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나 - 잔혹한 여신의 속임수
마이클 에니스 지음, 심연희 옮김 / 북폴리오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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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라하는 팩션 소설을 꼽으라면, 나는 단연코 이정명 작가의 『바람의 화원』을 꼽는다. 조선시대 가장 유명한 풍속화가 김홍도와 신윤복. 기록된 자 김홍도와 기록되지 않은 자 신윤복. 이 두 사람에게는 몇가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다. 첫재, 두 사람은 도화서 화원 생활을 함께했던 동시대인이다. 둘째, 두 사람이 똑같은 주제를 두고 그린 그림이 여러 장 발견되고 있다. 셋째, 두 명의 천재화가 중 김홍도에 대한 자료는 풍부하게 발견되고 있는 반면, 신윤복에 대한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행인 건, 기록은 사라졌지만 그림만은 온전히 남아있다는 것. 남아 있는 그의 그림에 작가의 상상이 더해져 탄생한 작품이 『바람의 화원』이다. 이 소설이 좋았던 이유는,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역사적 사실이라는 팩트를 바탕으로 펼쳐지는 그들의 이야기가 내 흥미를 유발했고, 무엇보다 책장 넘어가는 줄 모를 정도로 재밌게 읽혔기 때문이다. 팩트로만 끝나기에는 아쉬운 그들의 이야기를 픽션이라는 장르를 통해 계속해서 상상할 수 있게 만드는 팩션 소설의 매력을 통해 나는 김홍도와 신윤복, 그리고 그들의 그림을 아끼게 되었다. 이렇게 팩션 소설은 역사를 아는 이에게는 역사를 넘어 그들의 이야기를 생각하게 하고, 작품을 통해 몰랐던 역사를 접하게 만들어 역사에 관심을 쏟게 만드는 힘이 있다. 비록 반짝 관심이라 할지라도.

『바람의 화원』이 그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상상하게 만들었다면, 이번에 읽은 『포르투나: 잔혹한 여신의 속임수』는 이야기를 통해 시대를 읽게 해준 작품이었다. 시대 그 자체로도 매료되기에 충분했고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매력적인 사람들이 공존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던 빛나는 이성과 문화의 시대, 르네상스.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두 거물, 인류가 낳은 대표적인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현재까지도 큰 영향력을 과시하는 고전 『군주론』의 저자인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한 팀이 되어 연쇄살인사건을 수사한다면? 생각만 해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펼쳐질 것 같았고, 기대이상의 이야기였다. 소설의 큰 줄기를 이루는 소재 중 하나인 후안 보르자 살인사건이 역사 속에 미제로 남아 있는 실제 사건이라는 것을 비롯해 레오나르도 다 빈치, 니콜라 마키아벨리 등 실존했던 인물들이 소설 속 캐릭터로 등장해서 그런지 생생한 기분이 들었다. 소설 속 그들이 하는 말들은 작가의 생각일지 모르지만, 캐릭터 그 자체는 실존 인물이었으니까. 또, 르네상스 시대라는 나에게는 다소 생소했던 시대를 거부감 없이 읽게 만든 작가의 역량도 참 좋았다. 전반부에서 다미아타 시점으로 쓰여서 그녀의 치명적인 매력에 빠지고 기구한 운명에 함께 슬퍼하게 만들면서 소설에 집중하게 만들고, 후반부부터는 풍부한 지식과 냉철한 판단력으로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마키아벨리의 시점으로 쓰여 몰입하게 만든다. 나도 모르게 몰입해서 책을 읽고 마지막 장을 덮고 뒤돌아봤을 때, 르네상스 시대에 생소했던 나는 온데간데없고 르네상스의 역사와 정치를 조금은 알게 된 내가 되어있었다. 나는 단지 책 한 권 읽었을 뿐인데!ㅎㅎ 그리고 나는 아마도 언제 어디선가 르네상스를 접하면 이 책을, 이 책 속의 사건을, 사건의 진실을 찾기 위해 힘을 합쳤던 그들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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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모퉁이 카페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권지현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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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대의 스캔들 메이커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집 『길모퉁이 카페』를 나는 조금 힘겹게 읽었다. 1975년에 처음 출간된 소설집이기 때문에? 아니다. 1975년에 처음 출간된 소설집이라고 하기에 『길모퉁이 카페』속 문체는 2013년에 읽어도 전혀 어색함이 없었고, 옮긴이의 글 속 옮긴이의 말처럼 70년대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무색할 정도로 오늘날 벌어지는 우리의 이야기라고 생각되는 단편들도 많았다. 이것도 아니면, 250쪽에 남짓한 분량에 열아홉 편이라는 단편집이었기 때문에? 아니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장편 소설을 읽어보진 못했지만, 단편과 장편의 차이는 호흡의 문제일 뿐 단편은 단편대로의 매력이 있고 장편은 장편대로의 매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장편만큼이나 단편도 좋아한다.

