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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내 삶은 늘 주중은 피폐, 주말은 충만,인가보다. 주중이 5일이고 주말이 2일인게 슬플 따름이다. 그나마 금요일 저녁부터 내가 주말로 쳐주니 다행이다. 그리고 오늘은 제일 제일 싫은 일요일 밤이다. 이제 12시간쯤 지내면 다시 피폐해질 예정

* 금요일 저녁엔 K가 준 연극 티켓으로 대학로에서 연극을 봤다. 그러고보니 대학로에서 연극을 본 건 오랜만이라는 생각. 작년에는 연극을 거의 못보기도 했고, 최근에 본 것들은 국립극장에서 한 것들이어서 더 그런듯.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작년은 지금까지 살면서 대학로에 가장 많이 갔던 한 해였구나. 대학로의 미덕은... 지하철에서 앉아 갈 수 있다는 거? (아줌마 아줌마 ㅋㅋ)

* 대학로에서 고민 끝에 찾아간 청국장 집은 정말이지, 정말 맛있었다. 우리가 배가 고팠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청국장 뚝배기와 반찬이 담긴 쟁반을 나르는 것조차 힘겨워보이는 나이드신 할머님들께서 하는 청국장 가게, 김치찌개와 청국장을 시켰는데, 해장국과 청국장을 시켰지? 라고 세번이나 물어보고 그렇게 아니라고 말씀했건만 결국 해장국과 청국장을 가져오신 할머님께, 죄송한데 해장국은 먹지 않는다며 다시 김치찌개를 가져다 달라고 말하는 걸 그리 미안하게 여기도록 만들 수 밖에 없는 분위기,랄까. (해장국이 아니라 다른 거였다면, 아마 그냥 먹었을지도. 해장국을 먹지 않는 건 내가 아니라 C이고,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메뉴에서 유일하게 C가 먹지 않는 메뉴) 그런데 김치찌개도, 청국장도 정말 정말 맛있어서, 우리는 8시에 연극이 시작되는데 7시 55분까지 밥을 먹고 뛰어갔다. 남은 밥에 아쉬운 군침을 살짝 날려주며 ^-^ 다음에 대학로 오면 여기 또 가자, 라고 약속을 하며 나왔다. (혹시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혜화역 1번 출구로 나와 동숭 아트센터까지 걸어가서 우회전 한 후 패밀리마트 있는 쪽까지 살짝 내려가면 보이는 흰 간판이 달린 집. 상호는 모르겠네. ㅋㅋ (이봐이봐 역시 먹는 얘기가 제일 길어, 막 배고파질라그래)

* 공연장에서 우연히 P를 만났다. 스태프 목걸이를 달고 있었다. P는 고등학교 동창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 중 하나이다. 얼굴도 예쁜 것이 소탈하기까지 해서 내가 좀 듬뿍 좋아해줬었다. 2년 전엔가 지하철에서 만났을 때는 목에 독특하고 패셔너블한 재질의 목도리도 아닌 것이 스카프도 아닌 것이,를 감고 있길래 예쁘다고 칭찬해 줬더니 그녀는 매우 부끄러워하며, 목이 추운데 목도리를 하고 나오기는 부담스러워서 집에 있는 긴 양말을 꺼내서 살짝 감았다고 이야기해줬다. 발가락 부분은 뒤로 보냈다며 ;; 아, 저 오묘한 색의 줄무늬가 양말이었구나. 그녀가 아니면 누구도 소화할 수 없었을 거야. 근데 P가 왜 거기 있을까, 연극을 전공한 P는 이제 연극을 하지 않겠다고 말을 했었는데. 내가 밥을 10분만 덜먹었어도 연극 시작 전에 P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을텐데, 식탐을 원망하며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청국장은 맛있었으니까 ;;)

