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경기도민에서 서울시민이 된 나는 2주 전부터, 살신성인의 압력(?)을 받고 있었다. 경기도에 사시는 부모님을 둔 덕에. 

 - 웬디야, 집에 가서 부모님한테 교회봉사 열심히 하겠다고 하고 꼭 유시민 찍어달라고 해라...

라는 말을 같이 공부하는 분들로부터 지속적으로 들어왔던 것. 그러니까, 왠만하면 나도 하겠는데, 그럼 전....오후예배도 드려야 하잖아요. 네? 그러니까, 난, 저게 정말로 통할 것 같아서, 부모님한테 차마 말을 못꺼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도 했지만, 정치얘기하다가 괜히 열만 내고 제대로 대화하지 못했던, 누구나 한 번쯤은 있을법한 속상한 기억들이 주는 두려움도 있었다.

- 전.... 제 삶도 중요한데요....ㅜ_ㅜ 꼭...그래야 할까요...?
- 몸을 던져서라도 4대강은 막아야한다. 꼭 말하거라.
- 흑흑...네...

그러나, 여전히 입은 떨어지지 않았고, 그렇게 두번의 주말을 보냈다. 여러모로 편치 않은 마음으로 심상정 후보의 사퇴 소식도 접했고, 그 외 여러 움직임들에 마음을 쓰고 있었다. 나는 몇 번이나 입을 뗐다, 말았다, 뗐다 말았다... 그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너무 마음이 불편해 결국 전화기를 들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 엄마, 그런데, 이번에 누구 뽑을 거에요? 도지사?
- 왜?
- 그냥, 누구 뽑을 거야?
- 1번
- OTL 뽑지마, 뽑지마, 안돼, 엄마, 유시민 한번만 뽑아주세요.
- 왠 유시민? 
- 그냥 내 말 한 번만 듣고 뽑아요, 주말에 고기 사줄게요.
  (이거 너무 다락방님식 화법, 차마 교회 열심히 다닌다는 말은 못하고
  쉬운 것부터 던진 소심한 영혼)
- 끊어, 일단.

좌.절. 그러니까, 난, 실패했구나. 흑. 슬픈 마음으로 카페 불라에 잠깐 들른 나는 사장님께 억울함을 토로.

- 사장님, 저 엄마한테 유시민좀 찍어달라고했다가 퇴짜맞았어요 ㅜㅜ
(이후 이래저래 얘기하다가)
- 그러니까, 해법은 하나야. 자식들이 다 부모님한테 전화걸어서 설득하는 수밖에 없어.
- 그러게. 흑흑.

나는 혼자 막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무슨 카드를 써야 부모님을 설득할 수 있을까. 4대강 같은 걸로는 어림도 없을 것 같고, 천안함 얘기를 하면 싸움만 나겠고, 이래저래 고민하다가, 나는 생뚱맞은 카드를 선택했다. 잠시 후 엄마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 자, 이제 나를 설득해봐. 왜 유시민을 뽑으라고 했는지.
- 엄마, 이명박이랑 김문수랑 한나라당 나쁜 놈들이 나라를 다 망쳐놓고 있잖아.

역시나 어이없다는 듯한 기운이 수화기 너머 들려온다. 그리고 나는, 의료보험민영화제도에 대해서 엄마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유시민이 그걸 막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선거의 이슈도 딱히 아니지만, 일단은 눈 감고, 나이 들어가시는 부모님들께 한나라당이 왜 나쁜지 설명하는 데는 의료보험 민영화 카드가 최고라는 나의 결론... 엄마도 미국 의료보험 제도가 어떤지는 알고 계셨기 때문에, 설명하기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게다가 난 이번에 건강보험 제도의 덕을 톡톡히 본 입원 환자였지 않은가. -_-v 엄마는 옆에서 눈으로 확인한 산 증인. 엄마, 이 나쁜놈들이 막 제주도에 민영화 병원 짓고 있잖아. 걔들이 이번 선거에서 이기면 정말 다 끝이라니까.

- 좋아, 대신....

엄마도 하나의 카드를 내밀었다. 엄마가 공부하고 계신 게 있는데, 그걸 좀 도와드리기로. 나로서는 꽤 성가신 일이긴 했지만, 그래도 오후예배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며 엄마가 내민 카드를 흔쾌히 집었다. (흑 ㅜ_ㅜ) 그리고.... 아빠도 부탁한다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사실 엄마는 처음에 내게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부터, 져줄 생각을 하고 있었을런지도 모르겠다. 후보들이 내미는 핑크빛, 그러나 손에 잡히지 않는 희망보다는, 자식이 제시하는 손에 잡히는 실질적 도움이 더 어필하는 무엇일 수도 있겠다. (알고보니 실용주의노선?...;;;)

이 작은 몇 표는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할 수 있다. 아마 그럴 거다. 하지만, 오늘 밤 나의 마음에 와 닿았던 그 어떤 간절함은,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그 간절함이 모이고 모여, 어쩌면 기적을 만들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

밤의 기적, 같은 거 말이다.
이제 하루 남았다. 어쩌면 짧은 시간이 아닐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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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머니의 선거
    from 자유를 찾아서 2010-06-01 01:04 
      부끄러운 일이지만 내게 주어진 첫 투표권을 거부했다. 돌아가신 김대중 대통령이 대선에 나왔던 때였다. 그해 김대중 후보는 대통령이 되었다. 상대가 누구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는 정치판을 잘 몰랐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전통적 우파다. 아버지는 청년 시절 경찰이 된 이후로 퇴직할 때까지 오직 경찰에만 몸 담았던 분으로 완전한 보수였고, 어머니도 보수였다. 두 분이 함께 살면서 보수가 되었는지,
 
 
사과나무 2010-06-01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집은 선익이로 협박?
1번 찍어서 세상 망가지면 민선익이 고스란히 독박 쓰는 거라고...

