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월
전민식 지음 / 북폴리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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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13년에 쓰는 마지막 서평은, 한순간의 실수로 컨설턴트라는 소위 잘 나가는 직업을 잃고 추락한 주인공이 고급 애완견을 산책 시키는 일을 하면서 인생 역전을 꿈꾸는 내용의 소설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로 세계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전민식의 새로운 소설『13월』이다. “사람 냄새가 나는 소설, 훈훈한 소설”이라는 심사평을 들으며 화려하게 데뷔한 그가 이번에는 정반대의, 사람 냄새와는 거리가 먼 차가운 소설로 돌아왔다고 한다.

 

맞다. 차가운 소설이다.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통제하는 음모 가득한 비정한 사회를 그린 소설이고, 더 나아가 그런 사회 속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묻는 소설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경계하지 않으면 제가 제 자신조차 믿지 못하게 되는 끝없는 구렁텅이로 떨어지게 되겠지요. 그게 가능해진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미 이런 일이 흔하게 되어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안녕하신가요? (p.364 작가 후기 중)

 

‘안녕하십니까 대자보’로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안녕과 각자의 안녕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 연말이지만, 『13월』을 완독하고 난 뒤 읽는 작가 후기에서의 ‘안녕’은 사무치게 섬뜩했다. 어느 겨울, 정읍에서부터 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는 작가의 말처럼 나 역시 나의 위치를 확인하는 데 동의할 일이 생겨서 동의한 적이 있고, 그로 인해 소름 돋았던 경험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동의가 떨어짐과 무섭게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몇 초 만에 알 수 있고, 근처에 CCTV가 있다면 무엇을 하는지 또한 알 수 있으며, 내가 그 곳에 서 있기까지 돈을 쓰고 서비스를 이용한 내역 정보를 통해 내 취향이나 이동 경로, 성향, 심지어 철학이나 친구 관계까지도 파악할 수 있다는 데까지 상상이 미치니 섬뜩했던 것이다. 그냥도 아니고 사무치게. 작가도 그러했고, 나 역시 그 ‘동의’를 통해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지라도 말이다.

 

고아로 자라 일찍이 비행과 범죄에 노출되었지만 이를 극복하고 꿈꾸던 명문대 학생이 된 재황. 하지만 그에게는 결코 평탄한 삶이 주어지지 않는다. 필연적인 가난으로 인해 위험한 유혹에 휩쓸리고 급기야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마수에 빠져든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지켜보는 누군가가 있었으니, ‘관찰자’라는 이름으로 재황을 ‘밥’이라 칭하며 그의 모든 일상을 기록하는 수인이라는 여자다. 수인이 소속된 곳은 ‘목장’이라는 수상한 이름을 간판으로 내 건 비밀 정부 기관으로 '인류를 위한 숭고한 프로젝트'라는 미명 하에 개인을 관찰하고 연구하여, 인종을 개량한다는 엄청난 음모를 가진 곳이다.

 

라는 이 책의 주된 설정에, 주인공 재황은 우수한 유전 인자를 가진 인간이 열악한 환경을 어떻게 헤쳐나가는지를 연구하기 위해 키워진 인물이라는 설정이 얹어진다. 물론, 재황은 이 사실을 모른 채 계획된 운명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그저 살기 위해 24시간을 빈틈없이 살아간다. 때로는 소설을 쓰고, 때로는 승희를 그리워하며.

 

그런 재황을 관찰하는 수인은, 아버지의 불륜을 훔쳐보다 관음증과 조울증 등의 정신 질환을 앓았다. 누군가의 충분한 사랑을 받은 적이 없었다. 누구보다 노력했으나 병력으로 인해 4대 보험이 되는 회사에 취직할 수 없었던 그녀는 자신의 병을 능력으로 인정해주는 ‘목장’에 들어가게 되고, 그녀의 일상은 재황을 지켜보는 일로 가득 찬다. 그렇게, 그녀에게 재황은 점점, 전혀 모르지만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고 멀지만 가까운 존재가 된다. 벼랑으로 내몰린 상황에서 흔들리고 좌절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서는 재황의 모습을 바라보며 수인은 급기야 자신의 존재가 흔들릴 정도로 재황에게 깊이 빠져든다. 그리고, 그 누구에게보다 재황에게서 큰 위로를 받는 수인은 깨닫는다. 자신은 결코 재황의 앞에 나설 수 없는 재황의 그림자일 뿐이라고.

