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 바레스 : 어느 트랜스젠더 과학자의 자서전
벤 바레스 지음, 조은영 옮김, 정원석 감수 / 해나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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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럽문학동네 뭉클찜으로 이 책을 만났다. 벤 바레스, 어느 트랜스젠더 과학자의 자서전. 표지의 띠지에는 한 남성의 사진이 실려 있고, 그 옆에는 이런 문구가 담겨 있었다.

나는 내 뜻대로 살았다. 성별을 바꾸고 싶었고 그렇게 했다. 과학자가 되고 싶었고 그렇게 했다나는 진정 멋진 삶을 살았다.”

삶의 마지막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는 진정 멋진 삶을 살았다는 그의 말에 나는 이 책을 읽기로 결심했다.

    

대단히 성공한 여성 과학자가 된 바버라는 벤으로 성전환했고 사람들이 자신을 남자와 여자 중 누구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과학적 가치가 달라진다는 것을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경험하기 힘든 방식으로 알게 되었다. 성전환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아 세미나 발표를 한 자리에서 벤은 우연히 한 참석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벤 바레스의 오늘 세미나는 훌륭했어. 이 사람 연구가 여동생보다 훨씬 낫네.” 과학계에서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는 급진적인 운동가는 이렇게 탄생했다. (p.13)

 

이 책의 서문을 쓴 MIT 생물학과 교수 낸시 홉킨스의 말마따나 벤 바레스만이 겪을 수 있는 차별이었다. 성별을 전환하기 전 여성으로서 차별을 겪은 일화가 훨씬 많은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한다.

MIT 학부생 시절 바버라는 한 수업에서 정상적으로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어낸 유일한 학생이었지만, 교수는 그녀에게 점수를 주지 않았고 오히려 남자친구가 대신 문제를 풀어준 것 아니냐며 바버라의 부정행위를 비난했다고 한다.

 

이공계에서의 성차별은 비단 바버라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원장님, 원장님의 품위는 어디에 있습니까? 원장님께서는 단 한 번이라도 여학생이나 여성 연구원들과 이 문제에 관해 이야기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이들은 학회에 참가할 때마다 이런 수작질을 끊임없이 당해왔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예순 살이나 먹은 한 유명한 노교수는 지금까지 학회에서 200명의 학생, 연구원들과 잤다고 떠벌리고 다닙니다. 어느 학생은 최근에 학회장에서 자신이 발표한 포스터에 대해 한 중견 과학자와 멋진 대화를 나누었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에 자기 손바닥에 호텔 방 번호를 적고 가더라는 얘기를 하더군요.

전 제 학생들이 더는 이런 꼴을 당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p.21)

 

벤은 학회에서 일어나는 성희롱에 대해 분개했고, 학회 조직 위원회에 그러한 행동을 예방하는 규정을 마련하도록 요청하기 시작했다. 위 글은 벤이 미국 국립보건원 원장에게 쓴 편지의 일부다. 며칠 뒤 벤은 원장에게 품위 있는 답변을 받았지만, 벤은 전혀 만족하지 못했다. 벤이 원한 것은 성희롱 근절에 대한 실행이지 조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벤의 문제 제기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집요하게 계속되었다. 어느 날 낸시가 많은 이들이 목소리를 내기 꺼리는 이런 일에 나서는 용기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물었다.

 

낸시, 난 이런 일로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아.

어쩌면 내가 트랜스젠더라서 그런지도 모르지.

난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정말 상관없어.

그리고 내가 누구를 열받게 하든 그것도 신경 쓰지 않고.

정년 보장의 좋은 점이 이런 거 아니겠어?!

내가 스트레스를 받는 건,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하다는 거야. (p.24)

 

그렇다. 정년 보장은 이럴 때 이용하라고 있는 것이다. 벤 역시 정년 보장이란 것이 있는데도 많은 교수들이 목소리를 내고 진보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고 썼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주목했던, 트랜스젠더 과학자로서 벤이 겪은 성차별과 이공계에서의 성차별에 관해서만 언급했지만 이 책은 자서전답게 그의 삶 전반(1부 삶)과 그가 평생 함께한 과학’(2부 과학)에 관해 이야기한다. 2부는 정말이지 과학 이야기다. 목차 중 하나를 살펴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희소돌기아교세포 발달, 랑비에결절 형성, 미엘린 수초화의 이해. 이 구역의 문과생인 나로서는 분명히 활자를 읽었는데요... 읽지 않았습니다... 하는 상황이 되었다. 도통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서 소리내어 읽어 보았는데도 녹록하지 않은 내용이었다. 그렇게 찐 과학 이야기 2부를 지나면, 3옹호가 기다리고 있다.

