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에 만난 영화들에 대해서, 하나하나 리뷰를 쓰고 싶었으나 역시나 이렇게 추석이 지나버린 관계로 간단히 메모만 남긴다, 그렇지 않으면 쓰지 못할 것을 이제 너무도 잘 알기에 ㅠ (스스로의 게으름을 인정해 버린 지경)
추석에 만난 영화는 크게 3종류로 구분된다
- 보고 싶어서 극장에서 본 영화 : 원스, 즐거운 인생 (공교롭게도 둘 다 음악 영화다)
- 보고 싶지 않았으나 극장에서 본 영화 (권순분여사납치사건)
- 기나긴 청소와 함께한 곰티비 무료영화 : 잔혹한 출근, 각설탕, 아는여자 (또봤다, 하도볼게 없어서- 곰TV여 무료 영화 인프라를 좀 확장해 주세요)
(청소용 영화의 조건은 집중하지 않아도 내용 파악에 전혀 무리가 없는, 자막 볼 필요 없는 한국 영화)
위 영화들에 대해, 관람 순서대로 살짝 살짝 얘기해 보자면
원스
올가을 딱 한편만 영화를 본다면 난 이 영화를 봐야지, 하고 생각했다. 포스터에서 남녀주인공의 걸어가는 모습을 보는 순간- 그냥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제작비 총 9000만원으로 만들었다는 이 영화는, 영화는 꼭 돈으로만 만드는 것이 아님을 반증한다.
영화는 사랑, 그리고 음악에 대한 이야기이다. 음악을 앞에 놓아야 할지, 사랑을 앞에 놓아야 할지 살짝 고민했다. 음악을 앞에 놓은 이유는 이들의 사랑이 빛나는 이유가 음악 때문이기 때문이다. 아, 그런데 또 이들의 음악이 빛나는 이유는 사랑 때문이다, 결국 이 두가지가 서로를 빛나게 만들고, 영화를 빛나게 만들었다. (결국 사랑과 음악의 순서는 이름순으로 넣었다, 가나다든, abc든 ㅋㅋ)
사실 객관적으로 생각해본다면 특별할 것도 없는 스토리라인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여운이 긴 이유는, 이들이 음악을 아끼듯, 가만가만 서로를 아끼며 배려하는 모습이 그대로 마음에 남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건 이 두 배우가 실제로도 연인 사이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던 걸까?
그리고 음악은 매우 훌륭하다. 남자 주인공인 글렌 한사드가 거의 대부분의 곡을 작사, 작곡했고, 여주인공은 그의 밴드에 객원 보컬로 참여한 실력파다. 88년생이라고는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 여주인공의 목소리가 정말 매력적이다.
잔혹한 출근
요즘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만인의 연인 균,이 등장하는 영화,인 지 몰랐다. 진부한 설정, 떨어지는 개연성- 나는 정말이지 직장인들의 삶과 애환을 닮은 영화인 줄 알고 이 영화를 봤단 말이다, 그러니까 난 이 영화를 보며 엄청 공감할 줄 알았다, 유괴범에 대한 코미디 영화일 줄이야, 도무지, 유괴가 어떻게 코미디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아는 여자
2004년 정도에 봤으나, 워낙 볼 무료영화가 없어 한 번 더 보게 됐다. 두번째임에도 불구하고 곰티비 무료영화들 중 제일 잘봤다 싶은 영화.
각설탕
얼마 전 매우 재미없게 읽었던 소설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코끼리 모독, 그리고 영화 드리머와 딱 빼닮은 영화이다. 굳이 우리나라 버전으로 이런 영화가 또 하나 필요했던 이유는 뭐였을까? 하나 더 갖다 붙이자면 '여성'이라는 코드가 하나 더 추가된 정도랄까? 하지만 이 역시 진부하다. 각설탕은 영화 내 주요 소재로서의 모티브가 부족했고, 과천 경마장은 기껏 장소 대여를 해줬으나 오히려 이미지는 더 안좋아진듯- 누구를 위한 영화였을까, 결국 임수정?
권순분여사 납치사건
김상진의 코미디를 워낙 안좋아라하는 터라 굳이 보고 싶지는 않았으나, 엄마가 추석 전부터 함께 보자고 예약해 놓은 영화이기에- 머리도 식힐겸, 하는 생각으로 가서 봤다. 정말 머리가 식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영화의 해악성, 즉 납치범은 선하고 불쌍한 사람들이며, 정작 납치를 당한 피해자의 가족들은 매우 못되고, 되바라진 것들-이라는 설정이 주는 해악성은, 자신도 모르게 납치,라는 엄연한 범죄를 정당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며, 그들의 승리를 응원하게 되는 데 있다. 나는 야한 영화보다는 이런 영화가 20세 이상 관람가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아이에게는 절대 보이고 싶지 않은 영화가 가족 영화라는 이름으로 추석 시장에 나와 있는 것도 참 아이러니하다. 물론 나름 '교훈'이라는 걸 주겠다며 끝낸 듯 하지만 이런 식의 억지 교훈은 역시나 노땡큐다.
2미터를 훌쩍 넘는 키를 가진 여성의 비현실성, 그리고 그녀에 대한 희화화도 화가 났지만, 장면 장면마다 제대로 맞추지 못한 화면 비율 역시 눈에 거슬린다.
즐거운 인생
이효석문학상을 수상한 박민규는 작품집 뒤 소감에 이 책을 댄디보이였던 아버지에게 바친다는 글을 썼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알게된 아버지의 젊은 시절, 음악을 좋아하고 춤도 잘추던 아버지는 댄디보이였으며, 그런 아버지가 '나같은 것'을 키우느라 그런 삶을 포기하게 된 게 자신은 너무 슬프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단편 누런강, 배한척을 읽는 마음은 내내 편치 않았다. 그의 작품이 한층 무게를 덧입은 느낌이랄까.
즐거운 인생은 그런 아버지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박민규의 아버지가 떠올랐고, 또 우리 아빠가 떠올랐다. 아빠는 나를 위해, 또 어떤 '즐거운 인생'을 포기했어야만 했던 걸까.
악기를 처음 잡던 그들의 얼굴에, 그 어린아이 같은 표정에 나도 함께 설렜다. 동시에 그 표정, 그 천진함을 빼앗아 간 그들의 삶의 무게가 또한 슬프게 다가온다. 중년배우 셋은 훌륭한 연기를 보여줬고, 애 티를 벗은 장근석은 중년배우 셋 틈에서의 반사 효과를 톡톡히 누린다.
하지만 이준익 감독을 통해 보는 여성은 불편하다. 라디오스타에서도 살짝 보였지만 여성들은 항상 그들에게 비루한 현실을 깨닫게 하는 존재에 그친다는 점은 좋은 영화를 삼키다 만 느낌을 주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