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인문학 - 클레멘트 코스 기적을 만들다
얼 쇼리스 지음, 이병곤.고병헌.임정아 옮김 / 이매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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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책이 생각과는 많이 달랐던 게 사실이다
 
나는 그냥 인문학이 어떤 효용이 있는지, 사실은 조금 뜬구름 잡는 것 같은 얘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사실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을 많이 듣긴 하지만, 이조차도 이공계의 위기에 파묻혀 있으니 참... 같은 위기끼리도 인문학은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희망의 인문학을 읽고 나도 더 인문학을 사랑해주고 싶다는 생각에 책을 집어 들었으나...
 
이 책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의 책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인문학의 실질적인 삶에의 적용이랄까? 암튼, 이 책의 실질적인 삶의 적용 내용은 사실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사실 인문학은 배고픈 학문이다. 배운다고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당장 어디에 나가서 써먹을 수 있는 학문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기에 거대한 실용주의 노선 아래서, 점점 인문학은 등한시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희망의 인문학의 저자는 그러한 현실 속에서, 오히려... 가난한, 어디 나가서 써먹을 지식이 당장 필요한 이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치자고 주장하고 있다. 이 책의 앞부분은 가난한 자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쳐야 하는 당위성과, 그 실효성에 대해 굉장히 길게 설명을 하고 있지만, 사실 나는 그 부분을 굳이 읽지 않아도 될 만큼 그 당위성에 대해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내가 전공한 것은 다소 실용적인 학문이었지만, 그 과정은 굉장히 인문학적이었다. 스스로를 인문학도라고 말하기는 다소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인문학의 중요성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이 참 많이 안타까웠던 게 사실이다. 페미니즘의 경우 중산층 배운 여성 지식인들의 학문이라는 인식이 굉장히 팽배하다. 그들은 덜 배우고, 못 가진, 사회적 약자이자 타자인 여성들을 위해 애쓰지만, 정작 덜 배우고 못 가진 여성들은 그들의 논리에 공감하지 못하며, 사회에 순응하며 그저 자신이 박복하려니, 하며 살아가는 경우가 다반사다.
 
나는 여성을 한 예로 들었을 뿐, 상황을 여성에 국한시키는 것은 아니다. 범위를 좀더 확장해 서민 전체로 놓고 볼 때 가난한 사람, 서민들을 위해 열심히 움직이고 노력하는 정당이 있어도, 서민들은 오히려 그런 것들의 정치적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지 못한다. 오히려 자신의 기득권 유지에 급급한 정당을 지지한다. 자신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매체인 신문(조중동 등)을 통해 자신의 세계관을 형성하며 살아가는 서민들의 생각을 보면, 그 생각들은 더 이상 그들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며 나 역시 안타까우나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나 자신이 참 무력하다고 생각했다. 먹고 사는 데 바쁜 이들에게 생각과 성찰의 여유는 오히려 욕심으로 느껴질 것이다.
 
이런 그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쳐야 한다는 이 책의 저자 얼 쇼리스의 주장을 읽으며 가슴 한 구석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 정말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세상 한쪽에서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구나, 하는 감동-
 
이 책은 이런 클레멘트 코스에 대한 매우 실질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필요성에 대한 촉구를 넘어선, 세세한 적용 실례까지. 특히 뒷부분에 실제적인 강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담은 부분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나도 그런 내용으로 수업을 받고 싶을 정도로) 책 내용 중 클레멘트 코스 수강생이 본인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을 겪었을 때 "이럴 때 소크라테스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했어요"라고 대답한 부분은 참 인상적이었다. 사람의 성품을 바꾼다는 게 곧 그 사람의 삶을 바꾸는 일이고, 그 사람을 둘러싼 세계를 바꾸는 일이다.
 
대구 지하철 참사를 보며,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던 건, 그 사람은 세상을 원망할 줄만 알았지, 바라보고 성찰할 줄은 몰랐다는 점이었다. 그에게 어린 시절 좋은 선생님이 있었다면, 그가 좋은 것을 많이 배우면서 자랄 수 있었다면, 그런 안타까운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클레멘트코스야말로 정말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나라에도 이제 클레멘트 코스가 조금씩 정착되는 단계이다. 사실 책을 처음 받고 머리글을 읽었을 때의 두근거림으로는, 당장 회사를 그만두고, 나 클레멘트 코스의 강사로 들어가야 되는 거 아니야? 라는 괜한 사명감까지 느꼈으나, 나의 수준으로는 어림없는 짓이다. 그저 나의 위치에서 조용히 응원해 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 봐야겠다. 클레멘트 코스가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날이 오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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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는 나의 여행
임영신 지음 / 소나무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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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책을 받았을 때, 아기자기하게 감각적이고 예쁜 편집이 참 기분 좋았다. 하지만 싱긋 웃으며 책을 펼친 후, 갑자기 나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평화로 가는 길은 없습니다, 평화가 길입니다"

이 한마디가 이 책에 대해 모든 걸 말해주는 듯 했다. 그리고 내 머리속엔 자꾸 이 말이 맴돌기 시작했다

임영신, 그녀는 가정을 버렸다?
 