 

그렇다면 나는 무슨 이유로 『길모퉁이 카페』를 힘겹게 읽었다고 느꼈던 것일까? 그건 아마도, 열아홉 편의 단편이 ‘결별’을 테마로 했기 때문일 거라 생각한다. 열아홉 편의 단편을 읽어내는 게 힘겨운 일은 아니지만 결별을 이야기하는 열아홉 편을 읽어내기란 녹록치 않았기 때문에.

단편집의 매력 중 하나는, 하나의 단편을 끝내고 이어지는 단편으로 들어가는 호흡이 저마다 다르다는 점인데, 다른 독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보통 이어지는 단편보다는 앞서 읽은 단편의 여운의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다. 분량이 어떠하건 간에, 등장인물의 심리를 이해하건 이해하지 못했건 간에 나는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맞이하는 ‘결별’ 앞에서 자주 멈춰 섰다. 프랑수아즈 사강 특유의 가볍고 시니컬한 문체 덕분에 소설 속 그들에게는 나름 거창했을 결별이 나에게는 사소하거나 소소한 이별로 다가왔으므로 나는 그들의 결별에 대해 더욱 더 생각했다. 거기에 덧붙여 소설 속에서는 생략된, 그들이 결별하기까지의 그 시간들을 생각하고 있노라면 열아홉 편으로 채워진 250쪽이 못되는 이 소설집을 읽어내는 시간이 결코 짧지 않았다.

 

“모든 게 잘되고 있어. 밀밭이나 귀리밭에서 죽었으면 좋겠다.”

“뭐라는 거야?”

“머리 위에서 살랑거리는 줄기들과 함께.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진정해.”

“죽어가는 사람에겐 늘 진정하라고 하지. 정말 그럴 때야.”

“그래, 그럴 때지.”

마르트의 목소리는 아름다웠다. 남자는 여전히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는 여자의 손을 잡고 죽어갔다. 모든 것이 좋았다. 그 여자가 아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둘이 함께하는 행복이란…… 쉽지가 않네…….”

그리고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어쨌든 이제 그에게 행복 같은 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p.62-63,「누워 있는 남자」)

 

어쩌면 소설 속 그들이 결별한 이유는 소설 속 구절처럼 ‘둘이 함께하는 행복이 쉽지가 않아서’였을지도 모른다. 뜨거운 연인이 사랑의 언약을 속삭이는 길모퉁이 카페가 때로는 누군가의 사랑이 붕괴되는 자리이기도 할 것이고, 누군가의 인생이 마감되는 자리이기도 할 것이다. 한 때는 열렬히 사랑해서 둘이 함께 행복했으나 어느 날, 이런 저런 이유로 둘이 함께하는 행복이 쉽지가 않아졌기에 그들은 결별했을 것이다. 우리네 인생의 결별들이 그러했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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낼모레 서른, 드라마는 없다 - 방황하는 청춘을 위한 찌질하지만 효과적인 솔루션
이혜린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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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희 시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시를 떠올리게 하는 이혜린 작가의 신작 <낼모레 서른, 드라마는 없다>를 읽었다. 작가의 전작 <열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를 읽진 못했지만 표제와 부제가 주는 느낌이 심상치 않았고, 무엇보다 소담출판사 카페에서 연재되었을 때 작가의 말을 읽고 나는 이 책을 읽기로 결심했다.

