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부터 봤던 영화들에 대한 단평을 다른 곳에 모아뒀는데, 여기에도 옮겨둡니다 :)

사실 마지막 두개는 10월 초에 봤어요. ㅎㅎ

 

 

우리 사회가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 잔혹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영화를 다 보고 있었던 관객과의 대화에서 나눴던 이야기들은 정말 끔찍했다. 그녀는 분명 엄마로서 미숙했고, 겁이 많았고, 어느 부분에서는 실수를 했지만, 그래도 그녀가 받은 시험지가 유독 다른 사람들보다 어려운 시험지였다는 사실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을까. 자신도 똑같이 그 과정을 무사히 지나왔다며 타인을 단죄하는 일에 길들여진 사람들을 지켜보는 일이 내게는 이 영화를 보는 일보다 더 괴로웠다. 깨어진 달걀 껍질이 박힌 오믈렛을 씹는 심정으로, 온통 빨간 칠이 가득하게 된 집을 묵묵히 닦아내던 심정으로, 그렇게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분노를 감내하며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은 담담했기에 오히려 더 깊이 가슴에 남았다. 격한 연기 한번 없이 그 모든 감정을 다 표현해내는 틸다 스윈튼은 정말 대단했고, 이즈라 밀러의 눈빛은 좀처럼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다크나이트라이즈의 세계에 들어가면 악당이 되는건가. 내가 맨날 하는 말을 베인이 하고 있네. 명확한 선 긋기가 어려운 지점에 대해 선을 그어 놓고, 너무 한쪽 편만 들어서 오히려 전작이 안고 있던 딜레마가 주는 매력까지 다 뒤집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들었을 뿐이고. 베인이라는 캐릭터가 좀 더 매력적으로 그러져 세계관의 대립이 팽팽했다면 좀 더 매력적인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싶고. 근데 그러기엔 또 그 대립의 지점이 신선하지는 않고. 반전을 위해 악당 캐릭터도 살리지 못하고, 그저 무식하게 힘만 세 보여서 아쉬웠어요. 아이맥스에서 다크나이트 또 해주면 좋을텐데. 큰 화면으로 조커횽아 보고싶네.

 

 

연극으로 만난 작품. 영화는 원작에 약간의 변주만 주었을 뿐 연극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살렸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아이들이 등장하는 것만 제외하면, 연극과 마찬가지로 한 번도 끊기지 않고 리얼 타임으로 현장을 보여준다. 주 무대인 집 안과 복도를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어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었을텐데 그럴 틈을 허용하지 않는다. 상황이 변화무쌍, 스펙터클 그 자체니까. 우아한 포즈로 서로를 배려하던 모습은 위선이었음이 드러나고, 결국 멘붕을 거쳐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은 매우 재밌지만 마냥 웃으면서 남일인 양 지켜볼 수 만은 없다. 영화가 끝날 때쯤이면 네 인물쯤 누군가를 보며 자신이 가진 위선과 가장 비슷한 모습을 지닌 이가 누구인지, 스스로 찾게될 수 밖에 없을테니. 내 경우는....비밀이다. ㅎㅎ 어쩌겠는가... 인간이라는 존재가 원래 그렇고, 그럼에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예의를 차리고 살아야 한다고 배웠으니... 위선의 옷으로 무장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라며 또 스스로의 위선을 합리화하는 교활한 영혼을 보라) 이 작품은 상연될 때마다 늘 그 나라 최고의 연극배우들이 배역을 맡곤 했다는데, 영화 역시 최고의 배우들과 함께한다. 네 배우의 연기를 지켜보는 일은 무척 즐겁다. 추천.

 

 

본격 킬링타임용 영화. (내가 타임을 킬링할 때는 아니지만 ㅎ) 만듦새도 제법 짜임새있으나 후반 총격전에 너무 힘을 주어 길게 끈 나머지 오히려 전체적으로는 힘이 빠져버린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찍어놓은 게 아까워도 과감히 쳐낼 줄 아는 게 때로는 미덕. 전반적으로는 그냥 평균 이상의 영화 정도인 느낌입니다. 그나저나 김혜수는 역시 괜히 김혜수가 아니더라. 예뻐요.