이 책을 다 읽고 리뷰를 쓰기 전 이렇게 누군가 그녀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 것을 보았다. 세 아이이자 한 남편의 아내인 여자가 가정을 버리고 전쟁 현장으로 뛰어든 것은 이기적이고도 무모한 일이라고 가정의 평화는 그녀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느냐고

한비야씨의 글을 읽을 땐 누구도 그녀에게 무모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렇다면 그녀가 혈혈단신이기 때문이었단 말인가? 가정이 없는 여자는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도 되고, 가정이 있는 여자는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면 이기적이고 무모한 걸까? 

우리에게, 또 많은 사람들에게 건강한 가정, 가족이라는 것의 의미가 참 많이 왜곡돼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생각하는 가족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삶을 위해 한 걸음 나아갈 때 진정으로 지지하고 힘이 되 줄 수 있는, 본인을 가장 잘 알고, 박수쳐줄 수 있는 공동체이다. 가족이 있으므로 갇히고, 발목 묶여 그 가정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긍긍하는 공동체가 아닌 오히려 그로 인해 안심할 수 있고, 한 발 앞서나갈 수 있도록 서로를 긍정해 줄 수 있는 곳이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가정의 모습이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런 가정의 모습, 그리고 이런 지지자가 되어줄 수 있는 남편과 아내의 모습이 참 부러웠다 (남편 분, 제 이상형이십니다) 아이들 역시, 이런 남편이 있었기에 믿고 떠날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전쟁이라는 '선명한 거짓'을 좌시할 수 없었던 그녀에게 이러한 본인의 모습을 긍정하고 격려해 주는 가정은 큰 힘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대 여성학과 정희진 교수는 진정한 모성이란 엄마가 아이들에게 무조건적인 희생을 부어주는 것이 아닌, 엄마로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아이들에게 바람직한 롤모델을 보여주는 데 있다고 말했으며나 역시 그 말에 공감한다. 사회의 한 곳에서 옳은 일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는,엄마에게 어려서부터 평화에 대해 듣고, 평화를 배우고 자란 아이는 올바르게 자랄 수 밖에 없다. 다른 나라 아이들을 제 아이처럼 사랑하고 그들을 향해 눈물 흘릴 수 있는 그녀는 자신의 아이들을 역시 온맘과 정성을 다해 사랑하며 바르게 키워낼 수 밖에 없다

그러니, 그녀는 가정을 버렸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가정을 너무나 아끼고, 존중하고, 사랑했다

앗살라 말라이쿰, 평화가 인사인 그곳

이 책을 들고 지하철에서 읽는데 자꾸만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녀의 마음에 눈물이 날 것 같다, 그녀가 전하는 그 곳의 소식에 자꾸만 눈물이 날 것 같다. 그곳 사람들은 앗살라 말라이쿰, 이라고 인사를 한다. 당신에게 평화를... 평화가 일상인 우리는 사람들을 만날때 평화를 기원해주지 않는다.오히려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한 이 곳에서, 한 때는 "부자되세요"가 인사인 적은 있었다. 그게 사람들이 가장 바라는 것이었으니까

이 곳 사람들은 그렇게 인사하지 않는다. 오로지 서로에게 평화가 임하기를 늘 기도하고 기도해줄 뿐이다. 이 한가지 사실을 알게 되는 것 자체가 나에겐 정말 슬펐다. 평화가 그렇게 간절한 사람들이 있구나. 비둘기떼 따위를 보면서 막연히 저게 평화의 상징이야, 하면서 (지금은 아니지만;;;) 평화가 너무 당연해서 사실 진짜 평화가 뭔지 모르는 우리들도 있는데 그들은 일상이 아닌 평화가 일상이 되길 바라며 그렇게 서로에게 늘 일상적으로 인사한다. 참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그들은 참 강인하게도 그들의 일상을 지키려 노력한다

"다시 전쟁이 온다 해도, 폭탄이 쏟아진다 해도 이 강가에 와서 물을 끓이고 차를 마실 거에요. 전쟁이 우리들의 일상을 바꾸어놓을 수 없다는 걸 그들이 볼 수 있도록, 우리가 전쟁보다 강한 일상을 가졌다는 걸 볼 수 있도록"
- p49, 티그리스 강변에서 마주한 한 젊은 부부