 

남녀를 막론하고 모든 트랜스젠더들은 사회가 단지 성별 때문에 사람을 다르게 취급하는 것에 대한 분노를 공유한다. 성전환을 시도한 지 얼마 안 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 한 상담가는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사회적 지위가 갑작스럽게, 또 대단히 낮아진 이유가 트랜스젠더가 아니라 이제 여자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이해시키는 일이 가장 어렵다고 말했다. (p.222)

 

이제 여자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남은 평생을 여성으로 살아갈 이에겐 어쩌면 트랜스젠더이기 때문이 더 쉬운 이유가 되지 않을까. 단지 여성이기 때문에, 라는 이유보다는 조금 더 기댈 수 있는 이유일 테니까. 벤은 차별을 성별에 국한하지 않고, 소수 집단에 대해서도 언급했는데 이 부분이 참 마음에 들었다.

 

여기에서는 여성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라틴계 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포함한 많은 소수 집단들이 상당한 편견과 장벽에 부딪힌다. 모든 선의에도 불구하고 스탠퍼드나 그외의 대학에서 요직에 있는 아시아인들을 거의 볼 수 없다는 점 또한 불편하다. 미국 과학아카데미 회원 명단만 봐도 아시아인들은 자격과 상관없이 극히 소수만 선출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모두는 더욱더 분발해야 한다. (p.228)

 

위 구절에서 공통되는 아시아인 여성은 얼마나 큰 편견과 장벽에 부딪혔을지 눈에 선했다.

 

벤의 자서전을 읽으며 나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다큐멘터리를 종종 떠올렸다. 여성에게 특혜를 요구하려는 게 아니라고, 다만 우리의 목을 밟고있는 발을 좀 치워달라는 것 뿐이라고 이야기했던 긴즈버그. 벤이 살아생전 긴즈버그를 만나 이야기했다면 둘은 어떤 이야기를 나눴을까. 1933년생인 긴즈버그와 1954년생인 벤은 나이를 떠나 좋은 친구가 되었을 것이다. 각각 이공계와 법조계에서 둘도 없는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며, 둘의 목소리로 세상은 분명 변화했으니까.

 

신경아교세포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연구자였고, 연구 성과를 적극적으로 공유한 교육자였으며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성차별과 맞서 싸운 비판적인 활동가였던 벤 바레스. 늦었지만 그의 명복을 진심으로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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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는 춤추고 싶다 - 좋은 리듬을 만드는 춤의 과학
장동선.줄리아 크리스텐슨 지음, 염정용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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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 영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땐뽀걸즈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바로 이다.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에서 티파니(제니퍼 로렌스)는 팻(브래들리 쿠퍼)에게 헤어진 아내와의 재결합을 도와주는 대신, 자신과 함께 댄스 경연 대회에 참가해달라는 제안을 건넨다. 처음엔 그저 댄스 경연을 위한 춤을 준비하던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지고, 춤을 추며 보내는 하루하루가 점차 즐거워진다. 그러는 사이에 각자가 가진 상처는 조금씩 옅어진다. silver lining, 구름의 흰 가장자리 아래서.

취업 전선에 뛰어들기 전, ‘댄스스포츠대회를 앞두고 있는 거제여상 열여덟 땐뽀반학생들의 유쾌발랄 성장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 땐뽀걸즈’. 땐뽀반의 수장 이규호 선생님의 지도 하에 아이들은 차차차와 자이브를 배우며, 둘도 없을 고등학교 2학년 시절을 보낸다. KBS 스폐셜판 나레이션처럼, 세상 무엇에도 굴하지 않고 나를 오롯이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땐뽀걸즈 곁을 지나간다. 자이브의 흥겨운 리듬에 맞춰서.

 

문득 이 두 편의 영화가 떠올랐던 것은, 이 책 뇌는 춤추고 싶다속 구절 때문이었다.

 

공항에 도착해서 우리는 택시기사에게 요금을 지불했다. 그때 택시기사가 독일어를 할 줄 알며, 우리가 나눈 이야기의 일부를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8일간의 학술대회를 마치고 나자(우리가 서로 토론을 하고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또 춤도 추었던 그 8일간), 60세쯤 되는 그리스인 택시기사가 그것을 이렇게 요약해서 말했다. “춤추기는 멋진 일이죠! 사람들은 늘 웃음이 최고의 약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춤추기가 그렇죠. 웃음은 춤을 출 때 그냥 덤으로 받는 겁니다!”