 

 

 

 

 

 

빔 벤더스는 1985년 피나바우쉬의 공연을 보고 반드시 그녀의 모습을 영상에 담겠다 다짐했고, 그로부터 수년이 흘러 3D 기술이 나온 것을 보고 이제야 그녀의 모습을 아름답게 담을 수 있겠다 하여 영화 기획에 착수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암 선고를 받았고, 선고 5일만에 사망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영화에는 피나 바우쉬의 모습이 거의 담겨 있지 않다. 영화에 대한 사전 정보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처음엔 무척 아쉬웠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이르면 이 영화에 담겨 있는 것이 피나 바우쉬 그 자체임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건 3D라는 기술 때문도 아니고, 뛰어난 영상미 때문도 아니다. 생전의 그녀를 사랑했던 사람들의 그녀에 대한 진심, 그리고 피나바우쉬가 춤을 통해 담고 싶었던 그 무엇이 결국 나에게도 닿는 순간이 오기 때문이다. 영화 중간 중간에 그녀의 단원들은 생전의 그녀에 대해 직접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그보다 훨씬 많은 시간동안 온 몸으로 그녀가 안무한 작품들을 통해 그녀를 보여준다. 그 몸짓은 어떤 말보다 아름답다. 말로 할 수 없어 춤을 출 수 밖에 없는 그 순간을 좋아한다. i'd rather dance with you than talk with you 라고 노래하는 킹스오브컨비니언스도 '늦은밤 방한 구석에서 헤드폰을 끼고 춤을 춰'라고 노래하는 브로콜리 너마저도, 그리고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울 거야'라고 하는 검정치마도 모두 좋아한다. 마더에서 춤을 추던 김혜자의 모습도 잊혀지지 않는다. 피나바우쉬도 평생 춤에 대한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녀와 많은 시간을 함께한 부퍼탈 탄츠테아터의 단원들도 그녀에 대한 마음을 그렇게 나타낸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춤도 못추고, 에랄라. 평생 한번 물맞으면서 저렇게 춤한번 춰봤으면 좋겠네. 영혼도 팔겠네. 에헤라디여. 다시 태어나고 싶다.

 

 

 기대는 많이 했는데, 의외로 무난한 평작이었다. 어차피 류승룡을 보러 간 거니 상관 없었다. 하지만 류승룡 출연 분량이.... 류승룡 출연 분량을 더 내놓으시오!!!

 

 

 

 

 

 

 

 

사실 많은 부분에서 참 화법이 거칠고 투박한 영화다. 지나치게 직설적이고, 친절하기도 하다. 너무 잔혹해서 보는 내내 괴롭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마지막 장면이 모든 것을 덮는다. 섬세하고, 아름답다. 오랫동안 마음에 남을 것 같다. 스웨터를 입고 엄마 옆에 눕던 강도의 모습, 새벽 도로에 선명하게 그려진 붉은 자욱. 놓치지 않고 봐서 다행이다.

 

 

 

 

 

 

 너무 많이 울고 웃었다. 사랑스러운 만큼 웃었고, 사랑스러워한 만큼 울었던 것 같다. 뭔가 13년동안 쟤들을 같이 키운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_- 마지막 엔딩 곡이 나오는데 어찌나 감정이 이입되던지... (하지만 동물 공포증인 나는 늑대 아이를 키울 수가 없 ;;; 남자가 늑대로 변하면 도망 ;;;) 풍부하고 섬세하게 그려낸 자연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이 애니메이션의 미덕. 아이들의 이름이 눈과 비여서일까. 눈과 비가 내리는 장면은 여느 영화보다도 생생하고 아름다웠다. 결국은 제 길을 가기 위해 부모를 떠나는 것이 늑대의 일만은 아니기에, 내 부모도 이렇게 짠했겠구나 싶어 더 마음이 쓰이기도 했고... 처음에는 극장에 애들이 너무 많아 좀 의아했는데, 누구나 즐겁게 보고, 각자의 입장에서 자기 몫의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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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2-10-08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니 피나는 아래 썼구나. ㅎ

비연 2012-10-08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둑들>만 봤네요. <피나>와 <늑대아이>가 보고 싶구요. <케빈에 대하여>는 보고는 싶은데.. 넘 무거운 느낌일까봐 피하게 된다는.

웽스북스 2012-10-14 20:31   좋아요 0 | URL
네. 무겁긴 해요. 저는 책으로도 사놨는데 차일피일중.

마늘빵 2012-10-08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나는 전 영화 음악도 샀어요. 음악 들으면서 봄, 여름, 가을, 겨울 춤도 춰요.

웽스북스 2012-10-14 20:31   좋아요 0 | URL
아프님은 동영상을 공개하라. 공개하라.

2012-10-08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늑대아이, 저도 너무 좋게 봤어요. 몇 번씩 울컥 하며.. 모두가 각자 자기 얘기를 완성하는 영화. 누구의 몫도 빠지지 않으며, 그러나 물 흐르듯 욕심없이 아름답게 전개되며.. 전 이 영화에 완전 반했지용~^^

웽스북스 2012-10-14 20:32   좋아요 0 | URL
네 :) 저도 너무 잘 봤어요~ 오미야게미쯔, 타코미쯔!

