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아 아, 사람아!
다이허우잉 지음, 신영복 옮김 / 다섯수레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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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랄까, 이 책은 진흙 속에서 찾은 진주 같았다고나 할까? 중앙공원에서 벼룩시장을 하는데 꼬마 아이가, 책을 여러 권 팔고 있었다. 오래된 책 한 권이 눈에 띄어 보니 제목도 작가도 내겐 생소했다. (이렇게 유명한 책인줄 몰랐던 거다 -_-) 다만 역자인 신영복 선생님을 믿고, 또 함께 있던 지현선생님의 추천을 믿고 산 책, 아니다, 사려고 했다가 선물 받은 책이다

책값은 단돈 500원

책꽂이에 꽂아놓고 시간이 없어 계속 읽지 못하다가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나 이 책을 들었다. 책을 펴는 순간부터 빨려 들어가는 스토리 전개- 정말 잘쓴 소설이었던 거다 . 의외의 수확에 정말 감동하며 모처럼 즐거운 독서를~ 

표지에는 작가인 다이호우잉을 '중국 현대 휴머니즘 문학의 기수'라고 표현했다. '휴머니즘 문학'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또 '사람아 아 사람아!'라는 제목에 부응하게 이 책은 철저하게 사람에 대한 책이다. 표면적인 주인공은 호 젠후, 그리고 손 유에. 이들은 문화혁명시기로 대표되는 중국의 한 시기를 살아오면서 사상을 믿고, 이념을 믿었던, 하지만 그러기에 서로에 대한 사랑은 표현하지 못할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

호 젠후와 손 유에의 사랑 이야기는 이 소설을 이루는 매우 중요한 축이지만 사실 이 책은 이 두 사람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각각 이 시기를 다른 방법으로 살아온 11명의 사람들이 모두 1인칭 시점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완벽한 이상에 젖었던 사람, 그 이상을 현실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사람, 그 이상을 이용하며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그 세대가 겪었던 것들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며 새로운 각오로 살아가는 패기넘치는 젊은이, 그런 것과 전혀 상관 없었지만  그로 인해 삶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소시민까지- 이 사람들은 이 시기의 중국을 살아온 사람들의 전형이다

내가 산 중고책의 원주인이었던 사람도 중문과라고 쓰여져 있는데, 아마 수업의 교재로 이 책을 활용했던 것 같다. 그 시대, 그리고 그 때 그 사람들을 간접적으로 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손 유에라는 인물이 참 매력적이었다. 그녀와 함께한 결혼 생활을 그녀의 전 남편인 자오 젠 호안이 되새기는 모습을 보며

옛날처럼 그녀와 나란히 강가나 거리를 거닐며, 이상을 논하고, 문학과 예술을 이야기하며, 신문에 실린 뉴스에 관하여 의견을 나누고 사랑과 증오를 이야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으아- 이거 완전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결혼인데' 이렇게 책 옆에 적어놨다는 ㅋ

 
그녀의 유고 시집인 연인아 연인아, 그리고 그녀와 남편의 이야기를 적은, 그러나 지금은 절판되어 버린 시인의 죽음까지 힘들게 찾아서 구매했을 정도로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왔던 책,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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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도시
하비 콕스 지음, 구덕관 옮김 / 대한기독교서회 / 199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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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연극을 전공하는 친구가 있다. 고등학교 동창인 이 친구가 연극과로 진로를 선택한 후 나는 이 친구의 공연을 매번 꼭 보러 가리라 다짐했었다. 그러나 포항이라는 지리적 제약은 나의 결심을 쉽지 않게 만들었고, 결국 시간이 지나고 3학년이 되어서야 이 친구의 첫번째 공연을 볼 수 있었다.

