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고 누가 묻는다면, 분명 얼마 전까지는 '텔레포트'였는데, 지난 주, 그 소원이 바뀌었다. 


매우 덥고, 머릿속은 복잡해 올림픽에 도무지 관심 가질 여력이 없던 나른한 금요일의 점심시간이었다. 나는 애국 교육을 제대로 못받아서 올림픽을 보면서 우리 나라를 꼭 응원하고픈 마음도 없고, 세계화 교육도 제대로 못받아서 올림픽으로 세계가 하나되고 어쩌고 하는 소리만 들으면 코웃음을 치는데, (그럼에도 개막식은 정말 멋졌다.) 점심시간 밥을 먹으러 우연히 한 식당에 들렀을 때, 내 눈을 잡아 끈 경기가 있었으니, 그것은 '체조'였다. 더글라스라는 미국 선수가 금메달을 따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아, 나 체조는 챙겨 봐야지" 


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거다. 그래서 지난 주말부터 보기 시작해 처음 본 체조 경기가 트램펄린 결승. 퐁퐁 혹은 방방, 혹은 덤블링....이라고 부르던.... 그 트램펄린 위에서 뛰고, 균형을 잡고, 더 높이 뛰고, 공중에서 몇바퀴씩 도는 장면을 보는데, 세상에 너무 아름다운거다. 경기하는 걸 보는 것보다 슬로우모션을 볼 때 더 설렌다. 천천히 몸의 움직임을 보면, 몸이 그리는 곡선이 정말 예술이다. 그리하여 나는 새로운 소원을 갖게 되었다. 


"공중에서 한 바퀴만 돌아보고 싶어요"


그러자 너무나도 정직한 누군가 이렇게 말해주었다. 


"누나, 이번 생에는 끝났어. 포기해"


그러면서 녀석은 내게 <에버랜드 병신>이라는 제목을 가진 유튜브 동영상을 소개해줬다. 비참하니까 동영상은 링크하지 않을 작정이다. 요는 에버랜드에서 외국인 곡예사들이 트램펄린 위에서 뛰고 돌고 하면서 일반인 시범을 할 사람을 지원받았는데, 그 사람이 그 위에서 제대로 균형도 못잡고 빌빌대던 모습이 담긴 동영상. ㅠㅠ 그래, 내가 저 병신과 다를 게 무언가 ㅠㅠ 굳이 다른 게 하나 있다면 나서지 않는다는 거겠지.. 어차피 몸병신으로 태어났는데 이번 생은 아무래도 좀 마이 어렵겠지, 하면서도 나는 자꾸만 아름다운 체조의 영상을 찾아보고 있다. 보면 볼수록 선수들은 너무 아름답고, 나는 계속 비참하고 뭐 그렇다. 


오늘은 남자 링 경기와 여자 이단 평행봉 그리고 남자 도마 경기를 봤는데 양학선 선수가 금메달을 안겨준 도마도 재밌었지만, (히히 덕분에 이번 올림픽 첨으로 우리나라 금메달 따는 것도 봤긔 ㅎㅎ) 아, 남자 체조는 링이 갑이다, 뭐 이런 생각을. 공중에서 링 두개에 몸을 의지하고, 근력으로 서서 버티고 앉아서 버티고 물구나무 서서 버티고, 회전하고, 또 회전하고... 아 정말 멋지고 멋지다. 정말 절도 있다. 가오가 킹왕짱이다. 근육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링을 잡고 있는 체조선수들의 근육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필 오늘 오랜만에 요가를 가서 필라테스 수업을 했는데, 복근 앞에서 힘없이 무너지는 내 안의 몸병신을 만난 터라... 저렇게 버틴다는 게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일이라는 걸 알겠고... 저 근육들은 정말 단단한 인내의 시간을 거친 후에야 가능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좀 감동적이기도 하고... 이단 평행봉은 또 어떤가...! 두 평행봉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물구나무 선채로 손을 바꿔가며 돌고, 돌고, 나도 한번쯤은, 저런 묘기에 완벽한 착지를 바라지는 않아도 내 몸이 가볍고, 자유롭다는 걸 느낄 수 있는 그런 경지에 오를 수 있다면 좋을텐데. 


아무래도 몸이라는 것의 한계, 에 대해 계속 생각하는 요즘이라 더 그런가보다. 학교 때 체육은 왜 그렇게 등한시했는지, 달리기도 못하고, 유연하지도 않고, 점점 더 나무토막이 되어가는 몸이라. 저렇게 자유롭게 제 몸을 컨트롤하는 체조 선수들이 그리 멋져보였나보다. 


아. 부럽다. 부러우면 지는건데, 실은 안 부러워도 이미 진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냥 부러워해야지. 




 트램펄린이라도 한 번 타보고 싶네. 아. 더 비참할 뿐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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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2-08-07 0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트램펄린 넘 비인기종목인지 금메달딴 선수 사진 하나 없긔 ㅠㅠㅠ 결국 핸드폰으로 내가 캡처한 사진임. ㅠㅠ

風流男兒 2012-08-07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동영상이 에버랜드 병신이었나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목은 생각안하고 보면서 웃겨서 너무 힘들었었죠. 한바퀴 돌아 텔레포트라면 트렘블린이 게이트가 되는 건가요? ㅎㄷㄷ 뭔가 엄청난 소원이에요 ㅎㅎ

웽스북스 2012-08-07 01:43   좋아요 0 | URL
그렇죠. 트램펄린 위에서 뛰면서 눈을 감고 원하는 곳을 얘기해요. 그리고 한바퀴 도는거죠. 그럼 나는 원하는 곳으로 이동하는거죠

근데 착지를 잘해야돼요. ㅋㅋㅋㅋㅋㅋ

사과나무 2012-08-07 0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건 어디 가르쳐 주는 학원이 없는지... 늘 생각'만' 합니다

웽스북스 2012-08-08 12:34   좋아요 0 | URL
그니까요..... 음.... 아무도 안다니겠죠 ㅠ ㅋㅋ

라주미힌 2012-08-07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버랜드 뭐시기.. 아마 연기자일걸요.... ㅎ 예전에 동영상 보고 한참 웃었던 기억이...
저런 종목도 있었군요... 처음 알았네요.

웽스북스 2012-08-08 12:34   좋아요 0 | URL
아. 그렇지 않아도 우리도 그런 의혹을 보냈었어요.
저도 체조에 트렘펄린까지 있는 건 이번에 첨 알았어요. 아. 해보고싶어.

굿바이 2012-08-07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도 나도!!!! 요즘 내가 얼마나 몸병신인지 그리고 앞으로도 쭉- 그렇게 살아갈 것인지를 생각하면!!!!! 몸이 몸으로 존재하는 이유를 좀 발견하고 살았으면 좋겠고, 몸이 기억하는 뭐 하나라도 있었으면 좋겠고 ㅜㅜ 근데 웬디의 소원도 정말 엄청나구나. 엄청나다~

웽스북스 2012-08-08 12:35   좋아요 0 | URL
네. 언니. 야망이 너무 원대해서 감당이 안되요. 휴휴.
요즘엔 요가를 좀 게을리 했더니 몸이 다시 원상복귀됐어요. 휴휴.
제 몸은 기억상실증에 걸렸나봐요. ㅠㅠ

네꼬 2012-08-07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생애에는 옛날의 여우로 태어납시다. 너구리나. (재주넘기쯤이야.)

웽스북스 2012-08-08 12:35   좋아요 0 | URL
너구리 좋다. 너구리.
(너구리로 태어나서 양학선 집에 보내지면 어쩌지? ㅋㅋ)

비로그인 2012-08-07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학교 다닐 때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꼬맹이들을 보며 스탠드에서 여유부렸는지, 저도 후회 많이 했어요. ㅋㅋ 뭐 원체 운동감각이 없기도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안해서 그렇지 제대로 하면 잘할 것 같기도 하고... 그러네요. (그러니까 웬디양님도 시도해보세요! 저도 시도해볼거에요!) 저는 올림픽 보면서 서른 전에 올림픽에 한번 나가보자, 허무맹랑한 꿈을 꾸고 있답니다. 올림픽 끝나고도 유지될런지 모르겠지만요.