W 2010-06-01 21:57   좋아요 0 | URL
아, 우리 선익이가 사는 세상은
부디 이것보다는 더 좋아야 할텐데 말이죠...

反mb 2010-06-01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리 훌륭한 웬디양님, 그 "간절함" 모두에게 전해지리라 믿습니다.
근데 일단은 엄마가 아빠를 이겨주셔야만 할텐데... 결과가 궁금합니다.

W 2010-06-01 21:58   좋아요 0 | URL
그러게나말입니다. 흣.

푸핫 2010-06-01 0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의료보험 민영화 유시민이 추진하려고 했던건데;;

W 2010-06-01 09:03   좋아요 0 | URL
참여정부 시절 검토했고, 국민적 이익이 없다고 판단해 지금은 반대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건지요?

치니 2010-06-01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모 자식 간에도 거래가 필요할 때가 있더라고요 ~ :) 대부분 부모가 져주는 거래이긴 하지만. 웬디양님 낼 모레 공부도 하고 고기도 먹었으면 좋겠다!

W 2010-06-01 21:58   좋아요 0 | URL
그죠. 참, 저같은 딸내미 낳을까봐 좀 겁나지 말입니다.

風流男兒 2010-06-01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고했어요 ㅎㅎ
상정이누나도 눈물로 나오신 이 마당에. 정말이지 축구선수도 아닌 1번이라면. 정말.

W 2010-06-01 21:59   좋아요 0 | URL
그아저씨 위트가 있어 좋더마요. ㅎㅎ
한나라당은 차라리 축구를 시키면 잘할듯.

다락방 2010-06-01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내 식(?)의 화법이 안먹히는군요. ㅎㅎ

저는 부모님한테는 못하겠고(이건 오- 패쓰), 남동생의 표라도 좀 어떻게 해봐야겠어요. 말을 들어줘야 할텐데..에휴..

W 2010-06-01 21:59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저도 남동생한테 문자보내야겠어요.
생각해보니 저희엄마는 고기를 별로 안좋아하세요. ㅠㅠ

yamoo 2010-06-01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집은 전혀 안먹힐거 같다는..ㅋㅋ 그나저나 이번에 투료를 해야할지 말아야할지 망설여집니다..갈등중..

W 2010-06-01 21:59   좋아요 0 | URL
아니 왜이러십니까. 전화번호 대세요.

치니 2010-06-01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자랑할라고 왔어요 헥헥.
자주 가는 회사 옆 백반집 아주머니들이 '낼 놀지 ~?' 하니까, 동료가 '네! 낼 투표하셔야 돼요 ~!' 하고나자,
아주머니 한 분이 '근데 나 누가 누군지 몰라 , 교육감 누구 찍어야 해?' 라길래, 제가 원하는 분 찍으라고 말씀드렸더니 눈 크게 뜨시면서 옆에 아주머니가 '아 그 사람이다 우리 누구누구가 찍으라던 그 사람 ~ '하는 거에요. 여세를 몰아 거기 세 분 다 그 분 찍기로 순식간에 결정! 아, 이렇게 쉽구나 싶더라구요. ㅎㅎ

W 2010-06-01 22:00   좋아요 0 | URL
치니님 최고에요. 조금씩 조금씩 애쓰다보면 변할 수도 있겠죠? 그렇겠죠?

마그 2010-06-01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선거에 이모 대통령 누가 뽑았냐고 피튀기던 제게 아는 동생이 조용히 손들더라구요.
아버님이 거금 30만원을 주셨다며..그래서 돈받고 딴 사람 찍었어야지 라고 구박해줬는데. 그런 사람이 하나가 아니고 꽤 되더라는 거죠. 이제... 자식들의 역습! ㅋㅋ 웬디님 고생하심다~

W 2010-06-01 22:00   좋아요 0 | URL
헉. 30만원...ㅜㅜ
그런거였구나... 고기는 아무것도 아니였어...

레와 2010-06-01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그나마 다행스럽게 부모님 설득은 어렵지 않았으나
회사 사람들, 그중에 투표 자체를 안할려고 하는 사람들 설득이 힘들어요.
저의 히든 카드는 '군복무'와 '체납액'입니다.
여기에 의료보험 민영화도 넣어야겠어요.

여직원 중엔 여태 한번도 투표를 하지 않았다는 사람도 있어요.
아.. 증말 ..;;

W 2010-06-01 22:01   좋아요 0 | URL
군복무와 체납액. 저는 그렇게 어려운 거는 못 들이밀어요. ㅎㅎㅎㅎ
그냥 감정적으로...(으이그...인간아...)

굿바이 2010-06-01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짝짝짝짝짝!!!!!! 잘했다! 웬디!
정말, 잘했다. 어머님도 너무 감사하고, 흑흑....
사람이 기적이라고 믿고, 선거 끝나고 고기 사줄께^^

W 2010-06-01 22:02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이게 다 언니와 목사님의 압박...덕분...하하하..
그래도, 내일 좋은 결과 있음 좋겠어요. 흑.