평화롭지 못한 그들의 일상이기에 한 순간의 평화를 소중히 여기며 지키고픈 마음 또한 강렬한 그들의 모습에 또 나는 가슴이 아프다. 사람에게 다른 사람의 기본 인권인 존엄을, 생명을, 그리고 평화를 빼앗을 권리를 누가 주었던 것일까. 경제 제재를 이유로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영아 살해를 자행했던 그 모습을 어떤 이유를 들어 용서할 수 있을까. 한 사람의 삶의 시작이, 평생의 인격을 결정하는 시기가 '전쟁'이라는 치명적인 기억, 아픈 기억으로 시작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그 권한은누구로부터 정당성을 부여받은 것일까. 이런 사실을 보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우리는 그저 무기력한 존재,라며 이러한 것들을 합리화해도 되는 걸까? 아니면 몰랐다,고 그저 방관해도 되는 걸까? 오히려 무기력하다고 포기했고, 몰랐다고 방관했던 게 더 큰 잘못은 아니었을까? 그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대답 없는 물음만, 답 없는 질문만 끊임없이 반복할 뿐이다

정직한 물음, 정직한 대답

그녀는 이러한 현장들을 마음에 안은 채,평화를 향한 여행을 계속한다. 라브리와 떼제를 다니며, 그 곳의 사람들을 만나며 그녀는 계속되는 우리들의 대답없는 물음, 답없는 질문에 대해 어느 정도 답을 찾아 주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은 바로 정직한 물음 정직한 대답을 통한 자기 자신과의 깊은 대화이다

라브리는 깊이 묻고 정직한 삶을 살 것을 그 곳에서 쉼을 찾는 사람들에게 말없이 말해주고 있다. 떼제 또한 마찬가지다. 자기가 선 곳에서 깊이 묻고, 스스로 대답하고, 기도와 화해의 삶으로 희망을 이끌어나가는 삶, 단순하고 소박한 삶덜 갖고 많이 존재하는 삶, 생각한대로 살아가는 삶, 앎과 삶이 일치하는 삶, 자신을 사랑하고 세상을 돌보는 삶, 화해와 일치의 삶으로, 세상을 향해 화해의 문이 되어주는 삶- 이러한 삶을 살 것을 추상적 선언이 아닌, 손으로 매만져오는 일상으로 말을 걸고 있다고 그녀는 말하고 있다

이 책의 마지막에서 임영신은 돌맹이국을 끓이는 지혜로운 곰 이야기를 하면서 곰에게 그렇게 평화로운 지혜를 가져다 준 것은 숲에서 혼자 보냈던 시간, 자신의 분노를 돌아보고 고요하게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으며 우리의 삶과 세계에 이러한 물음들이 있다면 세계는 좀 더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을까, 라고 말한다

결국 이 책의 첫장에 신영복 선생님의 친필로 쓰여진 한마디처럼 평화로 가는 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마음 속 평화의 추구가 곧 평화를 향한 길인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 잘 살고 있는 거니? 

라브리의 설립자인 프란시스 쉐퍼의 책 제목이기도 한 이 물음- 이 책을 읽는 내내 나에게 함께한 물음이다. 대학 2학년 때 저 책을 읽고, 나는 답을 찾았던가? 지금 다시 이 책을 읽는다면 나는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신영복 선생님을 향한 말없는 흠모가 느껴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나는 나의 대학시절이 떠올랐다. 나 역시 대학시절, 학부의 선생님들을 참 존경했었고 감히 그 앞에서 부끄러워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뒤에서는 그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무던히 노력하고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다른 곳에 잠깐 취직했다가 자꾸만 마음에 밟히는 선생님들의 이야기 때문에 그 심어주신 삶에 대한 가르침, 가치관 때문에 NGO쪽으로 다시 취업하기 위해 알아보고, 노력했으나, 수요는 많고, 공급은 적은 상황 속에서 어렵게 어렵게 끝까지 갔으나 번번히 최종에서 탈락하면서 그냥 이 곳은 내가 갈 곳이 아닌가보다, 하고 다시 안주해버린 내가 나름 지금의 편안하고 스위트한 삶에 만족하면서, 내가 가서 직접 일하고 싶었던 기관들의 후원자로 남으며 만족하고 있는 내가 잘 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존경해 마지않는 신영복 선생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며, 그 삶을 경계하며 살아가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또한 다시 한 번 그녀로 인해 가슴이 두근거리는 나를 보면서 얼른 두근거리는 이 가슴 진정시키고, 나에게 정직한 물음과 정직한 대답을 던져줄 수 있는 나만의 시간을 선물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나만의 평화 여행을 계획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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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지링 오에 겐자부로 장편 3부작 1
오에 겐자부로 지음, 서은혜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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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좋은 책은 마음에 남는다

