시키는데...

 

 

스포일러가 있다는 말은 그 자체로 스포일러지만, 난 저 문장 때문에 이 책이 궁금했다. 강렬한 사건 속에서,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시키는 하나의 증거라. 어떤 증거일지, 그리고 그 끝에는 어떤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했다.

 

 

앞으로 하는 이야기는 스포일러를 거르지 않은 이야기라, 스포일러를 피할 분들은 여기까지만 읽어주시면 좋겠다.

 

   

 

이 소설에 대해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이 소설의 제목인 소실점에 관한 이야기다.

 

소실점, 을 아세요?”

 

2차원의 평면에 원근법과 입체감이 살아 있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기준이 되는 선을 연결하는 방법. 그 정도의 상식을 가진 주희에게 서인하는 조용히 그림을 그리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소실점을 하나로도 할 수 있고, 둘로도 할 수 있고, 셋으로도 할 수 있습니다. 소실점 하나로는 소실점 셋을 써야만 그릴 수 있는 높은 빌딩 같은 것을 그릴 수 없죠. 어렸을 때, 처음으로 이 개념을 알고 난 후 너무 신기해서, 보이는 모든 걸 소실점 찍고 그려보고 혼자 감탄하고 그랬습니다.” (p.276)

 

사건을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시킨 하나의 증거는 서인하가 비단 최선우 사건의 범인이 아닌, 연쇄 방화 살인범이라는 증거였다. 그리하여 그는 최선우를 살해, 시신을 방치한 상태에서 다음 살인 계획을 실천하고 있었던 범죄자가 되었다.

 

서인하는 묵비권으로 일관했고, 판사는 검사의 구형을 그대로 언도했다. 사형.’

 

사건이 종결되고 새롭게 맡은 사건에 매달리면서 주희는 이제 정말 온전하게 그녀를 보내고 서인하를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인하가 수감 중인 청송교도소에서 연락이 왔다. 5892번, 서인하가 강주희 검사를 뵙고 싶어한다는 연락이었다.

 

서인하를 만나기 위해 찾은 청송교도소에서 주희는 사건의 진실을 듣게 된다.

 

저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서인하를 연쇄 방화 살인범으로 몰았던 그 증거는 사실 조작에 관한 증거였다. 서인하 자신이 연쇄살인범이 될 수 있도록 만든 증거.

사고였는지, 정말 죽기로 작정하고 손을 놓은 건지는 여전히 자신도 모르고, 자신이 최선우와 연인이었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다만 자신이 최선우를 사랑한 것은 분명하다고 서인하는 말했다.

 

남들에게 보여지는 자신의 완벽한 모습과, 자신의 본질에 대해 오래 고민하고 괴로워했던 최선우. 그녀의 선택 끝에서 서인하는 준비해왔던 소실점을 찍는다. 증거를 조작하고, 용의자로 지목되고, 묵비권을 일관하여 끔찍한 사건의 범인이 되기로 자처하는 소실점을 말이다.

 

저는 최선우를 똑바로 보기 위해 매 순간 새로운 소실점을 찍고, 제 위치를 바꿔가며 그녀를 보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있는 자리에서 결코 움직이지 않고, 자신이 한 번 찍은 소실점에 변동 없이, 그 구도 안에 선우를 밀어 넣은 사람들은 보지 못했던 모습을, 저는 그래서 볼 수 있었고, 저는 그래서” (p.277)

 

유일하게 최선우의 본질을 알아봤던 남자, 서인하. 숨을 쉬고 싶어서 그를 찾았던 여자, 최선우.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온전하게 해주지 않은 여자를 위해 자기 인생에 허락받은 모든 것을 걸어버린 남자. 그가 뒤늦게 밝힌 진실이라는 소실점 앞에서, 그 사랑의 깊이에 대해 생각하고 있으면 그는 주희에게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 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제가, 사랑한 거니까요.”