그 때 관람했던 작품이 바로 미국의 극작가 ‘아서 밀러’ 의 ‘시련’(The Crucible)이었다. 원작은 1950년 미국 공화당 매카시 상원위원이 반대파를 공산주의로 몰아 이념 공세를 펼쳤던 매카시즘(McCarthyism) 열풍에 대한 비판을 목적으로 쓰여진 작품이었다. 중세 미국의 메사추세츠 주 세일럼이라는 마을에서 비밀리에 악령을 부르는 의식을 준비하다가 목사에게 발각된 소녀들은 악령이 나타났다고 거짓 증언을 하게 되고 이 때부터 목사와 지주를 중심으로 마을 사람들에 대한 심문이 시작된다. 이른 바 ‘마녀 사냥’ 이 시작된 것이다. 선량한 주민들은 소녀들이 지어낸 주장으로 인해 가진 자들의 폭력에 땅과 아내를 빼앗기게 되며 신과 악마라는 이분법적인 구분으로 약자들은 ‘악마의 추종자’ 로 낙인찍히게 되고, 결국 소녀들에 의해 거명된 사람들은 차례로 법정에 끌려나와 교수형을 선고 받는다. 작품의 중심은 결국 강요되는 침묵의 시대에 진실과 존업성을 위해 싸우는 평범한 사람인 주인공 프락터에 맞춰져 있었으며 억압적인 이데올로기들이 얼마나 평범한 사람을 비검하게 만들고 개인의 삶을 얼마나 철저하게 파괴시키는 지에 대해 현대인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큰 작품이었다.

작품이 주는 핵심적인 메시지도 인상적이었지만 그보다는 다른 생각이 그 후로 한참동안이나 내 머리 속을 지배했었다. 당시 연극을 통해 느껴지던 ‘중세’ 라는 배경이 너무나 답답하게 느껴져서 가슴을 턱! 턱! 치면서 혼자 눈물을 흘리며 봤던 기억. 진리가 진리라 통하지 않는 세상이 지구상에 너무나 오래 존재해왔구나, 라는 안타까움. 저들이 믿는 하나님도 내가 믿는 하나님과 다른 분이 아닐진대 명백한 불의를 진리요 하나님의 뜻이라 여기며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내 가슴을 정말 먹먹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을 위해 행한다는 청교도 정신에 의한 강력한 신권정치와 성서에 기준한다고 믿고 있던 그들의 가치관, 세상에 물드는 것을 죄악으로 생각하며 지나치게 정적으로 경건하고 도덕적인 삶을 최고의 삶이라 생각해 왔던 그들. 하나님의 대적하는(것으로 느껴질만한) 것들은 모두 악의 세력으로 규정하며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존재로 보아온 그들의 모습. 그러나 수년이 흐른 지금 내가 보기에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바도 아니었으며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기준으로도 명백하게 그른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 또한 500년 후의 사람의 눈으로 봤을 때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우며 명백하게 옳지 않은 가치관들을 갖고 사는 건 아닌지, 내가 판단하고, 지금 내가 속한 한국 교회의 눈으로 바라보는 이 세상은 과연 옳은 것인지, 어쩌면 내가 중세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그 답답한 눈길로 미래의 후손들이 나를 바라보는 건 아닐지, 그들처럼 나 또한 어리석다 여겨지는 과거의 사람이 되어 있지는 않을런지에 대한 고민을 하니 가슴이 더욱 답답해졌다. 하나님의 생각에 가장 가까운 생각을 하고, 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은데 내 자신이 아예 틀린 틀 속에 들어있으면 어떻게 하지, 라는 고민. 그 때부터 ‘진리’ 에 대한 갈급함이 생겼고, 삶에 있어서 이루어 나갈 목표는 내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여도 도에 어긋남이 없는 ‘종심소욕불유구(從所心欲不踰矩)’ 의 경지라 설정하게 되었다. (공자님도 70세가 되어서야 이르신 경지를 과연 내가 이를 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가장 가까운 생각을 하고 싶다고 결심하고, 부디 어리석은 조상(?)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여러가지 노력을 기울이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그 때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는 나의 고민들이 떠올랐다. 연극을 보며 답답해 가슴을 턱! 턱! 치던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무릎을 탁! 탁! 쳤다. 현재 교계에서 소위 ‘세속적’ 인 것이고 하나님의 뜻에 위배된다며 무조건 금하고 옳지 않은 것이라 했던 것들, 하지만 그 과정에 하나님의 뜻 안에 있고 우리는 그것이 올바르게 갈 수 있도록 대안을 제시하는 비판적 창조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저자의 명쾌한 논리는 막막했던 나의 고민에 신선한 청량제와도 같았다. 물론 저자가 살고 있는 세상보다는 진일보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세속화의 물결에 들어가서 옳고 그름을 판단해 세상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게 한다기 보다는 그것들을 두려워하고 무조건 옳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여 정죄하며 피하고 있다는 부정할 수 없는 현재 교회의 모습은 중세의 그것과 강도에 있어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기본적으로는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정작 그리스도께서는 속된 세상에 세상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믿는다고 고백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저자가 인용한 문구 중에 교회는 “전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를 잠정적으로 보여주는 곳” 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 말을 듣고 나니 정말 하나님께 부끄러워서, 당신의 의도를 구하기도 전에 먼저 판단하고, 지금까지 있어왔던 기준으로 이것은 옳지 않다고 함부로 말해 버리는 한국 교회가, 그리고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서 정말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서 숨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책이 쓰여진 것이 1965년이다 보니 사실 이 책에서 세속화된 미래 사회에 대해 예견한 모습들을 보며 40년이 흐른 지금의 현실과 맞춰 가면서 읽는 재미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느낀 것은 저자의 통찰력이 매우 뛰어났다는 사실이다. 물론 일부는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익명성을 단순히 ‘자유’ 로 규정한 저자의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물론 익명성으로 인해 지연, 혈연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로워지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현대에 와서의 지나친 익명성은 인간 소외 현상으로 드러나는 등 오히려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으며 이는 단순히 자유와 해방의 개념만으로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없는 문제인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약간은 지엽적인 부분을 제외한 전반적인 작가의 논지에는 동의를 보낸다. 혹자는 하비 콕스의 이런 논리가 너무 급진적이고 너무 앞서 나간 것이 아닌가 하는 사람도 있고 그가 의도한 것보다 더 급진적으로 그의 논리를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의 생각과 논지는 너무나 타성에 젖어 있기에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했던 교계에 경종을 울렸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군데군데에는 아직도 잘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지만, 그래도 많이 이해하고, 또 많이 공감하고, 많이 배울 수 있었다.