 

이미 성공한 사람들의 말은 한 귀로 흘려들어라. 그들은 성공했다. 고로 모든 고난과 역경이 아름답게 보일 거다. 나도 성공만 하면, 그런 소리는 충분히 해줄 수 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욕심만 부리지 말고 눈을 낮춰 작은 회사부터 들어가라! 실패 없인 성공도 없다! 도전하라! 조건 보지 말고 진짜 사랑을 해라! 외면보다 내면을 가꿔라!

빌어먹을. 고생이 그렇게 좋으면 너희들이나 실컷 사지 그래? 작은 회사에서 월급 못 받으면 누가 대신 주나? 도전했다 망하면, 다시 일어설 기회나 주니, 너희들이? 전셋값이 매년 1억 원씩 오르는 이 땅에서 감히 사랑을 들먹이는 거야? 그깟 내적인 아름다움, 백날 가꿔봐야 들여다보기나 하느냐고! (p.7)

 

아직 낼 모레 서른인 나이는 아니지만,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인상 깊게 읽었던 20대 초반을 지나 어느덧 20대 중반에 들어선 어느 날, 나는 이와 같은 책을 찾아 읽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사람들은 말한다. 청춘은 아프다고. 그래, 맞다. 아프다. 그런데 ‘졸라’ 아프다. (p.5)

 

다시 말하자면, 20대 초반이 청춘은 아프다는 것을 인식하는 나이라면 20대 후반은 그 청춘이 작가님의 말마따나 ‘졸라’ 아픈 나이랄까. 졸라 아프지만 커리어우먼은 없고, 로맨스는 없고, 화려한 싱글은 없음을 알기에 마냥 아플 수만은 없는 나이. 이 책은 그러한 나이를 살고 있는 여자를 위한 책이다. 커리어 우먼, 로맨스, 화려한 싱글은 없다는 3개의 주제로 나눠져서 쓰인 이 책은 상사의 고함에 대처하는 방법, 핫한 성희롱에 대한 쿨한 대처 등 커리어우먼으로 살기 힘든 직장에 대해 이야기하고 연하남, 업계 관계자등 직장인의 연애에 대해 이야기하고 다이어트와 강아지, 월세 등 화려한 싱글을 방해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나는 책의 구성이 참 마음에 들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상사와의 맞팔’에 대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 한다면, 실화 같은 이야기 한 편이 먼저 등장하고 ‘부하 사찰 대처법’이라는 본격적인 주제로 들어간다는 점. 마치 이런 느낌이다. 나를 포함한 두 명의 언니가 대화하고 있다. A언니가 직장에서의 연애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하면, B언니는 A언니의 이야기에 대해 공감과 함께 솔직한 충고를 해준다. C인 나는 그런 두 언니의 사이에서 누구보다 진지하게 이야기를 듣다가도 B언니의 유머에 빵 터져서 웃기도 하고.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작가님의 유머가 더해져 마냥 팍팍하지만은 않은 그런 ‘언니의 충고’가 담긴 책.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좋았다.

 

얼마 전 종영한 문근영, 박시후 주연의 드라마 <청담동 앨리스>에서 문근영이 연기한 캐릭터 한세경이 이런 대사를 외친다.

  

“가난하다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했어, 근데 이제 알았어. 아무리 열심히 성실히 노력해도 가난하다면 그건 부끄러워해야 하는 게 아니라 세상을 향해 화를 내야하는 거야. 훌륭한 사람들은 이럴 때 세상을 바꾸지, 근데 난 그런 사람 아니야. 난... 나를 바꿀 거야... 너처럼 살 거야...(이하 생략)”

 

그래서 우리의 한세, 세경이는 청담동으로 향한다. 비록 누구 하나 환영해주지 않았지만 세경이는 묵묵히 걸어갔다. 어느 날은 시계토끼를 찾고, 어느 날은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아 울었고, 어느 날은 간장을 맞기도 하면서. 세상을 바꿀 수 없어서 자신을 바꾸는 것을 택한 세경이. 이 책의 ‘작가의 말’처럼 보란 듯이 살아남기 위해 이 세상의 부조리와 어서 빨리 손잡았을 세경이. 나는 그런 세경이가 될 수는 없어서, 이 책을 다시 읽기로 했다. 이 책에 담긴 이야기가 좀 더 와 닿는 나이가 되었을 때, 작가님 보다는 언니로 부르고 싶은 혜린 언니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충고를 말이다.