 

 

최선우를 몰아넣었던 편견이라는 소실점, 그리하여 최선우가 괴로워했던 가면이라는 소실점, 그런 그녀를 위해 범죄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남자의 치밀했던 조작이라는 소실점. 이 모든 소실점의 끝에는 사랑이 걸려있었고, 나는 그 소실점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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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사유의 시선 - 우리가 꿈꾸는 시대를 위한 철학의 힘
최진석 지음 / 21세기북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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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를 해로만 보거나 달을 달로만 보는 분열된 삶에서 벗어나 해와 달을 동시적 사건으로 장악하는 활동성[]을 통해 아직 이름 붙지 않은 곳[]으로 건너가는 도전을 감행하고자 세워진[] 인문-과학-예술 혁신 학교 건명원(建明苑)의 초대 원장이자,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최진석 교수님의 이번 책 탁월한 사유의 시선은 교수님이 건명원에서 진행한 다섯 차례의 철학 강의를 묶은 책이다.

 

버리고, 이끌고, 홀로 서고, 참된 나를 찾고 문답을 공유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이 철학 강의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이야기는 1강에 나온다. 문화, 사상, 철학의 힘에 대해 이야기하는 ()’에 관한 부분이었다.

 

우리는 보통 일상생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한번 철학적으로 접근해보자” “넌 항상 문제를 철학적으로 이야기해” “이건 너무 철학적이야등등의 표현을 씁니다. 그런데 우리는 철학적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그 말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을까요?

- 최진석 탁월한 사유의 시선p.94

 

교수님은, 자신이 철학을 전공했지만 이 말뜻을 제대로 이해한 것은 대학원 석사 과정을 마치고도 몇 년이 지났을 때인 것 같다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자신이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철학적인 높이의 시선이 일반화되지 않은 문화권에서 이 말을 일상적으로 제대로 사용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고 덧붙인다.

 

여기서 익숙한 회사가 등장하는데, 그 이름은 레고(LEGO).

    

전통의 완구 회사 레고는 1990년대 들어 점차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어린이 고객들은 레고보다 비디오게임기에 더 몰두하는 것처럼 보였다. 레고는 아이들은 이제 전원만 켜면 바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장난감을 더 좋아한다고 분석하고, 비디오게임 시장에 뛰어들었다. 또 조립하지 않고도 바로 가지고 놀 수 있는 쉬운 장난감을 많이 만들었다. 그런데 결과는 참담했다. 2004년 레고는 사상 최대 규모 적자를 냈다.

 

 

레고는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덴마크의 한 컨설팅 회사를 찾아가서 해결책을 구하게 된다. 그 회사는 고객이 가져온 문제를 우선 철학적인 문제로 바꾸어서 접근하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레고는 원래 아이들은 어떤 장난감을 좋아할까?’라는 질문을 붙들고 있었는데, 그 컨설팅 회사의 조언에 따라 기존 질문을 다음과 같은 철학적 질문으로 바꾼다. ‘아이들에게 놀이의 역할은 무엇인가?’ ‘아이들에게 놀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말이다.

 

레고는 이 철학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아이들을 직접 관찰하고 인터뷰하고 따라다니면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아이들은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제공된 즐거움도 좋아하지만, 오랜 시간을 투자하여 어려운 기술을 익히고 이를 자랑하는 것에서도 큰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을.

 

그래서 레고는 이때부터 힘도 더 들고 시간도 더 오래 걸리지만, 스스로의 성취감을 느끼게 해줄 수 있는 장난감인 블록 장난감을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아이들이 세계에 대한 창의적 활동에 직접 참여하려 한다는 철학적 발견이 이룬 결과다.

 

탁월한 사유의 시선을 집중이 잘 되는 곳에서 읽겠다며 찾아 들어간 북카페에서 레고 : 어떻게 무너진 블록을 다시 쌓았나를 발견하고 꺼내 읽게 된 것은 인연이었다. 전엔 그저 레고의 경영에 관한 서적으로만 생각하고 지나쳤는데, 탁월한 사유의 시선을 읽고 나니 레고의 철학적인 높이의 시선이 어떠했기에 회사를 살렸고, 지금의 레고가 된 것인지 궁금해진 것이다.