웽스북스 2012-08-08 12:36   좋아요 0 | URL
서른 전에 올림픽이라.
제 꿈보다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어서 너무 아득해보여요.
수다쟁이님 화이팅

근데 종목은요?

개인주의 2012-08-07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사격만 봤어요.
우와.. 사격은 시간이 짧아서 좋아. 이러면서 결승경기만.
진종오의 차분한 눈빛이 매력적이지 않나요..;;
결승에서 최영래가 울 때
아.. 은메달이 어딘데.. 근데 진종오땜에 묻히겠군.
했어요.
그러고 이제 안 봄..
사실 더워서 텔레비젼 열마저 줄이려고 일찍 꺼놓습니다. =_=

웽스북스 2012-08-08 12:37   좋아요 0 | URL
어제는 장대높이뛰기를 봤어요. 저는 왜 이런 종목만 좋아하는건지.
그래도 오늘은 바람이 좀 불어서 좋더라고요 :)
스누피님, 여름 건강하게 잘 나세요~

L.SHIN 2012-08-08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어릴 때 처럼, 다리를 쭉 뻗고 앉아 가슴,배가 다리에 닿을 정도로
몸이 완전히 반으로 왜 안 접어지는지, 진지하게 생각 중입니다.=_-
어릴 때는 무수히 가능했던, 거의 요가에 가까웠던 몸 동작 놀이들을 왜 지금은 할 수 없는지..
'결코 나이를 먹어서가 아니라' '단지 운동 부족이다'라고 합리화 중입니다.(웃음)

오랜만입니다, 웬디님!

웽스북스 2012-08-19 21:43   좋아요 0 | URL
우와 엘신님이다!! 반가워요 엘형님!!!
저도 어렸을 땐 체조선수하라는 얘기좀 들었지 말입니다
아. 그때 계속 몸을 단련시켰으면 좀 괜찮았을까요

휴휴. 나무토막은 웁니다. ㅠㅠ
 

벚꽃엔딩
저는 진달래로 안녕

 

 

올 봄은 짧았다. 벚꽃과 목련이 함께 지는 봄이라니.

벚꽃이 아직 피어 있는데 라일락이 만개한 봄이라니...

이런 봄도 나름 아름다웠다. 늦고, 짧아, 많이 아쉽긴 했지만.

 

 

여기저기, 없는 시간 내서 참 많이 걸어다니던 중 만난 진/달/래

 

잎이 있으면 철쭉이고, 없으면 진달래라는 명쾌한 구분법 알려주신 이름님께 감사를 :)

가지에 달려 있는 여리여리한 꽃들이 예뻐 찍었고

진달래인가... 철쭉인가.... 하고 있었는데,

 

내 너가 진달래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았구나

지난 수요일 1/4차를 내고 남산 공원에 산책하러 가서 만났던 진달래.

 

 

 

저 멀리 피어 있는 분홍빛 꽃들이 어찌나 곱던지..

 

 

근데 알고보면 얘들은 또 내가 몰랐던 다른 꽃 아냐? ㅎ

 

카메라의 색감은 좀 더 고왔었는데, 리사이징하면서 색이 좀 진하게 보정된듯해서

살짝 아쉬움이 남네 :)

 

아 나도 집에서 시집 좀 뒤적여보고 올릴 걸, 싶었지만

사실, '진달래' 하면 언제나 이 장면이 생각납니다.

 

 

" 여보? "
" ... "
" 나 명년 봄까지 살 수 있을는지…. 산에 진달래가 필 텐데 말이에요. "
" ... "
" 그 꽃 따 화전을 만들어 당신께 드리고 싶어요. 당신께 드리고 싶어요, 당신께 드리고 싶어요, 당신께, 당신께, 싶어요, 싶어요, 싶어요, 싶어요."

 

여자의 목소리는 진달래꽃 이파리가 되고, 꽃송이가 되고 계속하여 울리면서 진달래의 구름이 되고, 진달래의 안개가 되고, 숲이 되고, 무덤이 되고, 붉은 빗줄기, 붉은 눈송이, 붉은 구름 바다, 그 속을 자신이 걷고 있다는 환각 속에 환이는 쓰러졌다. 꿈 속에서 울었다. 꿈 속에서 가슴을 쳤다. 여자를 부르고 달려가고 울부짖고, 여자가 죽어 이별한 뒤 환이는 줄곧 꿈 속에서만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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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流男兒 2012-04-24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4차라. 반차조차 없는 우리 회사 ㅠㅠ

웽스북스 2012-04-24 12:57   좋아요 0 | URL
깨알같이 쪼개서 쓰고있어요. ㅎㅎ 1/4차 있는 회사는 거의 없더라고요.

다락방 2012-04-24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토지의 저부분 올릴까 하다가 시를 올렸는데! 진달래 하면 저 부분 생각하는건 저 뿐만이 아니군요! 꺅 >.<

웽스북스 2012-04-24 23:02   좋아요 0 | URL
네네 진달래하면 이제 김소월보다 저 장면이 더 먼저 생각나요

그런데, 김소월도, 가만가만 생각해보면, 아, 너무 슬픔.

레와 2012-04-24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봄봄봄.. 좋다 좋아! ^^

웽스북스 2012-04-24 23:02   좋아요 0 | URL
뿌잉뿌잉. 레와님도 꽃사진 내놔요.

moonnight 2012-04-24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_+
덕분에 봄을 느끼고 갑니다. 좋아요. ^^

웽스북스 2012-04-24 23:02   좋아요 0 | URL
으힛. 좋아해주시니 감사 +_+

사과나무 2012-04-24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뜯어서 먹고 아무 이상 없으면 진달래
침이 질질 나오고 어지럽고 졸리면 철쭉

웽스북스 2012-04-24 23:03   좋아요 0 | URL
이 나무 참 무섭습니다. ㅋㅋ

... 2012-04-24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나무에 피는 모든 꽃이 좋아요. 그 중에 최고는 벚꽃.
진달래/철쭉 구별법은 이름님땜에 알게 됬는데, 위에 사과나무님 댓글 ㅎㅎ 어쩜 좋아....

웽스북스 2012-04-24 23:04   좋아요 0 | URL
이름님이 여러 사람에게 좋은 일 하셨어요,
저는 벚꽃보다 목련을 좋아하고,
배꽃도 좋아해요. 배꽃은 꽃도 꽃이지만, 나무의 형태와 꽃이 달린 모양, 그것이 모여 있는 장면들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실은 대부분의 꽃들은 이름을 몰라요. 엉엉.

비로그인 2012-04-24 23:06   좋아요 0 | URL
오옷 웬디양님 실시간이에요.. 전 배꽃도 잘 못알아봐요. 엉엉

웽스북스 2012-04-24 23:10   좋아요 0 | URL
꽃 따놓고 이게 배꽃이니? 하면 모를텐데,
배는 나무가 진짜 특이하게 생겼어요.

실은 저도, 학교 근처에 배나무 밭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 떄 유심히 보고, 좋아하기 시작했어요.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은 아닌 것 같아요.

달사르 2012-04-24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진달래는 역시 산에서 피어야 제 맛이네요. 사진만 봐도 시원~
시골촌년도 진달래와 철쭉 구분 못합니당. ^^

웽스북스 2012-04-24 23:06   좋아요 0 | URL
그죠. 아. 저 사진, 실은 사람들이 예쁘다고 생각 안해줄 줄 알았는데,
제 눈에만 예쁜 건 아니었네요.

그나저나, 양상국 말투로 읽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꽃만 보면 이름 다 아는 줄 알아?
나도 진달래랑 철쭉 헷갈려~~~

제가 서울에 살아서 모르는 게 아니라, 그만큼 무심했던게지요.
갑자기 꽃에 대한 책을 좀 사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


비로그인 2012-04-24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정말 잎이 없군요. 사과나무님의 구별법이 더 유쾌합니다만~~
전 라일락도 좋아요. 벚꽃이 지고 허전할 때 위로해 주듯 살포시 피는.. 그런데 요즘은 라일락이 별로 없지요?