카스피 2012-10-08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참 좋은 영호가 많네요.예전에는 참 많이 봤는데 요샌 도통 안봐서 무슨 영화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더군요^^;;;

웽스북스 2012-10-14 20:32   좋아요 0 | URL
영호는 철호 친구? (앗 죄송) 세상엔 좋은 영화가 참 많은 것 같아요 ㅎㅎ

굿바이 2012-10-10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그러니까!!!!! 베인의 캐릭터를 살렸으면 참 좋았을텐데 싶었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감독이라고 생각하는데 어째 그랬을까 싶네. 여튼 영화를 보면서 나는 참 법 없이 살 수 없는 무능한 사람임을 또 깨닫고! 법 없이 살 수 있는 사람들 짱 부럽더라 ㅜㅜ

웽스북스 2012-10-14 20:33   좋아요 0 | URL
저도요. 저도 법없이 못살아요. 법의 테두리 안에서!!
베인은 정말 아쉬웠어요. ㅠㅠ
 


빔 벤더스는 1985년 피나바우쉬의 공연을 보고 반드시 그녀의 모습을 영상에 담겠다 다짐했고, 그로부터 수년이 흘러 3D 기술이 나온 것을 보고 이제야 그녀의 모습을 아름답게 담을 수 있겠다 하여 영화 기획에 착수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암 선고를 받았고, 선고 5일만에 사망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영화에는 피나 바우쉬의 모습이 거의 담겨 있지 않다. 


영화에 대한 사전 정보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처음엔 무척 아쉬웠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이르면 이 영화에 담겨 있는 것이 피나 바우쉬 그 자체임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건3D라는 기술 때문도 아니고, 뛰어난 영상미 때문도 아니다. 생전의 그녀를 사랑했던 사람들의 그녀에 대한 진심, 그리고 피나바우쉬가 춤을 통해 담고 싶었던 그 무엇, 그것이 결국 나에게도 닿는 순간이 오기 때문이다. 영화 중간 중간에 그녀의 단원들은 생전의 그녀에 대해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그보다 훨씬 많은 시간동안 온 몸으로 그녀가 안무한  작품들을 통해 그녀를 보여준다. 그 몸짓은 어떤 말보다 아름답다. 세련되고 쭉쭉 뻗은 아름다운 몸이 아니라, 패이고 주름진, 하지만 평생의 삶이 담겨 있는 몸이다. 그래서인지 어떤 완벽한 아름다움보다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말로 할 수 없어 춤을 출 수 밖에 없는 그 순간을 좋아한다. i'd rather dance with you than talk with you 라고 노래하는 킹스오브컨비니언스도 '늦은밤 방한 구석에서 헤드폰을 끼고 춤을 춰'라고 노래하는 브로콜리 너마저도, 그리고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울 거야'라고 하는 검정치마도 모두 좋아한다. 마더에서 춤을 추던 김혜자의 모습도 잊혀지지 않는다. 피나바우쉬도 평생 춤에 대한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녀와 많은 시간을 함께한 부퍼탈 탄츠테아터의 단원들도 그녀에 대한 마음을 그렇게 나타낸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춤도 못추고, 에랄라. 평생 한번 물맞으면서 저렇게 춤한번 춰봤으면 좋겠네. 영혼도 팔겠네. 에헤라디여. 다시 태어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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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나라의 장난

 

김수영

 

팽이가 돈다

어린아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 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 한번 팽이를 돌려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도회 안에서 쫓겨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느 소설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정말 속임 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집을 가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

마치 별세계같이 보인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니 이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던지니

소리없이 회색빛으로 도는 것이

오래 보지 못한 달나라의 장난 같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 벽화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이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 년 전의 성인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애정지둔

 

김수영

 

조용한 시절을 돌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사랑이 생기였다

굵다란 사랑

누가 있어 나를 본다면은

이것은 확실히 우스운 이야깃거리이다

다리 밑에 물이 흐르고

나의 시절은 좁다

사랑은 고독이라고 내가 나에게

재긍정하는 것이

또한 우스운 일일 것이다

 

조용한 시절 대신

나의 백골이 생기였다

생활의 백골

누가 있어 나를 본다면은

이것은 확실히 무서운 이야깃거리이다

다리 밑에 물이 마르고

나의 몸도 없어지고

나의 그림자도 달아난다

너는 나에게 대답할 것이 없어져도

쓸쓸하지 않았다

 

생활무한

고난돌기

백골의복

삼복염천거래

나의 시절은 태양 속에

나의 사랑도 태양 속에

일식을 하고

첩첩이 무서운 주야

애정은 나뭇잎처럼

기어코 떨어졌으면서

나의 손 위에서 신음한다

가야만 하는 사람의 이별을

기다리는 것처럼

생활은 열도를 측량할 수 없고

나의 노래는 물방울처럼

땅속으로 향하여 들어갈 것

애정지둔

 

 

구라중화

- 어느 소녀에게 물어보니

너의 이름은 글라디올러스라고

 

김수영

 

저것이야말로 꽃이 아닐 것이다

저것이야말로 물도 아닐 것이다

 

