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은 단순히 사람이라는 보편성에 대한 인정이 아니라 사람이 다양하다는 것, 즉 차이에 대한 인정을 포함한다. 집단의 차이를 무시하는 ‘중립’적인 접근은 일부 집단에 대한 배제를 지속시킨다. ‘중립’이라고 가장된 입장은 사실 주류 집단을 정상으로 상정하고 다른 집단을 일탈로 규정하며 억압하는 편향된 기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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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빈 러너Melvin Lerner는 사람들이 공정세계 가설just-world hypothesis을 품고 산다고 말한다. 세상은 공명정대하고 사람은 누구나 열심히 한 만큼 결실을 맺는다고 믿는 것이다. 그렇게 믿는 이유는 그래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공정하다고 믿어야 장기적인 목표를 세우고 앞으로의 삶을 계획할 수 있다.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이 믿음은 필요하다.

문제는 부정의한 상황을 보고도 이 가설을 수정하지 않으려 할 때 생긴다. 세상이 언제나 공명정대하다는 생각을 바꾸는 대신 ‘피해자를 비난’하는 방향으로 상황을 왜곡하여 이해하기 시작한다. 세상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불행한 상황에 처한 피해자가 안 좋은 특성을 가지고 있거나 잘못된 행동을 했기에 그런 일을 겪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공정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바로 그 믿음 때문에 오히려 세상을 공정하게 만들지 못하는 모순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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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친척 한 사람은 자주 이렇게 말한다. "남자아이들은 너무 거칠어." 레슬링을 좋아하는 내 딸들과 몸싸움을 벌이면서도 말이다. 이럴 때도 나는 아이들과 나만 남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아이들에게 상기시킨다. "이모는 항상 남자아이들이 거칠다고 말하지. 하지만 이모는 여자아이들도 거칠게 굴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어. 게다가 많은 남자아이들은 그다지 거칠지 않아. 너희가 이걸 기억하면 좋겠어. 이모가 저렇게 말할 때는 세상에 있는 모든 거친 여자아이와 모든 조용한 남자아이를 까먹고 있는 거라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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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행은 일하는 것과 일하지 않는 것, 그저 존재하는 것과 뭔가를 해내는 것 사이의 미묘한 균형이다. 생각과 경험과 도착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육체노동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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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 지향적 문화에서는 대개 생각하는 일을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으로 간주하는데, 아무 일도 안 하기란 쉽지 않다. 아무 일도 안 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무슨 일을 하는 척하는 것이고,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에 가장 가까운 일은 걷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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