웽스북스 2012-04-24 23:09   좋아요 0 | URL
아. 그렇긴 하지만. 입에서 침흘리긴 싫어요 ㅠㅠ

라일락은 저도 어디있는지 잘 몰라서... 서울은 벚꽃 피는 곳들은 많은데 라일락은 딱히 어디다! 하는 데가 없어서... 그래서 일부러 몇군데 알아놨어요. 시청옆 프레스센터 라일락.. 그리고 숙대 입구에 있는 어느 골목에 라일락 나무 있는 곳이 있는데, 여기는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고, 걷다보면 나오겠거니... ㅎㅎ 둘다 향기로 먼저 라일락을 인지했던 곳들이에요. 바람에 날려오는 라일락 향기 :)
 

1


무심결에 지나치던 나무들이 실은 나도 이렇게 예쁜 꽃을 피우는 나무였노라고, 제 존재를 드러내는 계절이다. 올해는 좀 많이 늦었다. 벚꽃지는 계절에 이제야 목련이 피어나고 있다. 벚꽃도 조금씩 피어나고 있다. 효창공원역으로 가는 그 허름한 길에 초라하게 서 있던 나무들은 '나도벚나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 올해는 네 존재를 잊지 않으마. 


봄은 벚꽃의 계절이라지만, 나는 오래 전부터 목련을 좋아했다. 화려하게 와서 아름답게 지는 벚꽃보다는 나는 청아하고 기품있게 빛나다가 툭, 툭, 지저분하고 거무튀튀한 모습으로 변해 생을 마감하는 목련에게 마음이 갔다. 햇살과 함께 빛나는 낮의 목련도 좋아하지만, 밤이 되면 홀로 오롯이 그 자리에서 스스로 제 존재를 빛내려 안간힘을 쓰는 목련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지지난 일요일 청파멘션에 갔다가 창가에 앉아 고개를 돌렸는데, 어느새 바깥의 나무에 꽃눈이 달려 있었다. 그제야 나는 이 나무가 목련나무라는 걸 알아본다. 계산상 1~2주쯤 후면 꽃이 피겠구나 생각하고, 어제 투표를 마친 후 청파맨션으로 달려갔다. 오렌지 비앙코 한 잔을 시켜 잠시 테라스에 앉아 커피 한 모금 마시고, 목련을 바라보고, 커피 한 모금 마시고, 목련을 바라보고, 하다가 온 것 같다. 갑자기 후두두둑 빗물이 떨어진다. 비가오나? 자리를 챙기려는데, 아, 어제 내린 봄비를 목련이 머금고 있다가 바람에 흔들린 거였다. 목련은 바람에 흔들리며, 머금었던 봄비를 뿌리며, 조금 더 제 몸을 열었다. 아. 목련이 피어나는 순간을 함께하고 있구나, 나는 좀 감동을 받았다. ㅠ 




매년 목련이 필 때마다, 나는 책 한 권을 들고 청파맨션으로 가 오렌지 비앙코를 마셔야지. 



2


하지만 이 기분을 오래 만끽하기엔, 4월 11일은 너무나 잔혹했다. 절대 예상 못했다, 라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실은 누구나 힘든 싸움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을 것이며, 어느 정도는 예감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투표 전날이었나, 영호남 의석수를 보고 아, 기본으로 깔고 가는 좌석 수가 이렇게 차이가 많이 나는구나, 어지간히 이기지 않고서는 힘들겠다, 생각은 했지만, 예상을 했다고 해서 결과를 받아들이는 일이 쓰라리지 않은 것은 아니다. 게다가 출구조사 결과가 내게 너무 많은 꿈과 희망을 안겨줬었다. ㅠㅠ 분이 풀리지 않아 페이스북에서 친구들이랑 새누리당은 시골당이라고 욕하고, 우리나라 국민들은 시민이 아니라 백성인 것 같다고 욕하고, 욕하고 욱하고 욕하고 욱하고 ㅠㅠ 타임라인은 거의 '멘붕'이라는 단어가 장식했고, 나 역시 너무 속상했다. 게다가 새누리당을 지지한 그 시골들 땅덩이는 또 얼마나 넓은지 ㅠ 강원도 경상도, 충청도의, 우리 나라의 절반을 훨씬 넘는 그 면적을 뒤덮은 빨간 색을 보고 있자니 골이 띵했다. 예전에 빨갱이 빨갱이 하면서 빨간색만 봐도 민감하게 굴던 그 분들은 그 빨강을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꼈으려나. 참, 파란만장한 빨강의 인생 같으니. 


사실, 나는 통합진보당의 당원임에도 정당투표는 진보신당에 던졌다. 그들의 마지막 행보가 너무 멋졌기 때문. 그들은 마치 무너져가는 가운데서도 꿋꿋이 제 갈 길을 가는 선비 같았다. 우스개로 '아, 진보신당의 저 미학적 완결성을 보라....' 라는 말도 했었다. 진심으로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실은 당을 갈아탈까 생각도 했었으나, 그 때 한참 이정희 의원이 경선으로 힘들 때라, 힘들 때 탈당까지 하는 건 아무리 한달 몸담은 당이라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통합진보당이 13석을 얻은 것에도 박수를 보내지만, 진보신당, 녹색당의 고군분투가 멋진 선거였다. 진보신당 비례 1번 김순자 후보께서 오늘 아침, 다시 일터로 돌아와 동료들과 끌어안고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오늘의 일을 시작한다고 트위터에 글을 남긴 것을 보는데 어찌나 찡하던지. ㅠ 당신들은 마지막까지 그 존재만으로도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한표가 조금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사표가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의 힘을 얻는, 밑거름으로 소중히 쓰이길 바랍니다. 


이제 진보신당은 3%가 안되는 지지율 때문에 정당 등록이 취소되고, 진보신당이라는 이름을 다음 선거까지 사용할 수 없게 됐다. 1.2%를 얻은 기독당보다도 정당 득표율이 낮다는 건, 너무나 슬프고 화나는 일. (주여 ㅠ) 새누리당은 정당 지지율이 42.8%로 절반에 미치지 못하지만, 소선거구제, 1선거구에서 1인을 선출하는 이 제도 때문에, 과반이 넘는 의석 수를 확보할 수 있었다. 반면 민주 통합당과 통합 진보당의 지지율을 합하면 46.5%로 더 높은데, 의석 수는 훨씬 적다. 이게 현재 우리나라 소선거구제의 한계. 이걸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거 아닌가... 라는 글을 페이스북에 남겼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3


그런데 오늘 낮에 친구 y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어제 남긴 글을 보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려고 작심한 y는 k 언니가 주축이 되어 진행하는 비례대표제 스터디 모임에 오라는 것이었다. 아. 어찌나 시의 적절한 낚시였는지. k언니는 오래전부터 독일식 정당명부제 도입을 준비하는 연구소에 선임 연구원으로 있었는데, 나는 대략의 내용은 알지만 크게 관심을 두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선거를 마치고 나니 그래도 이건 좀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절실하게 도입이 필요하겠다, 싶었다. 일단은 가보자며 퇴근 후 스터디 장소로 갔고,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나의 무식을 뽐냈다 -_-v 오랜 시간동안 고민해온 사람들에게, 평소에 궁금했던 이것 저것을 자유롭게 묻고 (하지만 너무 자유로웠지 ㅋㅋ) 몰랐던 것들을 좀 채워나가면서 (하지만 너무 몰랐지) 나름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혹시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설명을 덧붙이자면) 독일식 정당명부제는 우리나라와 같은 1인 2표제로 한표는 지역구 의원을 뽑고, 한 표는 비례대표 의원을 뽑는다는 것은 동일하지만, 전체적인 의석 수는 정당의 득표율에 기반하는 제도이다. 이를테면, 우리나라의 경우 어제처럼 정당 득표율이 나왔다면, 새누리당은 128석, 민주당은 109석, 통합진보당은 30석이 되는 것이다. 지역구에서 통합진보당이 3군데 승리를 했으면, 나머지 비례대표 자리를 27석을 줘서 총 의석 수가 10%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러한 제도하에서는 본인의 표가 사표가 되지 않고, 한표 한표 모두 의석 수에 반영되기 때문에, 실제로 투표 참여 비율도 높다고 한다. (후진국일수록 투표율 높다고 한 변희재 사라져버려!!) 우리나라에서는 통합진보당에서 이 제도를 주장하고 있고, 전반적인 인식을 고려해볼 땐 아직도 갈 길이 멀어 보인다. 그런데 2004년 이후 3번의 정당 투표를 통한 비례대표제 선출을 경험한 것은, 이 제도 도입을 위한 좋은 밑거름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나 이번처럼 그 차이가 눈에 띄게 보이는 경우는, 매우 설명하기도 설득하기도 좋을 것이다. 암튼, 당장은 내게 매우 매력적인 주제이고, 좀 더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당분간은 2주에 한번씩 이 모임에 참석해볼 예정이다. 워낙 쉽게 질리는 게 탈이긴 하지만.. ( '') 무지랭이는 탈피해야겠지. 아하하하. 요가 이후로 또 이런 무지랭이 분야로 뛰어들다니. (흠. 그래도 여전히 요가를 더 못한;;;;;다;;;;;) 