(p.351-352)

 

택시기사의 말마따나 춤추기는 멋진 일이고, 웃음은 그냥 덤으로 받기도 하는 춤에 관해 8일간 열렬히 떠든 두 사람이 있다. 시즌2에 출연해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린 뇌과학자 장동선과 뇌와 춤의 심리학적, 신경과학적 관계에 대해 꾸준히 연구해 온 신경과학자 줄리아 F. 크리스텐슨이다. 두 사람은 그리스의 에기나섬에 있는 아폴로 호텔에서 열린 신경과학과 관련된 학술대회에서 처음 만났고, 대화는 바로 춤에 관한 것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호텔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추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춤을 추면 대체 왜 저렇게 행복해질까? 춤을 추면 더 건강해질까? 혹은 더 똑똑해질까? 둘은 한참 동안 이런 대화를 나눈 후에 수많은 사람들 틈에 섞여 먼동이 틀 때까지 춤을 추었고, 아침에 잠깐 눈을 붙인 다음 학술대회에 참석했다. 여드레 밤낮으로 학술 토론과 춤 사이를 번갈아 오갔고, 마침내 모든 것이 하나로 묶이게 되었는데 당시 여드레 밤낮 동안 두 사람이 나눈 대화의 주제와 춤에서 이 책 뇌는 춤추고 싶다의 중심이 되는 여덟 개의 장이 탄생했다고 한다.

 

나를 사로잡는 리듬인 1솔로 댄스로 시작해서 내게는 어떤 춤이 어울리는지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는 9춤 고르기가 담겨있는 이 책은 범주가 뇌과학이지만, 워낙 유쾌하고 춤에 관련된 여러 이론들(뇌과학, 신경학 등)이 적재적소에 나와서 읽기에 부담 없는 책이다.

 

우리가 자료 조사를 하면서 우연히 발견한 유튜브 동영상에서도 당김음의 마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세 명의 이탈리아인이 자동차에 앉아 있었다. 카메라는 앞쪽에서 그들을 찍고 있었다. 그들은 이탈리아인 특유의 과도한 몸짓을 해 가며 최근에 나온 여름철 히트곡인 <데스파시토Despacito>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 노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그들은 어디서나 그 노래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것을 끔찍해했다. 또한 사람들이 그 노래가 나오기 무섭게 춤을 추는 것 역시 싫어했다. 그들은 그 노래가 실패작이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때 라디오에서 다음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곡은 바로……, 바로 <데스파시토>였다. 그 이탈리아인들은 그 노래에 대해 불평을 하는 동안에도 중간중간에 끊임없이 따라 부르며 머리를 흔들고 즐기기 시작했다. 그 노래가 실제로는 한심하다고 주장하면서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해마다 여름철이면 히트곡이 나오고 우리들 모두는 언제부턴가 더는 듣고 싶지 않게 된다. 하지만 그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고 문득 노래를 즐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p.40-41)

 

구절 속에 영상 주소가 쓰여 있어서 찾아봤는데, 상황 설명을 듣고 봐서 그런지 재밌었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고 했던가. 이탈리아 특유의 손짓을 해가며 난 이 노래 불호야 하는데 데스, , 시토- 하는 후렴구가 나올 때마다 따라 부르는데 피식 웃음이 났다. 영상의 끝부분에는 이 상황이 연출임을 보여주는데, 어쩐지 엄마미소 짓게 된다. 그래, 이런 마성의 노래가 있지 있어. 이를테면 수능금지곡이라 부르는 U R Man (요즘으로 말하면 픽미나 나야나가 있겠지만 내겐 이 노래가 최고다) 같은. 당김음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고, 너무 들어서 지겨울 정도인데도 막상 또 나오면 언제 그랬냐는듯 듣게 되는 노래들. 최근에는 야놀자 CM송이 그랬다. 하도 들어서 지겨운데 어느 순간 입에 붙어서 야야야야야놀자 하고 있는 그 노래. 애기가 이거 들으면 울다가도 뚝 그친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찾아보니, 가만히 있던 돌잡이 아기 얼굴에 웃음꽂이 피고 흥겹게 춤을 추는 영상이 있었다. , 그 이야기가 정말 사실이었구나 했다.

데스파시토에 이어 바로 다음 챕터로 '모든 아기는 춤꾼'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야놀자송에 대한 아이들의 반응이 딱 이러해서 재밌었다. 어떤 리듬을 듣고 춤으로 따라 하려는 충동은 이미 신생아의 뇌에 완전히 준비되어 있는 상태고, 아기들은 춤을 출 때 미소를 지었다는 사실을 과학자들이 밝혀냈다는 글을 읽고 있으면 새삼스럽지만 이런 생각이 든다. 뇌과학은 멀리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우리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오스트레일리아의 웨스턴시드니 대학의 캐서린 스티븐스와 그 팀은 일련의 연구를 통해 춤을 지켜보는 사람도 매우 강한 정서적 자극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댄서가 무대에서 날 듯이 돌아다니는 모습을 볼 때 우리의 몸도 함께 흥분을 느낀다. 프랭크 폴릭은 동료인 커린 졸라와 장선희와 함께 특히 이 문제에 대해 깊이 파고들었다. 2011년과 2012년에 이들은 연구 결과를 발표했는데, 댄스를 즐겨 구경하는 사람들의 뇌에서는 근육운동과 관련된 기억 과정이 그들이 그 춤동작을 직접할 때와 똑같이 단련된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었다.