눈에 걸리는 마지막 물건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듯

영롱한 꽃송이는 나의 마지막 인내를 부숴버리려고 한다

 

나의 마음을 딛고 가는 거룩한 발자국 소리를 들으면서

지금 나는 마지막 붓을 든다

 

누가 무엇이라 하든 나의 붓은 이 시대를 진지하게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치욕

 

물소리 빗소리 바람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곳에

나란히 옆으로 가로 세로 위로 아래로 놓여 있는 무수한 꽃송이와 그 그림자

그것을 그리려고 하는 나의 붓은 말할 수 없이 깊은 치욕

 

이것은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을 글이기에

(아아 그러한 시대가 온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냐)

나의 동요 없는 마음으로

너를 다시 한 번 치어다보고 혹은 내려다보면서 무량의 환희에 젖는다

 

꽃 꽃 꽃

부끄러움을 모르는 꽃들

누구의 것도 아닌 꽃들

너는 늬가 먹고 사는 물의 것도 아니며

나의 것도 아니고 누구의 것도 아니기에

지금 마음 놓고 고즈넉이 날개를 펴라

마음대로 뛰놀 수 있는 마당은 아닐지나

(그것은 골고다의 언덕이 아닌

현대의 가시철망 옆에 피어 있는 꽃이기에)

물도 아니며 꽃도 아닌 꽃일지나

너의 숨어 있는 인내와 용기를 다하여 날개를 펴라

 

물이 아닌 꽃

물같이 엷은 날개를 펴며

너의 무게를 안고 날아가려는 듯

 

늬가 끊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생사의 선조뿐

그러나 그 비애에 찬 선조도 하나가 아니기에

너는 다시 부끄러움과 주저를 품고 숨 가빠하는가

 

결합된 색깔은 모두가 엷은 것이지만

설움이 힘찬 미소와 더불어 관용과 자비로 통하는 곳에서

늬가 사는 엷은 세계는 자유로운 것이기에

생기와 신중을 한 몸에 지니고

 

사실은 벌써 멸하여 있을 너의 꽃잎 위에

이중의 봉오리를 맺고 날개를 펴고

죽음 위에 죽음 위에 죽음을 거듭하리

구라중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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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2-04-29 0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5도 안봤는데, 좋은 시가 너무 많아 -_- 시집 전체를 옮길 기세 ;;;;;
 

 

하이킥이 끝났다. 아. 지난 몇개월간, 나는 거의 하이킥 '당일보기' 원칙을 매일 매일 지킬만큼, 하루의 끝을 하이킥과 함께했었다. 오늘의 하이킥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

 

어제 하이킥이 막방인지도 모르고, 나는 금요일 하이킥 본방사수를 어찌해야하나, 집에 얼른 들어가서 IMBC로 봐야하나, 10.1인치 갤럭시탭을 빌릴까, 암튼 약속은 없어야하고, 요가는 목요일에 미리 가야한다며 나름 원칙을 정해두고 목요일에 야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트위터에 하이킥 막방이 오늘이라며 ㅠ 부랴부랴 아이폰 앱을 켜고, 중간부터 보기 시작했다. 결말을 다른 누구로부터 들을 수는 없다는 강렬한 의지.

(여기부터는 스포스포-뭐 세상에 널리고 깔린게 하이킥 스포이지만)

여기까지가 소설 짧은 다리의 역습의 끝이다.
소설이라기보단 전부 실화죠. 마지막 에필로그만 뺴고. 마지막 에필로그는 그저 저의 상상입니다.

 

하이킥은 내레이터였던 이적의 소설이 마무리되는 것으로 결말을 짓는다. 처음에는 당연히 '여기까지'가 소설이라고 생각했고 '마지막 에필로그'가 승윤 부분이라고 생각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이킥의 결말이 줄 충격을 기대하고 두려워했는가. 그런데, 아무것도 뚜렷한 결말을 보여주지 않는 밋밋한 결말. 어떻게 보면 결말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은 거고, 사실은 그것이 현실에 가깝겠지, 라고 생각을. 삶을 흐르게 두는 일이 쉬운가. 하지만 삶은 흐르는 것이지. 오히려, 명확한 종지부를 찍는 일은 쉽지. 하지만 그는 그럴 수 없는 영혼. 그러면서도, 지원이 학교를 나가는 부분이나 하선과 지석의 이별과 재회 장면이 좀 더 설득력 있게 그려졌으면 어떨까 라는 아쉬움이 살짝 남았었다. (한국과 미국이 그렇게 멀었던가. 2개월이 그렇게 길었던가) 주변에 오늘 마지막회 자체가 에필로그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나는 그런 여지가 별로 없다고 봤었다.

암튼, 허전한 마음으로 디씨인사이드 하이킥3 갤을 들어가서 이런저런 글들을 살펴보다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누군가의 글에 이렇게 써있는 것을 봤다.