암튼, 나는 고등학교 때도 정치가 싫어서 수능 선택과목으로도 우리학교 애들의 90%가 선택했던 정치를  선택 안하고, 경제 선택했었는데, 이런 나에게 이런 공부에 관심을 갖게 만들다니, 우리 사는 세상이 참 대단하긴 하다. 그렇다고 주저앉아 울고 있을 수만은 없으니, 먼 길이라도 가보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내가 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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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4-13 0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새벽에 추천하게 만드네요. 굿나잇!

웽스북스 2012-04-13 22:35   좋아요 0 | URL
다시 하루를 돌아 굿나잇!!

jongheuk 2012-04-13 0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진보신당 너무 응원했고, 선거 다음날 아침 김순자님의 트윗보고 눈물이 왈칵 나오더라구요. 아아.. 세상은 정말 좋아지고 있는 것일까요. 제 마음이 너무 다급한 것일까요, 아니면 세상이 너무 느리게 좋아지고 있는 것일까요. 그 시간과 속도의 괴리속에 너무 무기력한 제 자신이 막 밉고 그러네요.

웽스북스 2012-04-13 22:38   좋아요 0 | URL
그죠 ㅠ 정말 그 멘션을 보는데 울컥, 하더라고요.
선거법/정당법 같은 걸 제대로 몰라서, 2% 안되면 등록 취소가 되고 그 이름을 못쓰는 줄 몰랐어요. 아. 정말 제가 한 표를 제대로 던졌다는 생각.

세상이 좋아지고 있다, 는 생각은 사실 전혀 들지 않아요. ㅠ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의 방향을 엉뚱하게 설정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계속 실망하고, 속상해하고, 슬퍼하고. 그래도 맞다고 생각하는 방향을 계속 봐야겠죠. 에효. ㅠㅠ

Alicia 2012-04-13 0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비례대표제를 공부하는 모임이라니, 웬디님 너무 멋져요!
새누리나 민주통합당이 추진하려는 석패율제가 비난받는 이유는 그게 궁극적으로 국민의사를 반영하려는 것이 아니라 거대 정당이나 현직의원을 위한 것이기 땜에 그래요. 석패율제가 성공하려면 비례대표의원 정수를 지금의 54인에서 훨씬 더 늘려야 되고(일본도 100명이 넘는대요.) , 전국을 몇개의 권역으로 나누어 비례대표의원을 배정해야한다는 얘기도 나오는데 이 글 읽으니 독일식 정당명부제가 제일 깔끔해 보이네요.
어제는 하루종일 속상했어요.

웽스북스 2012-04-13 22:40   좋아요 0 | URL
결국은 정권을 쥐고 있는 자들이 제도도 바꿀 수 있는 것이니 아무래도 그들에게 유리한 제도로 바꾸려고 하는 거겠죠. 그래서, 독일식 정당명부제가 저렇게 깔끔하고 합리적이어도 결국은 요원한 길로 보이는 것 같아요.

나도 너무 속상했어요. 우힝.

머큐리 2012-04-13 0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겨우 맨붕에서 탈출하려고 꼬물락거리는 저에게 힘이되는 이쁜 글이에요...^^

웽스북스 2012-04-13 22:40   좋아요 0 | URL
아. 고맙습니다 :)

레와 2012-04-13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나라가 국민이 지긋지긋하다고 바닥으로 추락하는 기분이였다가, 그래도 포기하면 안되지 마음을 추스리려하는데 힘이 안났어요. 웬디양님 글보니깐 조금은 나아지는 듯. ^^

웽스북스 2012-04-13 22:42   좋아요 0 | URL
으아, 추스려요 레와님. ㅠ

근데 레와님, 저는 궁금해요. 경상도의 젊은 세대들은 좀 다른가요? 레와님 주변 분들은 좀 어떤가요? 시간이 흐르면 지역주의라는 게 타파될 수 있는 걸까요?

치니 2012-04-13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 님은 정말, 공부의 여신! 이 세상의 반만이라도 웬디 님의 자세를 배우면 참 좋겠는데, 정작 배워야 할 사람들이 그러지 않는 게 함정. ㅠㅠ
그나저나 목련을 좋아하시는구나, 저는 사실 목련도 벚꽃도, 그저 무감했는데, 요즘 우리 치니가 달라졌어요. ㅎㅎ 꽃잎 하나, 풀잎 하나 하나에 눈을 다시 돌리게 돼요. 제주 효과, 좋아요. 언넝 함 들러보시라요 ~

웽스북스 2012-04-13 22:44   좋아요 0 | URL
어이쿠나. 하지만 저도 금세 질리고, 지겨워한다는 게 함정이에요.

저는 목련을 좋아해요 치니님. 하지만 제주 벚꽃 사진을 보고 진심으로 질투가 났어요. ㅠㅠ 저만 못가고 동동거리며 발이 묶여 있는 것 같아 속상해요. 올해는 부모님 모시고 한 번 갈 것 같긴 한데, 그 때는 다른 숙소를 잡아야 할테니, 그럼 치니님 또치님 보러는 언제 가나, 또 막 이러고 있어요. 그래도 진짜 간당게요. 헤헷.

참, 치니님은 주소 이전 하신거에요?

Shining 2012-04-13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례대표제 스터디 모임을 하신다는 웬디양 님 말씀에 추천을 안 누를수가 없군요ㅠ 어제 오늘 우울했던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드는 것 같아요^^

웽스북스 2012-04-13 22:47   좋아요 0 | URL
누군가 공부를 하고, 마음을 다잡는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는 사실에 실은 조금 놀라고 있어요. 아. 그만큼 우리 지금 너무 속상한 거군요. ㅠㅠ

마늘빵 2012-04-13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웬디님은 공부쟁이. 덕분에 나도 하나 알았어요. 나도 암것도 몰라요.

웽스북스 2012-04-13 22:47   좋아요 0 | URL
어머어머 아프님만 하려고요! 아프님이야말로 초절정레알공부쟁이!

소금꽃 2012-04-13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웬디님 멀리서 멀리서 왔습니다. 정말 글 잘 쓰시네요. 감동~^^ 추천 누르고 갑니다.