니나 2010-06-01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지금 학교에서 분당 사는 애한테 이 글 보여주며
유시민 찍으라고 하고 있어ㅋㅋ

아유 그 옆에 언니는 ㅁㅅ 찍는 데서 아예 투표 하지 말라고 했어(귀찮아서 안할 것 같음 ㅎㅎ)

W 2010-06-01 22:02   좋아요 0 | URL
굿굿. 좋아좋아.
옆에 언니는 꼭 붙들어놓고. (왜 ㅁㅅ를 찍는다는지, 좀 궁금하긴 하다)

니나 2010-06-02 01:34   좋아요 0 | URL
정말 근데 요기, 딱 요기만 그런 거 같어... 요기는 이렇게 말하면 환영인데
정말 조기, 딱 조기만 가도... ㅎㄴㄹㄷ이 대세인걸 느끼고 말았어ㅠㅠ(여론조사 다 맞구나 하면서ㅠㅠ)

Alicia 2010-06-01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오늘 친구만나서 같은얘기했어요. 친구가 부산사람이거든요.
부모님 설득해보려 애쓰고 이 문제로 얼마전 심하게 싸우기까지 했는데 결국 포기했대요. 그래서 언니 얘기를 하면서 먹히는 이슈하나를 잡아서 설득을 해야 한다고 힌트를 줬어요. 근데 이미 포기했다는데 어떡해.. =.=
부산은 이렇대요. 한나라와 친박연대인지 뭔지 그리고 한나라당 공천탈락해서 무소속으로 출마한 1인. 무소속을 찍지 그랬냐 그랬더니 결국엔 무소속이 당선된 후 다시 한나라당에 들어갈 수가 있어서(공직선거법이 바뀌었거든요)누굴찍어도 1번이 되다는거에요. 그래서 친구 동생은 1번을 찍었대요. 이런 경운 투표를 안하는게 낫지 싶은데..-_-a

W 2010-06-02 23:38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그런데 부산 이번에 민주당 40%나 나왔네요. 놀라워 놀라워.

순오기 2010-06-02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했어요~ 웬디님!!
나는 비례대표는 '진보신당' 키워 달라는 문자를 열심히 보내고, 전화통화도 불이나게 하고 있어요. '좋다'는 반응은 절반쯤...명색이 당비내는 당원으로 이 정도는 해야될 거 같아서요.ㅋㅋ

W 2010-06-02 23:41   좋아요 0 | URL
저도 비례대표는 진보신당 찍었는데 참 쉽지 않은 장벽이긴 하네요.
순오기님도 고생 많이하셨습니다.

토깽이민정 2010-06-03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학교에서 다음으로 투표현황을 보니까 (한국시간으로 새벽 두시 반쯤) 계속 한명숙 후보가 이기고 있잖아. 게다가 민주당이 계속 앞서고. 나까지 덩달아 신이나서 막 좋아했거든.
근데 웬일이니, 자기 전에 다시와서 보니까 다시 오세훈으로 된거야.
어제 기분 너무 나빴어 ㅠ.ㅠ
경기도 지사는 너무도 일찍 결정이 되어 그 시간에 이미 김문수였었구...
경기도는.. 아직도 더 당해야 정신을 차리려나봐. 아 싫다. 그치?

W 2010-06-03 21:38   좋아요 0 | URL
언니 저는 굿바이언니랑 새벽까지 문자 주고받으면서
함께 절망했어요. 흑흑흑.

멜라니아 2010-06-04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주도 지사가 새 사람으로 되었으니까
강정 해군 기지 반대하는 운동 몇 년 동안 계속 해 온 우리는
새벽에 만세 부르고 하이파이브 하고 생난리 부르스 추고
맥주 마시고 하하 웃었는데 서울 경기 주민 여러분 우리만 그랬군요.

토깽이 민정이는 해군기지 반대 데모도 참여했으니까

그거를 국책 사업이라고 밀어 부치려했던 후보가 떨어진 것을 축하하려무나

누가 되어서 기쁜 것보다 누가 떨어져서 기분 좋은 건
선거 하다가 처음 맛 보는 느낌이에요.
 


반성할 필요가 있겠다.

지난 시간들에 대해, 그러니까, 나는, 최고의...불량회원이었다. 몇개월간 책모임이 진행되는 동안, 누군가의 서평이 수권씩 올라오는 동안, 바쁨을 이유로 이직을 이유로 등등의 이유로 달과 6펜스, 그리고 설국 2권의 서평만 올려둔 채, 유유자적... 열심히 하는 거라곤, 때맞춰 책을 사는 것 뿐. 읽기도 쓰기도 부담스러운 곤궁한 일상을 핑계로 모임에 소홀했었다. 그리하여, 궁금한 마음에 서평을 체크하시는 분들께 늘 죄송한 마음이었고, 다른 분들의 블로그에서 일어나는 일, 쓰여진 서평들에도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니,

솔직할 필요가 있겠다.