(p.322)

 

위 구절을 읽고서 다짐하게 된 것이 하나 있는데, 내년엔 춤에 관련된 공연을 챙겨보자는 것이었다. 당장 행동에 옮겨서,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 뮤지컬을 예매하는 사이트에 접속해 발레단이나 무용단의 공연을 살펴보았다. 흥미로운 공연이 많았다. 이 책을 읽지 않았으면 시도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땐뽀걸즈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땐뽀반의 단장 혜영이는 이렇게 말했다.

 

 

 

 

 

 

춤추기 전은 진짜 (사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고 공부에도 그렇게 흥미가 없었고

뭔가 완성되는 느낌? 내가 점점 진짜 박혜영인 것 같은 느낌?”

 

내가 점점 진짜 박혜영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는 혜영이의 말은 아래 구절과 맥락을 같이한다.

 

대부분의 춤들은 <더티 댄싱>에서처럼 무더운 여름 한 철에 익혀지지는 않으며, 모든 춤이 더티 댄싱일 필요는 없다. 당신 자신의 템포, 자신의 리듬에 귀 기울이라. 미하엘 엔데는 이것을 자신의 동화책 모모에서 특별히 아름답게 표현했다. “음악은 아주 멀리서부터 왔지만 나의 내면 아주 깊숙한 곳에서 울렸지.” 당신의 내면에 들어 있는 완전히 자기만의 음악을 발견하라. 그리고 거기에 맞춰 춤을 추라.

(p.352-353)

 

어쩌면 혜영이는 땐뽀를 하면서 자기만의 음악을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내면 아주 깊숙한 곳에서 울리는 음악을. 그렇게 발견한 음악은 이후에 어떤 일이 있어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춤을 통해 몸에 남았고, 추억에 남았으며, 사는 의미를 깨닫게 해준 힘이 되었으니까.

 

이 책의 저자이자 춤의 힘을 오래전부터 아내에게 전파하고 싶었던 남편, 장동선 박사는 책의 말미에 이렇게 썼다.

 

나에게 이 책은 무엇보다 아내 유진에게 함께 춤추러 가자고 설득하려는 시도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가까이 있는 것을 느끼며, 춤을 추면서 이런저런 잡다한 일들을 잊는다는 것은 아주 멋진 일이다. 나는 이 느낌을 아내와 함께 나누고 싶다. 부부로서 춤을 추며 늙어 가면 좋겠다. 이것이 나의 꿈이다. 이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유진, 당신에게 바친다.

(p.390-391)

 

아아, 이쯤 되니 내가 읽은 책의 장르를 돌아보게 된다. 나는 뇌과학 책을 읽은 것인가, 춤에 관한 유쾌한 에세이를 읽은 것인가, 아니면 두 장르의 탈을 쓴 사랑 고백 편지를 읽은 것인가. 하하. 내게도 이런 춤이, 이런 사랑이 오기를 바라며 기쁜 마음으로 책장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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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노트 쏜살 문고
로제 마르탱 뒤 가르 지음, 정지영 옮김 / 민음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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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 관해 어떠한 배경 지식 없이 읽었는데, 1권의 마무리가 어쩐지 속편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뒤늦게 검색을 해보았다.

 

<티보 가의 사람들>

 

1881년 출생해 1937년 노벨상을 수상하고 1958년 사망한 로제 마르탱 뒤 가르의 장편소설. 14살 소년 자크가 학교 당국의 비열한 처벌에 격분해 가출을 하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1904년부터 1913년까지 대략 10년에 걸쳐 일어나는 사건들을 중요한 사건만을 압축, 요약하는 식으로 전개되는 최초의 앙가주망 소설로, 인간의 투쟁과 현대 생활의 여러 단면을 날카롭게 묘사한 사실주의 작품이다.

