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은사님께서 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라는 책을 출간하셨다. 졸업하고서 세번째 듣는 출간 소식이다. 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 라는 제목을 듣고 참 선생님답구나, 생각을 했다. 저 간결하고 딱딱한 제목만 봐도 그간 하고 싶으셨을 이야기들이, 심지어 얼마전 공동 출간하신 한국 기독교의 역사 3권에 미처 담지 못했을 이야기들이 내게 흘러오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선생님은 내가 제출한 서평 읽기를 즐거워하셨었는데, 그건 내가 글을 잘 써서라기보다는, 다른 친구들이랑은 좀 다르게 솔직하고 웃기게 (-_-) 썼기 때문일 거다. 그 속에서 내가 엿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 때 내가 쓴 서평들은 지금 내가 봐도 좀 귀엽다. 하하하. -_-) 마찬가지로 나도 선생님이 낸 책의 서문 읽기를 좋아한다. 단정하게 고른 단어와 문장들 하나하나에서 역시나 선생님의 고민과 마음이 느껴지기 때문인 것 같다.

선생님 말처럼, 의미 있는 학술지들을 출판사가 손해를 무릅쓰고 내주는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저자들이 그 출판사에 보내는 감사와 다른 의미의 감사를 보내야 할 것만 같다. 어쨌든 그런 고마운 마음들이 있기에, 우리도 이런 저서들을 만나볼 수 있는 거겠지. 그러니, 더 똑똑해지고, 더 많이 보고 듣고 읽고 경험해서, 좋은 것들을 알아볼 줄 아는 눈을 기르고, 기꺼이 가치를 지불하는 것은 또 우리의 몫이라는 생각이다. 이 기회에 나도 선생님과는 다른 이유로 <푸른 역사>에 감사를.

학교에 남아 TA를 하고 있는 후배가, 선생님 방에 여전히 내 사진이 붙어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졸업한지 6년, 여전히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던 그 곳에서, 그 사진을 찍었던 계절도 딱 이 계절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코스모스가 흐드러지던 가을날의 깊숙한 그 어딘가에서 활짝 웃으며 찍었던 그 사진이 나는 갑자기 보고 싶어졌다. 나는 올해 휴가도 못내는데, 진작 좀 다녀올걸 하는 후회와 함께, 더 늦기 전에 한 번 다녀오겠다, 라는 실현 가능성 없는 다짐도 불끈. 해본다.



책을 내면서      

학교의 요청으로 지난 해 연구실적을 정부통합전산망에 입력하면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10년 동안 국내외 전문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이 20편이 훨씬 넘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 년에 두 편 이상을 쓴 셈이니 편수로만 본다면 공부를 게을리 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역사 논문 하나를 제대로 쓰려면 일 년에 한 편 내기도 힘들다는 점을 생각하면서, 그 글들이 얼마나 잘 된 것인지 스스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직전 대통령의 비상한 죽음이 내 삶의 무게가 너무 가볍고 내가 하며 사는 일이 너무 사소하다고 느끼게 만들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학자의 무게를 논문 편수로 재는 사회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애써온 모습이 처량했기 때문인지, 마음이 불편했다. 

그 동안 발표한 논문 목록을 훑어보면서, 내 관심이 대체로 기독교의 여러 현상을 “종교외적”인 요인, 특히 정치나 이데올로기와 연관시켜 조명하는 데 있었음을 발견했다. 이번에 책으로 묶어서 내는 글들도 모두 그런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신학교를 다녔고 한 때 구약학자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 왜 기독교의 역사적 현상들을 “종교적”인 차원보다는 종교외적 맥락에서 바라보게 되었는지, 먼저 내 삶의 궤적을 돌아보았다. 그러면서, 기독교를 포함하여 모든 종교 현상 속에 종교적 차원과 종교외적 차원이 따로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였다. 