특히 공감할 수 있었던 부분은 내가 처한 상황 때문인 지 직업과 대학교에 관한 부분이었다. 직업에 대한 부분을 먼저 살펴보면 저자는 세속화가 진행됨에 따라 일하는 장소와 거처하는 장소를 갈라놓았으며 우리가 일하는 곳에 관료주의적 색채를 띠게 했으며 우리의 일이 종교적인 성격을 가질 수 없게 됐다고 말한다. 이 중 세 번째 사실은 약간 충격적이었다. 한동대 와서 수없이 들은 말과 수없이 해왔던 말이 바로 “당신의 비전은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 말이었다. 비전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그 비전을 어떻게 주셨는지를 상세히 간증하고, 비전이 없는 사람들은 “꼭 제 비전을 찾을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라는 말을 하곤 했다. 나 또한 분명 하고 싶은 일이 있고, 내가 두려웠던 건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는 사실. 다들 뭔가 뚜렷한 확신 속에 있는데, 난 단지 흥미와 약간의 적성을 고려한 단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원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내가 저들보다 덜 경건하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심리적 부담감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내가 비전을 위해 열심히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일이 내가 원하는 일이 정말 아니면 어떡하지? 라는 고민까지 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일터로 불러내시는 분이 아닌, 일을 통한 감사와 환희에로 불러주는 분이라는 사실과 우리는 세속화를 통해 일 속에 있는 노이로제적 강제성과 종교적 신비감을 배제하여 사람이 자유롭게 일을 해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점은 그런 생각으로부터 나를 구해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에게 부여된 재능과 흥미로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면 된다는 생각에 마음도 한결 가벼워지고 말이다.