이 책을 읽을 때, 사실 나는 10문장에 5문장은 괴로워했고, 사실은 내가 난독증이었나? 나 자신을 의심하기도 했고, 책갈피 꽂아놓는 것을 잊고 대충 기억을 찾아 읽어들어가다가 한페이지 가량 읽은 후에, 아 여기 읽었던 데잖아, 하며 좌절도 했고 얼른 읽고 다른 책을 읽고 싶어, 라는 생각도 스무번쯤 한 것 같다. 스스로가 본인은 나름 어려운 책도 잘 소화한다는 어이없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사실은 이런 내 모습에 조금 적응이 안되기도 했으나 이 책은 정말 꼼꼼하게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으므로, 꾹 꾹 참고 한 자 한 자 읽어 내려갔다

책을 덮으면서도 어안이 벙벙한 머릿속,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흘러도, 이 책속 구절들, 인물들은 계속 마음에 남아 있다. 작가가 읽는사람 마음에 남기기 원한 것들이 남아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것과는 상관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형태로 내 마음속에 남아있는 것들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1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누가 감히 함부로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사람이 가장 잔인하다고 생각되는 순간 중 하나가 그 사람이 무방비상태로 놓여 있는 순간,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내뱉는 순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책을 읽고 나는 이 책에서 '고로'라는 인물로 묘사되는 이타미주조 감독의 삶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 아... 역시 생각했던대로 대단한 감독이었구나, 이 책에 나오는 아버지의 이야기도 언급이 되는구나... 하고, 읽어내려가는 순간 마지막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10편의 연출작 중 9편을 흥행에 성공시키면서 일본의 대표적 흥행감독으로 명성을 날린 이타미 주조는 1997년 한 잡지사가 자신의 여성스캔들을 폭로하려 하자 빌딩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말 단호하고 확정적인 저 한마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도록 단정형으로 딱 잘라버린 저 한마디를 보며 사람들을 보고, 나를 보고, 나는 참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저 일축해버리는 한마디에 고로 사후 고기토는 얼마나 힘들고 혼란스러웠을까 절대 그랬을 리 없는, 150%라도 확신할 수 없는 친구의 어이 없는 자살 원인, 수많은 사람의 추측과 단정들, 그리고 규정지어버림- 이런 것들이 정말 고로를 괴롭게 했을 것이다

나 역시, 살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접했고, 그 사람들에 대한 수많은 풍문, 생각없는 지껄임 등을 들으며 더 알아보려 하지 않고, 고민하려 하지 않고, 그 사람들을 '규정지음'이라는 보이지 않는 창살 속에 가두어둔 적은 얼마나 많았는지, 누군가의 삶에 그저 단순히 호기심이라는 이유로 접근하고, 호기심 충족을 목적으로 주어진 사실 몇 가지를 받아들이고 마치 다 알아버린 양 행동했던 나 자신이 알고 있고, 또 믿고 있었던 것들에 대해 어느 정도는 재정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짐하고 결심해 본다, 다른 사람의 삶과 죽음에 대해 함부로 규정하는 '잔인한 폭력'은 행사하지 말자고

#2 죽은 자의, 이해를 구하는 변명, 예의 - 물장군

사실 '물장군'이라는 시스템을 통해 산 자와 죽은 자가 대화를 한다는 시스템 자체가 참 독특하다

고로는 왜 자살을 결심했으면서도, 고기토에게 그렇게 많은 물장군들을 남겼을까, 이건 그렇게 황망하게 가버림으로써 친구에 대한 예의를 다하지 못한 고로의 고기토에 대한 마지막 예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해할 수 없는 친구의 죽음 앞에서, 믿어지지 않는 사람들의 단정과 규정 속에서 자신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믿을 수 없는 이 사실을 어떻게 믿어야 할지 점점 혼란스러워져만 가는 고기토는 물장군이 있었기에, 그를 조금씩 이해해 간다

사실 물장군은 고로의 죽음에 대한 끝없는 암시가 들어 있었지만, 어쩌면 살려줘- 라는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르는 생각이 들었지만 물장군을 통해, 또 그 외에 다른 것들을 통해 고기토는 고로의 죽음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게 된다. 적어도,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통속적인 이유는 아니었음을- 이해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어쩌면 그 물장군은, 그저 죽은 자의 하나의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할지라도 참 고마웠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말없이 죽어버린 친구가, 사실은 본인에게 참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는 사실 ^^