 

19년에 걸쳐 완성된 대하소설로 총 여덟 부로 나눠진 작품이었고, 지난 2000년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의 정지영 교수가 필생의 역작으로 선보였던 <티보가의 사람들>을 가볍고 읽기 쉬운 쏜살문고로 다시 정리해 선보인 것이었다. 내가 읽은 <회색 노트>, 전형적인 부르주아 가문의 차남 자크와 자유분방한 프로테스탄트 집안의 다니엘 두 사람의 이야기를 주축으로 하는 성장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추신 - 이 편지를 간직해 줘. 네 마음이 처량해질 때, 그리고 보람 없이 어둠 속에서 부르짖는 일이 있을 때 이 글을 다시 읽어 줘. (p.78)

 

내 마음은 너무 부풀어 올라 터질 것만 같아! 나는 이 끌어 넘치는 파도를 이 종이 위에다 쏟을 수 있는 한 쏟아 볼 생각이야.

나는 고민하고 사랑하고 희망하기 위해 태어났고, 또한 희망하고 사랑하고 고민하고 있어! 내 일생의 이야기는 단 두 줄로 요약될 수 있어. 나에게 살아가는 힘을 주는 것은 사랑. 그리고 나에게는 단 하나의 사랑이 있을 뿐인데, 그건 너야! (p.82)

 

14세 소년의 편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섬세해서, 낯설고 새로운 마음으로 두 소년의 편지를 눈에 담았다. 나는 이 편지 형식으로 구성된 6장이 참 마음에 들었다, 편지를 통해 서로를 향한 각자의 마음을 문장으로 표현함으로써, 두 사람이 단순히 우정만을 교류한 것이 아니라 영혼을 교류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자크와 다니엘의 이야기보다 더 마음에 들었던 건 다니엘의 어머니, 퐁타냉 부인의 철학이었다.

 

 

 

 

게다가 여기 증거물이 있습니다.” 그는 모자를 떨어뜨리며 허리띠에서 빨간 테를 두른 회색 노트 한 권을 꺼내며 소리쳤다. “잠깐만 이걸 읽어 보십시오, 부인. 부인의 모든 환상을 벗겨 버린다는 것은 여간 잔인한 일이 아니겠습니다만, 우리가 판단하기로는 어쩔 수가 없군요. 이걸 보시면 부인께서도 잘 알게 되실 겁니다!”

그는 억지로 부인이 그 노트를 받게 하려고 두어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그러나 부인은 일어섰다.

여러분, 저는 단 한 줄도 읽지 않겠어요. 그 애의 비밀이 여러 사람 앞에서, 그 애 모르게 폭로되고, 그 애에게는 변명할 여지조차 남겨 주지 않다니요! 전 그 애에게 이런 대우를 받도록 가르치지는 않았습니다.” (p.38-39)

 

아들의 사생활이 담긴 회색 노트를 많은 사람 앞에서 읽지 않겠다고 당당하게 이야기 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고 하는 부인의 말을 읽는데 이렇게 훌륭한 어른이자 부모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쏜살 문고에서 이 작품을 선보이지 않았으면, 나는 티보 가의 사람들도 로제 마르탱 뒤 가르도 영영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판형이 다소 작고 1부의 분량이라 많지 않았음에도 읽기가 쉽지 않았는데,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처럼 뒷이야기가 궁금해지는 소설이었다. 작가에게 노벨상의 영예를 안겨준 작품은 <티보 가의 사람들> 연작 가운데 제7<1914년 여름>이라던데, 쏜살 문고 버전으로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아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검색했던 검색어들인데, 서평에 이 단어들을 담았기에 덧붙여본다.


앙가주망 문학(engagement literature) : 참여문학을 말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에 의해 주창된 문학사상이다. 그는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정치 세력들과의 투쟁에 참여하는 것이 문학이 지향해야 할 방향이며 임무라고 역설한다. 사르트르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반파시스트 투쟁과 레지스탕스 활동에 직접 참가하면서 인간 존재의 공동체적 규정에 새롭게 눈뜨고, 문학의 정치적 · 사회적 기능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앙가주망 문학 [engagement literature] (Basic 고교생을 위한 문학 용어사전, 2006. 11. 5., ()신원문화사)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 16세기의 종교개혁이래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분파(分派)한 각종 기독교회에 귀속한 사람들을 프로테스탄트(개신교도)라고 한다.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은 15294월 독일의 제국의회(帝國議會)에서 루터계 종교개혁파의 제후(諸侯)와 여러 도시가 로마 가톨릭의 다수파 측의 황제 카를 5세 등 로마 가톨릭 세력에 대해서 당당히 자신의 신앙을 표명하고 항거([라틴어]protestatio ; 프로테스타티오)’한 데에서 유래한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프로테스탄트 [Protestant] (21세기 정치학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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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톨로지 (스페셜 에디션, 양장) - 창조는 편집이다
김정운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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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기억되는 칼럼이 있다. 내게는 김정운 교수님의 한 칼럼이 그렇다. ‘내년에 오십인데라는 제목으로, 2010년의 글이다.