나는 종교를 신화나 의례와 연결시켜 해석하는 엘리아데(Mircea Eliade)의 종교학 이론에 단 한 번도 매력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보다는 마르크스(Karl Marx)나 트뢸치(Ernst Troeltsch)가 종교 현상의 본질을 훨씬 깊게 통찰했다고 믿는다. 종교의 진면목은 신화나 의례, 혹은 상징을 분석하기보다는 정치-경제-사회와 만나는 지점을 관찰하면 더 잘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어느 때부터인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역사를 공부하면서 나는 순결하게 고유한 종교의 영역이 있다고 믿지 않게 되었다. 기독교만 하더라도, 공교회의 역사는 곧 정치화 한 종교 혹은 종교화 한 정치의 역사였다. 개항기에 서구문명의 전도사로 들어와서 해방 후 이데올로기 전쟁의 일선에 서게 된 한국 개신교의 역사는 가장 종교적으로 보이는 현상도 정치-사회적 차원을 가지며, 종교적 신념과 이데올로기적 신념은 놀라우리만치 친밀도가 높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대부분 그런 점을 璿擅막졍?시도였다. (응? 아니 왜 이런 오타가 ㄷㄷ) 

여기 실린 10편의 글 가운데 제2부에 있는 기독교와 사회주의 관련 글 두 편은  각각 남북 학술대회와 국제 학술대회에서 발표했던 글이다. 그 둘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한국기독교의 역사》, 《종교문화비평》, 《경제와 사회》 등에 게재했던 논문이다. 책으로 묶기 위해 다시 읽으면서 심한 자괴감을 느꼈다. 내용은 둘째 치고 문장이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이다. 논문의 내용에 앞서 문장에 집착하는 버릇은 아마도 학부시절 문학을 전공한 후유증이 아닌가 싶다. 소설이건 논문이건 글로 된 것의 제일가는 미덕은 좋은 문장에 있다고 믿는다. 이전에 여러 차례 읽고 고친 글인데도 다시 읽어보면 적절하지 않은 단어, 매끄럽지 않은 문맥, 분명하지 않은 표현, 그리고 심지어 어법에 맞지 않는 문장도 여전히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 것들을 손보면서, 제 나라 말로 글 한 편 쓰는 일이 왜 이렇게 어려우며, 나는 언제가 되어야 글다운 글 한 편을 제대로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글과 내 생각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아득하다. 

종교와 정치의 경계가 모호하다면, 역사와 문학의 관계는 더 말 할 필요도 없다. 헤로도토스(Herodotus)부터 기번(Edward Gibbon)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역사학은 본질적으로 문학적 추구였다. 랑케(Leopold von Ranke)이후 역사를 “과학”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한동안 경주되었지만 문학과 결별한 역사는 적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렇지만 역사는 문학과 동일하지도 않다. 텍스트 바깥의 객관적 실재를 부정하는 최근 문학이론은 역사적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무너뜨려 결국 역사적 탐구를 무의미하게 만들 기세로 역사학의 정체성을 위협했다. 20세기 후반의 세계사적 격변은 보수적인 학문에 속하는 역사학마저 세포분열 시켰다. 마르크스주의자인 톰슨(E. P. Thompson), 아날의 브로델(Fernand Braudel), 빌레펠트의 벨러(Hans-Ulrich Wehler) 사이의 거리는 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역사가라는 범주에 묶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사료에 근거하지 않은 어떤 것도 역사의 일부로 다루려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역사 서술도 선입관, 소속감, 공명심 같은 무형의 영향력, 돈과 권력이라는 유형의 압력, 그리고 무엇보다 상상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참된 역사는 결코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모름지기 모든 학문의 본질은 일반화에 있다고 본다. 독특하고 일회적인 것에 대한 지식이 무슨 큰 가치가 있겠는가? 법칙을 좋아하는 소위 과학이라는 것과 친밀도가 높은 학문일수록 일반화 하려는 경향이 더 강한 것 같다. 그러나 지나친 일반화는 좋지 않은 학문으로 가는 첩경이기도 하다. 따라서 일반화라는 것은 학자에게 마치 밥과 같아서, 먹지 않으면 살 수가 없고, 너무 많이 먹으면 병들게 되는 어떤 것이다. 나는 논문을 쓸 때마다 일반화 시키려는 직업의식과 지나친 일반화는 피해야 한다는 양식 사이에서 줄다리기 하는 듯한 긴장감을 느끼곤 한다. 