웽스북스 2012-04-13 22:48   좋아요 0 | URL
어머.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글을 정말 잘 쓰는 건 아닌데, 아무래도 그냥 쉽고 잘 읽히는 글을 써서 그런 것 같아요. 무튼 고맙습니다. :)

마그 2012-04-14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말입니다. 여기서 무너지면... 수첩든 누가 어디 가신다지않습니까(자체검열 ㅡㅜ) 자자 힙냅시다. 그러나 저러나 오늘도 청파맨션 가셨나? ^^

웽스북스 2012-04-14 23:37   좋아요 0 | URL
오늘은 또 다른 서울 나들이 :)
그나저나 오늘 즈이동네까지 오셨는데, 집에 있었으면 맨발로 달려나갔을텐데, 아쉬버용 ㅠ

박양 2012-04-16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청파맨션 주인장임다.
피는 목련아래서 멋진 생각 하시고 오셨네요. 전 주인장인데도 요즘 잘 못가용.
음.. 글 너무 멋져서 감동 먹었어요
저도 선거결과 보고 같은 생각 했다는. 분노의 단계였어요.
얼굴뵈면 누구신지 알것 같은데.
암튼 단골님~~ ㅋ 자주 와주셔서 감사해요
 

어제는 산본에 사는 고등학교 동창  H의 집에 느즈막히 놀러가 와인을 마시며 놀았다. 나는 거의 1년 반만의 만남이었는데, 그러니까 H의 결혼식 이후로 애들을 못봤었나보다. 아직까지 만나는 고등학교 친구는 6명쯤 있는데 그 중 유일하게 결혼한 친구가 H. (라고 말하면 다들 놀란다. 니들 나이가 몇인데? 로 시작해 결국 '끼리끼리 논다'로 끝나게 된다. 그런데, 사실, 나는 그녀들과 거의 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말에는 어폐가 있다. ㅋ) 


오랜만에 만나면 하는 일은 거의 기억의 조각들을 맞춰보는 일. 고등학교 졸업 이후 각자 다른 길을 걸었고, 현재는 삶의 방식이나, 생각하는 방식 등의  좌표가 다르기 때문에, (신앙관부터 정치관까지, 아마도...) 공통된 과거를 이야기하는 쪽이 훨씬 편하게 느껴진다. 거기에 공통된 주제가 어제는 하나 더 생겼는데, 무려 '건강 염려'였다. 오. 마이. 갓. 우리가 늙긴 늙었나봐요. 하지만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과거로 점철됐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얘기를 하다가, 공부를 참 열심히 했던 H가 중3때 다른 방 불이 다 꺼진 걸 확인하고 잠들면서 공부를 했다,는 이야기로 시작해, (비평준화라 고등학교 입시가 있었다 ;) 컨디션 난조로 수능을 망쳤던 K의 대학 보내기 프로젝트 이야기로 넘어갔는데 나는 정말 까맣게 잊고 있었다. 너무 수능을 망쳐서 당시 성적만으로는 서울에 있는 어지간한 학교에 들어가기 힘들었던 K를 위해 H가 입시자료집을 뒤져 모학교의 학교장 추천 전형을 찾아내고 (우리 때는 흔치 않았다) 그래도 개중 글쓰는 게 좀 낫던 내가 자기소개서와 학업계획서 같은 걸 써주고, 했던... 그러다 잠자코 듣던 H의 남편이, "근데 그러면 안되는 거 아니에요?"라고 하는데, 아, 이거 생각해보니 정말 큰일날 짓이긴 했다 -_- 자기소개서를 대신 써주다니...! 19세엔 그게 우정인 줄 알았다. 나도 참 바보같았구나. 암튼, K가 대학에 들어간 건 H는 본인이 그 전형을 찾아냈기 때문이라고 믿었고, 나는 내가 자기소개서와 학업계획서를 너무 잘썼기 때문이라고 믿었고, 정작 K는 본인이 면접을 잘 봤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ㅋㅋㅋ


누구는 어떻게 공부했고, 누구는 얼마나 놀았고, 뭐 이런 얘기들을 하다가, 문득 내 친구들 중에서는 내가 수능을 제일 잘 봤었다....는 걸 깨달았다. 고등학교 때는 기독교 동아리에서 활동을 했었는데, 고2에서 고3으로 넘어가는 겨울방학에 후배들과 찬양집회를 준비하던 예비고3과 그렇지 않은 예비고3이 있었다. 나는 전자였고, 우리 학년의 수능 결과가 나오자마자 우리 후배 학년에서는 동아리 선배 중 내가 수능을 제일 잘본 것에 이상한 소문이 돌아서 '찬양 집회에 참여하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나보다' 라는 풍조가 만연해서 -_- 집회에 참석하는 게 유행처럼 되어 버렸다. (그러고보니 그들이 내 실력이라고 생각을 안해준 게 참 괘씸하네. 이놈들) 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집회에 참여했던 것도 아니었고, (그저 좀 더 같이 놀고 싶었을 뿐이고) 그렇다고 그들의 그런 신앙을 바로잡아줄 정도로 내가 엄청나게 깨인 의식을 가지고 있던 것도 아니고, 굳이 참여한다는 애들을 말릴 필요도 없어서, 그냥 그렇게 함께 겨울을 보냈었고, 후배 학년 아이들이 수능 결과는 미안하게도 참 정직했다. 


암튼, 그런 건 지나고 나면 다 부질없다, 라고 어른들이 말하면 '자기 일 아니라고 너무한다'고 생각했었는데, 곰곰히 따져보니 어제 만난 친구들 중에서 현재 받고 있는 급여는 내가 제일 낮을 듯 ㅋㅋ (까보지는 않았다) H는 몇 번의 파란만장한 이직 끝에 삼성경제연구소의 기획자로 들어갔고, P는 유학을 다녀와 코엑스 해외 전시팀에서 벌써 과장이고, K는 AI CPA 통과 후 전세계여성들이 가장 가고 싶어하는 화장품 회사라는(H의 말에 의하면 그렇다. 방문 판매 브랜드라 나는 정작 몰랐고 -지금도 기억이 안나고 - 당연히 가고 싶었던 적도 없던 브랜드) 곳의 재무부서에서 일을 하고 있다. 암튼, 그 때는 그 결과가 정말, 세상의 전부인 것 같았고, 그 서열이 마치 인생의 서열이라도 될 것처럼 여겨졌던, 더할 나위 없이 중대한 문제였으나, 결국은, 그 때는 듣고 나면 거세게 항의라도 하고 싶었던 어른들의 말처럼 '지나고 나니 별 것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내가 굳이 지금 그 시기를 겪고 있는 아이들에게 '그게 다 부질없단다'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그 때의 나를 기억하기 때문이고, 결국은 겪어보지 않으면 아무리 부질없다고 말한들, 전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정작 지금의 나도 내 나이를 겪은 어른들이 '나도 너같은 시절이 다 있었다'고 아무리 말해도 여전히 귓등으로도 안듣는 것처럼.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성적의 순서보다 더 절묘하게 인생의 방향을 바꿨던 건 순간의 선택들이고 그 선택지 앞에 놓여졌을 때에는 내가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지, 그에 근거해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지 등이 결과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 같다. 나 역시, 친구 중 연봉서열 4위지만, 내가 4위의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단순하지도, 극단적이지도 않은 사고 구조를 갖게 됐다.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자주 만나자'라고 이야기를 하고 왔지만, 그래봐야 우리는 아마도 일년에 두 번 정도 만나면 많이 만나는 것일 게다. 추억을 나누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곱씹기엔 한계가 있고, 현재의 삶이나 생각들을 나누기엔 묘하게 달라진 삶의 좌표들이 서로 맞물리지 못해 서걱거리고 있고, (다르다고 대화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시간의 간극과 함께 그것들을 극복하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이기도 하다. 실은 그 생각의 좌표가 제일 많이 변한 게 나이기 때문에 스스로 더 피곤하게 느끼는 것인지도.) 미래를 논한다는 건, 아, 너무나 아득한 일이니까. 함께 곱씹던 추억이 바래질 때 쯤, 또 만나 추억을 나누고, 늙어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때로는 함께 서러워하고, 함께 웃고 하게 되겠지. 그 또한 나쁜 관계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p/s

 

고등학교 때 친구들 만난 이야기를 굳이 남겨본 건, 하필 어제 H의 집으로 가면서 읽었던 책이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였기 때문. 불충분한 문서(여기서는 아마도 각자의 진술)와 기억이 만났을 때, 그리고 나의 입장이 만났을 때 나는 어떤 글을 쓰게 될지 궁금했기 때문. 역시 나한테 유리한 것들이 더 선명하게 기억나고, 그것 위주로 쓰게 되는군. ㅎㅎㅎㅎㅎ 나중에 알고 보면 후에 K에게 써줬던 자기소개서와 학업계획서가 사실은 정말 엉망이라는 걸 알고, 충격과 회한까지는 아니지만..... 매우 오그라들어할지도. ㅎ (열아홉에 어줍잖게 썼던 글이 눈에 찰 리 없지 않은가.) 암튼, 인간이란 참 재밌고, 처량한 존재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ㅎ  이 책을 읽는 내내 그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아. 이 책은 무척 재미있다. :)

 

 

 






잠이 안오니, 밑줄 투척.