 

 

 

* 인상 깊었던 구절 *

 

두 가지 길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지금 당신이 그 일에 미치지 않았음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고 설득할 자신이 있나. 없다면, 소시민이 되 자신을 보고 한숨부터 푹 내쉬기 전에 자신의 꿈이 진짜 꿈인지 백일몽인지부터 체크해야 할 것이다. 미치지 않았다면, 별수 없다. 소시민으로 사는 즐거움을 찾을 수 밖에. (p.39)

 

효과가 없을 것 같나. 일단 한번 해보시라. 경쟁이 힘겨운 건, 절박함 때문이다. 현실에서 한 발짝 떨어져, 이것도 게임 1라운드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더 '잘' 이기고 '잘' 싸우는 방법이 보인다. 그리고 그때만큼은 평범한 여직원인 나도 여전사들 못지않게 섹시하다고 느낀다.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은 의외로 '거리 두기'라는 거, 한번 믿어보시라. (p.56-58)

 

방법이 없다. 그냥 버텨라. 참고 또 참아서 끝까지 살아남아라. 그리고, 선배가 된 후 생각해봐라. 후배는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그때에도 '신입 사원에게 발언권을 똑같이 줘야 하며, 그가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잡무는 다 같이 나눠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당신을 존중하겠다. (p.77)

 

평생직장은 사라졌다. 윗사람은 늘 바뀌고, 라인은 언제나 요동친다. 아직 라인을 못 탔다고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 단, 피라미드 구조를 파악하는 걸 게을리하진 말아라. 결정적 순간은 아무 예고 없이 훅 닥쳐온다. (p.99)

 

나에게 반하지 않은 남자에게 목을 맬 이유는 전혀 없지만, 내 기대만큼 뜨겁지 않다고 싹둑 잘라내지도 말 것. 어장 한 칸 정도는 못 이기는 척 내주는 게 현명하다. (p.156)

 

당신이 연애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만 직시한다면, 그래서 다시 용기를 내는 데 성공한다면, A의 존재 따위, 당신의 연애 라이프에 아무 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A와의 소중한 우정을 잘 지켜내시라. 그런 친구, 또 없다. (p.163)

 

서른은 무조건 중요한 나이다. 내면의 목소리? 그딴 뜬구름을 잡을 때가 아니다. 30대 여성들과 절친한 내가 확실히 말하건대, 서른에는 적어도 둘 중 하나는 이루어놔야 한다. 부모님 도움을 받지 않고 내 맘대로 인출할 수 있는 돈이 3,000만 원을 '훌쩍' 넘을 것. 죽었다 깨어나도 이건 안 되겠다면, 내 맘대로 고를 수 있는 신랑감 후보가 세 명은 돼야 한다. (p.308-309)

 

 

 

★ 같이 읽으면 좋을 책, 같이 보면 좋을 드라마 ★

 

 

같이 읽으면 좋을 책 : 20대라면 김난도의 <아프니까 청춘이다>,

                              30대라면 김미경의 <언니의 독설>

 

같이 보면 좋을 드라마 : SBS 드라마 <청담동 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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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맨 - 제2회 골든 엘러펀트 상 대상 수상작
이시카와 도모타케 지음, 양윤옥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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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어디에도 없는 옆집 아저씨, 원빈이 주연한 영화 <아저씨>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너희들은 내일만 보고 살지? 내일만 사는 놈은 오늘만 사는 놈한테 죽는다. 나는 오늘만 산다. 그게 얼마나 좆같은 건지 내가 보여줄게.”

 

<아저씨> 상영 당시, 저 대사는 ‘내일’과 ‘오늘’이라는 표현의 어색함 때문이었는지 많은 관객들에게 조금의 오글거림을 선사했다지만 내게는 누가 뭐래도 명대사였다. 원빈이 연기한 차태식의 ‘내일만 사는 놈’은 지켜야 할 것들이 있고, 소중한 사람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저 대사를 한마디로 줄이자면 ‘너 나한테 죽는다.’지만 나는, 한 때 지켜야 할 것들이 있고, 소중한 사람이 있어서 내일도 보고 살았을 차태식이 생각나서 먹먹했던 관객이었기 때문에 저 대사가 참 좋았다.