 

 

“이봐, 수인 씨. 난 말이야 마루치를 내 가족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했어. 어느 순간 그렇게 되어 버렸어. 왠 줄 알아? 매일 지켜보는데 한 마디도 건넬 수 없기 때문이었어. 무슨 소린 줄 알지? 그쪽은 아무 대답도 없는데 나의 애정은 무한히 가버리는 거야. 외사랑은 순수하면서도 고통스러워. 메아리가 없기 때문이야. 하지만 외사랑만큼은 영원할 수 있어.” (p.260-261)

 

재황은 아무 대답도 없는데, 수인의 애정은 무한히 가버리고 수인이 재황의 그림자가 되어 재황을 관찰하던 그 시간이 끝나고 수인이 재황을 영원히 잃어버리는 시간이 온다. 그 시간의 수인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 소설의 제목 ‘13월’을 생각했다. 그 누구보다 오기를 바라지만, 영원히 오지 않는 시간.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통제하는 음모 가득한 비정한 감시 사회를 그린 이 소설 속에서라 그런지, 재황을 생각하는 수인의 마음이 애달팠다.

 

소설의 물음으로 되돌아가, 생각한다. 과연 나는 안녕할까? 답은 진즉에 나와 있었다. 안녕하지 못하다.

 

그 10년의 세월 동안 세상은 무섭게 변했습니다. 저는 이즈음에 이르러서야 그런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마음 같아선 내 몸을 편하게 만들어 주었던 문명의 이기들을 하나 둘 버리고 싶지만 결국 그러지 못하리라는 사실도. (p.365)

 

라는 작가의 말처럼, 내 일거수일투족이 관찰되고 나아가 통제될 것을 알지만, 문명의 이기들을 버리지 못할 것을 안다. 그리하여, 앞으로 걸어갈 내 길이 한 층 더 불안하고 쓸쓸하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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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엘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폴리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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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불에 덴 자리에 찬찬히 얼음을 갖다 대듯이 게이스케는 매일 공책에 이야기를 썼다. 그럴 때만 외롭지 않았다. 넘쳐나는 말을 글자로 바꾸어 쓰고 있는 동안은 슬프지 않았다. (p.21)

 

아버지의 부재와 어머니의 무관심, 가난 때문에 친구들에게 집단 폭력을 당하던 게이스케의 유일한 ‘낙’이자 ‘구원’은 매일 공책에 쓰던 동화였다.

 

야요이의 마음은 유치원 다닐 때부터 좋아해온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만 해방되었다. 그 시간만을 버팀목 삼아 하루하루를 보냈다. (p.69)

 

게이스케의 두 눈을 보고 숨을 삼켰던 야요이. 게이스케의 눈은, 야요이 자신이 알고 있는 눈이었다. 본 적 있는 눈이었다. 거울 속에서. 사진 속에서. 숨통이 막힌 듯이 답답한 감정을 어딘가 다른 곳에 가두어두고 온 듯한 눈. 얇은 막이 한 꺼풀 쳐져 있는 듯한 눈. 그 후로 같은 반이 된 게이스케가 몹시 눈에 밟혔던 건, 야요이 역시 아버지의 변태성욕으로 괴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야요이에게 있어 구원은, 어릴 적부터 좋아해온 그림그리기였다.

 

그날부터 리코는 매일 국어 공책으로 마코와 이야기를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책상에 공책을 펼치고 도중에 몇 번이나 연필을 깎으면서 오른손이 피곤해질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학교에서 다리와 배 때문에 놀림당한 일. 특히 싫어하는 반 아이. 점심시간에 칠판에 그려진 자신의 모습. 소풍 갔을 때 내내 혼자였던 것. 할머니와 만든 여러 가지 추억. 히나단 안에 숨었던 일. 거기서 우연히 들은 엄마 아빠의 이야기. (p.133)

 

다리가 굽혀지지 않는 장애와 엄마의 임신으로 소외감을 느끼는 ‘어둠 속의 아이’ 리코에게는 매일 국어 공책으로 이야기 하는 마코가 있었다.

 

축제 음악. 멀리서 작게, 하지만 귀를 기울이자 또렷하게 들렸다. 그 소리는 수화기를 꽉 눌러 댄 귀로 흘러 들어와 몸 구석구석까지 퍼져 나가는 것 같았다. 옛날에 들었던 그 축제 음악. 망대를 들고 바닷가 길을 나아가는 그리운 행렬. 핫피(예전 일본에서 하급 무사나 고용인이 착용하던, 소매가 짧은 상의 - 주) 차림의 남녀가 연주하는 대나무 피리와 큰 북. 전혀 변하지 않았다. 몇십 년이 흘렀지만 기억 속에 있는 소리와 똑같았다.