여기 소개된 10편의 논문은 사료가 허락하는 한계 속에서 내 이성과 상상이 구축한 세계다. 그 글들이 다루는 주제들의 객관적 실체가 바로 그 글들이 보여주는 바와 같다는 어리석은 주장을 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들이 적어도 허구는 아니며, 각 주제에 관한 개연성 있는 해석을 보여주고, 같이 모여서 한국 개신교 역사의 잘 보이지 않는 단면을 드러낸다고 믿는다. 10편 모두 복잡한 현상을 일반화시킨 것이겠지만, 기왕이면 지나치지 않고 통찰력을 제공하는 일반화이기를 바란다. 

이 책을 낼 욕심이 났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난 사람이 최기영 선생이었다. 그에게 출판사 소개를 부탁한 것은 그가 그쪽 사람들을 많이 알기도 하지만, 보기보다 마음 약한 분이라 후배의 소망을 어떻게 해서라도 들어주려 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내기 위해 마치 중매쟁이와 같은 역할을 마다하지 않은 그에게 큰 마음의 빚을 졌다. 아울러, 그의 감언이설에 속아 이름값 없는 시골 서생의 책을 출간해준 푸른역사의 박혜숙 사장과 신통찮은 원고를 좋은 책으로 만드느라 수고한 출판사의 여러분들께도 미안하고 감사하다. 그러고 보니, 이 책에 실린 논문을 쓰도록 혹은 부탁하고, 혹은 강권하고, 혹은 돈으로 유혹한 많은 분들이 생각난다. 그분들께도 유효기간이 한참 지난 감사를 드린다. 내가 공부하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아내다. 논문 한 편 쓸 때마다 부실한 몸이 더 수척해지는 모습을 매일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아내가 반가워할지 모르지만, 이것밖에 드릴 것이 없다.  

공들여 쓴 학자의 책이 팔리지 않아 출판사가 의무감으로 책을 내주어야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렇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류가 책이라는 것을 발명한 이래로 그렇지 않았던 시대가 과연 있었는지 모르겠다. 대중이 외면하는 연구서를 뜻있는 출판사가 손해를 감수하고 출간해주는 것은 대중의 구미에 맞고 유행을 따르는 글보다 좋은 학술서가 인간과 사회에 대해서 훨씬 더 깊은 통찰력을 제공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책 속의 글 한 편이라도 꼼꼼히 읽어주는 독자라면 시류에 휩쓸리지 않을 만큼의 무게가 있는 사람들이라고 믿는다. 그들이 이 책 속에서 한국 개신교에 대해 흔히 얻기 어려운 관점과 지식을 얻을 수 있다면 좋겠다. 학자로서 그것 이상 가는 보람이 어디 있을까. 

좋은 논문을 쓴다는 것이 갈수록 힘에 부치고 어렵다. 쓰면 쓸수록 글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내 한계만 깨닫게 되니, 학문의 참된 의미는 자기수련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학술적인 글과 대중적인 글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아마도 거기에 있지 않은가 싶다. 고인이 된 박재삼 시인이 오래 전에 낸 시집 후기에, “시집을 낼 때마다 새로운 각오가 생긴다고 하건만, 나의 경우는 그것도 빈약하고, 또 다른 길로 떠날 차비를 하는 것이 고작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꼭 그 꼴이다. 

 

2009년 여름, 한반도의 남동쪽 끝자락에서 류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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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다이어리 기록을 좀 성실하게 하는 중인데 어제 혼자 막 통계를 내보니 2009년에는 9권의 책을 읽었고 (아 오늘로 10권이 됐구나) 32명의 사람을 (이 역시 어제를 기준으로 34명?)만났다고 했더니 니나가 말했다. 

솔직히 말해. 너 3명이지? 

ㅋㅋㅋㅋ 그러게. 나도 세보고 깜짝 놀랐다. -_- 그 와중에 1위에 등극한 N과 H님은 4번이나 만났고, (음, N은 어제로 다섯번?) 벌써 2번씩 만난 사람들도 꽤 된다. (한 테이블에서 이야기하지 않은 사람들은 계산도 안했다. 게다가 기분나쁘면 같이 있었던 사람도 안적고 막 ㅋ) 4명씩 7명씩 만나고 하는 경우가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건 니나의 표현을 그대로 빌자면, 깜놀. 책도, 이번달에는 한권도 사지 않았고, 집에서 울고 있는 아이들을 달래주는 의미로 한권씩 꺼내서 보고 있었는데 (그래도 여전히 볼게 많다며?) 어찌하다보니 너무 달려주신 거지. 게다가 피아노 연습은 일주일에 두번씩은 꼭꼭 했는데, 지난 주에는 무려 1시간 이상 연습한 날이 4일이나 된다. 게다가 어머, 영화도 연극도 두편씩이나 봤네. 내가 생각해도 좀 놀랍긴 하다. 