이번 부산행이 다른 분들만큼 설레지 않았음을 미리 말해두자. 실은 내가 부산행을 결심한 건, 부족민들에 대한 궁금함 때문이 아니라, 좋아해 마지않는 언니들 때문이었다. 굿바이언니, 그리고 민정언니. 각자의 바쁜 삶 때문에 우리는 함께 지내온 시간에 반해 함께 어디론가 멀리 다녀온 기억이 없었다. 굿바이언니와 가장 멀리 가본 곳은, 세상에나. 방학동? 그리고, 민정언니와는 내소사에 다녀온 기억이 전부였다. 늘 말뿐이었던 다짐들, 약속들을 또 허공으로 보내고 싶지는 않아, 다음날 쉽지 않은 여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음에도, 부산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전날 우리집에서 민정언니와 다음날 프로그램을 준비하면서도 나의 기대감은, 실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내가 그 곳에서 만난 것들이 무엇이었는지를. 내가 그 곳에서 진짜로 만났던 것은, 길 양쪽으로 흩날리던 벚꽃도 아니었고, 숙소의 통유리 너머로 가득 담긴 봄바다도 아니었으며, 아름답게 펼쳐진 광안리의 야경도, 밤새 귓가에 찰싹 찰싹 울리던 파도소리도 아니었다. 밤새 바느질을 하며 가방을 만들던 마음이었고,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을 상상하며 나무를 깎던 마음이었다. 글로 만난 상대방의 취향을 생각해내며 영화를 고르던 정성이었고, 잠시 여행을 가서 맡은 차의 향기를 선물하고파 한가득 담아오던, 그 마음이었다. 선물할 게 없어 동동거리며, 밤새 고민해 고른 공정 무역 커피를 건네던 마음이었다. 한가득 여행짐을 챙기면서도, 제주산 귤을 두손 무겁게 가져오는 마음이었고, 늦게 들어가 피곤한 가운데서도 함께 먹을 김밥을 싸는 마음이었다. 빈 손으로, 다음날 또 멀리 가야하는데 짐이 많다며 징징거리고, 책 한 권을 겨우 챙겨갔던 내게 부족했던 건, 바느질을 하고 나무를 깎고, 김밥을 싸는 재주가 아니었고, 영화를 고르는 안목이 아니었다. 마음이었다. 나는 그 곳에서 마음을 만났다, 그리고, 마음을, 배웠다. 그 마음은, 다시 마음이 되어, 함께하는 시간 내내 손에서 손에서, 눈에서 눈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다시, 그 따뜻한 마음에서, 내 척박한 마음으로 살포시 자리잡았다. 참 고맙고 고마운 일이다.

나는 내밀 선물이 없어서, 가 아니라, 내보일 마음이 없어서 이내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평소보다 술을 많이 마셨고, (주량갱신 -_-v) 평소에 잘 부르지 않던 신나는 노래들을 불렀다. 즐겁게 함께하는 것 외에는 마음을 보일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죄송했고, 고마웠고, 실은, 매우 즐거웠다.

술을 잔뜩 마시고, 그만큼의 커피를 또 잔뜩 마시고, 결국 밤새 한잠도 자지 못하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리속을 지나간다. 다음날, 다시 떠나야 할 그 길고 긴 길만큼이나, 나는,

아직도 멀었다. 인정할 필요가 있겠다.

지난 시간, 열심히 함께하셨던 다른 분들은, 지난 부산행이 어떤 정점을 찍는 그 무엇이었겠지만, 나는 이제서야 시작하는 기분이다. 지난 부진한 리뷰숙제들을 만회라도 하듯, 열심히 숙제를 한다. 뒤늦게 내딛은 한걸음이 너무 늦은 건 아니길.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앞으로도 시간이 많이 남아있어야 할텐데. 어쩐지 그럴 것 같다. 매우 예감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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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책읽는 부족 부산 모임 후기, 함께 올립니다.
    from 바느질하는 오후 2010-04-15 16:23 
    1. 동우님 http://blog.daum.net/hun0207/13291027 (책읽는 부족 그이들) 2. 도치님 http://blog.daum.net/shave4ever/17145186( 뜻밖의 만남) http://blog.daum.net/shave4ever/17145189(첫 대면) 3. 굿바이님..
 
 
마그 2010-04-15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반성문 인척하는 즐거웠다는 여행기. 참신하군요~ ^^ 오랜만에 폭풍블로깅~ 좋습니다아~

W 2010-04-16 02:23   좋아요 0 | URL
아이쿠. 폭풍 블로깅이라니. 찬란한 제 과거가 울어요. ㅎㅎ

굿바이 2010-04-15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르를 넘나드는,실로 놀라운 감동인데^^
웬디에게서 흘러 나오는 글들이 꼭 웬디같다. 앞으로,얼마간의 시간이 허락될 지 모르겠지만, 말뿐이었던 다짐들과 약속들 많이 거두도록 하자.

뭔가 잔뜩 얻어오기만 했는데, 어찌 다 갚을지, 아득하다~

W 2010-04-16 02:23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언니.
전 언니에게 진 빚도 한가득인데요.

어휴. 어휴.

후니마미멜라니아 2010-04-15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다음에 만나면 웬디야 ! 라고 불러 버릴게요
요렇게 예쁜 마음이라니, 솔직한 마음이라니
꼭꼭 마음에 들어요.

반성문 처럼 여행기 만들어 내신 게
어딘가 논술 교사를 하고 있다면 제가 만약
어디선가 글 갖고 장사를 하고 있다거나
해서 글 재료가 부족했다면

요 글을 반성문은 이렇게 쓰는 거야
라든가
여행기는 이렇게 써야 하는 거야 라고
보여주고 싶어요

아마, 우리 책 부족에 자주 들락거리지 못한 거는
이 집의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고
연결선이었던 민정이는 미국에 가 있는데다가
이쪽 다음이 낯설어서였을 거에요

웬디님, 굿바이님과 빨리 친하고 싶어서 저도 알라딘에
집을 만들긴 했지만 시작과는 달리 거미줄 친 걸
거둘 시간도 없네요
집과 집이 양식이 다른데서 오는 일이었는데
그게 솔직해지자 하면서 반성문에 쓸 내용이 되었네요
착한 웬디양.

그나저나 블랑쉬를 추천해 주셨지만
그 여자가 빨리 죽는 역할이어서
오래 살려고 저는 블랑쉬 보다 오래오래 산 여자를
닉으로 했어요

마미라고 익숙해졌으니까 그렇게 부르시는 건 그대로 하시고
여기 와서 멜라니아라고적으면 그게 저인 줄 아숍소

W 2010-04-16 02:25   좋아요 0 | URL
저작권료는 안받을게요. 멜라니아님.
그런데, 애들이 진짜 반성문을 저모양으로 쓰면 어쩌죠?
무한 책임 느낄 것 같은데요.