요자와는 곁에 둔 돋보기를 집어 들었다.

그 옛날의 저물녘 풍경이 눈앞에 있었다. (p.196)

 

자식도 없이 살아오다 아내마저 죽자,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자살을 계획하는 요자와를 살린 건, 그 시절 듣던 축제 음악이었다.

 

리코는 <하늘을 나는 보물>이라는 동화를 읽고 구원을 얻었고, 요자와는 편지를 받고 흔쾌히 축제 음악을 들려 준 사람 덕분에 구원을 얻었는데, <하늘을 나는 보물>은 게이스케가 쓰고 야요이가 그린 동화였으며, 요자와의 편지를 받고 축제 음악을 들려 준 사람은 다름 아닌 게이스케였으며, 게이스케는 초등학교 4학년 담임 선생님이었던 요자와 덕분에 구원을 얻었다는 인연이 참 흥미로웠다. 이런 것이야말로 인연이지, 했달까. 그리고 어쩌면, 인연보다 더 이들을 구했던 건 ‘이야기’였다. ‘이야기’가 있어 각자가 살았고, 끝내는 서로를 살린 그 ‘이야기’ 말이다.

 

아직 이야기를 지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지어봐라. 뭐든지 상관없으니까 지어봐. 그러면 강해질 수 있어. 언젠가 힘든 일이 생겨도 반드시 극복할 수 있다, 라고.

“이야기의 세계로 달아나라는 의미인가 싶었지. 선생님이 그런 뜻으로 말씀하신 줄 알았지. 그래서 그때는 그런 건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오히려 더 슬퍼졌지. 이야기가 현실을 구원해줄 리 없다고 생각했거든.”

그러자 선생님은 마치 게이스케의 생각에 대답하듯이 이렇게 덧붙였다고 했다.

이야기의 세계로 달아나라는 뜻이 아니야. 이야기 속에서 다정함과 강함 등 여러 가지를 보고, 알고 나서 다시 돌아오는 거야. 다른 사람이 지은 이야기도 물론 괜찮아. 하지만 알고 싶은 것을 알려면 스스로 지어보는 편이 나아. 혹시 알고 싶은 것이 뭔지 모른다 해도 분명 찾을 수 있을 거야. 자신이 지은 이야기는 반드시 자신이 바라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법이니까. (p.253-254)

 

게이스케가 초등학교 4학년 시절, 요자와 담임 선생님에게 들었던 ‘이야기’ 이야기에 끄덕 끄덕, 수긍이 갔다. 나 역시 이야기 쓰기를 통해 ‘치유’를 경험한 사람이니까. 경험자로서 말하건대, 정말이지 이야기는 힘이 세다.

 

12월은 1년을 마무리하는 달이지만, 이야기하고 싶은 달이기도 하다. 올 한해가 가기 전에 만나고 싶은 사람과 만나 못 다 이룬 이야기를 나누고, 집에 돌아와 내 이야기를 하나 둘 정리한다. 비록 메모로 하는 이야기지만, 그제야 비로소 나 자신과 대화를 하게 되는 것 같다. 올 한해는 이렇게 살았구나, 토닥 토닥, 해가면서 말이다. 그 곁에, 겨울에 참 잘 어울리는 이 책 『노엘』이 함께해서 따뜻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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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여행 리포트
아리카와 히로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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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북폴리오 리뷰블로거를 2년간 해오면서, 가장 큰 수확이 있다면 고양이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초(정솔)의 『내 어린 고양이와 늙은 개』시리즈와 오야마 준코의 『고양이 변호사』, 종이우산의 『보드랍고 따뜻하고 나른한』, 이용한의 『흐리고 가끔 고양이』, 그리고 이 소설 아리카와 히로의 『고양이 여행 리포트』까지 고양이에 관한 책을 올해만큼 읽은 해가 없었다. 책을 읽으면서 고양이가 귀여워서 미칠 것 같았고, 고양이를 생각하면 먹먹했고, 귀여운 고양이 사진들을 잔뜩 봤고, 우리나라에 있어 고양이라는 동물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아마도 올해 마지막으로 읽은 고양이 책이 될 『고양이 여행 리포트』는 올해 고양이 책을 읽으며 느낀 감정들이 뒤섞여서 읽는 내내 싱숭생숭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 사토루와 단지 그의 은색 왜건이 주차된 자리를 좋아했던 길냥이. 사토루가 챙겨주는 1일 1식을 챙겨 받으며 생활해 온 길냥이 ‘나’가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고, 그 때 ‘나’가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사토루였다.