오늘 목수정 책을 읽다가 이 모든 걸 가능케했던 원인을 알았다. 

   
  "TV 드라마를 이렇게 재밌게 만드는 나라에서 그걸 끊는다는 건 담배끊기보다 힘든 일이다. 그러 만큼 취향 획일화의 선봉에 TV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말의 스케줄을 TV에 헌납한다. 문화관광정책연구원이 3년마다 실시하는 통계에 따르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애를 TV에 바치고 있다. 백지에 그림을 그려 넣는 일, 빈 시간을 스스로 찾아서 재미있게 보내는 일은 이제 그 무엇보다 힘든 일이 되었다. (중략) 나 역시 파리에 처음 정착할 무렵 5개월간 TV 없는 생활을 하는 동안 나 자신과 친해지고 내가 잊고 있던 다양한 능력을 무궁무진하게 발견했던 경험이 있다"  
   

사람들이 주말에 TV를 많이 보는구나. 나는 주말에는 물론 주중에도, 1월 들어 한 번도 TV를 보지 않았다. 유일하게 봤던 거라곤 그저께 D대리님을 졸라서 받은 고현정 무릎팍 도사를, 본 것도 아니고 다른 일을 하면서 들었던 정도? 원래도 잘 안보긴 하지만, 너는 그런 것들을 다 언제하느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 정도는 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TV가 주는 기쁨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나는 내가 TV를 지배하고 싶지, 내가 TV에 지배당하고 싶지 않다. 물론 강마에에 홀릭하던 시절엔 본방사수를 외치고 외쳤지만, 그리고 그 기쁨을 알고 누렸지만, 그 외의 평균적인 경우에는, 내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TV가 내게로 와주었으면 좋겠다. TV를 보기 위해 시간을 체크하는 일은, 그리고 나의 일상을 조절하는 일은, 그야말로 그냥 매우 특수한 케이스이길 바란다. 그랬을 때 그 특수한 일이 나에게 더 큰 기쁨이 되어줄 수 있을테니까. 그리고 나는 그보다 좋아하는 일들이 훨씬 많으니까. IPTV의 출현은 나에게 그런 의미에서 매우 기쁜 일이지만, 사실 그조차도 설치하지 않았다. 하하. 

목수정과 희완처럼 내 자식 낳으면 절대 TV는 보지 말게 해야지, 라는 강경한 어떤 철학이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나는 또래들이 동시대적으로 느끼는 감성의 공유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하다. 어린 시절 봤던 천사소녀 새롬이나 요술소녀같은 만화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서 난 아직도 가끔 텔레포트같은 허황된 꿈을 꾸기도 하고, 우울하면 만화 주제가를 부른다. 같은 만화를 보며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자란 또래를 만나면 반가워하고, 같이 만화주제가를 합창하던 일에서 내 자식이 소외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요즘 TV를 보면, 이걸 꼭 애들한테 보여줘야하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건 갑자기 왠 육아고민 버전인가 ㅋㅋ)

비는 시간이 많지 않은 내게 (물리적으로 많지 않은 건지, 내가 여기에 대한 강박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비는 시간을 찾아 최대한 즐겁게 보내는 건 최상의 과제이자, 최고의 기쁨이다. 책을 찾아 읽고 반성과 자학으로 가득차있다해도, 일기를 쓰고, 기록하고, 자꾸만 뭔가를 찾아내는 것들이 내게는 즐거운 것들이어서 참 다행스럽다. 