 

그런데, 왜 우리는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유순해진다고 생각하는 걸까. 잘 살았다고 상을 주는 게 인생이란 것의 소관이 아니라고 한다면 생이 저물어갈 때 우리에게 따뜻하고 기분 좋은 감정을 느끼게 할 의무도 없는 것 아닌가. 생의 진화론적 목적 중에 향수라는 감정이 종사할 만한 부분이 과연 있기나 한걸까.

 

/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다만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타인에게 얘기했다 해도, 결국은 주로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

 

인생의 깊이와 세월의 흐름은 비례하는 걸까? 소설에선 물론 그렇다. 그렇지 않다면 스토리라고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 인생에선 어떨지 가끔 궁금해질 때가 있다. 우리의 태도와 견해가 바뀌고, 새로운 습성과 기벽이 생기긴 하지만, 그건 뭔가 다른 것, 이를테면 장식에 가까운 것이다. 어쩌면 인성이란 다소 시간이 지나서, 즉 이십대에서 삼십대 사이에 정점에 이른다는 점만 빼면, 지성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 시기가 지나면 우리는 그때까지 쌓은 소양에 여지없이 고착되고 만다. 우리에겐 우리 자신뿐이다. 그렇다면 그걸 통해 여러 인생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 폼 잡고 말하려는 건 아니지만 - 우리의 비극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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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2-04-09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25 끝에 첫 댓글의 영광을! :)

웬디양님, 글 정말 잘 읽었어요. 연봉 서열 4위를 시인하면서도 'ㅋ'을 쿨하게 칠줄 아는 웬디양님은 역시 멋져요! 저는 고교동창을 만나면 꼭 이상하게 꼬임에 빠지게 되더라구요. 어디 교회에 끌려가거나 무슨 잠적설에 대한 해명을 듣거나. 가끔 추억을 이야기하고 만나서 회포를 푸는 관계는 퍽 좋은 것 같아요. 그걸로 과거가 일시적으로나마 살아나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일기를 들춰보는 것도 재밌겠지만요. 10년 뒤의 나와 내 친구들은 어떤 모습일지 실로 궁금해지는 따뜻한 오후네요~

웽스북스 2012-04-09 20:41   좋아요 0 | URL
우힝. 감사요 수다쟁이님. 까딱하면 무플 될뻔했어요. ㅋㅋㅋ

나이가 들면서 관계도 변하고, 관계에 대한 기대도 변하게 되는 것 같아요. 과거를 이야기하는 건 좋지만, 역시나 한계가 있다는 느낌도 받고요. 암튼, 옛 친구들과 정말 오랜만에 만나고 나니, 오만가지 생각이. ㅎㅎ

하지만, 따뜻한 오후를 선사했다니 기쁩니다 :)

개인주의 2012-04-10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강염려가 추가되는 거 심하게 공감되네요.ㅋㅋ
얼굴이 마비되니까 얼마나 애매한지.
- -

웽스북스 2012-04-13 01:28   좋아요 0 | URL
앗 스누피님. 갑자기 이 무슨 일입니까 ㅠㅠ 지금은 좀 어떠신지...

굿바이 2012-04-10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재까지 연락이 되거나 혹은 끝까지 가끔이라도 연락을 하는 친구들 중에서 나는 연봉 꼴찌를 달리고 있는데, 그 사실에 나보다 그들이 더 놀라는 것을 보면, 타인을 안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언제나 그러하듯 그저 밥벌이라도 할 수 있는 내가 참으로 대견한데 말이야^^

오늘은 목련이 핀 걸 보았는데 생전 처음으로 목련을 보는 사람처럼 나는 놀라고 또 탄식하고 꽃나무 아래 한참을 서있었어. 그러면서 생각했는데 앞으로 나는 지금 살아왔던 것 이상으로는 절대 살아갈 수 없겠구나 싶더라. 잘 지내지?^^

웽스북스 2012-04-13 01:30   좋아요 0 | URL
언니, 그러니까, 저도 지지난 토요일에 버스를 타고 가다가 합정에서 목련을 보고 한 정거장 먼저 내려 다시 되돌아갔어요. 목련은 그런 꽃인가봐요.

그리고 언니의 앞으로는 지금보다 훨씬 근사할 거라 믿어요. 물론 근사하다, 의 기준이 남들과 다를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언니와 저는 비슷한 기준을 가지고 있을테니까.

그러니까, 언니는 무조건 짱. 저는 목련보다 언니가 훨씬 훨씬 좋아요! 훨씬 훨씬 예뻐요!!

카스피 2012-04-10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봉과 상관없이 만날수 있는 학창 시절의 친구들이 많다는 것이 넘 부럽네용^^

웽스북스 2012-04-13 01:30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이제 많지는 않아요. ㅎㅎ
 

데미안 라이스


지난 주에는 데미안 라이스 공연에 다녀왔다. 가기 전에 매우 마음이 상했던 게, 나는 데미안라이스 곡의 현악 연주 부분들을 좋아하고, 어떤 곡들은 그 부분 때문에 찾아서 듣는데, 데미안 라이스가 혼자 혈혈단신으로 공연을 한다는 거다. 아. 이런 게 어딨어요. ㅜ_ㅜ

연인이자 듀엣이었던 리사해니건과 결별했으니, 그녀가 오지 못하겠구나, 라는 것만으로도 매우 허전했는데, 혼자서 그 곡을 어떻게 채워나가려고 그러나, 그것도 그 큰무대를 ㅜ_ㅜ 하는 생각에 괜히 야속하고, 현대카드도 밉고 ㅠㅠ 확마, 환불해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그럼 후회가 너무 클 것 같아서, 좀 서운한 마음을 안고, 올림픽 공원으로 갔다. 그런데! 자리에 앉는 순간! 모든 것이 용서됐다. 자리가 완전 좋아 ㅜㅜ 이래서 사람들이 좋은 자리에 집착하나보다, 혼자 소극장에 온 느낌이었다. 그런데, 데미안이.... 김어준 머리를 하고 나타났다!! 헉, 나의 데미안은 저런 머리가 아니에요... 금발의 어준...이라니... 산넘어 산이구나, 싶었으나, 그는 점점 그 머리가 어울리는 남자로 변해갔는데, 아, 이런 모습도 좋구나, 정말, 이 아저씨. ㅋㅋ 누가 그런 노래 부르래, 이렇게 웃기면서. 이렇게 웃기면서 누가 그런 노래 부르래! 

나는 데미안라이스의 앨범들을 많이 듣긴 했지만.. 내가 이렇게까지 다 외울 정도로 많이 들었는지는 몰랐다. (가사는 못외웠다 ㅋ) 반주 파트들은 거의 외우고 있어서, 허전한 부분들은 상상으로 채울 수도 있었고, 또 그 허전함을 창의적으로 채워나가는 데미안 라이스의 모습을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언론에 많이 보도된 떼창 같은 것들. Volcano 전주 부분의 첼로파트는 데미안의 목소리로 직접 불렀는데, 더욱 틈이 많아져, 또 새로운 느낌으로 들을 수 있었다. 그래. 음반이랑 똑같은 거 들으러 가는 건 아니니까. (10년쯤전에 -헉, 벌써 10년? - yb콘서트 갔다가 음반이랑 너무 똑같아서 -_- 지겨워서 그냥 나왔던 기억이 ; - 아 물론 공짜표 - 멀리서 화면 보면서 음반이랑 똑같은 거 들으면, 그냥 TV보지, 하면서 친구랑 그냥 나왔었다. 크리스마스날이었다) 


그 중에 가장 빛나던 순간은, 데미안 라이스가 무대 앞으로 나와 기타반주만 하면서, Cannonball을 부르던 순간. 마이크도 대지 않고, 그 큰 올림픽홀을 목소리와 기타소리만으로 채웠다. 그는 전심으로 불러야만했고, 관객은 전심으로 들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가능한 순간이었고, 그렇게 했고, 그렇게 됐다. 10분이 채 되지 않은, 숨을 쉬느라 잠시 긴장을 놓는 것조차 아깝던 그 순간은 어쩌면 내가 만난 가장 아름다운 순간 중 하나로 기억될 것 같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공연이었다. 정말 그랬다. 