 

당연하게도 레고는 이와 같은 철학적 접근만으로 무너진 블록을 다시 쌓은 것은 아니었다. 허나 분명한 건, 무너진 블록을 다시 쌓은 첫 블록은 철학적 발견에 있었다. 여기에, 장난감이라는 나무에서 놀이라는 큰 숲으로 시선을 돌려 아이들의 창의적 활동에 집중했던 레고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레고가 이룬 결과를 실감하게 된 건 지난 1월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브릭 라이브 인 코리아에서 레고를 맞추는 아이들을 보면서다. 전시 공간은 크게, 며칠에 걸쳐 만들었을 큰 레고 작품들을 전시해둔 공간과 빨간색이면 빨간색, 하얀색이면 하얀색 색깔별로 블록을 모아두고 원없이 맞출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전시를 잠깐 둘러보고, 이내 후자의 공간에 옹기종기 앉아있었다. 보라색 블록으로 가득한 곳에서는 보라색 집을 지었고, 초록색 블록으로 가득한 곳에선 성을 높이 쌓아올렸다.

크기가 맞는 블록을 찾기 위해 내내 고개를 숙이느라 힘도 들고, 오랜 시간이 드는 놀이이지만 블록으로 만든 자신의 작품을 완성했을 때의 그 뿌듯함, 그 성취감은 그 어떤 게임이 줄 수 없는 것임을 아이들을 보면서 다시금 깨달았다. 일상에서 철학적인 높이의 시선을 느낀 순간이었다.

 

이 경험이 내게는 너무 인상 깊었던 나머지 레고 이야기만 하고 말았는데, 정말 재미있는 책이었다. 일단 잘 읽혔다. 강의를 묶은 책이라 그런지 철학이 여전히 낯선 내게는 책장을 술술 넘기게 만드는 가독성이 좋은 책이었다.

1강에서 철학이 우리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맡아왔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산업혁명으로 시작해서 동아시아의 역사 발전에 관한 이야기가 언급되는데, 새삼 세계사가 이렇게 재밌었나 싶었다. 세계사에서 철학의 역할이라는 주제를 덧붙이니 이렇게 재밌을 수가 없는 거다. , 책 곳곳에 언급된 공자, 장자, 순자 등 동양 철학 역시 굉장히 흥미로웠다. 내게 동양 철학이라 하면 중-고등학생 시절 배웠던 윤리 교과서 속 화석 같은 철학이었는데, 철학 강의 중간 중간에 장자의 한 구절, 순자의 한 구절을 읽으면서 고여 있지 않고 계속해서 흐르는 물과 같은 철학임을 느꼈다. 무엇보다 이 책을 통해 내가 얻은 것은, 철학에 대한 전반적인 내 생각이 트였고 공부해보고 싶다는 욕심을 가지게 된 일이 아닐까.

 

가치의 결탁물로 되어 있는 자기를 장자는 로 표현하고, 이 가치의 결탁을 끊고, 즉 기존의 자기를 살해하고 새로 태어나는 자기를 로 새겼습니다. 가치관으로 결탁되어 있는 자기를 살해하지 않으면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드러날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자기살해를 거친 다음에야 참된 인간으로서의 자신이 등장합니다. 이 참된 인간을 장자는 진인眞人이라고 합니다. 흔히 말하는 무아無我라는 표현도 글자 그대로 자신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참된 자기로 등장하는 절차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무아라는 말은 진아眞我라는 말과 같아집니다. 진인으로 새롭게 등장한달지 진아로 우뚝 서는 일을 다양하게 표현하는데, 그것을 반성이라고도 하고, 각성이라고도 하며, 깨달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자기살해 이후 등장하는 새로운 ’, 이런 참된 자아를 우리는 비로소 독립적 주체라고 하는 것이지요.

