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별 1 - 경성의 인어공주
나윤희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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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배움이 부족한 건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란다.

충분히 배우고도 바른 말을 못하는 게 부끄러운 거지.

(p.59)

아가씨가 말하는 그 보통 사람들이 정말 보통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예요.

비단 어느 특별한 곳의 특별한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조선의 모든 땅, 조선의 모든 사람들이 중해서요.

그대도, 그대의 벗도, 가족들도.

아가씨가 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내게도 모두 중합니다.

(p.121-122)




광복절에 고래별을 다시 읽으며 깨달았다. 내가 고래별을 끝까지 읽어야지, 마음 먹었던 건 윤화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오래 전부터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약했다.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 학생운동을 하는 사람.

윤화는 독립운동을 하진 않았지만 자신의 삶 안에서는 저항했다. '긴 머리'가 어울리겠다는 명령 아닌 명령에는 불복했고, 한번도 제 뜻대로 살아본 적도 없이 죽기는 싫다고 그렇게 살 수는 없다며 선택했다. 숨소리 한 번 못 내보고 짓밟힐, 마른 땅의 들풀처럼은 될 수가 없어서.

윤화의 선택은 독립운동을 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지 않았을까. 수아에게 네가 뭔지 잊을 수 있을 만큼 멀리 가라던 그 말을, 누구보다 자신에게 들려주고 싶었을 사람.

경성 스캔들의 여경의 말이 떠오른다.

"왜 내가 직접 바꿀 생각은 않고 남이 바꿔주기만을 바랍니까?"

윤화는 그렇게 했다. 남이 바꿔주기만을 바라지 않고, 자신의 삶을 직접 바꾸기로 했다. 나는 그게 윤화의 저항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애석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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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로 인생의 포커스가 먼 미래가 아닌 '지금 바로 여기'에 맞춰졌다. 그전까지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 지금을 희생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이 있었다. 카페에 갔으면서 에스프레소는 주문하면서 몇백 원 비싼 아메리카노를 차마 주문하지 못하는 가난한 마음.

나는 그 몇백 원짜리 '마음의 여유'를 되찾아왔다. 지금 바로 여기에서 행복하지 못하면 내일이 되어도, 먼 미래에도, 타히티에 간다 해도 행복은 없다.

지나친 도약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커피를 마시면서 때때로 마음의 여유에 대해 생각한다. 커피를 마시는 허상의 이미지에 자신을 담기 위해 커피를 마시기 시작하지만 때때로 커피는 '내가 지금 바로 여기에 있다'는 걸 완벽하게 느끼게 한다. 그 순간은 내가 만들어낸 '커피를 마시는 나의 이미지'를 넘어서는 것이다. 커피는 내 몸으로 감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p.57)

나는 반쯤 고의로 나에 대해서 이런저런 오해를 하게 내버려두었다. 정확하게 알게 하는 것은 언제나 두려움을 동반하니까.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에 어떤 식으로든 길을 내고 싶다는 유치한 욕망도 있었다. 즐거움의 길보단 괴로움의 길을 내는 게 더 쉬워 보였고. 이제는 너무 늦은 얘기가 되어버렸지만, 그를 제대로 아는 게 존중이 아니라 그가 나를 제대로 알도록 해주는 게 존중이라는 것을 최근에 깨달았다. 그가 가진 것을 내게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닌 것을 온전한 형태로 그가 받아볼 수 있도록 전달하는 섬세한 마음, 그 정성이 존중인 것 같다. 사람이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을 때마다 성장하고 덜 어리석어진다면 좋겠지만, 그냥 나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아는 여전히 어리석은 사람이 될 뿐인 것 같다.

(p.88)


김영하 작가님 인터뷰에서 인상 깊게 본 구절이 생각난다. 본인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소설은 ‘감동적인 데 막상 밑줄을 치려고 하면 어디에 쳐야 할지 모르는 소설’이라고. 뺄 것도 없고 더할 것도 없어 보이는 작품.

내겐 정은 작가님의 에세이 『커피와 담배』가 그랬다. 이 구절이 좋다고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전문을 언급해야 해서 포기했다. 이 부분이 좋았던 이유는 이이이이이-부분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할 순 없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구절을 추려보았다. 지금 바로 여기에서 행복하지 못하면 내일이 되어도 행복은 없다는 것. 그를 제대로 아는 게 존중이 아니라 그가 나를 제대로 알도록 해주는 게 존중이라는 것.