"하이킥 결말을 보니, 영화 <어톤먼트>가 생각났어요"

 

이 글을 보는 순간, 쨍, 하는 느낌이 든 거다. 아. 어톤먼트. 그 순간 마지막회가 다시 짜맞춰지기 시작했다. 확인을 위해 다시 한 번 마지막회를 다운로드 받아서 봤다. 하선이 공항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힌다. 그리고,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라고 지석이 말한다. 사실은 거기가 실화의 끝, 이고 오늘 에피소드 전체가 에필로그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렇게 문이 닫히는 장면으로, 마지막화는 시작되었고, 그래서 평소와 분위기가 좀 달랐고, 조명은 한 톤 다운 되어 있었던 거였던 걸까.

 

사실 나는 영화 어톤먼트를 보지 못했다. dvd는 사놨는데 노트북이 고장나고 맥북을 사는 바람에. 대신 이언 매큐언의 원작 소설 <속죄>는 매우 인상적으로 봤었다. 사실 볼 때보다, 보고 나서가 계속 기억나는 작품인데, 그건 다 마지막 부분, 브리오니의 독백 때문이었던 것 같다.

 

(여기부터는 <속죄> 스포스포 ㅠ)

'속죄'에서의 해피엔딩은 결국 주인공이 자신이 젊은 시절 그들에게 저지른 잘못에 대한 하나의 속죄의 의식이었다. 의지적으로, 그렇게라도 그들의 삶을 아름답게 남겨두고 싶었던 것. 그들의 사랑은 실제로는 아름답게 이루어지지 못했고, 삶은 비극적이었지만, 그들에게는 행복을, 독자들에게는 만족감을 주기 위해 그러한 선택을 한 것. 그러니까 <속죄>라는 소설로서의 이 결론은 결국 앞의 소설 전체를 부정하는 게 되지만, 그럼으로써 오히려 그들의 삶을 긍정해주는 듯한, 그러면서도 매우 냉정하고, 바늘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게 서늘한, 그러니까 한마디로는 설명할 수 없던 그 마지막 부분을 읽었을 때의 감흥은 잊혀지지가 않는다.

그러나 이제 나는 독자들에게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로비 터너가 1940년 6월 1일 브레이 듄스에서 패혈증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혹은 세실리아가 같은 해 9월 밸엄 지하철역 폭격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해에 내가 그들을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런던을 가로지르는 나의 도보여행은 클래펌 커몬의 그 교회에서 끝이 났다는 사실을, 겁쟁이 브리오니는 그 둘을 마주 대할 용기가 없어서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병원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연인들이 주고받은 편지는 지금 모두 전쟁박물관 문서보관소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런 일들이 어떻게 결말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런 일들에서 독자가 희망이나 만족감을 얻을 수 있겠는가? 연인들이 두번 다시 만나지 못했고,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을 누가 믿고 싶어할까? 냉혹한 사실주의를 구현한다는 것을 빼면 그런 결말이 가져올 장점이란 과연 무엇인가? 나는 그들에게 그런 짓까지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너무 늙었고, 너무 겁을 먹었고, ...... (중략)

 

연인들을 살려두고 마지막에 다시 만나게 한 것은 나약함이나 도피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니라 마지막으로 베푼 친절이었고, 망각과 절망에 맞서는 투쟁이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나는 그들에게 행복을 주었지만 그들이 나를 용서하게 할 만큼 이기적이지는 않다. 그럴 만큼 이기적이지는 않다. 아직 그만큼은 아니다. (이언매큐언, 속죄)

 

하이킥과 어톤먼트가 연결이 되는 순간, 퍼즐이 풀리듯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굳이 스토리텔러이자 내레이터로 소설가인 이적이 등장해 이야기를 시작한 건, 처음부터 이런 마무리를 하기 위한 거였구나.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은 이적이 그의 젊은 시절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고, 사랑하는 아내의 소중한 순간들을 함께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선물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짧은 다리를 가진 사람들은 역습을 하기엔 다리가 너무 짧았지만, 그래서 어쩌면 안내상의 사업은 안쓰럽게 끝났을지도 모르고, 지원은 학교를 박차고 나오지 못하고 결국 르완다로 떠나지도 못한 채 살아갔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하선은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지석은 다시 그녀를 볼 수 없었을 지도 모르지만, 소설에서는 그들에게 아름다운 결말을 선물함으로써, 최소한 불꽃을 터뜨리게 함으로써, 최소한 학교를 뛰어나오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최소한 둘을 다시 만나게 함으로써, 어떤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으로 그들의 삶을 감싸주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어젯밤에는 이 결론에 확신을 갖고, 내가 마지막회를 오독했다고 생각했고, 확신을 갖기 위해 김병욱이 이언매큐언을 좋아한다는 증거를 찾아 헤맸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ㅜㅜ 아침에 일어나니, 이 해석이 좀 과도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긴 했는데, (심지어 저녁에 본 기사에는, 제작진이 상상한 부분은 '승윤 대통령 에피소드'였다고 콕 찝어줌) 그래도 나는,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을 이렇게 기억하는 편이 훨씬 아름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직도 한편으로는 그런 의도가 조금은 있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하고 있다. 적어도, 세번의 하이킥을 통해 김병욱 월드를 만났던 사람이라면, 이렇게 해석하는 일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아는 김병욱은 지독한 사실주의자였으니 말이다.

