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기억에 남는 건 바람, 이다. 기껏 정돈해놓은 머리가 날리고 섞여 엉망이 될정도로 세찬 바람이 불었다. 김영갑 갤러리 뒤편의 쪽문으로 빠져나가자 바람이 세차게 부는 작은 언덕 비슷한 것이 있었다. 올라가는 길의 동백은 일부는 피어 있고, 또 일부는 떨어져 있었다. 갤러리의 사진도 안보고, 그곳에서 작은 의자에 앉아 한참동안 바람소리를 듣다가 언덕 위로 올라갔다. 그 곳에서 불던 바람의 소리는 찍을 수도 없고, 녹음할 수도 없고, 그저 온맘을 다해 열심히 기억하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산굼부리에서 불던 바람의 소리는 김영갑 갤러리 뒤편에서 불던 바람의 소리와는 또 달랐다. 억새끼리 몸을 부딪치며 만들어내던 그 소리가 좋아, 머플러 두개를 꽁꽁 감쌀 정도로 추운 날씨에도 한참을 서성였다.
그리고, 또 기억에 남는 건 초계미술관에서 만났던 그 여유. 그건 노력으로 되는 얻어지는 게 아니라, 그냥 온 삶으로 체득한 것이라는 생각에 조금 많이 부러웠다. 바다를 보면서 매일매일 커피를 내리고 빵을 구우면 행복할까. 라는 의문이 잠시 들었지만, 그만큼 나는 서울의 저녁 풍경도 좋아하니까, (투철한 신포도 정신!) 그 때의 마음은 다 제주에 두고 올라왔다. 올라올 땐 비행기가 무려 1시간도 넘게 지연되서, '얼른 서울로 가고싶어' 라는 생각까지 하면서 왔다.
언제부터인가, 여행을 하면서 굳이 사진기를 챙겨가지 않거나, 챙겨가도 잘 찍지 않게 됐다. 사진기를 꺼내고 뷰파인더로 보는 것보다 내 눈으로 보는 게 진짜라는 생각. 내 기기와 실력은 어차피 내가 보는 만큼 재현해낼 수 없다는 생각. 그리고 사실은, 이제 늙어서 사진속의 내 모습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고. (ㅠ_ㅠ) 이번 제주 여행에서도 거의 사진을 남기지 않았다. 혹시나 하고 몇장 찍어봐도 역시나. 내 눈과 귀로 기억하는 편이 훨 낫다고 다시한 번 생각하게 된다. 내가 턴레프트님처럼 사진을 찍는다면 혹 모르겠지만. ㅎㅎ
제주에 가져갔던 (하지만 결국 공항 가는 지하철에서 다 읽어 버린) 한강의 희랍어 시간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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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곳에서건 사진은 찍지 않았다. 풍경들은 오직 내 눈동자 속에만 기록되었다. 어차피 카메라로 담을 수 없는 소리와 냄새와 감촉들은 귀와 코와 얼굴과 손에 낱낱이 새겨졌다. 아직 세계와 나 사이에 칼이 없었으므로 그것으로 그때엔 충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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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정말이지, 처음부터 끝까지 아름답다.
요가
요가를 다시 시작한 지 3주. 처음 다시 요가를 시작하던 날, 죽어라 고생하면서도 몸이 자세를 기억하고 있음을 알고, 그래도 생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건 아니구나, 라며 몸의 영리함에 감탄을 했었는데, 오늘은, 이 녀석이 고작 일주일 쉬었다고 나를 헉헉거리게 만드는 걸 보고, 참으로 간사하고 짤없는 것, 이라며 원망에 원망을 해댔다. 지난 주말 알라딘 중고서점에 갔다가, 우연히 G언니를 만나 잠깐 커피를 마셨는데 (둘다 책을 팔러 왔었다) 언니도 요가를 시작할 예정이라는 얘기를 하며 잠시 대화.