기독교 대학의 부분을 읽으면서 역시 참 많은 고민을 했다. "교회는 대체로 대학교가 기독교적이거나 교회적인 것이 못되기 대문에 비판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대학교는 대학교 답지 못할 때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라는 저자의 말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내가 졸업한 학교를 바라보는 교계의 시선을 볼 때 교계는 우리 학교가 대학의 역할을 감당하길 원한다기 보다 교회의 역할을 감당하기 원하며, 우리 학교의 학생들도 학교에 닥친 여러 문제들에 직면할 때 참 대학생답지 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기에, 내가 선택한 학교를 절대 합리화 시켜주지 못하는, 하지만 예전부터 계속 들어왔던 이러한 생각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우리 학교도 많은 교회들이 시도하려 했던 대학교의 모습들 중 하나의 모델일 뿐이었던 것이다. 결국 우리 학교는 그저 또 하나의 기독교 대학의 실패한 모델이 될 것인지, 아니면 저자가 회의적으로 바라봤던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 대학이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대한 대안으로 존재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할 것이며 그것은 전적으로 구성원들의 역량에 달린 몫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디 구성원들의 역량으로 그 역할을 감당해 낼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이기적인 생각일 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내가 선택한 학교니까. 합리화의 기제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결국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느낀 것들은 내가 너무 경건하지 못한 건 아닌가, 나의 생각이 잘못된 것일까, 라는 ‘하나님의 뜻’ 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억압했던 심리적 기제들에 대한 돌출구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기독교인으로서 경건해야 하고, 그것만이 옳은 것이라는 심리적 부담감이 많이 해소되었고, 오히려 세상의 일을 판단할 때 기존의 타성에 젖은, 교회에서 판단한 하나님의 기준이라 스스로 부여하는 가치가 아닌, 정말 하나님의 정말로 원하시는 바를 조금씩 알아가야만 할 것 같다는 즐거운 부담감이 생긴다. 물론 내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 하나님의 뜻을 모두 알고 통달한(?) 경지에서 하나님 곁으로 달려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감사하고 행복한 일은 없겠지만 꼭 그렇지 않아도 상관 없다. 지금의 내 모습 또한 저자가 말했던 것처럼 결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인가를 향한 과정으로 존재하기에! 이제 예전에 해 오던 “세상적인 것들을 모두 버리고 오직 하나님 바라보며 나아가도록 해주세요” 라는 기도는 더 이상 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 가운데서 오직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 나갈 수 있는 자녀가 되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해야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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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결 2007-08-05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것도 추천해야겠군요;;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W 2007-08-05 21:13   좋아요 0 | URL
앗, 감사드려요 ^^

yamoo 2009-01-30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하비콕스의 세속도시를 아직도 못읽었네요...아직도!! 멋진 리뷰 잘봤습니다~~ㅅㅅ
 
성경과 여성 여성신학 시리즈 2
앨버라 미켈슨 지음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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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경험이 많았던 나는 그 안에서의 남녀 관계에 있어 남학생들이 자신의 권위를 주장할 때보다 여성들이 이러한 성경의 해석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며 자신의 삶에 있어서 주체적이지 못하고, 남성들에게 리드당하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을 볼 때 더 가슴이 답답했다. 그래. 답답했다. 그건 내가 그 말에 대해 충분히 반박할 논거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결국 무지했던 나는 이렇게 답하는 수 밖에 없었다. ‘잘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하나님은 절대 그런 의도로 말씀하셨을 리가 없어.’ 하지만 이미 문자화된 성경의 권위 앞에서 나는 너무나 무력했다.

내게 이 책이 좋았던 건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그 안에서 성경 해석에 대한 다른 방향을 제시해 주었던 것이다. 페미니즘이 극단으로 빠져들게 되면 결국엔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게 되는 일이 많이 발생하는데, 그건 나 또한 원한 바가 아니었기에, 속으로 가슴만 답답해 하고 있었다. 이 책은 물론 100%의 정확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성경을 객관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것들을 또한 객관적인 방법으로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었다. ‘케팔레’ 라는 단어 하나만 놓고도 그 지역과 시대의 상황과 언어적 특징 등을 모두 고려해서 그 정확한 뜻을 파악하는 과정에 있어서 참 조심스러웠던 건 그 정의에 대한 신뢰감을 더해줄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우리가 한 권의 소설을 읽는다 해도 그 시대와 상황을 고려해서 읽어야 하는 거였는데, 지금부터 수천년전에 쓰여진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을 문자 그대로만 보려 했고, 그 시대와 상황을 전혀 보려 하지 않았다니 말이다. 시대와 상황이 다르다고 진리가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진리를 어떻게 표현하는 지에 대해서는 그 시대와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인 것인데, 우리는 너무 눈에 보이는대로, 그것도 수없이 많은 번역 과정을 거친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려 했던 것은 아닌지, 하는 안타까움이 일어났다.