* 연극은 훌륭하지는 않았지만, 흐뭇한 작품이었다. 뻔한 거 알면서도 미소짓게 되는 작품이었달까. 늦게 들어온 커플이 죄송하다며 우리 자리 쪽으로 비집고 들어와 구석으로 몰려와 나는 속으로 좀 툴툴거렸는데 그 커플이 늦은 이유는 나중에 밝혀졌다. 프로포즈 석을 산 커플이었던 거다. 나이가 조금 있어보이는 30대 중반쯤으로 추정되는 커플. (아니면 어쩌지? -_-) 연극이 끝난 뒤 무대에서 진행해주는 프로포즈 시간을 이용해 남자가 여자에게 준비한 깜짝 프로포즈를 보는데, 나는 또 혼자 눈물이 흘러 민망해 죽는 줄 알았다. 도무지, 남의 프로포즈를 보면서 주책맞게 울 건 또 뭐람. 그 커플이 잘생기고, 미끈하고, 예쁘고, 세련된 커플이었으면 나는 와~~ 하며 박수를 치긴 했겠으나, 눈물이 나지는 않았을 거다. 아마도, 나는 그들의 투박함 때문에 마음이 동한 것 같은데, 그다지 유창하지 못했던 연애편지를 읽어주던 남자의 마음이 진심으로 여겨졌기 때문인가보다. 편지 내용은 기억이 하나도 안나는데, 거기서 무릎을 꿇고 편지를 읽는 남자의 모습을 보면서, 그 자리를 예매하고, 준비하며, 조심스럽게 여자를 데려온 그 마음이 고스란히(라고 하면 과장이겠지만) 느껴졌던 것 같다. 부끄러워하면서도 연신 눈물을 훔치던 여자와, 연극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내내 달뜬 기분이었을 남자의 마음을 상상하면서 나도 모르게 그랬던 것 같다.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리 내가 그들의 행복을 빌어줬다 해도 남의 프로포즈 구경하면서 우는 건 쪽팔린 짓인듯 하여 얼른 눈물을 훔치는데 불이 켜지고, 뒤에서 누군가가 함께 온 사람을 타박하는 소리가 들린다. "너는 왜 우니?" 순간 드는 괜한 안도. 아, 나 그렇게 이상한 성향은 아니구나. 흐흐

* C가 연애를 시작하면서 나는 나도 C도 모르게, C에게 많은 것들을 배려했다. 사실 작년에 영화나 연극을 많이 보지 못했던 데에는 그런 이유도 컸다. C의 남자친구도 이런 나의 노고를 알아줘야 하는데 말이지. ㅋㅋ 오랜만에 C와 대학로에 오고, 함께 지하철을 타니 스물 일곱살이 된 것 같은 기분. 오랜만에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눈다. 도무지 이게 얼마만인지. 그럼에도 공유한 게 많아, 처음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아도 되는 친구와 나누는 이야기들은 참 편하고, 깊고, 즐겁다.


// 금토일, 3일치 얘기를 쓰려고 했는데, 어랄라 금요일만 이만큼이네 -_- 내가 무슨 이야기를 얼마나 더 하고 싶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한번 잘라줘야겠다 흐흐 ^-^ 나머지는 나좀 치워주세요 하고 울고 있는 어린 송아지같은 내 방좀 달래주고 와서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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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전하시네
    from 내가되는꿈 2009-01-08 02:20 
    올해의 첫 연극은 작년과 마찬가지로 C와 함께였고 저녁 메뉴 역시 대학로 청국장 집으로 동일했다 (차이가 있다면, 작년은 공짜로, 올해는 돈내고? ㅎㅎ) 청국장집은 재작년에 처음 간 이후로 꽤 여러번 갔었는데 오늘은 그 자리에 그 집이 없어 막 헤매다가 (없으면 내 기억력을 의심하고 헤맨다. 하하. 몇번이나 갔는데) 다시 확인해보니 확장 이전을 한 것이었다 거긴 원래 좀 지저분하고, 초라한 분위기가 꼭 그 청국장과 어울렸
 
 
Mephistopheles 2008-01-20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양님....본인이 프로포즈 받으실 때 대성통곡...하면 어쩌실려고...

웽스북스 2008-01-20 21:51   좋아요 0 | URL
흐흐흐 그러게요~ 그건 결국엔 그사람과 내가 그때까지 만들었을 시간이 어땠느냐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모든 프로포즈가 눈물이 나는 건 아니니까 ^^

마님은 어떠셨나요? 괜히 궁금해지는 사건 ㅋㅋ

Mephistopheles 2008-01-20 22:11   좋아요 0 | URL
마님은 그냥저냥 심드렁...이라고 해야 하나 울기까지는 하지 않았다죠..
어 이거 참 생각해보니 열받네 얼마나 공들인 프로포즈인데..

