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으면서, 누군가 내게 물었다.
그래서, 집은 구했어요?
네. 3월부터 나와 살게 될 것 같아요.
그리고, 내가 구한 집과 금액에 대해 대략적으로 설명을 하니, 운이 좋네, 잘 구했네. 라는 얘기 등을 하신다.
저, 스물 다섯개의 집을 봤는데요.
하하하. 그럼 그럴 자격 있네. 운 좋아도 되겠네.
뭐 뚜껑은 열어봐야 알겠지만, 뭐, 암튼, 역시나 현재 가진 금액에서는 최선이라 생각되는 집을 결국 구했다. 사실, 집을 보러 다니면서 맘상한 적이 굉장히 많았는데, 워낙에 전세난이 심각하다보니 정말 짐들이고나면 두명 앉아서 얘기할 자리도 없는 집이 굉장히 비싼 값에, 그것도 없어서 못팔고 있다고 유세를 하고 있는 걸 보면 맘이 확 상해버리는 거다. -_-
첫번째 집을 포기한 이유는 보안 때문이었다. 작은 2층 건물에, 함께 세들어사는 사람도 없이 혼자 산다는 게 위험한 건지, 몰랐다. 이렇게 무지하다. 계약하러 가기 전에 회사분들과 다음 로드뷰로 보면서 그제서야 실감했다. 실은 나도 내심 불안해, 관리비다 생각하고 집에 세콤을 달아볼까 하는 생각을 하긴 했었지만. 여자 혼자 사는 집, 이라는 게 알려진다는 것의 위험성. 내가 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듣지 못한다는 것의 공포, 등등이 결국 그 집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이전에 살던 사람도 신혼부부였다. 그날 봤던 다른 집들은 대안이 될 수 없었다.
두번째집은 분리형 원룸이었는데, 역시나 비슷하게 건물 하나를 혼자 쓰는 형태. 여기 역시 여자혼자 살고 있는 집이 아닌, 남자가 살던 집. 그러니까 여자 혼자는 저런 집을 얻지 않는다는 걸 그제서야 알았다. 이 집에 살던 남자는 결혼해서 나간다는데, 청소를 정말 징그럽게도 안하는지, 집에 온갖 잡동사니가 늘어져있어 굳이 들어가고 싶지도 않았다. (게다가 이날은 저 2층집에 마음이 혹한 상태)
세번째 집은 좀 독특한 집이었다. 원룸 건물 현관으로 들어가면, 또 문이 하나 있고, 두 가구가 함께 그 문안에 있다. 세탁실을 공유하고, 방 크기는 7평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작은 베란다가 있었던가. 풀옵션이었는데, 이유 없이 비싼 집. 고려의 대상도 되지 않았다.
네번째 집은 계단 세개쯤 내려가는 반지하. 계단을 내려가는 순간 안들어갈 거라고 생각을 했으니 (여전히 2층집에 마음이 혹해있으니) 들어가서도 제대로 봤을리 없다. 가족이 살던 집이라 꽤 넓었으나, 굳이 넓은 게 필요하지도 않았고, 당시 예산보다도 비싼 집이었다.
이렇게 네군데를 보고 나니, 당연히 첫집에 마음이 끌리지. 그래도 섣불리 계약은 하지 말라는 친구의 말에 부동산에 이집 다른 사람 보여주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나와서 회사 근처 아현동 집을 찾아갔다. 피터팬의 좋은 방 구하기 카페에서 본 집이었고, 집주인과 직접 약속을 하고 갔는데, 이 집주인 어딘가로 끊임없이 올라간다. 회사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이긴 하지만, 너무 올라가니 슬쩍 마음이 상한다. 집으로 들어갔는데, 한 30년쯤 된 집인 것 같다. 방은 큼직큼직한데 이 집주인들 너무 무성의하다. 리모델링을 했답시고 자기네가 직접 도배를 했는데 (그거 얼마나 한다고 -_-) 마감이 제대로 안되어 있다. 심지어 천장 한구석은 벽지가 1m쯤 축 늘어져있다. 나는 이 집부터 봤다면 정말 우울했을 거야. 라고 생각하며.... 창밖에 텃밭이 있다는데, 여기는 어떻게 가냐고 물었더니 창을 뛰어넘어서 가면 된단다. 최고. -_-b
결국 다시 숙대로 돌아와 그 부동산을 찾아가는데, 친구에게 하나만 더 보자고 했다. 그리하여 본 집은 매우 깔끔한 원룸이었는데, 전입신고가 안된단다. 문외한인 나도 전입신고 안되는 집이 위험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서 ;;; 미련없이 첫집을 계약하기로 결정을 하게 된 것이다.
여차저차 첫집을 포기하고나니 기운이 쭉 빠진다. 거의 아무것도 못하겠는 상황. 게다가 전날밤은 대출이 안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불안해서 단 한숨도 못잤던 터라, 거의 좀비 상황이었는데, 피터팬에 또 괜찮은 매물이 올라왔다. 회사분께서 고맙게도 차로 거기까지 데려다 주셔서 가는 도중에 전화를 하니, 집이 이미 나갔다고 한다. ㅜ 전세집을 구하는 건, 정말 시간싸움. 삼각지 쪽이었는데 근처 부동산에 명함 하나를 두고 왔다.