우리는 황석영의 ‘손님’ 이라는 책을 읽으며, 또 여러 상황들을 직/간접적으로 겪으며 성경의 권위라는 것이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 사용될 때 얼마나 무서운 폭력적인 결과를 낳는지에 대해 이미 뼈저리게 느껴왔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오신 이래로 그러니까, 성경이 쓰여진 이래로 여성은 번도 기득권의 입장에 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성경을 해석하는 작업에 참여하는 기회가 거의 없었을 것이고, 성경에 남성의 기득권을 보장하는 내용에 대한 해석은 당연히 남성 위주로 이루어졌을 것이기 때문에 여성들이 성경에 쓰여진 문자적 사실들로 인해 이러한 억압을 받아오게 된 결과는 당연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참 안타깝지만 말이다. 이건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는 일인 것 같다. 아니, 지난 책임을 묻는다기 보다는 나름대로 여권이 많이 신장되었다고 하는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여성들이 동참해서 바꿔야 하는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서 있었던 포럼에서도 여성 신학자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던 것처럼 말이다.

이 책에서 인용된 여성이 당하는 불합리함이 타락에서 비롯한 것이라면, 이제 예수님의 구속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런 것들은 사라져야 한다고 하는 견해는 정말 탁월했다. 물론 그럼에도 풀리지 않은 문제는 있지만,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숙제로 남겨놔도 무방할 것 같다. 케팔레에 대한 정의도 꽤 많은 연구 작업을 통해 상당히 진전된 부분을 보면서 앞으로 성경의 많은 부분들이 이렇게 재해석되고 또 연구 된다면, 적어도 성경으로 인해 그 성경의 권위를 신뢰할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이 억압받는 상황은 오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바울이 여성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지 않았던 건 그 당시에는 여성의 권리가 보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 역시 내게는 시원하게 다가왔다. 그러한 시대적 상황은 이해하려 들지도 않은 채 성경에 적혀져 있는 것만 보고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해 온 남학생들에게 이제는 시원스레 말을 해줄 수 있게 된 것 같아 개인적 차원에서는 정말 그게 기쁘고 감사했다. ^^

이 책을 읽고 서평을 쓰면서는 정말 괴로웠던 순간과 정말 시원했던 순간이 함께 존재했는데, 정말 인정하기 싫은 말이 그 신학자의 중심견해였기 때문에 그 말을 타이핑해야 했을 때는 정말 괴로웠다. 게다가 써머리의 과정에서 주어를 ‘나는’ 이라고 사용했기 때문에 그렇게 치면 이게 정말 내 의견이 되어 버릴 것 같아서 도저히 기쁜 마음으로 타이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그런 의견에 대한 멋진 반박을 해 주는 비평문이 있을 땐 너무 시원한 맘에 자고 있는 방순이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타타타탁! 타이핑을 하는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 아, 내가 이 책에 정말 감정이입을 많이 하고 있구나, 하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렇다. 이 책이 좋았던 한 부분은 논문의 발표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비평을 함께 실었다는 점이었다. 문자화된다는 것 역시 권력의 한 일환이라고 할 수 있고, 그게 독자들에게 읽혀질 때는 비평적 읽기가 불가능한 독자라면 그 말이 절대화 되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상황인데, 이 책은 특히 지식이 전달되는 차원이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이 훨씬 많아 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견이 제시된다면, 이러한 의견 역시 제시될 수 있다는 것 역시 함께 실어 논문에 쓰여진 내용들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비평적 시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또한 읽으면서도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왠지 맘으로 수긍되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 내 맘을 나보다 더 잘 아는 듯이 해 놓은 탁월한 비평들은 나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절대적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이 책은 그 사실을 인정한 것 같아서 참 마음에 들었다.

이 책이 내 책꽂이에 꽂혀져 있는 것을 보고 많은 학생들이 와서 얘기했다. “이 책이 성경의 이해 서평 책이라구요? 잘됐어요! 남학생들도 이런 책을 좀 읽어야 된다니까요!” 라고 말이다. 나 역시 그 말에 기쁘게 동의한다. 그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이해하고 싶은 대로 이해했던 남학생들에게 이 책을 읽어 본다는 작업은 분명 의미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또 한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성경도 그렇게 자신이 해석하고 싶은 대로 해석하고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사용했던 남성들 중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고 또 반성(?)할 수 있는 사람은 또 과연 얼마나 될 것인지. 그래서 꼭 다짐했다. 선생님께 이렇게 말씀드리기로!