 

이 책, 이시카와 도모타케의 『그레이맨』 서평을 영화 <아저씨>의 명대사로 시작한 건 『그레이맨』 속 구절 때문이었다.

 

“당신들은 살아서 지켜야 할 것들이 있어. 소중한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게 없어. 당신들은 우리를 이길 수 없어.” (p.394)

 

<아저씨>에는 차태식이 유일한 ‘오늘만 사는 놈’이지만, 『그레이맨』 에서는 ‘우리’다. 사유리, 료타로 등등 죽음의 심연에 빠져있던 그들을 ‘회색 남자’가 구해낸다. 자신은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재능이 있다며, 특히 자살을 각오한 사람을 한눈에 알아보는 능력이 있다면서 말이다. 물론 그가 이런 재능을 갖게 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절망의 심연 속에서 그를 살게 한 복수, 그에게 그런 복수를 갖게 만든 처참했던 사건. 그래서 그는 자살을 결심한 사람들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그러했기 때문에.

 

아닌 게 아니라 로쿠조의 말이 맞았다. 복수심 같은 마이너스의 감정은 그것을 품은 자의 영혼을 소모시킨다.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가는 그 같은 감정에서 도망치기 위해 거기에 또 다른 감정이나 가치를 꿰어 맞춰서 대강 절충을 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유즈키 레이라는 자는 그 강인한 정신력으로 복수심을 결코 내버리는 일 없이 깊이 간직한 끝에 목적을 이루었다. (p.452)

 

<아저씨>의 차태식은 전당포 귀신이었던 자신에게 한줄기 빛을 선사해준 소미를 잡아간 내일만 사는 놈들을 찾아내 처리하는 게 목적이었다면, 『그레이맨』의 그레이는 범인뿐만이 아니라 이 나라 전체를 갉아먹는 그 잘못된 구조에 복수하고자 했다. 오로지 그것만이 그가 삶을 이어가는 이유였지만 애석하게도, 그가 선택한 복수의 방법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범죄에는 범죄였다. 그는 자신의 복수를 실행하기 위해 범죄를 행한 범죄자였으나 그의 범죄는 또 다른 선(善)을 낳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복수를 위해서였다고 하지만 자신의 재능을 십분 발휘해 자살을 결심한 많은 사람들을 살렸고 '공범'이라는 필요로, 명목으로 그들을 살아가게 만들고 있으니까. 그의 재능으로 살아난 한 사람, 료타로가 회색 남자였던 그를 '그레이'라 부르면서 그는 회색 남자에서 그레이맨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 어떤 영웅들보다 자신에게 붙는 호칭을 마음에 들어했던 영웅이었다. 내가 『그레이맨』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했던, 작가와의 인터뷰 속 작가가 말하는 ‘약자 출신의 영웅’말이다.

 

이렇게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를 선택하게 하고 오롯이 읽어낼 수 있었던 데에는 이 시대의 영웅, 그레이의 힘이 컸다. 어느날 갑자기 마주하게 된 처참한 사건으로 절망의 심연으로 빠져버린 그. 무지막지한 영혼 소모를 강인한 정신력으로 이겨내며 복수심을 결코 내버리지 않았던 그. 료타로가 ‘그레이’라고 불러주었을 때 인간을 초월한 존재, 그제야 겨우 자신이 거기에 이르렀다는 실감이 들어서 무척 기뻤다던 그. 그런 그를 생각하면 많이 먹먹해지는, 제2회 골든 엘러펀트 상 대상 수상에 빛나는 이시카와 도모타케의 『그레이맨』이었다.

 

 

 

* 인상 깊었던 구절 (서평에 인용한 구절 제외) *

 

"남의 죽음을 예언하는 게 아니에요. 죽음으로 향하려는 사람을 민감하게 감지하는 거죠. 당신은 침울한 사람과 슬퍼하는 사람을 분간할 수 있나요?"

"그런 정도라면 가능할 거 같은데?"