이전 글에서 이 책의 구절 하나를 소개한 적이 있다. 책장 아래 자리를 선호하는 손님이 했던 말. 커피의 맛은 공간의 합이다. 그 구절을 읽던 그날, 내가 마신 커피의 맛에는 이 책도 합쳐졌다는 생각이 든다. 커피는 지금 바로 여기서, 내 몸으로 감각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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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실없는 이야기로 치부할 테지만, 나는 삶에 환상의 몫이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대면하려는 삶에서도 내밀한 상상을 간직하는 일은 필요하다. 상상은 도망이 아니라, 믿음을 넓히는 일이다.

(p.18)

에른스트 얀들의 시에 "낱말들이 네게 행하는 것이 아닌 네가 낱말에 행하는 것, 그것이 무엇인가 된다"는 구절이 있다. '행복'이 우리에게 가하는 영향력에 휘둘리는 대신, 우리가 '행복'에 무언가를 행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 무언가가 바로 망각이기를 바란다. 그 낱말은 죽은 조상에게 맡기고 그만 잊자고. 할 수 있다면 '불행'도 잊자고.

기쁘고 슬플 것이나 다만 노래하자고.

(p.35)

영화에서 알렉산더가 두 번이나 언급하는 말―그러니 다분히 의도적인―이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틀면, 잠시 후 앞집에서 같은 음악을 튼다는 것. 누구인지 알아볼까 싶기도 했지만, 모르는 채 두는 편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린다. 화답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아채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느꼈기 때문일 테다.

나 역시 이것을 위안으로 삼는다. 어딘가에 나의 메아리가 있다. 내가 혼자라고 해도, 나의 시간에 동반하는 당신의 시간이 있다. 우리는 같은 영원 속에 산다.

(p.73)

하지만 전공을 물어 '문창과'라고 대답하면 상대방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과 창문을 만드는 학과라고 생각해버렸다. 그걸 대학에서 배울 필요가 있는지 의심하면서. 혹은 묻지도 않고 무용과나 연극과라고 짐작하다가 뒤늦게 알고는 "문창과처럼 안 생겼다"고 말했다. 어떤 얼굴이어야 '문창과처럼' 생긴 건지 모르겠지만, 그 말은 하여간 억울했다. 그때 나는 문학에 대한 순정이 있었고, 누구든 내 얼굴에서 그것을 알아채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p.107)

문학은 결국 문과 창문을 만드는 일과 다르지 않나보다. 단단한 벽을 뚫어 통로를 내고, 거기 무엇을 드나들게 하고, 때로 드나들지 못하게 하고, 안에서 밖을 밖에서 안을 살피는 일.

(p.111)





문창과 이야기하는 글까지 넣으면 인상 깊은 구절을 옮기는 정도를 넘는 것 같아 고민했는데, 문창과가 문창과 이야기하는 글을 그냥 지나간다는 건 참새가 방앗간 그냥 지나가는 거랑 같은 거다. 그럴 수 없지.

이외에도 좋은 글이 정-말 많았다. 내가 가장 좋아한 글은 ‘행복을 믿으세요?’다. 사랑은 단지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지 영혼의 상태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고, 그것을 모르면 불행이 닥치는 순간 절망에 빠지게 된다는 시몬 베유의 글에서 ‘사랑’의 자리에 ‘행복’을 넣어 다시 읽는다는 부분이 인상 깊었다. 행복은 단지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지 영혼의 상태가 아니다. 우리는 행복을 향해 가지만, 그 길이 행복하진 않을 수 있고 그렇게 다다른 길 역시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니까.

상반기 최애 뮤지컬 ‘렛미플라이’에서 내가 좋아하는 대사가 떠올랐다.

“너 언젠가 후회하면 어떡해?”

“어떻게 살아도 후회는 해. 난 선택을 했을 뿐이야. 네가 그랬지? 선택하는 게 중요한 거라고.”

“We choose to go to the moon.”

“우리만의 달에서 살자. 우린 그걸 선택하는 거야!”

이 부분에 다다르면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정분이와 남원이는 행복이 가하는 영향력에 휘둘리는 대신, 선택함으로써 행복에 무언가를 행했다고 생각한다. 에른스트 얀들의 시 “낱말들이 네게 행하는 것이 아닌 네가 낱말에 행하는 것, 그것이 무언가가 된다”는 말이 이것이구나 싶었다.

결국 나의 내면을 만든 『시와 산책』을 떠올릴 때면 사랑스러운 이 뮤지컬도 함께 떠올릴 것이라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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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세트] 도미넌트 캐슬 (총2권/완결)
사하 / SOME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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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님 현대물은 처음인데 재밌게 읽었습니다. 외국인남주 미스터리 조합도 신선해서 무더운 여름밤에 읽는 맛이 있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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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공주는 잠 못 이루고 1 공주는 잠 못 이루고 1
흰울타리 / 나인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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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울타리 작가님 오해 키워드 조합 재밌네요! 즐거운 마음으로 2권 읽으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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