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산책 이벤트에 참여하면서, 휴대폰에 있던 사진을 오랜만에 뺐어요.
계절을 마무리하면서 사진을 남기겠다,는 스스로에게 한 공약을 꽤 오래도록 안지키고 있었으니,
정치인들 탓할 거 하나도 없겠습니다. ;;
병원에 있고, 어쩌고 하느라, 일상이랄 게 없었던 삶이지만,
그래도 간략하게나마 정리하고 넘어가려고요.
짠. 누가봐도 자취생 밥상. 김치찌개, 스팸, 멸치. 김.
멸치볶음 만드는 법을 물어봤던 날 차렸던 밥상입니다.
밥 얻어먹는 위치에서 밥 해먹는 위치로 신분의 변화가 있던 봄이었지요.
(그러다 물론 다시 밥 얻어먹는 위치로 한달을 살았지만요)
3월 말에는 회사 사람들과 경주에 다녀왔습니다.
학교가 포항에 있어서 경주는 몇번 갔었는데,
3월 말이 되도록 벚꽃이 피지 않은 건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꽃은 거의 못보고, 차 구경만 실컷 하다 온 나들이였지만,
그나마, 석가탑의 재발견이 있어서 좋았던 것 같아요.
석가탑이, 참 선이 곱고, 단아하다는 걸 뒤늦게서야 깨달았답니다.
그 단정한 아우라가 사진으로는 다 표현되지 못하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하지만, 또 그래야 직접 발걸음을 한 보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회사를 옮기고 처음으로 미술관엘 갔어요.
가야지, 가야지, 꼭꼭 다짐하고 다짐했던 루오전,
결국 마지막날 수많은 인파와 함께 봤지요.
역시나 참 좋은 전시였어요,
미제레레라는 판화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그 제목들이 모두 절박한 한 편의 시였고,
저 스테인드 글라스 앞에서는 말을 잃고야 말았습니다.
저날 이후로, 쭉 제 휴대폰 배경화면이기도 하지요.
대출녀 신세라고, 돈을 아껴보겠다며 도시락을 싸기도 했지요,
용문시장에서 산 오징어젖과 깻잎,
그리고 나머지 반찬은 다 제가 만들었지요. (메추리알 참 조악하게 깠죠)
지금은 다시 사먹는 밥. 이래저래 지겨운 건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간염으로 쓰러지던 날, 말이에요.
결혼식을 가다가 우연히 버스를 잘못타서 남산길로 들어섰어요.
그래서 오던 길에, 일부러 다시 그 버스를 타고, 남산에서 내려 한참을 걸었지요.
쓰러질 짓만 골라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침대에만 누워있었던 봄이 덜 억울했던 까닭은,
다 저 날의, 그 한시간 가량의 산책 덕분이에요,
남산도서관에 대출증 만들려고 2년 넘게 없이 살았던 주민등록증도 만들었어요.
저날, 저 하늘, 꽃, 바람, 이파리, 그리고 그 때의 마음, 기분,
모두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원효로 의원. 40년된 우리 아파트만큼이나 오래되어 보이는 이곳에 들어서면,
언젠가 위용을 떨쳤을 것 같은 이 곳의 예전 모습이 막 생각나요.
아무도 없는 낡은 소파가 흑백에서 컬러로 바뀌면서
막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찬 모습, 같은 거요.
원효로 의원이 아니었으면 저는 아마 진단도 제대로 못받고 죽어라 고생했을 거에요.
병원에 입원해있을 때도, 원효로 의원 선생님이 전화해서 몇번이나 안부를 물으셨어요.
나중에 퇴원하고는, 음료수도 사들고 고맙다고 인사도 갔지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곳에, 주치의가 생긴 기분이에요.
병명을 알기 전, 원효로의원에 링겔좀 놔달라고 찾아갔던 날,
링겔을 옷걸이에 걸어주어서 한참을 웃었지요.
토할 것 같다고 이야기하자, 옷걸이에 휴지도 걸어주셨어요.
그럼, 제 옷은 어디 있는 걸까요.
정말 재밌는 병원이지요 ㅎㅎㅎ
얼마나 웃겼으면 기운없어서 링겔맞는 도중에 인증샷을.. 하하하..
그리고는 일주일간 입원환자모드.
팔이 퉁퉁 붓도록 링겔을 맞았었지요. 다시는 안맞고 싶어요 정말. ㅜㅜ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오고는 신나서 혼자 축하파티를 했어요.
이 날은, 한달 병가 휴직의 마지막날.
이제 다시 새롭게, 생활인으로 살기 위해서 장보러 가던 길.
중앙시네마의 마지막.
마지막 영화의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함께 있었습니다.
마지막이라고, 뭔가 특별한 행사 같은 걸 하지 않을까, 했는데,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마지막 날을 보내더군요.
그것도 의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설령,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말이지요.
이래저래 노트북으로 정보를 찾아가며 투표할 사람을 고르던 6월 2일.
적어가지 않았으면 큰일날뻔했습니다. 투표할 게 너무 많아 머리가 하얘지던...
이 날은 많은 분들이 그러하셨듯, 오랜만에 밤을 하얗게 지새웠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말에는 예쁜 아가씨가 꽃을 사들고 놀러왔습니다.
꽃 하나가 분위기를 환하게 만들더라고요.
또, 처음으로 에어컨을 켰고요, 선풍기도 사려고 하고 있고요,
여름 이불을 사려고 벼르고 있으며,
살랑거리는 여름옷들을 보며, 무심하게 쪄버린 살들을 원망하면서,
그렇게 여름을 맞이하고 있답니다.
전, 여름이 정말 싫은데 ㅜㅜ
과연 올 여름은 어떻게 보내게 될지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