 

나는 수첩을 아주 자주 바꾼다. 조금 쓰다가도 지겨우면 바로 바꿔 버린다. 한달에 서너개 이상은 바꾸는 것 같다. 지금도 내 책상에는 처음 몇 쪽만 쓰다 만 수첩이 수십 종류다. 시내 큰 서점에 붙어 있는 문구점에 정기적으로 들러 새로운 디자인의 수첩을 찾아보는 게 내 취미다. 어쩌다 외국여행을 나가면 문방구를 파는 곳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거의 강박증 수준이다. 좀 한가한 어느 날, 내가 도대체 왜 이러는가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 한겨레 칼럼 [김정운의 남자에게] “내년에 오십인데” (2010.06.23.) 중에서

 

아주 자주 바꾸지는 않지만, 당시 내 책상에도 처음 몇 쪽만 쓰다 만 수첩이 적어도 열 손가락은 넘었으므로 나는 이어지는 글에 구미가 당겼다. 이 교수님이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고 이러나. 수첩을 자주 바꾸는 이유로, 교수님은 내 인생에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어서 그렇다고 썼다. 다다음 문단에 칼럼의 주제가 등장한다. ‘선택의 자유’. 내 삶의 의미는 내가 선택했는가 아닌가에 의해 결정된다는 이 이야기를, 나는 수첩을 볼 때마다 떠올리곤 한다.

 

8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몇 쪽만 쓰다 만 수첩을 끼고 사는 동안, 교수님은 4년만에 에디톨로지개정판을 출간하셨다. 창조란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며, 기존의 것들을 새롭게 재구성하는 데서 탄생한다는 에디톨로지’. 그 핵심을 오롯이 소화할 수 있게 쓰인 구판에 이어, 개정판에는 새로운 콘텐츠 생산과 관련된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자신의 편집 공간과 방법을 자세히 소개한 글이 함께 담겼다. 이 스폐셜 부록에 관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정말 많은데, 뒤로 미루고 일단 에디톨로지에 대해 이야기 해본다.

 

에디톨로지는 크게 3장으로 나누어 설명된다. 지식과 문화의 에디톨로지를 소개하는 1, 관점과 장소의 에디톨로지를 소개하는 2, 마음과 심리학의 에디톨로지를 소개하는 3.

 

1부에서는 ‘6 노트와 카드의 차이는 엄청나다는 꼭지가 가장 인상 깊었다. 한국 학생들은 노트를 독일 학생들은 카드를 쓴다는 글에서, 다음 카페와 네이버 지식인의 결정적 차이를 설명하는 글로 이어지는 이 글에서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독일 학생들의 카드 편집과 같은 주체적 지식을 편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꼭 엄청난 이론이 아니어도 아무 상관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관해 포스팅하고, 비슷한 관심을 가진 이들과 지식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한 블로거들의 세상이 열린 것이다. ‘재미 공동체(다음)’에서 지식 공동체(네이버)’로의 이동이다. (p.85)

 

내가 다음과 싸이월드보다 네이버를 좋아하는 이유를 이 책에서 발견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관해 포스팅하고, 비슷한 관심을 가진 이들과 지식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한 블로거. 공유하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편집해서 포스팅 할 수 있는 공간이기에 나는 블로그를 좋아한다. 10년간 블로거로 살아온데는 편집의 힘이 있었음을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2부에서는 ‘16 공간편집에 따라 인간의 심리는 달라진다는 꼭지가 가장 재밌었다. 내가 천장이 높은 카페를 좋아하는 이유를 여기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천장의 높이만 조금 더 높여도 창조적이 된다. 미네소타대학의 조안 마이어스-레비Joan Meyers-Lavy 교수는 천장 높이를 30센티미터 높일 때마다 사람들의 문제 해결 능력에 변화가 생기는 것을 발견했다. 공간의 형태에 따라 생각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천장이 높고, 넓은 공간에서는 사람들의 관점이 거시적이 되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잘 나온다. 반면 천장이 낮고, 좁은 공간에서는 사물을 꼼꼼하게 바라보게 되고,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는 경향을 보인다. (p.186-187)

 

머리를 쓰며 읽어야 하는 책을 읽거나, 서평을 쓸 일이 있을 때면 천장이 높은 카페가 생각나곤 하고 곧잘 찾아가는데 괜히 그런 게 아니었다. 우리가 문화 차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의 많은 부분은 공간 의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공간의 구조가 바뀌면 태도가 바뀐다. 출입문의 위치만 바뀌어도 사람들의 동선이 바뀌고, 공간 내의 상호작용 양상이 변화한다. 문화는 이렇게 아주 구체적으로 작동한다는 것. 관점과 장소에 대한 이야기가 이렇게 재밌을 수 있다니.