아저씨 또 오세요. 또 갈게요. 제가 비록 더 가난해졌지만, 그래도 또 갈게요. 역시 좋아하길 잘했어. 멋진 아저씨야. 게다가 웃기기까지 하고. 히힛 (하트를 넣고 싶은데 맥북으로 어찌 넣는지 몰라 ㅜ_ㅜ) 


-  짧게 여러 단상들을 쓰려고 했는데, 이건 뭐 데미안 라이스 얘기가 너무 길어졌네. 아래부터는 짧게. 


버스


맥북을 산 이후로 나는 버스를 타고 다니기 시작했다. 언젠가 끊어야 할 나쁜 습관이었다. 택시는. 다행히 아침마다 왓섭 메신저로 성실하게 모닝콜을 해주시는 다XX 님이 계셔서 요즘엔 거의 성공이다. 오늘은 무려 내가 답장이 없자 열 몇개의 메시지 공세를 퍼부으셔서 겨우 일어났다. 어찌나 고마운지, 이 고마운 마음 갚을 날이 있겠지. 


나의 성공을 보고 회사의 모 과장님은, "역시 사람은 닥치면 다 하나봐요, 저도 차를 사야겠어요"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진짜로 구매 직전까지 가셨음) 택시를 탔던 이유는 서부역에서 회사까지 걸어가는 그 길이 싫어서였고, 그 길이 추울 것 같고, 더울 것 같고, 졸려서였는데, 이 추운 날에 그 길을 걷는 것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찬바람 맞으면서 걸으니 잠도 깨고, 이런저런 생각들도 한다. 덕분에 또 오늘도 해냈다, 라는 성취감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남들에게는 일상인 것이 내게는 성취인, 조금은 한심한 삶을 살았지만 (ㅜ_ㅜ) 이젠 내게도 조금씩 일상이 되어간다. 


팟캐스트


맥북이 내게 가져다 준 변화 중 하나. 아이팟터치를 쓸 때는 팟캐스트가 뭔지 몰랐고 (ㅜ_ㅜ) 아이팟터치를 목사님 딸에게 주고 난 후에는 애플 유저에게 유일하게 부러운 것이 팟캐스트였고, 맥북을 산 이후엔 유일하게 내가 잘 쓰는 기능 중 하나가 팟캐스트라며 뿌듯해하고 있었는데, 일반 PC에서도 아이튠즈만 깔면 가능한 거였단다. 바보돋는 순간. (게다가 내 컴퓨터에는 아이튠즈가 깔려있었다 ;;) 암튼, 요즘엔 도시락을 싸다보니 집안일을 할 때가 많은데, 그럴 때 팟캐스트를 듣는다. 나는 꼼수다는 원래 챙겨들었고, 요즘엔 나는 꼼수다보다 나는 꼽사리다를 더 유용하게 듣고 있다. 꼽사리를 듣고 중국산 찐쌀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고 더욱 가열차게 도시락을 싸고 있다. 엄마, 난 찐쌀이 싫어요! 그리고 요즘엔 듣는 팟캐스트가 더 늘어났다. 이정희 의원이 진행하는 희소식을 듣다가 통합진보당 당원으로 가입도 했다. 귀가 워낙 얇 ;;; 예전에 웹진을 함께 만들던 K언니가 정치경영연구소에서 비례대표제 도입을 위해 열심히 뛰어다닐 때만해도 현실성이 있나, 싶었는데 통합 진보당 소식과 가까워지면서 최근엔 매우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다. 용산구 당원모임도 나가볼까 생각중이다. 그리고, 늦잠꾸러기인 나는 평생 못들을 줄만 알았던 '손석희의 시선집중'도 팟캐스트 덕분에 챙겨듣고 있다. 주간지 읽을 시간이, 신문 읽을 시간이 여의치 않아 뒤쳐지는 느낌이 들었는데, 팟캐스트 덕분에 집안일을 하면서도 세상 돌아가는 일들을 들을 수가 있어 좋다. 집안일을 하는 시간에도, 내가 늘 쳇바퀴를 돌리는 것 같다며 허망해하지 않아도 된다. 오늘도 집에 와 김치부침개를 만들어 먹으며, 도시락을 싸며, 설거지를 하며, 새로 올라온 희소식과 시선집중을 듣는다. 팟캐스트가 있어서 다행이야. 


재계약


서재에 집 구하러 다닌다는 얘기 올렸던 게, 많은 분들이 응원해주신 게 엊그제같은데 벌써 2년이 지났다. 우리집 역시 전세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전세값이 2천만원이나 올랐고, 고민 끝에 15만원의 월세를 추가 지급하는 쪽으로 결정을 했다. 사실 여러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비싼 집에 살아도 되는가. 하나도 포기하지 않으려고 너무 욕심을 부리는 거 아닌가... 그럼 이사를 갈까, 하다가 이사 비용도 만만치 않고, 2년 전의 고생을 반복하고 싶지도 않아 그냥 월세를 내는 쪽으로 결정했다. 그 때는 이제 독립한다는 설렘이 있어 그 추위를 견딜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젠 설렘이 설움으로 변해 그 추위가 더욱 살을 에는 고통으로 다가올 것 같아 자신이 없었다. 월세는 한푼 깎아달라는 말도 못하고 그냥 드리기로 했다.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려고 이렇게 아쉬운 소리를 못할까. ㅠ_ㅠ 덕분에 허리가 완전 휘어질 것 같은데, 그래도 어쨌든 향후 2년의 거주지가 확정된 덕에 안심하고 요가도 더 다닐 수 있고 (이사가야할지도 몰라서 3개월만 끊었었다. 그 외에도 다른 이유들이 있었지만) 이사갈 걱정 안하고 책꽂이도 더 들여놔도 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정말 열심히 아껴야 하지만, 그래야 하지만, 뭐 그래보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낄 구멍이 너무 많다. 전세 인상을 통보받은 지난 주말 이후, 월요일 지출 1,800원 (왕복 차비) 화요일 지출 5,400원 (왕복차비와 간식비) ; 물론 도시락을 싸갖고 다니기에 가능한 것이지만, 아, 뭔가 좀 처절한 숫자다. 맥북을 사면서 아끼는 습관을 들이기 시작한 게 다행히 충격을 완화해준 것 같다. 알고보면 맥북은 보물단지? 얼마나 더 아껴야할지, 실은 나도 잘 감이 안온다. 그냥, 살다 보면 살아보겠지, 뭐라도 되겠지, 하는 심정이다. 뭐 그렇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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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12-01-18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가 감동적입니다.
저도 맥북을 사야할까요?엥?

웽스북스 2012-01-18 00:46   좋아요 0 | URL
아. 인식하지 않았는데 각 주제마다 다 맥북이 등장하네요. ㅋㅋㅋㅋㅋㅋ

2012-01-18 0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18 0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18 0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18 0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18 0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와 2012-01-18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희열의 라디오천국!! (전 동진님 나오시는 토요일분만 다운받아 듣는데, 이 두남자의 수다가 완전 좋아요!! 엉엉.. 그런데 작년말에 방송이 끝나버려서 다운받은 방송 하나하나 아껴듣고 있어요.) 그리고 다운만 받아놓고 듣진 못했는데,'정은임의 영화음악'도 좋다더라구요.ㅎㅎ

웽스북스 2012-01-20 00:42   좋아요 0 | URL
작년에 끝날 때 주변에 많은 분들이 아쉬워했었던 게 생각나요.
둘다 접수접수요. 히히 신나요. 들을 생각 하니까.