알라딘에 집 만들지 않으셔도,
자주자주 놀러갈게요.
한군데라도, 열심히 해야죠. 흐흣.

그나저나 저 착각해서 멜라니아마미라고 부르면 어쩌죠? 헤헤.

토깽이민정 2010-04-15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력적인 막내 웬디양
누누히 말하지만
'왕림해 주시는 것 만으로도' 그대의 등장이 선물이었다니까! 그죠 부족민 여러분~

나도 3월의 숙제를 (마음대로) 제껴버렸고
4월의 숙제는 아직 시작도 못했는데,
아무래도 우리 이번 모임을 계기로 한동안 출석일수가 상당히 좋아질 것 같지?
뭐 그러다가 약발 떨어지면 이제 막내인 웬디가
혹은 서울에 들어오실 심샛별님이나 쟁이 (언제가 되실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다음 모임을 기획하면 될 것이고...

이제 우리 손을 맞잡고 열심히~ 출석확인 하자~~ ^^




W 2010-04-16 02:27   좋아요 0 | URL
언니. 그렇게 말하기엔 제가 너무 뻘쭘하고요. ㅎㅎ
저는 4월의 책이 오늘 왔어요. 열심히 다시 읽어야지요.

여튼, 이 모든 게 다 언니덕분이지요.
고마운 인연들에 감사하면서,
저는 남의 출석 확인전에, 제 출석부터 좀....;
(이미 개근상은 글러먹었으니 원)

도치 2010-04-16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만담같고 시트콤 같은 제 후기와는 달리 참으로 멋드러진 후기에 박수보냅니다.

지금도 두고두고 후회스러운 점은 잠이 덜깨어 반가웠다고 조심히 올라가시라고
제대로 인사를 못했던 점입니다. 그날 참~ 반가웠던거 아시죠? ^^

W 2010-04-18 02:30   좋아요 0 | URL
만담도 시트콤도 모두 제 분야인데, 도치님도 그 분야를 아끼고 계셨군요.
마음같아서는 배틀이라도 한 판 붙자고 하고 싶지만
제가 감이 심히 떨어진 관계로, 만담과 시트콤 분야는 도치님께 내어드립니다.
부디 녀석들, 잘 보살펴 주시고...흑!

반가운 마음이야 전하지 않는다고 모르겠습니까.
그날 이미 충분히 전해졌고, 또 느껴졌으니 염려 놓으시고요,
언제고 좋은 기회로 또 뵙게 되기 바라겠습니다.

2010-04-16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여기 저기 모임후기 읽을때 마다 빵빵 터지고, 이거 다들 독후감쓰실때 그 분들이 맞나 싶어요. 기행문과 반성문을 이렇게 절묘하게 울남편의 표현을 빌리자면 "비벼"내시다니, 웬디양님때문에 오밤중에 또 웃다 쓰러졌어요.

몸이 많이 힘드셨을텐데 그래도 기분 좋은 발걸음을 하셨다니 보는 저도 기분이 좋아졌어요.

W 2010-04-18 02:32   좋아요 0 | URL
아. 저의 이 진지한 반성문과 여행글을 읽으면서 웃다 쓰러지셨다는 쟁님 덕에 한참을 당혹스러워했습니다. 네. 도치님께 말씀드렸던 것처럼, 이런 글로조차 사람을 웃기는 재주가 있는 저는, 역시 여기보다는 만담과 시트콤 분야로 가는 것이...(도치님. 아무래도 제가 이긴 것 같습니다.)

그간 이래저래 쟁님 블로그도 몇번 못가보고 많이 소원했지요. 몸은 멀리 있어도 마음은 가까이 있을 수 있게 도와주는 고마운 기술들이 많은 세상이니, 쟁님 뵙는 날 어색하지 않도록 종종 놀러갈게요.

동우 2010-04-16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야아, 웬디님.
글도 글이거니와, 이런 솜씨라니.

일거에 점수를 따 만회하는 이 노회함.하하하
예서도 넘치게 엿보이는 웬디님의 노숙함..

W 2010-04-18 02:34   좋아요 0 | URL
동우님. 어디 다녀오셨습니까.
후기 하나 남기시고 슬쩍 사라지셔서, 은근 드나들며, 이제나 저젠 다시 들여보시려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거에 점수를 따 만회하는...노회함...하하...
동우님 눈을 피해갈 수는 없겠군요.
제가 너무 얄팍했습니다. 앞으로는 그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흑.
 


날이 너무 좋았다. 정말, 봄이라도 온걸까. 집앞 버스 정류장 앞 목련나무의 꽃눈이 눈에 들어온다. 저 목련나무, 봄밤마다, 정말 눈부시게 빛나던. 녀석도 봄준비에 한창이다. 아니지. 꽃눈은 이전부터 있었고, 내 눈에 그 꽃눈이 이제 보이기 시작했다는 얘기가 더 맞을런지도 모르겠다. 여튼 나는, 타닥타닥 오고 있는 봄맞이에 좀 신나하고 있는 중이었다.