 

마지막 3부에서는 ‘24 천재는 태어나지 않는다 편집될 뿐이다꼭지를 소개하고 싶다. 모차르트를 두고 계몽주의 시대의 편집된 천재라고 설명하는데, 어쩐지 구미가 당겼다.

 

반면 모차르트의 사정은 많이 달랐다. 한편으로는 궁정 사회에서 인정받고, 재정적 후원을 받기 위해 귀족들의 주문에 맞춰 작곡해야 하는 수공업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한 실험을 통해 자신의 예술적 상상력을 마음대로 펼칠 수 있는 주체적 예술가로서의 삶을 끊임없이 시도했다. 이런 이중적 삶이 모차르트를 천재로 만들었다. (p.269)

 

이 구절을 읽기 전까지는 타고난 음악성만을 두고 천재라 부르는 줄 알았는데, 수공업자의 예술에서 그치지 않고 주체적 예술가로서의 삶을 끊임없이 시도했다는 데에서 그를 천재라 부른다는 것이 인상 깊었다. 천재는 한 사회에서 다른 사회로의 이행기에 집중해서 나타나는데, 표상으로서의 미술이 사진이라는 기계적 수단에 의해 위협받던 시대의 산물로 피카소라는 천재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에서 스티브 잡스라는 천재들이 나왔다는 것 역시 재밌었다.

 

 

 

에디톨로지에 대한 지식도 지식이지만, 책을 읽으면서 많이 배웠다.

 

빈곤한 보캐블러리거친 논리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글을 써서 먹고살 수 있는 이유는 생각해서 쓰는 게 아니라, 쓰면서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글은 이 서평을 생각해서 쓰는 게 아니라 쓰면서 생각할 수 있게 만들었다. 아날로그 책이 좋은 이유는 내 맘껏 쓸 수 있어서인데, 책을 정말 깨끗하게 보는 사람이 있다는 글도 나를 움직였다. ‘내 책은 내 맘대로 쓰기 위해 산 것인데, 중고책으로 되팔려고 책을 사는 게 아닌데 왜 책을 그렇게 깨끗이 보느냐고 혼나는 것만 같았다. 다행히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 않아서, 모처럼 책을 깨끗하게 보지 않았다. 형광펜으로 죽죽 줄도 긋고 연필로 밑줄도 긋고 볼펜으로 내 생각을 써 가며 읽었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메타인지meta-cognition’라고 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객관화하는 자기성찰과 밑줄 긋고 빈곳에 자기 생각을 적는 독서는 동일한 심리적 프로세스입니다. 저자의 생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활자화하는 작업을 통해 정말 많이 성장합니다. (p.350)

 

이와 더불어 에버노트앱을 애용한다는 이야기와 널찍한 모니터 두 개를 나란히 붙여 사용한다는 이야기, 유튜브 같은 영상자료를 수시로 본다는 이야기 등등 스폐셜 부록에 담긴 이야기들은 모조리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글은 마감이 쓴다는 359쪽은 부끄럽게도 이 서평을 쓰면서 실현중이다. 14일에 책을 받아서, 20일까지 서평을 쓰기란 꽤 어려운 도전이었지만 마감은 글을 완성할 것이다. 늘 그랬듯이.

 

이제 정말로 이 서평을 마무리할 때가 왔다. 10년간 블로그를 운영해오면서 매일, 매주, 매달, 매년 콘텐츠를 생산하고 있는 나로서는 콘텐츠 생산, 그 자체가 재미있어야 합니다!’는 꼭지가 사무치게 와 닿았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콘텐츠 생산 그 자체가 삶의 즐거움이 되어야 합니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지만, 돈을 많이 벌려고 혹은 권력이나 명성을 얻으려고 글쓰기를 한다면 절대 잘 될 수 없습니다. 글쓰기 자체에 기쁨을 느끼고, 자신이 생산한 콘텐츠 자체에 희열을 느껴야 합니다. 돈이나 명성은 추구한다고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돈이나 명성, 성공은 100퍼센트 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따라오면 좋은 거고, 안 따라오면 할 수 없는 겁니다. 내가 글쓰기를 하면서 재미있고 즐거웠다면 그 자체로 만족할 수 있는 겁니다. 스스로 재미있는 글을 쓴다면 내 콘텐츠에 공감해주는 독자들은 꼭 나타납니다. 아무리 적은 숫자라도 교감할 수 있는 것처럼 기쁜 일은 없습니다. (p.363-364)

 

 

 