TV를 끊으면 내가 세명이 되는구나.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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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4 2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25 15: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실 2009-01-25 0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 그러게 말입니다.
전 요즘 TV 드라마에 빠져 삽니다. 중독이예요. 꽃보다 남자, 유리의 성, 가문의 영광...이러면서 책 읽을 시간이 없다고 얘기하다니. ㅠㅠ

웽스북스 2009-01-25 15:48   좋아요 0 | URL
흐흐 세실님. 그렇군요.
꽃보다남자는 정말 인기 많던데, 재밌나봐요. ㅋㅋ (유리의 성이랑 가문의 영광은 처음 들어요. 쿵!)

마태우스 2009-01-25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내의 유혹이란 드라마에 빠져 살아요. 근데 아내 때문에 꽃보다 남자도 보게 되었어요...게다가 1박2일도....ㅠㅠ

웽스북스 2009-01-25 15:50   좋아요 0 | URL
마태우스님은 잘생기셨으니까 괜찮아요 ^_^

그러니까 위 덧글을 총체적으로 한마디로 정리하면 꽃보다 남자도 1박2일도 다 '아내의 유혹'인 거군요 ㅋㅋ

깐따삐야 2009-01-25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하얀거탑'을 다시 보기 한 이후론 요새 드라마들이 넘 시시해졌어요. 말이 안 되어도 너무 말이 안 되는 막장 드라마들이 판을 치는 것 같아서 말이지요. 그래도 이유리의 연기가 좋아서 '사랑해, 울지마'는 챙겨보고 있어요. 그나저나 TV를 끊은 웬디양님은 손오공일세요.^^

웽스북스 2009-01-25 15:51   좋아요 0 | URL
사랑해 울지마? 음. 그것도 처음 들어요. ㅜㅜ 나 어쩌다가. ㅋㅋ 저도 한국 드라마 본 건 거탑이 마지막인 것 같아요. ㅎㅎ 그때 이후론 도통 보고싶은 드라마들이 없네요. 당분간 손오공 모드로 좀 살아야지 ㅋㅋ

다락방 2009-01-25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말 하면 정말 챙피한데요...


저....



『꽃보다 남자』봐요. 저도 제가 이럴줄은 몰랐어요!! ㅎㅎ

웽스북스 2009-01-25 22:49   좋아요 0 | URL
응? 나는 왜 다락방님이 그럴 줄을 알고 있었을까요? ==333333

깐따삐야 2009-01-27 13:13   좋아요 0 | URL
저도 왜 그럴 줄 알고 있었을까요? ==333333
 

   
  그날 우리가 나눈 대화는 대체로 의미심장하고 진지한 것들이었으나, 가장 강한 잔상은 대화 내내 그가 자주 보여주었던 '냉소로 쪼개지지 않는 1백%의 웃음이었다'
내가 아는 한 대부분의 프랑스 사람들은 85%만큼만 웃었다. 모든 상황에서 15% 정도의 판단은 유보해놓으려는 실존적 고집이었다. 혹시라도 파안대소를 하게 되면 바로 입꼬리를 일그러뜨려 표정을 수습하는 프랑스인들의 이러한 태도는 언제나 날선 비판력만이 자아를 지켜준다고 믿는 이 나라 사람들의 '겉멋'인듯하다. 일곱살만 되면 아이들도 15%의 냉소를 머금은 예의 그 프랑스적인 웃음을 입가에 달고 있다.

<목수정 -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p30>
 
   


가만가만 나의 웃음을 되짚어본다.
나의 웃음은 몇퍼센트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는 웃음이었는지를. 

혹시 나도 모르게, 웃음 뒤의 일들을 계산하는,
냉소로 쪼개지는 비겁한 미소를 보내고 있지는 않은지.

100%의 웃음을 두려워하고 있는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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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9-01-23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가 바뀌며 웬디양님 페이퍼가 형이상학적이 되부렸어요...^^

코코죠 2009-01-23 21:38   좋아요 0 | URL
그건 바로 그녀가 나이를 먹었단 증거라고 봅시다요!(악마의 웃음)

반가워요, 웬디양, 삼십대 동지여! 으화화화-(아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웽스북스 2009-01-24 11:05   좋아요 0 | URL
메피님 / 설마요. 전 그런 글을 쓰고 싶어도 못쓰는걸요. ㅎㅎ
오즈마님 / 어이쿠나. (아직 음력설 안지냈어요. ㅋㅋ 올해부터 음력설만 인정해줄 생각이에요. ㅋㅋ)