날이 좋아 서울역에서 내려 조금 걸어가기로 했다. 아직은 날이 추우니 따뜻한 라떼 한잔을 받아들고, 샌드위치 하나를 사서 걷는데, 서울역 광장은 온통 노숙인들의 세계다. 조금 무섭다,고 생각을 하면서, 또 무섭다, 고 여기는 스스로를 경멸하기도 하면서 걷고 있었다. 한켠에 노숙인들을 위한 배식 차량이 있었다.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다. 내 옆으로 걸어가시는 분의 식판을 보니 식사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국과 밥이 전부. 누구에게는 보기만 해도 입맛이 사라지는 식사.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참 고마운 한끼의 식사. 하필 지하철에서 읽던 책과도 연결되는 부분이 있어 나는 조금 복잡해졌다. 안다는 것과 직접 경험한다는 것은 여실히 다른 일이다. 내가 죽을 때까지 온맘으로 알지 못할 어떤 삶들이, 내가 알 수 있는 것들보다 더욱 많이 존재하는 한, 나는 감히 그 무엇에 대해서도 함부로 말하지 못할 것이다. 손에 들고 있는 라떼가 무색해져 나는 얼른 그 길을 지났다.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가을의 끝에 봄의 첫날을 꿈꾼다는 모 가수의 노래를 들으면서. 가을의 끝부터 기다린 봄은 성큼 다가와, 어느덧 겨울의 끝. 봄의 첫날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올 것임을 알고 있고, 나는 주말마다 어딘가를 쏘다니며, 혹은 누군가와 차를 마시며, 산뜻하고 상큼한 것을 먹으러 다니며, 봄에 어울리는 살랑살랑한 무늬의 원피스 한 장에 즐거워하며, 꽃을 보러 다니며, 푸릇푸릇한 것들에 마음 설레어하며, 그렇게 그 계절을 한껏 만끽할 것임을 알고 있다. 물론 저들에게도 봄은 올 것이고, 어쩌면 그들에게는 봄이, 내가 이 계절을 고마워하는 것보다 더욱 고마운 계절일런지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계절조차 공평하게 흐르지 못한다는 생각에 자꾸만 마음 한구석이 무겁다. 따뜻한 계절을 맞이해도, 마음까지 따뜻해질 수 없는 어떤 삶들이 분명 존재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오늘 내가 똑똑히 마주한 그 삶들은, 나의 마음을 산란하게 만들지언정, 결국 나의 봄의 어떤 것도 바꾸어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에, 20분 가량을 걷는 동안 내 발걸음은 쉬 가벼워지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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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21 2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26 0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10-02-22 0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절은 어김없이 돌고 돌아 봄도 오고 꽃이 피겠지만...
여전히 심리적 겨울을 넘어서 빙하기인 분들도 존재하겠지요.

(노숙자 분들은 가급적 피하시는게 좋습니다. 특히 서울역쪽 노숙자 분들은 노조로 말하면 초강성노조라서 폭력사태도 빈번히 일어나곤 합니다.)

W 2010-02-26 02:07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하긴 그 쪽도 만만치 않은 텃세를 버텨내신 분들이시니 역시 보통은 아니신가봅니다. 그런가봅니다.

L.SHIN 2010-02-22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정말 봄이 오고 있습니다.
공기의 냄새 부터가 다른 걸요. 이럴 때는 모든 걸 내팽겨치고 '훌쩍 떠날거야' 버젼이
버닝업 되죠...그래서 사고치기 전에 더욱 몸을 사려야 하는...-__-

W 2010-02-26 02:08   좋아요 0 | URL
훗. 엘형님이 치실 사고가 괜히 궁금해집니다.
공기의 냄새가 정말 다릅니다. 겨울의 동반자였던 기모스타킹을 이제 더는 못신게 되어버린 것 같아 아쉬워요.

개인주의 2010-02-22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는 그사람들이 해꼬지라도 했냐라고 하지만
일단은 일행이 없이 혼자라면 눈길 마주치지 않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배째.. 하는 근원을 알 수 없는 베짱이 무서워요

W 2010-02-26 02:09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참 생각하는 것과 마주하는 현실은 다른 것 같아요.
참 어렵지요. 어려워.

마그 2010-02-23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핑크색 옷을 꺼내입으면서..한 생각.
아..주말엔 옷좀꺼내야겠구나.......라며 다시 한 생각.
빨래 많겄다..아흑.... ( 눼.. 조만간 독립하시면 웬디님도 저같이 되실겝니다. ㅋㅋㅋㅋ)

W 2010-02-26 02:13   좋아요 0 | URL
눼. 세상에서 제가 제일 싫어하는 집안일이
빨/래/입/니/다

두둥

네임 2010-02-23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가슴에 시퍼렇게 멍이 든다던 태백산맥의 한 귀절이 마음에 박혀, 그 뒤로는 맑은 날 예쁜 하늘도 마음놓고 볼 수가 없더라구요.

왠디양님의 이 글은 초중학교 교과서에 실리면 좋겠어요.

W 2010-02-26 02:14   좋아요 0 | URL
네. 그런데.
또 맑은 날 예쁜 하늘을 보면
해사해져오는 이 마음은 또 어떤답니까.

그나저나 초중학교 교과서. ㅎㅎㅎ
고등학교 정도만 써주시지 그러셨어요.
 


나리씨가 말했다.  

그러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어쩌면 다른 카페들도 다 이런 거 아니야? 알고보면 우리가 가는 홍대카페, 뭐 이런 데들도 알고보면 다 우리같은 사람들이 있는거야.

그러니까, Cafe Bula의 네이버 카페에 누군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불라에 관한 글을 스크랩해서 올려주었고 (http://blog.naver.com/nelda2120/40094215194) 그걸 본 나와 돌고래씨의 반응은.

와, 뭔가 정상적인 카페같아, 

이렇게 객관화시켜서 올려놓은 카페사진을 보니 그냥 뭔가 정상적인 홍대 카페 포스팅을 보는 것 같은 오글오글하면서도 어색한 느낌을 감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배어져나오는 그 샤방함이라니. 아.