 

상처가 나을 때까지 사토루의 방에서 지내게 된 ‘나’와 그런 길냥이에 대한 사토루의 마음이 그려진 구절이 인상 깊었다.

 

“내 고양이가 되어주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런 선택은 솔직히 생각한 적 없었다. 태생이 길고양이여서 집고양이가 된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상처가 다 나을 때까지는 신세를 지지만, 상처가 다 나으면 나갈 생각이었다. ……아니, 나가야겠지, 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나갈 거라면, 이제 슬슬 나가주시지, 하고 쫓겨나는 것보다 내가 먼저 나가는 편이 쿨하지 않나. 고양이는 스마트한 생물이니까.

이 집 고양이로 살아주길 바라다니……. 그런 말은 빨리빨리 좀 하라고.

(중략)사토루와 함께 근처를 한 바퀴 돌고, 나는 다시 맨션으로 돌아왔다. 2층 제일 앞에 있는 문 앞에서 야옹 울었다. 얼른 열어.

올려다 본 사토루는 마치 우는 것 같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여기로 돌아오는 거다, 너?”응. 그러니까 빨리 열라고.

“너, 내 고양이가 될 거야?”그래. 그렇지만 가끔 산책 정도는 같이 가자.

이렇게 나는 사토루의 고양이가 되었다.

(p.15-17)

 

고양이 ‘나’가 사토루의 은색 왜건을 좋아했던 건 둘의 인연 덕분이었을까. 길냥이 ‘나’를 원했던 고양이 바보 사토루와 그런 사토루의 고양이가 되어 ‘나나’라는 이름을 얻게 된 ‘나’의 잊지 못할 로드 무비가 담긴 이 책은, 사토루가 나나의 룸메이트로서 더할 나위 없는 인간이었고, 나나 역시 사토루의 룸메이트로서 더할 나위 없는 고양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룸메이트로서 더할 나위 없는 존재라면, 여행 동반자로도 더할 나위 없는 존재이기도 하니까.

라고 쓰는데, 책을 읽을 때 겨우 참았던 눈물이 쏟아진다. 나나의 묘생이 끝날 뻔 했던 그 순간엔 사토루가 있었고, 사토루의 인생이 끝나는 그 순간엔 나나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나서 Pre-Report, 프롤로그를 다시 읽으니 둘은 그런 연(緣)이었구나 싶어서. 그리고, 그 연(緣)은 서로가 만든 연(緣)이라서 더 애달팠다.

 

피할 수 없는 ‘어떤’ 사정으로, 현재이자 과거의 시간을 함께 여행한 사토루와 나나. 사토루는 나나가 있어 행복했을 것이고, 나나는 사토루가 있어 그 여행의 모든 순간 순간이 행복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 둘의 여행을 읽을 수 있었던 내가 제일 행복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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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제로
롭 리이드 지음, 박미경 옮김 / 북폴리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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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튠스가 등장하기 전 최고의 온라인 음악서비스 시스템이었던 랩소디의 개발자이자 리슨닷컴의 설립자로, 음악 및 IT업계의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저술활동을 해온 롭 리이드의 첫 소설 데뷔작인 이 책 『이어 제로(Year Zero)』의 주된 설정은 이와 같다.

 

은하계에는 과학, 예술,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인간을 뛰어넘는 고등생명체들이 존재한다. 이들의 유일한 단점은 음악을 더럽게 못한다는 것뿐. 이들은 지구 음악을 처음 접하고 뇌출혈과 황홀경에 빠진 1977년을 자신들의 원년(Year Zero)으로 삼을 만큼, 로큰롤과 팝 등 지구 음악에 심취한다.