프레이야 2009-01-23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만가만 생각해볼 수 있는 구절들이 많더군요.
저 구절도 그래요. 100%의 웃음, 그렇게 웃고 사는지
저도 돌아보게 됩니당, 웬디양님^^

웽스북스 2009-01-24 11:06   좋아요 0 | URL
혜경님도 보셨군요. 저도 여러모로 가만가만 생각해볼 구절이 많아 즐겁게 읽고 있답니다. 혜경님은 제가 보기에 95%는 되는 것 같아요. 적어도. ㅎㅎ

치니 2009-01-23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찜 해두었었는데, 얼마전 케이블 티비에서 이 여자가 사는 법을 2부작으로 보여주는 바람에, 관심이 사그라들어버렸어요. 글을 먼저 만났드라면 분명 좋아했을 사람인데, 티비에서 보여지는 모습은...뭐랄까 제 타입은 아니더라구요. 그래도 웬디양님이 좋다고 하면 볼 건데, ㅎㅎ 어때요?

웽스북스 2009-01-24 11:07   좋아요 0 | URL
아. 사실은 이 덧글을 보고 고민이 되서 니나에게 치니님이 이 책을 좋아하실까? 라고 슬쩍 물어보며 요 덧글을 보게 했는데요, 니나도 실제 모습보다는 글로 만나는 모습이 더 좋았다고는 얘기하더라고요. 저는 그녀가 어떤 스타일인지 모르지만, 그래도 여러 문장이나 나름의 도발들에 꽤 반응하며 즐겁게 읽고 있어요. 이건 제가 아직 어려서 그런건지도 모르겠고. 암튼 전 좋은데, 치니님께는 어떨지 잘 모르겠네요. ㅎㅎ 역시나 선택은 치니님께 맡길래요. ㅋㅋ

레와 2009-01-23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저 구절 밑줄 그어놓았는데..^^;

웽스북스 2009-01-24 11:07   좋아요 0 | URL
어, 레와님, 찌찌뽕이에요. 크크.

L.SHIN 2009-01-24 0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요즘 들어 거짓 웃음이란걸 배우고 있습니다. ㅡ.,ㅡ

웽스북스 2009-01-24 11:08   좋아요 0 | URL
으. 이른바, 자동미소같은 것 말입니까? ㅋㅋㅋ

니나 2009-01-24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력설이 다가오네, 지나면 우린 꾸루룩 꾸룩 뿅뿅?! ㅋㅋㅋ

웽스북스 2009-01-24 16:29   좋아요 0 | URL
음력 지나면 만나이라고 쓰려고했는데
이거 너무 구차하다.

그냥 꾸루룩 꾸룩 뿅뿅 해야겠다.
 

   
 

"이젠 준비가 좀 됐나요?"
전화통화를 하던 어느 날 그가 물었다. 피아노 연주를 말하는 것이다.
"글쎄요. 비토씨 앞에서 직접 연주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전화로 연주를 하려니 부담스러운데요. 연주회에 한번 오시는 게 어때요? 제일 좋은 자리를 비워둘게요"
"아니에요. 내게 제일 좋은 자리는 바로 여깁니다. 난 가끔 친구들에게 전화를 해서 내 연주를 들려주기도 한답니다. 정말 친한 친구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죠. 나도 그런 특권을 누릴 수 있을까요?"

(중략)

깊이 잠들어 있을 때 그에게 전화가 왔다. 수화기를 들자마자 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연주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들을 수 있겠어요?"

나는 잠결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친한 친구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멀리서, 정말 먼 곳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도대체 집이 얼마나 넓은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들릴 듯 말듯한 소리를 잡아내기 위해 애쓰다보니 어느새 잠은 달아났고, 나는 귀를 전화기에 바싹 붙이고 그의 연주를 듣고 있었다. 그의 악보 곳곳에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인 것처럼'이라는 지시어가 붙어 있는 것 같았다. 작고 가냘픈 소리들이 전화기를 통해 내게로 넘어왔다. 그것은 음악이라기보다 단절된 소리들의 연속이었다. (중략) 허공에 모인 음표들은 오선지 위에서 제자리를 찾았고, 곧 음표들은 음악으로 바뀌었다. 그의 연주를 들으면서 그 장면을 떠올렸다. 눈을 감았더니 정말 음표들이 보이는 듯했다

 

 

 


오늘 피아노를 치면서, 이 소설이 떠올라 
나는 괜히 막 신났다.