"그것과 마찬가지예요. 상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주의 깊게 지켜보면 극한의 궁지에 몰려 있는 인간을 분간할 수 있어요. 자살하려고 하는 사람은 반드시 어떤 사인을 보내는 법이에요. 하지만 그걸 알아봐주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게 문제죠." (p.219)

 

몸을 베어내는 듯한 아픔. 폐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 이 지상에서 자신의 존재가 불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아버린 절망감. 몸의 세포가 모조리 다 타버릴 듯한 분노. 그리고 그 분노에 목이 졸려버린 슬픔. 어떻게도 해결할 수 없는 자기혐오. (p.284)

 

"어디에도 내 자리가 없었거든요."

불쑥 중얼거렸다.

"그래서 내 마음대로 이곳을 내 자리로 정했어요." (p.289)

 

"다행인지 불행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그야말로 나락에 떨어졌을 때 그레이에게 구조됐어요. 그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이런 썩어빠진 세상에 저할할 줄 아는 사람이 있구나, 정말 대단하구나, 하고. 그래서 그레이를 따라 나섰죠. 지금도 이 잘못된 세상에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무엇보다 나는 그레이가 어떤 일을 하고 어떻게 될지 꼭 지켜보고 싶어요." (p.290)

 

"자살하는 사람들에게 저마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돈에 얽힌 문제가 가장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어. 말을 바꾸자면,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는 거야. 물론 질병이나 그 밖의 불행한 사연도 있겠지. 하지만 역시 돈에 얽힌 문제가 압도적으로 많은 게 사실이야." (p.331)

 

"나는 미국이 결백하냐 아니냐의 논의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하지만 만일 미국이 스스로의 손으로 자기 나라의 건물을 파괴하고 국민이 죽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전쟁을 벌였다면 그건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겠지."

그레이는 잠시 한 호흡을 쉬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국민을 희생시키면서 제 나라의 영리를 추구했다. 그렇다면 거기에 사용된 나노테르밋 폭탄은 그야말로 붕괴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나?" (p.366)

 

"그레이는 처음부터 재분배를 생각한 게 아니라 권력자에게 공포감을 주는 것이 목적이었군요?" (p.419)

 

설령 불가능하다고 해도 나는 그레이를 절망의 심연에서 구해내야 한다. 그레이가 나를 죽음의 심연에서 구해주었듯이. (p.437)

 

비가 내리는 날은 날씨가 좋지 않다.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비가 내리더라도 해는 구름 뒤에 숨어 있을 뿐, 그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p.470)

 

비가 내리더라도 날씨가 좋을 때가 있는 것이다. (p.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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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묘묘 이야기 - 「어서와」 고아라 작가의 따뜻한 감성 만화
고아라 글 그림 / 북폴리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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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까칠한 고양이 한 마리가 있다. 고양이의 이름은 묘묘. 묘묘의 집에 곰곰이라는 곰이 찾아오면서 곰곰묘묘 이야기는 시작된다. 자세히 말하자면, 까칠한 고양이 같은 여자와 우직한 곰 같은 남자의 이야기.

 

  책을 다 읽고 난 지금도 둘의 관계가 정확히 어떠한 관계였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예전 사진이라는 단체 사진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찍힌 사진을 보며, 곰곰과 묘묘 둘의 대화에서,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이런 사이일까 하고 추측할 수 있을 뿐이었다. 앞부분을 읽으면서 둘의 관계가 많이 궁금해 했지만, 책을 읽어갈수록 둘의 관계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녀 사이가 으레 그러하듯 곰곰묘묘 이야기도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이야기니까. 어떠한 관계였는지를 궁금해 하기보다는 어떠한 관계가 될지 궁금해 하며 읽는게 독자의 몫이 아닐까하며 읽었다.

 

  곰곰의 말마따나 요리도 참 잘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퍼펙트 인생을 살고 있는 묘묘의 일상에 어느 날 찾아온 곰곰. 집도, 연락할 친구도, 갈 곳도 없었던 곰곰은 묘묘의 집에서 지내면서 묘묘의 일상의 틈을 부지런히 채운다. 한 집에서 같이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청소를 하고, 때때로 외출해서 장을 보고, 도서관에서 가서 책을 읽고, 산책을 한다. 이달의 다독왕에 선정될 정도로 책 읽기를 좋아하는 묘묘. 곰곰은 그런 묘묘 옆에서 같이 책을 읽거나, 묘묘가 어떤 책을 읽는지 궁금해 하고, 때로는 집중있게 책을 읽는 묘묘를 바라본다. 묘묘가 책 읽는 시간까지 곰곰이 함께 한다는 것. 나는 여기서 둘의 사이가 무척 가까워졌음을 느꼈다. 묘묘에게 독서란 일상 중의 일상이었고, 그 시간을 곰곰이 함께한다는 건 곰곰이 묘묘의 일상이 되었다는 것이니까.