“이 책을 제대로 읽고 올바로 이해해서 서평을 쓴 남학생이 있다면, 소개시켜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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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03 1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 증보판
라인홀드 니버 지음, 이한우 옮김 / 문예출판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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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마틴 루터킹 목사 자서전인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를 읽으며 흑인들이 당하고 있는 불평등하고도 불공정한 대우를 바로잡기 위해 비폭력적 사회 저항을 했던 그의 삶에 매우 큰 인상을 받았었다. 그러한 마틴 루터킹 목사에게 사상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친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의 저자 라인홀드 니버였다. 니버의 사상과 저서에 대해 써 놓은 부분을 읽어 내려가며 언뜻 잘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그 부분에서 꽤 큰 인상을 받았었나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자꾸만 마틴 루터킹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가 떠올랐다. 그 때 꼭 한 번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었기에.

책을 펼쳐 드니 여유가 있었다 하더라도 예전에 이 책을 끝까지 읽지는 못했으리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머리를 스친다. 이 책은 여유를 내서 읽을 책이 아니라 맘먹고 읽어야 하는 책이었던 것이다. 긴장하고 마음 독하게 먹고 읽었음에도 이 책은 나에게 정말 쉽지 않은 책이었다.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씨라는 말은 이런 데 쓰라고 있는 게 아닐까?’ 라는 엉뚱한 생각도 해 가면서 읽었지만 책이 너무나 어려워서 이 책을 감명 깊게 읽었다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서히 조금씩 읽어 내려가며 완벽히는 이해하지 못한 그 가운데에서도 이 책의 내용에 조금씩 공감할 수 있었다. 또한 그런 중에 감사한 건, 지식적으로 학문적으로 예전보다는 성숙한 상태에서 이 책을 접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책을 읽어 내려가며 개인의 도덕, 여러 민족의 도덕, 종교, 혁명, 정치 등 다양한 분야와 그것의 대안 가능성에 대해 논하며 계속 이것도 대안이 될 수 없고, 저것도 대안이 될 수 없다는 니버의 글에 조금은 당황했었다. 결국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뭐라는 건지, 그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는 건지, 그렇다면 결국 이 사회에 희망은 없다는 건지에 대한 의문이 계속해서 생겨났다. 도대체 결론을 뭐라고 지을 지가 너무 궁금한 나머지 빨리 결말 부분을 읽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책을 읽는 내내 함께 했다. 

결말까지 읽고 나니 수많은 사람들이 왜 이 책을 그렇게 명서요 필독서로 꼽았는지 이해가 됐다. 우리가 접하는 수많은 책들의 대부분은 ‘하나의 정답’ 을 말하며 그것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하지만 니버의 이 책은 달랐다. 우리가 이상적인 해결책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모든 것들은 완벽한 해결책이 될 수 없지만 또한 동시에 없어서는 안될 요소라는 것을 니버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은 따로 있었을 땐 미흡하고 이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었지만 그러한 요소들이 종국에는 우리 사회를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 줄 것이라는 니버의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언뜻 보기엔, 너무 뜬구름 잡는 것 같은 결론이라며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것이 정답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듯 했지만, 결국 이것은 모두 우리 사회에 조금씩은 필요한 요소들이었던 것이다. 즉 그는 개인적 도덕과 사회적 도덕이 양립하는 방향에서 그 해결책을 찾으려는 변증법적 방안을 사용했던 것이다. 