올해는 아무래도 이걸 해봐야겠다. 전화 연주회.

불현듯 친한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연주회를 해줄까,
아니면 시간을 예약받아서 연주해줄까.

한곡 한곡 마스터할 때마다 전화를 해볼까,
아님 연말에 몰아서 (그래봐야 두세곡쯤? ㅋㅋ)
한꺼번에 해볼까. ㅋ

그런데 사람들이 특권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내 친구가 된 어쩔 수 없는 숙명-_-이라고 생각하면 어쩌나
어쨌든 나는 저만큼의 실력은 갖출 수 없을테니.

하하, 학예회 정도로 생각해 달라고 협박한 다음에 막 들려줘?

암튼, 즐거운 피아노 연습에 윤기를 더하기 ^_^
어쨌든 나름의 목표가 생겼으니... 
고마워요 김중혁님.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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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09-01-18 0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이 참 이쁘군요.^^
'전화 연주회'라고 해서 요즘 흔히들 하는, 핸드폰 버튼 누르는 소리의 디지털 아카펠라
이야기인줄 알알았습니다.
소설 속 배경은 핸드폰이 나오기 전인가봐요. '도대체 집이 얼마나 넓은가' 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을 보면.

저도 웬디님 연주를 신청하면 들려주실건가요? (웃음)
전, [로미오와 줄리엣] 그 오리지날 연주곡을 듣고 싶어요 (^O^)/

웽스북스 2009-01-18 13:29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디지털 아카펠라. 역시 엘신님 상상력 ㅋㅋ

그런데 엘신님 놓치고 계신 부분이 있어요
곡 선정은 제가 합니다. 칠줄 아는 게 한개밖에 없어서요 ㅋㅋㅋㅋㅋㅋ
그러니 특권이 아닌 숙명이 될까 겁이 나는 것이지요

L.SHIN 2009-01-19 06:18   좋아요 0 | URL
오잉. 신청이 안되다니..=_= 헤엥~
그렇다면, 이건 될까요?
혹시 저를 재우고 싶다면 느린 곡보다 빠른 곡이 좋구요.
반대로 저를 불면에 시달리게 하고 싶다면 남들이 모두 '평화롭고 잠 오는'
그런 곡을 연주하시면 됩니다.
네? 뭐라구요? 거꾸로라구요? 그러게요, 저는 그래요.ㅋㅋ

웽스북스 2009-01-19 20:23   좋아요 0 | URL
아 엘신님은 역시 외계의 법칙을 그대로. ㅎㅎ
하지만 저는 그 두가지 다 칠줄 모른답니다. ㅋㅋ
그냥 오로지 한곡만
(그것도 아직 완벽하게는 못치는, 아 슬프다 ㅋ)

가시장미 2009-01-18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네요. 피아노!
나도 어릴적에 제대로 못 배워본 것 중 하나가 피아노인데..
이제는 용기가 없어서 못 할 것 같아요. 초등학생들의 현란의 손가락 움직임을 부러워하는..눈빛으로 바라보면서 레슨을 받을 생각을 하면 막... 얼굴이 빨개져요. 크크
어른만 다니는 학원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혹시 그런 곳도 있나요? ^^

웽스북스 2009-01-19 20:24   좋아요 0 | URL
가시장미님. 희망이 좀 크면 손붙잡고 같이 다니는 건 어때요?
그리고 요즘에는 성인들 가르쳐주는 데도 있을 거에요.

음악을 연주한다는 게 정말 삶의 기쁨이 되기도 하는 것 같아요.
장미님, 도전해보세요!

메르헨 2009-01-18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피아노............
전 근데 말이죠. 이 글 보면서 말이죠...
내 남자친구가 피아노 치면서 노래해 주면 좋겠다...그런 생각이 드네요.하핫하핫...
(신랑이 남자친구일 때 말입니다요.ㅋㅋㅋ)
피아노...다시 배우고 싶어요!!!