굿바이 2012-01-18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연이랑 음반이랑 똑같은 것도 좀 이상하지. 좋았다니 다행이고 그런 순간이 있었다니 더 다행이구나. 어떤 상황에서도 잘하는 놈들이 있어. 그런 놈들은 좋아해야지. 별 수 있니?^^

이정희의원은 지금 내게 유일한, 거의 유일한 기대인데 웬디 마음에도 들었다니 정말 신난다. 맨날 헛다리만 짚은 것 같아서 바보같았는데 뭔가 다른 사람 눈에도 기쁜(희)소식으로 들린다니 이번에는 성공하겠다 싶네. 작은 성공이라도.

이건 정말 개인적인 경험인데 말이지, 돈을 지출할 일이 생기면 또 들어올 일도 생긴다고..물론 매번 그런 건 아니지만 말이야.
웬디야, 다른 건 몰라도
오다가다 배고프면 언제든 오고, 오다가다 주머니 사정 어려우면 언제든 말하고
오다가다 커피 생각나면 언제든 전화하고, 책이건 옷이건 내 것이라도 가져다 쓰려면 언제든지 가져가도 괜찮아. 하우스렌탈푸어 화이팅!!!!

치니 2012-01-18 12:47   좋아요 0 | URL
나도 나도요 ~ 굿바이 님 말씀에 공감하는 거 알죠, 웬디 님? 돈이란 게 쓰고 나면 쓴 만큼 벌게 된다니까요, 두고 봐요 ~ ㅋㅋ
글구 제주 올 때 돈 없으면 뱅기 값만 해갖고 와요. 잘 데 있곘다, 밥 주겠다, 차비는 올레 길 걸어다니믄 되고 (기분 나면 우리 차로 모셔다 줄 수도 ㅋㅋ), 서울서 있는 것보다 크게 돈 드는 거 없으니 휴가 내면 꼭 와요 ~ 하우스렌탈푸어 화이팅!!2 (어제 피디수첩 보니까, 웬디 님 월세로 하기 정말 잘했구나 그 생각 또 들던데요. 지금 상황에 집 깔고 앉으려고 대출 더 받는 건 증말 별로 좋은 방법 아니에요. 월세 내면 아깝긴 해도 맘이 좀 편하잖아요, 빚 있는 거보다는. ㅎ)

웽스북스 2012-01-20 00:52   좋아요 0 | URL
굿바이언니 / 언니, 제가 이걸 회사에서 보고 너무 감동받아서 그만 눈물을 ㅋㅋㅋㅋ 아 창피해 죽는 줄 알았어요. 거기에 아래 치니님 댓글까지, 완전 감동이 몰려와서. 참 신기하죠. 진심은 진심으로 전해지는 거구나, 라고 언니 글 보면서 다시 한 번 생각했어요. 고마워요. 늘. 언니한테는 맨날 맨날. :) 하우스 렌탈 푸어지만, 마음이 가난하지 않은 건 다 저를 둘러싼 이런 고마운 마음들 덕분인 것 같아요. 으쌰쌰쌰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요. 저는 이정희 의원을 보면 언니가 생각나요. 그래서 더 좋은 건지도 모르겠어요. 왜 생각나는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설명해야될지도 모르는데 암튼 그래요. 그리고 어쩐지 언니는 이렇게만 말해도 내 맘을 알 것 같아요. 이번엔 정말 헛다리 아니면 좋겠어요. 정말. 정말.

치니님 / 치니님 그 지론에 이제 저도 중독되고 있어요. 이를 어쩌죠? ㅋㅋㅋ 저같은 소심한 렌탈 푸어에게 치니님의 정신이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 물론 좋은 쪽으로요. 치니님은 어른이라기보다는 저에게는 친구에 가깝지만, (마음은 그래요 ㅋㅋ) 그래도 저보다 더 오래 사신 분들 중에 특별히 치니님을 알고, 가까이 지내고, 또 좋은 영향을 주고 받는 일이 저에게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지 몰라요 히히. 진짜로 갈게요. 제주는요. 그리고 제주도 가기 전에도 한번 만나줘요. 울랄랄라. (어라, 이거 언제적? ㅋㅋ)

치니 2012-01-18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은임의 영화음악 들어 봐요 ~ (정은임, 이라고 검색하면 바로 나와요). 다 듣기 뭐하면 정성일 나오는 부분 우선 들어보시길. 증말 말 많고 숨 안 쉬고 영화 이야기만 하는 와중에 정은임 씨는 하다못해 "예" 소리 하나도 못 내고 50분이 가는 엄청난 청취 경험을 하게 될 거에요. ㅋㅋㅋ

웽스북스 2012-01-20 00:56   좋아요 0 | URL
아 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요? 저는 촌스러워서 1회부터 들어야되는 인간이라 ㅋㅋㅋㅋㅋㅋㅋ 지금 1회 막 틀었어요. 치니님, 레와님 두분의 강추에 힘입어!! :) 고마워요. 역시 물어보길 잘했어. 이게 있을지는 몰랐어요!!

L.SHIN 2012-01-18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부터 난 음악을 안 듣게 되었을까요?
음악 없이도 살고 있는 지금의 내가 신기할 따름입니다.

웽스북스 2012-01-20 01:29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그렇게 살다보면 또 언젠가 막 그리워지지 않을까요?

무스탕 2012-01-18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립만세 외치신지가 벌써 2년이나 됐어요? 정말 시간 빠르네요..
일단 이사를 안하게 되신건 여러모로 좋은데 하나 좋으면 하나 나쁘다고 경제적 부담이 늘은건 서러운 일이네요.
출근길 조금이라도 더 편안해 지시라고 얼른 봄이 오길 바랍시다!!
(웬디양님네 멍충이한테 안부전해 주세요.ㅋㅋㅋ)

웽스북스 2012-01-20 01:30   좋아요 0 | URL
무스탕님. 정말 시간 빠르죠.
좋은 것만 다 가지고 살 수도 없고 그 좋은 게 다 나에게만 오기도 바랄 수 없고
그냥 선택에 따른 결과에 대해 책임지며 사는 게 온당하지 싶어요.

서럽긴 하지만요.

마늘빵 2012-01-19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건 한편의 서울 청춘 직딩의 생존기에요. 전 부트캠프 안 깔고, 뱀웨어 깔아서 가상 윈도우를 구동할 생각인데 이걸 어캐 하는 건지 몰라서 낑낑 대고 있어요.

웽스북스 2012-01-20 01:30   좋아요 0 | URL
아이고. 아프님 화이링!
아프님도 서울 청춘 직딩 ㅋ 그래도 청춘의 반열에 들어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물론 20대 아가들은 그렇게 생각 안해주지만요.

종혁 2012-01-19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가 아는 많은 사람들이 데미안 라이스라는 하나의 매개체를 통해서 한 장소에 모여 있었어요. 그 분들끼리는 서로 모르구요. 저는 물론 외국에 있어서 못갔지만, 왠지 재밌기도 하고 흐뭇(?) 하기도 하고 묘하더라구요. 아, 이 님도 공연 갔네. 저 님도 지금쯤 공연장에 계시겠구나. 그 친구도 오늘 간다고 했지. 하고요. 그리고 다행히도 모든 분들이 아주 좋은 기억을 가지고 돌아 오셨어요. 덕분에 저까지 좋은 공연을 본 것 같은 포만감이 들더라구요.

웽스북스 2012-01-20 01:51   좋아요 0 | URL
아. 사실은 저도 그랬어요. 별 생각 없이 혼자 예매했는데, 오가는 길에 동행도 있었고, 가서 또 친구 만나고, 심지어 떼창할 때 저 앞에 나가 있는 사람도 친구고. 완전 신기했어요. ㅋㅋ 저희 회사분도, 트위터 타임라인이 데미안라이스 공연 이야기로 가득했다고... 어찌 보면 올림픽홀에서 하는 공연이 한둘이 아닐테니, 규모 때문만은 아닌 것 같고,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비슷한 걸 좋아할 것 같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게 되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ㅎㅎㅎ

네꼬 2012-01-19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님 나도 깨워줘요! ㅠㅠ

웽스북스 2012-01-20 01:51   좋아요 0 | URL
네꼬님도 늦잠꾸러기였어요? ㅋㅋ

다락방 2012-01-24 21:07   좋아요 0 | URL
어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