개인의 윤리와 사회의 윤리는 같을 수 없다. 하지만 사회적 윤리를 위해서 개인의 윤리 의식은 없어서는 안될 요소이다. 도덕적 이상과 사랑 역시 마찬가지이다. 완벽한 대안이 될 수는 없지만 그것으로 대안을 만들어 나갈 수는 있는 것이다. 종교 역시 마찬가지다. 이 책에서 니버는 단 한번도 기독교의 필요성을 얘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종교라는 것 역시 꼭 필요한 하나의 요소라고, 사랑이라는 가치관 역시 어느 정도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하며 종국에는 ‘기독교적 가치관의 필요’ 를 독자들로 하여금 끌어내게 한 부분은 참 인상적이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정치적 강제력 역시 필요한 요소라고 언급했던 부분이었다. 우리는 대부분 강제력이라고 하면 좋지 못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 대부분이며 이 사회에서 없어져야 할 것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니버는 강제력 역시 없어서는 안될 요소이고, 그것을 실행하는 것은 비폭력적인 요소들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간디의 비폭력 주의에 상당 부분 공감하는 듯 보였다.) 이는 강제력은 무조건 없어져야 한다는 도덕적 이상주의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대목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 알기로는 이 책이 쓰여진 시기적 상황이 미국 경제가 공황에 빠지고 세계 곳곳에 독재의 물결이 일던 그 시점에서 세월이 조금 흐른 후일 것이다. (1930년대) 니버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미래를 낙관하고, 인간의 합리성을 고양시킴으로 집단적 이기심을 견제할 수 있다고 보았던 자유주의적 사회과학자나, 양심에 호소해서 자선을 베풀게 함으로서 집단적 이기심을 견제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던 종교적 이상주의자들을 비판하려고 했던 의지가 강했던 같다. 서문을 비롯한 이 책의 곳곳에서 니버는 그들이 사회 조직의 범주 내에서 벌어지는 개인의 문제와 집단의 문제 간의 경중과 관계를 잘 구분하고 있지 못하고 비판하며, 사회집단 사이에 작용하는 운동의 강제성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특히 특권 계급의 집단적 이기심으로부터 발생하는 사회적 부정의는 조정이나 타협에 의해 해결될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이러한 사회집단의 악을 견제하기 위해서 폭력을 사용할 경우엔 이에 대해 다른 폭력이 나타나는 악순환이 계속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책을 읽으며 니버가 대단하다고 느꼈던 건 니버의 이러한 논지가 그가 살던 당시 시대적 상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70년 이상이 지난 오늘날에도 니버의 논지는 조금도 흐름에 뒤떨어지는 논지가 아니며, 지리적 배경이 다르지만 내가 살고 있는 이 곳, 한국의 상황에도 적용될 수 있고 꼭 국가 단위가 아니라 해도 규모에 상관없이 집단 속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일들이다. 이것은 그의 논지처럼 많은 요소들이 집단의 이기성을 견제하기에는 부족했기에 지금에 와서도 집단의 이기심이 예전과 다르지 않고, 이처럼 그의 논지가 통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이미 집단의 이기심의 무서움을 봐 왔으며 현재의 미국의 패권주의와 대 이라크 전을 통해 집단의 이기심이 어떻게 폭력성으로 변해가는 지를 너무나도 여실히 보고 있다. 사회는 힘을 가질수록 점점 비도덕적이고 폭력적으로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꼭 이런 극단적 사례가 아니더라도 사실 지금 나는 집단 이기주의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주지했듯이 멀게는 미국의 패권주의와 이라크 전부터 우리 나라, 내가 살고 있는 지역 사회간의 갈등 및 노사분규, 그리고 가깝게는 내가 졸업한 대학까지 모두가 집단 이기주의에 빠져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개인의 도덕적 잣대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너무나 많이 하지만 그러한 행동들은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라는 제목으로 늘 합리화 되고 있다. ‘종교’ 의 가치와 ‘도덕’ 의 가치와 ‘학문’ 의 가치를 모두 갖춘(혹은 그것을 표방하는) 집단 역시 이렇게 이기적일 수 밖에 없으니 다른 집단은 더 말할 필요도 없는 것 같다. 

이러한 잣대는 나에게 또한 관대하지는 않다. 나 역시 한 집단에 속한 구성원으로서는 도덕적이지 못한 행동을 해온 적이 많았고 앞으로도 많을 것이다. 한국 사회의 구성원으로 나와 다른 집단을 이기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 지, 나 또한 어떤 집단을 대표하는 위치에 서게 됐을 때 나와 집단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을 행사하지는 않을런지 고민이 들었다. 한 때 외국인 노동자들을 편협한 시각으로 바라보던 한국인으로서의 나의 모습, 다른 지역보다 우리 지역이 더 발전해야 하고, 위해 시설은 절대 들어와서는 안된다고 나도 모르게 생각해 왔던 철저한 님비정신(부끄럽지만)을 보이던 지역민으로서의 나의 모습 등을 보며 앞으로 세상을 살아나가는 나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돌아보고 정립해 나가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의 도덕적 이상으로도 될 수 없으니 할 수 없다는 회의적인 시각으로가 아닌, 가능한 모든 방법과 요소들을 모은 최선의 방법으로 말이다. 완벽을 기할 수 없다고 포기하기엔 난 아직 젊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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