그런데, 설마, 정말 그럴까요?
그럴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나는 어째 세상의 비밀을 하나 알아버린 어른이 되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고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정말 그럴까? 하는 마음도 있었던.
그리고 하루가 지난 어제, 나는 이리카페에서 있었던 양양 공연을 갔다.

어제는 홍대 이리카페에서 이리카페 가족들끼리 송년회를 했어요, 거기서 삼겹살을 구워먹었어요. 카페에서. 아마, 오늘 고깃집 냄새 났을 거야.

라는 양양의 말 뒤로 묻어나는 표정이, 아니 마음이, 나리씨가 말한 카페의 비밀이 사실은 사실, 이에요, 라고 나에게 속삭여주는 것 같아 나는 좀 웃었다. 그래, 정말 어쩌면, 우리가 가는 많은 카페들은 누군가에게는 매우 사적이고 내밀한, 가끔은 너절하고 끈적끈적거리기도 하는, 소중한 공간이겠지.

2009년은, 카페 불라의 비밀이 될 수 있어 고마운 시간들이었다. 그 곳에서 서성이는 마음들을 어쩌지 못해 이도저도 못하며 보냈던 밤들, 마셨던 와인과 맥주와 커피와, 차. 가끔은 소주, 또 가끔은 빈대떡, 혹은 육회 들었던, 또 불렀던 노래들. 그 좋고, 좋고, 좋았던 시간들은 1년 후, 혹은 3년후, 10년 후의 나에게 어떤 시간으로 기억될까. 어떤 의미로 남게 될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고 판명되더라도, 혹은 매정한 기억력이 그 시간들을 깡그리 지워버리는 만행을 저지른다고 하더라도, 그런 시간이 내게 존재했음은, 내 삶의 어떤 부분이 그런 시간들로 채워져 있음은 분명 감사한 일일 게다.  

그나,저나,어쩌나. 카페의 비밀을 알아버렸다. 이제 카페들에 들어설 때마다 그 곳에 배어 있을 비밀들을 상상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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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0-01-01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페에서...삼겹살을 구워 먹는다....
전 칵테일 바에서 바텐더가 소주를 준 적이 있어요...평새 잊지 못하죠..ㅋㅋ

L.SHIN 2010-01-01 15:28   좋아요 0 | URL
쏘주를...
메피님이 그 바텐더한테 고마워해야 해요. 어쩌면 자신이 아끼고 먹던 것을
나눠줬는지도 모르잖아요? (웃음)

W 2010-01-01 21:31   좋아요 0 | URL
아. 우리가 칵테일바에 가자고 안하고 자꾸 소주마시자고해서 그런거죠?
알았어요 메피님. 우리 칵테일바에서 소주마셔요. 네? ㅋㅋㅋ

Mephistopheles 2010-01-02 00:05   좋아요 0 | URL
이 싸람들이 양주 한 병 마시고 전사한 사람은 아직 회복도 못했는데.....

블리 2010-01-02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31일 불라 갔는데 햇살이 비치는 오후에 조용한 불라가 참 좋더라.
(31일은 단체 손님 없었어, 단체는 1일이었다는데.)
맛난 카레밥도 먹고 니나가 쓴 12월 달력도 보고 ㅇ리샤도 만나고...
그리고 문 열자 마자 그저게 웬디가 먹었다던 카레향까지 정겹고~ㅋㅋ
모든 카페에 비밀이 숨겨져 있더라도 우리의 비밀은 그 곳에만 있으니 역시 특별대접 받을만해, 불라는...

Alicia 2010-01-05 13:48   좋아요 0 | URL

ㅎㅎ
 



1

아마 허수경의 글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굉장히 가난한 집으로 촬영을 갔었는데, 방송이 끝나고 나니 시청자 게시판에 항의가 들어왔다고 한다. 그 집 할머니의 손가락에 왕방울만한 알반지가 끼워져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할머니가 제작진들을 속였다는 것이다. 그 반지는 할머니가, 그래도 방송에 나온다며, 예쁘게 보이고 싶은 마음에서 낀 유리알 반지였다고 한다. (플라스틱이었나. 암튼 그건 중요치 않다)

가난하다고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가난하다고 사랑을 모르겠는가 하던 신경림의 시가 떠오른다. 가난하다고 예쁘고 보이고 싶지 않겠는가. 자신의 가난하게 사는 모습을 찍으러 온 촬영진 앞에서도 초라하게 보이고 싶지는 않았을, 공중파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질 자신의 모습을 최선을 다해 예쁘게 꾸미고 싶었을 그 할머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사람들이 야속하고, 그제서야 그럴 수 있겠음을 깨닫고 공감한 당시의 내가 야속해 나는 그 부분을 꽤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2

거의 매일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나는 구걸하시는 분들을 종종 만난다. 사회적으로 그 분들에 대한 신뢰는 굉장히 낮은 편이고, 나 역시 그 분들의 진정성에 대해서는 어찌 생각해야할지 잘 판단이 안서긴 하겠지만 누군가는 또, 자신이 무심코 지나칠, 정말 자신의 도움이 필요할 사람 때문에 꼭 500원짜리를 준비해서 다닌다고 얘기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내가 그런 부분에 쓸 수 있는 돈이 한정적이라면, 가급적 믿을 수 있는 기관을 거치게 하자, 라는 원칙을 정해놓고 있는 편이어서, 그 분들에게 선뜻 손길을 내밀지는 않는 편이다.