#3 '그것'이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던 사건

이 책을 읽다 보면, 고로와 고기토의 청소년 시절,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던 '그 사건', 혹은 '그 일'로 표현되는 일이 나온다. 책을 읽으며 내심 도대체 '그 일', '그 사건'이 뭔지 궁금했다. 저자는 그 일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하지는 않는다. 다만 앞뒤 전후 문맥을 통해 짐작할 수 있도록 할 뿐이다. 그 일을 문맥을 통해 짐작하도록 했던 것은 문학적 장치라기보다는 아마 본인이 그 일을 스스로 써내려간다는 데 대한 괴로움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김형경의 세월을 읽다 보면 그녀 역시 본인을 평생 괴롭혀 온 일에 대해 쓰는 것을 너무나 괴로워하고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그런 일이 있었다'라는 문장으로 대체해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는 장면이 나온다. 작가 역시 이 부분을 구체적으로 적는 일이 참 괴로운 작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괴로움만큼이나 우리가 추측하는 그 일은 그리 대단케 느껴지지는 않는 일이다. 오히려 문학 작품을 통해서 더한 사건(?)도 겪었기에, 사실은 조금 김이 빠지기도 한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참,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서는 쉽게 생각한다고, 본인은 죽을만큼 힘이 드는 일일지라도, 그것을 객관화시켜버린 경우에는, 참 별것 아닌 일이 되어버린다고, 그것 또한 참 잔인한 일이 될 수 있겠다고

#4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들만의 방법

'아름다웠다'라고 표현되던 사람, 고로의 죽음 이후 그를 소중히 여기던 주변 사람들이 참 많이 힘들어하고,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지만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결국 자신만의 방법으로 그 죽음이 가져다 주는 상처를 극복하고 치유해 나간다

고로의 조카이자 고기토와 치카시의 아들인 아카리는 '고로'라는 제목의 음악을 만들어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치유한다. 고로의 'girl for everything'이라 표현되던 그녀, 특별한 연인이던 그녀는 결국 다른 사람의 아이를 다시 태어날 고로라 여김으로 그 아이를 낳아 정성을 다해 보살피겠다는 결심으로 고로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극복한다. 고로의 여동생인 치카시는 누구보다 오빠를 사랑하고 아끼던 사람, 17세 '그 일' 이후 다른 사람처럼 변해버린 오빠를 되돌리고 싶어, 자신의 아들을 낳으며 다시 고로를 낳겠다고 결심을 할 정도로 오빠를 소중히 여겼다. 그림을 좋아하던 그녀는 결국 자신의 마음을 꼭 닮은 그림을 통해 마음의 치유를 얻는다- 그리고, 새로 태어날 아이에게 정성을 쏟아 기르겠다는 그녀, 우라를 지원함으로써 산 자를 향한 마음으로 죽은자를 향한 슬픔을 승화시킴으로써 극복하게 된다

그리고 고기토는 그러한 마음들을 담아, 또 자신의 고로에 대한 마음을 담아 책을 쓴다. 고로는 죽기 전, 고기토가 자신을 글로 기억해줬으면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러니 이 '체인지링'이라는 책은 이타미 주조의 죽음에 대한 가장 오에 겐자부로다운 극복법인 것이다

이렇게 각자 죽은 사람은 마음에 묻고, 각자의 방법으로 극복하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또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죽은 자보다는 산 자, 산 자보다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들에 대해 마음을 쏟는 것, 그것이 이 책이, 이타미 주조의 죽음이 우리에게 끝내 남겨준 희망의 메시지일 것이다

#5 내 삶은 얼마나 진실한가

어떤 책이든 결국 내 이야기로 귀결시키는 데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웬디씨는 (ㅎㅎ) 결국 이 역시 나의 문제로 귀결시킨다. 고로의 죽음 앞에서...

열 여섯 살짜리 고기토를 만났을 때부터 나는 자네에게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일러왔네. 남을 즐겁게 하기 위해, 혹은 타인을 위로하기 위해서도 거짓말은 하지 말라고 계속 말해왔지. 바로 얼마 전에도 그렇게 말하지 않던가? 하지만 그대 자신이 '거짓을 양식 삼아 내 몸을 먹여온 것'은 사실이었어. 우리 두 사람 모두 말야.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하기로 해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출발'이다. 말할 것도 없겠지만 이번 경우 '출발'은 나 혼자서 할게. 그리고 우리들 나이가 되면 오직 혼자만의 출발을 각오하고 나면 더 이상 말릴 수가 없어. 타인에겐 물론 방법이 없어. 본인 자신에게조차! (중략)

그러니 고기토여, 나에게 고별이라는 시가 이해되는 것은 실은 여기까지라네. 삶의 연속선상에서 그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은. 그도 그럴 것이 그 시의 후반부는 출발한 후에야 비로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내게는 그런 기분이 들기 때문이지.