웽스북스 2009-01-19 20:25   좋아요 0 | URL
메르헨님은 정말 일편단심 민들레인가봐요. 남자친구 상상도 신랑으로 하시고. 으흐흐. 신랑이 피아노 칠 줄 아시면 한번 부탁해보세요. ㅋㅋㅋ 안되면 일단 가르치기부터? ㅋㅋ

깐따삐야 2009-01-18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화연주회라니. 웬디양님, 별밤 뽐내기 대회 다시 나가는 기분이겠다! 넘 멋져요. 저도 한곡 부탁드려도 되겠어요? ^^

웽스북스 2009-01-19 20:26   좋아요 0 | URL
크크 깐따삐야님. 저는 뽐내기 아니구 퀴즈퀴즈 나갔었는데 ㅋㅋ
그러고보니 전화로 하는 연주의 원조는 뽐내기였군요 ㅋㅋㅋ

깐따삐야님 접수요! 근데 그 언제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어요. 음. 하반기? ㅋㅋㅋㅋㅋㅋ

바람돌이 2009-01-19 0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양님 전화번호 알려주세요. 우리 해아 연주 들려드릴게요. 이제 피아노 배운지 일주일 돼서 도레도레~~~ 하고 있는데 그 소리가 얼마나 황홀한지 몰라요. ㅋㅋ 3=3=3===

웽스북스 2009-01-19 20:27   좋아요 0 | URL
오홋. 바람돌이님. 그 유명한 바이엘 상권의 1번 도레도레도레도레도 를 치는군요. ㅋㅋㅋ 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해서

배꼽 앞에 열쇠구멍 맞추고, 자. 도레도레도레도레도, 둘셋넷 띄고! 라고 외치던 에벤에셀 피아노학원 선생님이 아직도 생각나요. 선생님 얼굴은 생각 안나지만요. ㅎㅎ

전화번호는, 일단 학교종이라도 좀 치게되면 그때 ㅋㅋㅋ

세실 2009-01-19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어머 웬디양님 제 전화번호 알려드릴께요. 와 상상만으로도 멋져요~~

웽스북스 2009-01-21 01:25   좋아요 0 | URL
세실님 좀만 더 기다려주세요. 오늘도 연습하는데 버벅 버벅
 

   
  나는 나의 입술과 눈에 '불가사의한' 가벼운 미소가 '떠돌게' 하기로 작정한다. 그것을 통해서 나의 성격의 특성은 물론 모든 사진적 예식에 관한 즐거운 의식을 타인들이 읽을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즉 나는 사회적인 놀이에 내 자신을 맡기고, 포즈를 취하고, 또한 그것을 알고 있으며 당신들도 알아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중략) 나는 상황과 나이에 따라 변화하는 수많은 사진들 사이에서 흔들리고 움직이는 나의 이미지가 언제나 나의 자아와 일치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그와는 정 반대임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자아는 결코 나의 이미지와 일치하지 않는다. (또 중략) 사진이란 내 자신이 마치 타인처럼 다가오는 일이기 때문이며, 그것은 자기 동일성에 관한 의식의 교활한 분열이다. <p19>  
   


이제 사진 속 나를 너무 많이 봐서 낯설지 않지만,
그건 아마 사진 속 나와 진짜 내가 매치되는 측면에서라기보다는
사진 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에게 익숙해진 것일 뿐,
사실 난 가끔 사진 속 나 자신이 누구인가, 싶을 때가 있다

항상 사진은,
과거의 내가 보낸 순간 순간의 긍정성만을 기억해준다

웃지 않고서는 어색해서 사진을 찍지 못하는지라
모든 사진이 다 즐거워보여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고,
유독 즐거운 순간들만을 사진으로 남기게 되는 데다가
워낙 나쁜 기억력에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더욱 많으니,
사진에 남아 있는 상황들만을 선택적으로 기억하게 되니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할 뿐 아니라,
때때로 조작하기도 한다는 사실은
이제 그리 새삼스럽지도 않긴 하다


* 롤랑바르트가 살던 시대에 디카와 블로그가 존재했다면
그의 글은 또 어떻게 달라졌을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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