우리가 살면서 갖는 꿈들은 어쩌면 그 샴페인처럼 그냥 환상일지도 모른다. 실제는 별 것도 아니거나, 끝내 도달할 수 없는. 내게 김지원도 명인대도 그런 하나의 환상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 환상이 있어, 사람들은, 달린다. (하이킥 마지막회, 종석의 대사)

 

어쨌든 변함없는 건, 하이킥은 다리가 길던 짧던, 알고보면 별 것도 아니거나, 끝내 도달할 수 없는 그 무엇일지라도, 달려보는 것 그 자체를 응원하고, 그게 삶의 과정이고, 본질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 사실 끝까지 달려도 결론이 나지 않는 삶이 대부분이니까. 우리는 대부분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으니까. 이런 결말을 수긍할 수 없다는 사람들도, 사실은 다들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어떤 결말이건 간에, 결국엔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 우리의 삶처럼.

 

어찌됐건, 나는, 이번에도 하이킥의 결말이 반갑고 고맙다. 실은 어떤 결말도, 그렇게 반갑고 고맙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여전히, 그의 새로운 이야기를 기다리고, 또 기대한다 :)

 

 

 

 
그리고, 덕분에 이 작품도 다시 기억했고 :) 또 다시 만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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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12-03-31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다. 웬디양님, 좋아요.
아직 하이킥 마지막회를 못봤지만 하이킥을 이렇게 볼 수 있고 읽을 수 있는걸 보니까 마지막회를 안 봐도 좋을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텐아시아 기사는 와닿지 않았는데 웬디양님 글이 더 설득력 있어요. 제작자의 의도는 잘 모르겠지만.

웽스북스 2012-04-01 17:32   좋아요 0 | URL
우와. 아치님. 진짜진짜 고마워요!!!! 쓰면서도 사실 너무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 같아서 자기 만족으로라도 두고 싶어서 쓴 거였는데, 좋아해주시니 감격 감격 ㅠㅠ

마태우스 2012-03-31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윽..읽다보니 스포가 있어서 잽싸게 스크롤 내렸습니다. 저랑 아내는 하이킥 매니아로, 본방사수를 못할 때가 많았지만 못본 건 죄다 쿡으로 봤답니다. 이번주 건 하나도 못봐서 언제 몰아서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이따가 보기로 했어요. 그러니 진짜 댓글은 이따가 남길게요. 지하킥이 비극으로 끝나서 이건 안그러길 바라고 있습니다.

마태우스 2012-03-31 21:00   좋아요 0 | URL
댓글 남기고 나서 제가 못본 월~목을 쿡으로 봤습니다. 제가 사실 백진희랑 김지원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데요 그 두명이 굉장히 많이 나와서 재미가 없었습니다. 결말도 그랬구요. 허무한 결말에 그간 이 드라마에 제가 쏟아부은 본전이 생각나려 했지만 님의 페이퍼는 저로 하여금 그런 것만은 아니구나,는 생각을 하게 해줬습니다. 심층분석을 해주신 것에 감사드려요. 글고보니 하이킥 때문에 하루가 즐거웠던 적도 꽤 많았네요. 특히 하선이 무서워지려고 노력했던 그 회가 제일 대박이었어요.

* 요즘같은 시대에 미국간 연인이 안돌아온다고 침대에서 뒹굴고 있다는 게 정말 이해가 안갔답니다.

웽스북스 2012-04-01 17:34   좋아요 0 | URL
히히. 스포 경고 쓴 보람 있네요. 마태우스님이 덕분에 스포를 피해갔네요.

저도 그 부분이 참.....이해가 ㅠㅠ 정작 하선은 미국을 제집처럼 왔다갔다 드나드는데 지석이한테는 그렇게 먼건가. 무슨 과일 사준다고 외국도 가려고 했으면서..... 그점만 무슨 70년대 같았어요. ㅠ

저도 하이킥에 대한 기억이 좋아서, 마지막도 잘 기억해주고 싶어요 :)

jongheuk 2012-03-31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어톤먼트! 저도 하이킥 마지막회를 보고 한참동안 골똘히 어떻게 이 결말을 받아 들여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엄청 큰 힌트를 공짜로 선물받은 것 같아 기쁩니다. 감사해요! 하이킥은 제게 하루 하루 스트레스를 풀 기회를 제공해 주는 선물과도 같은 프로그램이었어요. 그래서 잔잔한 결말도 나쁘지 않게 받아 들였고, 끝났다는 사실에 더 크게 아쉬워했던 것 같아요.