웽스북스 2008-01-20 22:14   좋아요 0 | URL
아이쿠 제가 괜한 소리를 해서 공소시효 지난 사건에 울컥하게 만들었네요-
흑, 죄송해요, 제가 이렇게 눈치가 없어요 ;; ㅠㅠ

깐따삐야 2008-01-20 23:01   좋아요 0 | URL
저는 마님-메피님 커플 구도가 정말 매력적이에요.
시큰둥한 예술가 아내와 신실한 설계사 남편! 근데 서로 많이 사랑하구.
넘흐 부럽;; 넘흐 멋찜;;

Mephistopheles 2008-01-20 23:17   좋아요 0 | URL
아무리봐도 우리 깐따삐야님이 요즘 옆구리 찬바람에 몸살이 나셨나 봅니다..^^

웽스북스 2008-01-20 23:27   좋아요 0 | URL
D대리님~~~~~ ^_^

Mephistopheles 2008-01-20 23:58   좋아요 0 | URL
근데 D데리 찔러보셨나요..아이다 유이 아냐고??

웽스북스 2008-01-21 00:05   좋아요 0 | URL
아아 그 찔러본거 얘기했던 거구나 ㅋㅋㅋ 네네 근데 모르더라고요
근데 제가 검색해보니까 아이다유이가 아니라 아이다유아 아닌가요?
그래서 몰랐던것 같아 아무래도 ;;;

다락방 2008-01-20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몇년전에(기억이 가물) 발렌타인기념 최현우 매직콘서트를 보러갔었거든요. 거기서 여자가 모르게 남자가 프로포즈를 준비했더군요. 웬디양님 말씀대로 미끈한 커플이 아니어서인지, 굉장히 소탈하고 평범한 커플이어서인지 저와 제 친구들은 단체로 울뻔했다니깐요. 그런 이벤트에 감격하다니!!

끝나고 나서 어찌어찌 알고보니 저랑 허브공원에 같이놀러갔던 친구의 여자후배가 그 주인공이더군요. 못알아봤지 뭐예요. 그건그렇고, 이제 다른 얘기를 잠깐 하자면,

남자들 너무 힘들것 같지 않아요? 프로포즈 준비하느라 얼마나 머리를 싸맬까요. 남자들이 프로포즈 준비하는거 보면 여자로 태어난게 다행이다 싶어지기도 해요. 그리고 계속 다른얘기를 하자면,

프로포즈는 역시 남자가 한쪽 무릎을 꿇고 하는게 가장 근사해보여요.영화 『내 남자친구는 왕자님』에서 처럼 말이죠. 먹는거에 반지 넣고 이런거 말고.
(아, 나 너무 구식인가 orz)

웽스북스 2008-01-20 22:12   좋아요 0 | URL
아 역시 그런가요? 남의 프로포즈를 보면서 감동받는 사람이 많군요, 휴휴 다행이야 (이렇게 확인받아야 안심하는 것 같은 심리라니 ㅋㅋ)

프로포즈의 굉장히 형식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대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머리가 터지죠- 저는 이벤트 말고 저한테 무슨 말을 해줄 건지 머리 싸매게 고민하는 사람이었음 좋겠어요. 무릎을 꿇던, 먹는 거에 반지를 넣던, 비싼 호텔을 예약하던, 연극 프로포즈 석을 예약하던 간에 그런 건 별 상관 없으니까. 나는 사건 보다는 사연을 기억하고 싶은가봐요 ^^

그나저나 아무래도 나중에 남자친구가 생기면, 내 페이퍼들을 필히 좀 학습하라고 시켜야겠는데요? 제가 말하기 부끄러우니까 다락방님이 슬쩍 얘기해주세요, 네? ㅋㅋㅋㅋㅋ

다락방 2008-01-20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제 댓글은 왜 이렇게 길죠? ㅜㅜ

웽스북스 2008-01-20 22:13   좋아요 0 | URL
흠 근데 제 댓글은 왜 이렇게 실시간이죠? (아~ 방치우기 싫어요 이게 다 다락방님 때문이에요, 댓글 읽고 채식주의자를 마저 읽고 싶어졌거든요- 엄마가 문열어보면 기절할텐데 말이죠)

깐따삐야 2008-01-20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앙~ 연극과 청국장이라니. 완전 멋있고 맛있는 주말이네요!
떨리는 목소리로 서툴게 읽어내려가는 연애편지. 넘흐 멋찌잖아요오.♡
나이 먹을수록 친구들이 안 보여요. 어디들 갔냐면 데이트 하러 가거나 시집 갔다는. ㅋㅋ