그런데 그 분들을 볼 때마다, 저 분들은, 직업상 어쩔 수 없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초라한 옷을 입어야겠구나. 해어진 옷, 빨지 않은 옷 같은 것을 입어야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는 조금 안타까웠다. 사실 저 분들 집에 멀쩡한 옷 한벌 없겠는가, 를 생각해보면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 정서상, 멀쩡한 옷을 입었을 때는 동정의 정서가 생겨나기 어려울 것이므로, 그들은 일부러 혹은 어쩔 수 없이 가장 더러운 옷을 꺼내 입는다. 누군가는 작업복이 따로 마련돼있을지도 모를 일이긴 하다. 하지만 가끔은 그 때 읽었던 그 글을 떠올리며, 그들의 마음을 생각해본다. 많은 사람들 앞에 초라한 행색으로 나설 수 밖에 없는 그 마음은 어떨까. 특별히, 나와 연령대가 그리 차이나지 않는 여자분들을 볼 때마다 더욱 그러하다.


3

토요일 오후, 모임을 위해 종로로 가는 길이었다. 서울역에서 지하철을 갈아타 두 정거장만 가면 되는 상황이었고, 내가 내릴 역에 거의 다 와갈 때쯤이었다. 익숙한 음악 소리가 들리고, 할머니 한 분이 바구니를 들고 걸어오기 시작했다.
 
아, 그런데, 이 할머니............
 
분홍색 쉬폰 원피스를 입었다. 하늘하늘하면서 걸어온다. 아무 무늬도 없는, 밝고 화사한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할머니....어떤 사연이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할머니의 마음이야말로 진짜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구걸을 나왔어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좀 더 당당하게 예쁜 옷을 입고 싶었을 마음, 그게 오히려 나는 더 진심같이 느껴졌다.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이런 작은 것, 낯설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들.

나는 얼른 지갑을 꺼냈다. 매우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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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2009-08-25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들 앞에서 나는 매일 생색내고 짜증내고 심지어 욕도 해. 아...이를 어째.

W 2009-08-25 20:50   좋아요 0 | URL
언니 우리 아무래도 공정무역 스터디 끝나면
공정인격수양 뭐 이런걸로 넘어가야하지않을까 싶어요 ㅋㅋㅋㅋㅋㅋㅋ

라주미힌 2009-08-25 0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글 잘 쓰시네용. 정반합? ㅋ

W 2009-08-25 20:51   좋아요 0 | URL
우리 안지 2년 넘은 것 같은데 (생뚱맞잖아요 이런 반응!! --> 원래 잘썼다는 게 아니라)

바람돌이 2009-08-25 0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글 잘 쓰신다에 한표!!
저도 전에는 길거리에서 만나는 이런 분들한테 지갑 잘 안열었어요. 근데 어느 순간 그게 저의 자기 합리화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그냥 나의 하잘것없는 돈 몇푼이 저 사람에게는 한 끼 식사가 될지도 모른다 싶어지는.... 그래서 요즘은 고민하기 싫어서 그냥 보이면 지갑열고 맙니다. 그게 제가 맘이 편해요.

W 2009-08-25 20:52   좋아요 0 | URL
네 그런 것 같긴한데,
저는 또 괜히 잘 안주게 되긴 하더라고요
판단이 참 어려운 문제인 것 같긴 해요-

다락방 2009-08-25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번까지 다 읽고나자 추천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이런 작은 것, 낯설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들.

제목만 보고는 웬디양님이 분홍색쉬폰원피스를 입었다는 글인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했던 반전이에요.

W 2009-08-25 20:53   좋아요 0 | URL
분홍색 쉬폰원피스 입고 만날까요 다락방님?
완전 단색 분홍은 아니지만요 ㅎㅎ

네꼬 2009-08-25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웬디양님 너무 좋아.

W 2009-08-25 20:53   좋아요 0 | URL
우리 누가 더 좋아하는지 배틀할까요?
(네꼬님이 나를, 또 내가 웬디를, 이렇게? ㅎㅎㅎ 농담)

또치 2009-08-25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웬디양님 너무 좋아 222222

그리고 이건 딴 얘긴데,
루시드 폴이 31일부터 EBS 라디오 <세계음악기행> 진행한대요!
지금은 이상은씨가 하고 있는데... 아아아 3시부터 4시까지 꼭 듣고 있을 테야!
웬디양님도 들을 거죠?

W 2009-08-25 20:54   좋아요 0 | URL
아아아아아아아 또치님 또치님 ♡
이거 어떻게 들으면 되나요? 설마 새벽이 아닌거죠 그러니까?
인터넷으로 들을 수 있는거죠 그러니까? (아아 폴님)

또치 2009-08-25 23:13   좋아요 0 | URL
응응! 매일 오후 3시부터 4시까지랍니다~
오랜만에 가슴 두근거리게 신나는 일이 하나 생겼다능~~

W 2009-08-29 02:53   좋아요 0 | URL
흙. 하지만 전 일개대리 ㅋㅋㅋㅋㅋㅋ 또치부장님과는 급이 달..라요...흑

ji0158 2009-08-25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꾹 누르고 갑니다. 오랜만에 넘 이쁜 글을 읽었습니다.

W 2009-08-25 20:5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종종 뵈어요
0158 보니 015B가 생각날뿐이고~헤헷

Jade 2009-08-25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저 허수경으로 추측되는 글 읽은기억 나요. 아마도, 에메랄드 왕반지 운운했었지요. 호화 가구 어쩌고 하는 소리와 함께 ^^ 참 어릴적 읽은 것 같은데 당시 저도 참 묘한 기분을 느꼈었어요.

웬디양님 글 보니 좋아요! >.<

W 2009-08-29 02:53   좋아요 0 | URL
아아 제이드님도 읽었구나. ㅎㅎ 제이드님 근데 우리 올해 한번도 못만난거 알아요? 흙.