 

소설가 박상의 소설 『15번 진짜 안 와』의 도입부에서 록(Rock) 음악에 빠진 신들이 떠오르는 설정이었다. 여기까지는, 나처럼 비슷한 설정을 접해 본 사람이 있을 수 있는 설정이다. 신 혹은 외계인이 지상 혹은 지구의 음악에 빠진다는 설정 말이다. 여기서, 작가의 이력을 다시 살펴보자. ‘음악 및 IT업계의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저술활동’에 눈이 간다. 이어서, 이 소설의 다음 설정을 읽어보자. ‘그러나 수십 년 후, 빅뱅 이래 최대 규모의 저작권 침해와 부채로 우주는 파산 위기를 맞게 된다. 천문학적인 빚을 갚느니 차라리 지구를 파멸시키려는 은하계 반란 세력이 지구로 침입한다.’라니. 지구 음악을 처음 접한 1977년을 원년으로 삼을 만큼 지구 음악에 심취한 외계인다웠다. 심취해도 너무 심취해버린 나머지 빅뱅 이래 최대 규모의 저작권 침해와 부채로 파산 위기를 맞는 그들. 독자의 입장에서 지켜보면 재밌기 그지없지만, 외계인들 입장에서는 천문학적인 빚을 갚느니 차라리 지구를 파멸시키려는 생각을 한 것 역시 재미있었다.

 

이러한 이야기를 설정해서 소설을 쓰는 건, 비단 롭 리이드만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이야기를 설정에서 그치지 않고, 사실적으로 탄탄하고 맛깔나게 쓰는 건 분명 롭 리이드만의 능력이라 생각한다. 롭 리이드와 같이 IT분야와 음반 산업계를 잘 아는 사람일 수는 있어도 그걸 ‘외계’라는 소재에 녹여낸 건 롭 리이드만의 생각이었을 테니까.

 

특히, 나는 이 구절이 마음에 들었다.

“WoW에서 한국인을 만나면 겁나게 먼 데서 접속한 외계인이라고 생각하면 맞을 거예요. 그에게 현직 대통령 이름이나 서울의 거리 이름을 물어보세요. 분명히 당황해서 말을 더듬을걸요.”

“진짜 한국인은 모두 온라인 트리인가 뭔가에서 이뤄지는 다른 게임을 즐깁니다.” (p.131)

 

외계인들에게는 지구가 출입금지 구역이라, 불법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워크래프트를 통해 인간과 소통을 하는데, 그 때 소통하는 지구인에게 자신들의 신분을 ‘한국인’이라고 한다니. 책을 읽는 내가 한국인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참 재밌는 구절이었다. 외국에서는 외계인이 한국인이라고 둘러댈 만큼 물리적으로 멀게 느껴지는 나라라고 생각하는 걸까 싶어서 말이다.

 

영국의 국민 드라마라 불리는 SF드라마 <닥터 후(Doctor Who)> 애청자인 나는, 외계라는 설정이 낯설진 않았지만, 그 외계에 관한 자세한 설정들은 확실히 어려웠다. 닥터후의 경우, 영상물이다 보니 이해하지 못해도 그냥 볼 수 있었지만 책은 읽고 상상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온전히 읽어낼 자신이 있다면 극단적이면서도 무궁무진한 상상력이 돋보이고,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연상시키면서도, 특유의 신선함과 영리함, 재미를 선사하는 독창적인 책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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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달콤한 재앙
케르스틴 기어 지음, 함미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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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는 지루한 부분을 잘라낸 삶이다. - 알프레드 히치콕

 

알프레드 히치콕의 말처럼, 드라마가 재미있는 이유는 삶에서 지루한 부분을 잘라낸 것이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드라마 아닌 일상을 살아가던 어느 날 당한 불의의 사고로 드라마 같은 삶을 살게 된 여자가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것은 별로 생각하지 않고, 항상 우리에게 없는 것만 생각한다.

-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남편인 펠릭스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지만, 어느새 둘의 애정 생활에 소리 없이 스며든 일상을 보내면서 ‘남편과 죽을 때까지 함께하는 것이 과연 잘하는 짓일까’하는 회의감을 느끼는 여자, 카티가 바로 그 여자다. 그런 카티의 앞에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인 남자 마티아스가 나타나는데, 회의감이 커질수록 카티는 우연히 만난 마티아스를 향한 사랑도 커감을 느낀다. 카티가 불의의 사고를 당한 날은, 마티아스와 카티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그 날이었다.

 

놀라움은 언제나 예기치 않은 곳에서 일어나는 법이다. - 빌헬름 부슈

 

병원에서 눈을 뜬 카티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동요하기 시작하는데, 의식을 되찾은 날이 바로 남편 펠릭스와 처음 마주친 5년 전 그날이었기 때문이다.