웽스북스 2008-01-20 23:28   좋아요 0 | URL
맞아요 하루하루 더 지나면 더 그럴 것 같아요

연극과 청국장에 영화도 보고 사진전도 봤는데
아 이제 귀찮아서 더 글을 못쓰겠어요 ㅋㅋ
사진전 갔다온 얘기는 꼭 쓰고싶은데 말이죠 ㅎㅎ

깐따삐야 2008-01-20 23:37   좋아요 0 | URL
빨랑 방 치우고 사진전 갔다온 이야기 쓰고 자면 딱 맞겠다. ㅋㅋ

Mephistopheles 2008-01-20 23:59   좋아요 0 | URL
방은 안치우고 사진전 갔다온 이야기만 쓰고 잔다에 100원 겁니다.

웽스북스 2008-01-21 00:06   좋아요 0 | URL
둘다 안하고 잔다에 오백원 걸지요 ㅋㅋㅋㅋㅋ
엄마가 옆에서 딸을 잘못 키웠어...하면서 치우고 있어요

Jade 2008-01-21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양님 서재는 실시간 댓글이군요 ㅎㅎ

웽스북스 2008-01-21 00:12   좋아요 0 | URL
흐흐흐 제이드님이다~~~ 실시간 까지는 아니구요 흐흐흐
그냥 이시간엔 좀 버닝하는 거죠 ㅋㅋ

Mephistopheles 2008-01-21 00:38   좋아요 0 | URL
설마 아직도 동동주의 여파가..?

웽스북스 2008-01-21 00:43   좋아요 0 | URL
어랄라 그럴리가요~

순오기 2008-01-21 0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다 깨어 한밤중에 읽어도 넘흐 감동이고 재미있어요.
나도 같이 있었으면 막 펑펑 울었을지 몰라요. 내 이름은 수도꼭지!
 


1

올해엔 연극이나 공연 등을 작년에 비해 많이 보지 못했는데, 어찌하다보니 새 팀에 온 후 몇 주 안돼 이틀 연속으로 문화생활을 이유로 칼퇴근을 하게 됐다. 어제는 백건우 피아노소나타 연주회, 그리고 오늘은 반고흐 전시회. 그러니까 마치 웰빙주의 문화소비형 웬디가 된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걸. 그저 그간 힘들었던 것에 대한 선물이라 생각하고 있다. 오늘은 어쩐지 민망하고 미안해서 미술관 간다는 얘기도 안하고 퇴근했다. 어제 피아노 연주회를 간다니 다들 '우아 선아'라고 놀렸다. 우아00은 예전에 페이퍼에서 소개한 바 있는 우리 우아한 L대리님의 수식어다. 난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다. 하필 이틀 연속이었던 건, 하필 월광이 어제고, 반고흐전이 40% 할인되는 T클럽데이가 오늘이었기 때문이다. 우아는 커녕 대중적 취향인지라, 제일 유명한 월광이 제일 좋고, 할인에 집착하는지라 40% 할인되는 날 간 거다. 하필 이어진 이틀. 같은 날이 아니라 다행이다. 흐흐.

연주회장 1층에는 로렌초의 시종 님이 있었다. 시작 전에 문자를 보냈더니 인터미션 때 답이 왔다. 그리고 연주회를 마치고 '급 감동의 물결이 메아리쳐요'라는 내용의 문자를 보내려는 내게 로렌초님은 '상서로운 불길함'이라는 소감을 보내줬다. 갑자기 급 감동의 물결이 메아리친다는 나의 감상이 초유치버전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뭐 내가 이렇다. 하하하. 그치만 정말 마음 속에서 감동의 물결이 메아리를 친 걸 날더러 어쩌란 말인지. ㅋㅋ

난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소리가 제일 좋았다. 나이를 조금씩 들어가면서, 조금씩 첼로, 플룻, 등의 그럴듯하고 멋져보이는 악기로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악기소리를 바꾸는 친구들이 생길 때에도, 난 여전히 피아노를 제일 좋아했다. 첼로를 켜거나 플룻을 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는 잘 알지 못하나, 피아노를 잘 친다는 것,(여러가지 의미로)이 얼마나 어려운 지 알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난 피아노를 잘 치지 못하는데, 올 초 다시 M에게 피아노를 배우면서 '반주'를 배우겠다고 했다. 두달쯤 지나 서로의 사정으로 그만 뒀지만. 근데 어제 음악회장을 나오면서 난 외쳤다. '연주'를 배울 거야. 무조건 '연주'를 할 거야. 월광 1악장 정도는 어떻게, 되지 않을까?

