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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 출근을 하려는데, 유난히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아, 요즘은 좀 덜했었는데, 아무래도 이번주의 업무를 나보다 몸이 먼저 아는건지 말이다. 마침 잔뜩 가져온 일거리들도 있고 하니, 휴가를 내고 확 집에서 일을 해버릴까-라는 아침마다 매우 자주 하나 현실화된 적은 얼마 없는 고민을 했으나, 늘 그렇듯, 오늘도 회사로 가는 지하철을 탄다. 4호선은 그럭저럭 탈만한데, 문제는 늘 2호선- 사람들 틈바구니에 오늘도 내 몸을 밀어넣으며 꾸역꾸역 지하철을 타는 내가 어째 사람이 아니라 동물인 것만 같다- 심각하게, 그냥 사표를 내버릴까 생각한다. 모아놓은 돈으로 얼마나 살 수 있을까? 그냥 돈조금만 벌면서 커피가게에서 서빙하면 적금정도는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나이 많다고 안받아주려나? 돌아가고 싶었다. 돌아가고 싶은 게 집인지, 주말인지, 혹은 그 전보다 더 오래전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렇지만 생각과는 달리 몸은 이미 프로그래밍 돼있는걸- 강남역에 다다르면 내리고, 계단을 향하고, 올라가고, 찍고 나가고 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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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메신저에서 C와 나눈 대화, 기억에 의해 재편집
우리들의두려움이숲으로돌아가네 님의 말 (이하 : 숲으로) : 나 오늘 출근하다가 돌아가고 싶었어
바다는넓고배는작기에 님의 말 (이하 : 바다는) : 요새 잠잠하더니 왜
숲으로 : 그냥 모든 게 다 무의미한 것 같아서
바다는 : 우리 내일 만날까?
숲으로 : 나 회식이다, 너도 장난 아니구나
바다는 : 간신히 누르고 있지
숲으로 : 스믈스믈 기어오르는 마음을?
바다는 : 아니, 소용돌이치는 마음에 뚜껑덮어놨어
숲으로 : 아무래도 우리 만나면 안되겠다
펀드, 보험, 연금, 할부, 집세, 이런 것들은 사표의 걸림돌
그래서 난 독립도 안하고, 할부는 절대 안한다
회사를 장엄하게 그만두려는 순간, 할부값 따위가 발목을 붙잡는 상황은 절대 만들고 싶지 않아서- 그런데 꼭 할부값이 아니더라도 발목을 붙잡는 것이 한두개가 아니구나. 암튼 당분간 C와의 진지한 대화는 삼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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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오늘 언니들을 만났던 건, 시작 전의 일탈 같은 거였다. 15일 전까지는 꼼짝도 못할 것 같아서, 안경끼고 청바지 입고 출근해서 초췌하게 보고서모드로 좀 살아야 할 것 같아서 그렇다. 우리는 말똥만 굴러가도 까르르 웃는다는 나이의 아가씨들처럼 정말 정신 못차리고 웃어댔다. 생각해보니 정말 나사가 하나씩 풀려 있었던 것 같는데, 배가 아프도록 웃고 나니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계산을 하는데 카페 사장님이 '참 즐겁게들 노시네요'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신다. 10일치 다 웃었으니까, 10일은 좀 웃을 일이 덜 생기더라도 견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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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우리 고등학교 때 국어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근데 생각해봐, 말똥이 굴러가는데 안웃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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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찾아간 카페는 인사동의 레아. 겁도 없이 또 찐하게 마셨다. 덕분에 2시임에도 쌩쌩! 분위기도 깔끔하고, 인테리어도 깔끔하고, 핸드드립 커피맛도 훌륭하고- 우연히 들어가게 됐는데, 앞으로는 자주 가게 될 것 같은 느낌. 천장이 유리로 되어 있어서, 맑은 날에도 비오는 날에도 눈오는 날에도 생각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