고로의 죽음은 결국 거짓을 양식삼아 본인을 먹여온 데 대한 죄책감에 있는 것이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보면, 졸업하는 학생들을 향해 선생님께서 그들의 지식을 그들이 입을 이익을 위해 쓰지 말 것, 간사한 곳에 지식을 쓰지 말 것이라는 당부를 한다. 그 부분을 읽으며 나 역시 이를 얼마나 다짐하고 곱씹었던지... 마치 고로가 랭보의 시를 곱씹었던 것처럼 말이다. 결국 나 역시 조금은 간사해지고, 나의 이익을 위해 나의 지식을 사용하면서 이를 끊임없이 합리화시키고 있는 모습이 많고, 이런 모습은 고로가 그토록 괴로워했던, '거짓을 양식 삼아 제 몸을 먹여온 것'에 크게 다르지 않다

65세의 고로씨는 죽음을 택했다, 그것이 그가 랭보의 시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에. 하지만 스물 일곱 웬디씨는 좀더 진실한 삶에의 의지를 택한다. 비록 평생 결심과 의지로 끝나버릴 일이라 해도, 이 결심과 의지는 멈추지 않기로 ^^

참 많은 생각들이 마음에 남았다- 그렇기에 이 책을 읽느라 괴로워하고, 끊임없이 자책했던 독서의 시간들일지언정, 전혀 아깝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감사할 뿐 ^^

Epilogue... 그나마 위로

사실 책을 읽으면서 참 위로 받았던 부분이 하나 있다. 그건 고기토가 쓰는 글이 쉽지 않음을 고로가 지적하는 부분

그런데 고기토는 말야, 생각해보면 노랄 일이지만 최근 30년 정도 독자를 생각해서 주제나 글쓰기 방식을 택한 흔적이 없어! 자네는 소설의 초고를 쓰고 나서 계속해서 날마다 하루 열 시간씩 일을 하면서 그걸 완전히 고쳐 쓰지? 당연히 문장은 읽기 힘들어져서 분명히 연마되어가긴 하지만 자연스런 호흡이 아닌 인공의 음악이 되거든. '이화'라고 하는 자네가 자신있어하는 수법도 말야, 페이지마다 낯선 이미지와 맞닥뜨려야하는 어떤 독자가 같은 작가의 책을 한권 더 살 마음이 들겠냐고. 이것도 자네의 용어법이지만 노작이란 작가가 해야 할 일이지 독자에게 시킬 건 아니지.

음하하하 역시 나만 어려운 게 아니었어, 전 세계 독자가 어려운 거였어! 뭐 어려우면 어려운 만큼의 매력이 있는 거니까, 역시 난독증은 오버였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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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베이 2007-08-04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꼼의 웬디양님이신가요? 추천하고 갑니다^^

웽스북스 2007-08-05 00:55   좋아요 0 | URL
앗, 반가워요 쥬베이님! 북꼼의 웬디양 알라딘에 둥지틀어보려고 기웃기웃하는 중이에요 ^^

karma 2008-04-25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솔직하고도 진솔한 글이네요-
잘 읽고 갑니다!

저녁엔 2008-08-21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상문 잘 읽었습니다. 어젯밤 마지막 장을 덮은 책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
 
나의 고전 읽기 - 이 시대 대표 지성인 10인이 말하는 나의 인생과 고전
공지영 외 지음 / 북섬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가끔씩 책을 읽고 있는 나를 보면 사람들이 와서 묻는다. 왜 책을 읽느냐고. 그럴 때마다 나는 그저 웃으며 답할 뿐이다. 하하하 재밌어서요. 사실 맞다, 나는 재미로 책을 읽는다. 요즘에는 아무리 다양한 문화를 접해도 결국 책만큼 재미있는 컨텐츠를 찾아 보기는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나는 책이 왜 재밌을까? 사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책을 읽는다. 누군가가 말했듯, 어떤 사람은 책에서 공부하는 법을 찾고 어떤 사람은 책에서 돈 버는 법을 찾고 또 어떤 사람들은 책에서 사랑에 성공하는 법을 찾는다. 하지만 나는 책 속에 인생이 있기 때문에 책이 재미있다. 누군가의 삶이 있고, 그 삶이 내 삶과 다르지 않으면 다르지 않아서, 또 다르면 달라서 그냥 그대로 재미가 있고, 내겐 의미가 있다