웽스북스 2012-04-01 17:36   좋아요 0 | URL
아. 저도 그랬어요. 저는 지붕킥할 때 막 회사를 옮겼는데, 그 때 몸과 마음이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집에 돌아가면 쓰러져서 아무것도 안하고 하이킥을 봤었어요. 그 때 그게 얼마나 힘이됐는지. 그래서 이번 하이킥도 매일매일 노히지 않고 보려고 애썼거든요.

그나저나, 자의적으로 쓴 글인데 좋게 해석해주시니 기쁜데요. :) 종혁님도 어톤먼트 좋아하셨었군요.
 

 

영화 <화차>를 보고 집에 와 바로 책을 찾았다. 그런데, 아뿔싸! 분명히 중고로 산 것 같았는데, 내게는 책이 없었다. 나는 표지도 기억하고, 내 책장에 꽂혀 있던 모습도 기억하는데, 이상한 일이다. 찾다 결국 포기하고 새 책을 구매했다. 꼭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니었으나, 때마침 알사탕 500개 이벤트에 바로 넘어가버린 것이다. ^-^v 딱 하루! 라고 얘기만 안했어도. ㅠ_ㅠ

 

책은 영화보다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경선(김민희 역)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던 영화에 비해  책은 교코(영화 속 김민희, 경선)와 쇼코(김민희에게 신분을 빼앗긴 여자, 선영)에게 시선을 고루 안배하고 있었다. 교코가 부모 세대의 내집 마련의 과열된 욕망에 의한 결과를 담아낸 인물이라면, 쇼코는 신용카드 발급이 자유로워져서, 미래를 저당잡히고 현재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었던 그 다음 세대의 모습을 담아낸 인물이다. 영화가 선이 굵은 스토리를 취하며 성큼성큼 앞으로 가고, 원작에는 없는 뚜렷한 결말로 대중성까지 잡아냈다면, 책은, 좀 더 어둠속을 헤매며 한발한발 조심스레 내딛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 과정에서 좀 더 살피고, 좀 더 보듬는다. 그들을 둘러싼 사회 구조에 좀 더 집중하고, 결국 피해자와 가해자였던 그들이 사실은 서로 닮아 있었음을, 같은 고통을 짊어진 이들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시 그 구조 속에서의 그녀들을 통해 스스로를 보게 하고, 내가 속한 사회를 보게 한다. 누군가는 그들을 타자화하는 서늘한 시선들 속에 자신이 있음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텍스트'라는 도구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둘은 존재의 이유와 그 화법이 엄연히 다르구나, 라고, 적어도, '화차'라는 작품을 가지고 만든 영화와 그의 원작인 책을 시간차를 거의 두지 않고 보는 동안,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옛날에는 자기 착각대로 살아볼 만한 군자금이 아무한테나 없었잖아요? (중략) 그렇지만 지금은 별 것 아니에요. 꿈을 꾸기로 마음먹으면 간단하죠. 하지만 그러려면 군자금이 필요하고, 돈이 있는 사람이야 자기 돈을 쓸테죠. 그러니까 자기 돈 없이 '빚'이라는 형태로 군자금을 만드는 사람은 쇼코처럼 되는 거에요.

이 책을 읽으며, '쇼코'에게 더욱 마음이 갔다. 피해자여서, 안쓰러워서가 아니라, 그녀의 삶의 양태가 나와 어느 정도는 닮아 있어서이다. 어쩌면, 나도 쇼코처럼 착각 속에 살고 있는 지 모른다. 현재의 나, 와 내가 생각하는 나 사이의 간극을 빚으로 메워 가면서. 안락한 듯 보이는 현재는 무언가를 저당잡았기에 가능한 모습은 아닌가. '빚'이라는 형태로 군자금을 만들고, 힘겹게 대출 이자를 갚아 나가며 살면서도, 물욕을 버리지 못하고, 쉽게 취하고, 쉽게 버리며, 자아 아닌 것에 자아를 투영하고 있지는 않은가. 계속 좀 더 나은 삶을, 좀 더 누리는 삶을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좀 더 나은 내가 되는 길이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끔은 그 길이 지름길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뱀은 허물을 벗잖아요? 그거 실은 목숨 걸고 하는 거래요. 그러니 에너지가 엄청나게 필요하겠죠. 그런데도 허물을 벗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중략) 죽어라 허물을 벗다 보면 언젠가 다리가 나올 거라 믿기 때문이래요. 이번에는 꼭 나오겠지, 이번에는, 하면서." 

다리 따위 없어도 상관없잖아요. 뱀은 뱀이니까. 그냥 뱀이니까. 후마에가 중얼거렸다.