연주회장에서 직접 연주를 듣는 기쁨은 물론 음악 그 자체가 주는 것도 있지만, 하나 하나 곡이 바뀔 때, 악장이 바뀔 때의 그 짧은 시간마다 그 곡의 연주를 준비하는 연주자의 자세를 볼 수 있다는 데에도 있는 듯 하다. 베토벤의 장송곡으로 쓰였다는 곡을 준비할 때, 월광 연주를 시작하기 전의 잠깐의 '가다듬음'을 위한 텀을 보고 느끼며, 나도 함께 준비하면서 들을 수 있어 더 좋았고, 연주자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서도 좋았다. 물론 난 3층 맨앞 구석 자리에서 있어서 상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계단을 내려와서는, 아아아~ 저기는 소리도 다를 거야, 라며 울부짖었다는 거.

반고흐전은, 그냥 계속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고흐의 삶이야 뭐 워낙 유명하니까 말할 필요가 없지만, 그래도 전시회장을 하나씩 다닐 때마다 적혀 있는 그의 삶의 행적들을 보며, 당신 정말 힘들었군요, 라는 말이 계속 절로 나온다. 저런 삶이 또 어디 있담, 정말. 심리학 공부를 좋아하는 민정언니의 나름 심리학적 그림 해석들도 재밌었다. 미술치료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반고흐의 그림으로 제일 처음 시작하지 않을까 싶었다.

2

발표는 잘 마친 편이다. 실은 내일 하나 더 남았는데, 이렇게 페이퍼 쓰며 놀고 있는 사건. 어제 팀 대상 리허설 때 어렵다는 반응이 지배적이어서 '대중의 언어'를 습득해야겠다며, 쉬운 부분만 설명하고 어려운 부분은 넘어갔다. 내 보고서가 깊이 들어갈수록 좀 헷갈린다. 실은 나도 가끔. 덕분에 후배 혜진씨는 동기에게 오늘 교육이 무지 어렵다며 겁을 주었다가 이내 민망해졌다고 한다.

나이가 들수록 잔머리만 는다고, 오늘은 뽀대나는 부분까지만 설명하고, 질문은 내일 한꺼번에 받겠다고 했다. 버벅대든 어쩌든, 내일 하자고. 아무도 내 속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일은 윗분들이 아무도 안계신 날이다. 하하하!

요즘 교육에 잘 안들어오시는 전무님께서 들어오셨다. 이번 보고서는 전무님께 두번이나 기안을 올리고 바쁜데 굳이 하지 말라,고 한 걸 우겨서 한 것이니, 실은 들어오실 줄 알았다. 들어오시는 순간 숨이 막히는 것 같다. 눈을 질끈 감아버리려 했으나 곱지 않은 전무님의 표정이 자꾸만 눈에 들어온다. 나가시면서 한마디 하시려는 것 같길래 뭐라고 하시려나, 각오하는 순간, 옆방에서 교육을 듣던 이국장님이 건너오셔서 '선아야 정말 대단하구나!' 라는 말씀을 해주신다. 사내에서는 이국장님이 전무님보다 이쪽 분야에 대해서는 전문이시기에, 국장님이 칭찬한 부분을 전무님이 뒤집을 경우엔 전무님이 잘 이해를 못하신 게 되버리는 상황이다. 이 묘함이라니. 결국 점심시간에 마주친 전무님께서 '고생 많았다. 선수가 다 되간다'고 칭찬을 하신다. 앗싸. 마음은 늘 고고한척 회사에 다녀도 결국 칭찬 한두마디에 녹아버리는 어쩔 수 없는 직장인인가보다 나도. 전무님이야 뭐 어쩔 수 없이 칭찬을 하신 것 같지만, 일단은 넘어갔으므로 안심.

내일 교육은 아예 간략한 스크립트를 썼다. 어려운 걸 혹시나 실수로 설명하게 되는 우를 범할까봐, 최대한 간단하게, 숭덩숭덩 넘어간다는 게 내일의 전략이다. 부족한 시간을 핑계삼아. 전시회 가기 전 덕수궁 앞에서 혼자 스크립트를 펴놓고 연습했다. 생각해보니 코미디다. 하하하.