이 책은 책을 편집 혹은 홍보한 자의 표현에 따르자면 '이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인'들의 고전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실 그들이 단순히 고전을 소개하는 정도라면 내가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이책에 관심을 가진 건 이들의 소개하는 그 고전이 그들의 삶을 어떻게 형성했는지 책을 통해 내가 좋아하게 된 사람들이 어떤 책을 통해 어떻게 영향을 받아 왔는지, 순전히 그런 것들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최근들어 인간냄새 나는 글을 쓰기 시작한 공지영의 뒷편에는 톨스토이의 인간에 대한 고찰이 돋보이는 '부활'이 있었고 보이는/보이지 않는 폭력에 항거하는 자세가 돋보이던 김두식 교수의 뒷편에는 사랑과 평화의 실천을 이야기하는 톨스토이의 민화집이 있었으며 독특한 색깔의 영화로 주목받는 변영주 감독의 뒤에는 트뤼포 감독의 400번의 구타, 박완서 선생님의 나목, 그리고 발레교습소에서 그린 청소년기의 모습의 뒤에는 가네시로가즈키의 영향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홍세화 선생님의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 뒤에는 라 보에티의 '자발적 복종'이 있었다

톨스토이에 대한 부분, 사실 김두식 교수가 그의 저술 부분을 통해 고전은 모두가 알고 있으나 아무도 읽지 않은 책이라 표현했듯 나 역시 톨스토이의 저작 중 딱히 읽은 게 동화스러운 민화 몇개과 인생론 정도? 그럼에도 이 책에서 소개된 고전들 중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가는 톨스토이였다. 톨스토이는 공지영 작가와 김두식 교수님이 차례로 소개하는데 이 작가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서 더욱 흥미로웠다

예를 들면 공지영은 톨스토이의 성장과 인간성에 대한 믿음에 주목한다. 작가로서, 가장 마지막 작품인 부활이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칭송받는, 글쓰기를 통한 그의 성장이 그녀에게 도전이 됐으며, 인간의 추악한 면을 집요하게 파고 든 도스토예프스키와는 달리 인간에 대한 믿음, 구원, 희망을 얘기한 톨스토이가 그녀에게는 작가로서 더 닮고 싶은 모습이었다는 것

하지만 김두식 교수는 톨스토이의 삶에 있어서의 이상과 현실과의 괴리에 주목한다. 끊임없이 이상을 노래하고, 희망을 얘기했지만 그의 이상이 아닌 일상은 그와 같지 못했다는 것, 그 역시 이상을 이야기하지만 현실속에서 살고 있는, 어쩌면 톨스토이와 같이 괴리감이 있는 질척질척한 삶을 살고 있는 한 사람의 범인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고, 나 역시 이 부분에 굉장히 공감했다. 이상이라는 것, 사실 이상이기 때문에 완벽하게 이루지 못하는데, 그럴 바에 차라리 버리면 그만인 걸 버리지도 못하면서 그렇다고 이루지도 못하는 정말 질척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또 내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날마다 결심하고, 날마다 패배하면서도 또 다시 결심을 일삼는 내 모습이 그 안에 있었다

또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맹자를 이야기한 배병삼과 장자를 이야기한 표정훈의 저술 부분이었다. 사실 맹자, 장자는 윤리시간 이후 딱히 접한 적이 없다. 맹자 호연지기 장자 자연주의 노장사상 뭐 이런 것만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 있을 뿐

맹자와 장자의 공통점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신뢰와 존중이다. 알다시피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했고, 인간의 본성에서 희망을 본 사상가였다. 사실 희망보다는 절망이 더 많던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그 안에서 희망을 볼 수 있었던 맹자, 사람들 안의 선한 씨앗을 찾아주고, 그로 인해 다시 함께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고자 했던 맹자, 도덕 책에서 봤던 그의 인상은 흉악 울그락 불그락이었는데 그 안에 이렇게 착한 생각이 품어져 있었다는 것- 사실 도덕시간에 배울 땐 와닿지 않았었다 ㅎㅎ

그리고 장자는 인간 본성에 대한 존중을 이야기하는데 공자가 말하는 인의(仁義)에 대해, 그것은 인간의 본성을 억누르려는 비현실적인 사상이라 일침을 놓으며 각 사람이 자신의 본성에 충실하며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말한.. 사실 나도 조금은 이상주의자적인 측면이 있어서 이러한 장자의 사상에 100% 공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상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사람에게 삶의 방식을 강요하는 것 역시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장자의 사상을 운동권에 합류하지 못하던 자신의 젊은 시절을 합리화하는 논리로 써먹었다고 하고, 세상의 다양한 일에 대해 충고를 해주다 보니 다소 일관성이 없는 측면도 있었다고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일에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생각이 아닌가, 라고 이야기하고 그 부분에 나 역시 공감한다. 사실 나 역시 이상주의적 측면을 가지고 내 삶을 종종 옭아매더라도 또 이렇게 인간 본연의 모습에 충실하라는 장자의 이야기를 들으면 괜히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고 공감이 되는 것 역시 하나의 모순이 아니겠는가 흐흐흐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고전에 대해 이야기했고 사실 어느 정도 국한된 면이 있지 않을까 싶었던 고전의 정의는 너무나 다양하고 다채로웠다. 서양의 고전, 동양의 고전, 소설, 시, 사상, 영화까지 정말 고전이라는 말이 참 많은 것을 아우른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됐다