"그런데도 뱀은 생각해요. 다리가 있는 게 좋다, 다리가 있는 게 행복하다고. (중략) 이 세상에는 다리를 원하지만 허물벗기에 지쳐버렸거나 게으름뱅이거나 벗는 방법을 모르는 뱀이 수없이 많다는 거죠. 그래서 그런 뱀들에게 다리가 있는 것처럼 비춰주는 거울을 파는 뱀도 있다는 말씀. 그리고 뱀들은 빚을 내서라도 그 거울을 사고 싶어하는 거에요."

 

결국 이 책은 영화보다 긴 여운으로 마음에 남는다. 누군가는 영화를 보고 신용카드를 잘랐다는데, 나는 오히려 그럼에도 신용카드를 자르지 못한 채 현재의 삶을 유지하고 있는 나를 본다. 삶의 방식이라는 것은 신용카드보다 질긴 놈이라 가위로 쉽게 잘라지지는 않는다. 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언젠가는 다리가 나올 지도 모른다는 허황된 기대감으로, 나는 여전히 다리를 비춰주는 거울을 찾아다니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꼭 나만의 이야기인가.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이야기. 원작의 배경은 90년대이지만,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 20년간 그 화차는 끊임없이 앞으로 질주해 왔겠지. 끝이 훤히 보이는 길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참 아슬아슬하고, 그럼에도 신발끈을 고쳐매지 못하는 스스로가 참으로 안쓰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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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3-20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님..
글 진짜 잘쓴다. 네꼬님하고 쌍벽을 이루는 듯해요. 멋져.. ♡.♡

웽스북스 2012-03-22 23:18   좋아요 0 | URL
우엥. ㅋㅋㅋ 그래도 다락방님이 칭찬해주니 좋네요. 하트뿅뿅 눈으로.

레와 2012-03-20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소 느꼈지만, 웬디양님 글 참 좋아요!! '좋아요'를 마구 눌러주고 싶어.

원작이 있는 영화는 꼭 원작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자는 주의인데, '화차'는 어긋났어요.
영화를 보고나니 원작을 읽을 여력이 소진되었달까.. 해서 책은 패스하자 그랬는데, 웬디양님 글보니 원작도 읽어보고 싶네요. ^^

웽스북스 2012-03-22 23:21   좋아요 0 | URL
우힝. 감사요. ㅋㅋ
원작 꼭 읽어보세요 레와님!!!! 저도 패스하려고 했는데 알사탕이 저를 구했어요 ㅋㅋ

치니 2012-03-20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원작을 엊그제 읽었어요. 제가 읽은 건 2003년 판인가 2번 째 개정판이었어서 그랬는지, 군자금이란 말이 안 나왔던 듯. ㅎ 그건 중요치 않고,
전체적으로 웬디님 말씀에 공감인데, 저는 영화가 영리하게 잘 바꾼 부분도 꽤 있다 느꼈어요.
이선균의 연기가 너무나도 아쉬웠기에 그런진 모르겠으나, 책처럼 그냥 약혼자의 비중이 작았다면 더 나았겠다 싶기도 했고. ㅎ
아무튼 드물게, 영화도 원작도 다 보기를 잘했다 싶은 작품입니다.

웽스북스 2012-03-22 23:22   좋아요 0 | URL
아 500매가 빠졌다던데.... 그 부분도 있나봐요.
영화가 잘 바꾼 부분도 있다는 말 공감. 저도 둘다 보길 잘했다 싶어요.

책에서 약혼자 비중이 적어서 놀랐어요. 뒤에 한번은 나오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면서도, 안나올 것 같긴 했어요 ㅋ (뭔말이래 ㅋㅋ)

프레이야 2012-03-20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에선 이선균의 캐릭터에 아쉬움이 많았지만
책 리뷰 정말 좋으네요 웬디양님 ^^
책은 사뒀는데 조만간 읽을 거에요.
전 이 책으로 미미여사를 처음 만나게 될 거에요.

카스피 2012-03-20 23:20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이선균의 캐릭터는 원작소설에선 처음에만 나오고 사라져서 그런것이 아닌가 싶네요.새로운 캐릭털를 만들다 보니 아무래도 좀 부족했겠지요.

웽스북스 2012-03-22 23:23   좋아요 0 | URL
에공. 프레이야님 감사요. 이 책이 미미여사님 책들 중에도 손에 꼽는다고. ㅎ 저도 이게 세권째이긴 하지만, 제일 마음에 드는 작품이에요.

웽스북스 2012-03-22 23:23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 이선균에게 아쉬움을 표한 사람이 많네요. ㅎㅎ

라주미힌 2012-03-21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선균.. 찌질해보이고 좋았어요.. ㅋㅋㅋㅋㅋ

웽스북스 2012-03-22 23:24   좋아요 0 | URL
아. 바로 아래 라주미힌님 반전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