- 최진석 탁월한 사유의 시선p.244

 

자기를 살해하고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드러나는 일은 어쩌면 멀리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 같은 강의를 듣고, 책을 읽는 것 역시 자기 살해이며,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드러나기 위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아주 쉬운 방법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분명한 건, 이 책을 읽기 전의 나는 가치의 결탁물로 되어 있는 였으나 이 책을 완독한 뒤에 새로 태어나는 자기인 는 아니라는 것.

 

진아珍我인 내가, 위에서 말하는 진아眞我가 되기 까지는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까. 앞으로 걸어갈 길이 퍽 아득하지만 기분이 좋다. 나는 이제 한 걸음 뗐고, 모르긴 몰라도 시작이 반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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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랑할 용기 - 인간관계를 둘러싼 88가지 고민에 대한 아들러의 가르침
기시미 이치로 지음, 홍성민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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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니 이 책의 표지에 실린 책을 전부 읽었다.

 

미움 받을 용기로 아들러 심리학에 입문했다면 행복해질 용기로 복습하는 시간을 가졌고, 이 책 나를 사랑할 용기에 이르렀다.

 

아들러 심리학에 관한 책들이 다 비슷비슷해 보이고, 비슷비슷한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뜯어보면 느낌은 제각각 다르다. 공통점이 있다면, 아들러 심리학에 관한 일본의 제1인자인 기시미 이치로가 저자라는 것.

 

미움 받을 용기는 그런 기시미 이치로의 명해석을 작가 고기 후미타케와 힘을 합쳐 쓴 책으로, 청년과 철학자의 대화 형식을 취해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을 보다 쉽게 풀어낸 책이다.

행복해질 용기는 원인 분석에 얽매인 통속적인 행복을 넘어 바로 지금부터 행복해지기 위한 지침을 제시하는 책이다. 한 권을 온전히 완독하기에 부담 없는 분량과 아기자기한 구성이 눈을 사로잡아서, 아들러 심리학을 복습하기에 안성맞춤인 책이다.

 

아들러 심리학에 관해 책을 읽다보면, 이걸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써먹어 볼 것인가 하는 생각이 자연스레 생기곤 한다. 자신에 대한 불안에는 아들러 심리학을 어떻게 적용해서 다스릴 것인지, 직장 스트레스와 노후에 대한 불안은 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하는 것들을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책을 쓴 기시미 이치로에게 물었고, 국내외 강연 및 상담을 통해 받은 질문들이 꽤 쌓였다. 그중 호응이 높고 공감을 불러일으켰던 것들을 엄선하여 수록한 책이 나를 사랑할 용기. 내 이야기 같다 싶은 것도 있고, 내 친구 혹은 내 가족의 이야기 같기도 한 88가지 고민. 자신에 대한 불안, 친구와의 갈등, 피하고 싶은 인간관계, 공부와 진로, 직장 스트레스, 연애 감정의 불확실함, 결혼이 주는 상처, 육아의 어려움, 가족 간 갈등, 노후에 대한 불안이라는 총 10장에 걸친 이야기를 읽다보면, 당장 고민 해결! 까지는 못하더라도, 고민을 해결하는데 조금 더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내게 가장 와 닿는 한 가지 고민을 덧붙이려다, 그보다 제일 와 닿았던 프롤로그의 마지막 문단을 담아본다.

 

아들러는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다면 심리학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문제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지만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잘못된 인식을 버리자. 그 대신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꿈으로써 지금의 나를 더 나은 사람, 더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가자. 그것이 바로 나를 사랑하기 위해 필요한 한 걸음이다.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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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7-01-09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를 사랑할 용기>와 더불어 <미움 받을 용기>, <행복해질 용기>까지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리뷰 읽고 갑니다. 마지막 문단도 인상깊네요. 친구신청하고 갑니다^^

해밀 2017-01-11 12:20   좋아요 0 | URL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꿈으로써 지금의 나를 더 나은 사람, 더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가자는
뜻이 참 좋더라고요 :) 부족한 리뷰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친구신청 해주신것도요! 바로 수락했어요 :)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따뜻한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