사실 제목에 비해 책 내용은 조금 가볍긴 했으나 고전이라는 이름으로 무겁고 심각한 얘기를 줄줄 늘어놓지 않아 오히려 내게는 더 좋았던 것 같기도 하지만 정말 맘에 들지 않았던 부분은 책의 편집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의 폰트와 색깔을 달리하고 거기에 친절하게 밑줄까지 그어주었다는 것

읽는 사람에 따라 받아들이는 게 다르고 해석이 다른 '고전'을 이야기하면서, 여기가 중요한 부분이고,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라고 손수 밑줄까지 그어주셨던 편집자의 과도한 친절은 그야말 '사족'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그 부분을 읽을 때 편견을 갖게됨은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얕으나마 여러 고전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으니 나로서는 꽤 의미 있는 활동이었다

특히나... 천성이 비굴한 나에게 고전을 숭배하지 마십시오- 고전을 읽는 것은 나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위함이지 작가의 시각을 숭배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숭배하려는 자에게 고전은 속살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라는 배병삼 교수의 말이 나에게 다시 한 번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하마터면 비굴하게 숭배하면서 고전 읽을 뻔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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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천국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2
이청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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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은 소록도 나환자촌을 천국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우리에게 진정한 낙원의 건설은 가능한 것인지, 그렇다면 그 모습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던집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책 속 소록도의 모습이 사실 1970년대 군사정권 시절의 우리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모든 국민들은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든다는 대의 앞에 개인을 모두 희생했어야만 했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위정자들의 폭력은 국가를 위한다는 명분 앞에 정당화됐죠. 그 곳에는 이미 개인은 없고, '살기 좋은 나라'라는 이상향만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살기 좋은 나라'라는 명분은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닌, 한 사람의 이기적 성과주의로 변모하고 말았습니다.

당신들의 천국에서는 이러한 이기주의를 '동상'으로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업적을 기리는 상징물인 동상. 모두를 위한 마음으로 시작된 일이라 해도, 결국 자신의 성과를 인정 받고 싶은 마음, 누가 이런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결국 소록도를 '우리들의 천국'으로 만들겠다던 4대 원장 주정수는 그것을 자신의 이상향으로 만들었고, 공익이라는 명분 아래 합리화를 했습니다. 손발이 성치 않은 소록도 원생들은 그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만 했고요. 천국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삶을 혹사한 그들의 삶이 어떻게 천국일 수 있었을까요?

사실 태생적으로 그들 개개인의 삶은 천국이 될 수 없었습니다. 옛날에는 천형이라고도 불린 한센병을 앓고 있던 사람들, 그렇기에 사연도 아픔도 상처도 많은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바로 소록도입니다. 그렇기에 그 곳에 낙원의 건설은 어려울 수밖에 없던 것이지요. 개개인의 삶이 천국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어떻게 낙원이 될 수 있을까요? 사회적인 틀로서의 천국과 개인으로서의 가치가 완벽하게 조화될 수 있는 것일까요? 작가는 우리에게 이런 의문을 던집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조백헌 원장은 상대적으로 대안적인 인물로 그려집니다. 그가 완벽한 인물이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가 완벽했다면 오히려 <당신들의 천국>의 문학적 가치는 이 정도로 높게 평가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조백헌 원장은 주정수 원장이 겪은 시행 착오를 똑같이 겪습니다. 하지만 그는 성찰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조언에 귀를 기울이고, 그를 통해 자신을 직시하며 반성할 줄 아는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한계는 그들의 삶을 살 수 없는 데 있습니다. 운명을 같이 할 수 없는 사람이 운명 공동체로서 천국을 만든다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결국 자신의 한계를 직시합니다. 그리고 섬을 떠납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 다시 돌아옵니다. 운명을 함께 하는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

그리고 진심으로 그 곳의 변화를 위해, 이 책이 말하는 대안인 사랑에 근거한 자유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조력자가 됩니다. 그 곳은 태생적으로 완벽한 천국이 될 수 없는 곳이었지만, 그는 완벽을 기할 수 없다고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조금씩 조금씩 변화를 꾀하며, 섬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한걸음씩 갈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이런 모습이 이 시대의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견해 봅니다.
 
이제 대선을 앞두고, 우리는 이 땅을 천국으로 만들겠다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될 것입니다. 그들 역시 이타심을 앞세워 이기심을 드러내며, 공익을 위시한 본인의 성과주의에 집착하지는 않을지 사실 걱정스런 마음이 앞섭니다. 개인적인 마음으로는 그들이 국민들의 앞에 서기 전, 이 책을 꼭 한 번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저의 지나친 욕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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