글을 읽는 사람이 함께 호흡하려면 내 호흡이 경쾌해야 하고, 그래야 즐겁게 따라 읽을 수 있으니 짧게 쓰는 게 좋은 글이라고 하셨지만 편집의 실패로 글이 길어지고 말았다. 서평을 세 장 가까이 써버린 바람에, 아주 오래 기억될 것 같은 책이 있다. 내게는 김정운 교수님의 책 한 권이 그렇다. 20188월에 출간된 개정판으로, 책의 제목은 에디톨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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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달다. 어제는 지랄맞았지만,
달다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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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봤을 때, 제목이 참 청량하다고 생각했다. ‘어제는 지랄맞았지만, 오늘은 달다.’를 뒤집어서 오늘은 달고, 어제는 지랄맞았다고 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어린 내게 좋은 대학에 가면 행복이 온다고 했다. 대학생이 된 내게는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면 행복이 온다고 했고, 직장인이 된 내게는 결혼을 하면 행복이 온다고 했다. 나는 알려준 대로 행복을 위한 모든 패를 완벽하게 사용했다. 목적지처럼 보이는 막다른 길에 이르러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행복은 어디에 있죠?”

메아리조차 없다. 어른이 되어버린 내게 대답해줄 어른은 더 이상 없다. 나는 그 자리에 엉거주춤 서서 길을 잃은 아이처럼 울었다. 시간이 흐르고 다시 물었다.

나는 어디로 가면 행복하니?”

미련하게도 이제서야.

저기 숲길이 예쁘니까 구경하면서 갈까?”

나 숲 좋아해.”

알아.”

남의 말만 듣느라 소홀했던 내게 처음으로 행복을 물었다.

 

프롤로그의 일부다. 나 역시 자주했던 생각인지라 공감하며 읽고 있는데, “나 숲 좋아해.” 하고 알아.”라고 받아치는 나와 나의 대화가 마음을 울렸다. 프롤로그의 제목은 행복을 묻다’. 행복은 그 누구도 아닌 내게 묻는 것이고, 그 행복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데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표지의 일러스트도 귀엽고 책의 색감도 사랑스러워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 웬걸, 뜻밖의 보물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작가 달다는 나,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친구, 직장동료를 비롯해 일면식 없는 다른 사람들까지 따뜻한 시선으로 관찰한다. 때로는 통통 튀는 웹툰으로 때로는 사뭇 진지한 글로 풀어내는데, 그 완급조절이 마음에 들었다. 지난 영화제 때 본 오늘도 평화로운처럼 B급 감성 가득한 코미디를 보는 것 같다가도, 가족 이야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어쩐지 더 눈물이 나는 덤덤함.

 

마음에 들었던 구절을 하나만 더 풀자면 이 구절이다.

 

나는 줄곧 휑한 무대에 덩그러니 나를 세웠다.

관중들의 반응을 살피며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했다.

영악한 머리로는 적절한 타이밍을 살펴

멋들어지게 폭죽을 터뜨려 박수를 받아내기도 했다.

 

그러던 중 나의 무대는 위기를 맞았다.

환호 없는 무대는 초조했고 흩어지는 연기처럼 무의미했다.

그리고, 나는 달리기를 멈추었다.

 

전부였던 회사부터 어설픈 자기계발까지

끊임없이 휘두르던 채찍을 내려놓았다.

 

돌아서 본다.

무정하게 멀리도 왔다.

질주해온 길 끝에 아스라이 점처럼 작은 내가 보인다.

지금의 나는 두 팔을 벌리고 섰다.

저만치 따라오는 내 영혼을 힘껏 안아주려고.

 

끌어안은 그의 귀에다 속삭이듯 부탁도 해볼 참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도 나의 곁을 지켜달라고.

나의 진짜 관객이 되어달라고.

 

(p.230-231 파트 5, 08 영혼을 기다리는 시간)

 

글의 아래에는 인디언의 그림과 이런 글이 실려있다.

인디언들은 광야를 달리다 멈추어 서서 달려온 길을 바라본다고 한다.

미처 따라오지 못한 자신의 영혼을 기다리는 시간이라고.

 

 

내게도 영혼을 기다리는 시간이 있다면, 이처럼 좋은 책과 좋은 영화를 보는 시간일 것이다. 시간을 내어 책을 읽으면서, 바쁜 일상에 미처 따라오지 못한 내 영혼을 기다린다. 역시 시간을 내어 영화관에 가서, 좋은 영화를 보고 나와서 그 여운을 곱씹으며 영혼을 기다린다.

 

오늘도 이어지는 무더운 여름밤, 미처 따라오지 못한 영혼이 내게 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방금, 아주 즐겁게 읽은 책의 마지막장을 덮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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