다음날, 이제 정말 발품의 시작이다. 라고하면서 피터팬과 원룸닷컴을 열심히 뒤졌다. 원룸닷컴에 있는 어떤 부동산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연희동에 있는 원룸을 보여달라고 했더니, 그 집은 추천할만하지 않다며 다른 집을 보여주겠다고 해 신촌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이 아줌마, 엄청 허술하시다. 다른 부동산 매물을 들고 나온 것 같은데, 번호키 번호도 제대로 알아오지 않았다. 밖에서 한 20분은 번호 알아낸다고 보낸 것 같다. 그렇게 들어간 집은 정말 좁고 허접하다. 나는 좀더 넓은 집을 원한다, 라고 얘기했다. 그렇다면 다음날 연희동에 함께 가자고 말하는데, 나는 이미 이 분에 대한 신뢰가 바닥. ;;;; 일곱번째 집도 이렇게 땡.
돌아오면서 뭔가 신촌까지 온게 억울해 그냥 무턱대고 들어간 부동산. 역시 남의 부동산 매물을 하나 겨우겨우 찾아, 정말 없는 전세라는 유세에 유세를 들어가며, 집으로 갔다. 오르막 경사가 37도 정도 되는 길이었던 것 같고... 지금까지 봤던 집 중에 제일 후졌다. ;;;;; 게다가 외국인이 살던 집이라 냄새가 너무 심해서 제대로 볼 수도 없었다. 여덟번째 집도 나가리. 이렇게 신촌 집 두개를 보고 나니 갑자기 눈물이 핑 돌 것 같다. 이런 집에 살면서 대출금 힘겹게 갚느니, 나는 나오지 않겠어. 라는 결심이 선다. 죽어라 헤매더라도... 양보없이, 어디 한 번 찾는데까지 찾아보겠다, 라는 오기도 생긴다. 신촌에 집 보러 다시는 안온다, 라는 결심까지 했다.
그리고, 주중은 버리기로 한다. 정신을 두군데 쏟을 능력이 안되므로. 하여, 주말에 몰아서 보기로 한다. 금요일쯤 되니, 지난 번 명함을 두고 온 삼각지 부동산에서 전화가 왔다. 괜찮은집이 나왔고, 평수도 꽤 되는데 싸다고. 그래서 다음날 동선의 시작은 삼각지로 정했다.
아홉번째 집. 삼각지 쪽 오피스텔이었는데, 재밌는 게 이전에 어느 건물을 찾느라 잘못 찾아간 건물이었다. 인연도 참 기묘하다 생각하면서 파는 쪽 부동산 사람을 기다린다. 잠시후 이분이 오셨는데, 헉. 내려가는 엘레베이터를 누른다. 반지하였던 것이다. 그것도 꽤 깊은. 집은 정말 넓고 좋았다. C기획에 다니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결혼해서 나간단다. 거실에 서재도 놓을 수 있고, 붙박이장도 큼직한 게 좋다. 반지하라서 제습기까지 옵션으로 있다. 그런데, 반지하는 주변에서 하도 안된다고들 하니, 눈물을 머금고 나왔다. ㅜㅜ
열번째 집, 그 부동산에서 보여주는 다른 집. 역시나 방이 너무 좁다. 패스.
그리고 당산역 쪽으로 건너갔는데, 여긴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 가는 부동산마다 다 할아버지 한분만 계시고, 아무도 없었다. 손님도 없고. 매물도 없다. 아무래도 이상한 동네로 찾아간 것 같은데, 여튼 뭔가 정이 안가서, 얼른 철수하고 망원동으로 향했다.
열한번째 집. 아까 신촌집 제일 후지다고 한거 취소다. 이집을 잊고 있었다. 함께본 분의 말에 의하면 여관방이었다.
열두번째 집. 깨끗하고 넓다. 집은 좋은데, 전입신고가 안된단다. 괜찮다 괜찮다, 라는 부동산 아저씨의 설명을 듣고 갔는데, 가니 유리문에 경고장이 붙어있고, 집은 검사를 받느라 싱크대를 다 뗐다고 한다. 불안해서 살 수가 없겠다.
열세번째 집. 이 집도, 집주인이 리모델링 한다고 페인트 칠한 집. (거 잘 못칠하면 칠하지 맙시다 ㅜㅜ) 1분도 고민하고 싶지가 않다.
열네번째 집. 마음에 든다. 그런데 덜 지었다. 분리형 원룸에 방 크기가 꽤 되고 발코니도 있다. 그런데 바닥공사 중이어서, 보지도 않고 덜컥 계약하기는 어려워 좀 고민해보겠다고 하고 나왔다.
열다섯번째 집. 회사 걸어다닐 수 있는 거리에 있는 부동산을 한 번 가보자는 말에 갔더니 여기도 매물이 없다고 유세다. 그 와중에 보여준 집에 갔는데, 예전에 외근가면서, 아니 뭐 저런 건물이 다있나, 했던 바로 그 건물이다. 지은지 오래되어 8층 건물에 8층인데 엘레베이터가 없다. 운동한다고 생각하라는데, 내가 6층을 살아봐서좀 아는데 8층은 정말 ;;; ㄷㄷㄷㄷ
아. 스물 다섯개 다쓰고 자려고했는데, 이런 급졸린 상황. 불면에 밤잠은 언제나 웰컴이니, 일단 자겠어요. ㅎㅎ 남은 열개의 집도 까먹기 전에 얼른 써야지.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