- 언니, 저는 정말 궁금한 게요. 요가는 갈 때마다 클래스에서 제가 제일 못하는데, 제가 세상에서 제일 몸병신인 걸까요, 아니면 저보다 더 병신인 사람들은 안오는 걸까요?
- 나도 그 문제로 고민을 좀 해봤는데, 우리는 아무래도 몸병신중엔 그래도 상급인 것 같아. 우리보다 더 못하는 사람은 시도도 안하고, 안해서 더 못하게 되는 걸거야.
- 그렇죠? 아무래도 저도 그런 것 같아요. ㅋㅋ
아무튼, 상급 몸병신에서 이제 하급 정상인이 되기 위해 부던히 애쓰는 내가 요가의 힘든 동작들을 견뎌내면서 기다리는 시간은 다 씻고 집까지 걸어가는 그 10분이 채 안되는 시간이다. 하루 중 가장 상쾌하고 개운한 순간. 집에 와 키위를 잘라먹으며 오늘의 하이킥과 함께 깔깔거렸다. 토끼야~ 미안해~ 그리고 흐르던 검정치마의 노래. 크. 역시 김병욱 감독은 사랑할 수 밖에 없다.
신정구
그리고, 나의 시트콤 인생에 한 획을 그어 주었던 신정구 작가. 어제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안타까웠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내 서재에는 신정구의 이름이 3번이나 등장했다. 지금은 벌써 4번째) 노도철이 아무리 드라마로 건너갔어도, 나는 두 사람이 다시한 번 시트콤을 만들어주리라 기대하고, 기다렸는데, 이젠 기다릴 수가 없게 되었다. 프란체스카를 보며 웃고 울었던 순간들을 아직도 기억한다. 아름다운 생에 감사한다.
데미안 라이스
오늘이 바로 D-Day였다. 동방신기 팬에게 조언을 구하라는 LAYLA님 말을 듣고, 같은 팀 동료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녀는 동방신기 팬일 뿐만 아니라, 공연 마니아인지라, 수없이 많은 티켓팅 경험과 나름의 노하우, 그리고 집념을 가지고 있었다. 나도 나름 준비를 한다며, 현대카드 홈페이지에서 예매 예행 연습도 하고, 혹시나 결제 시스템 설치하다가 늦을까봐 필요한 프로그램을 점검까지 했다. 카드 한도가 아슬아슬해 티켓 값만큼 금요일에 선결제도 마쳤다. 내가 너무 유난스러운 듯하여 오버하는 것이냐고 물었으나, 그녀는 기본이라고 했다. 역시 프로의 손길은 달랐다. 내가 두번 실패하는 동안 그녀는 나와 같은 단계를 다섯번이나 해냈다. 내 정보인데, 내가 외우고 있는데, 왜 그녀가 더 빠르단 말인가. 아. 프로의 세계는 놀랍다. 그리고 나는 앞에서 4번째줄 좌석을 구하는 믿기지 않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처음 부탁했을 때, "자리는 어디로 해드려요?" 라고 묻기에 나는 좋은 좌석은 필요 없고, 그냥 거기 앉을 수만 있으면 된다, 좋은 좌석 하려다가 다 놓치는 것보다는 적절한 좌석이 좋겠다, 라고 이야기했으나 그녀는 의지를 불태우며, 그래도 좋은 좌석을 예매해야 한다, 고 나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나는 이런 데 참여해본 적이 없으니, 그저 믿고 맡길 뿐이었다. 내가 접하는 음악 세계가 넓지 않고, 몇몇 음악들을 그냥 깊이 좋아한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두번은 못하겠다. 하지만, 이런 스릴. 느껴본 게 또 언제였던가, 싶을만큼, 실로 손떨리던 순간이었다.
점심이 지나고, 오늘은 현대카드 고객들 우선 예매일 뿐이었는데도, R석은 모두 매진되었다. 올림픽홀 2층 앞열까지 R석이었으니, 데미안 라이스를 좋아하는 사람이 정말 많긴 하구나, 싶다. 보편적인 감성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좋아한다. 아무래도 인간은 참 쓸쓸한 존재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