3

이번주말에 있을 송년모임을 좀 유난스럽게 준비중이다. 흐흐. 그럴만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긴 하다. 올해의 나를 설명하는 책, 영화, 음반 중 한가지를 들고가 선물해야 하고, 내년에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을 나타내주는 노래를 찾아가 같이 들으며, 그게 누가 선택한 노래인지를 맞히는 퀴즈 시간을 갖기로 했다. 가장 많이 맞힌 사람들에게 저 책, 영화, 음반들이 상품으로 돌아간다.

디제이를 맡은 웬디양은 노래를 취합해가 씨디로 구워, 모두의 내년 소망을 담은 노래를 선물할 계획이다. 물론 나를 나타내는 노래도 뽑아야 되는데, 이게 은근 머리가 아프다. 내가 바라는 나의 내년 모습은 어느 노래에 담겨 있을까. 아니, 그 전에 내가 바라는 내년 나의 모습은 뭘까. 내일 좀 열심히 고민하고, 열심히 찾아봐야겠다. 뭐든 하나만 고르는 걸 어려워하는지라, 책이든, 음반이든, 영화든 고민이 좀 되긴 하지만, 일단은 좀 설렌다.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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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12-13 0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치아카 센빠이를 어서 빨리 찾기 바래요 노다메 웬디양님.
2. 대체 하시는 일의 정체가 뭘까 궁금해지는군요. 혹시 페인트모션으로 일관된 페이퍼의 내용 이면엔 국정원 직원이라는 반전이.?
3. 결정되어지면 그 음악과 영화와 책을 좀 알려주시길..^^

웽스북스 2007-12-13 10:03   좋아요 0 | URL
1. 남자는 피아노를 잘치면 500점쯤 따고 들어가죠 ^^
2. 뭐 합법적인 사기꾼 비슷한 겁니다
3. 흐흐 일단 오늘 좀 열심히 서치해보려고요
4. 메피님, 하루에 2시간 주무시죠?

마늘빵 2007-12-13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 왠지 웬디양님의 발표를 듣고 싶은...

웽스북스 2007-12-13 10:44   좋아요 0 | URL
제 발표를 듣고 대학시절 친구는 쇼핑호스트같다고 얘기했고요 -_-
어떤 선생님은 코미디언의 기질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
앞에 나가면 꼭 웃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데
유머 코드가 대중적이지 못해서 꼭 혼자 실실거리면서 발표를 합니다 ;;
사람들은 황당해해요 ㅋㅋㅋㅋ
얼른 끝내고 싶어서 말은 속사포처럼 빨리하지요 ㅋㅋ
오늘 발표를 들은 후배는 랩하셨어요 -_- 라고 하시던데요

마늘빵 2007-12-14 10:41   좋아요 0 | URL
오 그만큼 능숙하단 말씀이신데 배우고픈데요? ^^

웽스북스 2007-12-14 13:02   좋아요 0 | URL
푸하하 나 저게 '배고픈데요'로 보인 사건 ㅋㅋ
일단 마이크 잡으면 떨지는 않아요 ㅋㅋ
하지만 남들이 발표를 잘한다고 별로 인정은 안해준다는 거

춤추는인생. 2007-12-13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웬디님 저도 랩같은 발표회 듣고 싶어요.ㅎㅎ
어릴적에는 발표같은거 참 잘했는데 전 갈수록 목소리도 작아지고 나가기도 싫어지고. 큰일이예요 ^^

웽스북스 2007-12-13 19:16   좋아요 0 | URL
이게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인 것 같아요
저도 학년이 올라갈 수록 손들 때 아이들의 시선을 먼저 살피게 됐었거든요
저학년때는 저요~ 막 이러면서 발표했었는데 ;
지금도 손들고 말하고, 이런 건 못해요- 시키는 발표나 하는 거죠 ㅋㅋ

깐따삐야 2007-12-13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웬디양님 주말의 DJ~ 랩도 막 하구 음악도 막 틀구... ㅋㅋ 설레고 좋겠어요.^^

웽스북스 2007-12-13 19:20   좋아요 0 | URL
아하하하 랩은.....의도치않은...... ㅋㅋ
그래도 주말 송년모임은 좀 설레요 헤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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