 

인생의 갈림길에는 이정표가 없다. - 찰리 채플린

 

그렇다. 카티는 타임 슬립을 한 것이었다.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릴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렇게 카티는 운명과의 전쟁을 치르기로 결심한다.

 

책 중간 중간에 삽입된 격언(혹은 명언)들을 넣어서 줄거리를 정리해봤다. 책을 읽을 때도 격언들을 꼼꼼히 챙겨 읽었지만, 줄거리 사이에 넣어 읽으니 격언이 괜히 격언이 아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격언이란 삶 속에 존재하고, 삶 속에서 나오는 법이니까 당연한 일일지도. 이 책 『이토록 달콤한 재앙』의 핵심은 타임 슬립을 통해 ‘이토록 달콤한 재앙’인 두 번째 삶이 주어졌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하고,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데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삶을 사는 카티의 삶을 읽어 내려가면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선택’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카티의 선택을 수긍하기도 하고, 수긍하지 않으면서 두 번째 삶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는 것이다. 카티의 선택이 낳은 결말을 납득하거나 아쉬워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이 책의 매력은 크게 세 가지다. 타임 슬립이라는 다소 흔하고 익숙한 판타지 코드를 녹여냈지만, 주인공 카티와 카티의 주변 인물들을 둘러싼 각각의 에피소드가 너무나 사실적이고 설득력 있어서 식상하고 허무맹랑한 로맨스 소설로 읽히지 않는다는 점. 부부 혹은 연인 관계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양상을 아주 현실감 있게 보여주며, 사람들이 유혹에 빠지는 과정을 디테일하면서도 위트 넘치는 필치로 그려낸 점. 마지막은, 한국판 속 ‘옮긴이의 말’이다.

소설이 끝나면 이 책을 번역한 옮긴이 함미라의 편지가 이어지는데, 바로 주인공 카티에게 옮긴이가 보내는 편지다. 이 편지는, 책에 대한 옮긴이의 감상 같으면서도 실제 편지 같은 느낌이었다. 편지 형식으로 쓰여진 글이어서 그런지, 꾸밈없이 솔직한 옮긴이의 글을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내가 두 발을 대고 서 있는 이쪽 들판보다 가보지 않은 저쪽 들판이 왠지 더 푸르러 보이는 건 결코 나만 그런 건 아니라고 확신해. (중략) 내가 너처럼 혹시라도 두 번 살 기회가 주어져 다시 선택하게 된다면, 난 분명 나의 마티아스를 선택할 것 같아. 그런데 말야, 정말 신기하게도 결국에는 마티아스인 줄 알고 선택했던 그가 알고 보니 펠릭스였다는 황당한 엔딩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거든……. (결론적으로 펠릭스가 마티아스고 마티아스가 펠릭스가 되는 지극히 현실적인.) (p.365 옮긴이의 글 중에서)

 

책을 다 읽고, 카티의 선택에 대한 내 생각을 정리하는 중에 만난 이 글은 옮긴이 이전에 한 명의 여자로서 카티의 선택에 대한 솔직한 생각을 들을 수 있어서 굉장히 좋았다. 특히, 카티와 같은 유부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점이 내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또, 번역을 하는 내내 카티를 생각했을 번역가의 글이어서 더 와 닿았던 것 같다.

 

행복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행복이다.

- 마리 폰 에브너에셴바흐

 

* 마리 폰 에브네에셴바흐는 어떤 상황을 생각했던 걸까? 나도 그걸 생각하고 싶다.

- 케르스틴 기어

 

위 격언은 책에 담긴 수많은 격언 중에 저자 케르스틴 기어가 유일하게 말을 덧붙인 격언인데, 그래서인지 이 격언은 저자 케르스틴 기어가 이 책 『이토록 달콤한 재앙』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와 가장 맞닿아있는 느낌이었다. 마리 폰 에브네에셴바흐가 어떤 상황을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행복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에 대한 생각을 케르스틴 기어만의 시점에서 풀어낸 글 같았다고나 할까.

 

바로 행복인 그걸 생각하는 작가 케르스틴 기어의 『이토록 달콤한 재앙』 덕분에 내 삶의 진짜 보물이 무엇일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먼 길을 돌고 돌아 자기만의 진짜 행복을 깨달은 여자, 카티의 눈물겨운 여행기이기도 한 이 소설을 읽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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