 

  4월에 내리는 눈처럼 생각치 못하게 찾아온 손님, 곰곰.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먹다가 문득 자신이 어떻냐고 묻는 곰곰, 곰과 고양이의 우정이 유지될 수 있는 건 한 짐승의 지독한 짝사랑 때문이라고 말하는 곰곰, 짭짭 소리를 내며 밥을 먹는 곰곰, 산책하다 말고 네잎클로버를 찾는 곰곰, 걸려 넘어졌던 돌부리를 잊지 않고 찾아가 뽑아내는 곰곰, 어느 가을 날 춥다며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입혀주는 곰곰. 묘묘는 그런 곰곰이 점점 신경 쓰인다. 혼자 지내는 게 익숙했던 묘묘는, 곰곰이 겨울잠에 들어간 사이에 곰곰의 존재감을 깨닫는다. 자신만 그런 줄 알았으나 곰곰 역시 늘 혼자였음을. 겨울에 내리는 첫눈을 보며 묘묘는 생각한다. 사진을 찍어줄 걸, 밥 먹을 때 눈치주지 말 걸, 좀 더 다정하게 대할 걸. 그리고, 꿈에서 2년 전 가을 곰곰과 함께했던 때를 꿈꾸고 일어난다. 그 때, 묘묘의 방문을 열고 일어났냐며 아침 먹으러 나오라 말하는 곰곰. "봄이묘."라는 묘묘의 말로 곰곰묘묘 이야기는 끝이난다. 대사들이 짧고, 쉽게 읽히지만 그 틈 속에서 머물러서 한참을 생각하게 하는 책. 곰곰묘묘 이야기는 그런 책이다.

 

  곰곰이 생각하는 '사랑'과 묘묘가 생각하는 '사랑'을 보며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무엇인지 열심히 떠올리며, 나는 곰곰묘묘 이야기를 쉽게, 그러나 열심히 읽었던 것 같다.

 

 

 

 

 

* 인상 깊었던 구절 *

 

곰곰 : 사랑이 뭐곰?

묘묘 :

곰곰 : 난 언제나 곁에 있다곰. 그게 사랑이라곰 생각한다곰. 묘묘, 넌 어떻곰?

 

묘묘는 생각했다. 얼마전 곰곰이 요리를 해 준 일이 있었다.

 

묘묘 : 씨묘 개나 주라묘!

 

그것은 매우 거북한 맛의 요리였다.

그 후 며칠 뒤 길을 걷던 묘묘는 익숙한 냄새를 맡게 되었다.

 

묘묘 : 킁킁. 이것은 곰곰의 요리 냄새다요!

 

순간 역한 냄새에 울화가 치밀어 올라오는 듯 했지만

두근 두근. 갑자기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묘묘는 요리하는 곰곰이 떠올랐다.

크고 자상한 뒷모습, 흥겹게 휘파람을 불던 옆모습.

묘묘는 이 역한 냄새에도 곰곰을 떠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묘묘는 이 놀라운 순간을 곰곰에게 설명하고 싶었다.

묘묘는 생각을 정지하며 곰곰을 곰곰히 바라보았다.

멍청하고 둔한 히말라야 태생, 다시 묘묘는 집중하며 곰곰에게 해 줄 말을 생각했다.

가만보면 귀여운 120kg의 곰곰.

 

묘묘 : 아 배고프묘! 가서 밥 좀 해묘!

곰곰 : 묘묘! 나 이젠 스파게티 겁나 잘하곰.

묘묘 : 하? 그렇묘? 어디 함 보겠묘!

곰곰 : 기다리곰♪

묘묘 : 땅 꺼진다묘!

 

곰곰은 그렇게 요리를 시작하고, 묘묘는 그런 곰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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